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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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5대 대왕
경종 | 景宗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90309105101.460.0.jpg
영릉 전경
출생
955년 11월 9일
고려 황도 개주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즉위
975년 7월 4일
고려 황도 개주 정궁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981년 8월 13일 (향년 25세)
고려 황도 개주 정궁 정전[1]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영릉(榮陵)
재위기간
고려의 정윤[2]
965년 3월 ~ 975년 7월 4일 (10년)
제5대 대왕
975년 7월 4일 ~ 981년 8월 13일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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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주(伷)
부모
부왕 광종
모후 대목왕후
형제자매
2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헌숙왕후, 헌의왕후, 헌애왕후, 헌정왕후
정윤#正胤
왕치
자녀
1남
종교
불교

장민(長民)
묘호
경종(景宗)
시호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
(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1]
연호
태평(太平, 976년 ~ 981년)[2][3]


1. 개요
2. 묘호시호, 별칭
3. 연호
4. 생애
4.1. 즉위 이전
4.2. 즉위와 치적
4.3. 붕어와 유조
5. 가족관계
6. 평가
7.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의 제5대 대왕.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헌화대왕(獻和大王).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 연호는 태평(太平, 976년 ~ 981년)인데 독자적인 연호인지는 논란이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태어난 첫 번째 군주로 20세에 즉위해 26세에 요절한 청년 군주였다. 마음이 굳세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정종, 광종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속에 빠진 조정을 안정화시키고, 전시과[3]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경종은 부왕 광종의 숙청 기간과 사촌 동생인 성종의 발전 기간 사이에 있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경종은 무난하게 정치를 펼치며 성종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2. 묘호시호, 별칭[편집]


후계자 성종이 올린 공식 묘호는 경종(景宗)이다.

경종의 시호는 여러 고려 황제들이 그렇듯 두 버전이 있다.

  • 《고려사》 <경종 세가> -총서- 기준:
    •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

  • 《고려사》 <경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
후계자 성종이 '헌화'를, 아들 목종이 '성목'을, 사촌동생 현종이 '명혜'와 '순희'를, 문종이 '정효'를, 고종이 '공의'를 추가로 올렸다.

경종의 긴 시호 중 중요한 부분은 정윤 성종이 올린 대표시호 '헌화대왕'(獻和大王)이다. 그래서 묘호와 합쳐 부르면 '경종 헌화대왕'(景宗 獻和大王), '경종 헌화왕'(景宗 獻和王)이다.

시호 '헌화'(獻和) 중 '헌'(獻) 자를 돌림으로, 경종의 네 왕후는 모두 '헌' 자 시호를 받았다. 헌숙, 헌의, 헌애, 헌정왕후.

경종 재위 7년차에 만들어진 '지곡사진관선사비'엔 경종이 '영주'(英主), 고려는 '대방'(大邦)으로 등장한다.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90309105101.460.0.jpg}}}
개성시[4]에 있는 고려 경종과 헌숙왕후가 안장된 영릉
북한 치하의 고려왕릉들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3. 연호[편집]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거는 금석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에 있는 보물 제981호 마애약사여래불의 명문(銘文)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하지만 경종의 독자적인 연호인지 여부에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당시에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서 연호도 갖다 썼으며 당시 송나라 황제인 송 태종의 연호가 태평흥국(太平興國)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송 태종의 태평흥국 연호는 976년 12월부터 썼기 때문에 977년은 태평흥국 2년이다.

(((((((((((((((((((((((((((((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 옛 석불이 있던 것을 금상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법사 <마애약사여래불 명문>(銘文).



4. 생애[편집]



4.1. 즉위 이전[편집]


경종의 등극 이전 관작
작위
황태자(王太子) - 정윤(正胤)
전통적 후계자의 작위 태자에 고려 고유의 작위 정윤을 겸했다.
직위
내사제군사(內史諸軍事) - 내의령(內議令)
내사제군사가 정확히 어떤 직위인지는 미상이다.
그러나 제군사가 고려 군대 지휘관의 직함인 것을 감안하면
'내사성의 군대 지휘관'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겸한 내의령은 명예직으로 명목상 내의성 장관이다.

아버지 광종의 호족 숙청 작업으로 인해 차기 후계자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광종이 두려워한 탓에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하여 야단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차남 효화태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경종의 동복동생이라는 것과 시호만 남아 있어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어머니인 대목왕후 덕분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아녀자의 손에서 자라서 궁궐 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기 때문에 후회와 과실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아녀자의 손에 자랐다는 것은 아버지와는 교류가 어려웠고, 철저히 어머니나 외가 쪽 세력의 보호 아래서 자랐음을 의미한다. 광종과 관계가 가깝거나 적어도 나쁘지만 않았어도 정통성을 의식해 부자 관계를 실제보다 잘 포장해 적었을 것이기 때문.

대목왕후가 광종이 실시한 노비안검법에 대해 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대목왕후가 자신의 친정인 황주 황보씨를 포함한 호족 세력들의 대변자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무래도 이 역시 광종이 모후 혹은 외가의 교육을 받았던 태자 시절의 경종을 경계했던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경종은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후회와 과실을 면했다"는 부분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4.2. 즉위와 치적[편집]


975년 광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다. 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자신 역시 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에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은 혼란상 때문에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원한이 판을 쳤던 탓인지 몰라도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채용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다.

문제는 왕선이 건의한 법안[5]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사달이 났다. 경종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경종이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이 법을 승인했을 여지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왕선과 호족 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삼촌[6]이 이 법에 얽혀 살해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최승로는

"경종 시대에 복수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후생[7]

들이라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

이라고 까면서도 두 왕자에 대해서만은

"광종도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고 관용한 사람들이었다며 살아있었다면 족히 왕실의 웃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

이라고 자뭇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8]

이렇게 복수법의 폐단이 우후죽순 번지자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에 의해 입안자인 왕선은 파직된 뒤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 때 경종은 본래 한 사람만 담당하던 집정을 좌집정과 우집정으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두 집정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이후 사적인 복수를 행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는 동시에 복수법을 없애버렸다. 이 정책으로 인해 다음 왕인 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서 까이게 된다.

경종은 이후에 전시과(일명 시정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켰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안정적인 정치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광종 시절의 공포 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및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9]


4.3. 붕어와 유조[편집]


과인(寡人)은 4조(四朝)[10]

의 위대함을 이어 삼한(三韓)의 패도(霸圖)를 이어받으니 산천토전(山川土田)을 지키게 되었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매일 걱정하며 사니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근로(勤勞)로 인해 질병(疾疹)에 걸리니 부담을 놓아 정신을 편하게 하고, 거룩함을 전해 아름다운 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치(治)는 나라의 현명한 친척이며 내(予)가 아끼는 자다. 그는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국가(國家)의 창기(昌基)[11]

를 보호할 것이다.

아! 너희(爾) 공경재신(公卿宰臣)들아, 내 개제(介弟)[12]

를 존경하고 보호하라. 우리(我) 대방(大邦)[13]을 영원히 빛나게 하라.

과인(寡人)이 늘 예경(禮經)을 보니 '남자는 부인(婦人)의 손을 잡고 죽지 않는다'라 했으니 늘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금일(今日) 좌우빈(左右嬪)을 물러가게 했으니 혹시나 대기를 맞이하더라도 한스럽게 여길게 뭐가 있겠는가?

제사의 일정은 한제(漢制)에 맞춰 1일을 1달로 계산하라. 원릉(園陵)의 제도(制度)는 검약(儉約)하게 하라.

서경(西京),안남(安南)[14]

,등주(登州) 등(等) 제도(諸道)는 진수(鎭守)해야 할 임무(任)가 있으니 궐(闕)로 달려 오지 말고 각지에서 애도하라. 3일 안에 상복을 벗게 하고 나머진 사군(嗣君)[15]이 알아서 하라.

고려사절요》 제2권 <경종 헌화대왕> 중. 서기 981년 7월에 유조(遺詔)를 전하며.


붕어 1개월 전인 981년 6월에 병이 들었고, 981년 7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동생 정윤 개령군 왕치에게 "나의 뒤를 이으라"는 유조를 남긴 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


5. 가족관계[편집]


왕후들의 관계가 그야말로 족내혼의 극치를 달린다. 왕후 넷 모두 사촌관계이고 후궁도 사촌 관계이며, 왕후 두 명은 자매 사이다. 심지어 제1비인 헌숙왕후를 빼면 부모들이 모두 이복 남매 관계이다.[16] 그 덕에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의 증조부모와 조부모, 부모가 모두 왕과 왕후이며, 목종도 족내혼을 하여 처가까지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이다.

고모 낙랑공주경순왕 김부의 딸로서 경종과는 고종사촌 지간이다.[17]
숙부인 문원대왕과 문혜왕후 류씨[18]의 딸로서 경종과는 친사촌 지간이다.
제4비인 헌정왕후와 같이 외삼촌이자 숙부인 대종[19]과 선의왕후 류씨[20]의 딸들[21]로 경종과는 친사촌이자 외사촌 지간이다. 헌애왕후 보다는 천추태후라는 호칭으로 더 유명하며,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을 낳은 여인이다. 목종은 성종 이후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보위를 이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강조의 정변 이후 목종이 시해당하면서 경종의 후사는 끊기게 된다.
경종 재위 시기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경종이 승하한 이후, 숙부인 왕욱[22]과 사통하여 사생아를 낳는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남편인 경종이 빨리 승하한 탓인지 자매지간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남자 문제로 여러가지 물의를 빚었다.
경종의 고모 흥방궁주와 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 사이에서 태어난 숙부 원장태자(元莊太子)의 딸이다.


6. 평가[편집]


王溫良仁惠, 不好遊戲. 末年, 厭倦萬機, 日事娛樂, 沈溺聲色. 且好圍碁, 昵近小人, 踈遠君子, 由是, 政敎衰替.

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놀이 따위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에 염증을 내어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탐닉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군자들을 멀리하니 이에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해졌다.

고려사


분명 복수법이라는 실책을 저질렀고,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하며 주색에 탐닉하는 등 놀고 먹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후대의 평가가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며 불우한 유년기로 인해 그를 동정하는 여론도 꽤 많다. 전시과라는 훌륭한 제도를 성립시켰다는 점을 볼 때 꽤 유능한 군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 대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안정된 왕조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목종 때의 일을 예견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후계자가 버젓이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것인지 사촌이자 매부인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줬는데 성종은 지방 제도와 여러 업적을 남기고 결과야 어찌되었든 고려 행정 체계의 기초를 닦고 유학 중심의 정치 체제 확립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경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였다.


7. 대중매체[편집]


  •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대목왕후의 외가에서 보살핌을 받다가 평주 호족들의 반란에 어린 아이임에도 억울하게 엮여 누명을 쓰고 광종이 사약을 내린다고 했다. 하지만 일단 궁에 유폐만 된 상태에서, 신료들의 간곡한 요청과 대목왕후의 자결 위협으로 후에 사면되고 막판에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최철호가 연기했다.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맡은 신마적 역의 광기어린 모습과는 상반되게 아들에 대한 절절한 부성애 연기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작중에서 경종의 광적인 행동이 강한 인상을 남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 광증(狂症)은 실제 역사에 비해 매우 과장된 것이다.
왜 이리 풍악 소리가 작은 게냐? 오늘은 즐거운 날이 아니더냐? 근심 걱정 다 떨치고, 마시고 취하는 날이란 말이다!
풍악! 풍악! 풍악! 풍악을 더 크게 울려라! 풍악! 풍악...! 하하하... 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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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만월대의 정전은 천덕전(天德殿)이므로 천덕전에서 붕어한 것으로 보인다.[2] 경종은 왕태자-정윤(王太子-正胤)이였다.[3] 고려를 대표하는 토지 제도인 관계로 이것 외에는 치적이 없다시피한 경종이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종종 나온다.[4]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참고로 북한에서는 개성시를 2019년부터 황해북도를 포함한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게 행정구역을 개편했다.[5]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6]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 사후 효성태자로 추존)과 진천낭군(진주낭군, 사후 원녕태자로 추존).[7] 왕에 영합한 간신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광종 대에 등용된 신진 세력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8] 광종이 이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은 이들의 뒷배경이었던 천안시진천군이 광종의 외가였던 충주시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광종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출처 : 김창현 《광종의 제국》)[9]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노는 소년이 된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도 얼추 비슷한 부분.[10] 경종의 전 4대 임금. 태조, 혜종, 정종, 광종을 가리킴.[11] 국가의 창성한 기틀, 기반.[12] 큰동생, 성종을 의미.[13] 고려는 자국을 대국, 천조로 칭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었다.[14] 현 전라북도 정읍시 지역에 설치됐던 안남도호부를 말한다.[15] 다음 군주, 역시 성종을 의미.[16] 아래에 서술된 가족관계를 보면 태조 왕건의 아들들은 대부분 이복누이와 혼인한 것을 알 수 있다.[17] 경순왕의 첫 부인 죽방부인의 딸이라는 말도 있다.[18] 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딸. 즉, 문원대왕과 문혜왕후는 이복남매지간[19] 아버지 광종의 이복형제이자 어머니 대목왕후의 친형제. 이복남매인 광종과 대목왕후가 혼인하면서 관계가 이렇게 꼬였다.[20] 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의 딸. 대종도 문원대왕처럼 자신의 이복누이와 혼인한 것이다.[21] 즉,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경종의 후임인 6대 국왕 성종의 누이들이다.[22] 태조 왕건신성왕태후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