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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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 / Righteous army
1. 개요
2. 정체성
2.1. 부정적 측면
3. 군사적 한계
4. 효과
5.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한국사에서의 의병
5.1.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5.2.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
5.2.1. 의병 목록
6. 파일:중국 국기.svg중국의 의병
7. 유사 개념
8. 서브컬처에서의 묘사
9. 관련 영상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정미의병.png
정미의병 당시 의병들. 교과서에도 실려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사진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오른쪽의 한 사람은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인한 정규군 출신이다.
1907년, 영국 신문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된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F. A. Mckenzie)[1]가 양근군(오늘날의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들을 찍은 사진. 중앙에 다른 사람의 의상과 대비되는 정모코트를 착용하고 환도로 보이는 칼을 멋들어지게 어깨에 댄 사람이 보이는데, 그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자신에게 지급된 피복과 장비를 그대로 챙겨 의병에 합류한 구 대한제국군 육군 장병 중 한 명이다.[2] 후에 이 사진은 항일 무장 투쟁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 사진이 거의 그대로 재연되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가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위 사진을 찍은 영국인 기자 매켄지와 인터뷰를 한 의병 부대의 의병장이 남긴 말.


"...전술을 알지도 못하는 유생이나 무기도 없는 농민이 순국을 각오하고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통 가운데 배양된 민족 정신의 발로였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의병 1 : “사흘 전에도 저 아랫 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소.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측은 2명 전사, 3명이 부상을 당했소.”

프레더릭 매켄지: “당신들은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의병 1 : “우리 의병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무기가 별로 없소. 총포는 낡아서 불발이 많고, 총알도 거의 다 떨어졌소. 알고 있소, 이렇게 싸우다 결국 죽겠지. 허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소.”

의병 2 : “기자양반, 당신은 외국인이니 왜놈들한테 안 걸리고 무기를 살수도 있지 않소?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주시오, 돈은 지불할테니까.”

프레더릭 매켄지: “애석하지만, 저는 종군기자로서 양쪽 모두에게 도움을 드릴수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 당신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습니다.”

의병 3 : “우리는 한 서양인이 우리 의병의 참상을 보기위해 이곳까지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당신이 본 것을 세계에 전하여 우리의 현실을 알려주시오.”

의병 1 : “메켄지 양반,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도 좋소.”

프레더릭 매켄지: “아마 이 사진이 유일한 의병사진이 될겁니다.”

미스터 션샤인 24화 중에서


의병()은 왕조 시대 외적의 침입이나 대규모 반란에 대항해 사적으로 조직하여 정부군을 돕거나 향토 방위에 힘쓰는 군대를 뜻하는 말이다. 요즘말로 하면 민병대(의용군).

기록에는 보통 "○조 ○○년 하늘이 노하시어 나라에 망조가 드니 외적이 들끓어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할 제, ○○의 땅에 한 선비[3]가 있음에 이름은 ○○이라 하였다. 국난의 상황에 스스로 웅대한 의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느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니 그 곁으로 천하호걸여걸, 협객들이 모였으메, 이들이 백성들과 함께하여 정의로 불의의 무리를 심판하였다..."같은 식으로 묘사된다.


2. 정체성[편집]


가만히 생각건대,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예기의 큰 의리이고, 9대의 원수도 반드시 갚으려 하는 것이 춘추의 아름다운 말이다.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제거해야 하니, 신민(臣民)으로서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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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박춘무의 격문, 花遷堂集 卷1, 「檄文」


지금 이 잔악한 왜적의 소행은 짐승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백성들을 살육함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연물을 모질게 해침에 가옥과 식량을 모두 불살랐다. 길에서 아낙네 한 명을 만나면 사내 열 명이 다투어 淫行을 하니,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수많은 오랑캐들도 하지 않고 지각이 없는 짐승도 오히려 하지 않는 짓이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비록 감히 막는 자가 없지만 천지 산천의 귀신이 모두 은밀히 주벌할 것을 의논하고 중국과 오랑캐들이 모두 드러내 처형할 것을 생각하니 비록 죽음을 앞두고 잠시 목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天定人勝의 날에 그 죄를 자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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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의 격문, 「告諭本國人爲倭所擄君文」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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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의 격문. 『제봉선생집』권7, 정기록, 마상격문


나라의 국난 극복을 위해서 민간인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없다면 의병은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의병은 국가가 짜놓은 행정, 전시 동원체제 아래 있는 민병대이자 근왕군 성격이 강해서 흔히 생각하는 애국심 하나로 분연히 들고 일어난 힘없는 민중 같은게 아니다. 처음부터 전쟁 나면 동원하기로 정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양요에 동원된 민병대나 동학 진압에 투입된 민보군과 포군. 그리고 이들이 주축이 된 구한말 의병부대 다수가 여기 해당된다. 임진왜란 '초기' 의병도 정교하게 짜놓은 동원체제로 원래 관군으로 편입할 인원들이 전시공황 상태로 일시적으로 붕떠버리자, 향청 및 향회 같은 자치 기구에 속한 향촌 유림들이 조직화한 것이고 금세 조선 조정의 행정력 아래 들어가 말만 의병이지 관군이 되었다.

조금 지나면 아예 김덕령처럼 처음부터 관과 협력해 인증받고 의병을 구성했다. 물론 단순히 의기로 시작했던 조경남 같은 사례도 적지 않지만 규모가 일정이상 커지면 자연히 국가 행정체제 안에 들어갔다.

고려처럼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용도 만만찮을뿐더러 백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데,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조선에서 이는 큰 부담이라 상비군 규모를 키우는 대신 유사시 동원 가능한 민병대 조직을 갖춰놓은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고 정기적으로 훈련시키다 유사시 지방관이 사령관, 향촌 유림이 장교, 한량, 선달이 부사관, 농민들이 병사로 동원되는 식이었다. 이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물자나 군량등은 관에서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향촌 유림들이 자신들의 가산을 써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한말 의진 병력의 주축인 포군들은 동원되는 기간동안 급료를 받았다. 해당 의병진의 자금 사정에 따라 12~40냥 가량을 받았고, 해산군인이나 청군 출신 용병들은 거기서 더 받았다. 급료를 받지 못하자 민간에서 약탈을 자행해 의병장들이 이를 저지하느라 고심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구한말 의병은 하나 더 고려해야 하는게 있는데 바로 고종의 존재다. 한말 일정 규모 이상의 의병진치고 고종 입김 안닿은 곳이 없다. 흔히 평민 의병장의 결연한 결기, 민중의식의 확대라고 일컬어지는 신돌석, 안규홍, 홍범도, 채응언 등은 모두 간접적으로 고종의 후원 내지 독려를 받고 봉기했다.

물론 모든 의병진이 고종의 밀지 아래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요 의진은 거의 고종이나 그 측근들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미쳤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국권 피탈 이후에도 3.1운동 이전까지 쭉 독립운동 주류가 복벽이었을 만큼 확고한 구심점으로 존재했던 고종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즉, 조선 의병은 생업에 종사하며 틈틈히 훈련받고 전시에 동원되는 현대의 예비군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구한말 의진 전력의 중핵을 구성한 포군들은 급료를 받고 싸우는 용병 성향도 강했다.

2.1. 부정적 측면[편집]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실 달갑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본래 군대를 운영하는 것은 돈을 밑 빠진 독에 쏟아 붓는 것처럼 엄청난 군자금을 필요로 한다.[4]

단순히 의기만 가지고는 의병을 조직하기 힘들기 때문에 의병장은 보통 자기 지역에서 재력을 가지고 있거나 명성이 높은 인물이기 마련이다. 이들의 의병 활동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의병장들은 더욱 높은 명성을 얻게 되며 무력 집단지역 근거지까지 가지게 된다. 실패한다면 모를까, 의병의 활동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된다면 더욱 명성이 높아지고, 스스로 국가적 난제를 수습하지 못한 중앙 정부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추락한다.

그 결과 문제가 해결되면 의병은 군벌화 하고, 의병장들은 지방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도 처음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출세를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인물도 많다. 당장 유명한 삼국지의 유비만 하더라도 의병으로 군세를 일으켜 한 나라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이홍장, 증국번 같은 청말의 한인 출신 고관들 역시 이런 사례에 속한다.

그래서 국가 시스템이 살아있다면 되도록 정규군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조선임진왜란 당시 모인 의병들 상당수를 관군으로 편입시켰다. 의병이 관군으로 편입되면 지휘권이야 기존의 의병장이 갖는다 하더라도 일단 정규군이라 전후 해산이 용이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의병들이 도적떼가 되기도 하고 임의대로 관리들을 처단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하급관리였던 한용운의 아버지 또한 의병들에게 살해당했다. 오히려 당시 신문들[5]은 의병들을 폭도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3. 군사적 한계[편집]


의병 체제는 기본적으로 성공의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는 않다. 일단 의병은 중앙군의 소속이 아니라서 중앙군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의 보상이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전투 도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을 경우 중앙군은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보장해주지만, 의병의 경우는 그 소속 조직의 상황에 따라 지원이 없을 수도 있다. 물론 의협심으로 자발적으로 싸우다 그렇게 된 것이긴 하며, 곽재우 등 임진왜란의 의병장들이나 전공을 세운 의병에게 조선 조정에서 벼슬을 주거나 칭송을 해준 사례는 많다.

장비 수준 또한 지도자의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면 중앙군에 못 미치는 떨어지는 장비 수준을 보유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중앙 정부의 강력한 인력 소집 능력에 비해 순전히 의협심만으로 인력을 소집하므로 머릿수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핵심 인사들이 전략 / 전술적 개념이 얼마나 있는지도 문제시 된다.

같은 의미로 장비 보급 수준도 중앙군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앙정부는 제식 무기의 무장을 중앙군 위주로 할 것이다. 어쩌다 생산을 많이하여 남는 무기가 생기거나 사상자의 무기가 생기더라도 보충병력의 무장이나 손상된 무기의 대체품으로 사용할 예비 보급물자로 남겨둘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 입장에선 엄연히 민간인 집단에게 무기를 주면 폭도로 돌변시 걷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무기 보급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전란 후에 의병이 폭도가 되어도 골치가 아픈데, 혹여 전란중에 폭도로 돌변하면...
그렇지만 일부 지휘관에 한해서 의병집단과 신뢰가 쌓여 있거나 의병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지휘관은 약간의 무기지원을 해줄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휘관도 어쨌든 중앙정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원하는 양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무기는 소량의 지원을 받을 경우가 간혹 있을지언정, 군복같은 피복류나 식량은 지원받을 확률은 무기의 경우보다 더욱 없다. 군복을 지원해버리면, 중앙군과 의병의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피아식별상 문제가 발생한다. 구한말의 의병의 경우, 원래 관군 출신이었다가 군대가 해체 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군복을 입은 채로 의병이 되거나 이젠 쓸모가 없어진 피복류를 빼돌려서 입는 경우지, 정식 지원은 아니었다. 식량의 경우도 중앙군에서 과도하게 수탈이나 안하면 다행이었다.

사실 의병들이 장비 무장에 효과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전리품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의병들의 활약이 전란의 도움이 되는 현상을 겪는 전쟁의 경우, 관군이 제식 무기를 지원할 여력이 안된다면 전리품 획득의 규제를 좀 풀어주면 정부 입장에선 돈도 거의 안들면서 의병들이 무장할 수 있기 때문. 전리품으로 모든 의병을 무장화할 순 없겠지만, 죽창이나 낫과 같은 무기를 드는 것보다 일본도나 창류를 획득하여 무장하는 것이 낫다. 왜군의 갑옷 같은 피복류는 피아식별의 문제 때문에 활용하긴 힘들겠지만 갑옷의 철 등을 녹이거나 해체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의병의 경우 전리품을 중앙정부의 역할을 하는 대한제국에게 줘봤자 일본군으로 결국 넘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전리품을 중앙정부에 넘겨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지방 군벌화가 되는 중국 의병의 경우는 오히려 중앙군의 무기가 전리품이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전리품으로 무장하더라도 문제는 발생한다. 의병과 비슷한 규모의 적군에게 대승을 거두지 않는 한, 모든 의병의 무장은 어렵다. 적군의 무기도 적군이 회수해간 경우나 전투중 파손된 무기가 제법 발생할 것이라, 게릴라 위주의 전술을 펼치는 의병으로썬 한번의 전투로 전원 무장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략적으로 보급부대나 병참기지를 기습하여 승리하면 전리품으로도 꽤 훌륭한 무장이 가능할 것이다만... 훌륭한 전략물자를 중앙정부가 구경만 할 일도 만무하다.

또한 임진왜란을 예로 들면, 조총과 같은 당시 의병에게 생소한 무기는 전쟁 초반에 활용이 어렵다. 이 경우에는 중앙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의병들을 훈련 및 통제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훈련을 통해 의병도 적군의 신식무기를 다룰 수는 있다. 혹은 항왜와 같이 투항한 적군을 일종의 의병 교관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의병의 장비는 중앙군이나 지방군처럼 성능 좋은 무기를 제식화되어 체계적일 순 없고, 모든 의병이 통일된 무기로 강력하게 무장되는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정부군 지휘관이든 의병 지휘관이든 의지만 있고, 각 지휘관이 소통만 잘 한다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유연하면서도 강력하게 무장할 수 있다.

의병의 효과는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임진왜란과 같은 경우에도 초기에 밀린 부분을 제외하면 조선의 군사력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는 시점이 되어서는 보급 차단 및 곡창지 방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는 아군의 주력이 적의 주력을 붙잡는 상황에서 볼 수 있는 전술 효과였으나, 구한 말이나 여몽 전쟁기처럼 완전히 정복 당한 상태에서의 의병 활동은 침략군 입장에서는 귀찮은 저항 조직 정도 말고는 큰 의미를 발휘하지 못했다. 적을 상대할 주력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에서 군소 조직인 의병으로 적의 주력을 당해내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6] 의병보다 더 정예한 군사 조직이었던 여몽 전쟁기의 삼별초도 힘의 균형이 기운 상태에서는 그저 일시적인 저항에 그쳤을 뿐이었다.

4. 효과[편집]


한국 의병이란 파리 떼와 같다. 아무리 잡아도 계속해서 붙는 파리 떼가 있는 곳에 살 수는 없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하지만 의병은 일단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적군에게 지대한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의 한가운데, 혹은 후방이나 진격로 등에 자신들을 궤멸시키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어찌되었든 피해를 입힐만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은 진군 속도나 경로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7][8][9] 전쟁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공격군 입장에서 볼 때 진출 지역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무장 투쟁에 나설 정도로 공격군을 지지하지 않고 적대한다는 사실은 공격을 감행할 때 주로 하는 정신적 무장인 해방군, 정의의 군대라는 것에 아주 큰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의병은 무장과 복장 대부분을 민간에서 쓰던 것들을 그대로 쓰기에[10] 민간에서 쓰던 물건을 무기로 쓴 경우 무기가 아닌 그냥 물건인 척 할 수 있고, 애초에 무기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도 그걸 숨겨버리면 복장이 일반적인 민간인과 비슷해 구별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아무 민간인이나 보이는대로 족치면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의병에 가담하거나 협조하는 현지인들이 더욱 늘어나게 될 가능성이 급상승한다.[11] 민간인 하나 족쳤는데 그거 보고 분노한 목격자 10명, 아니 2명이라도 의병에 가담하면 단순히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봐도 침략군 쪽이 명백한 손해. 또한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군율이 약하고 조직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전술적인 예측이 어렵고[12]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으로 막나가기 시작하면 상당한 피해를 강요받기 때문에 더더욱 골치아픈 대상이 된다.

또한 사기에도 큰 영향을 준다. 정규군이 패퇴해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력할 것이라 생각했던 민간인들이 갑자기 무기 집어들고 달려드는 상황이 되면 아군의 무력 수준이 어땠든 '왕과 군대는 다 도망가서 우리가 이겼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백성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기를 들고서 나를 쳐죽이려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이 곳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나라인가? 앞날이 깜깜하다.'식으로 굉장히 심리적 부담이 된다. 실제로야 어쨌든 심리적으로는 상대 국가의 모든 활동가능한 주민이 전부 잠재적인 군대라고 받아들여지면 암담하기 짝이 없다.

특히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들은 이러한 상황에 당황했다고 한다. 일본 열도 내에서는 전쟁에서 장수가 전사하면 아무리 상대편의 남은 병사의 수가 많아도 그대로 끝이 났다. 상대편의 잔여병사들은 패잔병이 되고 승전한 세력이 그대로 그 패잔병와 그 지역의 백성을 차지하는 것, 만일 저항하는 백성이 있다면 이들은 몰살시키거나 지배층을 넘기도록 유도하는 것이 전국시대의 국룰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의병이란 자들은 이미 관군이 패퇴했음에도 고분고분 새 주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기 시작했으며, 저항하는 백성을 학살하니 이걸 보고 빡친 목격자들이 의병에 가담해 의병이 더 활성화되는 연쇄가 이어지게 되었다.[13] 여기에 이순신 함대에 의해 후방 보급까지 제한받고 명군까지 가세해 왜군들을 소모전으로 끌고 갔다.

특히 곡창지대이자 왜군이 보급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전라도를 지켜낸 것은 의병의 공로가 결코 적지 않다. 왜군이 다 평정했다고 생각한 함경도 또한 하급 관리 출신의 정문부가 의병장이 되어 거의 독자적으로 탈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의병도 일단은 싸울 수 있는 자들인지라 정규군과 정면으로 대적하는 게 불가능한 것까지도 아니다. 의병장들도 대체적으로 의병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화기는 빈약하지만 현지에 잘 녹아드는 게릴라 전술을 주로 활용한다. 이렇게 되면 당하는 침략군 쪽은 짜증을 넘어서 매우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극단적인 예가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안중근 의사. 어쨌든 수많은 항일 의병활동 중 하나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의병장으로 이 작전에 참가한 건 아니며, 의병 단원 중 한 명으로써 요인 암살작전에 투입되었다.

5.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한국사에서의 의병[편집]


한국사에서 의병은 전 시대에 걸쳐 자주 언급되나 주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계의병(繼義兵) 등)과 한말 을미의병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는 고려몽골의 침입 때나 조선 후기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이 활동한 바 있다. 특이한 경우 홍경래의 난 등 반란군을 상대로 의병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의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해서 승병들은 한국 불교가 호국불교의 성향을 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몽골살리타이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약 3,000명의 고려 의병에게 기습을 받는데 이 의병들의 정체는 사실 도적이었다고 한다.[14] 고려 이전에는 기록이 부실하며, 주로 특정 국가가 멸망한 후에 나타나는 무슨무슨 부흥군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의병이 중국처럼 군벌이 된 일은 없다. 국가 차원에서 유교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고 지방에 대한 관의 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했기 때문. 임진왜란 때도 전쟁 극초반인 임진년 5월부터 의병의 관군화가 진행되어 순수한 의병 부대는 크게 줄고 의병장이 관군을 지휘하거나(정문부) 관군 장수가 의병을 지휘하는(박진) 사례가 나타난다.[15] 김덕령 역시 이경린, 이귀 등 지방관들의 권유를 받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조정에 이를 알려 충용군이란 칭호까지 받았다. 즉 처음부터 조정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의병대다. 대중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여러 의병장들을 죽이거나 핍박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서 이름이 거론된 이산겸과 김덕령을 죽인 탓이다. 불멸의 이순신 등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이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대북이 의병 활동을 내세워 종전 이후 집권당이 되었으니 이런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양반들이 동학군과 싸울 민보군을 모집하기도 했고[16],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을미사변 이후 을미의병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지방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나 점차 농민이나 포수 출신의 의병장도 나오게 되었고[17]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는 을사의병이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며 2년 뒤인 1907년의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이 합류한 정미의병으로 그 세력이 더욱 커진다. 1908년 의병의 세력은 절정에 달해 7만명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일진회의 회원들을 총알받이로 동원하는 한편 남한 대토벌 작전(삼광 작전)을 전개해, 의병은 물론 의병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말살함으로써[18] 의병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어 불과 1년 후인 1909년에는 25,000명으로 격감했고, 1910년에는 고작 수천명 단위만이 잔류했다. 많은 의병이 일본군과 헌병 보조원들에 의해 토벌되었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기에 이른다.

5.1.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편집]




5.2.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시대 의병 지도자 목록[편집]



후에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5.2.1. 의병 목록[편집]




6. 파일:중국 국기.svg중국의 의병[편집]


중국사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황건적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들은 나중에 여러 군웅[19]의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서 선비족을 격파한 동진의 명장 유유양나라의 장수 진패선은 자신들이 거둔 전공을 무기로 백성들의 명성과 지지를 얻어 나중에 을 세워 황제가 된다.

또한, 나라는 황소의 난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지방 절도사들의 할거로 멸망하게 된다. 이런 문제로 인해 중앙 정부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남송 시대에 금나라에 대항하여 의병을 이끌었던 악비 등은 충성하던 정부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원나라남송을 침략 했을 때 남송의 의병에게 크게 당했고 비록 국체 였던 조씨 황가가 애산 전투에서 멸문지화 당해 나라는 멸망했지만 저항은 극심해 원나라가 장강 이남 지역 한족을 심히 탄압하는 계기가 된다.

명청 교체기 때엔 명나라의 잔존 정규군을 포함한 의병이 있어 청나라의 중원 정벌을 방해했다. 남명이 북경 함락 이후 바로 건립되었지만 미약한 행정력과 황제들의 무능력으로 북경 이외 지역에 힘을 못써 이들은 무적(無的) 신분으로 청나라와 오삼계를 비롯한 항장들에게 맞서 양주 십일[20]과 강음 대학살을 비롯해 피냄새 나는 저항을 이어갔다. 남명도 명조 시절 정규군과는 좀 다른 군대[21]가 있었고 청나라를 효과적으로 막아내 강남 지역 평정에 애를 먹였다.[22]

청나라 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에 대항하여 증국번이 의병 활동을 하였고,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청의 실질적 정규군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 증국번의 제자인 이홍장도 함께 활약했으며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 의병들은 당시 정규군이었지만 쇠퇴한 팔기군을 대체, 실질적인 청의 군사력을 담당했지만 중앙 정부가 아닌 개인이 통솔했던 경우가 대다수라 군벌화되었다.

특히 군대의 유지 비용을 사재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엔 상당수의 의병 집단이 그대로 비적이 되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나타난 군벌과 비적 집단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고 구 중국군이자 현 대만군의 모체인 국부군도 광동 지역 군벌이었는데다 현 중국군인 인민해방군의 원형인 홍군도 공산 군벌이었다.

7. 유사 개념[편집]


이름이나 행동 등은 약간 달라도 비슷한 걸로 일제 때 독립군[23]이나 프랑스레지스탕스, 독소전 당시 러시아 파르티잔 등을 볼수있다. 그 외 광신적 범죄 단체인 탈레반으로부터 다시 영역을 되찾으려했던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의 북부동맹도 약간 비슷하다.

8. 서브컬처에서의 묘사[편집]


게임이나 영화 등에선 초반에 모든 면에서 정규군에 뒤떨어 지지만 초반을 책임지며 민병대 자체가 점점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문명 5의 한국 문명에서 임진왜란 시나리오(사무라이의 침공)의 전용 특성으로 의병이 나온다. 효과는 유닛이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절대로 멸망 당하지 않으며 도시를 탈환하면 추가 유닛이 나오는 것. 그러나 그 추가유닛이라는게 고작 파이크병[24]과 궁수(...)이고, 그나마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유닛인 머스킷병은 적게 나와 큰 도움은 안된다. 궁수일 경우 어찌어찌 아군 진영까지 옮겨 석궁병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나머지는 그냥 고기방패로 쓴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RTS게임인 임진록 2의 확장팩인 조선의 반격에서 지대지가 가능한 근접 공격 유닛으로 등장한다. 본영에서 의병 모집 연구를 마친 이후 생산 된다. 일꾼이 쌀800의 비용, 일반 창병이 쌀400의 비용인데 비해 쌀 300이라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되는데, 의병이란걸 반영했는지 제대로 된 무기가 아닌 농기구인 괭이로 공격하는데 정규군인 조선 창병과 공격력이 똑같은 비범함을 보여준다. 단 방어력이 일꾼보다도 낮아서 전투 유닛 보다는 지뢰제거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단, 지뢰를 매설하는게 명 나라의 장수인 여여문이라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싸우기 위해 조직 된 민병대 단체'라는 실제 역사와 다르게 vs일본전 보다는 vs명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닛이다.

파일:독-특.jpg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을 두고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진 민중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이는 엄밀하게 사실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일단, 의병은 일정수준 이상의 중앙집권화가 이뤄져[25] 기존에 향촌세력이 이끌던 지역방위 집단을 중앙의 영향력 아래 넣고 외침에 대비해 꾸려놓은 예비대가 전혀 예상 못한 전란으로 붕 떠버리자 기존 계획대로면 지방관 아래 장교 역할인 유림들이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일어난 집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근거지가 아니라도 적극적으로 교전에 나섰다는 점과 근왕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 왕이 어찌되든 말든 신경 안썼던 고려때의 향촌방위체제와는 차이가 크며, 의병활동을 주도하던 의병장들이 대부분 양반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살펴보면 민중사관과도 거리가 매우 멀다. 물론 저 멀리 산골짜기의 순박한 시골 청년이 외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에 분연히 무기를 들고 의병대에 합류했다면 저 말이 맞다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양반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의병장이나 현대 예비군처럼 어차피 전쟁이 터지면 군사조직으로서 참전하게 되는 의병 자체가 나라에게 받은 은혜가 볼 수 없다고 보긴 어렵다.

9. 관련 영상[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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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2] 예전의 몇몇 교과서에선 이 인물의 옷이 가쿠란 비슷하게 보여선지 ‘학생(학도병)’이라고 잘못 소개하기도 했다.[3] 계급은 중요치 않으나 현직에 있는 고위 관료급은 보통 의병이 되지 않아도 자기가 맡은 군사들이 있어서인지 잘 안 나온다. 관료들이 이를 실행하면 당연히 의용군, 즉 의병 모집이 아니라 징병 혹은 모병이 된다.[4] 군대 운영 비용이 다방면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 자체도 맞지만,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유가 전혀 틀리지 않은 것이 군대 운영 자체만으로 파생되는 물질적 이득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약탈이나 둔전 등의, 비용을 그마나 메울 수 있는 방법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5] 일제강점기 이전의 일이다. 다만 이것도 애매한게 말이 좋아 일제강점기 전이지 실질적으로 일제강점기나 다름없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문의 경우엔 비적, 비도 등이 아닌 의병으로 명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사장이 외국인인 어니스트 베델이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신문들이 폭도 같은 표현을 쓰고 의병이란 표현을 안 쓴것은 일제의 탄압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6] 이 경우 레지스탕스 정도라고 보는게 더 맞다[7]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임진왜란만 해도, 왜군이 이순신의 수군에 보급로를 막혀버리고 전라도의 쌀을 얻기 위해 감행한 진주대첩에서마저 패하자 어떻게든 보급로를 확보하려 든 왜군에게 단순한 골칫거리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말 그대로 '모든 곳'에서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8]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행군하면서 산 타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전우가 활 맞고 쓰러져서 보니 의병, 그 의병 죽이고 이젠 민가를 털려고 하니 웬 여편네가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던지고, 그 민가에 불 지르고 이번엔 곡창지대로 가서 식량 좀 약탈하려고 해보니 이번엔 낫 든 농민들이 단체로 저항하는 식이다. 이 하나하나가 유효한 타격을 주진 못할지언정 모든 곳에 적이 숨어있다는 심리적 공포는 매우 컸을 것이다.[9] 특히 독소전쟁처럼 한쪽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모든 지상 통로를 통한 보급부대에 어느 정도 이상의 무장을 시켜야하며 현대에는 IED 등의 설치를 통한 보급로의 봉쇄 등도 가능하기에 진격 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병력이 필요해진다.(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병력 + 그 늘어난 병력을 보급해야 하는 보급 부대 + 다시 그걸 보급할 보급대..... 식으로 무한반복이 일어난다.)[10] 대표적으로 무기로도 쓸 수 있는 연장인 , 도끼 등이 있다.[11] 항우가 이를 모르고 했다가 민심이 단번에 날아갔으며, 이후 전투에서도 상대들이 항우한테는 항복해봐야 몰살당할 뿐이니 최선을 다해 저항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전투력이 엄청난 항우는 그들을 깨부수고 깨부쉈지만, 최후에는 농부에게 거짓 길 안내에 당해 도망가지 못하고 죽게된다.[12] 전술을 아예 몰라서 적군은 전략적으로 여기로 공격을 하면 우리가 불리하니까 여기에 방어를 강화해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허를 찔러서 성과를 어느 정도 거둘 수도 있고, 그 특성상 게릴라전이 주가 될 것이므로. 또는 의병 지휘관의 전술이 답이 없어 보여서 우린 따로 나와서 제대로 된 전술로 공격하겠다 하고 빠져나온 탈영(?)병들이 의병 본대가 버티는 동안 기습해서 의도치 않게 망치와 모루 전술이 일어날 수도 있다.[13] 이는 전쟁의 성격이 달라서 그렇다. 전국시대 전쟁 대부분은 사실상 땅따먹기인데, 현지 농민들까지 정적 밑에 있었다고 숙청해 버리면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 버려진 땅이 되고, 그렇다고 자기 영지에서 이주시키자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러니 다이묘들 간에 농민들은 건드리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농민들은 영주가 누구로 바뀌든 정해진 만큼의 세금만 납부하면 된다. 그러나 한반도 주민들이 이전부터 겪었던 전쟁들은 외침으로, 외침은 땅따먹기의 목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상대 국가를 힘으로 찍어 눌러 자국의 실익과 외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그러니 피점령 국가 여론이 어떻든 상관없이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쓸만한 이들은 자국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았다. 이러니 나랏님을 믿든, 안 믿든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죽거나 노예가 될 확률을 높게 생각해 거지같은 나라에서 살더라도 죽거나 노예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14] 이 도적은 일반적인 도적이 아니라 농민경제 파탄으로 인해 생겨난 유랑민이었다. 이걸 도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고려 정부가 유랑 농민들을 '초적(草賊)'이라고 불렀기 때문.[15] 당시 조선은 양인개병제에 의거 농병일치를 수행하고 있었고, 의병에 참가한 전투원들이 사실상 관군 전력이었기 때문이다.[16] 안태훈, 안중근 부자는 황해도에서 토벌대를 모집하여 김창수(=김구)의 동학군과 싸웠다.[17] 유인석이 김백선 죽인걸 고루한 신분제도에 얽매인 유생의 한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학계에서 그건은 신분에서 온 갈등이 아니라고 지적한게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애초에 의병을 중앙과 상관없는 자발적인 애국심의 발로로만 몰아가는 프레임이 문제인데, 을미의병경복궁 쿠데타와 춘생문 사건 실패로 일본과 친일 개화파 내각의 손아귀에 떨어져 실권을 잃은 고종이 친일 내각 영향력 하에 있는 친위대를 지방으로 빼내 경계를 느슨하게 한사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아관파천)해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각지 재야세력에게 밀지를 내려 거의를 독려하며 시작되었다. 이로인해 위정척사를 내세운 유림세력과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온건개화파, 명성황후의 인척인 여흥 민씨 일족이 일본 배격을 내세우며 뭉쳐서 일어난 게 을미의병인데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소요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인정해주고 누구도 죄를 묻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회유하려 했다. 이때 근왕파 관료들이나 민씨 일족과 연결된 의병들은 그대로 물러났으나 복제개혁, 단발령 등에 반발하던 척사파는 친일과 친러가 뭐가 다르냐며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이해관계와 사상이 전혀 다른 집단들이 '일본이 싫다'는 공통점으로 뭉쳤다가 사태가 일단락되어 다시 갈라진 것인데, 유인석은 화서계열 척사파 의병장이고 김백선은 여흥 민씨쪽 측근이었다. 즉, 신분문제가 아니라 정치 노선의 대립. 김백선을 죽여서 떨어져 나갔다는 의병들은 고루한 유생 의병장에게 실망한 평민의병이 아니라 민씨 일족 및 고종 측근들 관활하에 있던 의병 병력이다.[18] 말이 토벌이지 사실상 학살 수준이었다 한다.[19] 유비와 손견이 대표적이다.[20]양저우 지역의 명군이 청군과 맞서 싸우다 성이 함락된 이후 열흘 동안 청군의 학살이 일어났다. 양주십일기를 비롯한 기록이 남았다.[21] 대부분 전력이 약했고 정통성은 당연히 떨어졌다. 일단 가장 네임드가 정성공의 군대인데 정성공 부터가 아버지인 정지룡해적 출신 이었다.[22] 오죽 그러니 같은 명조인이었던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을 번왕으로 내세워 까다로왔던 운남, 광동, 복건을 다스리게 했고 강희제 때가 돼서야 삼번의 난을 겪고 과거 명조 전토를 청나라 영토 안에 넣었다.[23] 실제로 한말 의병의 일부가 만주 등지로 흘러 들어가 초기 독립군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24] 이 시나리오는 창병이 쓰레기 취급받던 오리지널을 바탕으로 한다. 당장 싸워야할 사무라이, 머스킷병 전투력은 16, 파이크병은 겨우 10...[25] 여몽전쟁때 최씨 정권이 지방반란을 진압하고 기존 문벌에 밀렸던 한미한 출신들을 등용해 중앙의 지배력이 올라가자 기존 고려 국방의 중심지였던 북부가 완전히 숙대밭(묘청의 난+조위총의 난+1차 여몽전쟁 손실)이 된 상태에서 남부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