신라-후백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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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후삼국시기 신라후백제의 관계. 신라가 멸망한 936년까지 나름대로 이런저런 관계가 있었으나, 후백제 건국 세력의 출신 성분과 오랜 직접 지배 시기 탓에 신라는 후백제를 한 번도 제대로 된 정식 국가로 인정한 바 없었다. 백제왕 견훤은 그나마 형식적으로는 신라왕을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대왕으로 인정하였으나 그건 말 뿐이었고 후백제 또한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기회만 되면 신라 영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신라의 영역을 차츰차츰 판도에 넣어갔으니, 신라와 후백제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후삼국시대 호족들 같은 경우 그나마 자발적으로 투항해온 호족과 무력으로 지배된 호족의 대우가 같을 수가 없었음이 여러 연구로 입증된 바, 후술할 경북 서남부 외의 후백제측 경상도 영토는 후백제가 무력으로 병탄한 영토가 대부분이었으니 신라에 충성하던 경북 동부 및 경남 호족들 대부분과 그나마 신라에게 충성하던 옛 신라군 부대들은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시된다. 이는 그야말로 후백제가 가장 잘 나갈 때도 죽기살기로 저항한 친고려 경북 서북부 호족들의 행태에서도 입증된다.

한편 후백제는 물론 백제부흥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나라지만, 옛 백제 지역은 이백수십 년이란 워낙 긴 세월 동안 신라에게 밀도 높은 직접 지배를 받았던지라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 측면에서 크게 신라화된 상태였다. 때문에 후백제 VS 신라의 관계는 아무래도 내전적인 성격이 강한 측면 또한 엿보인다. 이는 후백제 초창기 건국 세력이 신라 정규군 세력이었음에서 역력히 드러나며 이는 한국사에서 꽤 특이하게 보이는 경우지만, 이 또한 세계사적 측면에선 흔한 경우다. 앗시리아에게 오랜 지배를 받은 탓에 지배층과 정치군사적 측면은 그 전 시기 이집트보다는 오히려 같은 시기 신바빌로니아와 비슷했던 기원전 6세기 이집트, 일칸국에게 오랜 지배를 거친 후 그 전 이슬람 제국이나 사산 제국보다는 그 직전 시기 몽골 제국에게 역시 정치군사적 측면으로는 비슷했던 사파비조 페르시아, 동로마에게 2세기 가까이 지배 받았던지라 안 그래도 그 전부터 정교회를 믿었는데다가 직접지배의 기간이 더해져서 역시 아예 종교,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는 상당 부분 동로마와 비슷해져버린 2차 불가리아 제국 등 사례는 많다.


2. 역사[편집]


후백제의 시조 견훤은 원신라 지역 신라 장수 출신으로, 본인이 영입한 사람들과 서남해를 평정하고, 889년 봉기를 일으킨 뒤, 892년(진성여왕 6년) 신라가 한창 지방의 통제력을 잃었을 때 틈을 타 세력을 규합해 칭왕한다. 여기서 특이한 특징이 발견되는데, 견훤과 함께 한 집단은 그야말로 신라 사회에서 하층민 도적떼였던 궁예 집단이나 그저그런 변방 호족 집단에 불과한 왕건 집단과는 달리, 전원 신라 정규군 장병으로서 신라 사회에서의 입지나 신분도 궁예 집단이나 왕건 집단보다 높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신라 왕실에게 있어 후백제 건국 세력은 도저히 용서나 타협 등이 불가능한 세력이었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반란군 집단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건 신라 왕실 입장에서 하는 얘기고, 반면 옛 백제인들 입장에서 보면 옛 백제 지역은 통일신라에게 2세기 이상 직접 지배를 받았는데도 차별 대우는 오래도록 감수하여야 했기에, 통일신라는 옛 백제 유민들에겐 타도해야 할 옛 지배국에 불과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에게 혜택을 받았으면 받았지 피해는 별로 본 바 없는 패서 일대 호족들은 상대적으로 신라에게 쿨할 수 있었어도, 백제 유민들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견훤 집단이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할 텐데, 견훤 집단은 그들이 현재 복무하고 있는 지역의 반신라 감정에 편승하여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기득권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은 것이었다. 이러하였으니 후삼국시대 신라는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후백제와는 별다른 외교적 협상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한편 견훤이 이러한 옛 백제 지역의 민심과는 달리 일단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관작을 사용했는데, 이는 아무래도 백제왕보다는 신라 대장군이 하고 싶었던 견훤의 신라 왕실에 대한 간접적인 의사 표시로 보인다. 신라 자체를 미워했던 궁예는 그렇다치더라도 친신라를 표방하여 잠깐 존왕의 의를 내세운 왕건도 이런 안쓰러운 짓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도통'이란 칭호만큼은 백제왕을 칭한 이후에도 고수한 걸로 보면, 견훤의 신라 대장군직에 대한 로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될 정도.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신라는 견훤과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였다.

후백제가 성립한 이후 신라와 후백제의 관계는 그러나, 역사적, 명분적 우위가 엄연히 그래도 신라에게 있었음에도 군사적으로는 신라가 명백히 일방적으로 수세에 처하는 관계였다. 후백제 건국 초반에 한정한다면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전체가 그래도 직간접 지배 상태였고, 사로국 시절부터 시작한 신라가 그 일대까지 지배할 정도로 발전한 4세기 중후반 경에는 근초고왕 시절 백제한테도 정면으로 맞설 정도 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근초고왕 시절 백제와는 국력이 당연히 비교가 안 되게 딸리는 견훤의 이 초반 후백제에겐 한 번도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밀리게 되는 게 제3자가 얼핏 보기엔 정말 이해되지 않는 상황.

물론 견훤이 그 당대 한반도 최고의 장군이었던 게 이유가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우선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 건국 집단 자체가 통일을 한 번 해본 바 있는 신라군의 전통을 그대로 이은 집단이었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라 왕실이 무려 한 세기 넘는 세월을 투자해서 신라 왕실의 아성 중 아성으로 만들어놓은 충북-경북 일대의 추풍령 일대가 너무나도 쉽게 견훤에게 넘어가버렸음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헌창의 난 때에도 비슷한 일은 일어났었으나, 신라 왕실을 위해 누구보다도 충성했어야 할 이 지역이 어째서 견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진 미스테리의 영역이다.[1]

901년 견훤이 후삼국시대 1차 대야성 전투를 일으키지만, 난공불락의 요새인 대야성인 만큼 실패했다. 916년에도 다시 2차 대야성 전투를 벌이지만, 또 실패. 그러나 918년에는 대야성과는 별도로 지금의 경남 서부 일대가 와르르 한 번에 무너지면서 옛 대가야 일대가 후백제에게 넘어가고 만다. 다만 918년에 다름아닌 서라벌에서 김씨 족단의 반란이 일어났음을 볼 때, 역시 서라벌 내부의 혼란이 후백제와의 쟁패에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그리고 견훤이 서라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상당히 촉각이 밝았음을 눈여겨볼 수 있다. 920년 3차에서 대야성을 함락하지만, 견훤의 후백제는 뜻밖에 이 단계에서 한 발 멈춰야 했다. 경명왕이 재빨리 고려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면서 동맹 관계를 맺어 우군으로 끌어들였기 때문.

일단 이 단계에서 후백제의 파죽지세는 멈추게 되며, 고려-신라와의 접전, 협상 등으로 7년 세월이 흐르게 되지만, 파국은 뜻밖에 찾아오게 된다. 927년, 견훤은 그래도 영토 국가로서 체면은 유지하던 서라벌 지역을 타격했고, 이를 예상 못한 신라-고려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견훤이 신라를 친 건 당시 신라의 왕이였던 경애왕이 노골적으로 친고려, 친왕건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행태가 견훤을 더욱 자극해서 분노하게 한 건 사실로 보이지만 어차피 그 이전 신라 임금들도 이런 건 마찬가지였다. 견훤은 특유의 기동전 능력을 발휘했고, 앞서 대가야 일대를 손에 넣었듯 서라벌의 김씨 족단 반역자들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 경애왕과 대소신료들은 후백제군에게 붙잡혔고, 경애왕에게 자결을 강요한다.

견훤은 다만 이 단계에서 신라를 병합하진 못했다. 아무래도 꽤 이른 세월부터 내통 관계에 있었을 김씨 족단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던데다, 고려군이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데 신라 왕실을 함부로 폐지할 순 없었다. 때문에 경순왕 김부를 옹립하였다. 이 시점의 견훤은 적어도 서라벌에서는 그 누구도 그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는 최고권력자였기에 소원 성취는 한 셈이었고, 백제 유민들 입장에선 의자왕의 울분을 씻은 셈이 되는 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이 어찌되었든 옛 신라를 추억하는 이들은 이 사건으로 견훤과 그의 후백제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이후 경순왕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후백제 편을 들지 않았고, 오히려 전 경애왕과 같이 친고려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견훤이 노쇠해 가고, 아들들의 권력 투쟁과 그에 따른 신료들의 갈등까지 후백제는 신라에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신라는 936년 초, 후백제는 연말, 멸망하면서 함께 고려의 일부가 되어 다시 같은 나라로 통합된다.


3. 같이 보기[편집]


[1] 이런 논리로 생각해보면, 정규군 부대들이 통째로 반란을 일으켜 뜬금없이 백제를 부활시킨 일 자체가 신라 왕실에겐 더 큰 미스테리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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