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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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초대 국왕
궁예 | 弓裔

파일:궁예 (칠장사 벽화).png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의 궁예 벽화.
출생
(음력)

857년[1]
869년[2] 5월 5일
신라 금성(추정)
사망
918년 7월 24일 (향년 61세 혹은 향년 49세)[3]
태봉 부양 산골현 인근
(現 강원도 평강군 일대)
능묘
함남 안변 전 궁예묘[4]
재위기간
태봉 초대 국왕
901년 ~ 918년 7월 24일[5] (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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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1](弓)[2] / (高)[3]

궁예(弓裔, 躬乂) / 예(裔)
법명
선종(善宗)
부모
부친 헌안왕 또는 경문왕
모친 빈어[4]
왕후
부인 강씨[5]
왕자
청광보살(靑光菩薩)
신광보살(神光菩薩)[6]
종교
불교
신장
약 160cm 초과[7]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궁예왕(弓裔王)
존호
미륵불(彌勒佛)[8]
연호
무태(武泰: 904년 ~ 905년)
성책(聖冊: 905년 ~ 911년)[9]
수덕만세(水德萬歲: 911년 ~ 914년)[10]
정개(政開: 914년 ~ 918년)[11]



파일:궁예묘.jpg

함남 안변 전 궁예묘[6]
1. 개요
3. 궁예는 신라 왕족인가?
3.1. 긍정설
3.1.1. 거병 전의 궁예에겐 족보조작을 할 힘이 없었음
3.1.2. 왕실 족보의 매매·조작을 통한 사칭은 불가능하다
3.2. 부정설
3.2.1.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
3.2.2. 당대 조상 조작의 관행
3.2.2.1. 족보를 조작하더라도 반발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
3.2.2.2. 궁예라는 인물의 비합리성
3.2.3. 궁예 설화의 허위성
3.2.4. 고려 왕조의 날조 가능성
4. 평가
4.1. 재평가와 폭군 논란
4.2. 조선시대의 평가
4.3. 현대의 평가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후삼국시대군웅이자 태봉의 유일한 국왕이자 한국사 유일의 승려 출신 군주.

통일신라의 일개 떠돌이 승려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력적 소양과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만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불려 당시 한반도 천하의 삼분의 일을 평정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재위 말년에 가혹한 폭정을 실시하고 각종 전쟁과 후삼국의 정치를 겪으며 오늘날 의학적 개념으로는 편집성 성격장애와 같은 정신병이 발병한 결과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이 악화되면서 무자비한 폭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무자비한 숙청에다 독선적인 정치철학에 염증을 느낀 왕건역성혁명으로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7]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궁예/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궁예는 신라 왕족인가?[편집]


당대 신라 귀족이나 왕족 출신들이 궁예를 신라 왕족으로 여기는 기록이 있기는커녕, 정황 증거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궁예가 신라 왕족 출신인지에 대한 옹호론과 부정론이 있다.


3.1. 긍정설[편집]



3.1.1. 거병 전의 궁예에겐 족보조작을 할 힘이 없었음[편집]


궁예가 고위 신라 왕족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은 여러 가지 기록과 정황 증거가 있다. 궁예는 양길에게서 독립하기 전에 명주에 가서 호족 순식의 항복을 받았는데, 궁예가 그저 혈통도 알 수 없는, 아니 혈통이나 사칭하는 반란군 수령 나부랭이의 수하일 뿐이었다면 그렇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대에 흔히 이루어진 왕실의 선대조작은 일단 족보조작을 할 만큼의 재력과 세력을 확보한 후에야 가능했는데 궁예는 신라 말의 가난한 승려 내지 혼세의 비적대장 1에 불과(?)했기에 태봉 건국 전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때문에 확실히 혈통을 조작할 능력이 없었을 때 순식이 귀부한 것을 보면 궁예는 다른 진골귀족들의 음모로 선조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숙청당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왕의 초상화를 로 베었다는 일화를 비롯해서 신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궁예는 신라의 지배층에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궁예 자신이 당시 지배층과 모종의 악연이 있으며, 지배층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3.1.2. 왕실 족보의 매매·조작을 통한 사칭은 불가능하다[편집]


신라 당시는 가문과 혈통만은 엄격하게 따지는 골품제 혈족 사회, 신분 사회였고 상류층조차도 가문의 등급이 철저히 나뉘어졌으며 누가 몇 두품 가문 소속인지 아닌지는 가문 소속 인원들과 족보만 조사해봐도 금방 들통날 게 뻔했던 때였다. 환단고기에서는 궁예가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시대의 일개인의 족보조작과 진골 경주 김씨 편입이 마치 조선 후기처럼 그렇게 쉬웠으면, 최치원 등을 비롯한 유능하고 세력있는 6두품들이 그렇게 진골 가문을 사칭하지 못해서 절망하고 좌절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당시 힘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도 물론 선대를 조작했을 게 분명하다. 왕건도 그랬지만, 신라 말에 갑자기 각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오늘날의 권씨[8], 이씨, 장씨, 박씨 등 여러 본관별 성씨들이 출현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차마 경주 김씨 진골을 사칭하진 않았다. 작게는 세간의 조롱을 받고 크게는 조정의 어그로를 끌어 역적으로 몰려 토벌될 수 있었기 때문. 그 족보 매매가 횡행한 조선 후기에도 왕실 적통 족보는 절대로 팔릴 리가 없었다. 왕실에 원본이 있는 족보를 무슨 수로 매매하거나 위조를 한단 말인가? 조선 후기에도 그러했는데 신라 왕실에 족보가 없어서 맘대로 사칭이 가능했겠는가? 삼국지의 유비 정도로 서출의 먼 후손 급인 너무 먼 방계라면 황손인지 논란이 생길 수 있는 것이지만 궁예의 입지는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왕가의 선대조작이 관행이라 하나, 삼국의 시조들의 이야기는 어디가지나 술작(述作, 단편적 사실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새 얘기를 만드는 것)된 신화이고 설화이다. 신라 경주 김씨가 끌어들인 흉노족 투후 김일제나 왕건이 끌어들인 당숙종 갖고는 한나라나 당나라가 이미 망해 자빠진 나라라서 선대조작을 가지고 따질 사람도 없었던 반면 궁예의 시대에는 아직 골품제와 경주 김씨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웬 상놈이 왕족을 사칭했다간 천하에 망신살 뻗치면 다행이고 심한 경우 집안이 멸문당하기 딱 좋은 시대였다. 아자개와 견훤이 신라왕실 후손이라는 주장은 수백 년 후에 쓰인 고려시대 책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또 백제 부여씨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는 등 후백제 멸망 이후 훨씬 후대에 윤색 술작된 것이 뻔해서 당시 왕실 적통 사칭이 가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애초에 수도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왕실 후손이면 경주 김씨여야지, 굳이 성이 이씨일 리도 없고.

참고로 힘센 놈이 무조건 선대조작을 한다는 주장은 이성계 여진족설 같은 불쏘시개나 뿌리는 혐한들의 개소리이다. 이성계 또한 전주 토박이 전주 이씨 분가 종친들과 만나서 대풍가를 읊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전주 이씨도 아니면서 전주 이씨를 사칭하고 장자를 음서로 관직에 진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고대 한반도에서 혈통은 그 자체가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지배층 귀족들까지 여러 두품으로 나누어서 가문별로 철저히 등급을 구별했던 신라에서 감히 누군가가 근거도 없이 자기가 진골이라고 사칭했다간 철저히 세인들의 비웃음만 샀을 것이다. 삼국 중 왕권이 가장 약했던 백제의 경우도 대성팔족의 대귀족들이 허수아비왕을 세워서 조종하는 형식을 취했지 직접 왕위를 찬탈하진 않았다. 왕(영류왕)까지 죽인 고구려의 유명한 권신 연개소문도 마찬가지로 허수아비왕(보장왕)을 세웠지 차마 찬탈은 하지 못했다. 고대사회에서 혈통이 정통성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 만약 궁예가 신라 왕족을 사칭했다거나 혹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이 떠도는 소문 정도로라도 존재했다면 신라 왕실에서 문제를 안삼았을 리가 없고 고려의 사서에도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며 견훤 역시 이걸 빌미 삼아 궁예를 강하게 공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서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3.2. 부정설[편집]



3.2.1.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편집]


상기 긍정설에서는 '궁예는 그래도 권력에서 밀려난 경주 김씨 누군가의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석을 인정한다면 의문 하나가 또 남게 된다. 그러면 궁예는 누구의 아들이며, 왜 (권력에서 물러났을 경주 김씨 아무개가 아닌) 신라 왕의 아들이라고만 전해지고 있는가?

궁예는 태생부터 고아로서 원체 혈통을 추적할 만한 근거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진서로 인정받는 정사인 삼국사기 궁예전에도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의 아들이었으나 버려졌다'는 모호한 기록만이 전해질 뿐이며, 궁예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 각 왕의 본기에는 궁예의 출생에 대해 일말의 기록조차 적혀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신라의 영토를 무려 2/3나 차지하고 신라를 매우 증오하여 멸도라고 부를 정도의 인물이 정말 신라 왕의 아들이라는 근거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인물의 아버지 되는 신라왕의 본기에 궁예의 출생 혹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일부라도 실어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혈통에 대해서 사서에 이를 추적할만한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신라 왕자일 것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긍정설에서는 명주의 대호족인 순식이 귀부한 것을 두고 궁예의 신라 왕자, 혹은 왕족설을 긍정하지만 이것은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신분이 매우 중시되던 시대에도 어지러운 난세에는 의외로 신분이 높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고 세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례가 꽤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태생적인 신분이 낮거나 휘하의 세력이 빈약해도 그 사람의 인격, 능력, 용맹, 카리스마가 워낙에 대단하거나 혹은 장래성이 워낙에 뛰어나다고 판단되고, 또 그의 이런 면들 때문에 매료가 된다면 비록 신분이 높고 능력도 좋더라도 그의 밑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의외로 있다.

예를 들어 장량의 경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전국칠웅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 명문 집안 출신이었고, 본인의 능력도 워낙에 출중했지만, 미천한 농민 출신인 유방의 밑에 들어가 그의 신하로 활약했다.[9] 명책사 장량, 명재상 제갈량과 비교될 정도였던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책사 유기도 강남 한인으로 급제하기 그토록 어렵다는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한 엘리트 지식인이었음에도 비천한 농민출신이었던 홍무제를 섬겼다. 비록 궁예가 신라의 왕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순식과 그의 아버지 허월이 그의 매우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와 혁신적인 사상에 매료되고, 또 그의 장래성이 매우 기대가 되어 명주의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궁예의 혈통긍정론에 따르면 궁예는 진작에 권력에서 밀려나 사실상 상놈으로 전락해버린 떨거지 출신인데, 그런 떨거지가 단지 왕족이라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더 세력을 갖추고 있었던 대호족 순식이 귀부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3.2.2. 당대 조상 조작의 관행[편집]


궁예가 47대 헌안왕이나 48대 경문왕서자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꽤 많다. 일단 저 두 왕이 아니라 45대 신무왕이나 46대 문성왕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천 김씨, 광산 이씨족보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물론 족보라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과장된 전승과 황당무계한 전설까지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유력 호족들은 족보 세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야사인 《삼국유사》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에 따르면 견훤이 진흥왕현손이라고 써 있는데, 정사인 《삼국사기》 <견훤열전>에는 견훤이 상주 출신 농민인 아자개의 아들이라는 말 외엔 신라왕실과의 연계성은 전혀 지적되지 않는다. 게다가 견훤은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전승도 있어 백제 왕실과도 연관이 있는데 이 또한 후백제를 세우면서 퍼뜨렸던 프로파간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출자가 어지럽게 전해지는 것부터가 당대에는 술작이 흔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고려 왕실도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출자가 변방민이라 그렇지 당대에는 한가닥 하는 집안으로 패서 출신 해적이었을텐데도 중국 당나라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뻔한 구라를 쳤다. 여기서 더 웃긴 점은, 고려 왕실이 자기 조상이라 말한 당나라 황실 농서 이씨도, 본래는 선비족탁발부 계통으로 선비족 중에서 가장 융성했던 씨족으로 한때 흉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가장 융성했던 것으로 보아 토착 지배층 세력으로 추측된다. 농서 이씨는 선비족 계통이면서 자기들이 노자의 후손이라고 뻥을 쳤다는 것이다. 당나라 황실의 성은 이씨였는데, '노자'로 알려진 전설상의 인물도 이씨라고 알려져서이다. 참고로 한국에는 농서 이씨의 친척으로 연안 이씨가 있다.

그에 더해서 당숙종과 결혼한 자신들의 모계 조상이라는 진의라는 여자의 증조부로는 '성골장군' 호경이라는 인물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자세히 읽어보면 호경이 스스로를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했다는 것이지, 신라 왕실의 족보에 남아있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성골은 상대 신라에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최상위 왕족 이외의 의미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용어였다. 직접적으로 신라 왕의 후손을 자칭하진 않았지만 왕건도 신라 왕실의 후손이라고 생각될법한 논조의 프로파간다를 했다는 것. 당연히 그러한 기록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없고, 그냥 세력가들이 자기 혈통을 신라 왕가에 갖다붙이는 게 그 때 트렌드였구나, 하면 되는 것들이다. 궁예의 혈통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아예 처음부터 고아였던 궁예의 경우처럼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우기는 경우라면? 궁예전의 기록과 같은 일이 실재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왕후나 정식으로 들인 후궁의 아이를 그런 식으로 토스했을 리는 없으니 궁예의 '친모'는 그다지 귀하지 않은 신분의 정부(情婦)일 텐데, 설령 그때까지 살아있어서 증언을 해 준다고 해도 궁예가 한창 내가 누구 아들이오 하고 떠벌리고 다녔을 당시(890년대 - 910년대), 친부로 궁예가 주장한 헌안왕 또는 경문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정적으로 궁예가 태어났을 즈음에 어느 사가에서 왕의 아이가 태어났고 또 버려졌음이 확인되었다고 해도 이 아이가 그 아이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친모'가 '유모'와 함께, 한쪽 눈을 못 뜨는 갓난 아기를 안은 사진이라도 찍어 두진 않았던 이상 말이다.


3.2.2.1. 족보를 조작하더라도 반발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편집]

상기 옹호론에서는 감히 왕실을 사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지적하고 있다. 이 논리는 물론 매우 타당하다. 국가의 권위가 나름 유지되고 있는 때라면 말이다. 그러나 궁예는 국가의 내적 통치력이 유지되고 있던 시기의 사람이 아니다. 궁예 이전에 이미 기훤이니 양길이니 하는 도적떼들이 신라 땅 상당수를 점유하고 사실상 독립국 행세를 하는데 신라 왕조는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후고구려가 건국되기 8년 전에 이미 견훤이 '참람하게도' 대놓고 왕을 자청하고 백제의 후계자를 자처함에도 신라는 무력하게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가 자기가 신라 왕족임을 사칭한다 하더라도 신라에서 이를 반발하기 쉽지가 않다.

어차피 궁예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신라는 수많은 군벌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며, 궁예는 그런 개판이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양길의 부하를 거쳐 독립세력의 수장이 된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나는 신라 왕자다!' 라고 하더라도, 그 궁예를 진압할 능력이 없는데 괜히 '신라 왕족을 사칭하는 미친놈!'이라고 비난해 봐야 괜히 궁예의 분노를 사서 더 얻어맞기만 할 수 있으니 침묵했다고 보면 해석이 맞는다.

사례를 모아 보면 태조 왕건 또한 자기가 신라의 성골 호경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이것 또한 뻥일 가능성이 큰데, '왕건의 조상 호경'이 뻥인 것과, '궁예의 아버지 경문왕, 또는 헌안왕'은 동일한 수준의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왕가의 지위만 잃었을 뿐 명백히 살아 있는 경주 김씨들이 '왕건의 신라 왕족 사칭'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씨 가문이 경주 김씨의 방계라고 주장하는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궁예를 신라 왕족이라고 믿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다못해 왕건 가문을 '그래도 왕건도 왕실에서 밀려난 경주 김씨의 어딘가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잣대를 궁예에게도 똑같이 대볼 수 있다.


3.2.2.2. 궁예라는 인물의 비합리성[편집]

'감히 왕족의 족보를 사칭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냐?' 라고 하는데, 합리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역사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또는 '미친짓', '판을 그르친 오판' 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비합리적 결정 등이 넘쳐난다. 그리고 현 구성원이 생존해 있는 왕가를 사칭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전례가 없지 않다.

또한 태봉 말년에 궁예가 당대의 이름난 고승인 석총을 때려죽여 불교 교단과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는 행위, 스스로의 왕비와 자식들까지 때려죽이며 공포정치를 벌인 행위, 대놓고 미륵불을 자청하며 스스로 사이비 경전을 쓰는 행위 등은 아무리 좋게좋게 보더라도 도무지 합리적 행위라고 볼 수 없다. 합리적 차원에선 모두 궁예 자신의 지지를 깎아먹고 공포를 느낀 불만계층을 양성하여 결국 왕건의 쿠데타로 귀결된 행위기 때문이다. 이렇게 궁예라는 인물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정신나간 광증을 보인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자기 스스로가 신라 왕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뻥을 쳤다고 보는 것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3.2.3. 궁예 설화의 허위성[편집]


궁예 출생·성장담의 내적인 구조만 살펴 봐도 궁예 신라 왕자설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서, 궁예가 왕의 아들임을 증언해 주는 인물은 오직 궁예의 어머니 한 명 뿐이다. 유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궁예는 이 사람에게 출생의 비밀을 들은 후에도 어머니라고 부른다. 애초에 궁예의 어머니로 거론되기도 하는 장보고의 딸 역시 장보고가 염장에 암살되어 가문이 몰락한데다 신라 기준으로는 평민이었으므로 별도의 유모를 고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유리명왕의 것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해당 설화에서 어머니는 궁예가 신라 왕자라는 어떠한 물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설화에 가까운 야사에 불과하지만, 갑자사화 때는 피 묻은 적삼이 근거로 제시되기라고 했다.

그 다음도 이상하다. 궁예가 그런 말을 듣고 한 일은 승려가 되겠다며 집에서 나가 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물러나서 보게 되면 더 기막힌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어머니는 그렇게 기른 자식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기록에서 퇴장한다. 반면에 궁예는 일국의 군주가 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출생담을 세상에 알린 이는 누구라고 봐야 하는가? 당연히 궁예 본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어느 땡중 출신 갱스터 보스가 자기 아빠가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 그 유일한 증인으로 본인과 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람을 내세우는데
  • 그나마도 그 증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람이 본인 한 명뿐이다.

귀하디 귀한 임금의 자녀를 일관 따위가 내치자고 건의하고, 국왕이란 양반이 몇 가지 불길한 징조만으로 아직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갓난아이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은 아무리 고대 사회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가운데 아이가 중오일(重午日) 즉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으니 불길하다고 하는 것은 맹상군의 고사로서 당대에도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을텐데 말이다.

만에 하나 궁예가 진짜 신라의 왕자라고 해도 궁예전에 쓰여 있는 어린 시절 얘기는 허구로 보는 게 현명하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주인공의 미래에 대한 복선(태어날 때 나타난 불길한 징조, 비행 청소년이었던 어린 시절), 시점의 전지성(당사자들이 밝히기 꺼렸을, 일관이 헌안왕에게 한 경고나 유모가 눈을 찔러서 궁예가 애꾸가 된 사실 등을 기록자가 아는 것), 극적인 전환(왕자가 한 순간에 평민으로 전락함, 정체성을 깨닫게 된 아이가 집을 떠나 세상에 나오게 됨) 등 소설적 기법들이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 위에서 임용한 박사가 지적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내용이 엉성하며 너무 작위적이라는 것.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를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내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 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귾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칼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은 논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요약하자면
  • 궁예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고아였고 그의 혈통을 증명해줄 그의 가문이나 인물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
  •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대상마저도 제각각일 정도로 대해 혈통상 근거가 불분명함
  • 알려진 기록은 오직 고아인 궁예 자신이 말했을 믿기 힘든 설화적 뻥 뿐임
  • 그런데 궁예가 그렇게 뻥을 친다 하더라도 누가 뭐라 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이었음
  • 또한 궁예라는 인물이 과대망상적이고 광적이었기에 그런 뻥을 칠만한 사람이었음

을 근거로 궁예 신라 왕족설이 허구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3.2.4. 고려 왕조의 날조 가능성[편집]


왕건의 고려는 태봉을 무너뜨리고 성립된 왕조이기에 궁예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으니, 자칭 미륵이라고 하는 애꾸눈의 임금이 진짜 신라 왕자가 아니었다면 이를 문제삼지 않았을 리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고려 입장에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이어야만 했다.

왜나하면 고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바로 넘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옛 사로국 수준으로 전락한 신라를 인수했다고 해서, 신라가 왕건이 세운 나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왕건이 신검을 물리치고 후백제의 영토와 인민을 흡수했다고 해서 그 나라가 고려의 전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고려의 직접적인 전신은 어디까지나 궁예의 태봉 왕조였다. 그러니 고려 입장에서는 태봉이 반드시 정통성 있는 정권이어야만 했다. 물론 설화를 믿는다 해도 궁예는 당대 신라 왕실에겐 한참 방계였으며 애초에 직계 신라 왕실부터가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완전한 정통성을 세우기엔 좀 무리가 많았을 것이다. 아무리 왕족 출신이라 해도 김헌창의 난의 경우처럼 본국이 멀쩡히 있는데도 아예 따로 나라를 세우는 건 역시 역적질이 되기 때문. 게다가 당대에는 중앙에서 배제되어 몰락한 진골 출신들이 현실 권력을 따라 혈통상으론 한참 아래인 호족들의 신하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궁예는 이미 큰 세력을 갖춘 국왕이었으니 태봉 왕조의 권위를 세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사마씨의 서진이, 후한이 무너진 후 정립한 삼국 중에서 정통으로 인정한 나라는 한 황실의 후손이 세운 촉한이 아니라 자신이 타도한 전 왕조인 조위였다. 조선 역시 말기의 임금을 가짜로 깎아 내리긴 했어도 고려의 왕씨 왕조 자체를 가짜 왕조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훗날의 명나라조차 몽골족이라면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도 공식적으론 원의 천명을 명이 이었다고 주장했다(북원이 멀쩡히 있는데도!).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가 스스로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그 전신인 태봉부터가 정통성을 가진 왕조여야 했고, 그렇게 내세우기에는 그 나라의 건국자인 궁예가 신라 왕족이라는 것만한 게 없었다. 고려로서는 궁예가 '내가 경문왕, 헌안왕의 아들이요' 하고 떠들고 다녔던 게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들대로 태봉의 임금이 신라에 대해 서라벌을 멸도라고 부르고 그 나라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빠짐 없이 몰살하거나 신라 왕의 초상에 칼질을 하여 흉터를 남기는 등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고려로서는 궁예가 신라 왕자인 것이 정통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더 유리했다. 그렇다면 궁예는 신라 왕자로서 모국이었던 신라를 핍박한 불효, 불충한 인물이자 패륜을 저지른 인물이 되므로 정변의 명분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중략) 故弓裔見棄於其臣...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畵像)을 베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다. (중략) 그런 까닭으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 당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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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보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론이 딱 그런 논지다.

여담으로 태조 왕건에서 신라의 왕족 또는 왕자라는 추정이 있었던 궁예가 경문왕의 아들이자 신라의 왕자로 묘사된다.


4. 평가[편집]



4.1. 재평가와 폭군 논란[편집]




하지만 이런 역사는 이제 다시금 바꿔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주 경략의 주역이 왕건이 아닌, 궁예임을 입증하는 당시 전라도 고승 선각대사 형미(864~917)의 탑비 내용이 최근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선각대사는 당나라에서 10여년 유학한 뒤 귀국한 당대의 큰스님. 고려 건국 이전 왕건과 밀접한 관계였으나, 이를 시기한 궁예에 의해 태봉국 수도 태봉(철원)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 교수는 비문 내용을 정밀 판독한 결과 10세기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을 원정하고 비석의 주인공 선각대사를 태봉국에 데려간 이는 <삼국사기> 등 사서에 전해지는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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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경략 주역은 왕건 아닌 궁예”


그러나 새로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태봉의 국왕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무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했다. 그뿐 아니라 또 다른 법경대사(경유·慶猷)비문을 통해서 908년에도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했고, 무주 근처에 은거했던 경유를 만난 궁예의 요청으로 태봉의 수도로 갔다는 점이 파악되었다.

두 비문은 기존 사서보다 먼저 기록된 1차자료. 이 자료들은 나주와 무주에 대한 공략계획과 지휘를 궁예가 했고, 왕건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의 자료들은 왕건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기록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궁예에 관해서는 기성의 불교와는 다른 토착신앙과 결합된 불교사상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어왔다. 하지만 궁예는 형미와 경유의 예처럼 선종 승려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다.

특히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승려들을 탄압했다는 것은 형미의 비문에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왕건의 선종 승려들에 대한 우대는 궁예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이 왕건의 업적으로 제시하는 태봉의 남부공략은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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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경략은 궁예가… 왕건은 과장돼"


현대에는 마냥 폭군만은 아니었다라는 주장도 일고 있다. 즉, 후대에 궁예를 몰아낸 고려(왕건)측에 의해서 왜곡되어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궁예가 부인 강씨와 그 두 아들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 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씨의 친정이었고 게다가 궁예만 이런 것도 아니었거니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강씨와 그녀의 두 아들을 앞세워 순군부를 설치해 호족들의 군권을 뺏으려던 궁예의 왕권 강화에 저항했다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추측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을 숙청하는 일과 해괴망측한 불경을 저술한 것도 당시 교종에 익숙한 불교계에 선종을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도 보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으면 태조 왕건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 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 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 문제를 진정시키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 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조준의 상서문에 궁예는 1경의 토지에서 6석을 세금으로 수취하였으며, 이에 반해 왕건은 천하통법인 1/10세를 기준으로 1부의 토지에서 3승을 수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예와 왕건의 세금 부과기준이 경과 부로 단위기준이 상이함에 착안하였다. 궁예는 토지를 많이 경작하는 호족과 호족의 관반에게는 많은 수취를 하였으나, 1경 이하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면세를 해주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왕건은 3/10세를 1/10세로 감면해준다는 조치를 표방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토지를 많이 경작하는 호족과 호족의 관반에게는 유리한 조치였으나 토지를 적게 경작하는 농민들에게는 불리한 조치였던 것이다.

궁예의 면세조치 혜택을 받은 농민은 어느 정도였을까를 알아보기 위하여 궁예의 전제권력 강화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통하여 전제권력을 강화하면서 호족들의 농민 직접지배권을 점차로 중앙정부로 귀속시킴에 따라 면세혜택을 받은 농민들도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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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김주성,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139 - 157 (19 pages)


선각대사비에 전라도 지역을 원정한 후 선각대사를 泰封으로 모셔간 인물로 나오고 있는 大王은 지금까지 고려태조 王建으로 생각되었지만 비문의 전후 맥락을 고려할 때 태봉의 국왕이었던 弓裔로 확인된다. 후에 선각대사를 처형하는 大王과 동일 인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선각대사비에 의하면 大王 즉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羅州와 武府(광주) 등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였으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궁예의 親征사실은 형미와 함께 雲居道膺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慶猷의 행적을 기록한 法鏡大師碑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수행하고 있던 경유 역시 이 지역에 원정 온 궁예를 따라 태봉의 수도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이들 자료로 볼 때 현재 『삼국사기』와 『고려사』등에서 왕건의 업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태봉의 전라도 남부지역 경략은 실제로는 궁예의 직접 지휘 하에 행해졌던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 태조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던 것이다.

선각대사비와 법경대사비에 보이는 궁예의 선종 승려에 대한 우대 조치는 궁예의 불교정책에 대해서도 재검토하게 한다. 지금까지 궁예의 불교정책은 주로 미륵신앙이나 토착신앙 등의 신비적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왔지만 두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궁예는 선종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종교 정책의 특징이라고 생각된 선종 승려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 정책도 실제로는 전임자인 궁예의 정책을 계승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선각대사비는 나말여초 시기의 불교사는 물론 정치적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미 많은 연구들에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해석상의 작은 착각으로 인해서 자료가 담고 있는 정보가 온전히 파악되지 못하였다. 이 자료는 후대의 사서에 말살되어 버린 궁예의 행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으며, 보다 면밀히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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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津 無爲寺 先覺大師碑를 통해 본 弓裔 행적의 재검토, 최연식,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제7호, 2011.06, 203 - 222 (20 pages)


후삼국 시대의 궁예는 왕건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역사 속에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 궁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궁예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긴 자의 편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반면에,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통치를 했던 철원지역에 구전되는 설화는 궁예에 대한 상반된 가치 평가를 수반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지만, 대체로 궁예를 긍정적인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궁예에 관한 진실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궁예 관련 역사 기록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궁예에 관한 구전 설화 역시 설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그 문맥의 의미를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궁예와 왕건에게서 유사한 탄생의 이야기를 볼 수 있지만, 궁예의 신비로운 탄생은 상서롭지 못한 징후로 판단되어 궁예의 불행한 삶의 근거로 작용하고, 왕건의 경우 전형적인 영웅의 탄생으로 판단된다. 유사한 탄생 비화에 대한 이런 상이한 해석은 역사가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예이며, 궁예에 대한 역사의 악의적인 횡포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기록은 특히 왕건이 세력을 확장하여 궁예를 전복시킬 즈음부터 궁예의 비인간적인 포학무도한 면을 부각하는 서술에 치중하고 있다. 궁예의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한 기술은 왕건이 고려태조로 등극한 사실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작용한다. 즉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과 잔학함은 왕건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장치인 것이다. 반면에 왕건에 대한 역사의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평가는 과장되었다고 볼 만큼 매우 호의적이다. 이 과정에서 왕건이 집권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성을 위해 설화적 서술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원지역 궁예 관련 구전 설화의 전승자들은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이라든가 백성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혹평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혹평에 대한 이러한 부정은 철원지역에서 궁예는 나라를 세웠다가 몰락하고 패배한 인물이었지만 백성들의 편을 들어줄 민중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던 측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예의 죽음을 비장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으로 승화시키고, 또한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신라시대 신분의 장벽이었던 골품제도를 없애고 백성들을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는 논평에 가까운 전승자들의 진술은 궁예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실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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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최웅,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 301 - 330 (30 pages)


무엇보다 궁예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과 그 후손들이 기록한 고려측의 기록들 밖에 없다. 즉, 본인들의 역성혁명과 왕조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며 실제로 학계에서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 같은 1차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궁예에 대한 고려측의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등 고려측이 남긴 궁예에 대한 여러 기록들에 대해서 반론들이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즉,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실제로 학계내에서도 꽤나 존재한다는 것이다.[10]

다만 위와 같은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통설에 반박하는 학설들일뿐 기존 통설을 완전히 폐기하고 대체하는 상황은 아니다. 물론 먼 훗날에 관련 연구 자료들이 더 쌓인다면 궁예에 대한 기존 통설도 바뀔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통설이 완전히 폐기되고 대체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은 유념 할 필요가 있다. 궁예가 나주를 직접 공략했다는 선각대사비의 내용도 공략의 주체인 '대왕'의 해석을 왕건이 아닌 궁예로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당시에 왕이 궁예였기 때문에 '대왕'은 궁예를 가리킨다는 정도의 해석에 불과하고 비문에서 이미 궁예를 '전주'로 표현하고 있어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대왕'을 왕건으로 해석하면 형미가 왕건의 권유로 그를 따라갔다가 궁예에게 미움을 사서 처형됐다고 볼 수 있고 후대의 고려왕들에게도 '대왕'이라는 표현은 궁예가 아닌 왕건에게 하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궁예의 나주 공략설은 전체적으로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궁예가 직접 나주에 간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주는 통일이 될 때까지 고려와 후백제간의 공방전이 수차례 있었던 지역이고 이미 903년과 909년에 걸쳐 왕건이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에 912년에 궁예가 직접 한번 친정했다고 해서 왕건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궁예의 불경 제작에서 인정되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궁예가 불경을 스스로 썼다는 것 뿐이다. 그 내용이 정말 백성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에게 일갈하는 간지폭풍의 내용일지, 아니면 궁예 자신을 최고존엄의 미륵불로 신격화하기 위한 헛소리로 가득찬 불쏘시개에 불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절대적인 왕권 강화로 나가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20세기의 군사, 공산 독재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동시에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강화했듯이.

하지만 애초에 귀족 중심 불교를 타파한다면서 정작 기존 미륵 신앙의 본산인 법상종과 피를 뿌리면서까지 척을 진 시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궁예의 명백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법상종은 기본적으로 교종 종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대중 중심이라던 정토종조차 분류상으로는 교종에 들어간다. 왕으로서의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상대 종파에 대해 피를 볼 정도의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는 것은 결국 궁예의 교리가 대중적으로 그다지 큰 반향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일 뿐이다.

민간의 궁예 전승들과 신앙을 예로 들어 반박할 수 있지만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궁예의 민간 신앙의 경우 그것이 단군이나 고려강감찬, 공민왕, 최영, 조선단종, 남이, 김덕령 같이 전국적으로 널리, 그리고 많이,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 아닌, 겨우 경기도 안성시 그것도 몇몇 산골 마을들에 한정돼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라 이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또 그 과정에서 조카인 단종을 포함해 김종서, 황보인, 정분, 허후 등의 계유정난의 희생자들과 이후 사육신과 그 일행들과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일행 등에게 고문과 학살들을 자행해 백성들에게 매우 큰 미움을 받은 세조가 일부 지방에서는 신으로 숭배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어 이걸 가지고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한참 떨어진다. 이에 비해 단종단군, 공민왕과 더불어 한반도 역대 왕조시대의 군주들중 민간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많이 신으로 숭배되는 임금이라는걸 감안하면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누굴 지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철원 지역의 민간전승의 경우도 궁예에게 좋은 민간 전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당시의 곤암산 전설이나 또 궁예가 궁예의 왕후로 둔갑한 구미호에 홀려 재위 기간에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와, 한 대신이 이 '구미호'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를 잡으려 다리가 3개밖에 없는 전설상의 신비한 개인 삼족구를 구해 구미호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심지어 이 사건 이후 궁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무당이 18세된 여성의 유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인육을 먹었다는, 철저하게 고려의 입장에서 쓰여진 삼국사기 궁예전보다 더한 만행도 구전되어오고 있고, 또 고려말에 우왕창왕공민왕의 아들/손자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손자라는 이야기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조작되고 일어난 '김저의 옥사', '윤이, 이초의 옥사'와 더불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신랄히 비판한 사안이고 또 오늘날의 한국 역사학자들도 조작이라고 보는 공민왕 말기 자제위 사건이 연상되는 궁예가 자신의 아내왕건을 강제로 사통시켰다는 이야기와 또 이후 왕건에게 축출되어 쫓기게 되었을 당시 한탄강의 곰보돌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철원 지역의 민간 전승들이 궁예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진술들을 하고 있어 신뢰도가 떨어져 민간의 궁예 신앙과 궁예에 대한 민간 전승들을 가지고 무조건 궁예가 폭군이 아니고 비운의 창업 개혁 군주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궁예가 내세운 교리가 그 정도로 백성을 위한 혁명이었다면 적어도 궁예에게 우호적이던 철원군 지역에서는 궁예의 교리가 최소한 구전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이 있을텐데 오늘날 궁예의 경전이나 설법은 단 한 가지도 전해지는 것이 없이 앞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오히려 철원에서 멀리 떨어진 안성시에서 궁예 미륵 신앙이 드문드문 발견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살해한 목적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궁예는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심법을 이용한 자의적인 법 집행[11]과 공포 정치로 패서 호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그 숙청의 와중에 자신의 친위세력을 육성하는 방법은 고작 청주를 비롯하여 중앙에서 먼 옛 백제계 세력들에 대한 우대 정도였으며 명주의 순식은 여전히 독립 제후 수준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후계자들까지 씨를 말려버렸다. 후사야 다시 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비가 죽은 915년 궁예의 나이는 이미 46세다.(869년설을 따를 경우. 857년설의 경우 58세) 갓난아기를 후계자로 육성시킬 궁예의 수명 자체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정비 소생의 아들 둘을 스스로 죽여버린 것이다. 적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점에서 태자를 핍박하긴 했지만 끝내 죽이진 않은 광종과 비교된다.

이쯤되면 궁예의 목적이 순수하게 왕권 강화에 있었긴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정비야 그렇다 쳐도 후계자인 적자들까지 죽여야 할 정도의 위협에 시달리는 궁예 정권이 과연 백성의 지지를 제대로 얻기는 했을지도 의문이다. 정당한 어린 후사를 살해한 군주치고 민심이 고운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는 왕건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로 왕위를 가져갈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줬다. 궁예가 아무리 폭정을 했어도 명주나 청주에 지지세력이 남아있던 만큼 원래대로라면 반란세력도 왕자를 옹립하는 작업을 해야 했겠지만, 후계자 둘이 모두 궁예에게 직접 죽으면서 자연스레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왕건이 손쉽게 왕위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폭군 논쟁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이 있는데 바로 '업적이 있으니' 혹은 '국가를 이룰 정도의 능력을 보이고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었으니',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또 '왕조를 창업한 군주'이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업적 있음 = 무조건 폭군 아님이 아니다. 아무리 업적이 있어도 통치의 방식이 폭압적이라면 충분히 폭군의 범주에 들어간다. 한나라 고조, 신라 신문왕, 고려 광종, 명나라 태조, 조선 태종처럼 강력한 숙청을 동반한 급진적 왕권 강화책을 쓰는 군주 모두가 폭군은 아니지만 이들이 폭군으로 불리지 않거나 재평가를 받는 것은 적어도 백성에 해당되는 피지배층에게는 크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그러한 숙청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 한고조 유방의 경우와는 달리 지나친 숙청 정책으로 오늘날은 물론이고 그가 태조로 있었던 명 왕조 기간 동안에도 폭군이라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고려 광종의 경우도 재위 기간 동안에 벌어진 대숙청으로 인해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여기던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그가 고려의 국왕 중 1명으로 대접받던 고려시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문종 때에 '해동공자'로 불린 최충, 고려 전기 대학자였던 최승로, 고려 후기 목은 이색의 스승이였던 익제 이제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반면 방금 위에서 언급된 군주들과 달리 딱히 대숙청이나 학살 등을 하지 않고 그저 백성들을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가혹하게 부려 먹기만한 수양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다.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논리는 혁명 직후에도 몇 달 동안 세쿠리타트가 저항한 루마니아차우셰스쿠, 사망 이후 소련 공산 정권 하에서 직접적인 격하 운동까지 벌어졌는데도 추종자들이 많았던 스탈린, 전 인류 공공의 적으로 공인받고도 추종자들이 날뛰는 히틀러, 문화대혁명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고도 지금까지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되고 신격화되는 모택동 같은 사례들에 비춰보면 설득력을 잃는다.

그런데 궁예는 매우 직접적으로 백성의 삶에 너무나도 큰 피해를 끼쳤다. 바로 그가 추진한 철원 천도 때문이다. 애초에 일부에서 제기하는 대로 민본사상과 애민정신을 가진 군주였다면 구태여 철원 같은 말도 안 되는 입지에 백성들을 몰아 넣으면서까지 천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도 건설을 강행하면 물론 호족들이 물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면서 왕권이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징수당하고, 또 호족들과 달리 직접 수도 건설 공사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다. 게다가 철원 천도는 그냥 천도도 아니고, 이제 막 건설한 송악을 간단히 버리고 허허 벌판에 신도시를 지어 강행한, 역사상 보기 드문 사례였다.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지 수양제의 낙양 건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막장 정책이다. 당연히 호족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민간에 대한 수탈과 과중한 부역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천 년 뒤인 조선시대 말기, 흥선대원군경복궁 재건의 경우 처음에야 지배층의 헌금이 주였지만 결국에는 당백전과 도성 통행세 등 갖은 무리수로 이어졌다. 도시도 아니고 그저 궁궐이었음에도. 궁예의 종교 탄압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는 폭압정치의 사례다.

궁예가 도주할 때 우호적인 설화가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철원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 한탄강 수운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운 철원에서는 값이 급등했는데, 그렇다면 철원에 쌀을 공급했던 철원 근교의 지주나 농민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은 궁예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또한 정변의 수장 왕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지역의 옛 고구려 지역의 패서계 호족의 맹주였으며 옛 수도 송악을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니 그가 집권하면 철원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뻔한 이치다.

철원은 전근대 관점에서는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광복 직후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이 통과하는 문제로 생긴 일. 일제강점기 초 경원선 철도가 부설되며 철원은 서울~원산의 중간점이자 인근 이천, 평강, 김화 등 강원도 서북권의 교통 거점은 물론 금강산선을 통해 금강산 관광의 거점 역할까지 하는 교통의 요지로 성장했으며, 1940년대만 하여도 38선 이북 강원도에서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곳은 철원 한 곳 뿐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로동당 강원도당도 철원에 있었다.

그런 철원이 궁예 당시에 수도 노릇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궁예라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고, 불완전한 입지는 궁예의 몰락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궁예는 최소한 자신의 절대 권력 수립을 위해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공포 정치를 펴다가 실패한 임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나 그 행동들을 보면 개별적으로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틀에서 봤을때는 모순이 발견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즉 궁예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아예 정신을 놔버렸다는 설이 괜히 나오는 이유다. 납득할 수 없는 궁예의 이상성격에 드라마는 흥미를 더해가지만, 불행히도 이런 궁예의 이상성격은 편집성 성격장애[12]의 한 단면이다.

공포 정치를 자행한 시점에서 폭군의 요소는 충분하며,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친 철원 천도에 이르면 빼도 박도 못하고 폭군이다. 다만 수양제, 해릉양왕, 연산군 급의 톱클래스 폭군이 아니고 다소간 개인적 능력을 재평가할 여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능력으로 폭군 여부를 따지자면 수양제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시절에는 남진 평정에 참여했고 끝끝내 대운하를 완성시키는 등 능력은 꽤 준수했던 사람이니 폭군에서 빠져야 한다. 한 가지 정상참작을 하자면 궁예의 경우는 당시 신라 말기는 급격히 몰락해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궁예 역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점과 무리한 왕권 전제화에 대해서도 내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부분은 참작이 된다.

또 하나 궁예에 대한 변호 논리 중 하나는, 왕조를 개창한 창업 군주는 난세속에서 갖은 고초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에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고, 또 마음이 매우 굳세지는 이유로 폭군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가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수양제의 경우를 들면, 그는 아버지 수문제처럼 창업 황제가 아닌 수나라의 수성 황제였지만 제위 등극 후 폭정을 저질러 나라와 수 왕조와 자신을 망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제의 경우, 그가 황제로 즉위했을때, 이미 수나라는 통일이 다 된 상태였고, 수양제는 뒤를 이어 수성을 해야할 판국에 되려 폭정과 전쟁을 벌인 통에 처참히 멸망했으나 궁예의 경우는 아직 통일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내전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궁예와 비교되는 인물은 중국의 경우, 진나라 말기의 항우와 남북조 시대의 북조 전진의 황제 부견과 남조 양무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지도자들도 다들 초기에 나름 잘나갔다가 시간이 갈수록 실정을 저질러 끝내 망했던 인물들이라고 보면 된다. 직언을 듣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꽤나 비슷했다. 또한 '항우'의 경우는 궁예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탁월했으나, 대신에 궁예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부견의 경우는 궁예가 나주 전투에서 승리해 통일에 근접했던 것과 달리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비수대전에서의 엄청난 실책을 보여 대패해 몰락한 것을 보면 이는 견훤이 고창 전투에서 대패해서 몰락한 것과 비슷해서 부견의 경우는 궁예보단 견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양무제'의 경우가 궁예랑 비슷한 케이스에 근접하는데 둘 다 불교를 혹신했고, 실정을 했을때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만, 양무제는 항우나 수양제, 궁예 같은 폭정을 저지른 폭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인자한 성군이었지만 지나친 불교에 대한 혹신과 이로 인한 불교계의 극심한 부패, 그리고 지나치게 어질기만 한 정치로 망한 케이스로 소위 '인자한 창업 암군' 스타일이지, 항우 ,수양제, 궁예 같은 '창업형 폭군' 스타일은 아니였다.

또 비록 당 왕조의 창업 군주는 아니지만, 원래 황제가 될 처지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어 사실상 창업 황제의 성격이 강한, 우리에게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너무나 유명한 당현종의 경우, 정변을 일으켜 당중종의 황후인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를 제거한 후 제위에 올라 이후 군사를 일으켜 태평공주를 제거해 측천무후 사후,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던 여성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후 재위 전반과 중반까지는 개원의 치로 불리는 눈부신 선정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중 하나를 구가했지만 재위 후반에 초심을 잃고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 같은 총비와 간신들에게 놀아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국 안록산의 대규모 반란으로 민심을 잃어 아들인 당숙종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심지어 그 이후 아들인 숙종에게 시해당했다는 의혹까지 강하게 받고 있다.

즉, 궁예 같이 초심을 잃어 망한 창업군주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창업 군주는 위에서 이야기된 이유들 때문에 무조건 어질고 유능하고, 절대 무능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근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라, 독립영웅으로 칭송받던 사람이 독립국가의 최초 지도자가 된 이후 독재로 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괜히 미국의 조지워싱턴이 존경받는것이 아니다. 한국도 4.19 혁명이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승만이 상당기간 독재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그냥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패배자인 궁예가 폄훼됐을 것이라거나, 아니면 가족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폭군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냥 기록을 1차원적으로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흑백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궁예에 대한 평가에는 나말여초의 정치적 혼란상과 주류층 호족들의 이합집산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 왕조 초창기만 해도, 혜종은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죽었고 정종도 석연치않게 요절했을 뿐만 아니라, 광종 또한 호족들을 숙청하고 편집증에 걸려 친족까지 엄청나게 죽이다가 자기 아들까지 죽일 뻔했지만 정작 오늘날 광종이 폭군이라는 평가는 하지 않지 않는가? 이는 한국사의 호족이 북두의권에나 나올법할 세기말 군벌이었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호족들의 무법성이 최고조에 달한 후삼국 시대라면 당연히 고려를 해야하는 사항일 것이다.

후삼국 호족들의 무법성과 횡포는 후대의 고려 왕들도 신경병증에 시달리게 할 정도로 심각했다. 광종은 이에 맞서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으로 1차 대처를 했지만 적어도 광종은 정치적 명분을 확실히 가지고 한 것이다. 그러고도 반역을 걱정해 계승순위가 높은 왕족들을 죽여야했다. 이마저도 광종의 자질이 비범하여 가능했던 것이지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잡을 정도의 일신의 무력 그리고 후삼국 통일의 공로로 1등을 달리던 혜종조차도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요절하게 만들 수있는 것이 호족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궁예는 그 호족들을 처음부터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신정일치와 감시통제라는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다가 민생을 파탄내어 실패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4.2. 조선시대의 평가[편집]


실제로 고려사는 초기에 이제현의 사략과 최승로의 논평을 따르는데 궁예의 폭군설은 사실 조선 왕조 사관의 기록보단 이제현의 논평이 결정타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궁예를 섬겼는데 그처럼 시기가 많고 포악한 임금이 삼한(三韓) 땅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 것은 사실 태조의 공이었다.

고려사이제현 논평

이제현은 아예 3분의 2를 차지한 것을 고려 태조에게 몰빵할 정도로 매우 혹독한 평을 썼다. 그냥 왕에 오를 때 아무 것도 안하고 폭군 놀이만 했다는 것이다. 정작 조선 왕조 사관들이 직접 고려사를 새로 쓴 《동국통감》은 이런 말이 나온다.

궁예는 신라의 유얼(遺孼)로서 종국(宗國)에서 버림을 당하고 치류(緇流, 승려)에 자신을 의탁하였다가, 뭇 도적 가운데서 우뚝 일어나 흑양(黑壤, 철원)을 몰래 점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일컬으면서, 이윽고 삼한(三韓)의 3분의 2를 차지하였습니다.

동국통감》 후고구려 궁예 평

이쪽은 《삼국사기》 초기 궁예의 이야기를 대거 차용했는데, 도적치고는 우뚝 일어났다는 것이다. 단순한 초적이나 반란군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조선 왕조 사관들은 왕건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그것이 궁예와 다를 것이 없다는 논평까지 내놓았다.

태봉(泰封)은 스스로 미륵(彌勒)이라 일컬었으나 자신도 보존하지 못하였음을 고려 태조가 눈으로 직접 본 바이니, 귀감(龜鑑)을 삼았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화복(禍福)의 말을 두려워해서 부처 믿기를 이미 돈독히 하였고 부처 받들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다가 못하여 또 그 말을 듣고 글에 써서 자손에게까지 가르쳐 알린단 말입니까?

동국통감》 고려 태조 훈요 10조 평

이미 왕건-궁예 대등론을 다름 아닌 조선 왕조가 제기했고, 이미 궁예의 재평가가 조선 왕조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왕건이 조선 왕조 직전 왕조의 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실제로 만부교 사건, 개태사 건립 문제 등등 중간 중간 비판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궁예와 왕건의 엇갈린 평에 의문을 제기했고 왕건도 본시 태봉의 신하라는 말까지 썼다. 결과적으로 궁예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난 많은 이야기들은 불자들보단 유학자들에게 주로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견훤에 대한 평이 더 안좋아진다. 《삼국유사》에서는 견훤이 이전보다 재평가되나 《동국통감》에선 견훤에 대해 훨씬 더 악평이 쏟아진다.

천도(天道)는 되돌려주기를 좋아합니다.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은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였고, 안경서(安慶緖)·사조의(史朝義)는 아들로서 아비를 배반하였으니, 그 인과에 따른 대갚음이 또한 명명백백하지 않습니까? 견훤은 시골에서 일어나 참람된 칭호를 몰래 차지하여 자기 나라 보기를 원수와 같이 흘겨보고 씹어대며 으르렁거리기를 멈추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포석정(鮑石亭)에 들어가 흉악한 반역을 크게 자행하여 자녀(子女)와 보배로운 물건들을 죄다 빼앗아 갔으니,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견훤이 이미 뜻을 이루게 되어서는 교만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하여 이웃 나라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몹시 괴롭혔으며, 수 십 년 동안이나 전쟁을 일삼고 재앙을 일으켜 죄악을 천지에 가득 쌓았으니, 하늘이 노하고 사람들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자 사이에 사랑하고 미워함이 고르지 못하여 소장(蕭墻)의 환란을 빚어내게 되었으며, 마침내 몸을 숨기고 떠돌아다니다가 울분 끝에 죽게 되었으니, 생각컨대 이러한 아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식이 있게 됨은 가법(家法)에서 유래된 바 오랜 것입니다.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방탕한 사람에게 화를 주어 되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천도를 어찌 피하겠습니까?

동국통감》 고려 태조 견훤 논평

동국통감》에선 뭇도적에 3분의 2를 고려 태조인 왕건이 아닌 궁예가 했다는 논평과 달리 여긴 아예 견훤을 반역자로 몰았고 좋은 평이 단 한 개도 없다. 아예 팔공산 전투의 승리를 묻어버리면서 했던 논평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이야기보다 평이 더 안 좋다.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일컬었다는 궁예의 평과는 달리 견훤은 시골에서 일어나 참람된 칭호를 몰래 차지했다고 했다.

즉,《동국통감》 사관들이 보여준 조선 왕조 사관의 평은 왕건 ≥ 궁예 > 견훤이다.


4.3. 현대의 평가[편집]


궁예가 꽤 능력있는 지도자이자 임금이었던 것만큼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나라를 건국했다는 업적은 한국사에서도 몇 안되는 인물만이 이룩한 업적이며 후삼국시대 이후로 새 왕조가 탄생하는 과정은 모두 혁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13]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를 돌이켜봐도 위대한 장군이나 군사 지도자로서 위업을 달성한 인물들은 많으나 그 인물들 중에서 나라를 직접 세운 업적을 달성한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궁예의 군사적 능력이나 리더쉽 자체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신정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삼국의 후예라면서 세를 모으던 다른 국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일개 떠돌이 승려라는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출발해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것과 비뇌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여러 세력들을 규합했는데, 대호족이었던 왕륭은 아예 자기 지역을 수도로 삼아달라고 했으며 왕순식 또한 궁예에게 바로 항복하고 평생동안 충성을 바치다가 궁예 사후에도 왕건에게 대놓고 반역자라면서 반항하는 등 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자체는 꽤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개 정변 이후에는, 으레 구 지배 체제를 격하하고 업적 같은 것들을 깎아내리는 행위들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전주(大王前主)"라고 일컬어졌다. 즉 당시 국왕(대왕)인 왕건 즉위 이의 군라는 의미. 이 호칭은 선각사 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 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초기까지도 궁예의 영향력이 꽤나 남아있었다는 추측의 반증이 된다.[14]

그러나 말년의 치세가 파멸을 불렀다는 점 또한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왕전주로 호칭되기는 했으나 반란으로 폐위된 군주들도 받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호조차 받지 못하고 무덤마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에서 그의 취급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다. 계속된 연구로 궁예의 악행이 후대에 의하여 조작되었을수 있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궁예의 악행은 명백히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며 역사서에만 기록되어 다른 증거를 찾기 힘들어 과장 되었을지 모르는 악행을 다 제외하더라도[15] 건국 명분으로 삼았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철원으로 수도를 무리하게 옮긴데다가 나중에는 미륵 신앙을 내세워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없는 신정국가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그 명분을 스스로 부정한 것은 단순히 후대의 조작으로 날조 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철원 천도는 유적이 남아 있는 명백한 사실이며 후삼국시대 당시 백제를 국호로 걸었던 후백제와 멀쩡히 살아있는 신라가 있는 와중에 고구려의 후예라면서 걸었던 고려라는 국호를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갑자기 자기가 미륵이라는 헛소리를 해대면서 수도까지 옮긴 것은 정상이 아니다.

젋은 시절엔 성군이었다가 말년엔 폭군으로 타락한 지도자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에도 수두룩한 것을 생각하면 젋은 시절 성군이었던 궁예가 말년에 폭군으로 기록된 이유가 후대의 날조 때문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며, 궁예가 잘못된 통치를 가한 폭군이었다는 정황증거가 훨씬 넘쳐나기 때문에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왕건은 궁예의 태봉을 계승하지 않았다. 왕건은 궁예의 미륵 신앙도 버리고, 철원성을 버리고 송악으로 돌아가는 등 궁예 시절에 세운 것을 대부분 무시했으며 고려라는 명칭은 궁예가 나라를 세울때 처음 쓴 국호이지만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호가 장수왕 시대부터 고려로 바뀌면서 그걸 그냥 가져다 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궁예와는 별 상관이 없다. 왕건이 태봉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면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역성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던 고구려 호족들의 불만과 아직 남아있는 친 궁예 세력의 불만을 동시에 잠재울수 있는 국호가 고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사학자들 대부분은 궁예가 독자적으로 지은 불교 경전은 궁예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이비 경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궁예가 치성광여래 신앙,[16] 법상종의 미륵 신앙, 도교 사상[17]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형미와 같은 선사를 한때나마 중용했던 것을 보면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은 가졌을 여지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들의 인식 속 궁예는 드라마 <태조 왕건>의 궁예(김영철 분)의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궁예(태조 왕건) 문서 참조.

철원군에서는 군부(郡父) 대접을 받고 있다. 지금의 철원군 지역이 태봉의 수도가 되면서 이후 태봉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5. 기타[편집]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486053_image2_1.jpg
현존하는 경기도 안성의 궁예 미륵. #
  • 재미있게도 궁예의 시대에는 자칭 미륵이었던 것이 어느 새인가 안성시에서 진짜 미륵으로 둔갑하여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안성의 마을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 광산 이씨순천 김씨가 각각 궁예의 첫째인 신광과 둘째인 청광의 후손이라고 족보에 기록하기도 했는데 두 왕자는 궁예에게 직접 죽었고 따로 후손을 남겼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현재 두 가문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순천 김씨의 시조 김총의 경우 후백제에서 관직을 역임한 등 태봉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순천 김씨의 김종서와 광산 이씨의 이선제는 궁예를 비하한 <고려사> 편찬에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이란 것. 두 가문이 궁예와 연결된건 그가 어찌 되었든 신라의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가문을 신라 왕실과 연관짓기 위한 술작이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궁예라는 인물 자체가 악평으로 유명한 상황에서 과연 그렇게까지 했을거라 보기에는 많이 의심스럽다. 경주 김씨의 경우는 대체로 <삼국사기> 김부식의 논평을 따라 신라 왕족과 경주 김씨의 한 사람으로 논하지만 결말은 폭군으로 본다. 본시 초기는 좋았으나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말기에 이상해져 망했다고 한다.

  • 철원 지방에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처음 옮겼을 때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을 보고 왕조의 몰락을 직감했다는 설화가 있다. 백성들이 물러나라고 난리치자 "한탄강가의 돌에 좀이 슬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런데 다음날 한탄강 주변에 가 봤더니 진짜로 돌에 좀이 슬어 있었고 이것을 궁예에게 보여주며 물러나라고 하자 궁예가 "내 운수가 다했구나"라며 탄식하며 성을 버리고 나갔다는 이야기.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자연 지리적 특징과 태봉의 역사가 결합된 설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지역에서는 종종 "곰보돌"로 부르는 모양이다. 청주 지역과도 연관있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승장 영휴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따르면 궁예가 청주 상당산성을 축성하니 군중이 많아졌다고 언급된다. 실제 역사에서 궁예가 청주인들을 친위세력화한 행적과 연관있을지도 모른다.

  • 어떤 사건에 대한 근거없는 추측 행위를 두고 궁예질이라는 표현이 인터넷상에서 쓰이고 있다. 궁예질을 줄여서 '궁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 최남선이 지은 <풍악기유>라는 책에 오늘날의 북한 강원도 세포군인 삼방협에 그의 왕릉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전궁예왕릉은 한국전쟁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진 자가 없다.

  • 농담 삼아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중2병 지도자라는 말도 듣는다. 애꾸눈이라거나 버려진 신라의 왕족이자 관심법이라는 이능력을 쓸 수 있다는 설정, 기존의 사회 체제에 반기를 들었고 말년에는 타락한 행적 등 오늘날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중2병의 특징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 한국사의 숱한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웃사이더적 면모가 강했던 군주인데 출생의 비밀, 애꾸눈, 미륵을 자칭한 종교적인 이미지, 초기의 예수석가모니 등 성인군자 같은 모습과 대비되는 말기의 타락과 군사적 학살 등 여러 면이 겹쳐 수수께끼 같은 면모도 제법 강한 군주이다.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신정국가를 건국 명분까지 부정하면서 이룩하려고 했던 것은 다른 군주들에게서 찾을수 없는 궁예만이 가진 특징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말 어떤 유형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사에서 양면적이면서도 이중적이고 양날의 검 같은 삶을 살다간 복잡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 강원도 철원군에서 2022년 11월 민통선 내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 사당에 권오창 화백이 그린 궁예 영정을 봉안했다. 궁예 표준영정 제작은 2017년부터 지역사업으로 추진되었고, 현재 문체부 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

6. 대중매체에서[편집]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중매체에서는 황제가 되고 나서도 머리를 빡빡 민 모습으로 표현하는게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태조 왕건에서의 모습이 강하게 각인된 영향이고 그 이전에 묘사한 궁예의 모습은 승려 시절에만 삭발한 모습이고 거병 이후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에 일반적인 무장, 왕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작품도 있는 등 궁예의 모습 묘사가 천차만별이었다. <맹꽁이 서당>이나 <Why 시리즈>[18] 등 일부 학습만화에서처럼 마르고 비열해보이는 인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처럼 근엄차고 진지한 모습으로 나올 때도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이 아니더라도 궁예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즈음에는 상단의 대사가 재조명된 영향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배우 김영철이 연기한 버전이 특히 부각되고 있는 중이며 학습만화들에서도 김영철 버전의 궁예와 비슷한 외모와 복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어린이들이 괜히 멀쩡한 스님 사진에 애꾸 안대를 그려대며 궁예라고 불렀으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길수 후보의 선거홍보사진에 낙서를 자행하는 일이 잦았다. 인터넷상에서는 궁예에 대한 인지도가 높으며 이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묘사한 궁예 때문인데 대머리애꾸눈의 조합에 드라마에서 묘사된 궁예의 똘끼와 광기, 배우 김영철의 신들린듯한 연기가 시너지를 내면서 역대급 캐릭터가 탄생했기 때문.


6.1. 드라마 태조 왕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궁예(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영화[편집]


  • 궁예가 등장하는 최초의 영상물은 1959년 개봉한 영화 <왕자 미륵>으로 신라 말기에 궁예가 어지러운 난세를 평정하고 태봉을 건국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당대의 스타였던 방수일도금봉이 주연을 맡았다. 다만 작중에서는 '궁예'라는 이름 대신에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파일:external/file.koreafilm.or.kr/DSKT086295_01.jpg

  • 1970년 개봉한 영화 <태조 왕건>에서도 등장하는데 작중에서는 간신배 및 간신배와 간통을 하던 왕비의 꾀임에 놀아나다가 시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인 왕건은 궁예를 죽인 간신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여담으로 현대 매체에서 묘사된 궁예들중에서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있다(…) 궁예가 실제로 머리를 길렀는지는 불명이지만 이미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묘하다머리 있는것도 나름 어울리긴하다.


6.3. 게임[편집]


파일:D0qXai9.png

  • <천년의 신화>에서는 일반적인 커스텀 플레이시 고려군 영웅으로 나온다. 고려 미션에서는 역사대로 왕건의 반란 뒤 죽는다. 미륵염화술이라는 사이오닉 스톰 비슷한 불기술을 날린다.

  •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에서는 미션 모드에서 왕건이 독립하면서 3파전 구도로 흘러가다 왕건견훤을 제압하고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때 왕건을 제외한 견훤, 궁예의 이야기는 각자가 최후의 전투를 이겼을 때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는 if 전개로 이어진다. 즉, 궁예가 이길 경우 왕건과 견훤을 제압하고 중원 정벌에 나선다는 것이 엔딩이다.



후고구려의 초대 왕.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변란을 피해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후의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투신하여 세력을 키워 자립하였으나, 양길을 물리치고 후고구려를 건국했으나 폭정에 지친 신하들의 내란으로 죽임을 당한다. - 열전 설명


파일:The Legend of Cao Cao Gung Ye.png

  •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신성대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일러스트는 <태조 왕건>의 김영철을 다분히 의식한 듯. 병과는 무인계. 유저들은 궁예가 나온다면 마왕계 병종이어야 하지 않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능력치는 무력 88, 지력 45, 통솔 86, 민첩 84, 행운 85.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한국사 고대무장이 출시되면 능력치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결국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방해계 책략 강화/상태이상 공격으로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렇게 나와봤자 위연이나 우영 같은 성능이 더 좋은 무인계 장수에 밀려서 섬멸전이나 경쟁전 등 여러 콘텐츠에서 고인 확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건 극초창기에 이득규 개발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고 만약 정식 등장했다면 항우 때 그랬던 것처럼 좋은 전용 특성으로 바뀌어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항우는 정식출시 이전 원래 데이터에서는 기마공격 강화 무시, 일기당천이었다.


6.4. 소설[편집]


  • 단재 신채호는 궁예가 주인공인 <일목대왕의 철퇴>라는 소설을 썼지만 미완성으로 끝났다. 자주적인 일목대왕(외눈(一目)대왕)과 부패한 권신들간의 대립을 다루었다고 한다.
  • 춘원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기존의 인식과 달리 용감하고 정의로우며 카리스마있는 영웅이지만 자신과 시대의 한계를 못 이겨 몰락해가는 비운의 인물. 이 소설은 제목과 달리 마의태자는 소설의 후반부에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얽혀 잠깐 나오고 실제 주인공은 궁예이다
  • 김성한의 소설 <왕건>에서는 원래 이름은 '돌이'였으나 동네 사람들이 애꾸인 돌이를 꾸애라고 놀리다 결국 이름이 궁예가 되었다고 묘사된다. 궁예라는 이름이 멸칭이다보니 소설에서는 궁예를 선종이라고 칭한다. 왕비 강씨를 그냥 죽이지 않고 달군 쇠로 강비의 을 찔러 입으로 나오게 한다. 하지만 이게 원래 궁예의 모습은 아니고 궁예가 사냥을 하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후 인간이 달라졌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태조 왕건>에서 이 내용을 차용해 궁예가 머리를 다친 까닭을 암살 시도로 바꿨다. 머리를 다친 뒤에도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사리에 맞게 판단하는데 머리를 다치기 전의 궁예는 난세를 평정할 자질이 있는 비범한 영웅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다. 작중에서 왕건의 생각을 빌려 궁예가 사람과 전쟁 모두를 다룰 줄 아는 군주였고, 그가 죽은 후 사람을 다루는 재능은 자신(왕건)이, 전쟁을 다루는 재능은 견훤이 각각 가져갔다고 하여 사실상 궁예를 후삼국기 최고의 인걸로 묘사했다. 간신 은부를 총애하는 등 가끔 엇나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를 다치기 전에는 뛰어난 군주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미륵도 원래 선종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머리를 다친 후 정신줄을 놓으면서 자칭 미륵을 하게 된 것. 강비는 왕건의 어린 시절 첫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던 사이지만 정략결혼(선종이 강비를 요구했다)으로 궁예에게 간 것으로 나오는데 <태조 왕건>에서도 보이는 장면. 드라마상에서는 민간 전승에서 빌려온 설정이라고 나온다. 강비가 죽기 전에는 비록 사랑하는 이를 뺏은 사람일지언정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난세를 헤칠 영웅이었기에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다. 그런데 의형대가 아녀자를 학살해버린다. 간신 은부가 정신나간 궁예를 조종해 명을 내렸고 의형대 병사(사실상 은부의 부하들)들이 궁중 감옥에 갇혀 있던 젊은 여성들을 끌어다 윤간한 뒤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지져 잔혹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상황을 확인하러 온 신숭겸은 의형대를 모조리 포박했고 사태를 목격한 순찰대원들의 증언을 듣자 분노한 부하들은 의형대 병사들을 모조리 척살해버린다. 게다가 강비와 태자들의 끔찍한 죽음이 발생하고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결국 왕건은 정변을 일으킨다. 궁예가 정신병에 걸리고 강비가 원래 왕건의 첫사랑이었으며 선종이 왕건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던가 하는 등 <태조 왕건>과 소설간의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큰 틀만 비슷할뿐 전개와 캐릭터성 등은 완전히 다르다. 궁예의 광증 묘사도 서로 큰 차이가 있는데 소설의 궁예는 광기를 부릴 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이 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심신미약자로 묘사된다. 반대로 <태조 왕건>의 궁예는 판단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 기준이 일반인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인물의 성향 자체가 폭력적으로 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6.5. 만화/애니메이션[편집]


  • 계림 북스의 태조 왕건 · 궁예 · 견훤 학습만화에서는 양길에게 독립하기전에는 대머리 승려모습이지만 왕건을 만나고나서는 머리를 기른것으로 등장한다.



  • <조선일보>에서 아동, 청소년 한자 학습만화 컨텐츠로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는 맛있는 한자 시리즈에서는 강비가 궁예를 상대로 한 반란에서 궁예를 지키다 죽자 폭군이 된다. 아무래도 궁예가 강비를 끔찍하게 죽였다고 하면 어린이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각색한듯하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파일:궁예 (칠장사 벽화).png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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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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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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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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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륜왕





聖25
진지왕



김만명






























마야부인 김행의

聖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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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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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聖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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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천

眞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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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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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0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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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왕






































眞31
신문왕





흥평왕




































眞32
효소왕

眞33
성덕왕





명덕왕
































개성왕

김사소

효상태자

眞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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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5
경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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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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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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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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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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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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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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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강왕

익성왕



성덕왕
































眞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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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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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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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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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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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성무왕

?

眞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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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태자

문성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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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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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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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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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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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권 「백제 3권 (百濟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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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안왕 부친 설[2] 경문왕 부친 설. 《고려사》에 의하면 상인 왕창근이 궁예에게 <고경참문(古鏡讖文)>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거울을 바쳤다.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극을 암시하는 명문이었다. 이 내용을 토대로 궁예를 축(丑)년생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소띠라는 설을 수용한다면 857년(정축년) 혹은 869년(기축년)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과 동갑내기인 867년생으로 설정했다.[3] 음력 6월 14일, 쿠데타가 일어난 뒤 도망가다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었다고 한다.[4] 함경남도 안변에 궁예로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다#[5] 음력 901년 ~ 918년 6월 14일.[6] 1913년에 촬영됐으며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건물의 전경사진으로, 궁예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이지만 6.25 전쟁 이후 소재 불명 상태.[7] 물론 역사는 승자만이 기록을 남길 수 있기에 궁예에 대한 평가는 현대까지도 옳고 그르다의 말이 많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여러 기록들에서 폭군의 이미지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다면 마냥 그냥 나온 이야기는 아닐 것 이다. 폭군인지 아닌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고려 초기 왕실에선 궁예를 대왕이라 부르며 왕으로서 추존을 해줬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아있던 궁예 세력과의 공존을 위하여 추존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궁예에 대한 악평은 후대에 기록이 수정 됐을 가능성도 크다. 진실은 고려 초기 왕실과 그 관계자들만이 알 것이다.[8] 다만 안동권씨는 신라 경주 김씨에서 분적한 것이 맞다.[9] 다만 장량의 원래 목표는 전국칠웅 한나라의 부활이었고 유방과는 우연히 만나 뜻이 잘맞았지만 그의 주군은 한왕 성이었기에 홍문연 이후 촉으로 가는 유방을 따라가지 않았다가 한왕 성이 항우에게 제거되자 탈출해서 유방을 주군으로 모시기 시작했다.[10]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06) , (김주성,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 (최웅,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11] 자의적 법 집행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암살이나 역모와 같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적어도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경감시킬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무고를 입증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적어도 누군가의 제보(그것이 참소이든 아니든)나 그간의 행적과 같은 나름의 증거라도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인 숙청 방식인데 관심법에 의한 숙청은 그야말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권력층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스트레스는 비할 바가 못 된다.[12] 타인의 행동이 악의에 찬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등 불신과 의심을 일삼는 성격장애[13] 견훤은 조상 시절부터 신라 왕궁 근위대를 제공해오던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15살 때부터 서라벌에서 군생활을 시작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 동원력이 궤를 달리했고, 왕건은 대호족의 아들로서 기반 세력이 시작부터 있었다. 하지만 궁예는 사실인지도 의심스러운 왕족의 후예라는 것 말곤 기반이라곤 하나 없던 승려에 지나지 않았다.[14] 궁예의 충신이었던 왕순식만 봐도 궁예가 이미 사망한 이후에도 충성심을 유지하여 왕건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짓을 하면서 대들었지만 왕건은 왕순식을 건드리지 못했다. 왕건은 왕순식의 아버지였던 허월을 보내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왕순식이 922년에 아들을 먼저 보내 귀순 의사를 밝히고 928년에야 공산 전투 이후에야 왕순식이 직접 왕건에게 찾아가 완전히 귀순한다.[15] 왕권 강화를 위해 사람들을 죽인 것이 대표적으로, 현대 기준으론 잔악한 악행이지만 세계사에서 새로운 왕국이 생기면서 구세대를 숙청하는 일은 빈번했으며 당시 기준으로선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오히려 자기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필요악인 행위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 건국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해 왕씨 학살을 벌인 역사가 있다. 왕씨 학살 또한 명백한 악행이지만 결과적으로 고려 부흥 운동의 싹을 잘라버려 불안요소를 없애버림으로서 왕권 강화를 이룩했다.[16] 북극성에 대응되는 위치인 치성광여래를 신성시한다. 그런데 북극성은 동아시아에서 황제의 상징이기도 했다.[17] 도교에서는 단오(음력 5월 5일)를 황제의 숫자가 겹치는 날로 본다. 그리고 태봉 시절의 사찰 이름인 발삽사(勃颯寺)에서는 토성에 대응되는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한 궁예가 사용한 연호 중 하나인 '수덕만세'는 오덕종시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18] 여기서 등장한 궁예는 즉위 후에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나오는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