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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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성립
2.2. 초반(우호적 관계)
2.3. 파탄
2.4. 통일신라 시기
2.5. 말년과 종결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나당관계란 신라, 통일신라당나라의 관계를 말하며 당나라가 멸망한 9세기까지 관계가 있었다.


2. 역사[편집]



2.1. 성립[편집]


당나라 이전 통일왕조인 존재했던 수나라는 대운하 건설 및 대고구려 정벌에서 완패하며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다. 수나라는 이렇게 망하고 그다음에 당나라가 들어서고 당나라는 수나라와 같이 계속 고구려를 공격하나,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이럴 때, 삼국 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신라는 삼국통일을 하고 싶어했다. 결과적으로, 백제를 비롯한 삼국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는 신라와 고구려를 점령하려는 당나라간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 나당동맹을 맺게 된다.


2.2. 초반(우호적 관계)[편집]


초반에는 나당동맹을 맺고 각각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로 약속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며, 668년 이전까지는 꽤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645년을 나당연합의 시작으로 보는데, 고구려-당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다. 당은 신라와 백제에게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쳐달라 했으나, 백제는 이 부탁을 무시하고,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러 간 사이에 신라를 공격해 성읍을 빼았었다. 이렇게 백제와 당의 관계는 파탄이 나고, 나당 양국은 더 가까워져 650년 6월을 마지막으로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 대신, 당나라의 연호를 쓰기로 해 당나라에게 조공하는 질서가 확립되었다. 남은 두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는, 두 나라 모두 나당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느슨한 연맹을 성립한다.

645년과 650년 사이, 신라는 김춘추를 648년 사신으로 보내 의견을 같이함을 확인하고, 649년 당고종은 신라에게서 뺏은 영토를 돌려주고, 공격하면 당이 백제를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660년, 모든 준비를 마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를 열흘만에 멸망시키고, 8년 뒤 수많은 전투 끝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도 멸망시킨다. 이때까진 관계가 괜찮았으나 당이 한반도 정복의 야욕을 보인 이후 관계가 파탄난다


2.3. 파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당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구려의 일부 영토만 가지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가져가려는 야욕을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매소성 전투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며 당나라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일단, 당은 고구려 일부 영토만 가지겠다는 협약을 어기고 구 백제 영토를 점거하였으며, 웅진도독부를 세우고 신라와 백제(웅진도독부)는 싸우지 않고 화해한다는 회맹을 세우게 했다. 사실상 당나라의 괴뢰국이였던 웅진도독부를 엄연한 승전국인 신라와 동등시한 것이다. 굉장히 부당한 것인데, 일단 자신들이 맺은 협약을 스스로 위반했고, 백제는 물론 고구려 평정도 신라의 공이 컸으며, 괴뢰국과 승전국을 회맹시킨 것은 부당한 처사이다.

처벌권, 장수 임명권, 병력 징발권, 군사작전권 등 신라의 모든 군령권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처벌을 마음대로 하고, 병마를 징발하며, 장수를 임명했으며, 결정적으로 당군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마음대로 진군과 퇴군을 했다. 신라군은 동맹인데고 불구하고 당군이 철수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에야 철군했다.

이러한 갈등과 당의 야욕은 또다른 전쟁을 낳았고, 초반에는 고구려 부흥군이 내분으로 검모잠파와 안승파로 나뉘다가 검모잠이 피살당하고 안승이 귀순하는 등 구 고구려 지방이 많이 어지러웠다. 구 백제와 고구려 영토에서의 싸움을 걸쳐 전쟁은 절정에 다르고, 신라는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로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2.4. 통일신라 시기[편집]


나당전쟁으로 된통 혼난 당나라는 본인들이 어리석었음을 반성하고 다시 신라와 화친을 맺었고, 통일신라 시기에는 통일신라의 북쪽에 발해가 세워지며 해상으로 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잃게 된다.

통일신라와 당나라는 교역과 무역이 매우 활발했다.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의복도 당나라의 영향도 받았다. 당나라에는 빈공과에 신라인 합격자들이 많이 있었다.

신라는 국력에 비하면 당에게 꽤 외교적인 우대를 받았는데, 외국 사신들에 대한 의전서열에서 신라 사신을 1등석에 두었기 때문에 발해나 일본 사신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1]


2.5. 말년과 종결[편집]


당나라는 황소의 난시발점으로 해서 온갖 봉기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황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당나라는 멸망하며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도 후기로 가면서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통일신라에서는 원종과 애노의 난김헌창의 난 등 온갖 봉기가 일어나는 한편 골품제는 바뀌지 않고 유지된 탓에 형성된 호족들의 권력이 세지며 태봉후백제 등이 건국된다[2]. 결국 이 두 나라는 모두 안타까운 최후를 맞게 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가 멸망/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가 멸망/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관련 사건[편집]




4.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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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 명 같은 후대의 중국 왕조들도 북방 민족이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의 왕조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이 과정에서 당나라는 신라 포함 한반도의 나라들에도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하나같이 본인들 코가 석 자라서 남을 도와줄 처지가 아니였기에 줄줄이 거절만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