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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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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2대 왕 유리왕(琉璃王) 고유류에 대한 내용은 유리명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신라의 제3대 군주. 처음으로 이사금 칭호가 나타났다. 남해 차차웅과 운제부인의 장남이자 태자.
오늘날 일단 《족보》상으로 박씨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조를 따로 올라가면 유리 이사금이 나온다. 다음 파사 이사금부터 본관별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장남은 일성 이사금, 차남이 파사 이사금으로 모든 박씨의 근원이다. 6부촌 여섯 부족에게 중국식 성씨를 내리기도 하는 등 아직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초기 신라에 많이 기여한 왕이다.
유리 이사금은 달리 '치리'(齒理/治理), '세리지'(世里智), '노례 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儒理'(유리)는 상고한어로 'no.rɯʔ'(노르) 정도로 발음되며, 이는 '弩禮'(노례)의 중고한어 발음 'nuo.lei'(누레)와 유사하므로 두 표기는 같은 순우리말 인명을 음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齒의 뜻인 '이'는 초기 중세국어 자료에서 '你'(니)로 나타나므로 '齒理'는 '니리'라고 읽을 수 있으며, 이 또한 앞서 서술한 두 표기와 음운적으로 유사하다. 결론적으로 '세리지'(世里智)라는 이표기를 통해 유리 이사금의 휘가 '누리', 즉 '세상'을 뜻한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고구려에 유리명왕[2] 이라는 동명이인이 보이는데 한자는 다르다. 제14대 왕 유례 이사금(석씨)에 대해 《삼국사기》는 '제3대 왕, 제14대 왕이 이름을 함께한다'라고 기록해 유리 이사금과 동명이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의 딸, 혹은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 박씨, 또는 사요왕(辭要王)[3] 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남해 차차웅이 후계자를 확실하게 정해주지 않고 둘 중 현명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유언을 남겼는데, 일단 태자라서 계승 서열이 높았던 유리는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러나 석탈해와의 유명한 잇자국 대결을 통해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서기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해석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치아 갯수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는 얘기[4] 에 따라 서로 떡을 문 후 잇자국이 가장 많은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질금'(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잇금'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개수와 덕망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연구는 없겠으나 최소한 초기 신라에서의 왕위란 가문 배경이나 정통 계승권, 군주로서의 행정력, 카리스마보다는 '덕망'이 상위에 있는 가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다른 동양 문화권은 물론 서양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초창기 신라만의 문화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효율적일 수도 있는데 어차피 원삼국시대인 신라 초창기에 지리상 한반도 남동쪽 구석에 있는 신라는 각 씨족 중에서 누가 군장이 될 거냐 서로 싸우다가 인구가 줄어들거나 결속력이 약해지기보다는 덮어놓고 미신을 만들어서 이 개수 기준에 따라 최대한 수평적으로 통치하는 게 나았을 수 있다. 그러다 물산이 풍부해지고 규모가 커지면 주변 씨족들이나 야만인들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오히려 이사를 와서 인구가 늘었을 것이다.[5][6]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의 전통 문화를 만든 것 이외에는 별거 없는 무난한 왕이었다. 단, 42년 이후 승하할 때까지 15년 정도 기간 동안의 역사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왕인 탈해 이사금 문서를 참고할 것.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주요 한국의 성씨들이 유리 이사금 대에 정립됐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한국에는 아직까지 성씨 개념이 거의 없었고, 6촌 → 6부 개념은 분명히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훗날 신라 중대 이후 어느 시점에 가문의 조상까지 소급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한민족 명절인 추석의 여러 풍습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유리 이사금 때다. 추석 문서 참조.
5년(서기 28년) 겨울에는 유리 이사금이 나라를 둘러보다가 한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는 느낀 바가 있어 옷을 벗어 덮어주고 밥을 먹인 뒤에 관리에게 명해 나라 곳곳의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 가족이 없는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펼치자 신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주변 나라에까지 나서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으며 이들이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새로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전근대 시대는 인구가 많아서 생산력이 높은 나라가 거의 무조건 유리했으므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경주시 일대의 성읍국가였던 초기 신라가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 북방에서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격파하자 5,000여 명의 낙랑 사람들이 피난왔는데 낙랑이 예전에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 이사금은 낙랑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이 기사 자체의 신빙성은 높지만 기년은 다소 의문이 있다.[7]
33년을 재위한 후 중병에 걸리자 두 아들(일성, 파사)보다 매제 탈해의 재능이 뛰어나니 탈해에게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으며,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아무튼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평가와는 별개로 훗날 늦게나마 각자 왕에 오르긴 한다.
가족 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째 아들이 제5대 국왕 파사 이사금, 첫째 아들이 제7대 국왕 일성 이사금인데 한가위의 유래를 설명할 때 2명의 딸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파사 이사금이 즉위할 때 '일성이 적자'라는 언급이 있는 탓에 유리 이사금에게 다른 왕비나 후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신라 기년은 신빙성 있게 보지 않지만 계보 자체의 신뢰성은 꽤 높다고 보는 편이기에 개연성은 높다. 첫째 아들의 나이를 따지면 늦둥이라도 조금 괴랄한 데다 왕위에 오르는 순서가 이상하지만 그건 삼국사기 초기 기년을 곧이곧대로 믿을 때 얘기다. 둘이 정말로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높은 편이다.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본기〉
一年秋九月 유리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묘에 제사 지내다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十九年秋八月 맥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일부 기록은 진흥왕(제24대) 시대의 것을 상대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1. 개요[편집]
"내가 모자란 몸으로 군림하매 백성을 먹여살리지 못하여 노약자들을 이런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으니, 이는 내 죄이다."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使老幼至於此極, 是予之罪也.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5년조#
신라의 제3대 군주. 처음으로 이사금 칭호가 나타났다. 남해 차차웅과 운제부인의 장남이자 태자.
오늘날 일단 《족보》상으로 박씨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조를 따로 올라가면 유리 이사금이 나온다. 다음 파사 이사금부터 본관별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장남은 일성 이사금, 차남이 파사 이사금으로 모든 박씨의 근원이다. 6부촌 여섯 부족에게 중국식 성씨를 내리기도 하는 등 아직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초기 신라에 많이 기여한 왕이다.
유리 이사금은 달리 '치리'(齒理/治理), '세리지'(世里智), '노례 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儒理'(유리)는 상고한어로 'no.rɯʔ'(노르) 정도로 발음되며, 이는 '弩禮'(노례)의 중고한어 발음 'nuo.lei'(누레)와 유사하므로 두 표기는 같은 순우리말 인명을 음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齒의 뜻인 '이'는 초기 중세국어 자료에서 '你'(니)로 나타나므로 '齒理'는 '니리'라고 읽을 수 있으며, 이 또한 앞서 서술한 두 표기와 음운적으로 유사하다. 결론적으로 '세리지'(世里智)라는 이표기를 통해 유리 이사금의 휘가 '누리', 즉 '세상'을 뜻한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고구려에 유리명왕[2] 이라는 동명이인이 보이는데 한자는 다르다. 제14대 왕 유례 이사금(석씨)에 대해 《삼국사기》는 '제3대 왕, 제14대 왕이 이름을 함께한다'라고 기록해 유리 이사금과 동명이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의 딸, 혹은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 박씨, 또는 사요왕(辭要王)[3] 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2. 생애[편집]
남해 차차웅이 후계자를 확실하게 정해주지 않고 둘 중 현명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유언을 남겼는데, 일단 태자라서 계승 서열이 높았던 유리는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러나 석탈해와의 유명한 잇자국 대결을 통해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서기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해석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치아 갯수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는 얘기[4] 에 따라 서로 떡을 문 후 잇자국이 가장 많은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질금'(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잇금'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개수와 덕망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연구는 없겠으나 최소한 초기 신라에서의 왕위란 가문 배경이나 정통 계승권, 군주로서의 행정력, 카리스마보다는 '덕망'이 상위에 있는 가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다른 동양 문화권은 물론 서양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초창기 신라만의 문화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효율적일 수도 있는데 어차피 원삼국시대인 신라 초창기에 지리상 한반도 남동쪽 구석에 있는 신라는 각 씨족 중에서 누가 군장이 될 거냐 서로 싸우다가 인구가 줄어들거나 결속력이 약해지기보다는 덮어놓고 미신을 만들어서 이 개수 기준에 따라 최대한 수평적으로 통치하는 게 나았을 수 있다. 그러다 물산이 풍부해지고 규모가 커지면 주변 씨족들이나 야만인들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오히려 이사를 와서 인구가 늘었을 것이다.[5][6]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의 전통 문화를 만든 것 이외에는 별거 없는 무난한 왕이었다. 단, 42년 이후 승하할 때까지 15년 정도 기간 동안의 역사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왕인 탈해 이사금 문서를 참고할 것.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주요 한국의 성씨들이 유리 이사금 대에 정립됐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한국에는 아직까지 성씨 개념이 거의 없었고, 6촌 → 6부 개념은 분명히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훗날 신라 중대 이후 어느 시점에 가문의 조상까지 소급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한민족 명절인 추석의 여러 풍습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유리 이사금 때다. 추석 문서 참조.
5년(서기 28년) 겨울에는 유리 이사금이 나라를 둘러보다가 한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는 느낀 바가 있어 옷을 벗어 덮어주고 밥을 먹인 뒤에 관리에게 명해 나라 곳곳의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 가족이 없는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펼치자 신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주변 나라에까지 나서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으며 이들이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새로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전근대 시대는 인구가 많아서 생산력이 높은 나라가 거의 무조건 유리했으므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경주시 일대의 성읍국가였던 초기 신라가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 북방에서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격파하자 5,000여 명의 낙랑 사람들이 피난왔는데 낙랑이 예전에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 이사금은 낙랑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이 기사 자체의 신빙성은 높지만 기년은 다소 의문이 있다.[7]
33년을 재위한 후 중병에 걸리자 두 아들(일성, 파사)보다 매제 탈해의 재능이 뛰어나니 탈해에게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으며,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아무튼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평가와는 별개로 훗날 늦게나마 각자 왕에 오르긴 한다.
"탈해는 신분이 나라의 친척이고 지위는 날 보좌한 신하이니 여러 번 공이 있다. 짐(朕)의 두 아들은 그 재능이 따라오지 못하니 내가 죽은 뒤, 대위(大位)를 잇게 하라. 내 유훈을 잊지 말라."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가족 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째 아들이 제5대 국왕 파사 이사금, 첫째 아들이 제7대 국왕 일성 이사금인데 한가위의 유래를 설명할 때 2명의 딸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파사 이사금이 즉위할 때 '일성이 적자'라는 언급이 있는 탓에 유리 이사금에게 다른 왕비나 후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신라 기년은 신빙성 있게 보지 않지만 계보 자체의 신뢰성은 꽤 높다고 보는 편이기에 개연성은 높다. 첫째 아들의 나이를 따지면 늦둥이라도 조금 괴랄한 데다 왕위에 오르는 순서가 이상하지만 그건 삼국사기 초기 기년을 곧이곧대로 믿을 때 얘기다. 둘이 정말로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높은 편이다.
3.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본기〉
一年秋九月 유리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묘에 제사 지내다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十九年秋八月 맥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일부 기록은 진흥왕(제24대) 시대의 것을 상대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기록[편집]
[1]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에 나온 기년들을 기초로 한 추측인데 《삼국사기》 기년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으므로 이 시기였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매제가 되는 탈해 이사금보다는 많았거나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굳이 따져보면 실제로는 2세기 중후반 ~ 3세기 초일 가능성이 높다. [2] 《삼국사기》 기년 만으로 봐선 유리명왕 쪽이 1~2세대 앞의 인물로 재위 기간은 겹치지 않지만, 《삼국사기》 신라 초기 기사 자체는 신뢰할 수 있으나 기년은 신뢰할 수 없다는 쪽이 대체로 정설이므로, 신라 유리 이사금은 적어도 고구려 유리명왕보다는 훨씬 후대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기원후 2세기 중후반에 와서야 낙랑 일대로부터 예맥계 유이민이 와서 다른 집단들을 통합하는 모습이 고고학적으로 처음 드러나기 때문이다.[3] 이 사요왕의 '왕'은 갈문왕을 의미하는 거라는 설이 있다. 허루 갈문왕이 '허루왕'으로, 마제 갈문왕이 '마제국왕'으로 적힌 경우가 있어 사요왕의 '왕'이 국왕이 아니라 '갈문왕'을 의미하는 거라는 설이 정설에 가깝다.[4] 정확히는 '이가 많다 = 나이가 많다 = 현명하다'라는 뜻이다. 옛날 동양에는 치아가 많으면 존귀하다는 인식도 있었는데 1,000여 년 뒤 송나라 시대에 쓰여진 관상학 서적인 《마의상법》(麻衣相法)에서는 '치아가 38개면 왕이나 제후, 36개면 관료나 갑부, 32개인 사람은 중인(中人), 30개는 보통 사람, 28개는 하층의 가난한 부류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석탈해 일화와는 시대 차이가 상당히 나지만 치아가 많을수록 현명하고 존귀하다는 인식이 하루아침에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참고할 만하다. 참고로 따로 병이 없다면 일반인의 치아 개수는 사랑니까지 포함해 32개다. 32개를 넘어가면 현대에는 과잉치라고 해서 질병으로 취급한다. 기록대로면 유리 이사금은 치아 생성 세포 DNA에 변이가 일어나 과잉치를 가진 질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5] 이 시기는 역사학적으로 아직 국가로 분류하지 않는 데다 호패법도 없어서 이민이 아주 자유로웠다.[6] 이는 물론 인구가 적었을 때 얘기다. 인구가 많아짐에 비례해 점점 중앙집권화가 필요하며 그것을 보좌할 각종 제도, 법, 군대 등이 없으면 통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것을 신라에 정착시킨 세력이 김알지 계통의 경주 김씨들이다.[7]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낙랑인들이 처음 신라에 와서 다른 예맥계 집단을 통합해 지배집단이 되는 시기는 고구려에선 태조대왕-신대왕 등이 통치하던 시기인 기원후 2세기 중후반 ~3세기 초 즈음이었고, 고구려가 낙랑군에게 정면 도전해서 도장깨기할 수 있었던 것은, 낙랑 태수가 그 지배하던 영역의 고조선계 유력자들을 통제하기 힘들어하던 때가 그 시기부터였기 때문이었다. 대무신왕 때의 고구려는 낙랑군에게 분명히 말해 열세였다. 그저 몇 번 집적대서 약탈이나 할 뿐이었고 오히려 낙랑군이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호족들을 자꾸 부추겨서 고구려 왕실로부터 이탈시키는 걸 막느라 고생하던 시기기에, 이 일이 정말로 《삼국사기》 기사처럼 대무신왕 때 벌어졌을 개연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낙랑 사람들이 유리 이사금 치세에 대규모로 남하했을 개연성은 높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면 2세기 중반~3세기 초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박씨 족단이 등장하기 전 사로국은 전원 위만조선 성립기 및 멸망기에 내려온 조선인들 및 그 후예들로 이뤄졌기에, 낙랑인 또한 대부분은 한나라 지배를 받는 고조선 유민이므로 사로국이 계통이 비슷한 이 사람들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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