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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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군(朝鮮軍)은 조선의 정규군으로 1392년 8월 13일, 태조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위받아 조선 왕조를 개창하면서 설립되었다. 조선군은 1897년 왕조가 칭제건원하면서 대한제국군으로 재편되었으나, 1907년 일본 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산되었다. 사실상 해체일은 1907년이라 보면 된다.
1.1. 전기[편집]
[1]
초기 조선군은 고려 왕조를 쿠데타로 접수해 고려군의 체계를 그대로 계승했다. 고려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 역시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뉜다. 중앙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던 2군 6위에 태조 1년(1392) 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 좌, 우위 2위를 더해 10위(十衛)로 구성된 의흥삼군부로 구성되었다. 각 10위에는 취재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갑사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2] . 그러나 태조 3년(1394) 의흥친군위와 나머지 8위의 지휘체계가 달라 혼선이 있다는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10위는 10사(十司)로 개편되었다. 이에 중앙군이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로 편제되었고, 중군(中軍)에는 ○○시위사, 좌군에는 용○순위사, 우군에는 호○순위사가 배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즉위 이후 시위사를 9개로 증강하고 순위사를 1개(충무순금사)만 남겨놓게 되었다. 세종 즉위 이후 10사는 무려 12사로 증강되었으나 1424년 다시 10사로 돌아왔고, 이후 1445년에 또다시 12사로 늘어났다. 결국 문종 1년(1451) 기존 시위사들을 5사(五司)로 통폐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12사 병력 뿐 아니라 기존에 금군에 포함되던 별시위, 총통위, 방패 등도 5사에 속하게 하였다.[3]
이후 세조 대에 오사는 오위로 개편되었는데, 각 위에는 갑사, 팽배수, 친군위, 파적위 등의 부대가 소속되었으며, 지방에서 번상하는 정병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나누어져서 근무했다. 이를테면 경상도 출신 정병은 용양위에 배치되었고, 평안도 출신 정병은 호분위에 배치되었다. 다만 한양 출신 정병은 무작위로 배치되었다. 총통위는 해체되었으나 중앙군과 지방군 각 부대에 화약무기가 보급됐다.
- 중군(中軍)
- 좌군(左軍) → 용양위(龍驤衛, 좌위)
- 좌우위(左右衛) →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
- 신호위(神虎衛) →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 흥위위(興威衛) →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
- 우군(右軍) → 호분위(虎汾衛, 우위)
지방군은 크게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으로 나누어졌다. 육수군은 각 도에 있는 영과 진에 복무하며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영진군(營鎭軍)과 돌아가며 서울에서 궁궐을 지키던 시위패(侍衛牌)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선군은 말 그대로 수군으로 수영에 배치되어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경국대전이 반포된 후엔 기선군은 수군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여기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도 있었다.
이후 세조 대에 이르러 조선 초기 지방군사제도인 진관 체제가 자리 잡았는데, 진관 체제는 전국을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나누어 이중 삼중으로 틈틈히 방어망을 구축한 제도이다. 제진은 거진의 명에, 거진은 주진의 명에 복종하였으며 허락 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것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주진의 장은 병마절도사였으며 거진의 장은 병마첨절제사(첨사)나 판관[11] , 제진의 장은 병마절제도위가 맡았다. 단 첨사나 도위 같은 경우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현감이나 현령이 도위를 겸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진관 체제는 대규모의 적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지적되었고, 실제로 니탕개의 난 당시 3만여명에 달하는 여진족의 준동에 취약점을 노출하였다. 따라서 선조 대에 진관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로 개편되었다. 제승방략은 외적의 침입 시 각 진관의 병사들이 사전에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집결하고 이들을 수도에서 파견된 경장(京將)이 지휘하는 체제였다. 하지만 제승방략 역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문제점을 보이며 폐지되었다.
태종~세조 시기 조선군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북방 방비 및 여진족, 왜구 토벌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국경 확립에 공헌한 4군 6진 개척, 1396년과 1419년에 있었던 2차례의 대마도 정벌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로는 국토 방어에 힘쓰며 가끔 예방전쟁 성격을 띠고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는 것 이외에는 대외 확장은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 진법을 계승하고 후일 집대성해서 문종 때 오위 진법으로 나타난다. 오위 진법은 장군 아래 5위를 두고, 각 위는 5부가 있고, 각 부는 4통으로 구성되고, 사통 2부대는 기병과 2부대는 보병으로 구성되는, 보병과 기병을 균형있게 운용하여 적을 막으면서 각 부대 간에 상호 지원할 수 있게 만든 탄력적인 진법이다. 기병은 중기병 40%, 궁기병 60%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환도는 기본착용했다. 추가적으로 기병은 척후도 담당했는데 보통 10리 정도 안팎을 정찰하였다. 보병은 5가지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팽배수, 소형 총통으로 무장한 총통수, 장창으로 무장한 창수, 길이가 긴 외날 칼인 장검으로 무장한 장검수, 활로 무장한 궁수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총통과 팽배수는 무조건 20%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머지 병종은 상황에 따라 가감할 수 있었다. 단순 비율만이 아니라 도끼나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등 전장의 즉응성을 강조했다.
진영의 경우 팽배수가 1선에서 팽배와 환도로 무장하여 대기하고, 총통수가 2선에서 저격을 가하고, 3선과 4선에 있는 창수와 장검수가 들어오는 적을 요격하면, 5선에서는 궁수가 적을 저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병종 상관없이 찰갑이나 다른 갑옷을 입었으며, 총통수를 뺀 나머지 병종은 환도를 패용해서 근접전을 대비하였다. 전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방위위주로 모루인 주통과 예비대인 전통으로 나누어진다. 적이 오면 주통과 전통이 합세하지만 적이 물러나도 주통은 진을 지키고 전통이 나아가서 적을 섬멸한다. 이 진법이 쓰인 당시 주적은 여진과 오이라트 족으로 정주민이 유목민을 어떻게 상대하야 하는지 고민이 드러난 전법이다. 그러나 오위진법은 유목민 상대에 특화된 전법이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막는데 큰 실패를 겪었으며 이후 명에서 들어온 절강병법으로 대체되었다.
1.1.1. 성종 대 시작된 군축과 그 이유[편집]
조선시대에는 현직 관료를 제외한 15세 이상 60세 이하 대부분의 양인 남자는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나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으로 편성되었다. [12]
그러나 조선군은 초기부터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태종 15년(1415)에 조정에서 정군에 지급하는 봉족의 수를 경작 면적과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는데[13] 당시 봉족은 정군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보니 아예 정군이 봉족에게 자기가 할 일까지 떠넘기는 행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오죽하면 태종이 1407년에 정군이 자기가 배를 타지 않고, 능력을 불문하고 봉족을 시켜 대신하게 하니, 적(賊)을 만나면 모두 배 밑바닥에 엎드려서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군역 운영상의 문제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정군의 수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 보이자 세종 23년(1441)에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의 구분 없이 건강한 자를 택하여 정군으로 삼고, 솔정(率丁)의 수에 따라 봉족을 주도록 하여[14] 전력누수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그것이 안되어서 세조 10년(1464)에 조선초기부터 실시한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바꾸어 시행하면서 종래의 봉족을 보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게다가 세조 시기에 조선 전기의 최대 수준으로 증강되었던 조선군이 이후엔 성종이 즉위하자마자 무자비한 군축에 들어간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무로마치 막부가 열리면서 조선의 해안을 위협하던 왜구의 주요 활동무대가 조선 연안에서 중국 남동부 연안으로 점차 이동하였기에 해안의 안보가 안정되기 시작했다.[15] 여기에 중국 정세가 안정되고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안보적인 소요 자체가 크게 줄어든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다. 게다가 유교국가 특유의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조선의 입장에선 대규모 병력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고 조선의 부실한 유통망도 한몫했다. 세종 14년에 조선 조정에서 파악한 공식 인구는 573만 명[16] 이었고 중종 38년에는 946만 명에 달했다. 조선 특유의 말단행정의 허점으로 인하여 통계에 안잡힌 인구까지 합하면 분명히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와 중기는 이전 한반도 정권들에 비하면 상당기간동안 상업이 비활성화 되었던 시기이다. 상업이 부재한 만큼 유통망을 국가가 유지해야하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조선은 유통망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군대란 것은 생산성은 없지만, 유지비가 매우 많이 드는 집단이다. 충분한 부를 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징세를 하고 징세한 세수를 서울로 가져와 군사비로 치환을 하는 행위가 힘들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이다.
이러한 경제적 문제는 조선의 역사가 계속 되는 내내 점점더 심각해졌다. 일례로 세종 시기에 기병에게 바로 지급할 수 있는 군마가 4만 필이었는데 명종 시기에 가면 2만 6천필로 급락하고 만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한번 보자. 출처는 성종실록 44권, 성종 5년 윤6월 17일 경자 3번째기사이다.
경인년[17]
에 이르러 별시위(別侍衛) 2천 4백 명에서 9백 명을 감하고 갑사(甲士) 2만 명에서 1만 명을 감하였고, 파적위(破敵衛) 3천 명에서 5백명을 감하고 대졸(隊卒) 3천 4백 40명에서 4백 40명을 감하고 팽배(彭排) 6천 명에서 1천 명을 감하고 정병(正兵) 8만 6천 명에서 5천 8백 60명을 감하였고, 임진년[18] 에 또 9천 7백 45명을 감하였으니, 양년에 정병을 감한 수가 벌써 많습니다. 이제 또 감하면 병졸이 단소(單少)하여 갑자기 위급(危急)함이 있으면 일을 구제할 수가 없으니, 그 군국의 대계에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군호(軍戶)가 파폐(罷弊)함을 염려한다면 마땅히 그 번수(番數)를 성글게 하여서 그 힘을 쉬게 하소서. 신은 또 듣건대 전날의 군액(軍額)을 감할 때에 관리가 간교(奸巧)를 부려, 감함을 받은 자는 모두 부호(富戶)이며 가난한 자는 뇌물을 줄 수가 없어 오히려 군적(軍籍)에 편입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청컨대 《대전(大典)》의 수에 의거하여 감하지 마소서.
지역별 세부적인 군축 내용은 성종실록 15권, 성종 3년 2월 1일 무진 7번째 기사에 나와 있다.
3년에 걸쳐 조선군은 대규모의 군축을 단행하였다. 수군도 국가 방위보다는 미곡 운송에 쓰이는 조운에 치중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군축으로 인해 세조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조선의 정예병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중보병인 팽배수와 중기병의 비율이 낮아진 것은 조선 중기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였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고려 공양왕 시기에 과전법을 실시하여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정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상도 전국 단위에서 경기도로만 한정하였다.
그래서 토지를 개혁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경제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토지중심 경제체제였고 강압적인 힘으로라도 쌀본위나 곡물본위제도를 채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힘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과전법으로 받은 토지를 국가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신전, 휼양전 같은 예외적으로 일부 토지를 한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이용하고, 편법으로 상속을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토지겸병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만 수취하도록 했던 것도 지키지 않고, 수조권만 주었는데 아예 토지를 소유해 버리는 건 덤.
문제는 이게 그저 토지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종 시기부터 관료들의 수를 늘리다보니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토지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점점 그 대상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기존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병제에 가까워서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 시기를 지나면서 심화되었다.
게다가 군인들의 실전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사라지면서 병종의 불균형까지 심화되었다. 일반적인 세병제의 장점은 팽배수와 중기병 같이 단순 훈련만으로 기르기 힘든 고급 병종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이지만 조선의 세병제는 이렇게 못한것이다. 한마디로 전투에 대한 노하우가 쭉 이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굳이 따지자면 양반들의 스포츠였던 활로 인해 궁수의 수급은 어느 정도 원활했으나, 팽배수나 중기병 같은 근접전투병들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와, 육성 노하우가 어느 순간 사라졌던 것이다. 물론 근접전을 수행할 장검류들을 든 장검수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 오위체계 내에서도 팽배수를 지원하도록 되어있지 이들이 일선에서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더욱이 기병과 보병에 맞설수 있는 창병 육성을 완전히 놓아버린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이는 조선군의 전성기인 초기의 세종 때부터 문제였는데 세종 13년인 1431년에 갑사 취재를 응하는 사람들에게 기창세와 보창세를 훈련하게끔 했는데,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북방을 제외한 조선 전 지역에서 무예를 연마하는 것에 대해 나태해지기 시작했고, 세종 말기엔 정예부대인 갑사들마저 아예 평상시엔 자신들의 병장기를 팔고, 상번할 때만 다른 사람에게 병장기를 빌려가는 사례가 고발되었을 정도다. 한마디로 무예를 연마할 생각이 없었고 무기 관리도 부실해진것이다.[19]
그로 인해 조선은 창병 육성뿐만 아니라 아예 창 제작술 자체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이후인 조선 후기엔 1625년에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10년 뒤인 1635년까지도 창대로 쓸 목재의 조달조차 되질 않았다. 조총이나 장검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큰 언급이 안되었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드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경기도의 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 나무를 써야하는데 그럴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론 창대를 제작할수 있는 우수한 품질의 목재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창은 고대부터 가장 싸게 제작할 수 있는 무기였으며, 창을 주무기로 사용했던 많은 나라들과 조선 이전의 왕조들은 목재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문제를 해결했는데 정작 조선에는 이러한 제작 노하우가 사라져 있던것을 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에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후대에 등장할 총보다도 비쌌다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 기준으로 조총 가격이 3.5석일 때 창대 가격만 해도 2석이었는데 이는 다른 국가들에게서는 상상도 못할 이상한 일이었다.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는 장창을 만들려고 하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는 대나무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할 정도였다.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다.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데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결국 조선은 창병 육성은 물론 창 제작에 대한 노하우조차 복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수한 창병은 실전의 경험 없이 운용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창병은 공격력을 가진 질량 벽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절대 진형을 흐트리면 안되기 때문이다. 즉 피할 수 있는 화살이나 투창, 도끼, 단검들을 맞고 죽을지언정 절대 진형을 흩뜨려서는 안되었기에 매우 높은 규율과 경험, 용기를 요구한 병종이었다. 타 병종과 달리 창병은 진형을 흩뜨리는 순간 그 존재가치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개인 기예로 창술을 익힐 수 있겠지만 전장터에서 창병 집단에게 요구하는 능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전 정권을 규탄하며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도 이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는 직전법을 실시했지만 국가가 지는 부담이 가중되는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다.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손을 더 대었다가는 가뜩이나 고려 말기부터 조정에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느라 권력을 빼앗긴 각지의 지방 토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중앙관료들까지 합세하면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이 어디서 얼마나 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단종 복위 운동이랍시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벌어지는 판에 계유정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 스스로도 4군 6진 같은 새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에 전가 사변 같은 북방 사민 정책을 시행하고 원주민인 여진족들의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역의 토호를 토관으로 임명했으므로 이들에게 중앙정부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진 부족들이 변방을 공격하는 횟수가 증가하여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자주 하다보니 조선군은 병력의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보법을 실행해 이전처럼 군호를 지정해서 굴리지 않고 양인개병제로 바꾸어서 3명 단위로 묶어 1명은 정군, 나머지 2명은 보인으로 돌아가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해 정규군의 수를 13만 5천 정도로 불렸다. 조선군의 인사고과에서 활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도 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하면 근접전의 숙련도가 개나 주는 꼴이 되어버릴 정도로 형편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의 숙련된 무사집단이 아닌 숙련도는 낮지만 필요한 만큼 움직여줄 대규모 병력이었기에, 이 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숙련도가 중요한 팽배수와 중기병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즉 3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 3세기부터의 로마, 동로마 제국처럼 재원은 부족해지고 반란, 외침 등으로 병력수요는 이전시기보다 더 늘어났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돌려막기를 추구한 것이 세조의 정책이지만 이는 병력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계유정난에 가담한 공신들에 의해 훈구파가 형성되고 세조 이후 성종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된 사림파들이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자 이로 인해 양인이 감소하여 군인층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팽배수들이 각종 역사에 동원되면서 점차 양인들 사이에서 기피되고 천인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량역천으로 변질되어 팽배수들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만 이시기에는 주적인 여진족들을 상대할 정도면 충분했기에 군사적인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이로 인해 1541년 중종 36년에 수포제가 시행되어 군역 부담자에게 번상가를 포로 일괄 징수해서 그 비용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된다. 이후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은 1년에 군포를 2번 내는 납포군으로 변환된다.
1.2. 중기[편집]
1592년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조선군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각지의 산성을 보수하고 이순신 등 유능한 장수들을 승진시키는 등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규모[20] 로 인해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국왕이 수도를 버려 수도가 일본군한테 넘어가고 요동으로 내부를 고민할 정도로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다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봉기와 항쟁, 명군의 대규모 파병,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한 관군의 반격으로 개전 1년 만에 전세가 일본 우세에서 교착 상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심유경의 강화 협상으로 흐지부지되다 일본군이 14만의 병력으로 침공한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만다. 여기서 조선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 남원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이 명량 해전과 직산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은 다시 수세에 몰려 왜성에 의지해 방어만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결국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임진왜란 와중에 오위진법은 보병 위주인 일본군과 싸우면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21] 조선은 조총을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593년에 조총을 모방 생산하는데 성공한다.[22][23] 여기에 김충선 같은 항왜들의 도움을 받아 조총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임란 이후에는 조총이 보병의 주력 무기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명군이 불랑기포로 많은 활약을 선보이자 임란 이후로 불랑기포가 주력 화포로 많이 쓰이게 된다. 기존 총통들도 꾸준히 개선해서 사용한 것은 덤.
기존 군제가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가진 조선은 1593년 새로운 중앙군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토대로 조총을 쓰는 포수(砲手), 창검으로 무장한 살수(殺手), 활로 무장한 사수(射手)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로 전환한다. 지방군 역시 1594년에 속오군 위주의 영장 체제로 개편되어 기존의 제승방략 체제를 대신하게 된다.
보통 척계광의 기효신서(절강진법)를 기반으로 삼수병 체제를 구성했다고 배우는데 기효신서 자체는 단순 병법책이 아니라 왜구를 상대로 농민들을 훈련시켜 편성하는 법을 수록한 책이다. 기효신서는 팽배수, 낭선, 당파수 등 다양한 병종이 있지만 단병접전에서 왜구한테 밀리던 조선군 입장에서 근접전은 최소화 할수 밖에 없었고 이는 훈련도감의 삼수병, 즉 사수, 살수, 포수 등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에서 청군에게 패하였다. 이때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소멸된 평안도 북방군을 대신해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을 신설해 중앙군을 보강하고, 산성 위주 방어 전략을 이용해 청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청군은 이를 눈치채고 산성을 우회해 한양을 향해 속공으로 나왔다. 여기에 청군 기병에 맞설 기병과 창병이 부재하고 지나친 조총수 위주의 보병 편제로 인해 청군 기병을 저지할 수단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전거와 기병, 보병을 함께 운용하는 거기보전을 도입하려 시도했다. 특히 삼수병체제는 기본적으로 보병체제이기 때문에 산성 방어에는 적당했지만 야전에서는 기동력을 가진 청의 철기병에는 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오위전법을 가져오되 화력덕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거기보전이다. 거기가 바로 거대한 기계, 즉 화포를 의미한다. 실제 화거방진도를 보면 하나의 방진은 100량의 화거와 20량의 목화수거로 구성되는데 화거 한대당 조총이 50문에 목화수거는 15문이라는 미친 화력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산이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전거를 운용하기에는 제약이 많았고 조선의 재정이 좋지못해 거기보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전거와 군마를 대량으로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예산 문제로 만기요람이라고 군수물자 확인서에는 훈련도감에 전거가 겨우 51량만 있게 된다. 결국 살수가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기병을 상대하는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 장창을 빼고 구창과 협도곤을 추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 숙종 때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금위영을 신설하면서 오군영 체제가 완성되고, 수도인 한양 도성과 주변 도시들을 지키게 된다.
왜란과 호란 이후부터 조선군은 조총수가 태반인 보병과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 불랑기포와 기존 총통을 다루는 포병 전력으로 구성된다. 다만 화포를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와 화약을 만드는데 필수인 유황의 부족으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동시대 유럽의 군대가 사용한 것보다 어느 정도 뒤쳐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구리나 유황같은 화포 운용에 있어 중요한 자원들을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인 탓이 컸다. 숙종 시기가 되어서야 진산 근방에 유황이 대량으로 채굴되기 시작해서 겨우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 고충을 짐작할 만하다. 의외로 전술은 동시대 유럽에서 쓰던 선형진과 유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조선군이 조총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자 신 유럽처럽 군악대가 편성되어 되었다. 오방색으로 전진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북으로 이동하는 거리를 나타내었고 전투시작을 알렸다. 징으로 멈추하게 후퇴를 명했다. 소라로 만든 나각으로(일종의 뿔나팔같은 악기) 소집시키고 나라는 좀더 큰 징으로 전열을 분열시키고 솔이나 방울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살수와 조총수를 분리했다.신호를 하기 전에 승자총통 같은 화기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조선후기 진법과 무예 훈련과 관한 연구>[24]
그러나 화포 부분에서 유럽과의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사실 18세기 전반까지 조선이나 서양이나 화포 제작법에는 토모를 사용했는데 토모는 습기가 차고 무엇보다 규격화하여 제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원군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토모의 습기는 화포의 성능을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는 그리보발이 대포 주조틀의 표면을 깎아내는 '천공 기술'을 사용하면서 화포의 규격화에 성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1750년대에 '강선'이 등장하면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강선'이 개발되었음에도 1780년에도 활강포를 생산한 걸 보면 불랑기포처럼 불완전했던 것 같다.[25]
한편 바다를 지키던 수군은 수도권 인근 해안을 지키던 통어영(統禦營)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으로 나눠지게 된다. 정조 때 국방비 절감의 일환으로 통어영과 강화도를 지키던 진무영이 통합되었으나(1779), 군사상의 비효율성으로 얼마 후 복구되었다(1789).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조선은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였다. 일종의 예비군 개념인 속오군,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소속 정규 지방군 및 수영(水營) 소속 수군, 오군영(五軍營)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까지 합하여 약 20~30만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7월 4일을 보면 병자호란 바로 전년의 조선군 총수는 약 10~11만에 중앙군은 3만 5천정도, 종전 3년 후이자 최초 기사로부터 4년 후인 18년 12월 1일 기록에는 거의 30만까지 불어나있다. 이후 20만 전후의 규모에서 꾸준히 유지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기병 역시 수만 단위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군의 경우, 훈련도감 6~7천여명, 어영청과 금위영 각 2천여명[26] , 금군 및 호위청을 합쳐 1천여명 등 약 1만 3천명 가량이 존재하였으며, 이 밖에도 경기일대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과 수도를 둘러싸던 4유수부 (광주, 수원, 강화, 개성)을 지키던 수어청, 총리영(總理營)[27] , 진무영(鎭撫營), 관리영(管理營)[28] 등에 속한 병력이 있었다. 지방군의 경우는 별무사[29] , 친기위[30] , 별기위[31] 등 정예 기병대를 상비 병력으로 운용하였다. 보병들은 사수와 살수가 도태되고 포수 위주로 개편되어 아예 포군(砲軍)이라 불리는 등 조총 위주의 편제가 굳어졌다. 청과 인접하여 있던 평안도의 경우, 2만 가량의 수비군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군대의 양만 지속적으로 늘어났지 정작 실질적인 전력은 중앙군의 규모인 수만 단위로 계속 머물렀고 지방군은 여전히 형편없어 지방의 반란조차 제대로 진압못하여 중앙군을 파견해서 진압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는 조선 조정을 고질적으로 괴롭힌 좋지못한 재정, 그리고 왜란과 호란 이후 100여년에 걸친 평화가 중앙군과 삼남 지방의 지방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지방군의 춘조/추조 (봄, 가을의 훈련)이 이루어지던 숙종~영조 시기와는 다르게 정조 시기부터는 춘조나 추조가 제대로 치루어지지 않았고, 성을 방어하는 훈련인 성조마저도 기준을 채우지 못하였다.
수군의 경우는 80~100척 가량의 판옥선이 삼도수군 (충청, 전라, 경상)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서히 약체화되어가고 있던 지방군과는 달리 수군은 청나라 해적, 이양선 출몰 등의 위협으로 적어도 순조 때까지는 잘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군 역시 나중에가면 함선 수의 감소와 병력 감소 등으로 인해 육군과 사정이 비슷해질 정도로 서서히 약체화 되어가고 있었다.
1.3. 후기[편집]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의 방위 체계는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재정도 좋지못하고 오랜 평화로 군대를 크게 유지할 필요성도 없었기에 조선군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기에 서구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나타나도 이에 대항할 배 한 척조차 없게 된것이다. 그나마 대원군이 집권하여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고 서구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병기 개발에 노력하고 오군영을 다시 보강하면서 약간이나마 나아진다. 특히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서양제 무기의 파괴력을 인식하고 신무기 제작을 진행했다. 대표작으로는 섬유를 겹쳐 만든 방탄복인 면제배갑이나 수중 기뢰인 수뢰포 등이 있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조선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백전 발행 등으로 조선 경제를 파탄내면서 조선군은 다시 강화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고종이 친정하자 군대에 대한 지원이 끊기면서 그 결과 운요호 사건 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군도 변화를 맞는다. 우선 삼군부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아래 군무사(軍務司)를 설치하여 오군영을 무위영(武衛營)[32] 과 장어영(壯禦營)[33] 으로 축소 개편한다. 그 유명한 별기군이 바로 무위영(武衛營) 소속이었다. 또한 서양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은 폐지되고 조선의 중앙군은 청, 일본, 조선의 군사교리가 모두 섞인 신식 군대인 친군영(親軍營)으로 변모한다. 지방군 역시 신식 군대화가 진행되어 강화도에 주둔하던 친군심영(親軍沁營)[34] , 평양에 주둔하던 친군서영(親軍西營), 대구에 주둔하던 친군남영(親軍南營), 부평에 주둔하면서 경기 연해를 지키는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35] 등이 설치된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각 도의 감영, 병영, 수영에 소속된 구식 군대는 남아있었다.[36]
한편 중앙의 친군오영은 전후영(前後營)은 일본군의 영향을, 좌우영(左右營)은 청군의 영향을, 별영(別營)은 전통적인 조선군의 영향을 받아 편제와 교리 등이 중구난방이었다. 그 뿐 만 아니라 당시 한양에는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용호영(龍虎營) 등 기존 조선군 군영들도 온전하게 남아있던터라[37] 중앙군 편제는 상당히 복잡하고 세분화되었었다. 결국 상술한 전통적인 조선군 군영들은 1884년 해체 후 인원들은 친군영에 이관하였으며, 친군영 역시 오영(五營) 체제에서 삼영(三營)체제로 개편한다. 친군 전영과 좌영을 통폐합한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통폐합한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친군 별영을 개편한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으로 친군삼영(親軍三營)체제를 유지하였다가 1891년 북한산성 일대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을 통위영(統衛營)에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을 신설하면서 친군사영(親軍四營)체제로 굳어지게 된다.
친군영(親軍營)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실전 경험을 다수 겪기도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 병력과 심영(沁營) 병력[38] 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인 바 있으며 같은 해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할 당시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평양 기영(箕營) 등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하고 친일내각을 세운 이후 갑오개혁으로 중앙군은 시위대[39] , 훈련대 [40] 가 설치되어 근대식 군대로 재편된다. 하지만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가 일본군과 결탁하여 아군인 시위대를 공격하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가담함에 따라 훈련대와 시위대는 친위대[41] 로 개편된다. 지방군 역시 갑오개혁 당시 친군영(親軍營)들이 해체된 이후 구식 감영군(監營軍) 혹은 병영군(兵營軍)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터라 진위대가 신설된다. 이후 의병 봉기가 빈발해지자 병력 규모가 증강되어 중앙군은 4400명으로, 지방군은 3031명으로 증강되었다.
- 오군영(五軍營) 폐지 이후 중앙군 군영의 변화
- 조선 후기 지방군 군영의 변화
중앙과 지방의 친군영들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갑오개혁으로 인해 모두 폐지되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군은 대한제국군으로 재편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대한제국군을 참고.
2. 편제[편집]
육군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눠진다. 전기는 문종 때 형성된 오위 기준이다.
- 전기
- 오(伍) : 병사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최하위 제대. 지휘관은 오장(伍長)으로 불렀다. 오장은 군관이 아니라 병졸이 맡았다. 인원 숫자상으론 현재의 조[42] 에 해당한다.
- 대(隊) : 5개의 오(伍)로 이루어진 제대. 지휘관은 잡직 정·종9품 치력부위/근력부위 대정(隊正), 부지휘는 잡직 종9품 근력부위 대부(隊副). 현재로 치면 소대에 해당한다.
- 여(旅) : 5개의 대(隊)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중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잡직 종8품 장건부위 여수(旅帥)로 주로 기병이나 보병에서 승진한 이가 맡았다.
- 통(哨) : 5개의 여(旅)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대대와 비슷하며 지휘관은 통장(統將)으로 불렀다.
- 부(部) : 4개의 통(哨)으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연대 내지는 여단과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부장(部長)이라 불렀다. 부장은 종 6품의 병절교위에 해당한다.
- 위(衛) : 5개의 부(部)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사단과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종2품 위장(衛將)이 맡았다.
- 후기
- 대(隊) : 취사병 역할을 하는 화병 1명, 정군 10명과 그 지휘관인 대장(隊長)으로 이루어진 분대급 제대이다. 대장은 잡직 종8품이었으며 보통 군졸에서 승진한 이가 맡았다.
- 기(旗) : 3개의 대(隊)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소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잡직 정8품 맹건부위 기총(旗摠)이라 불렀다. 기총 역시 군졸에서 승진한 이가 맡았다.
- 초(哨) : 3개의 기(旗)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중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초관(哨官)이라 불렀다. 초관은 종9품 무관직이었다.
- 사(司) : 5개의 초(哨)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대대와 비슷한 제대이다. 지휘관은 파총(把摠)이라 불렀다. 파총은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이 겸임하기도 하였다. 이는 지방관이 해당 고을의 군사를 지휘하는 조선의 군사 체계 때문으로 이런 경우 겸파총이라 불렀다. 실제로 어영청과 금위영의 경우 경기도 일대 수령들이 겸파총이 되어 병력을 이끌기도 했다.
- 부(部) : 5개의 사(司)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연대와 비슷한 제대이다. 지휘관은 천총(千摠)이라 불렀다. 속오군에는 잘 보이지 않고 주로 오군영에 보이던 제대이다.
- 영(營) : 5개의 부(部) 내지는 5개의 사(司)로 이루어진 제대. 전자는 사단, 후자는 여단과 비슷한 제대이다. 지휘관은 대장(大將), 혹은 사(使)라 불렀다.[43] 지휘관 밑에는 부지휘관 겸 수석 참모 격인 중군(中軍)이 있다.[44] 중앙군은 오군영(五軍營)에 속해 대장과 사의 지휘를 받았고, 지방군은 해당 지역 감영이나 병영에 속해 관찰사나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3. 계급과 보직[편집]
3.1. 계급[편집]
- 도원수(都元帥) : 임시 계급으로, 지방군을 통솔하던 계급. 지휘 범위는 유동적이다. 주로 정 2품 이상의, 문신이 임명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최고위직이긴 하지만 전시에만 상설되던 임시성과,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령 계통으로 인해 도원수가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현대의 대장 혹은 현재 한국군에는 없는 원수 정도의 계급으로 현재의 합동참모의장 격.
- 대장(大將) : 오군영 중 삼군문(三軍門)으로 통칭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장. 종 2품의 무관직으로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訓鍊大將)은 서반 최고의 요직으로 대접 받았다.[45]
- 사(使) : 오군영 중 총융청과 수어청의 수장으로, 종 2품의 무관직. 대장의 하위 직책 같은 개념으로[46] , 초기에는 무관들이 주로 임명되었으나 수어청의 장인 수어사가 18세기 이후 문신인 광주유수 겸임으로 바뀌어 그 세가 약해졌다.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였던 종 2품의 무관직. 무관이 임명되는 단병사와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가 있었으며, 단병사는 경상도와 함경도에 각 2인, 나머지 6도에 각 1인씩 총 10인이 존재하였다. 지방의 병영에 배치되어 지방군의 훈련을 주재하였으며, 유사시 출전하여 근왕의 임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었으나, 병자호란에서도 보듯이 감사등 문관들이 임무에 상당 부분 간섭하였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은 모태가 된 당나라의 절도사의 그 것처럼 막강하진 못했다. 현대의 소장 ~ 중장 정도의 계급.
- 중군(中軍) : 각 군영에 속했던 종 2품 또는 정 3품의, 참모장 겸 부사령관 정도의 장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에 속한 중군은 종 2품의 품계를 갖고 있었으며, 평시 군영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군영 대장의 유고시 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한편 진무영 등 지방군에 속한 중군은 정 3품직이었으며, 병영이나 감영에 배치된 병마절도사나 감사의 수석 참모장을 맡았다. 현대의 소장 ~ 중장 정도의 계급.
- 방어사(防禦使) : 각 지방의 방어영에 배치된 종 2품의 무관직. 전원 지방수령이 겸한다. 지방의 방어를 담당하였으며 변란시에는 감사, 병사 등과 협조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기도 하였음. 방어사를 역임한 무관이 중군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 /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군영 대장으로 영전하는 것이 관례였던만큼 계급은 현대의 소장 정도로 추정된다.
- 별장(別將) : 각 군영에 속했던 종 2품 또는 정 3품의 당상군관. 금군의 장인 금군별장(禁軍別將)은 종 2품 무관직이었고 5군영과 각 병영에 소속되던 별장은 정 3품직으로 기병을 지휘하였다. 현재의 준장 / 소장(5군영 소속 / 병영 소속) ~ 중장(금군의 경우) 정도의 계급.
- 천총(千摠) : 현대의 연대나 여단급 정도의 부(部)를 지휘하던 정 3품 무관직의 장교. 군영마다 존재하였으며, 지방의 병영이나 감영에도 배치되어 지방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영장(營長) : 현대의 연대급 정도인 지방의 진영(鎭營)[47] 의 군사들을 지휘하던 정3품의 군관 벼슬. 중앙의 총융청, 수어청 등에도 존재하였다. 주로 속오군을 지휘하였으며, 중앙에서는 군영의 중군이나 판관[48] 이 겸임하였고 지방에서는 해당 지역 지방관 혹은 판관이 겸직하였다. 인조 때는 전임 영장제를 시행하여 상당 부분 권한이 확대되기도 하였으나 가속된 속오군의 천역화 등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자리가 됨. 하지만 북도 (함경도)등의 영장은 계속 존속하여 지방 방위에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절제사(節制使) : 진관 체제 하에서 중요한 거진(巨鎭)에 두었던 정 3품 무관직. 경주, 전주, 의주, 광주, 제주에만 두었는데 제주에만 병마수군절제사를 두고 나머지는 병마절제사를 두게 했다. 제주의 경우 제주 목사가 절제사를 겸했으며 경주, 전주, 의주, 광주에서는 부윤이 겸하였다.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첨절제사(僉節制使)[49] : 조선 시대의 거진을 담당하던 종 3품 무관직으로 만호와 같이 육군과 수군 모두에 존속하였다. 부산진 등 각 진마다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함경도 등 북도에도 배치되어 국경 경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대령 / 준장 정도의 계급.
- 만호(萬戶) : 지방의 진관 체제 하의 각 진에 속한 장교. 육군과 수군 모두에 존재하였으며 변경에서는 독자적인 방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종4품직으로 현재의 중령 정도의 계급.
- 파총(把摠) : 현대의 대대급 정도인 사(司)를 지휘하던 종 4품의 장교. 지방 수령이 파총을 맡은 겸파총제가 시행되기도 하였으며 중앙군인 5군영뿐만 아니라[50] 각 지방의 감영(監營), 병영(兵營) 소속 사(司)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정 4품직으로 현재의 대령 정도의 계급.
- 종사관(從事官) : 각 군영의 대장이나 중군 하에서 잡무를 처리하며 보좌하던 관직. 종 6품의 품계를 갖고 있었으며,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군영의 재정 업무를 겸하기도 하였으며 훈련도감 등에서는 화약색의 관리 중 겸임하여 화약 등 군수품 제조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의 소령 정도의 계급.
- 조방장(助防將) : 전란 시, 주장(主將)을 도와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임명되는 임시직이다. 주로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무재(武才)를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았다. 제주진관에서는 제주진관 관할 9진(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차귀진, 모슬진, 명월진, 애월진)중 만호가 지휘하는 명월진을 제외한 나머지 8진을 지휘하는 종9품 무관직으로 본토와는 다르게 상설직이었다. 조선초기 방호소 시절엔 감영에서 파견된 여수가 수장으로 있었다가 17세기 이후 9방호소가 모두 진(鎭)으로 승격된 후 제주진 병마수군절제사[51] 휘하의 조방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들 조방장은 제주출신 군교로서 제주목사가 임명한다.
- 권관(權管) :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에서 소규모 진보(鎭堡)를 책임졌던 종9품 무관직. 원래는 법에 없는 임시직이었으나 속대전에 기록되면서 정식 관직이 되었다.
- 초관(哨官) : 무관의 최하직. 종 9품으로 현대의 중대급 정도인 1개 초(哨)를 지휘하였다. 훈련도감에 34인, 어영청에 45인, 금위영에 41인이 존재하였으며 지방군에도 존재하여 초를 지휘하였다. 현대의 중위 / 대위 정도의 계급. 대부분의 무과 급제자들이 처음 제수받는 관직이었다.[52]
- 기총(旗總) : 서반 잡직 종8품으로 현대의 소대급 정도인 1개 기(旗)를 지휘하였다.
- 진무(鎭撫) : 무품으로 군영에서 군관을 보좌하여 군사와 관련된 실무를 담당하던 최하위 관직으로서 현대의 중사 / 상사 정도의 부사관 계급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 군교(軍校) : 무품인 아전으로 지방 군영 관청에서 군졸들 위에서 지휘하는 현대의 하사 계급에 대응한다.
3.2. 품계[편집]
- 조선에서는 정직과 잡직의 계급을 구분했는데, 정직은 무관 즉 한국군의 장교에 해당하는 자에게, 잡직은 군교 즉 한국군의 준·부사관에 해당하는 자에게 부여되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직(무관)과 잡직(군교)은 품계가 같아도 동등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직 종9품 전력부위 초관(중대장)이 잡직 정8품 맹건부위 기총(소대장)을 지휘했던 것, 군교(준·부사관)를 무관(장교)으로 천거할 경우에는 1품을 강등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3.3. 보직[편집]
3.3.1. 경관직[편집]
중추부(中樞府)[53]
- 정1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원
-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2원
-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6원
-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8원
-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副事)
- 종4품 경력(經歷) 1원
- 종5품 도사(都事) 1원
오위도총부
- 정2품 도총관(都摠管) 5원
- 종2품 부총관(副摠管) 5원
- 종4품 경력(經歷) 6원
- 종5품 도사(都事) 6원
훈련원(訓鍊院)[54]
- 정2품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1원: 타관의 겸직이다.
- 정3품 도정(都正) 2원: 1원은 타관의 겸직이다.
- 정3품 정(正) 1원
- 종3품 부정(副正) 2원
- 종4품 첨정(僉正) 4원
- 종5품 판관(判官) 8원
- 종6품 주부(主簿) 18원
- 종7품 참군(參軍) 2원
- 종8품 봉사(奉事) 2원
선전관청(宣傳官廳)
- 정3품~종9품 선전관(宣傳官) 24원
- 종6품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 2원
- 종6품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38원
- 종9품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12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 정5품 좌·우익위(左右翊衛) 각 1원
- 종5품 좌·우사어(左右司禦) 각 1원
- 정6품 좌·우익찬(左右翊贊) 각 1원
- 종6품 좌·우위솔(左右衛率) 각 1원
- 정7품 좌·우부솔(左右副率) 각 1원
- 정8품 좌·우시직(左右侍直) 각 1원
- 정9품 좌·우세마(左右洗馬) 각 1원
- 종6품 좌·우장사(左右長史) 각 1원
- 종7품 좌·우종사(左右從史) 각 1원
- 종6품 수문장(守門將) 5원
- 종9품 수문장(守門將) 18원
훈련도감(訓鍊都監)[55]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원: 의정이 예겸한다.
- 정2품 제조(提調) 2원: 호조판서,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 종2품 대장(大將)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2원
- 정3품 천총(千摠) 2원
- 정3품 국별장(局別將) 3원
- 종4품 파총(把摠) 6원
- 종6품 종사관(從事官) 6원
- 종9품 초관(哨官) 34원
- 지구관(知彀官) 10인: 항오(병) 중에서 취재하여 차출한다.
- 기패관(旗牌官) 20인: 항오(병) 중에서 취재하여 차출한다.
- 별무사(別武士) 68인: 항오(병)으로 차출한다.
- 군관(軍官) 15
- 별군관(군관(軍官) 15
- 별군관(別軍官) 10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국출신(局出身) 150
금위영(禁衛營)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원
- 정2품 제조(提調) 1원: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 종2품 대장(大將)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1원
- 정3품 천총(千摠) 4원
- 정3품 기사장(騎士將) 3원
- 종4품 파총(把摠) 5원
- 종4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2원: 고을의 수령이 예겸한다.
- 종6품 종사관(從事官) 2원: 문무관 각 1원.
- 종9품 초관(哨官) 41원
- 교련관(敎鍊官) 12
- 별무사(別武士) 30
- 군관(軍官) 5
- 별군관(別軍官) 10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기사(騎士) 150
- 별기위(別騎尉) 32
어영청(御營廳)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원
- 정2품 제조(提調) 1원: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 종2품 대장(大將)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1원
- 정3품 천총(千摠) 5원
- 정3품 별후부천총(別後部千摠) 1원
- 정3품 기사장(騎士將) 3원
- 종4품 파총(把摠) 5원
- 종4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0원: 고을의 수령이 예겸한다.
- 종6품 종사관(從事官) 2원: 문무관 각 1원.
- 종9품 초관(哨官) 41원
- 교련관(敎鍊官) 12
- 기패관(旗牌官) 11
- 별무사(別武士) 30
- 군관(軍官) 41
- 별군관(別軍官) 10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가전별초(駕前別抄) 52
- 기사(騎士) 150
수어청(守禦廳)
- 종2품 사(使)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2원
- 정3품 천총(千摠) 1원
- 종4품 파총(把摠) 3원
- 종6품 종사관(從事官)
- 종9품 초관(哨官) 12원
- 교련관(敎鍊官) 7
- 군관(軍官) 3
- 한량군관(閑良軍官) 283
수어청의 남한(南漢)
- 정3품 수성장(守城將): 광주부윤(廣州府尹)이 예겸한다.
- 정3품 유영별장(留營別將) 1원
- 정3품 성기별장(城機別將) 1원
- 종9품 초관(哨官) 5원
- 교련관(敎鍊官) 10
- 기패관(旗牌官) 60
- 군관(軍官) 43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이속군관(移屬軍官) 290
- 부료군관(付料軍官) 27
총융청(摠戎廳)
- 종2품 사(使)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천총(千摠) 2원
- 종4품 파총(把摠) 2원
- 종9품 초관(哨官) 10원
- 교련관(敎鍊官) 15
- 군관(軍官) 14
- 감관(監官) 2
- 수문부장(水門部將) 1
- 한량군관(閑良軍官) 300
수어청의 북한(北漢)
- 정3품 관성장(管城將) 1원
- 종4품 파총(把摠) 1원
- 종9품 초관(哨官) 6원
- 교련관(敎鍊官) 4
- 기패관(旗牌官) 5
- 수첩군관총(守堞軍官摠) 2
- 군기감관(軍器監官) 1
- 소임군관(所任軍官) 3
- 부료군관(付料軍官) 20
- 성문부장(城門部將) 3
호위청(扈衛廳)
- 정1품 대장(大將) 1원: 시·원임대신=의정, 국구 중에서 겸한다. 비록 대신(=의정)이어도 훈척(勳戚)이 아니면 겸할 수 없다.
- 정3품 별장(別將) 3원
- 군관(軍官) 350
- 소임군관(所任軍官) 3
- 당상별부료군관(堂上別付料軍官) 1
용호영(龍虎營)
- 종2품 별장(別將) 1원
- 정3품 장(將) 7원
- 당상군관(堂上軍官) 16
- 교련관(敎鍊官) 14
- 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80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56]
- 종2품 대장(大將) 각 1원
- 종6품 종사관(從事官) 각 3원
- 각 부장(部將) 4
- 무료부장(無料部將) 26
- 가설부장(加設部將) 12
관리영(管理營)
- 종2품 사(使) 1원
- 정3품 중군(中軍) 1원
- 종사관(從事官) 1원
- 별장(別將) 2
- 천총(千摠) 3
- 백총(百摠) 4
- 파총(把摠) 6
- 초관(哨官) 32
- 교련관(敎鍊官) 8
- 기패관(旗牌官) 36
- 당상군관(堂上軍官) 50
- 군관(軍官) 250
진무영(鎭撫營)
- 종2품 사(使) 1원
- 정3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사관(從事官) 1원
- 천총(千摠) 4
- 파총(把摠) 10
- 초관(哨官) 36
- 교련관(敎鍊官) 10
- 기패관(旗牌官) 71
- 군관(軍官) 15
3.3.2. 외관직[편집]
경기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3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7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8원
- 종4품 만호(萬戶) 4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13원
- 종2품 수군통어사(水軍統禦使) 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2원
- 정3품 절도사(節度使)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당상 광주중군(廣州中軍)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6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2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5원
- 종9품 별장(別將) 7원
충청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종3품 우후(虞候)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3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38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2원
- 정4품 우후(虞候)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1원
경상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3원
- 종3품 우후(虞候) 2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6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25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39원
- 종2품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1원
- 정3품 당상 우후(虞候)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절도사(節度使) 3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6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4원
- 정4품 우후(虞候) 2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3원
- 종4품 만호(萬戶) 15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3원
- 종9품 권관(權管) 2원
- 종9품 별장(別將) 10원
전라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우후(虞候) 1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7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35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3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4원
- 정4품 우후(虞候) 2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6원
- 종4품 만호(萬戶) 15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 종9품 별장(別將)
황해도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1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8원
- 종4품 만호(萬戶) 3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8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2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1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5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3원
- 종9품 별장(別將) 5원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1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12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3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1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함경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3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1원
- 정3품 당상 우후(虞候) 2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24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7원
- 종4품 만호(萬戶) 18원
- 정6품 평사(評事) 1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4원
- 정3품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정3품
- 정3품 진영장(鎭營將) 6원
- 정3품 위장(衛將) 10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3원
- 종9품 권관(權管) 15원
- 종9품 별장(別將) 2원
평안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2원
- 정3품 당상 우후(虞候) 1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24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25원
- 종4품 만호(萬戶) 15원
- 정6품 평사(評事)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1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2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9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5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1원
- 종9품 권관(權管) 14원
- 종9품 별장(別將) 4원
4. 우수성[편집]
4.1. 궁시 병과의 정예화[편집]
왜적은 지난날 중국의 창법, 조선의 편전, 일본의 조총이 천하의 제일이라고 하였다.[61]
지봉유설 권18 기예부
남곤이 아뢰기를,
"왜인도 활을 잘 쏘던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비록 쏘는 자가 있었으나 활이 강하지 못하여, 맞은 자가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궁(角弓)을 사용하여 쏘던가?"
하매, 나사항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방패 안에서 활을 쏘았으므로 무슨 활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남곤이 말하기를,
"방패 안에 있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쏘아 맞혔는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그 방패 위에 두 귀[耳]가 있었는데, 왜인들이 반드시 이를 통하여 엿보았으므로 쏘아 맞힐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4.2. 화약무기의 대량 운용[편집]
대규모 전투로 나라가 혼란했던 조선 초기의 북방 개척 시기, 왜구 격퇴 시기 및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주로 화약 무기 분야에서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온 화포를 이러저리 뜯어보고 개량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이렇게 쌓아둔 노하우를 바탕으로 비격진천뢰나 승자총통, 세총통, 천보총처럼 독자적인 병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고려 말의 혼란으로 무기 제작 지식이나 운용 노하우등이 많이 실전되어[62] 화포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조선 초창기에는 총통이 활보다 성능이 떨어져서 아예 전부 폐기하자는 의견도 나올 정도였다. 태조 역시 일신의 무예와 가문의 전통적 전투기술을 중시하는 집단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명궁이라 총통에 별 관심이 없었다.[63] 그래서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 소양을 지니고 전통적 전투기술보다 효율성을 먼저 추구하는 집단의 대표라 볼 수 있는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화포 관련 개발이 시작되어, 과학기술 발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세종 ~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구경과 종류의 총통과 기타 화약 무기들이 개발되고, 총통의 사용법과 전술까지 제식화하는 등 사실상 조선군 무기 체계의 기틀이 마련된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무기들 중 신기전(神機箭)은 여말선초 시기에 등장한 주화를 개량한 것으로, 1448년(세종 30년) 만들어진 로켓 개념의 무기다.[64] 개발에만 그치지 않고 신기전을 실전 배치 및 운용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일부 독자적인 과학기술의 발달이 있었으며 로켓 형식의 무기를 운용할 줄 알았다. 신기전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차는 신기전기(神機箭機)로 불렸고 지금도 설계도가 남아 있다.
신기전은 고려시대 최무선에 의해 발명된 로켓 병기인 주화(走火)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비장의 무기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기전은 화약의 사용량이 너무 크고 명중률이 떨어져 실효성은 떨어졌다고 한다. 신기전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으로 나뉜다.
대신기전은 길이 5.6m, 사거리 2km, 최대 3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다. 1448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고 하며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은 약 3kg으로 조총 1000회 발사 분량이다. 목표 지점에 다다르면 폭발물이 자동으로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산화신기전은 길이 5.3m. 사거리 2.4km, 최대 3.4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로 대신기전보다 길이만 짧은 것 뿐이지 사거리나 폭파 범위는 다르지 않다. 다만 탄두에 철편(쇠파편 조각)이 내장되어 있어 살상 능력이 더욱 강력해진 무기이다. 무려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흠좀무한 물건. 1단이 다 소모되면 지화가 점화되어 600미터를 더 날아갈 수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라는 폭발 시간을 조절하여 내부의 철 조각으로 주위에 피해를 주는 일종의 시한폭탄도 개발하여 경주 전투를 시작으로 실전 배치되었다. 주로 인마 살상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바위에도 파편이 박힐 정도로 강력한 성능이라고 한다.
또한 신기전의 발사체계로도 알려진 화차는 문종 치세때 현대의 모듈러식 체계와 같이 상부 부품을 교체하는 것만으로 서양의 오르간 건같은 총통기와 신기전을 쏘는 신기전기를 둘다 운용할 수 있게 개량되었으며, 이를 문종화차라고 불렀다.
4.3. 해군의 제도화[편집]
고려 말인 1389년(창왕 1년) 박위 등은 왜구 근절을 목적으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조선 개국 후인 1396년(태조 5년) 김사형 등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한 번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상왕 태종은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로 삼아 그해 6월 19일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때 동원된 함선은 227척, 병력은 1만 7,285명에 달했다.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한 원정군은 다수 적병을 참수하고 조선인, 중국인 포로들을 구출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여말선초 시기에 세 차례나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수군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 초에 이르러 수군은 육군과 분리된 병종으로 지위가 확립되었는데, 이는 고려 말의 수군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수군의 강화는 역설적으로 왜구의 잦은 침입에 기인한 것이었다.
태종은 즉위 이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며 수군 체제도 정비하였다. 거북선[65] 등 군선을 건조하고 화기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탑재 무기를 개발하였다. 세종도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조선술을 발전시키고 대규모로 군선을 건조하여, 맹선(猛船), 병선(兵船) 등 829척에 이르는 군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 수군의 총 병력은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한 거대한 병력은 수군 도안무처치사, 첨절제사, 만호 등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15세기 이르러서는 수군의 지휘체계가 확립되었다. 1457년(세조 3년)에는 전국 지방 군사 조직이 진관체제로 통일되어, 육군과 더불어 수군도 절도사-첨절제사-만호의 일원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게 되었다.[66]
이러한 노력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이순신의 손에 크게 빛나며 조선을 구해냈다. 당시 조선군이 대적한 일본군은 병선 숫자만 2,200여 척에 달하는, 양적으로는 당대 지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전력이었는데, 조선군은 이에
5. 문제점[편집]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67]
[반론][68][69]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70]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 기사[71]
임금이 경기 감사 유엄(柳儼)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외(京外)에서 어수선하여 뜬소문이 크게 떠도니, 임금이 몹시 근심하여 도성을 지키는 것과 강도(江都)에 들어가는 것의 편의 여부를 유엄에게 물었다. 이에 유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유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약소 국가입니다. 몽고(蒙古)가 공격해 오면 청인(淸人)의 경우와 같이 접대(接待)해야 하고, 비록 서달(西韃)이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72]
하였다. 이에 임금이 아무 대답 없이 주서를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이런 말들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약소 국가이다. 그러나 유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73]
애석하게도 조선은 대규모의 군대를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데 문제가 많았다. 여진족이나 왜구, 반란, 도적을 퇴치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대규모의 외국 정규군과 맞설 때 문제를 보였다. 물론 조선의 실권자들도 이를 인지하고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조선의 국가적 한계가 발목을 잡아 끝내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은 재정이나 통제 문제로 평시에 대규모 병력을 미리 배치하는 것이 어려웠다.[74] 이를 해결하려면 지방 사족들에게 어느 정도 군사적 자율권을 주어야하는데 문제는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조선의 국왕들 입장에선 정치적 위험이 높을 뿐더러, 지방 사족들이 군사력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발판이 될 수 있어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양민들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는 것 역시 조선이 추구하는 왕도 정치에 어긋나는 폭정이었다.[75] 그러나 보니 조선은 국경의 방어선이 가진 종심이 얕아 대규모 외침에 쉽게 뚫렸다.[76] 조선이 우수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급히 병력을 징발하고 소집해도 적의 본대는 이미 영토 깊숙이 들어온 뒤였다.
이 상황에서 조선의 최고 지휘관이 전국의 병력을 일시분란하게 지휘하여 적을 포위섬멸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교통통신 기술로 그건 불가능했다. 또한 조선군의 최고 지휘관은 얼마 되지 않는 휘하 병력으로 자기 구역의 전선을 유지하느라 바빠 타지역을 신경 쓸 여유도 부족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조정에서 수없이 내려오는 간섭과 훈수를 적절히 대처해야만 했다. 왜냐면 전시의 조선 조정은 군대에게 주로 공격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사실 조선 조정도 이러한 작전이 생각없이 한것이 아니고 그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게 당장 왕의 안위가 위험하기도 했고, 전쟁이 길어지면 조정의 권위가 추락하고 왜란 시기의 의병처럼 지방 세력이 자체적으로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지방 세력의 군벌화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조선 왕조 입장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결국 각지의 조선군은 서로 원할하게 연계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싸워야 하는 경우가 흔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유격전을 벌이며 잘 싸운 사례도 있지만, 유기적인 운용 부족으로 적군에게 무력하게 각개격파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밖에 부족한 숙련병과 부사관 계층으로 인한 부대 통제의 어려움, 원거리에 편중된 병력 구성으로 생긴 취약한 야전 능력도 큰 난관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조선군은 지휘관 입장에서 봤을 때 지휘난이도가 매우 높은 난해한 군대였다. 다른 나라였으면 이런 식으로 군대를 엄두도 못 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무과로 선발한 조선의 인재와 인력이 이런 군대도 어떻게 굴러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기할 점을 하나 꼽자면 조선시대의 군사력 약화가 동서고금의 다른 여러 나라와 달리,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체제의 정비와 완성 단계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조선군은 통치세력의 능력과 주변 환경의 영향을 따지기 전에 군사제도 설계와 운용에서부터 심각한 결함을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은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보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조선처럼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이면의 사정을 살펴보자면, 조선군의 경우 대규모 전투가 드물다보니 독자적으로 군제를 짜기엔 실전 데이터가 모자랐고, 중국의 군제를 많이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인 명나라의 군사제도가 조선 입장에선 모방하기 좋은 게 아니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부병제의 원리에 기반한 위소제를 운용했는데 이것이 16세기쯤 되면 유명무실해져 북로남왜라 불리는 가정 연간의 외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77] 이때 척계광이 나서서 자신이 고안한 전술로 남왜와 북로를 소탕했다. 남쪽의 왜구를 상대하기 위한 전술은 기효신서, 북방의 기마민족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은 연병실기라는 저술로 남겼고, 이것이 조선에도 도입되었다.
연병실기의 거보기영진은 조선의 지형 특성상 운용하기 어려워서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이 주축이 되어 도입되었는데, 문제는 이 절강병법이 각 병종 별로 굉장한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78] 병농일치가 근간인 조선으로서는 숙련병을 제대로 수급할 필요가 없어서[79] 절강병법을 현지화 하여 삼수병 체제로 운영했다. 그런데 삼수병 체제는 살수의 비중이 매우 적고 포수와 사수의 비율이 과도하다보니 기병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호란 때 조선군이 청나라의 기병대에게 처참하게 패하는 원인이 된다.[80]
5.1. 유명무실해진 지방군[편집]
조선은 이전의 한국사 왕조들에 비하면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국가의 군사력 전반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집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만약 중앙의 행정력으로 지방의 군사력을 파악하거나 통제하기 여의치 않다면 통제가 가능한 수준까지 군사력을 축소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애초 조선이 태조 이성계가 당대의 최고위 무장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부터 유력 가문들의 사병(私兵) 보유 금지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자리잡았고, 사병을 혁파한 이후에는 지방의 정규군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정예병을 보유한 변방의 군사 책임자에게 조정의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가 뒤따랐기 때문에 결국 지방의 군사 책임자들 대부분이 군사 훈련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군적 역시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장부상으론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의 병력이 있어도 정작 전시에 출정하려고 보면 실제 인원은 그것의 반도 채 안 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딴에는 대비를 열심히 한 임진왜란 때도 제대로 군사를 조련해 두었던 지휘관은 이순신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성을 쌓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일에 그쳤거나 그것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때문에 병력이 부족하거나 없는 성이 많아져 왜란 초에 조선의 성들이 일본군에게 매우 손쉽게 함락되었고, 심지어 비축된 군량미들이 통째로 일본군에게 넘어가서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병자호란 때는 청을 상대하기 위해 평안도에서 야심차게 정예군 육성을 시도하지만, 그 지휘관인 이괄이 중앙정부의 권력 다툼에 관련되어 위기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켜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조차 조정의 극심한 통제 때문에 제대로 군사를 훈련시키지 못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병력도 소수의 군대만 주는 바람에 전쟁 당시에는 청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분전하다가 죽는 사태가 벌어진다. 무엇보다 주력군의 병권을 인조가 측근들에게 넘겨줬는데 문제는 이들이 지리멸렬한 지휘[81] 로 도박수를 감행한 청나라를 행복하게 해줬다.
양란 이후 조선에선 지방군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다.[82] 하지만 그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조선이란 나라의 정치적 정체성과 맞지 않아 포기하고 대신 강력한 중앙군 육성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비대해진 중앙군은 자연스럽게 막대한 재정 수요를 창출했고 조선은 이걸 장기간 건실하게 유지할 역량이 없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후술.
5.2. 빈번한 지휘 간섭과 난잡한 명령체계[편집]
조선군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임진강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쌍령 전투와 같이 아군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여 조선의 주력군이 어처구니 없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한 원인이었다.
군권을 지닌 지휘관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조선의 방침은 평시뿐만 아니라 전시에도, 지방군과 중앙군을 가리지 않고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 조선 특유의 기형적이고 난잡한 명령체계가 탄생하고 말았다.
이는 위의 조선군 계급체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명칭의 직급이 난잡해있으며 심지어 각 직급별 위아래 구분도 명확치가 않다. 이는 비슷한 시기 중세 후반 유럽의 군대 계급체계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군통수권자인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계급인 기병 장관부터[83] 말단 사병까지 그 사이에 있는 계급이 10여 개 이하일 정도였다. 반면 조선군은 상술한대로 부사관 이상만 쳐도 20여 개(...)였으니 소통이 원활할 리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선군은 명목상 전군의 최고 지휘관인 도원수조차 군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왜냐면 조선 조정이 기존 군대 계급 외에 따로 도체찰사, 체찰사 등을 파견하여 군대에 간섭했는데 여기에 임명되는 건 보통 도원수보다 끗발 있는 대신이었기 때문에 도원수가 제대로 지휘관을 행사하기가 힘들었다. 이전 왕조들엔 10만 이상의 대군을 지휘했던 최고 지휘관도 등장했었지만 조선의 도원수는 최고 지휘관인데도 5만 이상의 병력을 제대로 지휘한 사례가 없다. 이러다보니 각지의 군대는 도원수의 명령보다는 조정의 명령을 우선시했고, 실질적으로 도원수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야 2~3만 정도인 자기 직속부대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도원수부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최고사령부 노릇을 한 조정이 후방에 있어 정보전달이 느리고, 수뇌부인 국왕과 대신들이 군사적 식견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현장 지휘관들의 정당한 판단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결국 이는 전세에 악영향을 크게 끼쳤던 것이다. 유약했다는 편견과 달리 조선의 국왕들과 골수 유학자들은 전시에 굉장히 호전적인 강경론자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유학자들은 충의를 중시하기에 국란이 닥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서 싸우는 걸 당연시했고 그걸 실천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국왕과 대신들은 현장 지휘관이 전세가 불리해서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야할 때에도 그를 오히려 겁쟁이로 매도하며 무조건 겁먹지 말고 싸우라고 닥달해서 전투를 말아먹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실무 경험이 적고, 무제한 비판이 가능하며 그 결과를 책임질 필요도 없는 대간들이 이런 경향이 심했다. 당시 흔했던 의사 결정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도원수, 수사, 병사가 현재 작전 진행 상황을 보고한다.
2. 국왕이 대신들과 의논해 보고 이러이러한 작전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3. 현장 지휘관은 이러이러한 작전은 지금 상황에서 어렵다고 답변한다.
4. 국왕과 대신들은 정말 현장의 상황 때문인지, 지휘관이 딴 마음을 품은 건지 의심한다.
5. 중앙에서 조사관이 내려와 군영을 뒤집어 놓는다.
6. 심한 압박감에 못 이긴 현장 지휘관이 최대한 조정의 의견을 반영하여 작전을 진행한다.
당연히 이렇게 진행한 작전은 대부분 폭망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
지방군의 명령 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각 도의 최고 지휘관인 관찰사[84] 와 병마사의 위계를 명확하지 않게 하다보니[85] 명령이 통일되지가 않았다. 위세는 행정권까지 가진 관찰사가 높았지만 실무는 무관 출신이 주로 임명되는 병마사가 더 능했기 때문에 한쪽이 우위를 점하기 힘들었다. 이러다보니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와 병마사 유림이 의견 충돌 때문에 부대를 나눠 따로 싸우다가 청군에게 관찰사의 군대는 궤멸하고 병마사의 군대만 승리하기도 했다. 심지어 승리한 유림은 홍명구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까지 당했고 한참 후대에 가서야 공을 인정받고 시호를 받았다. [86]
5.3. 군대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는 재정과 군사행정[편집]
짧게 요약해서, 이전 시대보다 반란 위협이 적은 대신 돈이 더 많이 드는 군사제도를 이전 시대보다 적은 비용으로 운용하려다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군대가 유명무실해지거나, 폭증한 재정 부담이 백성에게 떠넘겨 지거나, 아니면 둘이 한꺼번에 발생했다. 이는 정치와 군사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재정만은 지방자치, 혹은 봉건제에 가깝게 굴린 조선의 특이한 시스템이 가져온 문제였다. 모든 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중앙정부에게 파견한 관리가 장악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지방에서 알아서 조달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지역의 토착민과 유지들은 보상을 받지못해서 불만이 크며 중앙에서 뭘 시키면 의욕이 전혀 나질 않았고, 중앙정부도 되도록 지방에 뭘 안시키려고 했기에 문제가 발생할수밖에 없다.
현대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국방력 강화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경제력과 그걸 활용하는 군사행정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조선은 규모 있는 군대를 유지할 역량이 없었다. 조선보다 인구와 생산력이 훨씬 적었던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등의 이전 한국사 왕조들이 조선보다 훨씬 쉽게 대군을 동원하는 걸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은데[87] , 여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조선은 민생과 검소함을 중시하여 세율이 낮았고, 자연스럽게 국가 재정이 정말 심각할 정도로 작았다. 반면 정부 조직은 이전 왕조들보다 훨씬 커서 이들에게 봉급을 주는 것만으로도 국가가 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이 낮은 세율이 백성의 부담 저하로 완벽하게 치환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녹봉은 관료들의 생계를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지방 아전들 같은 경우는 생계 기반을 알아서 마련해야 했다[88] . 결국 어쩔 수 없는 부정부패와 수탈이 조선시대 전체에 만연하고 고착되어 버렸으며, 중앙집권적 시스템의 특성상 이런 거대한 지하경제가 더욱 치명적인 해악으로 작동했다. 농업 생산량의 증가, 그리고 부역의 감소로 이전 왕조시대에 비해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진 것은 맞지만 실질적인 조세 부담률이 얼마나 줄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통계가 안 잡히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성리학의 이념을 철저히 따라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하면서 작은 재정을 추구하는 조선의 방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는 문란해진 조세 제도와의 전쟁과 새로운 문제 출현의 반복이었다. 전세를 낮추고 재정이 부족해지자 공납의 부담이 급증했고, 이 때문에 공납이 문란해지자 대동법을 시행했더니 이번엔 환곡이 문제가 되고, 결국 세도정치 시기에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져 나라 재정이 막장이 되버린다. 또한 이전 왕조들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해당 지역의 군사력을 맡겼지만, 조선은 반란을 두려워하여 지방 유력자들[89] 이 자체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했다.[90] 관료들 녹봉 챙겨주는 것도 힘들어하는 중앙정부 혼자서 나라 전체를 지킬 군대를 키우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외로 재정 못지않게 나라의 시스템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이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한 수준의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사실 통신 기술이라고 해봐야 파발이 말 타고 달려가서 전달하거나 봉화대에 불 올리는 게 한계였던 전근대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국가마냥 중앙정부가 지방의 모든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초대형 사건마저도 실시간으로 수도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91] 이 때문에 전근대 국가에서는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마다 동원할 인력 수를 정하는 중앙집권제 국가보다는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이 자기 지역에서 알아서 인력을 뽑아내는 봉건제 국가가 군대 머릿수에서는 확연히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봉건제 국가의 경우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이 최소한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의 사정만큼은 확실히 꿰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명령 내리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는 중앙정부에서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지방 귀족이 자기 재량껏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봉건제 국가의 경우 대신 지방 귀족의 이반을 철저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성이라는 면에서는 조선이 추구한 중앙집권제 국가보다 훨씬 못했던 것은 맞지만[92] , 철저한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중국 통일왕조들마저도 중기를 넘어서면 슬슬 당나라의 절도사 제도처럼 지방의 세력가에게 지방의 통치를 일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집요한 중앙집권제 추구는 어찌보면 시대의 한계를 감안하지 않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정책이었을 수도 있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상황에서는 정말 아무런 힘도 못 썼던 제승방략 체계만 보더라도 이러한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93]
조선 초기에는 병농일치제 및 양인개병제를 바탕으로 16세~60세 이하 남성들이 3년에 1번씩 번상하며 군역을 맡았다. 이때 봉족제에 따라 군역을 맡은 가구 하나 당 조호[94] 를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고 군역을 맡은 가구는 호수(戶首)가 되었다. 조호는 2~3결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빈민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호수가 조호를 노비처럼 부리며 갑질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거기에 호수 대신 조호가 군역을 대신 가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세조 때 보법을 시행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고 군역을 맡은 사람은 정군으로, 정군을 보조하는 사람은 보인이 되었다. 보인은 정군 1명당 2명씩 배치되었고 보인 2명이 1년에 군포 2~4필을 내는 것으로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보인들이 지는 부담은 늘어났지만 대신 군대 규모를 크게 늘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조선의 시스템이 완성되는 성종 이후로는 위와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관료 조직이 거대해지면서 이를 위한 비용은 늘어났고,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노비의 숫자가 증가함으로써 이 부담이 양인층에게 전가되었다. 농업생산량도 꾸준히 증가했지만 이를 만회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경제적 지원을 담당해야할 보인이 몰락했고, 군역을 맡은 정군도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역에만 동원되니 군역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되었다. 결국 조선은 군역 자체를 기피하는 풍조가 나라에 만연하게 되었다. 양반부터 상민들까지 다른 사람에게 군포를 주는 대신 군역을 대신 맡는 대립이나, 매년 군포 3필 또는 쌀 9말을 내고 군역을 빼는 방군수포를 하는 식으로 다들 군역을 회피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성종 대부터는 예전처럼 군대를 대규모로 소집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결국 중종 대에 대립과 방군수포가 법제화되면서 공인되었고 사실상 이 시기부터 조선군은 정권 보위와 국경 수비를 맡은 병력 빼고는 유명무실화된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군적에 올라있는 병력의 숫자는 무려 35만명에 달했지만 실제 병력은 절반도 안되며 그 병력들조차 태반이 대열 한 번 못 맞춰본 일반인들이었다.
양란 이후에는 오군영이 주축인 중앙군, 속오군이 주축이 된 지방군이 탄생한다. 하지만 소규모 재정이 가지고 오는 근본적인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속오군은 일찌감치 천예화되었고 오군영은 중앙정부의 재정으론 감당이 안 돼서 광산이나 둔전 운영 같은 이권을 보장받거나, 또는 화폐를 주조하며[95] 버티다가 조선 후기가 되면 이마저도 유명무실화되어 군대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사태가 벌어진다.[96]
다만 실제로 조선의 국가재정이 작았는지는 의문인것이 당장 초중기 조선의 연간 전세 수입이 고려보다 많았기 때문이다.[97]
5.4. 허리가 없는 지휘체계[편집]
대부분의 조선군 부대는 군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본래 조선 초기까지는 갑사가 실질적으로 부사관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세조가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넣어 사실상 없애버렸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조선군에는 이와 비슷한 병종이나 계급이 창설되지 않았다. 물론 이는 군대 규모가 소수일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급 지휘관들이 조금만 더 신경쓰면 군의 하부까지 통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수만~10만, 수십만 단위 이상의 대군이 소집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하여 고급 지휘관들만으로는 군대를 완벽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여러가지 문제가 속출했다.
그나마 중앙군은 오위인 위(衛) - 부(部) - 통(統) - 여(旅) - 대(隊) - 오(伍)로 체계적으로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하지만 정작 병력의 대다수를 구성하던 지방군에서 군의 통제력 부족이 심각했다. 특히 조선의 지방군은 각지의 수령들이 적당히 자기 동네 병력을 소집해서 거느리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방군도 수령을 따르는 군관들이 있기는 했는데, 이들조차 숫자가 부족했고 부사관 역할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왜냐면 이들은 수령의 보좌, 호위, 전령, 정찰병, 돌격장까지 여러가지 역할을 겸해야했기 때문이다.
양란기에 조선군이 겪은 위기 대부분도 하급 간부의 부재로 인한 발생했다. 군대 하부까지 세세하게 통괄하는 간부가 없다보니 당장 대군에 대한 일사분란한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러니 조금만 전세가 기울어도 군대가 와해되었고, 조선 정규군이 임진왜란 시기의 왜군과 병자호란 시기의 청나라 팔기군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98] 게다가 부대 간의 지휘권 단일화도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보니 조선의 군대는 일국의 군대가 아닌 다국적 연합군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중앙의 지휘력이 이렇게 부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병사들의 구심점이 될 하급 간부의 부재는 조선군의 혼란을 심화시켰다.[99]
그나마 이 문제는 오군영이 들어서면서 해결되었다.
5.5. 비현실적인 원거리 무기 집착[편집]
조선군은 이상할 정도로 화기를 비롯한 원거리 무기에 집착했다. 국토는 좁고 산지는 많으며, 이렇다할 정예 상비군도 부족했던 조선 특성상, 성에 틀어박혀 원거리 무기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 가장 가성비 높은 전략이었다. 따라서 조선 이전의 한국사 왕조들 역시 원거리 무기를 선호하는 경향은 있었지만,[100] 문제는 조선의 경우 이 경향이 빈약한 지방군이라는 단점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병종의 구성이 다르긴 했지만 조선의 기본 전술은 접근해오는 적들을 투사 병기로 타격하고 기병으로 제압한다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백병전 병과도 편제에 있긴 했지만 이들의 기본 역할은 사수나 포수를 적의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대규모 전투에서 공격적으로 운용하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다. 특히 사수, 포수, 총통수 등의 원거리 병종의 숫자가 백병전 병종의 숫자와 비슷하거나 심하면 2배 이상으로 많았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백병전 병종이 적군을 공격하려고 나서면 원거리 병종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원거리 병종도 자체적으로 환도정도는 들고 다녔지만 그건 권총 수준의 호신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원거리 화력이 나름 강했다고는 하지만, 15세기[101] 가 지나면 백병전 없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군보다 원거리 화력이 몇십 배나 우월했던 근대 유럽의 군대들조차도 총검 돌격과 기병전을 비롯한 백병전을 수세기에 걸쳐 수행했다.[102] 백병전의 종말은 기관총을 비롯한 자동화기의 등장 이후에야 가능했다. 조선의 화력이라고 해봐야 결국 조총과 오연자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만으론 적의 대군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조선군의 부족한 백병전 능력에서 무수한 군사적 문제점들이 파생되었다. 일단, 원거리 화력으로 적을 압도해도 정작 백병전으로 적에게 치명타를 날리지 못하다보니 적을 확실하게 섬멸하는 결정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적이 피해를 감수하며 어떻게든 조선군의 화망을 뚫고 백병전을 걸어오면 대응도 못하고 맥없이 진영이 붕괴되기 십상이었다. 또한 조선은 화약 생산량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령 한 부대가 전투에서 적을 이겼어도 화약을 다 소모해서 한동안 전투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이렇게 백병전과 난전에 취약하다보니 기병 없이는 공격적인 작전이 힘들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히든카드였던 기병조차도 재정 문제 때문에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대접전에 특화된 중기병의 숫자가 줄어들어 대기병 전력과 대 보병 충격력이 너무나 부실했다.
조선의 체제적 특성상 백병전 병과를 육성하기 쉽지 않았고, 어렵게 육성해 놓아도 오래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왜냐면 백병전을 담당하는 병사들에겐 좋은 무기와 갑주, 그리고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데 조선의 빈약한 재정과 지휘관의 군사 훈련을 극도로 통제하려는 지침은 우수한 백병전 전력과 양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103] 더욱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중앙군이 상비군화 한 것을 제외하면 일정 1년의 3분의 1 가량 번갈아 가며 군역을 치루는 구조다. 그래서 대신 비용과 훈련이 덜 필요한 원거리 병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원거리 병과인 사수와 포수는 좋은 갑주가 필요 없어서 무장 비용도 상대적으로 쌌고, 훈련도 많이 필요 없었다. 활쏘기가 신분,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포츠였던 조선에 뛰어난 궁수는 넘쳐났고, 총은 쉽게 숙련될 수 있었으니까.
다만 초기에는 그래도 백병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록도 있는걸보면 마냥 등한시하지도 않았던듯하다.[104]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도검을 주무기로 삼은 병과들도 있긴 했다. 무예청 무사[105] 들 중에는 보직에 따라 칼만 패용하던 경우가 있었고[106] , 세자익위사 무사들 중 일부[107] 또한 검을 지니고 호종하였다고 한다.
6. 의의[편집]
그래도 15세기 조선은 대외로 무력을 투사하는데 꽤나 적극적인 편이었다. 고려말 왜구 및 원나라 잔당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는 불세출의 무장인 이성계가 세운 새 나라의 안정된 통치 아래 강군으로 재편되었고, 이 유산은 100여년 이상 이어져 15세기 내내 좋은 성과를 여러 번 냈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108]
[109] 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110]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111] 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15세기때는 여진족들을 정벌할 때도 1만단위의 병력을 모아 압도했고 이시애의 난 당시 수만병력을 어렵지 않게 동원한적이 있다.[113]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114]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115] ,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116]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117]
다만 여진족이 그렇다고 마냥 오합지졸들도 아니었던것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이 평소에 올적합(兀狄哈)과 올량합(兀良哈)을 알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사나워 싸움하기를 즐겨하며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고 진중(陣中)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한곳에 모여 사는데, 3, 4백 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러나 3, 4백명으로도 우리 나라의 1만 군사를 당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당시 여진족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는 성종시기 기록도 있고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여진족들의 부락을 공격한적이 있는데 여진족들이 반격하려하자 피해가 커질것을 우려해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들이 단순히 오합지졸이었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할리는 없으니 전투력에서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인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로 여겨질정도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석하는게 맞고 이정도면 못해도 오늘날 탈레반과 하마스 같은 무장단체정도라고 볼 수 있다.[118]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계하기를,
"올적합(兀狄哈)·올랑합(兀郞哈) 등 잡종들은 갑옷과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열도 이루지 아니하고 싸우나 활[弓]을 잘 쏘기 때문에 상대하기 어려우니, 나무로 방패(防牌)를 만들어서 사용하되, 매양 싸울 때에 이것을 전열에 세우고 기창(騎槍)·기사(騎射)를 뒤에 세우면, 비록 겁이 많고 약한 자라도 반드시 등지고 달아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갑옷을 입은 적은 얼마나 되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겨우 20, 30인이고 그 나머지는 다 푸르게 물들인 반신(半身)의 납의(衲衣)1133) 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와 말은 하나도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옥천(沃川)의 군인 김응보(金應輔)가 화살에 다리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으나 이튿날에 죽었고, 화살에 맞은 말은 서넛뿐입니다."
어쨌든 철기가 없거나 소수에 불과할 땐 조선의 토벌군이 여진족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하치 세력이 흥기하면서 갑주를 입은 철기병을 대규모로 굴리기 시작하자 상황은 반전된다. 이성량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갑옷을 수입하거나 아예 제작기술을 확보하여 대규모 중기병을 거느렸기 때문이다.[119]
게다가 여진족들을 성공적으로 통제 하에 둘 수 있었던 건 정규군 외에 조선군의 특수부대였던 체탐인들의 활약이 컸다. 세종때 창설된 이 부대는 정말 오늘날의 특수부대처럼 소규모로 적진에 침입해 낮에는 은신, 밤에만 이동하면서 주로 여진족들에 대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주기적으로 교대로 활동하던 체탐인들은 여진족들이 쳐들어올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보고하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을 정벌하러 갈 때 미리 그들이 주둔지를 정찰하여 지도를 그려오기도 했다. 때문에 사망률도 높은 대신 임금도 후한 정예 정찰 부대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허나 바로 위의 성종 시절, 전쟁은 줄어드는데 자꾸 체탐인들을 보내 사상자가 나온다며 조정에선 이를 책임질 사람을 끈질기게 추궁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소극적인 부대 운영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성종은 그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체탐인(자) 부대를 해체시켜버렸다. 하지만 여진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 역설적으로 바로 이 체탐자였기에 이후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점점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렇게 조선의 특수정찰부대는 맥이 끊겼다. 젊은 시절의 이순신 역시 그 피해자 중 하나였고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조선군은 정찰 능력이 매우 뒤떨어져 고생을 했다.
함경도 안문 어사(咸鏡道按問御史) 이정험이 아뢰었다.
"신이 이달 4일 토병(土兵)을 시재(試才)하는 일로 행영(行營)으로 달려가는 길에 병사(兵使)를 만났는데, 그는 남·북도(南北道)의 포수(砲手)와 사수(射手)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건퇴를 분탕시키기 위해 번호(藩胡)의 탁두와 약속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행영에 머물면서 첩보(捷報)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8일 신시(申時) 경에 갑자기 영중(營中)에서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더니 행영의 군사가 싸움터로부터 와서 아무 아무의 존몰(存歿)을 말한 까닭이다.고 했습니다. 신이 바로 행군(行軍)의 승패에 대해 묻자 7일 석양에 아군이 종성(鐘城)에서 탁두의 군사를 대동하고 강을 건넜고 8일 이른 새벽에 건퇴의 적굴(賊窟)에 도착했다. 선봉이 시배(時排) 밖에 있는 오랑캐들의 집에 들어가 분탕할 무렵에 오랑캐들이 미리 대비하여 매복시킨 철기(鐵騎) 수백 명이 불시에 뛰쳐나와 칼을 휘두르며 아군을 어지럽게 공격하자 아군이 당해낼 수가 없어 일시에 무너졌다. 보병은 산으로 도망치고 기병은 길을 따라 달아나 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우후 성우길이 몸을 돌보지 않고 용맹을 떨쳐 일어나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서 퇴각하여 직접 오랑캐 서너 명을 베자 적이 조금 물러섰다. 만일 우길이 힘을 다해 적을 막지 않았더라면 아군은 거의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하였습니다.
1605년, 누르하치와 대립했을 정도로 강성한 여진족 세력[120] 인 홀라온이 함경도를 노략질하자 조선에선 토벌군을 보냈다. 직전 노토 부락을 상대로 우수한 전과를 얻었기에 자신감 있게 진격했지만, 홀라온 철기병이[121] 급습하자 참패하고 우후 성우길의 분전으로 간신히 퇴각만 했다. 조선은 이 전투에서 큰 충격을 받고 여진에 대하여 방어적인 입장으로 선회했고, 나중에 누르하치가 홀라온을 압도적으로 박살내고 조선의 번호들까지 죄다 털어가자 여진족의 부상을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위기라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튼 개별전투에서 1만이상의 군대를 이끈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그마저도 용인전투같이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이었던 임진왜란시기 조선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이 시기 그저 국경부근에서 여진족의 난동이나 내부 반란정도가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여 막아야하는 임진왜란 수준의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조선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122]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무려 32만이 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23]
7. 장비[편집]
조선시대의 무기 (1392~1895) 참조.
8. 주요 전쟁[편집]
9. 관련 인물[편집]
- 이종무
- 최윤덕
- 김종서(조선)
- 이징옥
- 남이
- 권율
- 이순신
- 신립
- 이일
- 김시민
- 정발
- 이억기
- 정기룡
- 무의공 이순신
- 나대용
- 원균
- 이봉상
- 강홍립
- 장만
- 이괄
- 정충신
- 김충선
- 임경업
- 민영환
- 양헌수
- 어재연
- 홍계훈
- 황형
10. 대중 매체[편집]
제작비 때문인지 제작진이 고증에 관심이 없는건지, 미디어에 나오는 조선군은 죄다 근무복 평복이다. 고증이 철저했던 과거에도 군복은 죄다 평복이었다. 때론 그냥 포졸복 차림으로 나오는 게 허다하다. 고증이 그만큼 엉망인데 여러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죽어라 당파만 들거나 화살을 든 정도로만 나오는 게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에서 허다하다. 심지어 사극 고증이 뛰어났던 1990년대에도 다 포졸복 차림이었으며 신발 역시 짚신 차림인 경우가 가득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나름 엘리트 군사들이라 평가받는 내금위, 의금부, 포도청, 오위도총부, 5군영, 훈련원, 병조, 형조의 군사들이나 금군들도 다 지방관아 군사들과 비슷한 평복을 입었으며 게다가 신발도 짚신만 신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90년대 말~2000년대 초를 거치면서 내금위, 의금부, 포도청, 훈련원, 오위도총부, 5군영, 병조, 형조의 군사들은 각각 색을 다르게 입히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발도 신기고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과 기록, 해당 항목의 설명을 봐도 알수있듯 조선군은 초기부터 갑옷과 화약무기로 무장한채 싸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교사로서 조선에 온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지에 조선군은 검은 갑옷 차림이 많다라고 적었는데 위에 나온 갑사 갑옷을 말한 듯하다.
그래도 2000년대 후반이나 2010년대 이후부터는 조금씩 고증에 신경쓰는 작품들이 늘어나며, 그중엔 그동안 조명되지 않던 경번갑이나 찰갑, 두정갑 등을 입은 병사들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나온 작품중 조선군의 고증을 잘 지킨 경우는 만화는 칼부림, 영화는 남한산성이라고 볼수있다.
10.1. 게임[편집]
임진록 2에서는 당연히 등장한다. 주인공 세력답게 어느 하나 딱히 튀는건 없는 무난한 진영이다. 자세한 설명은 임진록 2/조선 유닛 및 건물 문서 참고.
2022년 얼리억세스로 출시된 산나비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근미래적인 배경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조정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실제로 주인공이 장군의 복식을 갖추고 있으며, 보스 중 저스티스라는 등장인물은 장군 특유의 징이 박힌 갑옷을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