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백제의 제31대이자 마지막 건길지.[3]
무왕의 장자로 《삼국유사》 <서동요> 설화의 기록을 따른다면 신라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태종 무열왕의 이종사촌이다.
632년 태자가 되었으며 641년 즉위했다.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인 군주로 군림했다. 3천 궁녀를 들였다는 루머가 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평가가 심히 엇갈렸던 군주로 재위 중반기까지만 해도 숙적인 신라를 몰아붙이며, 무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으나 재위 15년(655년)에 접어들어서는 주색을 탐하는 암군으로 전락하여 백제를 망하게 하였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라는 나라를 시기한 타국들에 의해서 의자왕의 업적이 곡해된 것으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백제 역사상 기록이 많이 남은 군주 중 1명이며,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1권을 모두 장식한 군주이다.[4] 《삼국사기》에서 <백제본기>는 총 6권임을 생각해보면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이는 의자왕이 다른 백제의 군주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과 의자왕 퇴위 및 멸망 이후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까지도 모두 <백제본기> -의자왕- 에서 총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용이 디테일하고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의자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과거부터 현재까지 굉장히 애매한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삼천궁녀 설화처럼 확인되지 않은 일들로 그가 후대에 많이 꺼내려 졌을 가능성도 높다만 그렇다고 무작정 띄우기에는 만약 엄청 뛰어난 명군이었다면 백제를 그래도 후대까지는 유지하지 않았겠냐는 반론이 더해져 명군도 암군도 아닌 중간 정도의 군주라는게 가장 정확한 평가로 보통 결론 내려진다.
의자왕은 왕권 강화와 대외 정벌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 붙여 정치를 했던 인물이다. 이는 백제 내부에 자신감을 불어 넣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부친 무왕 때까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것을 끊어낸 말년의 외교 판단으로 대당관계를 파탄내서 당과 신라의 양면 협공을 초래했다는 점도 있어서 이는 명백히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무리한 왕권 강화로도 마찬가지로 비판 받는데 일본서기[5] 에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앉히는 등의 무리한 왕권 강화 노력 때문에 백제 귀족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예식진 같은 매국노에게 붙잡혀 백제 멸망을 지켜보게 되는 비참한 몰락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4. 가족 관계[편집]
- 부왕 무왕(백제)
- 왕후 은고부인
- 슬하 50명 이상 (50남 ?녀) - 삼천궁녀 설화가 확인된 실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실 실제로도 자식 자체는 역대 한국사의 국가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아들만 50명이며 딸은 몇 명인지 모른다. 딸도 비슷한 비율로 태어났다고 한다면 자녀 수는 100명 가까이 된다. 다만,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왕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한 것을 원문으로 따르자면, '서자 41명'을 실제 의자왕의 친자식들이라기 보다는 의자왕의 종친이나 왕실의 친위세력들을 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인데, 의자왕이 "우리는 모두 가족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줬을 것으로 추정한다.
5. 기타[편집]
- 의자왕의 '의자'를 시호라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실 시호가 아닌 그의 이름이다.[15] 마지막 군주한테 "의롭고 자비롭다"라는 시호를 줄 리가 없다.[16] 한국의 어린이 잡지 《위즈키즈》에서는 시호와 이름을 헷갈려서 한때 역사 코너에서 의자왕을 옹호하는 떡밥으로 쓰였다. EBS 교육방송에서 방영되는 '역사채널e'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의자'를 이름이 아닌 시호로 생각해서 의자왕은 방탕한 왕이 아닌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고 설명했는데 '의자'는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시호가 아니라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나 SNS에서 해당 역사채널e 편이 짤방으로 제작되어 유포되고 있는 답답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정상적으로 치세를 마쳤다면 시호는 '문왕(文王)'이 되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武' 시호 다음에는 '文' 시호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 이름에 '의자'가 들어가는 탓에 그 앉는 도구 '의자'가 연상돼서인지, 이름에 대해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어디 앉아서 노닥거리기만 해서 의자왕', '선생님이 백제의 마지막 왕을 물어봤는데 기억을 못 하는 아이에게 의자를 가리켰더니 걸상왕이라고 대답' 등의 농담도 있다.[17]
- 3,000 궁녀... 즉 (낭설이지만) '여자가 많았다.' 라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하렘의 대명사로 통한다. 사실 역대 왕조 국가의 군주들 중에서 후궁을 두었던 군주는 여럿 있었지만[18] 의자왕은 '3,000'이라는 놀라운 숫자에다 백제 왕조의 종점이라 의자왕은 '하렘의 대명사' 자리를 꿋꿋이 지킨다. 그 이유에서인지, 한국판 남자 카사노바처럼 밈이나 드립 등에 꾸준히 활용되는 중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의자왕처럼 3000명 이상을 궁녀로 거느리는 것은 제아무리 왕권이 강한 황제였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서동요>의 내용을 적용해 생각해보자면 그가 백제 땅 넓히기를 혈연보다 더 우위에 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서동은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이자 무왕의 왕비이며, 의자왕의 모친으로 간주되는데, 그러면 그는 이모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19] 한동안 미륵사지 석탑 복원공사 중 나온 <금제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사택씨의 딸이라고 나와 관련학설에 대해 이론(異論)이 나와 힘이 실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학계에서는 귀족 사택 가문의 딸이 후처로서 의자왕의 친모가 아니라 보는 등 기존의 학설을 수정하는 쪽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설은 사택씨의 딸이 정실부인이라면 본인 주도하에 세운 미륵사지의 가운데 탑 위치에서 유물이 발굴되어야 했으나 중측으로 세워지고 무너진 서탑에서 발굴되었다는 점, 해동증자로 불리던 의자왕이 장남임에도 오랫동안 태자로 책봉받지 못하고 겉돌았다는 당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주장된 설이다.
- 위의 설과 선화공주 설화를 엮어, 과거 역사스페셜을 비롯한 각종 역사 관련 미디어에서 이도학 교수의 설명을 참조하여 의자왕이 선화공주로 이어진 신라의 핏줄, 혹은 미천한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이를 성공해 냄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백제의 왕임을 과시했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 실제 동기가 어찌 되었던간에, 아버지인 무왕과 함께 신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몰아 세우고 집권 초중기에는 백성과 관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왕이었음은 확실시 된다. 정작 그 인기절정의 순간,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년에는 당나라까지 끌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참 비참한 운명의 군주라 할 수 있다.
-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키면서 '의자왕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를 내걸었음을 보면,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옛 백제 지역 사람들은 의자왕을 동정한 모양이다. 이후 견훤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의자왕의 한을 갚았다.'고 선언했다. 한편으로는 신라가 한반도를 영토적 통일은 이루었으나 정신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백제와 아무런 연고가 없고 오히려 서라벌에서 정규군으로 활동하다 반기를 든 생판 남인 견훤이 200년 전에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을 위해 복수하자고 했는데 그 일대에서 호응했다는 점이 그렇다.
5.1. 친위정변설[편집]
5.1.1. 백제의 대란[편집]
“백제국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사(弔問使)를 받들어 보냈는데, 저는 조문사를 따라 함께 츠쿠시노쿠니(筑紫國, 축자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례식에 봉사(奉仕)하고자 하여 혼자서 먼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매우 어지럽습니다”
《일본서기》권24 고교쿠 덴노 정월
2월 정해(丁亥) 초하루 戊子 阿曇山背連比羅夫, 草壁吉士磐金, 倭漢書直縣을 백제 조문사의 處所(처소)에 보내어 그 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가 대답하기를 “백제 국왕이 저희들에게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일본 조정에서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20]
백제 조문사의 從者(종자) 등이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 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권24 고교쿠 덴노 2월조
한편 642년 혹은 655년 정월, 백제에서는 꽤 큰 규모의 정치적 대란이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에 시기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기록상 642년이라고 되어 있지만, 상황상 655년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의자왕이 '어머니'가 죽은 틈을 타서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기록은 《삼국사기》 등 국내의 사서에는 전해지지 않으며 오로지 《일본서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에 다녀왔던 조문사와 백제에서 온 사신의 입을 빌어 당시 백제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서술했다.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왜국에 가서 머물고 있던 아우 부여새상의 귀국을 막았으며, 조카인 부여교기와 모매여자(母妹女子 :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의 딸) 4명 및 내좌평 기미 등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 당시 권력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왕의 혈족들과 대신들이 한순간에 백제 조정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이 기록에 나타난 '의자왕의 어머니'란 곧 무왕의 정비인 사택왕후(沙宅王后)를 일컫는다. 사택왕후가 의자왕의 친모가 아니라고 추정되지만 어쨌든 사서에는 그냥 어머니로 기록되었다. 또한 추방당한 왕의 혈족인 새상, 교기, 누이동생 4명 등은 아마 의자왕의 어머니인 사택왕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내좌평 기미 등을 비롯한 40명은 의자왕의 정적들이었으리라.
의자왕이 효성과 형제들간의 우애로 명성이 높아 '해동증자'라 불릴 만큼 처신했지만, 이는 세력이 미약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의자왕의 초기 일생을 살펴볼 때, 그는 태자 책봉을 무척 늦게 받는 등 지지 세력이 미약한 탓에 그 기반이 취약했으나 이를 노련한 처세술로 극복하고, 자신이 대권을 휘어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노렸다.
의자왕은 아버지인 무왕이 승하한 이후에도 아직 큰 권세를 지닌 어머니 사택왕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한편, 사택왕후가 낳은 동복형제들에게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 사택왕후가 죽자 마침내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이즈음에 의자왕은 이미 수차례 신라와 싸워 이기고 민심을 얻으며 힘을 키우는 한편 대내적으로도 꽤 탄탄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의자왕이 갑작스레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회복한 것이다.[21]
이는 의자왕이 선대인 성왕과 위덕왕 부자가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로 형성된 대성팔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하고, 전제 왕권을 수립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이후 백제의 정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거니와, 백제의 멸망에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5.1.2. 정치 세력의 변화와 친위 세력[편집]
의자왕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는 이후 백제 정치 세력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쿠데타가 일어난 655년 즈음에 백제 최고위직에 있었던 좌평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등 정치적 변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당시 백제의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은 654년에 은퇴하여 낙향했으며,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655년에 좌평 임자가 김유신과 내통을 시도했다. 656년 3월에는 좌평 성충이 의자왕에게 간언을 했다가 옥에 갇혀 죽었으며, 좌평 흥수는 죄를 지었다하여 고마미지현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집권 세력들과 마찰을 빚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백제의 정국이 급변하는 가운데 정치 세력의 주류는 기존의 고위 귀족들로부터 친위 쿠데타에 동조한 왕의 친위 세력들에게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의자왕의 친위 세력 관련 기록은 일절 남아있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당시 고위 귀족의 세력에 눌려 좌평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 머물렀던 신흥 귀족 세력들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동조한 친위세력으로 보고 있다.
의자왕 대에 장군으로서 수차례 신라 공격을 주도하다가 훗날 벼슬이 좌평에 이른 의직이나 벼슬이 달솔에 머물렀던 계백, 흑치상지 등을 그런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서에 기록된 말년의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 등의 실책도 이 친위 쿠데타와 연관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단순히 의자왕이 타락한게 아니라, 친위 쿠데타 과정에서 집권 세력과 마찰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오히려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의자왕도 이 과정에서 폭주하고 대외 상황에 방심하게 되었다는 것.
5.1.3. 언제 일어났는가?[편집]
(가을 7월 甲寅 초하루) 乙亥 백제 사신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 등에게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어떤 기록에는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智積)과 그의 아들 달솔(達率) 모(某), 은솔(恩率) 군선(軍善)이라 하였다.> 이에 건장한 장정에게 명하여 교기(翹岐) 앞에서 씨름을 하게 했다. 지적(智積) 등은 잔치가 끝난 후 물러나와 교기(翹岐)의 문전(門前)에 절하였다. - 《일본서기》 권 24 고교쿠 덴노 원년 7월(642년 음7월 22일)
갑인년(甲寅年)[22]
정월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니, 그 높디놓은[巍巍]한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스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그 우뚝 속은[峩峩]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로운 밝음을 머금어...(이상 해독불가) - <사택지적비 명문>
사실 《일본서기》 고교쿠 원년조는 이 사건을 서기 642년, 즉 의자왕 재위 2년 째에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따르면 의자왕은 641년 겨울에 즉위하고 나서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은 이듬해 1월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의자왕은 애초부터 그 세력 기반이 취약한 탓에 태자 책봉도 40세에 가까운 나이에 받았을 정도였는데,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외척과 고위 인사를 대규모로 숙청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의자왕은 즉위 초에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당나라에 조공사를 파견하며 전국의 주 / 군을 순행하는 데에 힘을 썼는데, 그처럼 혼란한 정국에 이런 활동까지 함께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친위 쿠데타 직후 조심해야 할 상황에서 궁성을 비우고 국토를 순행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위다.
또한 같은 기록에 작년(641년) 11월에 죽었다던 대좌평 사택지적은 정작 642년 7월에 멀쩡히 살아서 왜국으로 파견나갔고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654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음이 확인된 바 있다(...). 게다가 섬으로 추방당했다던 부여교기가 그해에 왜국으로 파견되어 왜국 대신의 집에 머무르는 등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때문에 이 기록은 필시 일어난 시기가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의자왕 재위 15년(655)의 일, 즉 《일본서기》의 고교쿠 덴노 원년조가 아닌 사이메이 덴노 원년조의 기록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설이 대두하였다. 다만 국내 사학계에서는 여전히 이를 642년에 일어났다고 보는 시각이 대다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황극천황(고교쿠 덴노)은 642년에 즉위했으며, 제위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655년에 제명천황(사이메이 덴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복위했다. 후대에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동일한 두 왕의 기록을 다루는 과정에서 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더욱이 655년을 기점으로 하여 의자왕이 점차 향락에 빠져들고, 서자 41명에게 좌평직을 하사해 백제 16관등 체계를 무너뜨렸으며, 656년 성충을 투옥하였다. 좌평 흥수가 무슨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 유배를 간 것도 이즈음이며, 대좌평 사택지적도 654년 정월에 은퇴했다가 갑자기 죽은 시기와 일치한다. 백제 좌평 임자(백제)는 655년 전후로 간첩 행위를 한 신라인 조미갑을 봐주는 행적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실려있다. 이처럼 백제 정국의 변화가 극심해졌으므로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는 642년이 아닌 655년 정월에 일어났다고 봄이 더 합리적이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의자왕/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一年春三月 의자왕의 즉위
一年秋八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年春一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年春二月 주군을 순행하여 백성을 위무하다
二年秋七月 미후성 등을 공격하다
二年秋八月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하다
三年春一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三年冬十一月 고구려와 화친을 맺다
四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四年 융을 태자로 책봉하다
四年秋九月 김유신이 일곱 성을 빼앗다
五年夏五月 신라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차지하다
七年冬十月 의직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다
八年春三月 의직이 요차성 등을 함락하다
八年夏四月 옥문곡으로 진격하다
九年秋八月 은상이 신라의 석토성 등을 공격하다
九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二年春一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十三年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다
十三年秋八月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다
十五年春二月 태자의 궁을 수리하다
十五年夏五月 붉은 말이 오함사에 들어와서 울부짖다
十五年秋七月 마천성을 중수하다
十五年秋八月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十六年春三月 왕이 향락에 빠지다
十七年春一月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七年夏四月 큰 가뭄이 들어 농토가 황폐화되다
十九年春二月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오다
十九年夏四月 태자궁에서 암탉과 참새가 교미하다
十九年夏五月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다
十九年秋八月 여자 시체가 떠내려오다
十九年秋九月 대궐 남쪽 도로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리다
二十年春二月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二十年夏四月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이다
二十年夏五月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치다
二十年夏六月 백제 멸망의 여러 징후가 나타나다
二十年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망국의 군주답게 믿기 힘든 기록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신라와 당나라의 프로파간다라고 보기엔 성충이나 흥수 등 여러 귀족들이 귀양간 걸 보면 민심이 흉흉했던 건 사실로 보인다. 나라가 멀쩡한데 임자가 김유신한테 보험을 들 이유가 전혀 없다. 들통나면 목이 날라가는데... 그만큼 나라 사정이 암울했던 것.
이후로는 의자왕과 관련없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기록에 있는 것들이다.
二十年 복신이 부흥 운동을 일으키다
二十年 도침과 복신이 여러 무리를 모아 세력을 확장하다
唐 高宗 龍朔二年秋七月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고 부흥 운동은 종말을 고하다
唐 高宗 麟德二年 부여융과 신라왕이 웅진성에서 맹약을 맺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