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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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47대 군주.
제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이복동생이자 이종사촌 동생[2] 이고, 제46대 문성왕에게는 숙부이며 제48대 경문왕의 장인이자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의 외조부이다.
헌안왕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3] 조카인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병부령을 맡았고, 이후 문성왕 11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문성왕은 태자가 있었는데 폐위되었으며, <신라경순왕전비문>(新羅敬順王殿碑文)에서는 문성왕에게 김안이라는 아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왕이 죽을 때 유언으로 숙부인 헌안왕을 후계자로 추대했고, 각간의 벼슬에 있었던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의 업적은 그리 오래 재위한 것이 아님을 감안해도 빈약한 편인데 별 일 안 한건지 기록이 부실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후자쪽에 가까워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제사를 지내고, 큰 물고기가 잡혔으며 제방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사실 <헌안왕 본기> 기록 자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리 짧은 편은 아닌데 거의 왕족인 김응렴(훗날 경문왕)과의 대화 내용이 절반을 차지한다. 대화 내용을 요약하면 '김응렴과 얘기했더니 똑똑해서 사위로 삼고, 후계자로 삼아야겠다'라는 것이 내용의 골자.[4] 더군다나 후기에는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다.
아들은 없고 성씨를 알 수 없는 왕비에게서 본 두 딸만 있었는데 사망 기사를 보면 과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이 있었으므로 딸을 여왕으로 올리자는 여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헌안왕이 유교적 관점에 의하면 잘못된 것이므로 본받을 수 없다고 하여 두 딸을 경문왕에게 시집을 보내 그가 왕족이자 사위로서 왕위를 잇도록 했다. 이는 통일신라 사회내에서 여왕이 이론적으로는 즉위가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히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5] 물론 여기에는 헌안왕이 아무래도 김응렴의 아버지인 김계명과 손을 잡고 문성왕 대의 권력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헌안왕이 후궁인 빈어(嬪御)[6] 에게서 궁예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후에 태봉을 건국한 궁예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헌안왕의 서자라고 기술되어 있어 이 설에 따르면 궁예가 최소 861년 이전 출생이라는 말인데 궁예의 활동 기간이나 사망년 등을 감안할 때 시기 차이가 많이 나서 주목받지 못하는 학설이며, 궁예의 주된 활동 기간을 감안하면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또는 문성왕의 사촌동생인 김예(金銳)라는 인물이 경문왕 시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처형되는 점을 감안해 헌안왕의 아들로서 경문왕의 박해를 받아 신라에서 이탈했다고 볼 수도 있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 부친설을 채택했다.
헌안왕릉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179호로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지구 선도산 자락의 왕릉 밀집 지역에 있다. 자연석을 둘러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한 높이 약 4m의 고분으로 바로 옆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이 있으며 500m 거리에 무열왕릉,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삼국사기》 <헌안왕 본기>
一年秋九月 헌안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죄수를 크게 사면하다
一年秋九月 이찬 김안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二年夏五月 비가 오지 않다
二年 당성군에서 큰 물고기가 잡히다
三年 기근에 사신을 보내 구휼하다
三年夏四月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에 힘쓰게 하다
四年秋九月 왕족 응렴이 헌안왕의 사위가 되다
五年春一月二十九日 헌안왕이 죽다
1. 개요[편집]
신라의 제47대 군주.
제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이복동생이자 이종사촌 동생[2] 이고, 제46대 문성왕에게는 숙부이며 제48대 경문왕의 장인이자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의 외조부이다.
2. 생애[편집]
헌안왕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3] 조카인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병부령을 맡았고, 이후 문성왕 11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문성왕은 태자가 있었는데 폐위되었으며, <신라경순왕전비문>(新羅敬順王殿碑文)에서는 문성왕에게 김안이라는 아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왕이 죽을 때 유언으로 숙부인 헌안왕을 후계자로 추대했고, 각간의 벼슬에 있었던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의 업적은 그리 오래 재위한 것이 아님을 감안해도 빈약한 편인데 별 일 안 한건지 기록이 부실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후자쪽에 가까워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제사를 지내고, 큰 물고기가 잡혔으며 제방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사실 <헌안왕 본기> 기록 자체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리 짧은 편은 아닌데 거의 왕족인 김응렴(훗날 경문왕)과의 대화 내용이 절반을 차지한다. 대화 내용을 요약하면 '김응렴과 얘기했더니 똑똑해서 사위로 삼고, 후계자로 삼아야겠다'라는 것이 내용의 골자.[4] 더군다나 후기에는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다.
아들은 없고 성씨를 알 수 없는 왕비에게서 본 두 딸만 있었는데 사망 기사를 보면 과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이 있었으므로 딸을 여왕으로 올리자는 여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헌안왕이 유교적 관점에 의하면 잘못된 것이므로 본받을 수 없다고 하여 두 딸을 경문왕에게 시집을 보내 그가 왕족이자 사위로서 왕위를 잇도록 했다. 이는 통일신라 사회내에서 여왕이 이론적으로는 즉위가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히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5] 물론 여기에는 헌안왕이 아무래도 김응렴의 아버지인 김계명과 손을 잡고 문성왕 대의 권력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헌안왕이 후궁인 빈어(嬪御)[6] 에게서 궁예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후에 태봉을 건국한 궁예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헌안왕의 서자라고 기술되어 있어 이 설에 따르면 궁예가 최소 861년 이전 출생이라는 말인데 궁예의 활동 기간이나 사망년 등을 감안할 때 시기 차이가 많이 나서 주목받지 못하는 학설이며, 궁예의 주된 활동 기간을 감안하면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또는 문성왕의 사촌동생인 김예(金銳)라는 인물이 경문왕 시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처형되는 점을 감안해 헌안왕의 아들로서 경문왕의 박해를 받아 신라에서 이탈했다고 볼 수도 있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 부친설을 채택했다.
헌안왕릉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179호로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지구 선도산 자락의 왕릉 밀집 지역에 있다. 자연석을 둘러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한 높이 약 4m의 고분으로 바로 옆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이 있으며 500m 거리에 무열왕릉,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3. 가계[편집]
- 증조부: 열조 원성왕(제38대)
- 증조모: 숙정부인
- 배우자: 헌안왕비
4. 기타[편집]
- 흥미로운 설이 존재하는데 헌안왕이 상대등 시절에 시중인 김계명(金啓明)[8] 과 힘을 합쳐 조카인 문성왕을 협박해 물러나게 했고 이 때문에 김계명의 아들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이 그 것이다. 근데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는 설이긴 하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거나 핍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당장 50년 전으로 돌아가서 조카인 애장왕을 시해하고 삼촌 헌덕왕이 왕위에 오른 판에.
- 헌안왕과 경문왕의 왕위 이양 설화는 여러모로 요임금과 순임금 간의 평화적 계승을 연상케 한다. 헌안왕=요임금, 경문왕=순임금, 영화부인=아황, 차비 김씨=여영에 해당. 설화적 요소를 걷어낸 진실이 그닥 평화롭지는 않은 것도 동일.
5. 대중매체에서[편집]
6.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헌안왕 본기>
一年秋九月 헌안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죄수를 크게 사면하다
一年秋九月 이찬 김안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二年夏五月 비가 오지 않다
二年 당성군에서 큰 물고기가 잡히다
三年 기근에 사신을 보내 구휼하다
三年夏四月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에 힘쓰게 하다
四年秋九月 왕족 응렴이 헌안왕의 사위가 되다
五年春一月二十九日 헌안왕이 죽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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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균정이 새 아내인 조명부인과 재혼한 직후인 822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즉 40세 즈음에 죽은 셈이다. 장녀인 영화부인이 헌안왕 사망 당시 20세였으므로 시기적으로도 잘 맞아떨어진다.[2] 신무왕의 어머니 정교부인과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이 자매간이다.[3] 이복 형인 신무왕이 장보고와 힘을 합쳐 민애왕 세력과 왕위 다툼을 벌였었는데 그 때 무엇을 했는지 조차 남아있지 않다.[4] 신라~고려 초기까지는 왕족간의 근친혼이 흔했고, 적장자가 없을 때 사위는 왕위 계승 후보였다.[5] 결국 신라의 3번째 여왕이 30여 년 뒤에 즉위하지만 제51대 진성여왕 시기에 지방에서 반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통일신라가 다시 분열해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6] 후궁 작호 중 하나이다.[7] 헌안왕의 두 딸과 모두 혼인했다.[8] 제43대 희강왕의 아들이자 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