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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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金歆運
신라 중대의 장군.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자 신문왕의 장인.
단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는 김흠운 사후 27년이 지난 683년에 신문왕의 계비가 되었으므로 생전에 장인이었던 적은 없다.
2. 생애[편집]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 행적이 전하는데 내물 마립간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으로 왕위와 약간 거리가 있는 진골 귀족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화랑 문노 휘하의 낭도로 있었는데 동문이었던 전밀이 옆에서 그를 보기에 어렸을 적부터 이름있게 죽어간 옛 화랑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반드시 그들처럼 싸우고 명예롭게 죽을 것이라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655년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지역인 조천성(助川城)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맞붙었는데 김흠운이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했다.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사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백제군이 야간에 조천성을 기습해왔는데 김흠운은 퇴각하지 않고 맞서다 전사했고, 기습으로 잠깐 혼란에 빠졌던 신라군은 흠운의 의지를 보고 분전해 싸우다 죽는 자가 많았다. 무열왕은 일길찬 관등을 추증하고 신라 사람들은 양산가(陽山歌)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애도하였다 한다.
전사하기 전에 딸을 두었고 이 딸은 훗날 신목왕후가 된다. 삼국사기 효소왕 즉위조에 효소왕의 어머니인 신목왕후의 아버지 김운 공이 김흠운이라고도 불린다는 내용이 있어, 김운과 김흠운은 동일인물로 여겨지기 때문. 비록 본인은 전사했지만 그 대가로 가문은 승승장구한 셈.
위서인 박창화 저 화랑세기에서는 김흠운의 부인이 바로 요석공주라고 주장한다. 기록에 남은 무열왕의 사위 중에 일찍 전사한 사람이 김흠운밖에 없는 것을 보면 실제로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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