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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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
4.1.1. 신라의 국제 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유물 일람



1. 사회[편집]


신라는 같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에 비해서 중국과 교류하기 어려운 한반도 동남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대륙에서 전해지는 문물이 늦게 도착했고, 율령에 기반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 및 정착한 시기도 더 늦은 편이었지만 지증왕법흥왕의 내부 개혁과 진흥왕의 대외 정복전쟁을 거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백제, 발해고려, 조선과 달리[1]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 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서로 내전없이 평화적으로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었다, 이는 신라 주변 중국, 일본, 만주 지역뿐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보기 드문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다. 삼국 시대 중기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는 동시에 불교를 장려하여 중앙 집권 국가가 되는 것에 힘썼다.


1.1. 골품제[편집]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이는 수직적 신분제도로, 물론 고구려백제도 엄연히 세습 귀족제 국가였기에 딱히 신라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신라 자체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신분제에 가까웠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신라도 이 폐쇄적인 신분제도내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방통치나 인재등용을 보여줬기 때문에 반드시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운용했다 보기도 어렵다. 그렇지 않다면 세 나라가 번갈아 차지하던 국경지대의 지방민들이 신라에 협력하고 싶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단양 신라 적성비의 내용이나 《삼국사기》 <열전>의 죽죽, 강수와 같이 신라를 지지하고 충성한 지방민들이 존재했다는 점은 신라의 골품제 내에서의 유동성이 어느 정도는 있었음을 보임과 동시에 폐쇄적인 신분제도이지만 그 때문에 신라 특유의 높은 중앙집권화(왕권)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입장도 있다.[2]

비록 다른 두 나라의 신분제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까지 남지는 않았지만 동시대 신라보다 압도적으로 훨씬 경쟁력 있는 체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경쟁력이 있었다라는 입장이 나올 수 있긴 한 사례들이 존재하고 평민층에서 신흥세력의 존재들이 나오며 국가 위기상황에서 결속력이 두드러지긴 하는데 신라라고 딱히 고구려만 못하진 않았기 때문. 그리고 백제의 경우 대성팔족체제하에서 신분제 형태가 신라보다 폐쇄적이었다는 얘기는 근거가 없다. 애초에 대성팔족 자체가 한성백제 당시에는 아예 귀족 계층도 아니었던 계층들을 포함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구려도 집과 의관이 신분마다 차이가 있었다던지 중앙관리와 지방관리의 격이 있었다던지의 신분제의 유동성은 있으되 신라처럼 신분적 격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백제의 경우는 대성팔족을 기반으로 한 세력외에는 신흥세력이나 특별출세 인물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단, 신라의 골품제는 삼국통일, 나당전쟁 시기에 정복 사업의 성공과 전 국가적 위기로 신장된 왕권을 바탕으로 신라가 살아남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이후 평화 시기엔 수도 경주와 귀족 세력에게만 이익이 편중되어 내전을 유발하고 지방 호족의 불만이 커지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골과 왕족 간 혈연 거리가 멀어지고 아무래도 진골이 국정에 대한 책임감은 왕족 집단만 못했던데다 기득권은 결코 놓치려 하기 않았기에 신라 멸망의 으뜸가는 요소로 대두되고 만다. 이와 같은 현상은 벌써 이미 진흥왕 때부터 단초를 보였는데, 이런 문제점은 정복 사업의 성공과 국가 위기 극복으로 일단은 봉합되었으나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고 개혁이 요구되는 시기가 오자 적어도 법흥왕 때부터 내려오는 기존 왕족 집단이 개혁을 원천 거부하는 진골 귀족 집단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해 끝내는 타도당하고 말게 되면서, 신라는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3]

한편, 나말 여초에 발달한 전기 소설 가운데 《김현감호》(金現感虎) 《조신》(調信) 《수삽석남》(首揷石枏) 등이 있는데 여기에 신분간의 대립이 보이는 중에도 상층의 사고 방식과 말이 하층의 사고 방식이나 말과 활발히 교류하거나 뒤섞이는 특징이 보인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1.2. 관직[편집]


신라 중앙 정치는 귀족들의 합의 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 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간의 대립으로 특징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의 권력이 강했고, 중기에는 시중이,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서열
관직명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중시(령)
도독
사신
시랑(경)
군 태수
현령
1
이벌찬











2
이찬











3
잡찬











4
파진찬











5
대아찬











6
아찬











7
일길찬











8
사찬











9
급찬











10
대나마











11
나마











12
대사











13
사지











14
길사











15
대오











16
소오











17
조위












신라의 관직골품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17등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골품에 따라 골품당 최대한으로 승진할 수 있는 등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은 6등급 아찬,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다. 각부의 장관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령(令)은 5등급인 대아찬 이상부터 오를수 있었으니 사실상 진골만이 이 지위를 획득할수 있었고 각부의 차관격인 경(卿)은 11관등에서 6관등의 사람, 즉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다. 17관등 위에 특별직인 대각간, 태대각간이 있었다. 1등급 각간(이벌찬의 다른 이름)에 대 자를 붙여서 높인 것인데 1천 년 역사 동안 몇 명 없을 정도로 큰 업적을 세운 사람만을 임명했다. 신라 땅에서 일어난 태봉후백제, 그리고 고려도 초기에 잠깐 동안 신라의 관등 체계를 가져다 쓰거나 조금 변형해서 쓰기도 했다. 물론 이쪽은 골품제는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1.3. 화랑[편집]


신라는 청소년들을 화랑도에 귀속시켜 국가적인 인재 양성을 꾀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위급 자제들이 화랑이 되고 하위 골품의 인원들이 낭도가 되어 화랑을 따르는 방식이었으며, 이들은 전국의 유명한 과 큰 , 고유신앙의 성지를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무예를 닦으며, 유교불교, 도교 경전을 익히면서 문무를 겸비한 국가의 인재들로 성장했다.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 낭도와 같이 생활하면서 유대감을 쌓았고[4] 수련 중에 눈에 띄는 뛰어난 인재는 추천해서 문무 관직에 추천했다. 이런 화랑제도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삼국 통일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만 통일 신라기엔 그 과정에서 옛 백제 및 고구려 지역까지 낭도 수십~수백 명을 데리고 쏘다디면서 화랑들이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현상이 일어났고, 화랑들이 딱히 옛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 등을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지방민들은 결국 반(反) 신라 감정을 키우게 된다.


1.4. 원화[편집]


진흥왕 시대(576년)에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일종의 아이돌로 삼아 수백명의 젊은이가 보좌하게 하여 인재를 등용하려 한 것이 원화의 시작이다. 그 뒤 준정이 남모의 미모를 질투한 나머지 남모를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만든 다음 익사시킨 게 발각되어서 준정도 결국 사형당했다. 이로써 원화 제도가 없어지고 용모가 뛰어난 꽃미남들을 모집했는데 그것이 화랑 제도의 시작이다. 준정이 남모를 따르던 무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물론 《화랑세기》는 그 진위가 매우 의심스러운 작품이지만 나중에 미실이 원화제도를 부활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시 시가지를 종단하는 도로 이름이 여기에서 따 온 원화로다.


2. 언어[편집]



현대 한국어의 뿌리는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진국과 마한, 변한, 진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의 언어 교류 그리고 통일 신라에서의 융화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 *kusuniziri)"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鬪將臨城洫而歎曰 久須尼自利 (此新羅語 未詳也)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 (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 라고 탄식하였다. 일본서기 562년 7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일 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ziri 부분을 현대어에서 의지를 표현하는 -으리로 본다면 미래지향적인 다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2.1. 백제어, 고구려어신라어와의 관계[편집]


백제어, 고구려어신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라 생각된다. 다만 이 삼국의 언어들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상호의사소통성이 있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다. 중국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말이 통했으며, 백제와 신라가 말이 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단 최근 언어학계에서 한국어 자체에 대해서는 고립어거나 한국어의 방언끼리 자체적으로 한국어족을 이룬다고 보는 추세라 삼국간 언어는 유사동종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신라와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목간 해석에 따르면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삼한 계통의 국가였고 고조선계 유민들이 남하해왔기 때문에 조선(고조선)과 부여가 기본적으로 같은 종속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백제, 고구려, 신라의 언어는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고구려와 신라 간의 기록을 보면 서로 간에 대화가 어렵지 않게 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인명 자료에서도 고구려와 신라의 것이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와 신라가 방언상 차이는 크지만 서로 언어가 통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고구려어의 각종 어휘가 현대 한국어와 중복되는 것이 많다.

백제어 같은 경우 이기문 박사가 백제어가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 등을 보면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건길지나 어라하 등의 칭호가 달랐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할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때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백성들은 임금님이라고 불렀다고 조선의 언어는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호칭상의 차이일 뿐 이런 게 언어가 달랐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3. 공업[편집]


신라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세세한 분야의 공예 전담 관청을 설치해 관영 수공업을 운영했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분업 공정 관계로 얽혀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소전(䟽典) - 고치실을 켜는 작업을 담당.
  • 표전(漂典) - 뽑아낸 표백을 담당.
  • 염궁(染宮) - 염색 작업을 담당.
  • 홍전(紅典) - 염색 작업을 담당.
  • 폭전(曝典) - 염색 작업을 담당.
  • 금전(錦典) - 비단 제조를 담당.
  • 기전(綺典) - 비단 제조를 담당.
  • 마전(麻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직방국(織紡局)으로 미루어보아 삼베 의류 제조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모전(毛典) - 모직물 제조를 담당.
  • 침방(針房) - 바느질을 담당. 여성 16명이 배속되었다.
  • 왜전(倭典) - 일본 수출용 물품 제작 담당.
  • 철유전(鐵鍮典) - 철기, 유기 제작 담당.
  • 칠전(漆典) - 옻칠 담당.
  • 타전(打典) - 가죽 무두질 담당.
  • 피전(皮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포인방(鞄人房)으로 미루어보아 가죽 제품을 다루는 곳으로 추정된다.
  • 추전(鞦典) - 안장 등 마구 제작.
  • 피타전(皮打典)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운공방(䩵工房)으로 미루어보아 가죽 을 제작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 탑전(鞜典) - 가죽 신발 제조 담당.
  • 화전(靴典) - 가죽 장화 제조 담당.
  • 마리전(麻履典) - 짚신 제작 담당.
  • 마전(磨典) - 과녁, 악기 등 제조 담당.
  • 궤개전(机槪典) - 밥상, 탁자 제작 담당.
  • 와기전(瓦器典) - 기와 제작 담당.
  • 채전(彩典) - 건물의 단청 등 그림을 담당.
  • 남하소궁(南下所宮) -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인 잡공사(雜工司)로 미루어보아 이런저런 잡다한 공사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겹치는 것이 보이는데, 가령 염색 작업을 담당하는 관서가 동시에 여럿 있었다는 것은 생산하는 옷감의 종류에 따른 염색 방법이 세분화되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궁중 수공업 관청을 매우 세분화해 둔 것은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며,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상당수는 소실되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여러 문화재를 통해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민간 수공업도 성행했다. 상원사 동종에는 725년(성덕왕 24)에 조남택(照南宅) 집안에 소속된 장인 사▨(仕▨) 대사가 주문을 받아 이 종을 주조했다고 새겨져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대종을 35대 금입택 중 하나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장인이 주조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들은 저택의 이름을 내걸고 각자 장인을 보유해 수공업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일본에 수출해 지금도 남아있는 정창원 신라 양탄자 중 하나에는 자초랑택(紫草娘宅)이란 제조업체명이 남아있어, 이 양탄자를 제조, 판매한 곳이 자초랑이란 신라 귀족 여성의 저택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물품들은 오로지 수출용 사치품은 아니라, 양탄자는 5두품의 수레용 깔개로 사용될 정도로 흔히 사용되는 소비재였다.##

국가 권력의 통제에 따라서 장인의 신분도 등급별로 나뉘어 골품을 하사받는 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부역에 동원되어 기술 노역만 제공하는 사람, 그외에 왕실 수공업을 위해 노비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관한 기록은 지방에 있는 시장보다 수도 위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관영이나 사영 기술자들의 생산품은 주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사치품이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각 지방 백성들의 생필품 등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주요 도시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체계적인 산업의 형태를 띄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신당서》 <신라전>이나 《삼국유사》 <왕력>편의 유시(油市) 등의 존재를 근거로 각 지방 향시의 존재를 추정하는 설도 있다.


4. 경제[편집]


구릉과 산지가 많은 한반도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비록 산지가 많았지만 농사에 적합한 기후에 산과 산 사이로는 평지가 많았고, 지금은 넓은 김해평야나 호남평야는 치수와 간척이 이루어지기 이전 고대에는 아직 얕은 바다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신라의 시작 거점이었던 경주에는 거대한 하천인[5] 형산강이 있어 울산에서 경주까지 형산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립 초기부터 안정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주변 진한 지역을 흡수해 세력을 형성하였고,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 그리고 가야 땅 낙동강 전역을 차지하여 막대한 농경지를 얻어 삼국 통일 이전부터 삼국 중 가장 많은 주요 농경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기 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벼와 곡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신라가 차지한 한강과 낙동강,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하천과 평야 지대를 많이 접한 신라였기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관개 설비를 정비하며 논 농사가 수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전체 농토 중 논과 밭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시기를 다룬 행정 자료인 <신라 촌락 문서>에 기재된 촌락의 논과 밭의 비중은 논은 102결, 밭은 62결 정도로 밭보다 논이 더 많음이 확인된다. 물론 아직까지 전체적인 논과 밭을 다룬 토지 자료가 발굴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체 농토의 논 / 밭 비중이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논 / 밭의 비중과 별개로 농토의 공 / 민유지는 전체논의 10% 미만 정도가 국유지 내지는 관유지이고 나머지 90%는 귀족들이나 중류층, 그리고 농민들의 사유지로 보인다.

농토의 크기는 결과 부, 속 등으로 그 규모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 결부의 개념처럼 농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 기준에 따라 조세를 부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토를 둘러싼 농민들의 소유 형태는 정전제를 볼 때 오늘날 사유 재산의 개념처럼 온전히 백성의 사유지라기 보다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고 농민들은 그 땅의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땅을 파는 매매나, 땅을 담보로 하여 자금이나 물자를 빌린다거나, 땅의 소유권 등을 등기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전제가 실시되었지만, 신라 말기에 호족 세력이 궐기한 점이나, 전체적으로 귀족의 경제력이 튼튼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방 유력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주변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없이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영 농민보다 서구 농노나 조선 시대 노비나 조선 초기 전호들처럼 자기 논밭이 있지만, 휴경 등의 이유로 자신의 논밭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귀족의 논밭을 경작해주는 대가로 식물의 종자나 대형 농기구를 빌리는 형태의 장원(농업) 경작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물론 통일 신라나 내외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외부로의 세력 확대나 주변국의 침입,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초기에는 휴경기에 귀족의 논밭을 경작하기보다 농민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도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파일:신라 촌락 문서01.jpg


파일:신라 촌락 문서02.jpg

▲ 민정문서의 자원 내용
▲ 민정문서의 인구 내용

그 밖에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토지와 주택, 주거지의 규모, 가축과 임목의 숫자와 종류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인구의 증감, 재산의 증감을 아주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농업 용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후대에도 있었던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가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특히 농업용 가축이 아닌 말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시 동원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산림 지역을 무주 공산으로 방치해 전국에 민둥산을 양산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6] 산림의 나무가 몇 그루인지와 수종을 정확히 파악하고 변동을 정기적으로 기록하며 관리하는 것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나 다른 자료에서 신라의 수공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수공업 자재의 일종으로 수천 그루의 나무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보아 비단 생산이나 목공을 위한 대규모 공업 시설이나 수공업 체계의 존재 등이 추정되고,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한 기록에서 으로 요리를 하며 사치를 누렸다는 것이 등장하는데, 체계적인 임목 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땔감이나 목재의 공급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문서에서는 전체 임목 중 비단 생산에 필요한 뽕나무 재배 수량이 유달리 많은데, 촌락 문서에서 다루는 청주 인근 4개 촌이 뽕나무 육성에 특화된 마을인지 아니면 신라가 전체적으로 뽕나무 육성에 주력하였는지는 이 시기 행정 자료가 촌락 문서 하나 뿐이라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라(羅) 자체가 비단이라는 뜻이 있고, 이 촌락 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이전인 삼국 통일 이전, 신라라는 국호가 지증왕 대에 확정되기 전부터도 유잠국(有蠶國) 같은 누에치기와 연관이 깊은 이름을 썼던 기록이 있어서 원래 신라가 뽕나무 및 누에치기에 국가적으로 관심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뽕나무는 보통 뽕잎이 누에의 먹이로써 비단 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고, 뽕나무 자체가 활과 화살통을 만드는데 주요한 재료였다는 점, 나뭇잎이 넓은 활엽수는 비록 나무 전체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목질이 단단하여 가구재로서 적합해 수공업이나 공업용 재료로서 적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촌락 문서의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은 점은 상공업을 위해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뽕나무 문서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열매 채집 시기가 모를 심는 농번기와 겹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그 주변에 뿌리를 내려 다른 작물의 식생을 방해하므로 보통 농지와 멀리 떨어진 늪지나 습지 혹은 외곽에 심는다. 그러므로 농업을 보조하거나, 도와주기에 적합한 수목은 결코 아니다.

그 밖에 국가의 인력 동원 체제 등을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남은 20세 이상의 장정으로서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을 받고 요역(徭役)에 참가하는 사람, 조자는 정남을 도울 15세 이상의 남자, 제공은 요역을 면제받은 60세 이상의 연령층, 노공은 70세 이상의 노인 등으로 보인다. 또 호(戶)의 기준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로 나누었는데 그 구분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랐던 것 같다.

산지가 대부분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육로개발 보다는 수로와 인력을 통한 물류 운반을 중시했던 후대 왕조 조선과는 달리 육지에서의 도로와 수레 사용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등의 다양한 유물이나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 등의 발견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주 서봉총에서 4세기~5세기 경 신라인들이 먹었던 음식들이 출토되었는데, 안동 간고등어의 예에서 보듯 소금으로 짠지 수준의 염장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신선한 음식을 조달하기 힘들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갓잡은 듯한 신선한 해산물들이 잔뜩 들어가있어 당시 내륙 지방의 물류체계가 굉장히 원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YTN 뉴스

등을 기르는 목장도 전국적으로 운영되었다. <민정문서>에서는 청주시 주변 4개 마을에서 말 61마리를 사육하고 그 두수를 기록해 둔 것이 남아있고, 일본 승려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전라남도 다도해의 여러 섬에서 귀족 소유의 목장운영되었으며, 지금의 부산광역시에 있는 절영도산 말은 명마로 이름이 높아 성덕왕이나 견훤이 구해서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말들은 군마나 수레를 끄는 역마로 쓰였을 것이다.

어업도 발달해, 예를 들어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우물에서는 붕어, 잉어, 연어, 민어, 복어, 가오리 등의 다양한 어종의 뼈가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민어는 경주시가 위치한 동해 바다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고 서해에서 잡히는 생선으로, 당시 어류의 장거리 보존과 유통 체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경주보다 더 깊은 내륙 지역인 경산시 임당 유적에서도 고등어, 전갱이 등 바다 생선의 뼈가 다수 출토되었다.

어업 및 하술할 무역에 필요한 조선업 역시 발달하여, 특히 일본 측 기록에서는 신라 배의 우수함을 말하는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 신라가 왜에 파견한 배 만드는 장인이 훗날 야마토 조정의 목공기술 전문 집단 이나베(猪名部)의 시조가 되었고, 일반 배는 바람과 파도에 약해 신라 배를 나누어 달라는 기록##이나 신라식 배를 따로 만들도록 주문한 기록## 등이 있다. 먼 바다를 치고 나갈 수 있는 배는 해상 무역을 활성화시켜 8세기 경덕왕 무렵에 이미 해상에서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9세기에 이르러서는 광범위한 신라방 사회 및 장보고, 장영(張詠), 김자백(金子白), 유상희(劉相晞), 유천궁, 왕건 가문 등 해상 세력가의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4.1. 무역[편집]




초기에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 남동쪽은 왜가 있는데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흐름이나 교류에 뒤쳐져있고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토우(흙 인형) 중에 코끼리, 원숭이의 모습을 본딴 것들이 출토되고 있으며[7] 동유럽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마 제국유리로 제작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과 유리잔, 보물 제624호 유리잔을 비롯해 황남대총 등에서 서역산 공예품이 말 그대로 쏟아졌기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8세기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공무역이 주축이 되었지만 9세기 이후 신라, 당, 일본 3국의 중앙 집권 체계가 약화되면서 민간 무역이 성행하였고 장보고등의 해상 세력은 당나라 산동 지역 등에 설치된 신라방 등을 통하여 활발한 민간 무역을 행하였다. 후에 무역으로 부력을 갖춘 호족들의 약진은 후일 호족들과 함께 후삼국 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당과의 무역에서는 초기에는 원자재나 지역 특산품을 수출품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비단 공예품과 금속 수공업품의 비중이 늘어나 <신라 촌락 문서>에서 대규모 뽕나무 숲을 육성한 것 역시 비단 생산을 위한 목적이 큰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공무역으로는 주로 금, 은, 우황, 인삼 등을 수출하고 당에서 비단과 당삼채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삼국사기》 <잡지>에 기재된 각종 외래 사치품은 주로 사무역을 통해 들여온 것으로 보는데 목도리, 중앙 아시아산 에메랄드로 상감한 빗과 모자, 바다 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 페르시아산 카페트 등이 있었다. 매신라물해 등 일본 기록에 남아있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품으로는 신라금(琴, 악기), 신라도((新羅刀, ), 구리 그릇 등이 있었다.

다만, 중국과 달리 금속화폐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지 못하여 견포, 즉 옷감을 상품화폐로서 사용하였다.[8]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견포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길이를 조정하고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의 아스카이타부키노미야(飛鳥板蓋宮), 카와라데라(川原寺) 등에서 신라의 은화로 추정되는 무늬 없는 은전이 출토되어 옷감보다 높은 교환가치가 필요한 경우 고액 현물화폐가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4.1.1. 신라의 국제 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주요 유물 일람[편집]




인도네시아: 신라 인면유리구슬
동로마: 경주 계림로 보검


페르시아: 쿠쉬나메
이집트: 신라의 유리잔

[1] 단, 해씨 고구려설, 비류백제왕 설과 같이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도 주몽온조에서 이어지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2] 그렇지 않고서야 통일신라 시점에 와서 골품제 개편 논의나 특히 신분이 평민이었던 장보고에게 군사 징발권과 청해진 대사라는 벼슬을 주었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3] 고대 로마 기준으로 따지면 모든 개혁을 거부하던 옵티마테스가 끝내 카이사르를 비롯한 포풀라레스 집단에게 타도당하고 만 것과 비슷하다. 그나마 개혁을 거부하던 신라 진골 집단은 서라벌 함락 당시 후백제 수도 전주로 끌려가서 일반 후백제 백성으로 살든지 아니면 고려의 향리로 강등당할망정 몰살당하진 않았지만, 옵티마테스 집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물리적으로 말살된 게 차이다.[4] 향가 모죽지랑가는 귀족인 화랑 죽지가 자기 휘하인 평민 낭도 득오를 아끼고, 득오가 죽지를 존경해 지은 노래다. 찬기파랑가 역시 모범이 되는 화랑 기파랑을 아랫사람이 찬양하는 노래다.[5] 현재의 경주 시내 형산강은 보문관광단지의 인공 호수를 지으면서 수량이 줄어들어 쪼그라든 상태다. 원래는 지금보다는 넓은 강이었다.[6] 물론 조선은 인구 밀도가 커지면서 국가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만.[7] 개미핥기 토우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개미핥기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안 닮았을 뿐더러 개미핥기처럼 꼬리가 수평인 게 아니라 개처럼 꼬리가 엉덩이위까지 올라가 있다. http://blog.naver.com/gesekideska 애초에 개미핥기는 아메리카에 사는 동물인데 그 시절엔 개미핥기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다. 다만 개미핥기와 비슷하게 생긴 은 동남아에도 서식한다.[8] 이는 고려와 조선시대 까지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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