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원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철부
김구해
김거칠부
김세종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수을부
을제
수품
비담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알천
금강
김유신
김군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진복
김문영
김개원
인품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배부
김사공
김정종
김사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신충
만종
신유
김양상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김경신
충렴
세강
김언승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김숭빈
김수종
김충공
김균정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김명
김귀
장보고
김예징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김의정
김안
김정
위진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김위홍
준흥
김성
계강
제45대
제46대
박위응
김성
문헌상 기록이 확인된 인물
김춘추, 김순정, 김옹, 김주원





金愷元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7남[1]이자 제30대 문무왕의 동생.


2. 생애[편집]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서기 655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다음 해, 형들과 나란히 관등을 제수받았다. 이는 무열왕이 정권 초기에 친위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장에 가도록 하였다. 임금이 곧장 지경을 파진찬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이후 서기 667년, 문무왕 7년에 당고종의 칙명으로 대아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앞선 기록에선 이찬에 임명됐다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대아찬이라 해서 아마 앞의 기록이 아찬을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듬해인 668년 6월에는 김인문, 흠순, 천존, 진복, 지경, 흠돌 등과 함께 대당총관에 임명되었고 고구려 정복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683년에는 조카인 신문왕김흠운의 딸을 맞아 부인을 삼으려 하자, 이찬 김문영과 함께 김흠운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그리고 695년, 효소왕 4년에 마침내 상대등에 임명됐다. 이렇게 보면 자신이 주관했던 혼례로 태어난 효소왕이 자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한 셈.[2]

[1] 문명왕후 소생.[2] 아마 실제로는 어린 효소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은 신문왕비, 신목왕후의 의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5 22:04:58에 나무위키 김개원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