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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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舊韓末


파일:대한제국 지도.png

1876년[1] ~ 1910년[2]
이전
이후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1. 개요
2. 상세
3. 시대 구분
4. 구한말 인물
5. 구한말을 다룬 작품



1. 개요[편집]


구한말()이란 낱말은 본래 대한제국을 뜻하는 구한국(舊韓國)이라는 단어에 왕조의 말기라는 의미에서 말(末) 자를 붙인 것이다. 따라서 엄격하게는 대한제국 시대만 일컫는 어휘지만, 뜻이 확장되어 국호를 바꾸기 이전 조선 말기까지 통틀어 일컫는 데 쓰이는 경우가 많다. 개화기와도 상당 부분 겹친다.

보통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경술국치(1864~1910)까지를 지칭한다. 더 넓게는 철종 재위기~경술국치(1849~1910)까지이며, 좁게는 강화도 조약~경술국치(1876~1910)까지이다.

2. 상세[편집]


버튼 홈즈(Burton Holmes)[3]가 촬영한 구한말 기록영화[4]

조선 말기가 언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하는지를 두고 다양한 주장이 있다.

보통 구한말이라 하면 1864년 흥선대원군 집권[5], 혹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6]을 시작점으로 여긴다.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병인양요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충격적인 일을 겪고, 청나라일본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같은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집어삼키려 드는데, 이 판에 러시아도 끼어드는 등 굉장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사회적으로도 수많은 근대적 서양문물들이 전해지고 국가제도도 굉장히 바뀌었다.

갑오경장 때는 수천 년을 내려온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초기에는 청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따위 사건을 겪으며 영향력을 행세했으나 청일전쟁으로 퇴패했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며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제대로 된 정책 입안과 실행에 실패하여 국력을 키우지 못했다.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영일동맹 등을 거쳐 다른 열강들에게 조선을 식민지로 삼음을 인정받은 뒤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 후에 군대를 해산하고 정부조직은 개편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렀다. 나라의 위기 속에서 의병이 나타나 무력으로 저항해보고자 했지만, 일본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강제합병 당시에는 거의 소멸했다.

구한말은 근대화와 함께 다양한 서양의 신기술들이 한국사에 최초로 들어온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한말은 상당부분 개화기와도 겹친다. 철도, 전신, 전보, 우체국, 전등, 전화, 사진, 수도, 신식 소총·대포군함, 의복 과학/기술/생활분야뿐만 아니라 제도와 사상, 이념, 풍속, 법규 등 모든 것이 획기적으로 변하던 시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충격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전통을 지키자는 이들과 개화하자는 사람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단발령에 많은 사람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사건은 급변하는 시대의 문화충격과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한반도에 서양의 식문화가 전래되면서 새로운 먹을거리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을 기반으로 하는 식문화가 발달되어 이 영향으로 오늘날 재고량이 남아도는 지경이 되었다.

워낙에 많은 일이 일어나고 극적인 시대에 국권상실이라는 고통이 섞여 많은 매체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이 시기를 거친 대부분의 조선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리는 편.

참고로 이 시기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홍콩 트램이 운행을 시작하고 빅토리아 문화가 꽃 피는 아시아 도시가 되었다. 같은 동아시아 지역이지만 너무 얄궂게 운명이 갈렸다.

일본에서 한국사의 이 시대에 해당하는 시대로 메이지 유신 직전 막말(幕末, 바쿠마쓰) 시대와 유신 이후 메이지 시대가 있다. 시기적으로도 가깝고 겪은 시행착오도 공통점이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이 시대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 시대는 영화, 드라마 등 여러 매체에서 매우 각광받는 시대배경이다.[7]

3. 시대 구분[편집]


고종의 제국선포 후의 광무개혁기(1897년 10월 12일 ~ 1904년 8월 22일)와 러일전쟁 승리 직후부터 본격적인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기로 나누어지며 후자는 아래와 같이 나누어진다.
  • 고문정치기[8] (1904년 8월 22일 ~ 1905년 11월 12일)
  • 통감정치기 (1905년 11월 12일 ~ 1907년 7월 24일)
  • 차관정치기 (1907년 7월 24일 ~ 1910년 8월 29일)


4. 구한말 인물[편집]




5. 구한말을 다룬 작품[편집]


서양인과 서양 문물이 대폭 유입되는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기에, 일제강점기 이전을 다룬 사극 등 역사물에서 서양인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또한 조선인(주로 지배층)의 복식도 전통 한복에서 서양식 양복, 제복 차림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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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화도 조약 체결[2] 경술국치[3] 1870년 1월 8일~1958년 7월 22일. 보다시피 상당히 장수하였고 말년에는 몇십 년 전에 방문했던 곳이 전란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듯.[4] 버튼 홈즈 유산 보존회에서는 촬영시기를 1899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1901년으로 규명했다. 버튼 홈즈가 1901년에 조선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몇 달 뒤에 방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1913년에 재방문했을 때 촬영한 영상도 섞였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유튜브 댓글에서 일본인들이 모리시타 인단(森下仁丹) 광고지를 근거로 1920년대 일제강점기라고 주장하지만, 모리시타 인단은 이미 러일전쟁 무렵 한국에서 판매되다가 아류상품까지 나온 제품이므로 근거가 되지 않는다. 경희궁 흥화문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므로 늦어도 1915년 이전 영상일 가능성이 높다.[5] 한국사 교과서, 수험서는 출판상 편의 때문에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근대로 편제한다.[6] 근대성에 비중을 두는 관점에서 좀더 엄밀한 시점을 중시하는 경우.[7] 아니, 사극에서의 비중은 일본의 막말기가 한국의 구한말기보다 훨씬 위이다. 일본 사극은 절반이 전국시대이고 4분의 1이 막말기일 정도로 이 두 시대에 편중이 심하다. 소재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8] 괴롭히는 고문을 했다는 게 아니라 일본인과 친일 성향의 외국인 고문(顧問)을 대한제국 각 부처에 임명하여 내정간섭을 하던 시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