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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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50대 국왕. 제48대 경문왕의 차남, 제49대 헌강왕의 남동생, 제51대 진성여왕의 둘째 오빠, 제52대 효공왕의 숙부.
2. 생애[편집]
형인 헌강왕이 서자인 김요(효공왕)만 남기고 승하하자 서자를 왕위에 올릴 수는 없어 동생인 김황이 왕위에 올랐다. 887년 1월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마련해 정강왕 스스로도 행차하고 강의를 들었다. 887년 1월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金蕘)[2] 가 반란을 일으켜 정강왕은 군대를 파병해 김요를 죽였다. 한주는 지금의 경기도 지방으로 수도 서라벌에서는 먼 북방이었지만 진성여왕 시대에 일제히 반란이 일어나고 중앙 정부가 통제를 못해 후삼국시대가 사실상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정강왕 시기만 해도, 수도 서라벌에서 지방의 반란을 통제할 여력이 있는 상태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즉위한 지 1년도 안 된 887년 5월, 병이 들자 시중 준흥에게 여동생 김만(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3] 887년 7월 5일 승하했다. 재위 기간이 딱 1년 365일이며, 2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정강왕릉은 《삼국사기》에서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53에 있는 능을 정강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경주시 시내버스가 많이 다니고 남산(경주)을 등산할 때도 기점으로 많이 가는 통일전 바로 옆 100m 거리에 있어서 찾아가려고 하면 가기는 쉬운데 가는 길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거쳐야 한다. 300m 거리에 형이자 선왕인 헌강왕릉도 있는데 양식이나 크기는 거의 똑같지만 정강왕릉이 비교적 초라한 편이다.
3.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정강왕 본기>
一年秋七月 정강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준흥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 나라 서쪽이 가물어 흉년이 들다
二年春一月 황룡사에 백좌고를 설치하다
二年 이찬 김요가 반역을 꾀하다 목베이다
三年夏五月 정강왕이 만으로 왕위를 잇도록 유언을 하다
三年秋七月五日 정강왕이 죽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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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인 헌강왕이 861~864년생으로 추정되고, 여동생인 진성여왕이 865~868년생으로 추정되므로 정강왕은 863~867년생 정도로 추측이 가능하다.[2] 나중에 효공왕이 되는 김요와는 다른 사람으로 한자가 다르다. 당시 효공왕은 2세 남짓한 나이로 반란은 커녕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3] "병이 위급하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나 나의 누이 김만(曼)은 재능이 명석하고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으니 경들은 옛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예를 따라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