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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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교역로
울산항 · 당항성 · 영암 · 청해진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308호
완도 청해진 유적
莞島 淸海鎭 遺蹟




소재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면적
239\,312㎡
지정연도
1984년 9월 1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제작자
장보고

1. 개요
2. 상세
2.1. 설치
2.2. 직위
2.3. 해체
3. 사적 제308호
4. 기타
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淸海鎭

9세기통일신라무주 침명현(浸溟縣)에 설치되었던 해상 기지. 신라의 해군 기지이자 무역 거점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장보고 유적지)에 위치해 있으며 그 범위는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와 완도 동쪽의 작은 섬 장도 일대로 보고 있다.

1990년대부터 2001년까지 대규모 발굴이 이뤄졌고 청해진 유적이 다수 확인됐는데, 청해진 본영은 장도 섬이고 인근의 완도 본섬 부분은 병사들이 머문 군영과 기타 시설이 산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장도와 완도 본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984년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편집]



2.1. 설치[편집]


신라 흥덕왕 시대에 해적이 들끓어 문제시되자, 국왕이 직접 당나라에서 이사도를 토벌하여 무령군 소장까지 지내다가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에게 칙령을 내려 군인 1만 병력으로 상업의 요충지인 청해에 해군진을 건설하고 전략적 시설을 마련하도록 한다. 이에 해적들로부터 남해의 제해권을 보호하고 중국일본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으로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1] 서남 항로를 개척하여 강력한 해상 왕국으로도 불릴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심지어 서아시아의 대식국(페르시아 및 아라비아)에서도 교역하러 찾아왔을 정도다.


2.2. 직위[편집]


자세한 구조는 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장보고와 동시기에 살았던 엔닌이 남긴 일기입당구법순례행기에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져 온다. 엔닌은 일본을 거쳐 당나라로 순례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장보고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이 기록들을 자신의 일기에 고스란히 적어두었다. # 여기서 장보고는 대사(大使)이며, 그 바로 아래에서 활동한 인물로 최훈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인물은 병마사(兵馬使)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장보고가 엔닌을 돕기 위해 보낸 부장 중 한 사람이 판관(判官)이라는 직책에 있던 남(南)씨 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큰 구조로는 대사-병마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3. 해체[편집]


하지만 후에 장보고가 신라 중앙 정계에서 벌어진 왕위 다툼에 휘말려 갈등을 겪다 끝내 841년 11월(속일본후기) 혹은 846년(삼국사기) 신라 조정이 보낸 자객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이때 리더를 잃게 된 청해진은 당나라 측 기록 번천문집에 의하면 장보고의 고향 친구이자 휘하 장수였던 정연(통일신라) 등이 잠시 맡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장보고만큼의 리더십을 보이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상당히 혼란한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후기에는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던 기록이 있다. 그리고 장보고 사후 한때 추종 세력이 정부군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위력을 두려워한 신라 귀족들에 의해 해체되었다. 결국 851년 청해진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벽골(지금의 김제)로 강제 이주당한다.


3. 사적 제308호[편집]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장도는 섬 전체가 계단식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고, 인근에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있다.

청해진은 신라 후기 장보고가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의 산동지방과 일본을 연결한 해상 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청해진유적 → 완도 청해진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4. 기타[편집]


  • 해군 잠수함 구조함 청해진함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 세워진 제주 민군 복합항의 별칭으로도 '21세기 청해진'이 쓰이고 있다.

  • 바다의 날은 청해진을 설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5. 창작물에서[편집]



5.1. 바다의 전설 장보고[편집]


파일:attachment/1265186998_pic39_big_simb663.jpg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장보고 일행의 본진이며, 시 드래곤의 모항이다. 2050년의 미래 배경이라 자동화가 되어있어서 건물이 잠수도 가능하다. 조병창이나 승무원들의 편의시설이나 숙소도 마련되어 있는 모양.

이 기지 때문에 장보고 재벌 2세설이 대두되었다. 모티브를 1에서 따왔고 장보고의 기지인 이상 반드시 나와야 했겠지만 먼치킨급이라서 어쩔 수 없는 과장 요소.

[1] 당시 일본의 승려인 엔닌(圓仁)의 기록에 따르면 왜구를 피해 안전하게 일본에서 당 제국으로 가기 위해 규슈의 항구에서 청해진 소속의 선단을 기다리는 상인을 포함한 인파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당 제국으로 가는 데도 장보고의 통제가 필요했다는 것. 이 외에도 장보고를 해상의 지배자라 칭하는 등의 기록과 당 제국에서도 엔닌이 장보고의 후원을 받아 원활히 활동하는 점에서 당시 청해진과 장보고가 중국 동해안의 신라방을 통제하고 원격 조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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