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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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17대 가한


무주 초대 황제
성신황제 | 聖神皇帝


당 고종의 계후
측천순성황후 | 則天順聖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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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624년 2월 17일
이주
(現 쓰촨성 광위안시)
즉위
690년 10월 16일
장안 상양궁 전조당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705년 12월 16일 (향년 81세)
장안 상양궁 선거전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건릉(乾陵)
재위기간
당의 황후
655년 10월 13일 ~ 683년 12월 27일
당의 황태후
683년 12월 27일 ~ 690년 10월 16일
초대 황제

제17대 가한

690년 10월 16일 ~ 705년 2월 22일
당의 태상황
705년 2월 22일 ~ 705년 12월 16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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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무(武)

조(照→曌)[1]
부모
부황 태조
모후 양씨
형제자매
2남 3녀 중 2녀[2]
배우자
태종, 고종
자녀
4남 2녀
종교
불교
신장
167cm[3]
아명
미랑(媚娘)
존호
천책금륜성신황제
(天策金輪聖神皇帝)[4]
시호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5]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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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天授, 690년 ~ 692년)
여의(如意, 692년)
장수(長壽, 692년 ~ 694년)
연재(延載, 694년)
증성(證聖, 695년)
천책(天冊, 695년)
등봉(登封, 695년 ~ 696년)
통천(通天, 696년 ~ 697년)
신공(神功, 697년)
성력(聖歷, 698년 ~ 700년)
구시(久視, 700년 ~ 701년)
대족(大足, 701년)
장안(長安, 701년 ~ 705년)
신룡(神龍, 7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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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행종도>(武后行從圖), 장훤(張萱), 당나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대당제국의 황후가 되다
2.3.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
2.4. 공포정치외척정치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
2.5. 신룡정변과 마지막, 그리고 역사의 전설 속으로
3. 평가
3.1. 내치의 경우
3.1.1. 관롱집단의 위험성
3.1.2. 고종의 무후 기용설
3.1.3. 숙청의 불가피론
3.1.4. 과거 제도와 비(非) 관롱집단의 양성
3.2. 비판
4. 가계
5. 야사
6. 여담
7. 대중매체
7.1. 영화
7.1.1. <무측천>(武則天, 1939)
7.1.2. <적인걸> 시리즈
7.2. 드라마
7.3. 소설
7.3.1. 《여황 측천무후》
7.3.3. 《강신무》
7.4. 게임
7.5. 만화
8. 같이보기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당고종의 계후이자 무주 왕조의 유일한 황제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이다.[2]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여걸이자 괴걸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손꼽히는 여군주이지만 유교 사상을 가진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허나 최초니 유일이니 하는 수사가 필요없이 당시까지 이만한 권력의 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두른 여자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통치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중국사에 길이 남을 여걸이란 점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나라를 주무른 여자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았지만 여성 본인이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사람은 측천무후가 유일무이했다. 여자가 황제로 즉위했는데도 노쇠할 때까지 아무도 들고 일어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거사가 성공(신룡정변)한 다음에도 그들의 뜻을 따라 유일의 여자 태상황제로서 천수를 다 누렸다는 점에서 측천무후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최고령(67세)으로 제위에 오른 황제이기도 하다. 30세에 황후가 되어 80세에 죽을 때까지 무려 50여 년을 권력의 정상에 계속 있었던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충분히 장수한 축에 들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오래 살았다.

이름은 '무조'(武照)로 로마자 표기를 할 경우 무측천(Wu Zetian[3])으로 쓴다. 황제 즉위 후 照와 발음이 같은 曌로 개명했다.[4]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제명은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 약칭 성신황제(聖神皇帝)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유로 황제로 인정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 등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명칭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당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던 태원군공 무사확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며,[5]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6]으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무재인이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했다. 태종이 방법을 묻자

* 철편[7]

으로 때려서 기를 죽인다.

*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철추로 후려친다.

*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른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태종이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

라고 하자, 무재인은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는 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음을 은근히 비판한 것으로, 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재인을 존중하게 되었지만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고종은 아버지가 이 때문에 무재인을 처녀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무재인과의 결혼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내세웠다.

태종이 붕어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장안 인근의 감업사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 이치의 명령으로 정2품 소의(昭儀)[8]로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했다.

당태종후궁이었다가 그 아들 당고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 황실이 원래 선비족한족혼혈이라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유목민족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거나 형사취수제를 함이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사마천은 《사기》 <흉노 열전>에서 중항열의 입을 빌어

"전쟁으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보니 집안의 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

이라고 설명했는데 그냥 여자를 가축과 같은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하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다 보니 부자, 형제간 상속 내지 양도가 가능하다고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방 유목민족의 이러한 풍습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오는 재산 때문이었다. 중국과는 다르게 여성의 재혼이 가능하기에 가지고 온 재산을 다시 내놔야 했으므로 이러한 불이익을 막기 위하여 생긴 일이었다.

비슷한 예로 칭기즈칸은 정실 보르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복된 부족 여성들을 첩으로 삼았는데 칭기즈칸 붕어시 이들 중 일부에게 약간의 재산을 상속해주었을 뿐,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이들을 첩으로 삼았다는 말이 없다. 또 유목민은 반대로 여권이 상대적으로 좋기도 했다. 예시로 백등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한고조 유방에게, 흉노의 묵돌 선우는 여자에 약하다며 묵돌의 연지(부인)를 설득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정작 묵돌은 자기 애첩도 거리낌없이 죽여버린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묵돌이 여자에 약하다는 것은 흉노 사회가 여권이 상당히 높았고, 때문에 묵돌 역시도 여자(부인)의 말을 아주 무시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9]


2.2. 대당제국의 황후가 되다[편집]


이 무렵 고종의 정후(正后)인 황후 왕씨[10]와 후궁인 숙비 소씨의 사이에 암투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무소의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 즉위하게 된다.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반대했던 장손무기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 대신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그 정치적인 능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나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린 일은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는 예이다.

정사에 정력적이지 못한 유약한 황제가 장손무기 등의 원로대신을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당태종의 후궁으로 오래 황실에 몸 담았던 점, 왕황후와 소숙비의 암투 속에서 황후 자리를 쟁취한 점 등을 보아 황제보다는 무황후가 원로대신을 처리했다고 봐야 한다. 무씨 일족의 대두 역시 아버지 무사확은 이미 사망했고, 이들을 중용한 것은 고종이었다. 그리고 무삼사 등의 능력은 제법 유능했기에 이들의 임용에 대해서 별다른 반발이 있지도 않았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

라고 무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아무 이유 없이 쥐로 환생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무후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귀신이 되어 복수하겠다!!"

라는 말에 죽인 다음 시체의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갔다. 일설로는 산 채로 사지를 잘라 술독에 빠뜨려 죽였다고도 한다. 그후에

"술 취한 귀신이 과연 날 찾아올 수 있겠느냐?"

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덧붙여 고종이 왕황후를 쫓아내고 무후를 황후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는 무후의 어린 딸 안정공주가 황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왕황후가 정말로 안정공주를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후가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했다는 쪽으로 중론이 쏠려 있다. 안정공주는 단순히 유아 돌연사했을 뿐이고, 그 시기가 하필 왕황후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황후가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무후가 갓난 안정공주를 목 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덮어씌웠다는 주장도 있다.[11]


2.3.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편집]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고종은 무후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12]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였다. 이세적은 농민 출신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 우지녕 등의 관롱귀족이거나 고위문신들에게 배척받았던 사람으로 무측천의 정권 장악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엔 유골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지는 형벌을 받지만 이건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몄다가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13]

그후 자신의 차남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되었다. 무후는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훗날의 당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당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고종이었다. 무측천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면 반대파가 재상직까지 올라오는 꼴을 놔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종이 붕어한(683) 이후 황태자 이현(李顯)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라는 초대형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폐위당했다. 이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자른 건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684)[14] 중종의 이 발언이 얼마나 정신나간 헛소리인지는 중종 문서 참조.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당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이 일으킨 반란이다.[15]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16]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17]

드디어 남성 중심의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황제의 시대가 출현한 것이었다.


2.4. 공포정치외척정치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편집]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했는데,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혹리(酷吏)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고 제위를 차지하자 사냥개 역할을 하던 예조프 내준신과 삭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이었다.

친정 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 이래 최초였을 정도였다. 측천무후가 조카무승사무삼사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말은 했지만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8]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무주의 치). 혹자는 무후가 다스린 시기의 내치는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때 맞이한 개원의 치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북주(北周)-(隋) 제국 관롱집단들보다는 넒어졌지만, 여전히 협소한 범위의 문벌귀족 집단으로 정계의 고위직을 독점하던 현상을 해소하고, 수나라 시기 시범적으로 도입되던 과거 제도를 점차 확대시행하여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과거 급제 출신들이 주류를 차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심지어 이 시기에 여권이 크게 신장되어 일처다부제가 실시되기도 했었는데, 거대 제국들 중에서 이런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데, 무후 시절 '초당 4걸'에 들 정도로 걸출한 문인 낙빈왕이 <토무조격>(討武曌檄)이라는 격문을 지어 이경업 거병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고 이 글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낙빈왕이 썼다는 말을 듣자 재상에게

"왜 진작에 이 사람을 나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나? 이런 인재를 내가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

라며 낙빈왕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하며, 낙빈왕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모아 엮도록 했다. 즉위 후에도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를 보면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예기》(禮記)와 더불어 문장으로 본받아 쓸 만한 것을 요청하자 담당 관청에게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의 사본을 제작하고, 《문관사림》(文舘詞林)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들을 골라 뽑아 50권으로 엮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온 왕자 김인문이 694년에 사망했을 때는 부음을 듣고 수의와 관작을 보낸 뒤 김인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의 영구를 신라로 호송하도록 명령했으며, 또한 702년 제32대 효소왕이 붕어한 것을 전해듣고 애도 차원에서 2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소왕의 왕제로 뒤를 이어 즉위한 왕자 김융기[19]에게 효소왕의 계승을 승인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2.5. 신룡정변과 마지막, 그리고 역사의 전설 속으로[편집]


하지만 699년 이후 장역지, 장창종 등 측근 관리에 실패해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당 황실의 충성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넣게 된다. 이에 무후는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고, 무주는 1대만에 멸망하며, 당나라 농서 이씨 황실이 복벽했다.

놀라운 것은 보통 비정상적으로 제위에 오른 사람이 퇴위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고 측근들도 숙청되는 게 보통인데, 이때는 신하들이 거사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에게 당을 부활시키고 태상황제로 물러나면 더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이는 무후가 이미 병이 깊어서 오래 살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측천무후가 당중종과 당예종의 모후이며 당현종의 친조모라는 점이 가장 컸다. 아무리 측천무후가 당을 멸망시킨 역적이라지만, 당나라 부활 이후 황제들이 전부 고종과 측천무후의 직계였다. 무후에게 그 이상의 처벌을 가한다면 신정권이 친어머니를 핍박한 패륜아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이후 황제들이 대대로 역적의 자손이 되어 정통성 시비까지 벌어지는 빌미가 될 수 있었으니 처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 측천무후가 순순히 물러나준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본인이 제 발로 물러났는데 이후에 누가 무주 재건을 외치겠는가. 즉 위의 조건에 측천무후가 순순히 퇴위하여 뒤에 벌어질 불씨가 없어지니 이들도 부담없이 측천무후를 살려주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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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권좌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해 말 측천무후는

"황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긴 채 붕어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를 두고 '내 삶에 대한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겸허함으로 보는 해석과 '내 공적은 너무도 커서 이런 작은 비석 따위에 다 새기기도 모자란다.'는 자뻑으로 보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어쩌면 둘 다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겸손한 척하면서 자뻑하는 '무자 공덕비'는 측천무후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중국 역사상 몇몇 인물(대표적으로 명신종 만력제)도 남겼다. 또한 자신이 모함해 죽인 폐후 왕씨 일가를 복권시키라고 태자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아무튼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그래서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20]

측천무후 관련 포스트


3. 평가[편집]


치세와 난세는 시세요, 존재와 멸망은 형세이다. 만일 걸주(桀紂)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아무리 요임금(堯)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만일 요순(堯舜)이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비록 걸왕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어지럽히지 못한다. 여자가 겁이 많은 사내를 부리고, 적당한 때를 타서 세력을 얻고, 또한 백성의 생명을 가볍게 다스리기에 족하여, 방종하게 불의의 위세를 행사하였다. 무릇 무씨가 칭제한 해를 보고 있자면, 탁월한 재주를 지닌 자가 많았고, 가족과 헤어짐에 괴로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으며, 조정의 위기에 분하여 주먹을 쥐었지만, 선제의 은혜에 능히 보은하지 못하며 임금의 자식을 지켰다. 이윽고 무고한 이들이 모함을 당하고 목을 내밀어 주륙되었으며, 천지를 삼태기로 삼았으니, 과거가 어찌 편안하였는가? 슬프구나! 옛날 여자의 참언은 옛날에 해악을 칭했고, 짐승과 같은 이의 독은 대대로 재앙을 낳는다. 무후는 적자의 지위를 빼앗을 때, 목구멍을 바짝 조르고 갓난아이들의 숨통을 끊었으며, 죄인의 시체를 젓갈에 담그고 후비의 뼈를 잘게 부수었으니, 그 부도덕함이 매우 심하였고, 또한 간사한 자가 여자의 상태를 강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치에 바른 언론이 널리 퍼지고 그 시대의 올바른 인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비록 부인이 전권을 맡았지만, 종국에는 능히 아들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세간에 떠도는 말이 위원충의 죄를 바로잡았고, 교묘한 언사가 적인걸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시헌을 높이고 총신을 억누르며, 충언을 듣고 혹리를 주벌하였다.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나라와 백성에 재앙을 끼치는 여자가 얼굴을 바꾸고, 태자궁에 태자가 창성하였다. 어찌 창천이 되어, 이런 기허(夔魖)를 낳았는가? 제위를 강탈하고, 황거를 더럽혔다. 요사스러운 흰 머리가 다하니, 어떻게 아랫사람의 형편을 굽어 살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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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내치의 경우[편집]


사실 측천무후 역시 몇몇 여성 지도자들처럼 붕어한 후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긍정적인 면은 거의 감춰지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무후에 대해서는 영 부정적인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잔인한 숙청공포정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롱집단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무후의 잔인함은 자신의 성격보다도 당시 시대 상황이 무후의 성향과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3.1.1. 관롱집단의 위험성[편집]


관롱 세력의 위협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애초에 남북조시대부터 이어져온 거대 세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당제국은 모양새만 한족 국가인 사실상의 호한 연합 정권[21]으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애초에 당 왕조의 전신이었던 왕조가 허망하게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을 위시로 한 거대 세족들의 반발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족을 숙청하는 일은 당 왕조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였다.

정관의 치라고 추앙받는 태종 이세민의 시기에도 장손무기 등을 위시로 한 세족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들을 속칭 무천진 군벌이라고 부르는데, 명신으로 칭송받는 위징조차 그런 세력들과 인척을 맺으며 신경을 쓸 정도였다. 태종 말년부터 당나라의 정치 체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으며, 정관의 치에도 불구하고 중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생산력 또한 수문제 시절의 개황성세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다. 이건 당태종이 잘못한 게 아니라, 수양제가 워낙 제대로 말아먹은 탓에 수습이 안 된 것이었다.

게다가 고종 또한 강인한 성격이 못되어, 측천무후에게 숙청과 부패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숙청이 피비린내난다고 하지만 제왕에게 요구되는 점에는 비정함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국 이후 수성에 있어 왕조의 안정을 위한 질서를 다잡아야 한다는 걸 상기하자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시점에 강인한 성격의 측천무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결국 더러운 일을 자기가 다 맡아쓴 셈이다.


3.1.2. 고종의 무후 기용설[편집]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고종의 역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고종이 체력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측천무후가 고종의 협력관계 내지는 동조없이 무천진 군벌을 등에 업은 황후 왕씨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는 것 때문에 측천무후가 고종을 쥐고 흔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숙종장희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고종 입장에서 무천진 군벌 정리를 위해서 측천무후를 기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22] 실제로 무천진 군벌 축출은 측천무후의 입궐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측천무후는 절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고종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서 수시로 쓰러졌기 때문에 사실상 고종과 측천무후의 협치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것도 수나라 문제가 보여준 장면이었다. 수와 당 초기처럼 북방 계통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나 종종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고종이 상관의를 통해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상관의가 잘리고 무후가 고종을 협박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고종이 무후의 목줄을 부여잡은 것이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더욱이 고종이 그 당시 골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권의 진공 상태를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후는 이후 고종에게 한동안 허리를 굽혔다.

게다가 고종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황후이자 보조자에 불과했던 탓에 고종의 첩들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죽일 만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죽였다는 첩들 외에도 고종에게는 여러 첩들이 존재했다.[23]

고종 사후에야 여러 남첩들을 들였으나 그들이 정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다. 다만 무측천 재위 말년에 통치력이 쇠퇴한 시점부터는 이들 남첩들이 궁중을 장악하면서 점차 입김을 늘려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1.3. 숙청의 불가피론[편집]


이런 입장에서 보면 측천무후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청나라의 제5대 세종 옹정제처럼 특권 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 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 세력을 대신하여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매력없고 잔혹하며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고,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24]

당제국의 사실상의 창건자가 태종이고, 고종 시절부터 무후가 통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후는 실질적인 당제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조선의 경우 태조 이성계가 창업군주, 정종 이방과를 징검다리라고 치면 실질적으로는 제2대째인 태종이 숙청과 사병 철폐 등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제3대째인 세종대왕이 조선의 기틀을 잡은 것이 된다. 반면 수문제는 제1대 황제로서 굉장한 업적을 이룩하고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제2대 수양제가 나라를 말아먹어서 박살난 것을 생각해보면 측천무후의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는 시대의 필수적인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측천무후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무후의 권력은 고종 사후에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도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황후나 태후라는 위치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권력 유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측천무후에게는 정치적인 배경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고종과의 연계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에야 절대권력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되나 그 시기는 700년 즈음으로 무후 통치기의 말년 중의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또한 혹리들도 고종이 붕어한 683년부터 즉위하는 690년까지만 활동했을 뿐, 즉위 직후에 대부분 숙청했으니 측천황제의 시대가 "공포정치"라는 것은 좀 거리가 있다. 게다가 측천무후를 까는 또 한 가지의 요소인 "음탕한 년" 혹은 "요녀"로써의 이미지도 과장된 것이 많다. 특히 측천무후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공식 기록상에서는 살해된 후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사료를 교차비교를 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3.1.4. 과거 제도와 비(非) 관롱집단의 양성[편집]


과거 제도의 완성이자 황권의 강화책인 전시를 역사상 최초로 시행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 제도의 전시 시도와 더불어, 인재 등용을 위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제도를 제시하여 시행했다.

  • 첫째,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 둘째, 무거(武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선발했다.
  • 셋째, 시관(試官) 제도를 시행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했다.
  • 넷째, 측천무후는 사회 최하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하층에서도 당나라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여럿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다섯째,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다.
  • 여섯째,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때 뽑혀서 측천무후의 친위집단이 된 것이 북문학사(北門學士)였다.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이 원래 예법이었는데, 북문을 통해 몰래 측천무후의 정치적인 브레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북문학사'였다. 더불어 훗날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현종의 치세를 이룩하게 한 기본적인 시스템과 요숭, 송경 등의 인재 풀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위 계승에서 태평공주가 아닌 현종을 지지한 게 바로 이 신진 비관롱집단이었다. 이런 면에서 측천무후는 최소한 용인과 정치력 자체는 발군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전시는 당중종의 복벽으로 폐지되는 바람에 전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북송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3.2. 비판[편집]


측천무후는 비교적 성공적인 내치에 불구하고, 외치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당제국의 최대 강역을 이룩한 고종 사후부터가 문제였다.[25]

무후의 시대는 북방 민족과 수많이 싸웠지만 대체적으로 영향권과 영토가 크게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쪽의 토번(티베트)에는 가르친링으로 대표되는 대당 강경 정권이 들어서면서 하서의 패권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며 대비천 전투, 승풍령 전투, 인식가 전투, 소라한산 전투 등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682년 돌궐 제2제국(후돌궐)이 골돌록가한(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부활했으며, 691년에는 묵철가한(카프간 카간)이 즉위해 쿠차와 사주(돈황)의 (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한창 때는 하북은 커녕 산동까지 털리는데도 손을 쓰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696년 거란이진충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1차에 180,000명의 대군을 투입했다가 황장곡 전투에서 깔끔하게 괴멸되었고, 2차로 300,000명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는 진압을 못해서 돌궐 제2제국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그나마 698년에 돌궐 제2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곧바로 동북방의 거란족과 해족이 재독립하며 요동요서의 통제력을 상실한 걸 보면 진압한 이후의 통제조차 혼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거란의 반란을 틈타 나라를 세우겠다며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했지만 천문령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토록 많은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어 간신히 멸망시킨 고구려가 발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는 것을 지켜보는 처지가 되었다.

군사적인 실패의 이유도 그녀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관롱집단을 숙청하던 와중에 정무정[26], 왕방익[27], 흑치상지 등의 양장들이 숙청당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측천 일가가 군사적으로 무능했다.[28] 대표적으로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하내왕 무의종, 건안왕 무유의, 설회의 등이다. 먼저 무삼사의 경우, 영주 반란 제1차 진압군 파견 당시 유관도안무대사에 있었다. 선봉인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 몽땅 포로가 된 뒤 연비석과 종회창의 군대가 몰살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자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했다. 무의종의 경우에는 낙무정 산하의 거란군이 조주에 있는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은채 상주로 달아났고, 조주가 거란군에게 도륙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29] 무유의의 경우에는 그의 소속이었던 청변도행군대총관 왕효걸이 죽는 등 악재가 있었다.[30] 심지어는 북송 시기 거란, 즉 요나라가 강대해진 것이 무측천 때문이라는 과장도 나왔다.

다만 이런 사태의 책임을 측천무후 한 명에게 모두 떠넘김은 부당하다. 태종과 고종의 치세에 당나라는 한족 문화 국가로서[31] 최대 판도를 구축하고, 이민족들을 기미체제로 편성했다. 하지만 이들 이민족들이 완전한 야만족도 아니고 돌궐, 고구려 등 국력이 통일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한들 중국에 맞선 강력한 국가를 이룬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비록 당군에 패배하여 기미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기미체제가 불안정해지면 얼마든지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기미체제의 불안정한 조짐은 다름아닌 당고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가 이를 막지 못했긴 했지만, 측천무후 한 사람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측천무후의 긴 치세는 여러 문제점을 남겼는데 새로 뽑힌 신진 집단이 측천무후의 개인 숭배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후계를 튼튼히 할 수 없었다는 여제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측천무후 사후 당나라는 다시 한 번 계승 문제로 혼란에 시달려야 했다.(경룡정변, 당륭정변, 선천정변) 더구나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가 고종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측전무후 때 완전히 붕괴되었는데 외치의 실패는 이런 결과일 뿐이다. 부병제가 붕괴하자 군사적인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당현종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했으니 바로 군진체제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번진(藩鎭)과 절도사가 등장하고, 안사의 난이 일어나며 당 왕조는 서서히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으로, 나아가 오대십국시대로 접어들었다.


4. 가계[편집]



가족사가 조금 복잡한데 아버지인 무사확과 전처인 상리씨 사이에서 나온 형제 두 명인 무원상과 무원경이 있었고, 이후 무사확과 양씨가 재혼해 언니인 한국부인[32]과 여동생인 무씨가 있었다.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관덕친왕 양웅의 조카딸이자 시안공후 양사달의 막내딸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훗날 무측천이 황후가 되자 '영국부인'에 봉해졌다가 죽은 뒤 '노국부인'으로 봉해져 시호를 받았고, 함양에 안치되었으며 무측천이 이미 죽은 아버지를 '태원군왕'으로 봉하면서 어머니를 그곳의 왕비로 올렸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들은 어머니에게 눌려 있었던 탓에 이후에도 기를 잘 펴지 못한건가 싶을 정도로 황제답게 혼자 정권을 쥐고 있었던 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장남인 이홍의 경우,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뜻을 자주 거스르다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차남 이현의 경우, 역시 어머니에게 밉보였다가 쫓겨났다. 3남 중종 이현은 예전부터 유약했다고 하며 복위한 뒤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사를 처리하는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했다. 이런 아들들에 비해 중종의 딸이자 측천무후의 손녀인 안락공주나 측천무후의 막내딸인 태평공주는 권력욕이 강했다고 한다. 안락공주는 어머니 위황후와 손을 잡고 자기 친아버지인 중종을 만두로 독살했을 정도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평공주는 성격이나 재능면에서 측천무후와 닮은 점이 많아서 측천무후가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중종보다 자기가 황제에 어울린다며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하자

"네가 뛰어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또 여자가 황제가 되려면 신료들을 또 다시 대숙청해야 할텐데 나도 그렇게 황위에 올랐지만 그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세도는 남아 있어 4남 예종 이단이 복위한 건 여동생 태평공주와 후에 현종이 된 아들 이융기 덕이 크며 예종이 재위한 동안은 거의 태평공주가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33] 측천무후의 판단은 적중하여 태평공주는 결국 나중에 황제로 즉위한 조카와 암투를 벌이다가 져서 자신은 물론이고 일파까지 대숙청당했다(선천정변).


5. 야사[편집]


  • 유명한 관상가인 원천강이 무사확의 집에 들렀다가 갓난아기였던 무측천을 보고 봉황의 목과 용의 눈을 지닌 귀한 상이며 여자아이라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34]

  •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후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한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당태종 당시 좌무위장군을 역임했던 이군선(李君羨)이었다. 능력있는 인물이었는데도 화주자사로 강등된 뒤 반역죄로 죽었는데 바로 <여주무왕>의 예언과 더불어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낙주(洛州) 무안(武安) 출신으로 아명이 '오낭'(五娘)이었으며, 군벌 유무주(劉武周)를 토벌해 무련현공(武連縣公)에 봉해져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을 수호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무'(武')자가 많고, 아명에 '낭'(娘)이 들어가는 바람에 당시 <여주무왕>의 예언을 전전긍긍하던 당태종에게 찍혀서 <여주무왕>으로 지명되어 죽었다. 훗날 그의 가족들이 탄원을 올려 이군선은 명예회복이 되었고 관직까지 돌려받는데, 얄궂게도 이군선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사람이 <여주무왕>의 당사자였던 측천무후였다. 다만 이 이야기가 단지 야사일 뿐이라는 말도 있다.

  • 용수나무에 얽힌 일화가 있다. 측천무후가 어느 날 가마를 타고 산책을 나갔을 때,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져서 시종들이 모두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때 측천무후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용수나무를 보고 비를 피했다. 그때 무후는 용수나무 앞에 향을 피우고
"어느 날 뿌리가 마르고 손님이 주인이 되리라."
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이씨 왕조 대신 무후가 황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후 모든 사찰에 용수나무를 심고 받들라 명했다고 한다.
용수(龍樹) 즉 용화수나무에 담긴 불교적인 의미와도 관련이 깊다. 불경에 따르면 미륵보살이 마지막 부처로써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세 번 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 불교를 숭상했던 측천무후 자신이 미륵의 화신임을 강조하고자 내세운 프로파간다 가운데는 《대운경》이라는 불경에
"미륵의 화신인 정광천녀(淨光天女)가 중생을 구제한다."
라고 언급한 부분도 있었는데, 《대운경》을 토대로 여자로서 즉위한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필연적인 일로 굳히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대운경》을 전국에 뿌리면서 각 지역마다 '대운사'라는 절을 새로 짓게 했으며, 이 제도는 일본에 전해져서 쇼무 덴노(제45대)의 '고쿠분지' 건립에도 영향을 주었다.[35] 측천무후의 즉위나 통치를 반대했던 세력(특히 유학자)에서는 측천무후가 자기의 통치를 위해 아예 위경 하나를 새로 지어냈다고까지 몰았고, 오늘날에는 《대운경》 자체는 위경이 아니라고 보는 반론도 나와 있다. 아예 가짜 경전을 지어냈든 원래 있던 경전의 내용을 끌어온 것이든 측천무후가 불교를 자신의 정치에 끌어들여 입지를 굳히려고 한 것만은 틀림없다.

  • 측천무후의 성욕이 엄청나 남첩 3,000명을 뒀었다는 하렘 드립도 있는데, 측천무후를 포함한 여성 권력자 관련 섹드립은 이런 식으로 비상식적인 드립이 많다. 측천무후 후대인 손자 현종에게도 40,000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의 동시대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봐서는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36]

"여왕이 통치한다"
며 조롱하더니 정작 자기들은 여제가 나온 것에 더해 나라 이름도 잠깐 갈아엎어졌음을 보면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37]


6. 여담[편집]


  • 측천무후는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재위 시절 중, 민가에서 엄청나게 큰 가 나와서 그녀에게 진상했을 때, 측천무후는 황실 요리사에게 무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요리사는 무를 채 썰어 녹두 가루를 묻혀 볶은 후, 오징어, 새우, 살코기를 넣어 측천무후에게 바쳤다. 이 요리를 그녀가 가연채(假燕菜)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식습관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비타민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했으며, 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측천문자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만든 글자, 즉 한자 몇 개를 더 만든 셈이다. 이들 문자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 많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측천무후 시기가 끝난 뒤로 사멸해갔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스스로를 노자 이이의 후손을 자처하고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와 달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에 한 몫을 거든 건 그녀의 내연남인 풍소보로, 미륵 신앙을 이용해 측천무후를 떠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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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로 낙양 근처에 있는 룽먼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위의 초상화와 비교해보자.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 불경을 읽을 때 해당 불경을 찬미하기 위해 서두로써 읽는 <개경게>(開經偈)는 측천무후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無上甚深微妙法 (무상심심미묘법) 무상(無上)의 깊고도 깊은 미묘한 법은
百千萬却難遭遇 (백천만겁난조우) 백천만 겁이 지나도 다시 뵙기 어려워라.
我今聞見得受持 (아금문견득수지) 나 지금 듣고 보고 받아 지니고자 하오니
願解如來眞實義 (원해여래진실의) 바라건대 여래께서 진실한 뜻을 풀어 주옵소서.

  •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 명칭을 갈아치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다. 3성 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나라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연호로 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기간 동안 연호를 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는 큰 재미를 못보다 보니, 재미있게도 최초의 판다 외교를 시도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측천무후는 두 마리의 판다를 일본에 선물로 보냈다. 요동(발해), 동(신라), 서(토번), 북(돌궐)까지 당나라의 군사 영역이 크게 축소되다 보니, 동부의 신라와 발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외치의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나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방향이라고 할 만한 북쪽에는 돌궐 제2제국, 서쪽에는 토번, 동북-동해에 이르는 영역에는 발해-신라가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제각기 한꺼번에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연이은 참패로 군사적인 역량이 꺾인 당나라로서는 그 큰 땅덩어리가 도리어 악재로 작용하여 사방의 국경 지대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그 자존심 높은 중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다급한 화친 의사를 보낸 것이 아니다. #

  • 한국에서 그녀에 대해 안 좋은 평을 한 최초의 인물은 고려 중기의 김부식이었다. 심지어 조선 초기의 권근
"당태종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했기에 측천무후가 중국에 나왔다"
고 비난했다. 사실 좀 알고 보면 권근의 이야기가 웃긴 셈인데, 맨 처음에는 당태종이 오히려 사람을 보내어 대신 통치하도록 하려고 했고,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른 것과 당태종은 큰 관계가 없다.[38][39]

  • 측천무후 이후로 중화권에는 서태후 등 실권자를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여성 최고 지도자가 나오지 않다가, 2016년 대만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함으로써 무려 1,311년만에 공백이 깨지게 되었다.

  • '관중 18릉'이라고 하는 당나라의 자연적인 산을 능침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으로는 5대 10국 시기의 온도가 건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했다고 하며, 건릉을 탐사해본 결과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 현재로서는 안정공주나 태자 이홍의 사망이 측천무후의 짓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정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간다효 같은 전문성 없는 자칭 역사 유튜버는 물론, 심지어 전남대 사학과 이성원 교수처럼 나름 전공자라는 대학 교수마저도 벌거벗은 세계사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마치 정설인 것마냥 소개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이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정도로 무고하지는 않더라도[40] 측천무후로서는 억울할 법하다.


7. 대중매체[편집]


  • 여성으로 황제까지 등극한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인생을 살아온 그녀기에 그녀를 소재로 한 드라마영화가 정말 많다.


7.1. 영화[편집]



7.1.1. <무측천>(武則天, 1939)[편집]




7.1.2. <적인걸> 시리즈[편집]


  • 서극 감독의 영화 <적인걸> 시리즈
    • 1편 <통천제국>[41]: 황제 즉위 직전으로 나오는데, 많은 반발을 무릅써가며 여인의 몸으로 황제가 되려는 이유가 나온다. 주류 귀족과 달리 아버지 무사확은 부자였다가 수당교체기을 잘 잡아서 벼락 출세를 했고 문벌귀족 중에서 역사가 짦아서 귀족 사회에서 최하층에 속했다.[42] 무측천은 10대 초반에 화려한 황궁에 들어와서 그 곳에서 벌어지는 궁중 암투에서 발버둥치며 살아남으려고 하다가 서서히 권력을 탐하게 되어간다.[43] 황제인 남편건강 문제로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자 국정에 관여하여 영향력을 강화하다가 남편 사후 들마저[44] 꼭두각시로 만들고 마침내 황제가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1편 후반부에서 보인 눈물을 보면 무측천도 욕심이 있든 없든 결국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최종적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구중궁궐이 만든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조위의 부인 유가령이 배역을 맡았는데, 황후와 황태후을 이미 거쳤고 이제 제왕이 되기 직전인 상태의 포스를 장난아니게 보여준다.
    • 2편 <신도해왕>: 남편 고종이 아직 살아있어 황후였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온다. <신도해왕>의 엔딩 후 짤막하게 나오는 에필로그에서 적인걸 일행에게 차를 대접하고 차를 다 마시자 해독제를 가져오라는 장면이 나오는데[45] 의심이 보통이 아닌 정도를 넘어 신뢰를 전혀 하지 않는 수준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7.2. 드라마[편집]



7.2.1. <일대여황>[편집]


파일:external/a1.att.hudong.com/01300000258678123596047186381.jpg
1985년 대만 드라마 <일대여황>에서의 측천무후

  • 드라마 <일대여황>[46]과 <일대공주>[47]#에서 보여준 넘사벽의 측천무후의 포스로도 유명하다. <신조협려>에서 보여진 것과 달리 여기서는 그야말로 순수한 소녀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냉정하고 정치적인 여자로 바뀌는 과정을 200% 잘 보여주었다. 특히 옥좌에 앉은 저 포스는 가히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포스. 이 이전과 이후에 측천무후 역할을 맡았었던 풍보보(馮寶寶), 유효경(劉曉慶), 가정문(賈靜雯), 귀아뢰(歸亞蕾) 등과 비교해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단, 한국 한정으로 반영자의 <측천무후>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중화권에서 다른 배우들을 압도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실제로 측천무후를 연기한 이들은 당대에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었으며 고르게 인기가 많았다. 다만 반영자가 주연한 <일대여황>이 최초로 측천무후를 다룬 드라마라서 인지도가 가장 높다. 우측의 링크는 역대 측천무후 드라마와 주연 여배우들의 소개와 인기에 대한 소개이므로 참고할 것. # 또한 2014년 판빙빙이 측천무후를 연기한 <무미랑전기>의 경우, 연출 기술의 발전, 배우들의 외모 및 연기력, 고증 등이 종합적으로 인정받아 중화권을 넘어 한국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측천무후 드라마는 판빙빙이다. 우측의 링크의 중국 언론에서 역대 무측천 배우들을 비교하며 분석을 했는데 판빙빙을 최고의 여배우로 선정했다. # 이러한 인기를 인정받아 판빙빙은 2017년 당대 최고의 측천무후로 선정되어 최초로 측천무후를 연기한 반영자와 한 무대에 올랐다. #

  • 이는 상단의 링크에도 소개된 중화권 제도 언론의 기사를 전제로 내용으로 하면 중화권 내에서 측천무후를 맡은 반영자의 인기는 최초의 측천무후를 연기한 것으로 인지도가 있는 정도는 아니다. 단, 기사에서도 반영자의 <측천무후>를 본 세대에서는 여전히 반영자의 <측천무후>를 최고로 치기도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오히려 해당 기사들에서는 반영자 전후로 측천무후를 연기한 배우들인 유효경(劉曉慶)과 귀아뢰(歸亞蕾), 가정문(賈靜雯), 범빙빙(范冰冰)을 비교했으나 반영자의 연기력을 다른 여배우들보다 높다고 평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1대 측천무후 여배우를 한 공로를 높게 평가했다. 오히려 유효경(劉曉慶)은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1995년 드라마 <무측천>과 2006년 <일월능공>[48]#에서 측천무후를 두 번 맡았다며 크게 호평했고, 귀아뢰(歸亞蕾) 또한 금마장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파 배우라 인기가 높다고 평가했다. # 이중에서 여배우의 외모와 연기력과 중화권 내 시청률을 근거로 최고의 측천무후로 평가된 여배우는 판빙빙이었다. 단, 가정문(賈靜雯)이 연기한 측천무후도 배우의 외모와 연기가 좋아 인기가 있었다고 평가했으나 지나친 각색으로 측천무후를 선역으로만 미화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이는 <무미랑전기>도 마찬가지였다. # <일대여황>의 속편급인 <일대공주>에서의 연기도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다. 어머니와 딸의 1인 2역[49]을 한다는 것을 캐치프레이즈 삼아 예고편 및 비디오 표지 등에 SBS에서 방영한 <측천무후>의 반영자가 딸 태평공주도 연기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한국에서 상당히 흥행했다.


7.2.2. <연개소문>(2006)[편집]


배우 장은비가 연기했다. 그러나 극 중 후반에 나오는데다가 비중이 별로 없다. 그냥 별 거 없는 악녀인데 사실 한국 사극의 조연 측천무후는 중국 문화권의 주연 측천무후와는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무조'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고구려백제멸망시키는 주 원인이다.


7.2.3. <대조영>(2007)[편집]


파일:당나라측천무후1.jpg
파일:당나라측천무후2.jpg
당고종의 황후 시절
황제 즉위 이후



7.2.4. <무미랑전기>(2014)[편집]


파일:external/moviepic.manmankan.com/1654_7124.jpg
측천무후를 주인공으로 한 판빙빙 주연의 <무미랑전기>가 중국 후난 TV에서 방영되었다. 포스나 아름다움은 뒤쳐지지 않고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측천무후의 일대기보다는 궁중 암투와 로맨스에 중점을 두어서 사람 보기에 따라서 스토리가 진부할 수도 있다. 복장 관련해서 특히 위의 포스터를 보면 기모노 아니냐는 생각이 들법도 한데 사실 저 포스터상의 복장이 당대의 복장이라 비슷하게 보일 뿐으로 반일 감정이 강한 중국에서 일본 전통복을 중국 전통복으로 하는 무리수를 둘 리는 없다. <무미랑전기>는 제작비의 대다수를 인테리어나 의복에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고증을 거쳤으며 당나라는 개방적이던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몸을 싸매는 스타일과 달리 지위가 높을수록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고 한다. 얇은 비단천으로 몸을 가린 하늘하늘한 복식의 형태였는데 <무미랑전기>를 보다 보면 은근히 눈이 즐겁다.(...) 모든 한푸가 이렇지는 않고, 한푸라도 시대마다 나라별로 스타일은 조금씩 다른데 유난히 당나라 복식이 노출이 심한 편으로 너무 고증을 잘 살렸다가 중국의 과잉 검열에 걸려서 송출이 중단되거나 얼굴만 클로즈업되어 방송되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고증에 맞지 않는 것은 당시 귀걸이를 안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한 정도다.


7.2.5. <호텔 델루나>(2019)[편집]


2019년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과거 배경이 측천무후의 통치 기간으로 등장한다. 정확히는 대조영이 동모산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던 시기이다. 안타깝게도 배경적인 요소인지라 측천무후 본인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7.3. 소설[편집]



7.3.1. 《여황 측천무후》[편집]


서양권에서는 중국계 여류 소설가인 샨사가 쓴 소설 《여황 측천무후》가 히트를 치면서 명성이 특히 커졌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측천무후는 그야말로 먼치킨이다. 그 포스가 가히 당 태종도 말아먹을 기세이다. 한국 소설로는 경향신문에서 연재했던 유현종의 《낙양성의 봄》이 있다. 같은 작가의 《패왕별희》와 마찬가지로 찐한 베드신이 자주 나와서 재미가 쏠쏠하다.


7.3.2. 《역사를 만든 여왕 리더십 시리즈[편집]


6권, 시즌 2의 첫 여왕 주연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하고는 달리 후궁 책봉 이전부터 '미랑'이라는 이름이다. 이치 황제와의 결혼, 황후 등극까지가 배경으로, 현대의 냉정한 철혈군주 이미지는 나오지 않고, 유년기의 긍정적이고 활당한 성격의 캐릭터로 나온다.


7.3.3. 《강신무》[편집]


서반석 작가의 퓨전 판타지소설 《강신무》 2부 장안편의 보스로 나온다. 단, 서태후의 요소와 요괴라는 설정이 붙어있다.


7.4. 게임[편집]



7.4.1. <문명 시리즈>[편집]




7.4.2. <Fate/Grand Order>[편집]


4성 어새신으로 출현했다.


7.4.3. <도미네이션즈>[편집]


측천무후의 머리 장신구가 유물로 등장하며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니버시티/황후 측천무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4.4. <삼국지 14>[편집]


파일:측천무후 삼국지 14.jpg
삼국지 14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14>에서 '무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43/38/88/83/78이며 개성은 허실, 책사, 안력, 악명, 오만이고 전법은 짐독, 도발, 혼란이다.


7.5. 만화[편집]


일본의 판타지 만화 마녀대전에서 잔다르크와 대전했다.


8. 같이보기[편집]




9. 둘러보기[편집]


구당서(舊唐書)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a48252><width=33%><-2> 1권 「고조기(高祖紀)」 ||<width=33%><-2> 2·3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2> 4·5권 「고종기(高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연(李淵) ||<-2> 이세민 ||<-2> 이치 ||
||<-2> 6권 「측천황후기(則天皇后紀)」 ||<-2> 7권 「 중종·예종기(中宗睿宗紀)」 ||<-2> 8·9권 「현종기(玄宗紀)」 ||
||<rowbgcolor=#fff,#191919><-2> 무조 ||<-2> 이현(李顯) · 이단 ||<-2> 이융기 ||
||<-2> 10권 「숙종기(肅宗紀)」 ||<-2> 11권 「대종기(代宗紀)」 ||<-2> 12·13권 「덕종기(德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형(李亨) ||<-2> 이예(李豫) ||<-2> 이괄 ||
||<-2> 14·15권 「순종·헌종기(順宗憲宗紀)」 ||<-2> 16권 「목종기(穆宗紀)」 ||<-2> 17권 「경종·문종기(敬宗文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송 · 이순(李純) ||<-2> 이항 ||<-2> 이심(李湛) · 이앙 ||
||<-2> 18권 「무종·선종기(武宗宣宗紀)」 ||<-2> 19권 「의종·희종기(懿宗僖宗紀)」 ||<-2> 20권 「소종·애종기(昭宗哀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염(李瀍) · 이침(李忱) ||<-2> 이최 · 이현(李儇) ||<-2> 이엽 · 이축 ||
||<-6><width=1000> 51·52권 「후비전(后妃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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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헌황후 · 장황후 · 장경황후 · 예진황후 · 정의황후 · 소덕황후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적선황후 ||
※ 21권 ~ 50권은 志에 해당. 구당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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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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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53권 「이밀전(李密傳)」
54권 「왕세충등전(王世充等傳)」
이밀 ,선웅신,
왕세충 · 두건덕
55권 「설거등전(薛舉等傳)」
설거 ,설인고이궤 · 유무주 ,원군장, · 고개도 · 유흑달 ,서원랑,
56권 「소선등전(蕭銑等傳)」
소선 · 두복위 · 보공석 ,감릉 왕웅탄, · 심법흥 · 이자통 ,주찬 임사홍 장선안, · 나예 · 양사도 ,유계진 이자화,
57권 「배적등전(裴寂等傳)」
배적 · 유문정 ,이맹상 진행사 유세룡 조문각 장평고 이사행 이고천 허세서 유사립 전구농 번흥 공손무달 방경운 장장경 이안원,
58권 「당검등전(唐儉等傳)」
59권 「굴돌통등전(屈突通等傳)」
당검 · 장손순덕 · 유홍기 · 은개산 · 유정회 · 시소 · 무사확
굴돌통 · 임괴 · 구화 · 허소 · 이습지 · 강모
60권 「종실전(宗室傳)」
이효기 · 이신통 · 이신부 · 이숙량 · 이침(李琛) · 이효공 · 이원(李瑗) · 이도현 · 이도종 · 이박예
61권 「온대아등전(溫大雅等傳)」
62권 「이강등전(李綱等傳)」
63권 「봉륜등전(封倫等傳)」
온대아 · 진숙달 · 두위
이강(李綱) · 정선과 · 양공인 · 황보무일 · 이대량
봉륜 · 소우 ,소예 소균 소관 소업, · 배구 · 우문사급
64권 「고조22자전(高祖二十二子傳)」
이건성 · 이현패 · 이원길 · 이지운 · 이원경(李元景) · 이원창 · 이원형 · 이원방 · 이원례 · 이원가 · 이원칙 · 이원의 · 이원궤 · 이봉(李鳳) · 이원경(李元慶) · 이원유 · 이원명 · 이령기 · 이원상 · 이원효 · 이원영
65권 「고사렴등전(高士廉等傳)」
66권 「방현령등전(房玄齡等傳)」
67권 「이정등전(李靖等傳)」
고사렴 · 장손무기
방현령 · 두여회
이정(李靖) · 이세적
68권 「울지경덕등전(尉遲敬德等傳)」
69권 「후군집등전(侯君集等傳)」
70권 「왕규등전(王珪等傳)」
울지경덕 · 진경 · 정지절 · 단지현 · 장공근
후군집 · 장량 · 설만철
왕규 · 대주 · 잠문본 · 두정륜
71권 「위징전(魏徵傳)」
72권 「우세남등전(虞世南等傳)」
73권 「설수등전(薛收等傳)」
위징
우세남 · 이백약 · 저량
설수 · 요사렴 · 안사고 · 영호덕분 · 공영달
74권 「유계등전(劉洎等傳)」
75권 「소세장등전(蘇世長等傳)」
유계 · 마주 · 최인사
소세장 · 위운기 · 손복가 · 장현소
76권 「태종제자전(太宗諸子傳)」
이승건 · 이관(李寬) · 이각(李恪) · 이태 · 이우(李祐) · 이음 · 이운(李惲) · 이정(李貞) · 이신(李愼) · 이효(李囂) · 이간(李簡) · 이복 · 이명
77권 「위정등전(韋挺等傳)」
78권 「우지녕등전(于志寧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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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녕 · 고계보 · 장행성
79권 「조효손등전(祖孝孫等傳)」
80권 「저수량등전(褚遂良等傳)」
조효손 · 부인균 · 부혁 · 이순풍 · 여재
저수량 · 한원 · 내제 · 상관의
81권 「최돈례등전(崔敦禮等傳)」
최돈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이의염 ,손처약, ,악언위, ,조인본,
82권 「허경종등전(許敬宗等傳)」
83권 「곽효각등전(郭孝恪等傳)」
허경종 · 이의부
곽효각 · 장검 · 소정방 · 설인귀 · 정무정 ,정명진, ,장사귀, ,조도흥,
84권 「유인궤등전(劉仁軌等傳)」
85권 「당림등전(唐臨等傳)」
유인궤 · 학처준 · 배행검
당림 · 장문관 · 서유공
86권 「고종·중종제자전(高宗中宗諸子傳)」
이충(李忠) · 이효(李孝) · 이상금 · 이소절 · 이홍 · 이현(李賢) · 이중윤 · 이중복 · 이중준 · 이중무
87권 「배염등전(裴炎等傳)」
88권 「위사겸등전(韋思謙等傳)」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위사겸 · 육원방 · 소괴
89권 「적인걸등전(狄仁傑等傳)」
90권 「왕급선등전(王及善等傳)」
적인걸 · 왕방경 · 요숙
왕급선 · 두경검 · 주경칙 · 양재사 · 이회원 · 두로흠망
91권 「환언범등전(桓彥範等傳)」
92권 「위원충등전(魏元忠等傳)」
환언범 · 경휘 · 최현위 · 장간지 · 원서기
위원충 · 위안석 · 소지충 ,종초객 기처눌,
93권 「누사덕등전(婁師德等傳)」
94권 「소미도등전(蘇味道等傳)」
누사덕 · 왕효걸 · 당휴경 · 장인원 · 설눌 · 왕준
소미도 · 이교 · 최융 · 노장용 · 서언백
95권 「예종제자전(睿宗諸子傳)」
이헌 · 이총 · 이범 · 이업 · 이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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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권 「유유구등전(劉幽求等傳)」
요숭 · 송경
유유구 · 종소경 · 곽원진 · 장열
98권 「위지고등전(魏知古等傳)」
99권 「최일용등전(崔日用等傳)」
위지고 · 노회신 · 원건요 · 이원굉 · 두섬 · 한휴 · 배요경
최일용 · 장가정 · 소숭 · 장구령 · 이적지 · 엄정지
100권 「윤사정등전(尹思貞等傳)」
윤사정 · 이걸 · 해완 · 필구 · 소향 · 정유충 · 왕지음 · 노종원 · 이조은 · 배최 · 왕구
101권 「이예등전(李乂等傳)」
102권 「마회소등전(馬懷素等傳)」
이예(李乂) · 설등 · 위주 · 한사복 · 장정규 · 왕구례 · 신체부
마회소 · 저무량 · 유자현 · 서견 · 원행충 · 오경 · 위술
103권 「곽건관등전(郭虔瓘等傳)」
104권 「고선지등전(高仙芝等傳)」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우선객 · 왕충사
고선지 · 봉상청 · 가서한
105권 「우문융등전(宇文融等傳)」
106권 「이임보등전(李林甫等傳)」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이임보 · 양국충 · 장위 · 왕거 · 왕모중
107권 「현종제자전(玄宗諸子傳)」
이종(李琮) · 이영(李瑛) · 이염(李琰) · 이요 · 이완 · 이거(李琚) · 이일(李一) · 이수(李璲) · 이교 · 이민 · 이린(李璘) · 이모 · 이분 · 이기(李琦) · 이환(李環) · 이황 · 이빈 · 이규(李珪) · 이공(李珙) · 이진(李瑱) · 이선(李璿) · 이경(李璥)
108권 「위견소등전(韋見素等傳)」
109권 「풍앙등전(馮盎等傳)」
위견소 · 최원 · 최환 · 두홍점
풍앙 · 아사나사이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다조 · 이사업 · 백효덕
110권 「이광필등전(李光弼等傳)」
111권 「최광원등전(崔光遠等傳)」
이광필 · 왕사례 · 등경산 · 신운경
최광원 · 방관 · 장호 · 고적 · 창최
112권 「이고등전(李暠等傳)」
113권 「묘진경등전(苗晉卿等傳)」
이고(李暠) · 이린(李麟) · 이국정 · 이환(李峘) · 이거(李巨)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114권 「노경등전(魯炅等傳)」
115권 「최기등전(崔器等傳)」
노경 · 배융 · 내진 · 주지광
최기 · 조국진 · 최관 · 경괄 · 위원보 · 위소유 · 위백옥 · 이승
116권 「숙종·대종제자전(肅宗代宗諸子傳)」
이계(李係) · 이담(李倓) · 이필(李佖) · 이근(李僅) · 이간(李僴) · 이정(李侹) · 이영(李榮) · 이광 · 이수(李倕) · 이사 · 이소(李佋) · 이동(李侗) · 이희 · 이막 · 이하(李遐) · 이술 · 이유(李逾) · 이연(李連) · 이형(李迥) · 이구(李遘) · 이내 · 이신(李迅) · 이선(李選) · 이소(李溯) · 이조 · 이섬 · 이운(李運) · 이우(李遇) · 이휼 · 이통 · 이규(李逵) · 이일(李逸)
117권 「엄무등전(嚴武等傳)」
118권 「원재등전(元載等傳)」
엄무 · 곽영예 · 최녕 · 엄진 · 엄여
원재 ,왕앙, ,이소량, · 왕진 · 양염 · 여간 · 유준
119권 「양관등전(楊綰等傳)」
120권 「곽자의전(郭子儀傳)」
121권 「복고회은등전(僕固懷恩等傳)」
양관 · 최우보 · 상곤
곽자의
복고회은 · 양숭의 · 이회광
122권 「장헌성등전(張獻誠等傳)」
장헌성 · 노사공 · 곡환 · 진한형 · 양조성 · 번택 · 이숙명 · 배주
123권 「유안등전(劉晏等傳)」
124권 「설숭등전(薛嵩等傳)」
125권 「장일등전(張鎰等傳)」
유안 · 제오기 · 반굉 · 이손
설숭 · 영호창 · 전신공 · 후희일 · 이정기
장일 · 유종일 · 소복 · 유혼
126권 「이계등전(李揆等傳)」
127권 「요령언등전(姚令言等傳)」
이계(李揆) · 이함(李涵) · 진소유 · 노악 · 배서
요령언 · 장광성 · 원휴 · 교림 · 장섭 · 장진 · 홍경륜 · 팽언
128권 「단수실등전(段秀實等傳)」
129권 「한황등전(韓滉等傳)」
130권 「왕여등전(王璵等傳)」
단수실 · 안진경
한황 · 장연상
왕여 · 이필 · 최조 · 관파
131권 「이면등전(李勉等傳)」
132권 「이포옥등전(李抱玉等傳)」
이면 · 이고(李皋)
이포옥 · 이포진 · 왕건휴 · 노종사 · 이봉(李芃) · 이징(李澄)
133권 「이성등전(李晟等傳)」
134권 「마수등전(馬燧等傳)」
이성
마수 · 혼감
135권 「노기등전(盧杞等傳)」
노기 · 백지정 · 배연령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위집의 · 왕숙문 · 정이 · 황보변
136권 「두참등전(竇參等傳)」
두참 · 제영 · 유자 · 노매 · 최손 · 제항
137권 「서호등전(徐浩等傳)」
서호 · 조연 · 유태진 · 이서 · 소설 · 우소 · 최원한 · 우공이 · 여위 · 정운규 · 이익 · 이하(李賀)
138권 「단수실등전(段秀實等傳)」
139권 「육지전(陸贄傳)」
140권 「위고등전(韋臯等傳)」
조경 · 위륜 · 가탐 · 강공보
육지
위고 · 장건봉 · 노군
141권 「전승사등전(田承嗣等傳)」
142권 「이보신등전(李寶臣等傳)」
143권 「이회선등전(李懷仙等傳)」
전승사 · 전홍정 · 장효충
이보신 · 왕무준 · 왕정주
이회선 · 주도 · 유평 · 정일화 · 이전약
144권 「상가고등전(尚可孤等傳)」
상가고 · 이관(李觀)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한유괴 · 가은림 · 두희전 · 울지승 · 형군아 · 양조성 · 장경칙
145권 「유현좌등전(劉玄佐等傳)」
유현좌 · 동진 · 육장원 · 유전량 · 이충신 · 이희열 · 오소성
146권 「설파등전(薛播等傳)」
설파 · 포방 · 이자량 · 이설 · 엄수 · 소흔 · 두아 · 왕위 · 이약초 · 우흔 · 노징 · 양풍 · 정원 · 두겸 · 양조성 · 설비
147권 「두황상등전(杜黃裳等傳)」
148권 「배기등전(裴垍等傳)」
두황상 · 고영 · 두우
배기 · 이보길 · 이번 · 권덕여
149권 「우휴열등전(于休烈等傳)」
우휴열 · 영호환 · 귀숭경 · 유후인 · 해척 · 장천 · 장예 · 유등 · 심전사
150권 「덕종·순종제자전(德宗順宗諸子傳)」
이의(李誼) · 이심(李諶) · 이량 · 이상(李詳) · 이원(李謜) · 이겸 · 이인(李諲) · 이계(李誡) · 이악 · 이함(李諴) · 이경(李經) · 이위(李緯) · 이종(李縱) · 이서(李紓) · 이주(李綢) · 이종(李綜) · 이약 · 이결 · 이상(李緗) · 이구(李絿) · 이기(李綺) · 이현(李絢) · 이훈(李纁) · 이관(李綰) · 이선(李繕) · 이롱 · 이곤 · 이신(李紳) · 이륜 · 이작 · 이집
151권 「고숭문등전(高崇文等傳)」
고숭문 · 이신(伊慎) · 주충량 · 유창예 · 범희조 · 왕악 · 염거원 · 맹원양 · 조창
152권 「마린등전(馬璘等傳)」
마린 · 학정옥 · 왕서요 · 유창 · 이경략 · 장만복 · 고고 · 학자 · 단좌 · 사경봉
153권 「요남중등전(姚南仲等傳)」
154권 「공소부등전(孔巢父等傳)」
요남중 · 유내 · 원고 · 단평중 · 설존성 · 노탄
공소부 · 허맹용 · 여원응 · 유서초 · 장숙 · 웅망 · 백기
155권 「목녕등전(穆寧等傳)」
156권 「우적등전(于頔等傳)」
목녕 · 최빈 · 두군 · 이손 · 설융
우적 · 한홍 · 왕지흥
157권 「왕굉등전(王翃等傳)」
158권 「무원형등전(武元衡等傳)」
왕굉 · 치사미 · 이용(李鄘) · 신비 · 마총 · 위홍경 · 왕언위
무원형 · 정여경 · 위관지
159권 「위차공등전(衛次公等傳)」
160권 「한유등전(韓愈等傳)」
위차공 · 정인 · 위처후 · 최군 · 노수
한유 ,장적 맹교 당구, · 이고(李翱) · 우문적 · 유우석 · 유종원 · 한사
161권 「이광진등전(李光進等傳)」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이공(李珙) · 이우(李祐) · 동중질 · 양원경 · 유오 · 유면 · 석웅
162권 「반맹양등전(潘孟陽等傳)」
반맹양 · 이소(李翛) · 왕수 · 조화 · 위수 · 정권 · 주지 · 한전의 · 고하우 · 고우 · 최융 · 육선 · 장정보
163권 「맹간등전(孟簡等傳)」
164권 「무원형등전(武元衡等傳)」
맹간 · 호증 · 최원략 · 두원영 · 최홍례 · 이우중 · 왕질 · 노간사
왕파 · 이강(李絳) · 양어릉
165권 「위하경등전(韋夏卿等傳)」
166권 「원진등전(元稹等傳)」
위하경 · 왕정아 · 유공작 · 최현량 · 온조 · 곽승하 · 은유 · 서회
원진 · 백거이
167권 「조종유등전(趙宗儒等傳)」
168권 「위온등전(韋溫等傳)」
조종유 · 두역직 · 이봉길 · 단문창 · 송신석 · 이정(李程)
위온 · 독고울 · 전휘 · 고익 · 풍숙 · 봉오
169권 「이훈등전(李訓等傳)」
170권 「배도전(裴度傳)」
이훈(李訓) · 정주 · 왕애 · 왕번 · 가속 · 서원여 · 곽행여 · 나립언 · 이효본
배도
171권 「이발등전(杜黃裳等傳)」
172권 「영호초등전(令狐楚等傳)」
이발 · 장중방 · 배린 · 이중민 · 이감 · 고원유 · 이한 · 이경검
영호초 · 우승유 · 소면 · 이석
173권 「정담등전(鄭覃等傳)」
174권 「이덕유전(李德裕傳)」
정담 · 진행이 · 이신(李紳) · 오여납 · 이각(李珏) · 이고언
이덕유
175권 「헌종·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의종·희종·소종제자전(憲宗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懿宗僖宗昭宗諸子傳)」
이녕 · 이운(李惲) · 이종(李悰) · 이흔 · 이오 · 이각(李恪) · 이경(李憬) · 이열 · 이순(李恂) · 이역(李懌) · 이음(李愔) · 이협 · 이담(李憺) · 이충(李㤝) · 이췌(李惴) · 이척(李惕) · 이탄 · 이책 · 이주(李湊) · 이용(李溶) · 이보(李普) · 이휴복 · 이언양 · 이집중 · 이성미 · 이영(李永) · 이종검 · 이준(李峻) · 이현(李峴) · 이기(李岐) · 이역(李嶧) · 이차 · 이한 · 이경(李涇) · 이관(李灌) · 이자(李滋) · 이근(李沂) · 이택 · 이윤 · 이흡 · 이예(李汭) · 이문 · 이옹(李澭) · 이일(李佾) · 이건 · 이길 · 이간(李侃) · 이보(李保) · 이의(李倚) · 이진(李震) · 이승 · 이유(李裕) · 이우(李祤) · 이계(李禊) · 이점 · 이인(李禋) · 이의(李祎) · 이비 · 이기(李祺) · 이동(李同) · 이진(李禛) · 이상(李祥)
176권 「이종민등전(李宗閔等傳)」
이종민 · 유위 · 양우경 · 마식 · 이양이 · 위모 · 주지 · 최귀종 · 정숙 · 노상
177권 「최신유등전(崔慎由等傳)」
최신유 · 최공 · 노균 · 배휴 · 양수 · 위보형 · 노암 · 하후자 · 유첨 · 유전 · 조확 · 필함 · 두심권 · 유업 · 두로전
178권 「조은등전(趙隱等傳)」
조은 · 장석 · 이울 · 최언소 · 정전 · 노휴 · 왕휘
179권 「소구등전(蕭遘等傳)」
소구 · 공위 · 위소도 · 최소위 · 장준 · 주박 · 정계 · 유숭망 · 서언약 · 육의 · 유찬
180권 「주극융등전(朱克融等傳)」
주극융 · 이재의 · 양지성 · 장중무 · 장윤신 · 장공소 · 이가거 · 이전충
181권 「사헌성등전(史憲誠等傳)」
182권 「왕중영등전(王重榮等傳)」
사헌성 · 하진도 · 한윤충 · 악언정 · 나홍신
왕중영 · 왕처존 · 제갈상 · 고병 · 시부 · 주선
183권 「외척전(外戚傳)」
독고회은 · 두덕명 · 장손창 · 무승사 · 위온 · 왕인교 · 오서 · 유성 · 두유 · 왕자안
184권 「환관전(宦官傳)」
양사욱 · 고력사 · 이보국 · 정원진 · 어조은 · 두문장 · 구문진 · 토돌승최 · 왕수징 · 전령자 · 양복광 · 양복공
185권 「양리전(良吏傳)」
위인수 · 장윤제 · 이동객 · 이소립 · 설대정 · 가돈이 · 이군구 · 최지온 · 고지주 · 전인회 · 위기 · 권회은 · 풍원상 · 장엄 · 왕방익 · 설계창 · 배회고 · 장지건 · 양원염 · 예약수 · 이준(李浚) · 양교 · 강사도 · 강순 · 반호례 · 양무겸 · 양인 · 최은보 · 이상은(李尙隱) · 여인 · 소정 · 장연 · 이혜등 · 임적간 · 범전정 · 원자 · 설빈 · 염제미
186권 「혹리전(酷吏傳)」
내준신 · 주흥 · 부유예 · 구신적 · 삭원례 · 후사지 · 만국준 · 내자순 · 왕홍의 · 곽패 · 길욱 · 요소지 · 주이정 · 왕욱 · 길온 · 나희석 · 모약허 · 경우
187권 「충의전(忠義傳)」
하후단 · 유감 · 상달 · 나사신 · 여자장 · 이공일 · 장선상 · 이현통 · 경군홍 · 풍립 · 사숙방 · 왕의방 · 성삼랑 · 윤원정 · 고예 · 왕동교 · 소안항 · 유문준 · 연흠융 · 안금장 · 이징(李憕) · 장개연 · 최무피 · 노혁 · 장청 · 안고경 · 설원 · 장순 · 허원 · 정천리 · 원광정 · 소진 · 부린 · 조엽 · 석연분 · 장비 · 견제 · 유돈유 · 고목 · 가직언 · 유경휴 · 신당
188권 「효우전(孝友傳)」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군조 · 조홍지 · 진집원 · 원양 · 배경이 · 배수진 · 이일지 · 최면 · 육남금 · 장수 · 양문정 · 최연 · 정공저 · 나양
189권 「유학전(儒學傳)」
서문원 · 육덕명 · 조헌 · 구양순 · 주자사 · 장사형 · 가공언 · 장후윤 · 곡나율 · 소덕언 · 허숙아 · 경파 · 유백장 · 진경통 · 나도종 · 형문위
고자공 · 낭여령 · 노경순 · 왕원감 · 왕소종 · 위숙하 · 축흠명 · 곽산운 · 유충 · 노찬 · 윤지장 · 서대 · 소변 · 육질 · 풍항 · 위표미 · 허강좌
190권 「문원전(文苑傳)」
공소안 · 원랑 · 하덕인 · 유포 · 채윤공 · 정세익 · 사언 · 최신명 · 장온고 · 유윤지 · 장창령 · 최행공 · 서제담 · 두역간 · 노조린 · 양형 · 왕발 · 낙빈왕 · 등현정 · 곽정일 · 원만경 · 교지지 · 유윤제 · 부가모 · 원반천 · 유헌 · 심전기 · 진자앙 · 송지문 · 염조은 · 가증 · 허경선 · 하지장 · 석예 · 제완 · 왕완 · 이옹(李邕) · 손적 · 이화 · 소영사 · 육거 · 유포 · 최호 · 왕창령 · 맹호연 · 원덕수 · 왕유 · 이백 · 두보 · 오통현 · 왕중서 · 최함 · 당차 · 유분 · 이상은(李商隱) · 온정균 · 설봉 · 이증 · 이거천 · 사공도
191권 「방기전(方伎傳)」
최선위 · 설이 · 견권 · 송협 · 허윤송 · 을불홍례 · 원천강 · 손사막 · 명숭엄 · 장경장 · 이사진 · 장문중 · 상헌보 · 맹선 · 엄선사 · 금양봉 · 장과 · 엽법선 · 현장 · 신수 · 일행 · 상도무
192권 「은일전(隱逸傳)」
왕적 · 전유암 · 사덕의 · 왕우정 · 노홍일 · 왕희이 · 위대경 · 이원개 · 왕수신 · 서인기 · 손처현 · 백이충 · 왕원지 · 반사정 · 유도합 · 사마승정 · 오균 · 공술예
193권 「열녀전(列女傳)」
배숙영 · 경상자 · 위무기 · 두백랑 · 두중랑 · 이현진 · 왕화자
194권 「돌궐전(突厥傳)」
195권 회흘전(回紇傳)」
196권 「토번전(吐蕃傳)」
돌궐
회흘
토번
197권 「남만·서남만전(南蠻·西南蠻傳)」
임읍국 · 파리국 · 반반국 · 정랍 · 수진랍국 · 타원국 · 가릉국 · 타화라국 · 타파등국 · 동사만 · 서조만 · 장가만 · 동여국 · 남조만 · 표국
198권 「서융전(西戎傳)」
니파라국 · 당항 · 고창 · 토욕혼 · 언기국 · 소륵국 · 우전국 · 천축국 · 계빈국 · 발율국 · 강국 · 파사국 · 불름국 · 대식국
199권 「동이·북적전(東夷北狄傳)」
고려 · 백제 · 신라 · 왜국 · 일본 · 철륵 · 거란 · · 실위 · 말갈 · 발해 ·
200권 「안록산등전(安祿山等傳)」
안록산 ,안경서 고상 손효철, · 사사명 ,사조의, · 주차 · 황소 · 진종권



신당서(新唐書)

[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a48252><width=33%> 1권 「고조기(高祖紀)」 ||<-2><width=33%> 2권 「태종기(太宗紀)」 ||<-2><width=33%> 3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이연(李淵) ||<-2> 이세민 ||<-2> 이치 ||
||<-2> 4권 「측천황후·중종기(則天皇后中宗紀)」 ||<-2> 5권 예종·현종기(睿宗玄宗紀)」 ||<-2> 6권 「숙종·대종기(肅宗代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이현(李顯) · 무조 ||<-2> 이단 · 이융기 ||<-2> 이형(李亨) · 이예(李豫) ||
||<-3> 7권 「덕종·순종·헌종기(德宗順宗憲宗紀)」 ||<-3> 8권 「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기(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紀)」 ||
||<-3><rowbgcolor=#fff,#191919> 이괄 · 이송 · 이순(李純) ||<-3> 이항 · 이심(李湛) · 이앙 · 이염(李瀍) · 이침(李忱) ||
||<-3> 9권 「의종·희종기(懿宗僖宗紀)」 ||<-3> 10권 「소종·애종기(昭宗哀宗紀)」 ||
||<-3><rowbgcolor=#fff,#191919> 이최 · 이현(李儇) ||<-3> 이엽 · 이축 ||
||<-6><width=1000> 76·77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원소황후 · 혜안황후 · 곽숙비 · 공헌황후 · 적선황후 ||
※ 11권 ~ 60권은 志에 해당. 61권 ~ 75권은 表에 해당. 신당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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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a48252><width=33%> 1권 「고조기(高祖紀)」 ||<-2><width=33%> 2권 「태종기(太宗紀)」 ||<-2><width=33%> 3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이연(李淵) ||<-2> 이세민 ||<-2> 이치 ||
||<-2> 4권 「측천황후·중종기(則天皇后中宗紀)」 ||<-2> 5권 예종·현종기(睿宗玄宗紀)」 ||<-2> 6권 「숙종·대종기(肅宗代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이현(李顯) · 무조 ||<-2> 이단 · 이융기 ||<-2> 이형(李亨) · 이예(李豫) ||
||<-3> 7권 「덕종·순종·헌종기(德宗順宗憲宗紀)」 ||<-3> 8권 「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기(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紀)」 ||
||<-3><rowbgcolor=#fff,#191919> 이괄 · 이송 · 이순(李純) ||<-3> 이항 · 이심(李湛) · 이앙 · 이염(李瀍) · 이침(李忱) ||
||<-3> 9권 「의종·희종기(懿宗僖宗紀)」 ||<-3> 10권 「소종·애종기(昭宗哀宗紀)」 ||
||<-3><rowbgcolor=#fff,#191919> 이최 · 이현(李儇) ||<-3> 이엽 · 이축 ||
||<-6><width=1000> 76·77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원소황후 · 혜안황후 · 곽숙비 · 공헌황후 · 적선황후 ||
※ 11권 ~ 60권은 志에 해당. 61권 ~ 75권은 表에 해당. 신당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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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78권 「종실전(宗室傳)」
이도종 · 이도흥 · 이효기 · 이도현 · 이숙량 · 이효협 · 이사훈 · 이진(李晉) · 이유량 · 이침 · 이효공 · 이괴 · 이원 · 이신통 · 이도언 · 이효일 · 이신부 · 이박의 · 이봉자
79권 「고조22자전(高祖二十二子傳)」
이건성 · 이현패 · 이원길 · 이지운 · 이원경(李元景) · 이원창 · 이원형 · 이원방 · 이원례 · 이원가 · 이원칙 · 이원의 · 이원궤 · 이봉(李鳳) · 이원경(李元慶) · 이원유 · 이원명 · 이령기 · 이원상 · 이원효 · 이원영
80권 「태종제자전(太宗諸子傳)」
이승건 · 이관(李寬) · 이각(李恪) · 이태 · 이우(李祐) · 이음 · 이운(李惲) · 이정(李貞) · 이신(李愼) · 이효(李囂) · 이간(李簡) · 이복 · 이명
81권 「고종·중종·예종제자전(高宗中宗睿宗諸子傳)」
이충(李忠) · 이효 · 이상금 · 이소절 · 이홍 · 이현(李賢) · 이중윤 · 이중복 · 이중준 · 이헌 · 이총 · 이범 · 이업 · 이융제
82권 「14종제자전(十四宗諸子傳)」
이종(李琮) · 이영(李瑛) · 이염(李琰) · 이요 · 이완 · 이거(李琚) · 이일(李一) · 이수(李璲) · 이교 · 이민 · 이린(李璘) · 이모 · 이분 · 이기(李琦) · 이환(李環) · 이황 · 이빈 · 이규(李珪) · 이공(李珙) · 이진(李瑱) · 이선(李璿) · 이경(李璥) · 이계(李係) · 이담(李倓) · 이필(李佖) · 이근(李僅) · 이간(李僴) · 이정(李侹) · 이영(李榮) · 이광 · 이수(李倕) · 이사 · 이소(李佋) · 이동(李侗) · 이막 · 이하(李遐) · 이술 · 이유(李逾) · 이연(李連) · 이형(李迥) · 이구(李遘) · 이내 · 이신(李迅) · 이선(李選) · 이소(李溯) · 이조 · 이섬 · 이운(李運) · 이우(李遇) · 이휼 · 이통 · 이규(李逵) · 이일(李逸) · 이의(李誼) · 이심(李諶) · 이량 · 이상(李詳) · 이원(李謜) · 이겸 · 이인(李諲) · 이계(李誡) · 이악 · 이함(李諴) · 이경(李經) · 이위(李緯) · 이종(李縱) · 이서(李紓) · 이주(李綢) · 이종(李綜) · 이약 · 이결 · 이상(李緗) · 이구(李絿) · 이기(李綺) · 이현(李絢) · 이훈(李纁) · 이관(李綰) · 이선(李繕) · 이롱 · 이곤 · 이신(李紳) · 이륜 · 이작 · 이집 · 이녕 · 이운(李惲) · 이종(李悰) · 이흔 · 이오 · 이각(李恪) · 이경(李憬) · 이열 · 이순(李恂) · 이역(李懌) · 이음(李愔) · 이협 · 이담(李憺) · 이충(李㤝) · 이췌(李惴) · 이척(李惕) · 이탄 · 이책 · 이주(李湊) · 이용(李溶) · 이보(李普) · 이휴복 · 이언양 · 이집중 · 이성미 · 이영(李永) · 이종검 · 이준(李峻) · 이현(李峴) · 이기(李岐) · 이역(李嶧) · 이차 · 이한 · 이경(李涇) · 이관(李灌) · 이자(李滋) · 이근(李沂) · 이택 · 이윤 · 이흡 · 이예(李汭) · 이문 · 이옹(李澭) · 이일(李佾) · 이건 · 이길 · 이간(李侃) · 이보(李保) · 이의(李倚) · 이진(李震) · 이승 · 이유(李裕) · 이우(李祤) · 이계(李禊) · 이인(李禋) · 이의(李祎) · 이비 · 이기(李祺) · 이진(李禛) · 이상(李祥) · 이정(李禎) · 이기(李祁) · 이복 · 이희(李禧) · 이고(李祜) · 이제 · 이희(李祐)
83권 「제제공주전(諸帝公主傳)」
동안공주 · 장사공주 · 양양공주 · 평양소공주 · 고밀공주 · 장광공주 · 장사공주 · 방릉공주 · 구강공주 · 노릉공주 · 남창공주 · 안평공주 · 회남공주 · 진정공주 · 형양공주 · 단양공주 · 임해공주 · 관도공주 · 안정공주 · 상락공주 · 양성공주 · 여남공주 · 남평공주 · 수안공주 · 장락공주 · 예장공주 · 북경공주 · 보안공주 · 동양공주 · 임천공주 · 청하공주 · 난릉공주 · 진안공주 · 안강공주 · 신흥공주 · 성양공주 · 합포공주 · 금산공주 · 진양공주 · 상산공주 · 신성공주 · 의양공주 · 고안공주 · 태평공주 · 신도공주 · 의성공주 · 정안공주 · 장녕공주 · 영태공주 · 안락공주 · 성안공주 · 수창공주 · 안흥소회공주 · 형산공주 · 회양공주 · 대국공주 · 양국공주 · 설국공주 · 식국공주 · 금선공주 · 옥진공주 · 곽국공주 · 영흥공주 · 천장공주 · 영국공주 · 흥당공주 · 서평공주 · 낭령공주 · 광화공주 · 창락공주 · 수춘공주 · 장녕공주 · 연경공주 · 정락공주 · 낙온공주 · 영청공주 · 위국문의공주 · 안화공주 · 보강공주 · 창원공주 · 창녕공주 · 금화공주 · 인수공주 · 영수공주 · 당흥공주 · 영평공주
84권 「이밀전(李密傳)」
85권 「왕두전(王竇傳)」
이밀 ,선웅신, ,조효징,
왕세충 · 두건덕
86권 「설이이유고서전(薛李二劉高徐傳)」
87권 「소보심이양전(蕭輔沈李梁傳)」
설거 ,설인고이궤 · 유무주 · 고개도 · 유흑달 · 서원랑
소선 · 보공석 · 심법흥 · 이자통 ,주찬, ,임사홍, ,장선안, 양사도(梁師都) ,유계진,
88권 「유배전(劉裴傳)」
89권 「굴돌울지장진당단전(屈突尉遲張秦唐段傳)」
유문정 · 배적
굴돌통 · 울지공 · 장공근 · 진경 · 당검 · 단지현
90권 「이유은허정시임구전(二劉殷許程柴任丘傳)」
91권 「온황보이이강최전(溫皇甫二李姜崔傳)」
유홍기 · 은개산 · 유정회 · 허소 · 정지절 · 시소 · 임괴 · 구화
온대아 · 황보무일 · 이습지 · 강모 · 최선위 · 이사진
92권 「두감왕이원나왕전(杜闞王李苑羅王傳)」
93권 「이이적전(二李勣傳)」
두복위 · 감릉 · 왕웅탄 · 장사귀 · 이자화 · 원군장 · 나예 · 왕군곽
이정(李貞) · 이세적
94권 「후장설전(侯張薛傳)」
95권 「고두전(高竇傳)」
96권 「방두전(房杜傳)」
후군집 · 장량 · 설만균
고검 · 두위
방현령 · 두여회
97권 「위징전(魏徵傳)」
98권 「왕설마위전(王薛馬韋傳)」
99권 「이이대유최전(二李戴劉崔傳)」
위징
왕규 · 설수 · 마주 · 위정
이강(李綱) · 이대량 · 대주 · 유계 · 최인사
100권 「진양봉배우문정권염장강장전(陳楊封裴宇文鄭權閻蔣姜張傳)」
진숙달 · 양공인 ,양사도(楊師道), · 봉륜 · 배구 · 우문사급 · 정선과 · 권만기 · 염입덕 · 장엄 · 위홍기 · 강사도 · 장지건
101권 「소우전(蕭瑀傳)」
102권 「잠우이저요영호전(岑虞李褚姚令狐傳)」
소우
잠문본 · 우세남 · 이백약 · 저량 · 요사렴 · 영호덕분
103권 「소위손장전(蘇韋孫張傳)」
104권 「우고장전(于高張傳)」
소세장 · 위운기 · 손복가 · 장현소
우지녕 · 고풍 · 장행성
105권 「장손저한내이상관전(長孫褚韓來李上官傳)」
장손무기 · 저수량 · 한원 · 내제 · 이의염 · 상관의
106권 「두이최고곽조최양노이유이유손형전(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傳)」
두정륜 · 최지온 · 고지주 · 곽정일 · 조홍지 · 최돈례 · 양홍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유덕위 · 손처약 · 형문위
107권 「부여진전(傅呂陳傳)」
108권 「유배루전(劉裴婁傳)」
부혁 · 여재 · 진자앙
유인궤 · 배행검 · 누사덕
109권 「최양두종축왕전(崔楊竇宗祝王傳)」
최의현 · 양재사 · 두회정 · 종초객 · 축흠명 ,곽산운, · 왕여(王璵)
110권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사대내 · 풍앙 · 아사나사이 · 아사나충 · 집실사력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근행 · 천남생 · 이다조 · 논궁인 · 손유정 · 울지승 · 상가고 · 배분
111권 「곽이장삼왕소설정당전(郭二張三王蘇薛程唐傳)」
곽효각 · 장검 · 왕방익 · 소열 · 설인귀 · 정무정 ,정명진왕효걸 · 당선 · 장인원 · 왕준
112권 「왕한소설왕류풍장전(王韓蘇薛王柳馮蔣傳)」
113권 「당장서전(唐張徐傳)」
왕의방 · 한사언 · 소안항 · 설등 · 왕구례 · 유택 · 풍원상 · 장흠서
당림 · 장문관 · 서유공
114권 「최서소두로전(崔徐蘇豆盧傳)」
115권 「적학주전(狄郝硃傳)」
최융 · 서언백 · 소미도 · 두로흠망
적인걸 · 학처준 · 주경칙
116권 「이왕위육이이두전(二王韋陸二李杜傳)」
117권 「배유위이길전(裴劉魏李吉傳)」
왕침 · 위사겸 · 육원방 · 왕급선 · 이일지 · 두경전 · 이회원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길욱
118권 「장위한송신이이배전(張韋韓宋辛二李裴傳)」
119권 「무이가백전(武李賈白傳)」
장정규 · 위주 · 한사복 · 송무광 · 신체부 · 이발 · 배린 · 이중민 · 이감
무평일 · 이예(李乂) · 가증 · 백거이
120권 「오왕전(五王傳)」
환언범 ,이복업 습수 설계창, · 양원염 · 경휘 · 최현위 · 장간지 · 원서기
121권 「유종최이왕전(劉鐘崔二王傳)」
122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유유구 · 종소경 · 최일용 · 왕거 · 왕모중
위원충 · 위안석 · 곽진
123권 「이소로위조화전(李蕭盧韋趙和傳)」
124권 「요송전(姚宋傳)」
이교 · 소지충 · 노장용 · 위거원 · 조언소 · 화봉요
요숭 · 송경
125권 「소장전(蘇張傳)」
126권 「위로이두장한전(魏盧李杜張韓傳)」
소괴 · 장열
위지고 · 노회신 · 이원굉 · 두섬 · 장구령 · 한휴
127권 「장원배전(張源裴傳)」
장가정 · 원건요 · 배요경
128권 「소윤필이정왕허반예석제전(蘇尹畢李鄭王許潘倪席齊傳)」
소향 · 윤사정 · 필구 · 이걸 · 정유충 · 왕지음 · 허경선 · 반호례 · 예약수 · 석예 · 제한
129권 「배최노이왕엄전(裴崔盧李王嚴傳)」
130권 「배양송양최이해전(裴陽宋楊崔李解傳)」
배수진 · 배면 · 노종원 · 이조은 · 왕구 · 엄정지 · 왕충사
배최 · 양교 · 송경례 · 양창 · 최은보 · 이상은(李尙隱) · 해완
131권 「종실재상전(宗室宰相傳)」
132권 「유오위장류침전(劉吳韋蔣柳沈傳)」
이적지 · 이현(李峴) · 이면 · 이이간 · 이정(李程) · 이석 · 이회
유자현 · 오긍 · 위술 · 장예 · 유방 · 심기제
133권 「이곽양왕장우전(二郭兩王張牛傳)」
134권 「우문위양왕전(宇文韋楊王傳)」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왕충사 · 우선객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135권 「가서고봉전(哥舒高封傳)」
136권 「이광필전(李光弼傳)」
137권 「곽자의전(郭子儀傳)」
가서한 · 고선지 · 봉상청
이광필
곽자의
138권 「이이마로전(二李馬路傳)」
139권 「방장이전(房張李傳)」
140권 「최묘이배려전(崔苗李裴呂傳)」
이사업 · 마린 · 이포옥 · 노사공
방관 · 장호 · 이필
최원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여인
141권 「최등위위이한노고전(崔鄧魏衛李韓盧高傳)」
최광원 · 등경산 · 최관 · 위소유 · 위백옥 · 이징(李澄) · 한전의 · 노종사 · 고하우
142권 「이양최류위로전(李楊崔柳韋路傳)」
이린(李麟) · 양관 · 최우보 · 유혼 · 위처후 · 노수
143권 「고원이위설최대왕서치신전(高元李韋薛崔戴王徐郗辛傳)」
고적 · 원결 · 이승 · 위륜 · 설각 · 최한형 · 대숙륜 · 왕굉 · 서신 · 치사미 · 신비
144권 「내전후최엄전(來田侯崔嚴傳)」
145권 「원반여양엄두전(元王黎楊嚴竇傳)」
146권 「이이전(二李傳)」
내진 · 전신공 · 후희일 · 최녕 · 엄여
원재 · 왕진 · 여간 · 양염 · 엄정 · 두참
이서균 · 이용(李鄘)
147권 「삼왕노신풍삼이곡이로전(三王魯辛馮三李曲二盧傳)」
왕사례 · 노경 · 왕난득 · 신운경 · 풍하청 · 이봉(李芃) · 이숙명 · 곡환 · 왕건휴 · 노군 · 이원소 · 노사매
148권 「영호장강이유전왕우사전(令狐張康李劉田王牛史傳)」
영호창 · 장효충 · 강일지 · 이유(李洧) · 유옹 · 전홍정 · 왕승원 · 우원익 · 사효장
149권 「유제오반왕이전(劉第五班王李傳)」
150권 「이상조최제로전(李常趙崔齊盧傳)」
151권 「관동원조두전(關董袁趙竇傳)」
유안 · 제오기 · 반굉 · 왕소 · 이손(李巽)
이계 · 상곤 · 조경 · 최조 · 제앙 · 노매
관파 · 동진 · 원자 · 조종유 · 두역직
152권 「장강무이송전(張姜武李宋傳)」
153권 「단안전(段顏傳)」
154권 「이성전(李晟傳)」
장일 · 강공보 · 무원형 · 이강(李絳) · 송신석
단수실 · 안진경
이성
155권 「마혼전(馬渾傳)」
마수 · 혼감
156권 「양대양이이한두형전(楊戴陽二李韓杜邢傳)」
양조성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이관(李觀) · 한유괴 · 두희전 · 형군아
157권 「육지전(陸贄傳)」
158권 「위장엄한전(韋張嚴韓傳)」
육지
위고 · 장건봉 · 엄진 · 한홍
159권 「포이소설왕오정육로유최전(鮑李蕭薛樊王吳鄭陸盧柳崔傳)」
포방 · 이자량 · 소흔 · 설파 · 번택 · 왕위 · 오주 · 정권 · 육긍 · 노탄 · 유성 · 최융 · 장정보
160권 「서여맹유양반최위전(徐呂孟劉楊潘崔韋傳)」
161권 「장조이정서왕풍유전(張趙李鄭徐王馮庾傳)」
서호 · 여위 · 맹간 · 유백추 · 양풍 · 반맹양 · 최원략 · 위수
장천 · 조연 · 이서 · 정운달 · 서대 · 왕중서 · 풍항 · 유경휴
162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요남중 · 독고급 · 고소련 · 위하경 · 단평중 · 여원응 · 허맹용 · 설존성 · 이손
163권 「공목최유양마전(孟簡等傳)」
공소부 · 목녕 · 최빈 · 유공작 · 양어릉 · 마총
164권 「귀해삼최노이설위호정이왕은전(歸奚三崔盧二薛衛胡丁二王殷傳)」
귀숭경 · 해척 · 최연 · 노경량 · 설빈 · 위차공 · 설융 · 호증 · 정공저 · 최홍례 · 최현량 · 왕질 · 은유 · 왕언위
165권 「삼정고권최전(三鄭高權崔傳)」
166권 「가두영호전(賈杜令狐傳)」
정여경 · 정순유 · 고영 · 정인 · 권덕여 · 최군
가탐 · 두우 · 영호초
167권 「백배최위이이황보왕전(白裴崔韋二李皇甫王傳)」
백지정 · 배연령 · 최손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황보박 · 왕파
168권 「위왕육유류정전(韋王陸劉柳程傳)」
169권 「두배이위전(杜裴李韋傳)」
위집의 · 왕숙문 · 육질 · 유우석 · 유종원 · 정이
두황상 · 배기 · 이번 · 위관지
170권 「이고이주이유범이왕맹조이임장전(二高伊朱二劉范二王孟趙李任張傳)」
고숭문 · 이신(伊愼) · 주충량 · 유창예 · 범희조 · 왕악 · 맹원양 · 왕서요 · 유창 · 조창 · 이경략 · 임적간 · 장만복 · 고고 · 학비
171권 「이오왕양조고유석전(李烏王楊曹高劉石傳)」
172권 「우왕이두범전(于王二杜范傳)」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양원경 · 조화 · 고우 · 유면 · 석웅
우적 · 왕지흥 · 두겸 · 두아 · 범정전
173권 「배도전(裵度傳)」
174권 「이이원우양전(二李元牛楊傳)」
배도
이봉길 · 원진 · 우승유 · 이종민 · 양사복
175권 「두유이장양웅백전(竇劉二張楊熊柏傳)」
176권 「한유전(韓愈傳)」
두군 · 유서초 · 장우신 · 양우경 · 장숙 · 웅망 · 백기
한유
177권 「전최이위이고풍삼이노봉정경전(錢崔二韋二高馮三李盧封鄭敬傳)」
전휘 · 최함 · 위표미 · 고익 · 풍숙 · 이우중 · 이고(李翺) · 노간사 · 고원유 · 봉오 · 정훈 · 경회 · 위박 · 이경양
178권 「유분전(劉賁傳)」
유분
179권 「이정이왕가서전(李鄭二王賈舒傳)」
이훈(李訓) · 정주 · 왕애 · 가속 · 서원여 · 왕파 · 곽행여 · 한약 · 나립언 · 이효본 · 고사옹 · 이정소
180권 「이덕유전(李德裕傳)」
181권 「진삼이조유전(陳三李曹劉傳)」
이덕유
진이행 · 이신(李紳) · 이양이 · 조확 · 유첨 · 이울
182권 「이이최소이정이노위주이배유조왕전(二李崔蕭二鄭二盧韋周二裴劉趙王傳)」
이고언 · 이각 · 최공 · 소업 · 정숙 · 노균 · 노간방 · 위종 · 주지 · 배휴 · 유전 · 조은 · 배탄 · 정연창 · 왕부 · 노광계
183권 「필최유육정주한전(畢崔劉陸鄭朱韓傳)」
필함 · 최언소 · 유업 · 육의 · 정계 · 주박 · 한악
184권 「마양노로전(馬楊路盧傳)」
185권 「정이왕위장전(鄭二王韋張傳)」
마식 · 앵수 · 노암 · 노휴
정전 · 왕탁 · 왕휘 · 위소도 · 장준
186권 「주왕등진유조이양고전(周王鄧陳劉趙二楊顧傳)」
주보 · 왕처존 · 등처눌 · 진유 · 유거용 · 조덕인 · 양수량 · 양성 · 고언랑
187권 「이왕제갈이맹전(二王諸葛李孟傳)」
188권 「양시주손전(楊時朱孫傳)」
왕중영 · 제갈상 · 이한지 · 왕경무 · 맹방립
양행밀 · 시부 · 주선 · 손유
189권 「고조전주전(高趙田朱傳)」
190권 「삼유성두종장왕전(三劉成杜鐘莊王傳)」
고인후 · 조주 · 전군 · 주연수
유건봉 · 성예 · 두홍 · 종전 · 유한굉 · 장웅 · 왕조 · 유지겸
191·192·193권 「충의전(忠義傳)」
하후단 · 유감 · 상달 · 경군홍 · 여자장 · 왕행민 · 나사신 · 장도원 · 이육덕 · 고예 · 안금장 · 왕동교 · 오보안 · 이징(李憕) · 노혁 · 장개연 · 최무피 · 안고경 · 가순 · 장순 · 허원 · 남제운 · 뇌만춘 · 요은 · 정천리 · 방견 · 장흥 · 채정옥 · 부령기 · 유내 · 맹화 · 장비 · 주증 · 장명진 · 석연분 · 오서 · 고목 · 가직언 · 신당 · 황갈
194권 「탁행전(卓行傳)」
원덕수 · 권고 · 견제 · 양성 · 사공도
195권 「효우전(孝友傳)」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소현 · 임경신 · 지숙재 · 정원사 · 무홍도 · 정잠요 · 원양 · 배경이 · 양문정 · 심계전 · 허백회 · 진집원 · 장수 · 서원경 · 여상안 · 양열 · 목종세 · 후지도 · 정구라 · 하징수
196권 「은일전(隱逸傳)」
왕적 · 손사막 · 전유암 · 맹선 · 왕우정 · 왕희이 · 이원개 · 위대경 · 무유서 · 백이충 · 오경 · 노홍 · 오균 · 반사정 · 사마승정 · 하지장 · 진계 · 장지화 · 공술예 · 육우 · 최근 · 육구몽
197권 「순리전(循吏傳)」
위인수 · 진군빈 · 장윤제 · 이소립 · 손지원 · 설대정 · 가돈이 · 전인회 · 배회고 · 위경준 · 이혜등 · 나상 · 위단 · 노홍선 · 설원상 · 하역우
198·199·200권 「유학전(儒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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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03권 「문원전(文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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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권 「방기전(方伎傳)」
이순풍 · 견권 · 원천강 · 설이 · 명숭엄 · 상헌보 · 엄선사 · 두생 · 장과 · 강무 · 상도무
205권 「열녀전(列女傳)」
배숙영 · 왕난영 · 경상자 · 위무기 · 하후쇄금 · 왕아족 · 왕옥영 · 요아 · 두백랑 · 두중랑 · 이묘법 · 왕화자 · 사소아 · 봉순
206권 「외척전(外戚傳)」
독고회은 · 무사확 · 위온 · 주인궤 · 왕인교 · 양국충 · 이소(李翛) · 정광
207·208권 「환관전(宦官傳)」
양사욱 · 고력사 · 정원진 · 어조은 · 유정양 · 토돌승최 · 마존량 · 구사량 · 양복광 · 이보국 · 왕수징 · 유극명 · 전령자 · 양복공 · 유계술
209권 「혹리전(酷吏傳)」
삭원례 · 내준신 · 후사지 · 왕홍의 · 곽홍패 · 요소지 · 주이정 · 왕욱 · 최기 · 모약허 · 경우
210권 「번진위박전(藩鎭魏博傳)」
211권 「번진진기전(藩鎭鎭冀傳)」
전승사 · 사헌성 · 하진도 · 악언정 · 나홍신
이보신 · 왕무준 · 왕정주
212권 「번진노룡전(藩鎭盧龍傳)」
이회선 · 주도 · 유평 · 주극융 · 이재의 · 장중무 · 장윤신 · 이무훈 · 이전충 · 유인공
213권 「번진치청횡해전(藩鎭淄青橫海傳)」
214권 「번진선무창의택로전(藩鎭宣武彰義澤潞傳)」
이정기 · 정일화 · 이전략
유현좌 · 오소성 · 이우 · 이비
215권 「돌궐전(突厥傳)」
216권 「토번전(吐蕃傳)」
돌궐
토번
217권 회흘전(回紇傳)」
218권 사타전(沙陀傳)」
회흘
사타
219권 북적전(北狄傳)」
220권 동이전(東夷傳)」
거란 · 해족 · 실위 · 발해 · 말갈
고려 · 백제 · 신라 · 왜국 · 일본 · 유귀국
221권 「서융전(西戎傳)」
니파라국 · 당항 · 여국 · 고창 · 토욕혼 · 언기 · 구자 · 소륵 · 갈반타국 · 우전국 · 천축국 · 계빈국 · 강국 · 안국 · 동안 · 동조 · 서조 · 중조 · 자지국 · 미말 · 굴상니가 · 화심 · 갈상나 · 나색파 · 달밀 · 영원국 · 대발률 · 토화라 · 읍달국 · 구란국 · 월저연국 · 범연국 · 석한나 · 식익 · 사몰 · 구밀 · 호밀 · 개실밀 · 골돌 · 소비 · 다미 · 이오성 · 사자국 · 파사국 · 구위 · 불름국 · 대식국 · 달만
222권 「남만전(南蠻傳)」
남조 · 임읍 · 파리국 · 반반국 · 정랍 · 수진랍국 · 타원국 · 가릉국 · 타화라국 · 타파등국 · 동사만 · 서조만 · 장가만 · 동여국 · 표국
223권 「간신전(奸臣傳)」
허경종 · 이의부 · 부유예 · 이임보 · 진희열 · 노기 · 최윤 · 최소위 · 유찬 ,장현휘 장정범 씨숙종 주우공,
224권 「반신전(叛臣傳)」
복고회은 · 주지광 · 양숭의 · 이회광 · 진소유 · 이기(李錡) · 이충신 · 교림 · 고병 · 주매 · 왕행유 · 진경선 · 이거천
225권 「역신전(逆臣傳)」
안록산 · 고상 · 손효철 · 이희열 · 사사명 · 주차 · 황소 · 진종권 · 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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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례는 황후의 예로 치렀다.[2] 측천무후 이전에 중국에서 여황제가 된 원고낭(남북조시대 북위 말기)과 진석진(당고종 치세)도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에 원고낭과 진석진도 여황제로 보아 측천무후는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나 세 번째 여황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원고낭과 진석진은 정식 황제로 칠 수 없다는 학계 의견이 많은데 전자는 남자로 둔갑시켜 즉위시킨 사기 즉위였고, 후자는 반란군 세력이 황제를 자칭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후궁, 황후, 황태후, 황제, 태상황제를 모두 거친 전무후무한 존재이고, 여자로서 황제와 태상황제를 한 사람은 중국사 전체에서 측천무후가 유일하다.[3] 우 쩌톈[4]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 측천무후가 직접 만든 한자다. 황제는 피휘 문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만들거나 아무도 모르는 벽자 이름을 사용해야 모두에게 편하다.[5] 제일 높은 품계인 귀비를 포함한 19개의 후궁 품계 중 밑에서 네 번째인 품계인데, 당시 입궁을 앞둔 측천무후의 어머니는 딸이 받은 품계가 낮은 것을 한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무씨 성의 예쁜이[7] 문서에도 설명되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쇠사슬 채찍이 아니라 대나무 모양으로 벼린 쇠막대이다.[8] 이전 품계였던 재인(才人)에서 무려 11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정2품 소의에서 무품이자 황후의 바로 아랫자리인 귀비까지 총 3명의 비(숙비, 현비, 덕비)만 존재할 뿐이었다.[9] 훗날 당현종 이융기도 자기 아들인 수왕의 여자였던 양귀비도교 도사로 출가시켰다가 다시 입궁시키는 형태로 후궁으로 삼았다. 당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환속당고종의 후궁이 된 측천무후와 비교하면 종교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양옥환의 경우에는 도교에 출가하면 이전의 모든 행적들이 다 지워진다는 것을 활용한 측면이 크지만 측천무후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 세탁을 할 목적으로 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선황의 후궁들 중 자녀가 없는 사람이 절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10] 당고조의 누이인 동안공주의 손녀이다.[11]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아예 '네가 죽어야 내가 황후가 된다' 라며 안정공주를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대조영(드라마)>에서도 무측천이 황위에 오른 후 "내가 낳은 아이까지 내 손으로 죽여가며 오른 자리다"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측천무후 소생의 자식으로 무후에게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황대사> 노래로 유명한 장회태자이다. 측천무후 본인이 죽인 건 아니고 측근이었던 구신적에게 죽은 것이었다. 만화고우영의 십팔사략》은 아예 이 설을 채용했다. 하술할 국내 비디오 시장에 나온 적 있고, SBS 방영으로 더 유명한 <일대여황>에서는 자기를 오랫동안 모셨던 시녀가 안정공주를 죽이고 왕황후를 모함하려고 자작극을 꾸몄다가 들통나자 사실대로 말하고 황궁 연못에 투신자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왕황후는 몰락했다.[12] 이것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데, 통괄적으로 당고종의 생을 보면 아비였던 태종 이세민에 비하여 정력적이지는 못했지만, 그 이세민이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사람이었다. 또한 왕황후의 경우, 무천진 관롱집단의 지지속에 황후에 오른 사람으로 궁으로 복귀한 지 얼마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측천이 쫓아낼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종 시기까지 무측천은 황제였던 고종의 최측근 조언자이자 지지자였을 경우가 더 높다고 봐야한다.[13] 당시 기록에서 태자 이홍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과 무측천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무능한 3남 중종 이현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당장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자기 소생 아들을 죽인다고 다음 후계자로 지명되는 사람이 또 다시 자기 소생이 된다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14] 배염은 무측천의 반대파 사람으로 훗날 무측천에게 제거될 정도였으니 비밀리에 이를 꾸몄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15] 국성이라서 반란 이후 도로 성씨를 빼앗겼다. 이적의 집안은 거의 박살이 나서 후손 중에는 토번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업 자신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려(옛 고구려땅, 신라일 수도 있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경업의 난을 평정할 때 나섰던 장군 중에는 백제 유민 출신의 번장 흑치상지도 있었다.[16] 공식적으로는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이 무후의 즉위를 하루가 멀다하고 주청하자 예종도 이에 동조해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에게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17] 측천무후는 주왕이 정무를 보던 명당(明堂)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등 고대 주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18] 사실 무승사, 무삼사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설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한 이유가 가족주의인데 무씨가 황제가 되면 무후의 자식들은 숙청당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측천무후가 자기 자식들이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무씨가 제위에 오를 경우 일어날 반란에 대한 염려는 덤이었다.[19] 당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나중에 '흥광'으로 고치기는 했는데, 성덕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당현종이 즉위(712)하기 이전으로 임치군왕 시절이었다.[20] 중국의 소설가 샨사는 측천무후의 무자비 앞에서 소설 《측천무후》를 구상했다고 한다.[21] 그나마도 비중은 '호'쪽, 즉 선비족이 더 높았다.[22] 한국사에서 비슷한 예가 고종명성황후이다. 그러나 나름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 측천무후를 외척 세도의 탐학과 외세 줄타기로 국가 멸망으로 이끈 명성황후와 암군인 조선 고종에 비유하는 건 무리이다.[23] 무후가 죽였다는 첩 혹은 고종의 여인들은 폐황후 왕씨, 숙비 소씨, 한국부인 무씨, 위국부인 하란씨로 왕씨, 소씨는 무후가 황후로 책립되는 과정의 정쟁에서 제거되었고, 한국부인, 위국부인은 무후의 언니, 조카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것이 통정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리어 고종의 자식을 낳은 유씨, 정씨, 양씨 등은 살해당하지 않았다.[24] 흥미롭게도 이런 군주들이 등장하면 그 뒤에 반동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군주가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군주의 시대에 태평성대와 이후의 몰락이 오가게 되는데 당현종은 자기 대에 성세인 개원지치와 난세인 천보난치가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사실 현종도 측천무후의 손자가 아니랄까봐 자신의 반대파였던 큰어머니 위황후와 사촌안락공주를 위시한 위씨 일족, 할머니의 무씨 일족, 고모인 태평공주와 그녀의 세력을 싹 숙청한 전례가 있어 마냥 너그럽고 인자한 타입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25] 대체로 고종 시기 백제고구려의 멸망도 무후의 공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백제 멸망의 경우, 무후가 완전히 전면에 나서기 이전이었다. 도리어 무후는 고구려 원정에서 고종의 친정을 반대하며 반전 여론 혹은 고종의 대외 정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고종이 군사적인 해결을 선호한 반면, 무후는 외교적인 해결을 선호했다고 한다.[26] 돌궐 전선에서 활약했으나 서경업의 반란에 연좌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군중에서 처형당했다. 그 결과는 대돌궐 방어선의 와해였다. 돌궐군은 출전할 때마다 정무정의 사당에 기도를 드리고 출전했다.[27] 안서 4진을 되찾은 명장이었으나 왕황후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유배되던 와중 사망했다. 그 결과는 서역을 토번에게 다시 빼앗겼다.[28] 이진충의 난때 이게 드러나고 말았다.[29] 이 과정에서 그의 참모가 진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자를 버리고 도망친 것은 덤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당문》에 있는 장열의 기록과 《자치통감》에 이 사실이 그대로 나와 있다.[30] 진자앙의 <등유주대가>가 창작된 배경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소굉휘가 왕효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아 왕효걸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무삼사가 군대를 모집할 때는 거의 모이지 않았고, 이현이 군대를 모집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31] 엄밀히 말해 건국 집단은 선비족 출신이지만, 성격을 따지자면 한족 문화권 국가라 봐도 무방하다.[32] 이름이 한국부인인 것이 아니라 직위명이다. 본명은 불명이다.[33] 예종이 건강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융기에게 빨리 선위한 것도 이런 정국을 뒤집어엎기 위함이었다.[34] 다만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는게 당장 황제인 이세민이 무씨가 이씨를 멸문시킨다는, <여주무왕> 예언 때문에 전혀 관련없는, 능력있는 장군을 누명 씌워 죽였을 정도로 전전긍긍했는데 무려 무씨 집안에서 황제의 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불보듯 뻔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주무왕>이 아니더라도 무사확 일가는 반역죄로 꼬투리를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태종이 이 <여주무왕>의 예언을 결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은 그녀가 커서 궁으로 들어온 뒤 이순풍으로부터 <여주무왕>에 대한 풀이를 듣고 난 후였다. 즉 이미 손쓸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주무왕>에 대한 풀이를 해준 이순풍 역시 이미 그가 궁에 있고 대세 역시 <여주무왕>에게 있으며 이 이상 <여주무왕>을 찾아내 죽일 경우, 오히려 태종의 자손들이 다시 태어난 그에게 멸문당할테니 더 이상 그(녀)를 찾지 말라고 했었다. 더 자세하게는, 지금 <여주무왕>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죽여도 그 운명을 지닌 사람이 다시 환생할 것이며, 그때는 더 젊고 혈기방장한 상태이기 때문에 숙청에 있어서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없지만, 지금 살려 두면 나이가 좀 있는 상태에서 권력을 잡게 되므로 숙청의 정도가 약해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로 인해 측천무후는 죽임을 당하는 대신 감로사로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다만 이 <여주무왕>에 관련된 설 자체가 밑에 이군선 이야기와 더불어 야사라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금지다.[35] 유명한 도다이지도 그러한 고쿠분지였다.[36] 현종의 후궁 40,000명 운운은 《신당서》 <환관지>에 있는 "개원 연간에는 궁빈이 40,000여 명이 있었다."라는 구절에 근거하는데, 《신당서》를 쓴 구양수말장난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현종에 대해서 이런 비판이 가능했다면, 측천무후에 대해서는 더한 소리가 불가능하지 않다.[37] 더군다나 선덕여왕은 엄연히 전대 진평왕의 공주로서 즉위한 것이지만, 측천무후는 비록 황후였긴 해도 엄연히 당나라의 황족인 농서 이씨와는 전혀 별개 집안의 사람이었다.[38] 굳이 들자면 측천무후를 후궁으로 들인 것,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비난하는 것도 뭣하다. 여기에 이미 중국에서는 3세기 조위에서 현 일본의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를 왕으로 인정한 바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제후국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즉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다 자기 아래로 보였다는 건데 측천무후가 바보도 아니고 중화의 황제가 되고 싶으면서 제후국이 하는 것을 예시로 들었다는 것은 체면상 맞지가 않다. 진짜 선례를 찾아내서 하려고자 했다면 중국의 역사를 이 잡듯이 뒤져서 비슷한 사례를 들었을 것이다. 사실 당태종은 비웃음을 당할 만도 한 게 신라에 여왕이 있다고 비웃은 전력이 있는데 이후 2대만에 여성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생판 남도 아니고 바로 자기 후궁이었다. 그것도 이미 입궁해서 바로 옆에서 이런 말들을 들었을 시점이다.[39] 다만 측천무후가 살던 7세기에 이웃나라인 야마토(일본), 신라(한국), 동여국(티베트), 참파(베트남)에서 계속 여왕이 나타났고, 중국 민간에서 여황제를 자칭한 진석진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측천무후가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40] 장회태자의 경우는 실제로 측천무후 자신이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측천무후가 보낸 구신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상 측천무후가 분명히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41] 국내명은 <측천무후의 비밀>로 개봉을 했다.[42] 《은하영웅전설》의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남매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귀족이라고 해도 재력이 풍부하거나 권력이 대단한 귀족이 있으면 가난한 귀족도 있기 마련이다.[43] 2편 <신도해왕의 비밀>과 3편 <4대 천왕>에서 권력욕을 가진 것이 본격적으로 나온다.[44] 다만 중종은 결격 사유가 확실해서 갈아치울 때 당시 조정의 고위층들이 황태후와 같이 퇴위시키는데 동의했다. 판빙빙의 드라마 <무미랑전기> 1화와 마지막화를 보면 정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께 구국의 결단을 했다고 하며 정변 세력들과 같이 어머니를 만나다가 망신만 당하고 도망치자 정변의 주요 인물인 재상 장간지가 한탄하면서 "이씨 강산도 끝났구나"라는 한탄을 할 정도의 겁쟁이였다. 여기에 무측천 하면 빠지지 않는 위씨 며느리의 대화와 행동을 보면 마누라에게 잡혀살고 공처가 기질이 보일 정도인데 이러한 경향은 실제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결국 처음부터 황제가 될만한 재목이 아니었던 것이다.[45] 쿠키 영상 비슷하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나오는 장면인데 임팩트가 상당하다. 적인걸 일행은 먹으면 괴물로 변하는 독약에 얽힌 사건을 해결한 후 궁궐로 불려가 차를 대접받게 된다. 괴물로 변하는 독약이 측천무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시 그 차에도 독약이 들어있을까봐 마시지 않고 ​망설이다가, 측천무후가 자기를 못 믿는 거냐고 묻자 어쩔 수 없이 마신다. 측천무후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아랫사람에게 "해독제를 가져와라."라고 명령하고, 적인걸 일행은 한꺼번에 '역시!'라는 표정을 짓는다.[46] 한국에서는 <측천무후>로 비디오 발매가 되었는데 비디오 발매 당시인 80년대에는 국내 비디오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기가 없었으나 90년대 중반 SBS에서 방영한 이후 큰 인기를 얻어 비디오 시장에서 상당히 흥행했다.[47] 국내에서는 <태평공주>로 비디오 발매가 되었는데 <일대공주>에서는 측천무후와 그녀의 딸이자 주인공인 태평공주를 반영자가 1인 2역으로 연기했다. 비디오 발매시 전작의 인기에 편승할 요량으로 SBS에서 방영한 <측천무후>의 반영자가 어머니 측천무후와 딸 태평공주의 1인 2역의 연기를 한다고 예고편에서 상당히 홍보하며 표지에도 전작 측천무후의 샷을 넣는 등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여 <태평공주>도 한국에서 상당히 흥행했다.[48] 한국에서는 <여황제 무측천>으로 2009년 CHING에서 방영했다. 1994년 드라마 <칠협오의>에서 전조를 연기한 초은준이 무측천의 조카 하란민지로 출연.[49] 측천무후와 딸 태평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