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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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의 여신
선도성모 | 仙桃聖母

이름
사소(娑蘇)
생몰년
미상
출신
중국 제실[1]
자녀
슬하 1남
아들 - 혁거세 거서간
별호
서술성모(西述聖母), 동신성모(東神聖母),
서악대왕(西岳大王)
1. 개요
2. 기록
2.1. 북송의 설화(삼국사기)
2.2. 동국이상국집
2.3. 삼국유사
2.4. 신중동국여지승람
3. 분석
3.1. 동신성모와의 관계



1. 개요[편집]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여신. 고대 한국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신으로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됐다. 정견모주[2]가 대가야에서 숭배받은 것처럼 혁거세 거서간의 어머니로서 신라시대에 숭배받은 여성 산신으로, 국가의 형성이나 다양한 설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2. 기록[편집]



2.1. 북송의 설화(삼국사기)[편집]


김부식은 신라본기의 마지막에 논평을 썼는데, 여기서 선도성모 설화를 자신이 북송 학사에게 들은 신라의 건국설화 중 하나로 언급했다.

김부식북송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신관(佑神館)에서 한 여선상을 보았는데 안내자 왕보(王黼)가 이 여선은 당신 나라의 신으로, 옛날 중국 제실의 딸인데, /남편 없이 임신해 의심을 받아/[3]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이를 낳은 것이 해동시조가 되고, 지선(地仙)이 되어서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고 있는데 그 여선상이라고 말했다.

또 송나라 국신사 왕양(王襄)이 고려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지낸 글에, "현성(賢聖)을 낳아 나라를 세운"이라는 구절이 있었기에 김부식은 동신성모가 즉 선도성모라고 추측했다. 다만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그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2.2. 동국이상국집[편집]


동국이상국집엔 이규보가 동경의 반란군을 진압하러 갔을 때 동경의 신들에게 쓴 제문이 남아있다. 여기서 선도성모는 '동경 서악대왕'으로 등장한다. 서악대왕이란 이름은 '동경 동악대왕'으로 숭배된 토함산신 석탈해와 대비되는 이름이다.

이규보는 서악대왕에게 제사지낸 후, 여러 반란군 수괴를 잡았다며 감사하는 제문을 올렸다.


2.3. 삼국유사[편집]


이하는 모두 삼국유사의 '선도성모 수희불사'의 내용이다.

  • 기원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이 사소(娑蘇)였는데, 신선술을 얻어 해동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부황(父皇)이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어 보내면서, 이 솔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잡아 살라고 했다. 사소는 솔개를 날려보내고, 솔개가 멈춘 한 산에 머물러서 지선(地仙)이 되었다. 그 산의 이름은 서연산(西鳶山, 서솔(개)산)[4]이 되었고, 신모는 오랫동안 살면서 나라를 도와 신이한 일을 많이 일으켰다.
이후 서연산신 제사는 국가 공인 제례가 되어 소사[5]로 분류됐고, 여러 망제[6] 중 으뜸으로 두었다.

  • 안흥사 증흥을 돕다
대표적인 설화는 안흥사 중흥 설화다. 신라 26대 진평왕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안흥사(安興寺)의 불전을 중수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비용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한 여선(女仙)이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나 위로하고는 자신은 선도산의 신모(神母)인데, 불전 중수하는 일을 도우러 왔다며 자신의 자리 밑에 금 10근이 있으니 가서 불전 중수 비용에 쓰되, 불전에 주존삼상(主尊三像)을 안치하고, 벽에는 53부처와 육류성중(六類聖衆)과, 아울러 여러 천신(天神), 오악신군(五岳神君)[7]의 그림을 그려 붙이고, 매년 춘추로 10일에 사람들을 모아 점찰법회(占察法會)[8]를 개최하라고 말했다.
지혜 비구니가 꿈에서 깨어 사람들을 데리고 선도산으로 가서, 신사(神祠)의 좌석 밑을 파니 과연 황금 160냥이 나왔으며, 그걸로 불전을 중수하고 신모가 일러준 대로 모두 설치했다. 일연 당시(원 간섭기)에 그 불당의 설치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점찰법회는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칠성, 산신을 모시는 건물들에 대한 기원을 설명해주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 경덕왕이 대왕으로 봉하다
신라 54대 경명왕이 산에 매사냥을 나왔다가 사냥매를 잃었는데, 신모상에 빌어서 사냥매를 찾아주면 작위를 주겠다고 하자 과연 사냥매가 책상 위에 날아와 앉았으므로, 왕이 신모를 대왕(大王)으로 봉했다.

  • 그 외
여러 천선을 시켜 비단을 짜고 붉게 염색해 조의(朝衣)를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신이롭게 생각했다.


2.4. 신중동국여지승람[편집]


승람에 따르면 경주 선도산엔 '성모사'가 있어 선도성모를 모셨고, 토함산엔 '석탈해사'가 있어 석탈해를 모셨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있던 서악대왕, 동악대왕의 제사가 그대로 이어진 듯 하다.


3. 분석[편집]


대가야의 여성 산신이었던 정견모주와 비슷하게 본디 신라의 여성 산신이었으나, 건국 설화나 각종 유적에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신성함이 덧붙여졌다. 본디 선도산은 서술산이란 순우리말 이름이 있었는데 삼국유사엔 되려 서술산이 선도성모가 온 뒤 붙은 이름이라는 설화가 기록됐다. 이는 후대에 서술산신에게 선도성모 설화가 추가됐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선도성모가 중국 제실의 딸이라는 점은 당대의 가장 발달한 문명국가에서 건너온 고귀한 혈통이라는 걸 강조하여 신라가 문명국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남북국시대에 덧붙여진 포장이다. 그래서 중화주의와 관련있다는 시선이 있다.

만약 앞서 언급되고 있는 선도성모 설화가 진짜라면 현대인 관점에서 중국의 특정 귀족, 왕족의 딸이 문란한 사생활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한반도로 도망쳐와서 진한 땅에 자리잡고 신라의 초대 왕인 박혁거세를 낳았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되면 신라의 모체는 중국인 어머니로부터 시작되고 박혁거세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중국 쪽 사생아 출신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박혁거세는 모든 박씨들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는 존재이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선도성모가 곧 동신성모로서 진한의 첫 임금을 낳았다고 추측했지만 그 첫 임금이 누구인지는 특정하지 않았는데, 삼국유사의 일연은 혁거세와 알영 두 사람이 모두 선도성모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그 신화에 계룡, 계림, 백마 등이 나오는 이유는 닭과 백색이 서방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부식은 어디까지나 신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지나가듯 언급한 이야기라 자세하지 않은데, 삼국유사는 전설을 주로 수집했다 보니 선도성모 설화에 살을 더 붙여서 넣었다는 의심이 있다.


3.1. 동신성모와의 관계[편집]


북송의 국신사였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따르면 동신성모는 개경 선인문[9]동신사(東神祠)에서 모신 신이었다. 서긍은 동신사에서 제사지낸 뒤, 누군가가 동신성모는 '고려시조를 낳은 부여의 아내이자 하백의 딸'이라고 설명했다고 기록했다.

즉 고려도경은 동신성모가 유화부인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근데 동시기의 김부식[10]은 삼국사기에서 동신성모는 선도성모라고 추측했다. 처녀잉태와 한 국가의 창업주를 낳은 어머니라는 점에서 유화부인과 선도성모는 공통점이 있는데,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출범했던 고려 왕조가 후기로 갈수록 신라 계승 의식이 강해지게 됐거나, 국모라는 입장에 있는 두 신격(神格)이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일치화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격의 일치화는 역사상 흔히 일어났던 일이다. 혹은 김부식이 단순히 잘못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동신사는 개경에 있었던 방면 선도성모사는 경주 선도산에 있었다. 신사가 아예 다른 위치에 있었고 호칭도 달랐으니 두 신격은 완전히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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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고학적으로 증거가 없고 옛 문헌에 기록은 있지만 후대에 중화사상으로 왜곡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취소선 처리[2] 천신 이비가와 결혼한 가야산신이다. 대가야 시조 뇌질주일과 금관가야 시조 뇌질청예를 낳았다.[3] 이 부분은 삼국사기에만 있고 삼국유사에는 없다.[4] 지금의 경주시 선도산으로, 과거에 '서술산'이란 순우리말 이름이 있었다. 본 설화는 서술산(서솔산)의 민간어원이다.[5] 국가의 제례는 대, 중, 소 3사로 중요도를 나눈다.[6] 산 꼭대기까지 가지 않고, 꼭대기가 잘 보이는 곳에서 바라보며 지내는 제사.[7] 신라의 다섯 산신으로,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8] 대통에 꽂힌 막대기를 뽑아 점을 치는 법회로 사실상 전통 무속신앙에서 점을 치는 행위와 같다.[9] 나성의 남문이다.[10] 당시 서긍 일행이 왔을 때 김부식이 접반사였기에 그의 기록이 고려도경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