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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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막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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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조
태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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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막리지*
연남생
막리지*
연남건
태대막리지*
연남산
* 추정을 제하고 삼국사기, 연남생 묘지명, 연헌성 묘지명, 연남산 묘지명 원문 기준 각각 가장 높은 관직명 기술.
연씨 집권자
고구려 (좌우보 · 국상 · 대막리지) · 백제 (좌우보 · 상좌평)
신라 (대보 · 시중 · 상대등) · 발해 대내상 · 태봉 시중 · 고려 문하시중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대한민국 국무총리






연남생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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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배신자
고구려 제2대 대막리지
국적
고구려
시호
양공(襄公)
이름
연남생(淵男生)
이명
천남생(泉男生)

원덕(元德)
아버지
연개소문
형제
첫째 동생 연남건
둘째 동생 연남산
아들
장남 연헌충(淵獻忠)[1]
차남 연헌성(淵獻誠)[2]
사망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관사(官舍)
묘지
당 낙양(洛陽) 망산(邙山)
생몰연도
634년 ~ 679년 1월 29일 (음력, 향년 45세)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일생
2.2. 권력 투쟁
2.3. 고구려 멸망
3. 평가
4. 가족
5. 묘지명
6. 대중매체에서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논하여 말한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이다.

-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발췌. 저자 김부식과, 고려 조정 및 고려 식자층들이 남생 헌성 부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권신으로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 2대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연남건, 연남산 두 동생과 불화가 생겼고 권력 투쟁을 벌이던 끝에 궁지에 몰리자 당나라에 투항하여[3]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일생[편집]


남생의 고구려 관직
고구려 관등
선인(先人)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막리지(莫離支)[661년]
태막리지(太莫離支) / 대막리지(大莫離支) / 태대막리지(太大莫離之)[666년]
고구려 직위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661년]
634년에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41년에 아버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 642년부터 벼슬을 지내게 되었다.

642년에는 선인(先人) 벼슬을 얻었는데 그때 연남생의 나이는 9세였다.[4] 15세에는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봉해졌으며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였다. 23세에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임명되었고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으며 28세에는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 兼 三軍大將軍)이 되었다.

20대에 대장군을 찍는 이런 초고속 승진은 확실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닌데, 이미 고구려는 아버지 연개소문이 독재자에 올라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차지한 상황이었으므로 장남 연남생의 관직은 말 그대로 연개소문 마음대로였다고 할 수 있다. 연씨 가문 대대로 권력을 세습시켜 주기 위한 의도가 드러난다.

이후 661년 9월에는 연개소문의 명에 따라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수를 수비하여 당나라군을 막았는데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이 도착하면서 크게 패하여 3만 군사를 잃고 달아났다.[5] 이후 당나라군은 몇 개월 동안 평양 근처에 주둔하였으나 662년 정월에 연개소문이 직접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무찌르자(사수 전투)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666년 마침내 연개소문이 죽게 되자[6] 32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막리지(太莫離支)가 되어 군사와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등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2.2. 권력 투쟁[편집]


태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대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맡게 된 후 지방으로 가서 여러 성을 순시하게 되었다. 이때 두 아우인 연남건과 연남산 등을 수도에 남겨두어 뒷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이때 연남건과 연남산의 측근들이 두 사람에게 와서는 연남생이 필시 그들을 죽이려 할 것이므로 먼저 손을 써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고하였으나 연남건과 연남산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한편 연남생 역시 두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켜 연남생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려 하려 한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연남생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지속적인 이간질에 의해 결국 동생들에게 의심을 품게 된 연남생은 우선 친한 사람을 밀정으로 보내서 동생들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그만 밀정이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형을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평양으로 불렀으나 연남생은 동생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해 돌아오지 않았다.[7]

666년 연남건과 연남산은 결국 정변을 일으켜 수도 평양성을 장악하였고 급기야는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8]마저 살해하고 말았다. 정변 직후에 스스로 태막리지가 된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어 지방에 있던 연남생의 세력을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연남생은 수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에 피신해서 이를 방어하는 한편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연헌성 묘지명에 의하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계책은 연남생이 혼란스러워 할 때 연헌성이 적극적으로 제안해 관철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2.3. 고구려 멸망[편집]


남생의 당 관직(본인 묘지명 기준)
당 작위
현도군공(玄菟郡公)
변국공(卞國公)
당 직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摠管)[9] 겸(兼) 지절안무대사(持節安撫大使)[10]
요동 대도독(遼東 大都督)
우위 대장군(右衛 大將軍)
당시 당나라는 1, 2차 고구려-당 전쟁의 연이은 실패 이후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연남생의 전갈을 받은 당고종은 사신으로 파견된 연헌성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하여 국내성으로 돌려보냈으며 장군 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연남생을 맞아들이도록 하였다.[11] 666년 6월에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한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남소성(南蘇城)·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666년 9월 연남생은 그 공으로 당고종으로부터 특진[12] -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特進 - 遼東都督 兼 平壤道安撫大使)의 벼슬을 받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해졌다.[13] 이렇게 하여 한때 고구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은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의 향도가 되고 말았다.

이런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공을 해왔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났음에도 고구려는 2년에 걸쳐 끝까지 대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668년 말 수도 평양성의 성문이 당나라와 내통한 승려 신성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물밀듯이 밀려온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고구려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자결을 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보장왕과 함께 당나라군에 사로잡히면서 평양성은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연남생은 당나라군의 길을 터준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벼슬을 받았으며 3,000호에 달하는 식읍을 하사받았다.

연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당고종은 연남건을 포로로 잡을 생각이 없고 바로 죽이려 했는데 연남생은 형제간의 정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는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해서 결국 유배형으로 끝나게 해 주었다. 이후 연남생은 한동안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에 676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평양에 거점을 뒀던 당나라 세력은 요동까지 쫓겨나게 됐다. 이로 인하여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옛 북쪽 땅 요동에서도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677년 연남생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연남생 묘지명에 의하면 요동에서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질병을 막고 구휼하며 농사에 필요한 전야 구획, 치수를 개편하고 세금을 균등히 하고 역역(力役)을 폐지해 유망민을 불러들이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연남생은 안동도호부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679년에 46세의 나이로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14] 679년 12월 26일 당나라는 죽은 연남생의 유해를 중국 땅으로 옮겨와 낙양북망산에 매장하였다. 4일 동안 조회가 중지되었으며 장례식에 든 비용은 모두 조정이 냈다. 비단 700필과 쌀 200석을 내려 주고 5품 관리를 시켜 부절(符節)과 새서(璽書)를 보내주었다. 당 고종은 연남생에게 사지절대도독, 병, 분, 기, 남의 4개 군사, 그리고 병주자사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비문을 세워 그 공적을 드러냈다. 황실 악단을 시켜 노래를 연주하게 시켰고 황실 호위대가 관 운반을 호송했으며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았고 발인 날 5품 이상 관리는 그 집으로 가도록 해 애송(哀送)의 성대함이 고금에 다시 없었다고 한다. 연남생묘지명은 연남생의 일생, 관직, 가계도 등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을 남겼는데 이 연남생 묘지명은 1923년에 발굴되었다. 묘지명에 기록된 당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양공(襄公). 도와준(거들어준) 공작이라는 뜻인데 연남생에게 어울리는 시호이다. 증손자 연비의 묘지명에는 '변국 양공(卞國 襄公)'으로 나오는데 생전의 봉국을 시호에 붙혀 쓴 것.


3. 평가[편집]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돌아가시자 나라가 망했대"[15]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사론에서 연남생을 아버지인 연개소문이나, 아들인 연헌성 등과 더불어 반역자라고 신랄한 비난을 가하였다. 그나마 연개소문은 왕을 죽인 죄가 큰 것이지만 당나라에서도 그 능력과 군공을 인정했기에 약간이나마 긍정 평가 요소도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남생과 연헌성은 그대로 당나라에 투항해버린 것에 대해서는 '남생, 헌성은 당나라 입장에선 공신이어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라고 딱 잘라 평가하였다.[16]

이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하여 대개 매국노로 평가되었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때는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이 결국 자기 나라에서 도망쳐나와 망하게 만들었으니 일생 자체는 꽤 기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연남생이 두 동생들과 권력 투쟁을 벌인 탓에 고구려가 망했다는 다소 극단적인 평가 또한 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에 수십만 단위의 대군을 갈아넣은 대전만 전신 수나라 때부터 6차례에 달했기 때문에 국력이 온전한 상황이 결코 아니었으며,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고 실제 연남생의 투항 이전에는 고구려 정복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신라 역시 백제 부흥운동이 완전히 정리된 이때쯤이면 슬슬 이용가치가 떨어진데다 신라 정벌 욕구까지 가감없이 드러내던 당나라를 견제하는 데에 대해 열을 올리게 된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야 고구려도 수 세기 동안 대립한 적국이었기에 당연히 감정이 좋을 리는 만무했지만 주적이였던 백제가 사라진 이 시점에서 고구려의 잠재적 위협도가 많이 줄어들었고 오히려 당나라를 위에서 막아주는 '울타리'로서의 효용 가치가 있었기에 고구려 멸망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신 정세를 보며 저울질하는 상황이었다.[17]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는 통일 중국과의 기나긴 70년 대전쟁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연씨 형제들의 집안 싸움으로 어이없이 망한 것이다. 특히 이듬해인 669년부터 토번의 발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고구려의 멸망을 더욱 안타까워 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연남생이 죽은 후에 남긴 묘지명에는 기존의 사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연개소문 가문의 가계도와 집안에 대한 내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고구려 후기의 역사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경우 전기사보다 후기사가 많이 부실하기에 이러한 금석문의 가치가 높다.

이유가 기구했다 치더라도 어쨌든 고구려은 서로 적국인데다 고구려 최고 권력자가 동생들과의 권력 투쟁 중에 모국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하였기에 고구려와 후대 한국인 입장에서는 참작의 여지가 없는 매국노일 뿐이다. 그나마 7세기의 사건이고 대중의 인지도가 아버지인 연개소문에 맞춰져 존재감이 미비했기에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삼국지에서의 원소의 장남 원담과 그 행적이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원담은 연남생과 비교하기에는 연남생한테조차 모욕인 수준의 인물이다.[18]

신당서에서는 예의가 바르고, 언변이 좋으며 사격 솜씨가 좋다고 평하였다.


4. 가족[편집]


아버지는 그 유명한 막리지 연개소문. 어머니는 관작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존재는 보인다.

남생의 아들 헌성 묘지명에 '조모(祖母)'란 인물이 등장한다. 682년에 사망했으며 당에서 죽었다. 헌성의 조모는 당연히 남생의 어머니, 연개소문의 아내를 의미한다. 이를 보아 남생은 당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간 걸로 보인다. 아니면 고구려 패망 후 따로 모시고 왔던지.

형제론 동생 남건, 막내동생 남산이 있다. 삼형제가 조국 멸망 끝에 당에서 다시 만났는진 의문이다. 본인과 연남산 묘지명엔 형제 간에 다시 만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대신 본인 묘지명엔 남건을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고 당고종에게 부탁한 기록이 남아있다.

남생에겐 두 아들이 있었으니 분명히 아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특이하게 남생, 헌성 묘지명에 일언반구도 없다. 사망년도라도 남은 남생의 어머니에 비해 어떠한 언급도 없는 걸 보면 일찍 죽은듯 싶다.

아들은 연헌충(淵獻忠), 연헌성이 있다. 상술했다시피 연헌충은 동생들과 투쟁 중에 살해당했다.

손자는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이 있다. 세 손자 모두 연헌성의 아들이다.

증손자는 연현은의 아들인 연비가 있다. '천비(泉毖) 묘지명'이 있다. 보장왕의 외손자인 '왕위(王暐)'의 딸과 결혼했다.

가족사에서 특이한 점 중 하나로 연남생 삼형제는 돌림자(男)를 쓰고 있으며 연남생의 아들들인 연헌충과 연헌성 또한 돌림자(獻)를 쓰고 있다. 연남생의 손자대부터는 가문이 당나라에 정착하고 태어났으니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돌림자를 썼다고 볼 여지가 있긴 한데 연남생 삼형제와 연남생의 아들들은 명백히 고구려 출신인데도 이름에 돌림자를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부터 한국사 최초로 돌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걸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문선부여문사가 돌림자(文)를 쓰고 있었다.


5. 묘지명[편집]


죽은 후에 중국 낙양 북망산에 묻혔고 거기에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된 묘지명을 남겼다. 덕분에 고구려의 인물들 중에서도 드물게 전반적인 생애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있는 인물이다.

파일:연남생 묘지.jpg
연남생의 묘지(墓誌) 뚜껑돌과 묘지명.

왕덕진(王德眞)이 비문을 쓰고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이 글씨를 썼다.묘지 뚜껑돌에 적힌 글은 '대당고특진천군묘지(大唐故特進泉君墓誌)'. '당나라의 특진된 고(故) 천(泉) 군의 묘지'란 뜻이다.

  • 연남생의 성이 연(淵)이 아니라 천(泉)으로 씐 것은 '연’자가 당고조의 이름 '이연(李淵)'과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관습을 피휘라 부른다.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고 고구려에서 죽었다면 본인 성을 그대로 사용했을텐데 당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에 성이 바뀌었다.

  • 이 문서의 대부분 내용이 여기서 나왔다. 남생의 나이, 생몰년도, 3대조, 후손, 관직, 사망지, 묘지, 장례식 등등. 아들 헌성과 증손자 비의 묘지명에도 조금씩 등장한다.[19]

  • 특이하게 묘지명에서 남생의 출신지를 '요동군 평양성인(遼東郡 平壤城人)'이라 했다. 요동군은 당이 옛 고구려 땅을 부를 때 쓴 말이고 중요한건 '평양성인(平壤城人)' 즉 남생은 평양 귀족 출신이란 걸 드러낸다.

  • 남생의 죽음은 졸(卒)이나 사(死)가 아닌 '훙(薨)'으로 표현됐다. 이는 당이 엄청난 우대를 해준 것이다. 동생 연남산, 고려 최충헌, 최항도 자신들 묘지명에 훙으로 죽음이 표현됐다.

  • 봉국인 '변국(卞國)'은 '변한(卞韓, 弁韓)'이다. 삼한 문서에서 설명되어 있듯 삼국시대 후반기쯤 가면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각각 대입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옛 변한으로 간주해 봉국으로 붙었다. 조선의 변한 소경공과 같은 국가가 봉해졌다. 동생 남산은 요양군(郡)에 봉해져 한단계 낮았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아무래도 인물의 행적이 행적인지라 주인공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으며 고구려 말기를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그래도 비중있게 자주 등장한다. 순수하게 매국노 악역으로 묘사되기 보다는 왠지 열폭형 캐릭터가 흑화된 경우가 많다. 열폭의 대상은 당연히 극 중 주인공들.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안재모[20]가 연기했다. 모친은 젊은 시절 연개소문의 부인이었던 이화[21]로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는 이복형제지간이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친아들처럼 생각해주고 새어머니라 할 수 있는 소연[22]을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두 동생들을 잘 보살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맹세까지 한다. 한편 소연은 서토의 여인이 낳은 연남생만을 챙기고 생각한다며 울분을 토하는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다시 1번만 더 그런 소리를 하면 2번 다시 너희를 보지 않을 것이다."라며 엄포를 놓는다. 물론 소연은 형제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이 3형제의 갈등은 끝내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심하게 무능하거나 찌질하거나 인성이 개판인 인물로는 나오지 않지만[23] 이 드라마에서 거의 초인과 같이 묘사된 아버지와 비교하면 능력에서 영 떨어지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연개소문도 연남생이 자기 뒤를 이을 만큼 유능하지는 않음을 알면서도 "제 놈이 자리를 못 지킬 정도로 무능하면 그에 걸맞은 인물이 나타나 대막리지 자리를 알아서 차지하겠지."하는 생각으로 대막리지 자리를 넘겨줬는데 그 직후 서토의 여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평소부터 연남생에게 불만이 많았던 연남생의 이복동생[24]들인 연남건과 연남산이 변란을 일으켜 형의 가족을 몰살하고 고구려도 망하게 된다.[25] 이후 행적은 역사와 비슷한데 그래도 이 쪽에서는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남생보다 그 동생들에게 크게 묻고 있다.[26].

작중 연남생을 억지로 이밀의 조카로 설정하다보니, 연남생의 출생연도가 실제 기록과 엄청나게 차이난다. 이밀이 618년에 사망하였는데, 이 시점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이화와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연남생은 633년 생이므로 이 때와 거의 15년이나 차이난다.


  • 2011년 개봉한 영화 <평양성>에서는 배우 윤제문이 연기했다. 드라마 연개소문이나 드라마 대조영과는 다르게 연남생이 온건파에 가까운데 처음부터 당나라와의 협상을 주장하였으나 주전파인 연남건에게 투석기로 날려진다. 근데 하필이면 떨어진 곳이 당나라 이적 장군의 막사였고 그대로 당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해버린다.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고구려와의 연계를 꾀하던 중 연개소문 아들이 왔다고 히히덕대며 들어온 김유신만 골 아프게 된다. 고구려의 신무기와 보급품 테러로 사기가 오른 연남건의 성격을 잘 알던 연남생은 퇴각하는 척하며 동생의 기마 부대를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연남건에게는 부상을 입힌다. 그리고 형제끼리 싸우는걸 싫어하던 연남산에게 접촉해 연남건의 신변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평양성 성문을 열어주겠노라 약속받는다. 마지막 전투에서 평양성이 함락되고 연남건이 몸에 창이 박힌 채로 죽어가자 "너 이게 뭐이가?, 성 말 들으라했지? 이 썅놈의새끼야!"라고 울부짖는데 비록 생각은 정반대였어도 그래도 동생을 아끼기는 했던 모양.[27] 요동 일대를 넘겨받기로 했는데 당나라가 직접 통치한다는 선포에 이적에게 항의했다가 계필하력에게 얻어맞고는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른다.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아마도 실제 역사대로 흘러갔을 소지가 크다. 연남건, 연남산이 김유신이 보낸 쌀가마니의 글을 읽지 못하는 와중 연남생은 쌀가마니의 글을 전부 읽음으로 봐서 두 형제와는 다르게 똑똑하고 머리는 좋은거 같다.

  •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초중반에는 비중이 없다가 극후반에 아버지가 사망 후 대막리지를 이어받고 동생들에게 쫓겨나 투항하는 모습이 간략하게 등장한다. 이후 당군에 종군하여 항복을 청하러 온 아우 남산과 재회, 서로 책임전가를 시전하다 너희 형제 싸움 때문에 고구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정신 못 차리고 남 탓하냐는 김인문의 일갈에 데꿀멍하고 퇴장하는 것으로 등장 종료.[28]
  • 2013년 KBS 드라마 <칼과 꽃>에서는 배우 노민우가 연기했다. 꽃미남인 배우 덕분에 역대 연남생 중에서는 가장 외모가 뛰어나지만, 역시 주인공이자 연개소문의 서자인 이복형 연충에게 열폭하는 캐릭터로 등장해 상찌질이로 등장했다.


7.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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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남건이 헌충을 죽임.[2] 두 형제의 이름에서 돌림자를 제외한 글자를 합치면 충성(忠誠)이 된다.[3] 비슷한 시기 연남생의 작은아버지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신라에 투항했다.[661년] A B 莫離支 兼 三軍大將軍.[666년] 태막리지는 본인 묘지명, 대막리지는 삼국사기, 태대막리지는 아들 헌성 묘지명.[4] 비록 선인은 조의와 더불어 고구려에서 상당히 낮은 직책이었지만 당시 연남생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관직 생활은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다. 둘째 아들 연헌성도 9살에 선인 벼슬을 받았고 정황상 첫째 연헌충도 똑같을 듯하다.[5] 글필하력은 남생군을 이겼으나 당고종의 조서를 받고 퇴각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견이 많은데, 연남생 군을 대패시켰으나 군을 정비한 연남생의 군과 요동에 있던 고구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대패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글필하력의 군대가 연남생의 군대를 궤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자마자 퇴각하였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글필하력의 군대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거나 군을 재정비한 연남생과 이를 지원하러 온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과의 협공으로 인해 대패하여 도주했고 더는 버티지 못해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다. 글필하력이 이대로 진군했다면 소정방이 평양에서 죽다 살아나고 또 임아상방효태의 군대가 사수에서 전멸하는 일은 없었을 듯하다. 글필하력은 당으로 귀환 뒤 서쪽으로 파견되어 철륵 진압에 투입된다.[6]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657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와 중국 측 기록에는 666년 죽었다고 나온다.[7]일본서기》에는 성 밖을 둘러보던 중 동생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8] 연남건, 연남산 본인들에게는 조카가 된다.[9] 평양도는 고구려의 수도, 행군은 임시 군부대란 뜻이며 대총관은 당국 군대 계급이다.[10] 지절은 임금의 임명을 받았다는 뜻이고 안무대사는 고정 직위라기보단 일종의 특별 인사 같은 직위다.[11] 계필하력은 당태종 시절부터 수 차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최대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출정했다니 기분이 묘했을 것이다.[12] 당나라의 문산계 품계로 정2품.[13] 삼국사기 기준. 구당서, 신당서 등을 비롯한 중국 측 사서에는 연남생을 사지절요동대도독 - 상주국 - 현토군개국공(使持節遼東大都督 - 上柱國 - 玄菟郡開國公) 식읍 3,000호에 봉했다고 한다.[14]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남생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훙은 제후 중 왕 급에만 붙여주는데 당나라가 얼마나 연남생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15] 고무줄놀이를 할 때 많이 부르는 노래로 알려져 있으며 이 노랫말처럼 정말로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순식간에 붕괴되었다.[16]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맹목적 친중 사대주의 성향의 유학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의 입장이 아닌 고려의 입장에서 쓰인 이러한 서술이 반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김부식은 대외적으로는 사대주의를 표방했을지언정 실제로는 한반도 고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큰 인물이었고, 삼국사기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김부식을 비난하는 데에선 삼국사기가 쓰여진 시대가 명분상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시대였던지라 더욱 평가가 박했던 것도 있었다.[17] 신라는 666~668년 초까지 고구려 원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귀순해오는 고구려 유민만 받았다. 나중에 검모잠문무왕이 주고받은 문서에서 고구려인을 울타리로 삼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그러나 결국 668년 전세가 기울어 신라의 개입과 무관하게 고구려가 어차피 멸망할 것임이 기정사실화되자 나당동맹의 명분과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 평양성에는 막타치러 간 것이지만 뒤로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지속적으로 당을 견제하였다. 물론 나당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지만.[18] 일단 후계자로 내정이 되어있냐 안 되어있느냐의 여부가 다르다. 원담은 장남이지만 사실상 폐출된 자식인데다 그 이전에도 여러 가지 과오를 저지른 반면 연남생은 분명히 원래 후계자는 자신이었으며 매국 행위 이외로는 이간질로 인해 동생들을 의심했을 뿐 다른 과오를 범한 적은 없다. 그 매국 행위의 이유도 동생들에 의해 장남이 살해당하고 자신까지 죽을 위기에 처해 살기 위해서 그랬다는 참작의 여지라도 있다.[19] 조부는 연태조, 증조부는 연자유이다.[20] 재미있게도 연남생을 맡았던 안재모는 연개소문을 맡았던 배우 유동근과 이전에도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아버지아들 역을 맡은 적이 있었고 이후에도 각자 태종과 태조의 역할로 만나게 된다.[21] 서토인 수나라의 여인으로 나오며 작중에서는 배우 손태영이 연기했다. 연개소문이 젊은 시절을 신라와 수나라에서 보내는 판타지물답게 연개소문이 섬기던 이밀의 조카라는 설정.[22] 연개소문의 현 부인으로 연남건과 연남산의 어머니인데 배우 이세은이 연기했다.[23] 전쟁에 참여해 승리한 적도, 패배한 적도 있다. 명장 급은 아니었지만 전쟁에 나서기만 하면 백전백패를 기록하던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신검 같은 녀석과는 달랐으며 최소한 연남생 쪽에서 먼저 동생들을 괴롭히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면모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24] 이 드라마에서는 설정상 쌍둥이 형제로 나왔다.[25] 이후 연개소문이 이 사실을 알자 "어리석은 놈, 자신의 역량이 모자라 일이 그리 되었으면 마땅히 혀 깨물고 엎어져야 하거늘..."이라며 한탄하였다.[26] '물론 연남생도 잘한건 아니지만 동생 놈들이 형의 가족을 도륙내고 형도 쫓아내 갈 곳이 없게 만들었으니 연남생이 어디를 가겠냐? 길에서 객사하거나 동생들 손에 죽을 수는 없으니 당나라에라도 투항해야지.' 딱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연남생의 투항도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당나라의 힘이라도 빌려서 가족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아들 연헌성의 강권에 하는 수 없이 가는 것으로 나온다. 연개소문도 연남생은 못난 자식이라고 까는 정도에 멈췄지만 연남건과 연남산은 직접 죽이려고 했다. 참고로 고증 같은것은 씹어먹은 드라마라 고구려 멸망 시기까지 연개소문이 생존해 있다. 추가로 이때 평양에 들어온 당군을 직접 마주하고 심지어 과거에 이밀의 반란군 동지였던 이세적하고 재회하면서 "고구려는 다시 돌아올걸세"라는 말을 삼기고 삼족오에 타 승천한다. 현실성? 그런거 없다[27] 실제 역사에서도 당고종한테 동생을 살려달라는 간청을 한 기록이 있으니 고증에 맞는 묘사이다.[28] 사실 본작의 김인문부터가 형인 문무왕과 친당과 반당으로 갈려 대립하다가 결국 형의 거병에 서로 창검을 맞댈번한 상황까지 갔던 걸 생각하면 이렇게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