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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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존의 평가
3. 성취와 업적
4. 한계와 실패
4.1. 신라가 실패한 이유: 극복하기 어려웠던 성공기의 유산



1. 개요[편집]


신라, 그 중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를 서술하는 문서.

2. 기존의 평가[편집]


전근대에는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을 한반도 단일 국가 탄생의 원형으로 여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고려시대조선시대에까지도 삼한일통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는데 고려는 신라의 삼한일통을 이어받아 재통일과 온전한 통합을 이루었다며 자부하였고 이러한 인식은 조선 조정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신라의 삼한일통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러한 의문은 크게 발해와의 공존, 외세의 개입이라는 두 갈래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18세기 유득공발해고에서 시작되는데 유득공은 발해가 8~9세기 통일신라로 공존하였으므로 이 시기는 통일신라가 아닌 남북국시대로 명명하는 것이 옳다고 지적하며 기존의 주류 시각을 비판하였다.

후자와 같은 인식의 경우 19~20세기 외세의 침탈이 두드러지면서 심화되었다. 대표격인 단재 신채호신라삼국통일에 대하여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외세를 끌어들여서 만들어낸 통일이고,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은 통일이라고 비판하며 우리 역사에 사대주의적인 요소를 심게 되는 계기라고 평가했다

현대까지도 역사학자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신채호가 내린 평을 긍정한다. 여전히 많은 대중은 신라의 자주성을 부정하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같은 민족의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원흉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영토에 매력을 느낀 이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시킨' 원흉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대중과 달리 역사학자들은 7세기 당대에 삼국 사이에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없었다는 걸 근거로 하여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비판한다. 언어, 복식, 문화가 비슷한 동류집단이란 인식은 있었으나, 운명 공동체와 같은 인식은 당대에 존재하지 않았음이 분명했기 때문. 당장 백제만 하더라도 이질적 집단이었던 왜국을 끌어들여 신라를 침공하기 일쑤였고 북위수나라에는 고구려를 침공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현대인들의 시각을 7세기 이전의 시대상에 투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일단 민족사적인 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인연이 서로 깊은 건 사실이었다. 고구려 왕실의 원류는 부여, 백제 왕실의 원류는 고구려, 신라 왕실의 원류는 고조선인데, 우선은 고조선과 부여는 같은 예족 계열 나라다. 게다가 초기 고구려의 핵심 기층민 집단은 전국연에게 패배를 겪기 이전 요동 동부에서 고조선을 구성했던 조선인들이며, 한성백제의 기층민 집단은 옥저 계열 예족 집단 및 조선인들, 신라의 기층민 집단은 역시 조선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민족사 운운하는 건 오늘날 우리 생각이고, 뿌리와 계열이 비슷한 게 꼭 서로간의 친밀성이나 국계 의식을 가깝게 한다고 볼 순 없다. 당장 오늘날을 봐도, 현대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미국과 더욱 가까운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한편, 대중의 고구려 일변도식 사관을 비판하겠다고 완전히 그 반대의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일본 극우의 한반도 비하 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완전히 부합하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부류가 최근 등장한 것도 문제다. 이들은 완전히 신라의 입장과 영토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신라에서만 찾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로는 그 두 나라의 문화적 명맥 및 국가적 계승맥락이 한국사에서 완전히 끊겼다는 틀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 이런 동북공정 같은 이상한 견해는 역사학계에선 성립할 수가 없는 편견이다. 따라서 특정 국가에 매몰되지 않고 삼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한 것이다.


3. 성취와 업적[편집]


신라삼국통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단일 운명 공동체가 탄생한 건 부정할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집단에게 하나로 통일된 국가라는 경험을 새겨넣고 전 지역이 동일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험을 하게 한 가장 첫 국가는 어디까지나 신라지, 고조선은 아니다. 즉 국가 공동체 통일의 시발점을 닦은 발판의 마련은 민족사적 시각에서 신라한테만 해당하는 업적이다. 한국 역사의 최초라고 평가받는 고조선은 서북한 지역을 지배했던 군장 국가에 불과하여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진 못했고, 그저 한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1]

또한 신라는 나름대로는 정복민을 포용하려 노력했다. 가야를 멸망시킨 후 왕족들은 신라 왕족인 진골로 편입되었으며 금관가야 왕의 증손자였던 김유신도 신라 진골이었고,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해당 지역의 지배층들을 비록 하급 귀족으로 강등시키긴 했어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거나 몰살하진 않았었다.[2]

단재 신채호가 외세를 끌여들어 같은 민족을 없앤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한 걸 아직까지 인용하는 입장도 있으나, 이는 현재 입장에서만 바라본 잘못된 생각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말이 각각 어느 정도 통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같은 민족감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건 아니었다.[3]

고대 삼국은 서로를 지금처럼 같은 민족이라 생각한 바는 없다. 물론 언어와 문화가 어느 정도 동질적인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은 외국이었다. 오히려 이런 예가 세계사적으론 흔하며[4], 사실 유명한 고대 성서 무대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 암몬, 모압, 에돔, 유다 모두 같은 언어를 썼고 문화도 같았다. 종교면에서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없었지만 서로를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이며 죽자꾸나 싸워댔다.

역시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로마든 페르시아든 뭣이든 열심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상대방을 쳐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마찬가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정벌을 나섰을 때 페르시아 편에서 싸운 그리스인들도 있었을 정도였다.[5]

이렇게 서로 국가 정체성이 달랐던 삼국 백성이 완전히 국가도 민족도 같은 나라라는 동질감이 생긴 건 고려시대 이후다.[6] 물론 통일신라는 민족 통합을 완료하지 못해 다시 후삼국으로 나뉘게 된다.

반대로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의 일원이 되어, 자국 백성들을 고구려나 백제의 2등 국민으로 만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은 우스갯소리일 뿐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신라가 당과 연합한 것에 대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괴롭힌 가야와 백제도 피할 수 없다.[7][8] 만약 1,000년 후 후대인이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북한에 의해 순순히 망해줬다면 남북분단 비극이 없었을텐데라고 한다면 현 한국인 입장에서 어이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에게 멸망당해 더 큰 민족국가가 되었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도 당대 신라인에게는 당치 않은 소리에 불과하다.[9]

또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세 나라의 문화를 빠르게 융합, 발전시켜 당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빛나는 문화를 꽃피웠다.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각종 공예품과 불교 미술이 남긴 정교한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래서 발해 등을 곁가지로 취급하는 외국 및 한국 사학계에서는 삼국 -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을 중심으로 한국사로 설명하는 편이며, 최근에 등장하는 미국 중, 고등학생 교과서도 그런 식이다. 이것은 발해의 기록이 부족하다거나 발해에 대한 연구가 신라에 대한 연구보다 부족한 데 이유가 있지 않다.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국이긴 했지만 당대 국제 사회에서 당과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에 국호조차 맘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행세하질 못한데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계승국도 남기지 못하여, 민족사에서 통일신라보다 비중과 성과가 명백히 떨어지는 데 있다.[10]

4. 한계와 실패[편집]


신라 삼국통일의 진짜 한계는 고구려 영토[11]제대로 편입하지 못했고[* 실제로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토도 100년 넘게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782년 패강진을 설치해서야 겨우 영향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패서(浿西) 지역이라 불리우는 임진강 이북의 영토들은 사실상 고구려 유민들의 앞마당이나 다음 없었다.] 백제 왕실을 흡수하지 못했으며[12],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에게 '우리도 한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심는데는 실패한 물리적 통합에 머물렀다는 점이다.[13] 물론 이런 물리적 통합이 있었기에 고려의 의식적 통합도 가능했지만, 신라의 통합이 결국 물리적인 면에서만 그쳤기에 실패했음은 부정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말이 통하고 문화가 어느정도 비슷한 다른 나라'들을 물리적으로나마 처음 통합을 했고 신라말에 분열을 막기위해 대두시킨 삼한일통 의식을 탄생시켰으니 통일에 의의가 없다고는 할 수 없고 분명히 뒷날 고려의 통일에 한 전범이 되었지만 '진정한 한민족의 시작'이라고 할 순 없다.

이렇게 신라의 삼국통일은 나름 의의는 있었으나, 전 국민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하지 못한 물리적 통일이었기에 결국 전국 각지에서의 지방 반란으로 기존 신라 영토 외 영역에 대해선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다 끝내는 250여 년 전 멸망시켜 통합했다던 백제와 고려의 부활을 허용했고, 끝내 이들에게 시달리다 망하고 만 것이다.[14]

삼국사기 40권의 문무왕 대 조치들만 보고 고구려인과 백제인 상류층에 관등(벼슬의 등급)을 내릴 때 본국과 견주어 주는 등 많은 우대를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단정하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해당조치가 본국과 견주어 그에 맞게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틀린 견해다. 정복 국가가 여간해선 정복 초기에 피정복국 지배층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는 건 역사에서 흔한 일이며, 중요한 건 이러한 파격이 지속되었느냐인데 신라의 경우는 분명 아니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두품, 6두품, 진골 귀족으로 편입했다고 하지만 진골은 예외 케이스라고 봐도 좋을 정도고, 멸망한 나라라 격하됨을 감안해도 백제 지배층을 5두품[15]에 편입시킨 대우는 약간 심했다고 여겨질 소지는 있다. 멸망시킨 나라 귀족을 여간하면 지배층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제대로 된 정복 계획을 세우는 나라라면 어디나 하는 것으로 이는 로마, 페르시아, 헬라 제국 등이 그랬고, 심지어 정복민 괴롭히는 방면에서 대단한 악질이었던 일제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왕가와 귀족층에 상당한 지위를 보장하였다. 때문에 완전한 국가 통합에 성공해서 종족적, 언어적 계보 자체가 다른 족속까지 통합하는 데 성공했던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땐 여전히 빛이 바랜다.

게다가 6두품이라 한들 정치와 경제 면에서의 차별은 분명했고, 5두품은 군현 단위에서 우두머리를 하는 게 끝인, 하급귀족 정도에 불과한 지위였다. 또한 그런 대우를 받은 건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고구려, 백제 유민 대부분은 수도와 차별적 대우를 받는 지방 세력으로 흡수되었고, 지방민은 세금과 인력을 바치는 의무만 질 뿐 중앙에 진출할 기회는 상당 부분 차단되어 있었는데 이는 지방 세력의 실력이 성장하는 후기까지도 제대로 고쳐지지 못했다. 굳이 장보고까지 안 가더라도,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신라인이었고 지방 유지 자제였던데다 중앙군에 수월하게 입대할 수 있었던 견훤조차도 그 빼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앙정계에서 크게 출세하진 못하는 현실에 분개해서 반란에 몸을 던졌을 정도니, 그 나머지 지방 세력 자제들의 형편은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이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을 잘못 해석한 나머지, 신라의 융화 정책이 완벽했다고 주장하는 얘기가 있다. 그 사료들을 보면 백제 유민들과 고(구)려 유민들이 차별 받았다면 분명히 수도 많고 세력도 있었던 이들의 반란이나 전쟁이 기록되어야 한다는 얘긴데, 그런 사례가 후삼국 시대의 항쟁으로 인한 신라 정부의 지배력 붕괴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나당 전쟁 종식 이후로 200여년간 내내 반란이나 전쟁은 없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이는 정체성이 살아있다면 피지배민은 늘상 항구적인 반란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는 대단히 비역사적인 전제에 불과하다.

그렇게 따지면 일제도 철저한 탄압을 거쳐서 적어도 1930년대에 한반도에서의 소요는 거진 죽이는 데 성공했고 세계사에서도 정복국이 강하며 통치가 참을만할 동안 피지배국은 잠자코 있는데, 이걸 갖고 명분이 있네없네를 따질 수는 없다. 가장 반그리스, 반로마적 의식이 특유의 종교적 영향으로 강했던 유대인들마저도 반란 없이 조용히 지냈던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며, 결국 로마 제국에게서 떨어져나가 최대의 적으로 돌아온 불가리아도 바실리우스 2세 때부터 무려 이백 년 넘게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잠자코 로마에 충성하고 살았다. 후백제와 고려 건국이 단순히 신라에 대항하고 반란하는 것에 명분을 주기 위해서란 말이 있으나, 그 전에 그렇게 융합이 잘 되었으면 멸망한지 수백년이 흘러간 시점에서도 백제나 고(구)려 재건이라는 모토의 분리독립이 먹혀들어갔을 정도로 정체성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요한 건 그게 어떻게 유독 그 시대에서만 명분으로서 작용했고 이후에는 갈수록 파급력이 적어지는가다.

긴 시간의 통일신라 시대 때 차별과 같은 문제는 전혀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저 지방 세력에 불과하다는 이유만으로 출세에 한도가 있고 지방 유력자가 중앙 정계에 진출할 경로가 완전 차단되어 있으며 정책 결정에서 완전 배제되어 있는 건 차별이 맞다. 게다가 그 지방 유력자 대부분은 고구려계, 백제계일 수밖에 없고, 오죽했으면 신라가 지방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이식했던 신라 진골이나 6두품마저 죄다 이반했겠는가? 따라서 신라는 옛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게 '신라인'이란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 실패한 게 맞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백제 유민 의식과 신라 유민 의식이 분명 잔존했으니 고려도 마찬가지란 견해가 있으나[16], 고려 시대의 부흥 운동은 후삼국 시대처럼 성공하지도 못했고 거꾸로 지방에서 근왕군이 일어나 부흥군과 직접 대결하는 상황을 보면 신라 후기 시절과는 단연코 양상이 달랐다.

신라 장군이였던 견훤과 신라 왕족일 개연성이 있는 궁예가 부패하고 약해진 신라를 대항한다는 뜻에서 명분상 백제 부흥, 고(구)려 부흥을 주장했는데, 이런 야심가들의 경우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중앙 정부에 적극 협조해서 공을 세우는 길을 택했지 위험한 복국 반란에 몸을 던지는 경우는 대단히 적었다. 그 원인은 온전한 대우가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이런 야심가들이 이용할 유민의식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사료에도 차별이 있어 후삼국 시대가 생겼다고 쓰여있지 않다고 하는데, 지배당했다가 부활하는 입장에선 당연히 그냥 복국을 외치지 차별 대우를 해소해서 완전히 대우받을 여지가 있으면 뭣하러 독립해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나서는가? 중국에서 현 국가에 대항할때 예전 국가의 국명을 명분으로 삼아 대항했듯이 후삼국 시대에서도 그랬을 것으로 보는 억측도 있으나, 중국에서 그것은 중원 지역의 군주일 경우 마땅히 해당 지역이 속하는 지역을 봉국으로 삼아 한 글자 국호로 나라를 건국하는 관례에 의거한 것이다. 한반도에는 그러한 관행이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1차 사료를 대강 검색해보고 훑어보면 적어도 신라 측 공식 입장에선 그런 게 보이지 않으니 신라의 융화 정책이 완벽했다고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유독 한국사에서는 신라 말에만 불거지는,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것이 흔한 옛 국가 부활 운동의 순서란 면을 본다면 그러한 억측은 전혀 불가능해진다.

신라가 초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새로 복속된 지역에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던 적도 물론 있었다. 가야 제국(諸國)의 경우는 진골로 바로 편입된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유는 변한(가야), 진한(신라)의 상대적으로 강한 문화적 동질감에 있었던 걸로 추정되며, 월성 석씨 선원 세계도, 신라 김씨 선원 세계도 의하면 석탈해의 손녀 마정 부인이 그의 양자격이었던 김알지의 처가 되었다고 하는 게 그 근거.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장남의 이름은 강조(康造)라 하고, 월성 석씨 족보에서는 구광이라 하였으며 구광은 가야 국왕 김수로왕의 딸이다.즉 김알지의 계통 체계는 금관 가야 김수로와의 혈연적 연관이 보이며, 때문에 예전부터 신라와 가야 제국들과의 혼인 관계에 의해 진흥왕 시절 새로 편입된 가야 제국의 백성들은 위화감 없이 신라에 융화되었다고 추정한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야 멸망 후 신라 왕족과 명목상 동급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선 그렇지 못했음이 또 다시 드러난다. 고구려의 경우 왕족은 진골이지만 나머진 결국 6두품, 백제의 경우는 아예 왕족이든 무엇이든 전부 5두품 이하여서 가야에 비해선 분명히 쳐졌기에 썩 좋은 우대라곤 보기 어려웠다.

특히 백제의 경우 깡촌 우두머리급인 5두품에 속했다는 게 이목을 끄는 데, 이는 백제와 통일 전쟁 전후로 상호 원한이 쌓였던게 일차적인 원인으로 백제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간 건 원인이 아니다. 설령 그랬다한들 전부 건너 가는 건 불가능한 얘기며, 그렇게 따지면 마찬가지로 모두 보존되지 못한 고구려 고위층한테 백제 고위층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신라 측도 바보가 아니라서 오히려 애초엔 백제 쪽을 더 우대해주려고 했으나, 구 백제지배층은 신라 정부 생각대로 그렇게 쉽사리 협조적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신라가 본국과의 관등에 맞춰 신라식 관등을 하사했을 때 고구려계는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백제계 중 상당수는 거부한 정황까지도 분명 나타날 정도였다. 똑같이 망했지만 신라의 포용 정책에 그럭저럭 순응했던 고구려계와는 분명 대비되는 행태였고, 이들의 이런 비협조에 대한 신라의 반응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신라 지배층이 몹시 격분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17]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의 완전한 통합 시도는 고려시대로 미뤄질 수밖엔 없었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신라의 고위 계급으로서 정착하였고 동화하였다고 생각하는 건 문무왕 대의 극히 초반 파격적인 조치를 통일 이후 전 시기 동안 유지된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며 이는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입증된다.[18] 후삼국시대가 이백 년 이상 뒷날의 이야기기 때문에 7세기의 통합 후유증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다시 갈라졌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으나, 국가라는 집단의 진화와 발전에는 여러 요인이 기여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라고 주장할 순 없겠지만 통합할 때 행한 부적절한 조치가 무려 이백 년 동안에도 고쳐지지 않아 다른 여러 요인과 합류하여 분열에 기여한 건 사실이기에 직접적 원인 중 하나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신라의 지방 세력은 신라 왕조로 대표되는 체제가 건재한 이상 자신들에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 의식, 백제 유민 의식에 불을 붙여 중앙 정부로부터의 공식적 이탈, 즉 독립이라는 실력 행사로 후삼국 시대로 나타나게 된다. 즉, 후삼국 시대의 도래는 신라의 융화 정책이 끝내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뒷날 고려가 진정한 통일을 했다고 보는 건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태자였던 대광현을 비롯해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에 편입된 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어차피 영토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고려도 조금 더 북상에 성공했을 뿐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차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로 평가받는 이유는 삼국 유민의 의식적, 내적 통합까지 달성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신라 계승적 의식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삼국사기에서도 진정한 통일 왕조는 고려라는 시각이 드러난다. 물론 삼국사기야 고려 왕조에서 펴낸 관찬사서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으나, 신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애착이 컸을 개연성이 있었다고 보는 김부식마저도 기껏 서술한 건 고려의 삼한 계승 의식이었다.

이 의식적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현대 한국인에게 와닿는 사례를 하나 들자면 신라가 한반도를 통치하던 시절 단군은 어떤 지위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려인들이 자신들이 이어받았다고 여긴 고구려는 주몽을, 신라인들은 박혁거세 혹은 김알지(혹은 성한왕)를 시조로 섬겼지만,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을 기점으로 그전엔 평양 산신 취급받던 단군이 한민족 전체의 시조급으로서 위상이 급부상한다. 말과 풍속, 역사를 전혀 공유하지 않는 이민족과의 오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한반도의 독자성을 강조할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한민족이라는 관념은 신라가 아닌 고려에 모태를 둔다. 바로 그렇기에 신라는 한민족의 시작을 일군 주요한 토대는 될지언정 시작 자체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이다.[19][20]

한국인의 민족 관념에서 단군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생각하면 고려시대에 발생한 이 의식적 통합이 중요함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신라의 통일이 내외적으로 완전했었다고 가정한다면 애초에 이런 통일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이나 논쟁 자체 또한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 단일 민족 국가로서 신라 혹은 그 후속 국가들이 이어지는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고려, 조선 같은 국호를 가진 나라가 등장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 다음에 조선이란 국호가 등장하는 걸 들어 이것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으나, 조선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건 애초에 삼한일통을 목표로 한 고려 건국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하며, 고려 왕조를 압도하는 정통성을 가지고자 했던 이성계신진사대부측의 열망이 원인이기에 이는 과장이 아니다. 애초에 조선은 신라와 국체의 연속성이 없었던 고려와는 달리, 분명히 태봉-고려와 연속성이 있었음 또한 고려해야 한다.

행정적으로도 신라의 한계는 뚜렷한데 그나마 구 백제령에 속하는 지역에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직할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막상 구 고구려령, 특히 황해도 지역에서는 신라 조정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미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나당전쟁7세기에 종결되었으나 정작 신라가 개성(송악)을 시작으로 황해도를 행정 구획에 편입시키는 절차는 8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삼한일통을 주장하기 위해 반드시 점유해야 하는 고지인 평양에 대해서는 조정의 관리가 매우 미흡한걸 넘어 제대로 수복한게 맞는지도 의문이다. 더군다나 통일신라가 수복한 고구려의 고토, 즉 현재의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대는 본토의 9주와 별개로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패강진으로 관리되었는데 신라가 이 지역에 대해 군사적 목적 외에 행정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관철시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패강진 일대에서의 행정력 공백 속에서 고구려계 호족들이 성장했고 태봉과 고려를 건국했다. 구 백제령의 경우에도 중앙정부가 강력한 통치를 관철시키기는 했으나 상술한대로 백제계 귀족 및 백제령에 대한 차별대우는 지속되었고 이는 백제 유민의식과 합쳐져 후백제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첨언하면, 여기서 국체의 연속성이라 함은 그야말로 국체의 직접적 계승, 오늘날로 따지면 국가승계를 의미한다. 정부, 영토, 인민 등. 고려는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명백히 신라와 별도의 국가로 부활한 고(구)려의 계승국이지 신라와 같은 나라는 아니었다. 여기서 고려가 신라의 영토 내에서 발생하였으니 고구려와 관계가 희박하고 고려가 신라 자체라고 말하는 잘못된 동북공정식 의견이 있으나, 현대 정치적인 맥락을 일단 배제하고 보더라도 이건 그냥 철저하게 지배국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신라 일변도식 정체성에 매몰된 잘못된 견해다. 아예 신라가 강력한 직접 지배를 관철한 옛 백제 영역에서 건국된 후백제도 당대 국제 사회에서는 신라 외의 모든 나라에겐 백제로 인정받았고, 오늘날에도 이 나라가 부활한 백제임은 상식적인 사람이면 모두 인정한다. 그런 상황이니 신라가 간접 지배한 지역에서 고구려의 후신으로 건국되어 신라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까지 가진 고려가 어떻게 신라와 같은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21]

고려 정부가 신라 정부와 국가 대 국가로 관계를 가진 부분에 대해 보다 서술하자면, 신라 정부는 후백제의 군사적 압력이 워낙 거센 상황이었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빨리 고려를 별도 국가로 인정하면서 사신을 교환했다. 그리고 역시 이조차도 후백제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영역 국가로서의 역량을 모조리 해체당해서긴 하였으나, 나중에는 아예 고려왕 왕건을 대왕 고려왕으로 칭하며 그 아래를 자처했다. 이는, 아예 신라가 정식으로 망하기 전부터 있었던 상황이다. 신라 왕실은 임금이 살해당하고 정상적인 국가 기능이 거의 끝장나버린 상황에서도 끝까지 후백제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가 결코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큰 차이다. 또한 주민도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흡수했고,[22] 영토도 신라가 간접 지배로 만족한 패강진은 아예 직접 지배 영역으로 까는걸 넘어 아예 중심지였으며 고구려의 고도 평양 일대도 완전히 손에 넣었다. 물론 관직 체계도 완전 별도로 새로 시작한 새 나라였으며, 지방 체제 또한 고려는 적어도 현종 이전까진 원 신라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던 곳과 그렇지 않았던 지역은 별도의 지방 체제로 편성하여 다스렸다.

한편 조선은 왕조와 국명, 이념, 수도는 바꾸었지만 주민, 영토, 정부 모두 고스란히 계승했다. 애초에 조선왕이란 지위란 게 고려 태후가 고려왕을 폐위한 다음 이성계를 고려왕으로 임명하고, 그 고려왕 이성계가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하면서 생긴 지위였다. 반면 고려왕과 신라왕 사이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다. 또한 계승의식으로 따지면 조선은 신라와 고려가 시작한 삼한일통의 완성으로, 정체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모두 골고루 두었다.

신라와 고려가 반드시 국체가 이어져야만 한국사가 이어진다는 생각은 당위성에 몰두된 강박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해낸, 비역사적인 추상적 관념에 불과하다. 한 민족의 국가가 특정 시기에 하나만 있을 수 있다는 관념은 역사학에서 통하지 않는다. 고려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은 나라로서 신라라는 국가를 양도받고 백제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신라가 미완성한 삼한일통을 완성했으며, 이는 더 나아가서는 광개토대왕장수왕한반도에 가졌던 야망과 청사진을 거의 실현한 것이었다.[23] 때문에 고려가 신라를 그대로 이은 나라가 아니라고 민족사가 끊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신라와 고려의 연결성을 과도하게 부각하면서 고려는 그저 이름만 고구려를 이은 나라며 신라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동북공정과 일본 우익의 한반도 비하사관에 이바지하는 위험한 행태가 될 수밖에 없다.


4.1. 신라가 실패한 이유: 극복하기 어려웠던 성공기의 유산[편집]


분명히 신라는 폐쇄적인 고대 사회의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삼한통합을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그렇다고 유독 고대 국가 신라만 다른 한반도 국가들만 못했거나 본디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오늘날의 우리가 폄하해선 안 된다. 이는 배타적인 전제군주정 국가나 소수민족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경우 지금도 '왕가, 지배층>국가'임을 고려해보면 알 수 있다. 현대 국가인 아랍에미리트가 그런 것들과 비슷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 908만여 명 중 11%인 106만 명만이 내국인에 해당하는 시민권자이며 나머지는 전부 외국인이다. 소수의 내국인은 막대한 이익과 복지와 권한을 독점하고 있고 시민권을 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외국인들은 소수의 고학력 고연봉 직업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금이 낮거나 힘든 직종에 종사한다. 물론 이 체제의 경우 어차피 외국인들이 영구정착보다는 본국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에 온 것 뿐이기에 마음에 안 들면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 유지되고 있다.

극단적인 케이스지만 북한도 국가와 국민 자체를 희생물로 사용하여 지배층과 김씨 왕가의 배타적인 이익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이 극단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무역 등 시민사회 성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가보위성을 비롯한 믿을 수 있는 엘리트 관료집단에게 모든 이익을 독점적으로 몰아주어 자국민을 감시하게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순수한 민족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주장하는 모습이 무색하게도 피지배층을 이민족에 가깝게 여기고 있는 모습인데 이러면 당연히 피지배층의 불만이 쉽게 많이 쌓이게 되는 만큼 정국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제를 구태여 유지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지배층끼리는 결속과 동질성이 강한 반면 피지배층에 대해서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특권을 포기하길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외에도 고대사회의 경우 특권유지를 넘어서는 전근대인들 특유의 세계관적인 이유도 있는데 불안정한 정국이 반복되어 지배층들끼리도 서로 죽이면서 싸우는 게 흔했던 전근대 사회에서도 지배층의 사직이나 종교, 문화만큼은 피지배층 혹은 이민족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권력싸움까진 몰라도 그런 것까지 외부세력에게 양보하는 순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 혹은 세계 그 자체가 끝난다고 여겼기 때문.

역시 유사전근대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지배층 또한 자신들이야말로 숭고한 민족의 순수성과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기에 특권을 누리는 것 또한 정당하다고 자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발전과정을 봐도 신라의 경우 삼국 중에서도 특히 배타적으로 발전해왔다. 한반도 세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했던 중원이나 유목 세력과 대적하면서 발전해온 고구려의 경우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유력한 외부세력의 흡수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한국계 이민족은 물론이고 한족이나 유목민도 광범위하게 지배층으로 흡수되었다. 백제의 경우 초창기 잘나갈 때는 몰라도 수도 한성을 잃고 국가멸망 위기에 몰리게 되면서부터는 왕가와 기성 귀족의 위상이 크게 떨어지고 토착 세력을 광범위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여러 이민족을 규합하면서 발전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는 일단 지리적으로도 소백산맥 뒷쪽에 고립되어 있었고, 초창기 발전과정에서 외부 유입세력이 지배층으로 흡수된 이후로는 체급이 비슷하거나 적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한반도 세력들하고만 각축전을 벌이면서 딱히 외부세력 영입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지배층 자체가 쭉 고립되어 있었다.

즉 정리하면 지배층이 극도로 배타적인 집단인 상황에서는 지금의 북한처럼 지배층이 지배층의 번영보다 국가의 안위를 신경쓰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 것이다. 물론 이는 상기한 바와 같이 명백히 망국으로 가는 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도 그럴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왕조가 멸망하는 것이나 외부세력이 광범위하게 유입되어 감히 지배층의 순수한 사회문화가 더렵혀지고 변질되는 것이나 그 고대적 세계관을 가진 배타적인 지배층에게는 세계관의 멸망이란 측면에선 어차피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는 개혁을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천재지변이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배타성을 박살낼 이민족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유입되거나 그들에게 정복당해 사회가 뒤집히거나 혹은 그러한 위협이 발생해 내부적으로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생기거나, 아예 반란 등의 체제붕괴로 해소될 수밖엔 없었을 텐데 신라는 자국 국력이나 사회•문화적 역량으로는 도저히 달성하는 게 불가능했을 삼국통일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외부 세력인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갑작스럽게 달성[24]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섬처럼 고립된 지형에서 오랜 기간 평화가 유지되어 고대국가적 배타성을 극복할 개혁의 드라이브가 발생할 일도 그걸 박살낼 외부세력에게 정복당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기존 신라의 영토 정도야 가야 금관국 지배층(진골)과 진한 소국 지배층들(6~4두품)에게 약간의 특권을 주는 정도로도 고대사회적 배타성을 유지하면서 소화가 가능했겠지만 이미 각자 독자적으로 원숙한 수준의 발전을 이룩하여 높은 사회문화적 역량을 키우고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기존 지배층들에게까지 그런 고대사회적 차별을 적용하면서 신라인으로 동화시키는 건 무리였다.

실제로도 끝내는 연이어 터진 반란을 통해 체제가 붕괴하게 되었고 동화에도 실패해 기존 삼국의 유민의식 또한 그대로 이어져 옛 지도를 거의 그대로 따라 다시 갈라진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단일한 국가의식이 완성된 건 고대국가적 체제를 극복한 고려 대에 가서야였다.

또한, 신라 특유의 배타적인 골품제는 적어도 통일신라 중기부터는 경덕왕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정도로 지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나라가 망하는 1등 원인이 되고 말았으나, 적어도 삼국 쟁패기 때는 지배층 내부 간의 규율을 단속하고 수도와 지방 사이 위계질서를 확고히 세우는 데 도움을 주어 삼국통일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무시할 순 없다. 어느 나라나 문제가 되는 건 왕실 본가와의 대수가 멀어진 끝에 일반 귀족으로 전락한 방계 왕족이나, 지방에서 힘을 키운 호족이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자기네 집안 혹은 지역 이득만 앞세운다는 점인데, 백제나 고구려 모두 이 문제로 꽤나 고생한 편이지만 신라는 피지배층/지배층간 규율이 엄격했던 만큼이나 지배층간 내부에도 격차를 두어 이 구분이 엄격했기에, 적어도 신라는 이런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골품제가 위기 단속에는 도움이 되어도 장기적으론 신라 왕실에 해가 될 수 있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었음을 신라 왕실이 모르지 않았다. 진골의 입김이 미치지 않도록 서라벌과 먼 지역에서 왕실이 직할하는 정예 부대를 육성하기 시작한 게 이미 눌지 마립간 때부터 일이며, 진흥왕 때 서라벌 근위 사단과 서라벌 왕궁 근위대 체제 자체가 완전히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진골은 아예 왕궁 근위대에 장교로든 병사로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는 진골 집단이 신라를 최일선에서 수호하는 집단인 동시에 확장성을 저해하며 왕실도 자기네 계급 이익에 크게 저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해코지할 수 있는 집단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했던 조치였다. 다만 진골 집단의 강한 힘 탓에 무열왕계 왕실은 그나마 삼국통일전쟁 및 나당전쟁으로 얻은 군공과 권위를 통해 진골들을 제어하며 가능한 선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최대한 추진했으나, 다들 아다시피 혜공왕이 살해당하면서 등장한 원성왕계 왕실은 본인들 자체가 그 진골 집단의 일원이었던데다 무열왕계 왕실만한 권위는 가질 수 없었기에 이런 과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다.

그리고 그렇다고 원성왕계 왕실이 개혁에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상술했듯 부족한 권위 아래에서도 노력한 몸부림의 결과가 독서삼품과와 청해진 등이었다. 또한 원성왕계 왕실이 결국은 했어야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백수십 년 동안 미루고 미뤘던 개혁을 특유의 똘기로 불과 5년도 안 되는 사이에 해치워버린[25] 궁예가 끝내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한 걸 봤을 때는, 원성왕계 왕실만 유독 개혁을 못했다고 타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해내야만 하는 급진 개혁이란 게 말로는 쉬워보여도 그것이 본인과 본인 집안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면 누구든 망설일 수밖에는 없다. 원성왕계 왕실도 가능한 선에서는 어떻게든 개혁해서 신라를 이끌어가려 노력했지만, 오랜 고대의 숙명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만약 원성왕계 왕실에 궁예처럼 기득권층인 진골들과 대놓고 정면대결할 용기가 있는 군주[26]가 나타나 개혁을 완수했다면 또 어찌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IF의 영역이다.

[1] 이건 마치 중국의 국가 공동체 통일의 시발점을 닦은 발판의 마련은 진시황의 진나라이지, 최초의 국가인 하나라(실존하지 않는다면 상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2] 신라의 골품제는 그러나 비판의 대상은 맞다. 고구려와 백제의 신분제 또한 어느 정도는 폐쇄적이었으나 신라 골품제는 그보다 심했기 때문. 여성의 속옷까지 제한하는 이 제도는 삼국유민의 진정한 통합에 가장 큰 저해 요소였다. 가장 중요한 성골 핏줄이 끊길지언정 진골을 성골로 격상시키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다른 왕조 같았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효공왕의 즉위가 상당히 잡음이 심했고, 또 역시 동시대 다른 왕조 같았으면 전례가 없었을 진성여왕의 즉위가 가장 큰 예. 선덕여왕이 즉위한 건 그렇다치더라도, 진성여왕의 즉위에 대해 신라 지방 호족이나 당나라 유학파 육두품이 대단히 이의를 제기한 건 그만큼 이런 서라벌 성골관념과 지방 및 지식인들의 정통 의식이 상당 부분 괴리가 있었음을 나타낸다.[3] 당장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서로에게서 느끼고 그 역사적 연원에 근거한 뿌리를 토대로 정체성을 똑같이 형성한 남한북한이 서로 대립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4] 유럽사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더 가까이의 중국, 일본만 해도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 전국시대 등 지역별로 나라를 갖추고 동시기에 여러 나라가 전쟁을 벌이면서 누구 하나가 통일할 때까지 나눠싸운 적이 있다.[5] 당장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페르시아를 끌어들였는데 애시당초 스파르타는 전쟁을 유지할 만한 경제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경제력도 없고 페르시아를 끌어들인 데다가 아테네 이상으로 맹주라며 동맹을 쥐어짠 반면 그 성과는 독차지하려 들었기에 결국 나중에는 동맹이었던 코린트, 테베 등이 이탈해서 스파르타에 적대했을 정도였다.[6] 고려시대도 통일이 된지 200여년이 지났던 무신정권 시기에 신라,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7] 고구려는 애초부터 강자였으니 구태여 외세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고 또 지리적으로도 대한반도 원정을 위해 마땅히 끌어들일 세력도 없었다. 굳이 꼽으면 말갈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고구려에 복속된 피지배민 내지는 용병 비슷한 처지였으니 외세라고 볼 수는 없다. 고구려가 주체적 이라기 보다 외교적으로 굳이 손해 보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8] 사실 지도층이 고구려와 연원이 같은 백제 또한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고 부여는 한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병력을 지원해주었다.[9] 다만 후삼국시대 때 결국 신라가 후손들을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서 고구려의 후예인 고려에게 나라를 넘기긴 했다. 적어도 신라는 후손들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을 수 없는 건 맞다.[10] 궁예와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고려란 국호를 신라, 후백제, 중국, 일본의 인정을 받고 대외적으로 전혀 꿀릴 것 없이 당당하게 내걸은 것 자체가 한국사에서는 큰 사건이었다. 그저 이름만 빌린 건 아니었다.[11] 물론 고구려 영토인 개마고원, 만주까지 신라가 관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12] 신라는 백제를 정복했으나 가야와는 달리 백제 왕실을 신라의 지배층에 편입시키지 못했다. 다만 순순히 나라를 바쳐서 신라의 지배층에 편입된 가락국의 왕족들과 달리 백여년이 넘도록 서로 견원지간으로서 치고 박고 싸운 백제 왕실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장 지난날 누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문무왕이 항복한 부여융의 면전에다 침을 뱉은 것만 봐도 그렇다. 한편, 고구려 왕실의 경우 신라는 고구려왕 안승을 진골 계급에 속하게 하면서 최소한 형식상으로나마 고구려 왕실을 포섭하였다.[13] 단 미완에 그치긴 했어도 통일신라 250년간 삼한은 하나여야 한다는 의식적 통합을 어느 정도 주입시켰기 때문에 후삼국시대가 삼국시대보다 빨리 끝나고 재통일이 가능했다고 의의를 두기도 한다. 비슷한 평가는 중국사에서도 나타나는데 한나라나 당나라 같은 통일왕조의 재분열은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초한쟁패기삼국시대는 아직 춘추전국시대의 지역국가 연고 의식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었다.(분봉왕을 두었던 항우야 말할 것도 없고, "연인 장비"의 연인은 옛 연나라 출신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오랜 통일왕조의 경험 때문에 중국사가 진행될수록 분열이 짧아지고 재통일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14] 고려는 후백제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다지만 고려 또한 신라 왕실에게 저지른 능멸과 월권은 어떤 의미에선 오히려 후백제 이상이었다. 고려와 신라의 후예인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야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신라 왕실 입장에선 고려는 어디까지나 본디는 지방 참칭 반란자에 불과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나중에야 제후왕으로 인정한 후, 그 다음엔 아예 상전인 고려대왕으로 인정했지만 그건 왕건 아니면 선택지가 신라사 최악의 반란군 두목인 후백제의 견훤밖에 없어서 한 마지못한 선택이었다.[15] 다만 여기서 신라를 변호하자면, 백제는 고구려보다 신라와 싸운 역사가 길고 백제 유민들 자체도 나당 전쟁과 그 이후 과정에서 신라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통합에 그렇게 협조적이지 않았던 사정도 있었다. 그러니 신라는 백제 상류층을 고구려 상류층과 동등하게 대우할 이유가 없었다.[16] 분명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유민 의식의 저항 강도나 양상이 달랐음을 간과하는 짧은 견해다.[17] 신형식 교수의 신라 통사 및 충남역사문화원의 백제사 중 백제 유민 편 참조.[18] 이런 논리로만 따지면 일제의 조선 왕족 및 양반에 대한 우대도 대단히 파격적이었고 일제 군인이나 공무원 중에 조선인도 많았으며, 조선인 판사를 모독하는 일본인 법정 공무원이 매우 엄히 일본법으로 처벌받은 사례도 있으니 조선인이 완전히 일제에 융화되어 차별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과연 받아 들일 수 있는가? 프로파간다적 시도를 현실과 혼동하는 게 이렇게 위험천만하다. 일제강점기와 신라 지배기는 경과한 시대와 세대교체의 차이가 있었으니 다르다는 견해가 있으나, 몇 가지 문서적인 근거와 극히 일부의 지배 계급 진출로 동화를 단정하는 견해로만 따지면 오히려 일제야말로 동화에 최선을 다했다는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궤변이 틀렸다는 지적은 경과한 시간과 세대교체를 간과하는 경우가 아니다.[19] 삼국사기 초기 신라 기록에 사로국이 조선 유민이란 기록이 있고 이는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서도 부정할 수 없이 분명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신라 왕실이 이후 고조선에 대해 강조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고구려 또한 초기 집단은 그 왕족 집단 외엔 분명히 모두 고조선 유민이었음이 역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성백제는 약간 얘기가 다르지만 한성백제가 초반부터 통합해나갔던 마한 주류 집단 또한 고조선의 후예들이었다.[20] 한편 고려가 계승을 천명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아닌 단군을 시조로 모신 이유는 고려 중기가 넘어가면서 고구려에 대한 배타적인 계승 의식보다 삼한일통 의식이 더욱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만의 정체성을 초월해 삼한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시조로서 단군을 본 것이다.[21] 태봉-고려는 신라가 간접 지배하던 패서 일대 외에, 신라의 직접 지배지인 임진강 이남 한주 및 명주, 삭주 일대도 판도에 넣고 있었다. 그러나 태봉-고려의 핵심지가 패서 지역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궁예가 이 패서 호족들의 참여를 제한하고 절대 왕권을 키우기 위해 백제계 호족들을 우대하였으나 타도당한 것은, 창업군주라도 벗어날 수 없었던 패서 호족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입증한다. 패서 호족들 및 반패서 내지는 비패서 호족들까지 모조리 탄압하고 처벌하여 고려 왕실만 그 통치하는 나라 전체에 우뚝 세우는 과업은 정종부터 경종까지 이어진 기나긴 과정 후에야 가능하였다.[22] 발해 멸망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발해 유민들의 남하 릴레이는 이어졌는데 혹자는 이 무렵의 발해에 정치적인 소요 사태나 대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기록이 워낙 없어서 그 내막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지만.[23]한국인들이 고려의 재통일에서 고구려 전성기를 떠올리지 않는 이유는 고려와 후대의 조선 왕조가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 북방 고토를 수복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사실 왕건삼한일통을 이룰 고려 초창기만 하더라도 북방 고토에 대한 향수 의식이 남아있었고 고려 왕조 역시 고구려 고토 회복을 중장기적인 국시로 내걸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당시 만주 지역에서는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로 이어지는 유목민족의 전성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고려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고 현실적인 여건상 고구려의 고토 회복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려 초 서희의 강동 6주 회복, 고려 중기의 윤관의 동북 9성 축조 및 말기인 공민왕 대 요동 일시 정복 역시 고구려 고토 회복 의식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고구려 계승 의식은 고려 왕조를 타도한 조선으로도 계승되어 세종대왕4군 6진 개척으로 이어진다. 나라가 망해가던 대한제국 시기까지 조선이 간도 개척에 집착할 정도였다.[24] 그러나 삼국통일을 위한 신라의 노력을 무시한채 당나라 덕분에 운 좋게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는식의 관점은 옳지 못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이루어낸 내부 개혁과 무수히 많은 외교적 노력등 삼국통일까지의 그 과정들을 살펴본다면, 결코 갑작스럽게 삼국통일을 이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25] 패서 및 평양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 관철 그리고 그것에 반항하는 패서 호족 숙청, 진골 관할 토지 몰수 및 지배층 보유 토지에 대한 세금 징수 법제화, 진골 같은 기득권층의 권력 온상이 될 수 있는 병부에서 군령권 완전 박탈[26] 고려의 광종, 조선의 태종이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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