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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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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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과도기
2.3. 전기
2.3.1. 중앙군
2.3.1.1. 중앙군의 구성에 관하여
2.3.2. 지방군
2.4. 중기와 후기
3. 해군(수군)
4. 병력 규모
5. 참전 목록
6. 참고 자료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려의 정규군이었던 고려군에 대하여 서술한다.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초기 고려군은 통합된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동맹군이나 연합군에 가까웠다. 이는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일리천 전투 때는 고려 태조 휘하 친위대 + 고려 호족의 사병[1] + 친 고려 호족의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규모는 사료의 기록상으로는 최대 10만명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 학계내에서도 논란이 존재한다.[2] 고려 왕실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친고려 호족들을 달래주고 중립적인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했다. 여기에다 복속시킨 이민족 부대와 후백제 군대도 있었다. 세력 간 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고려 왕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특히 호족들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도 독자적으로 사병을 거느렸다. 이렇게 중앙이 통제하지 않는 군사력이 지방에 있는 것은 국가적 불안 요소였다. 그래서 고려 조정은 무인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과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 절도사 출신인 송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한을 철저히 약화시킨 것과 흡사하다. 허나 이는 나중에 무신들의 불만이 커져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직위 또한 기록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추측이 가능하다. 사서 및 금석문에 나타나는 직위는 마군장군(馬軍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우장군, 장군, 대장, 내사제군사, 군부서사, 호기위 등이 있다. 편제로는 국왕 친위대인 내군, 북벌군인 개정군, 일리천 전투 당시의 좌강 - 중군 - 우강 삼군 체제, 보천군, 우천군 등 다섯 천 자 돌림 부대가 있었다.


2.2. 과도기[편집]


거란의 침공이 임박하자 고려의 군대는 통합이 촉진된다. 후삼국 통일 이후 호족과 중앙의 갈등도 완화되고 다시 양측의 공조가 이루어졌다.[3] 제3대 임금 정종은 무려 30만 대군을 조직해 광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만 정종이 조직한 광군은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예비군에 가까웠다. 더욱이 이들은 전투부대가 아니라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던 노동부대였기 때문에 예비군이라 부르기 민망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광군이 명시적으로 동원된 기록은 현종 초기 개심사 석탑조성에 동원되었다는 정도이다. 특히 이들은 각 지방의 호족들의 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지휘권도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광군의 구상은 정종이 했을지라도 실제로는 지방의 통치를 맡고 있었던 호족세력에 의하여 조직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처럼 광군의 지휘권을 호족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군에 대한 조정의 통제가 시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 증거가 바로 광군사의 설치인데 그렇다면 정종이 광군의 조직을 통해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은 농민의 역역(力役)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광군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시도는 현종대까지도 계속된다.[4]

한편 정종 및 4대 광종 대에 벌어진 정쟁에 고려군의 지휘체계는 다시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6대 성종은 지방을 정비하고 호족 사병들을 통솔하기 위해 12주목 절도사 군단을 만들었다.[5] 개경을 중심으로 북 황주와 남 양주에 좌우신책군을 만들고 각 지역의 대도시들에 절도사를 파견해 각 군단을 맡겼다. 동시에 중앙군은 광종때 장위부(掌衛部)가 중앙군으로서의 국왕 친위대 노릇을 하다가 성종때에 오면서 호위대의 군수지원을 책임지는 위위시(衛尉寺)로 재편되고 중앙군이 본격적으로 6위 체제를 보이게 된 것도 성종 때로 보인다.[6]

이렇게 고려는 점차 군권을 통일시켰다. 성종은 2군 6위의 기본 틀 및 주진군, 주현군을 조직 및 구상하였고, 7대 목종대에 6위체제가 본격적으로 운용되며, 이후 8대 현종대에 2군(응양군(鷹揚軍) / 용호군(龍虎軍))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정식 중앙군 체제인 2군 6위체제가 현종 때 와서 완비되게 된다. 목종은 절도사 제도를 축소하고, 현종이 이를 완전 폐지하여 지방군 체제를 완성시켰다.

이 과정에서 현종 초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던 광군은 주현군으로 재편되었다. 당시 주현군은 치안·방위를 담당하던 보승(保勝)·정용(精勇)[7] 과 공역을 담당하던 노동부대인 품군(1품·2품·3품)으로 나뉘었는데 이중 광군은 품군에 편성되었으므로 광군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이 세 등급의 품군 중 고려조정의 통계에는 약 2만명의 1품군만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주현군(州縣軍)이라도 중앙으로부터 받는 통제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 주현군(州縣軍)은 공역부대 외에도 호족들의 사병집단들을 통제하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통제의 수준에 따르는 등급 품계별로 중앙통제의 수준을 볼 수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반면에 주진군(州鎭軍) 은 공역이 아닌 전투부대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교대로 번상근무를 했기에 중앙의 통제가 매우 강했다.


2.3. 전기[편집]


고려 전성기의 군제이다. 일반적으로 고려군의 편제라면 이때가 기준이다. 가장 군제가 체계적이었던 시기이고 기록도 자세하기 때문이다.


2.3.1. 중앙군[편집]


고려 중앙군의 병종과 무장은 동시대의 여타 군대와 대동소이했다. 다만, 중앙군은 지방군보다 무장과 훈련의 수준이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종은 크게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었다. 보병은 방패와 칼, 활이 기본 무장이었고, 기병은 칼과 창이 주무기였다.[8] 고려 보병들의 갖춘 장비는 <당육전>에 나오는 당나라군의 장비와 비슷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二軍六尉)였다. 2군 6위외에 별도로 조직된 특수부대도 있었다. 상비군이라 할 수 있는 2군 6위의 총 군사 수는 천 명씩 1령으로 계산하여 총 44령이었다. 즉, 44,000명이었다.

우선, 2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이었다. 이들은 고려 군주의 직할 친위 부대였다. 그래서 6위보다 서열이 높았다. 2군 내에서는 응양군이 용호군보다 서열이 높았다. 응양군은 1령, 용호군은 2령이다. 훗날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도 이 2군이었다.[9][10]

6위는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 여섯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수도 방위군이었다. 전시에는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의 3군이나, 3군에 전군(前軍), 후군(後軍)까지 더한 5군으로 재편되었다. 여몽전쟁 당시 동선역 전투에서 몽골군을 야전에서 격파한 것이 고려의 3군이었다.

5군(五軍)[11]은 임시 편제여서 전후에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5군 편제는 천자는 6군, 제후는 3군 편제를 쓴다는 전통적 편제를 독자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는 문벌귀족이 가장 강성했던 의종 대에 문관들의 견제로 3군(三軍)[12]으로 축소된다. 허나 무신정권이 시작되자 다시 5군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병력에 따라 3군과 혼용되었다.[13]

6위 중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은 고려의 주력 전투 부대인 3위였다. 모두 32령으로 구성되었다. 1령은 1000명으로 3위의 병력은 32령으로 32,000명이었다. 이는 6위 전체 병력의 약 76%였다. 금오위(金吾衛)는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는 일종의 헌병군이었다. 7령으로 구성되었다. 천우위(千牛衛)는 왕실 의장대였다. 상령(常領) 1령과 해령(海領) 1령으로 편성되었다. 마지막으로 감문위(監門衛)는 성문을 경비하는 부대였다. 예하에 1령만 편성되어 규모가 가장 작았다.

2군과 6위의 직렬은 동일했다. 모든 부대가 동일한 직함을 사용했다. 직함 간 상하는 소속 부대로 구분했다. 가령 같은 상장군이라도 좌우위 상장군 > 금오위 상장군이었다. 2군의 직렬에는 추가로 근장, 친종을 붙여 소속을 확실히 구분했다. 시간이 지나며 직렬에 섭직과 가직을 추가해 격차를 늘렸다. 그래서 형식상 9개의 직위가 있었지만 실제론 더 많았다. 검교직이 있어 명예직으로도 수여했다. 가령 척준경의 아버지 척위공은 예종에게 검교대장군 직을 받았다. 진짜 2군6위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명예 대장군 직위였다.

2군 직함은:
  • 근장상장군(近仗上將軍) 정3품
  • 근장대장군(近仗大將軍) 종3품
  • 친종장군(親從將軍) 정4품
  • 근장중랑장(近仗中郞將) 정5품
  • 근장낭장(近仗郞將) 정6품
  • 근장별장(近仗別將) 정7품
  • 근장산원(近仗散員) 정8품
  • 근장위(近仗尉) 정9품
  • 대정(隊正) 종9품

6위 직렬[14]은:
  • 상장군(上將軍)[15] 정3품[16]
  • 대장군(大將軍)[17] 종3품
  • 장군(將軍)[18] 정4품
  • 중랑장(中郞將)[19] 정5품
  • 낭장(郞將)[20] 정6품
  • 별장(別將)[21] 정7품
  • 산원(散員)[22] 정8품
  • 위(尉)[23] 정9품[24]
  • 대정(隊正)[25] 종9품

6위엔 추가로 비전투인원인 행정업무 처리 담당자들이 있었다. 이들도 무반 대우를 받았다.
  • 장사(長史) 종6품
  • 녹사(錄事) 정8품[26]
  • 사(史) 무품
  • 기관(記官) 무품

고려는 총 8명의 상장군과 8명의 대장군이 있었다. 16명의 상, 대장군은 모여 군부를 구성했다. 이것이 중방(重房)이다. 중방의 의장은 반주(班主)란 직함을 썼다. 대체로 응양군 상장군이 역임했다.

고려의 태자 또한 호위 부대를 두었다. 이는 문종 대에 상정되었다. 8솔부(率府)로 구성되었다.[27]
  • 시위상장군(侍尉上將軍)
  • 시위대장군(侍尉大將軍)
  • 각 솔부의 솔(率)
  • 각 솔부의 부솔(副率)

그외에도 의종때 내순검(內巡檢) / 중금군(중금반)(中禁軍(中禁班))라는 호위대를 만들었던바 있으며 의장대로는 도지군(도지반)(都知軍(都知班)) / 은골타자대(銀骨朶子隊) / 은장장도대(銀粧長刀隊) / 방패대(防牌隊) / 청유대(淸遊隊) / 현무대(玄武隊)라는 의장대가 존재했다.#


2.3.1.1. 중앙군의 구성에 관하여[편집]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 시대의 중앙군 소속의 군인들은, 복무 방식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1. 중세기사처럼 세습적으로 군인 신분이 유지되는 방식.
2. 평상시는 농민이었다가, 순서가 되면 정해진 연수만큼 복무하는 방식.

1번의 경우 세습적으로 군인을 하는 직업군인들이 월급을 받으면 수도에서 근무하는 경우이며, 2번의 경우 평상시에 농사를 짓던 일반 농민이, 때가 되면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도로 오는 경우이다. 때문에, 항상 개경에 거주할 필요가 없고, 군역의 의무를 수행할때만 거주장소와 월급을 주면 된다.

고려의 중앙군은 1, 2번 모두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2개 다 사료에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1번을 군반씨족제설, 2번을 부병제설 이라고 통칭한다.

먼저,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문종18년) 병부에서 아뢰기를, ‘군반씨족의 장적(帳籍)이 작성한 지 오래되어 낡고 썩었습니다. 때문에 군인의 수효(軍額)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방식에 의거해 그 장적을 다시 만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고려사》권 8, 세가8, 문종 5년 윤 5월


여기서 '군반씨족의 장적'은 누가봐도 군반씨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1.최소 4만 5천 명(2군 6위의 서류상 총원수)이나 되는 군인들이 개경에 모두 거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고려 개경의 평상시 인구가 약 30만~50만호로 추정되는데, 이 군인들의 가족까지 쳐서 숫자를 계산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온다.
2.월급이 너무 많다.
보통 군인들에게 월급으로 땅 20결을 주었는데, 4만 5천명에게 준다고 하면 90만결이 된다. 근데, 고려말인 공양왕 대에 한 토지조사 결과가 79만 8천 118결이었으므로,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개경 인구의 최소 절반이상은 군인이었고 고려 정부 예산의 90%이상이 군인월급으로 지급되었다는 소리가 된다.

다음으로 부병제설의 사료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는 삼한을 통일하고 비로소 6위를 두었는데, 위에는 38領이 있고,領에는 각기 천 명씩이 있으며, 상하가 서로 유지되고 >체통이 서로 연속하니, 당의 부위제도를 방불하였던 것이다

《고려사》권 81, 志35, 兵1, 序


(고려는)나라 안에 개인 사유지(私田)는 없다. 백성은 가족수에 따라 役을 부과받으며 16세가 넘으면 군역에 충당된다. 6군3위는 >항상 관부에 머물러 있다. 3년마다 선발되어 서북의 국경지대를 파수하는 군인들은 반년마다 교대된다. 군인들은 비상시에는 >무장을 하고 役事가 있을 때에는 징발된다. 일이 끝나면 농사처로 돌아간다

《宋史》권 487, 列傳246, 外國3, 高麗


(문종) 4년 10월 도병마사왕총지가 상주(上奏)하였다. ‘傳에 이르기를 안전할 때에도 위태로운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는다 하여방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諸衛의 군사들은 국가의 爪牙이니 마땅히 >농한기에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

(《高麗史》권 81, 志35, 兵1, 兵制문종 4년 10월).


(고종 4년 10월) 安東․慶州․晋陜州․尙州․靈岩․羅州․全州․楊廣州․淸州․忠州등 10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諸州의 土貢을 독촉하고 또 >겨울옷을 가지고 오겠다는 이유로 귀향했다가 오랫 동안 번상(番上)하지 않는 군인들에게 빨리 서울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였다

《高麗史》권 22, 世家22, 고종 4년 10월).


그러나 부병제설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는데, 먼저 부병제설에서는 군역을 수행하는 농민에게 군반씨족제설처럼 땅을 주진 않지만 대신 농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땅에 대해 면세권을 준다. 고로 중앙에서 복무하는 농민, 군역을 하는 대신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면세지를 줘도 똑같이 90만결을 줘야 한다는 군반설과 비슷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이렇게 두 설이 대립하던 중 결국 여느 고려 관련 학설이 그러하듯 둘을 합쳤고, 고려 중앙군은 월급을 받는 세습제 직업 군인 + 때가 되면 중앙으로 올라와 근무하는 농민으로 구성되었다는 군반씨족제설 + 부병제설 = 경외군 혼성제설이 탄생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이렇게 하자 상당수의 문제점들이 해결되었고, 이렇게 경외군 혼성제설이 자리를 잡는듯 했으나... 중요한건 사료가 없다. 즉, 상상력이 사료를 이기게 된 것이다.


2.3.2. 지방군[편집]


지방 5도는 주현군(州縣軍), 양계 지역은 주진군(州鎭軍)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양계인 북계와 동계에는 대규모 정예군을 상시 배치했다. 여진족이나 거란족과 인접한 북방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계 지역에는 주진군 뿐 아니라 3위인 좌우위(左右衛), 흥위위(興威衛), 천우위(千牛衛)도 주둔했다. 다른 주현군은 군역보단 요역이 위주였던 데 비해 주진군은 군역이 위주였다. 주현군과 주진군은 모두 호족들의 사병이었던 광군(光軍)이 국가의 상비군으로 전환된 것이었으며 중앙통제에 따라 주현군은 품계의 등급별로 중앙통제의 범위를 보였으며 주진군의 경우에는 중앙통제가 주현군보다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현군은 앞서 얘기된 것처럼 보승(保勝)·정용(精勇)과 더불어서 1~3품군으로 구분화되었으며 주현군의 경우 1품군의 경우 중앙정부가 군역이 파악되는 인원들이었던 반면에 2/3품군은 중앙통제에서 군역이 잘 파악되는 인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2/3품군은 상대적으로 무작위 착출적 성격을 지니며 호족들의 사병적 역할이 강했던 반면에 1품군은 1년 근무로 2교대를 가을에 하는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주진군의 병종은 북계의 경우 초군(抄軍)·정용(精勇)[28]·좌군(左軍)·우군(右軍)·보창(保昌)과 신기(神騎)·보반(步班)·백정(白丁) 등으로 구성되고, 동계는 초군·좌군·우군·영새(寧塞)와 공장(工匠)·전장(田匠)·투화(投化)·생천군(鉎川軍)·사공(沙工) 등으로 구성되었다. 북계에는 정용이 있는 주·진에는 초군이 없고 초군이 있는 주·진에는 정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양군은 동일한 병종의 다른 명칭으로 추측된다고 한다.주진군/주현군

이들 주진군과 주현군의 최고 지휘는 정5품 중랑장(中郞將)이 맡았고 최하위 지휘계급은 종9품 대정(隊正)까지의 장교로 구성되었으며 주현군의 경우에는 수령을 비롯한 정7품 별장(別將)이 지휘하며 최하위 지휘계급은 정9품 교위(校尉)가 담당했다. 대부분 지방의 향리등의 세력가들이었고 특히 주현군은 품군에 따르는 군인전이 지급되었다.

큰 틀에서의 고려군에 관한 기록이 미비해서 지방군의 편제 역시 깊이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진-주현군말고도 독자편성체제의 군대들이 확인되는데 대표적으로 서경군에는 좌영과 우영 두 부대와 그 산하에 감군(監軍)이 있었다. 감군 밑엔 또 맹군(猛軍)과 해군(海軍)이 있었다고 한다.


2.4. 중기와 후기[편집]


그러나 무신정변으로 전기 고려군의 체제가 모두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신정변자들끼리의 소모정쟁과 여러가지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중앙군 편제나 지방군 편제는 점점 축소 유명무실화되어갔고 무신 집권자들의 사병기구인 도방(都房)이나 삼별초(三別抄)와 같은 사병 집단들에 의해서 명부상의 편제 조직이나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게 된다. 당장 친위대인 공학군/견룡군/순검군조차도 점점 수가 줄어들어 명종때 편성된것으로 보이는 위국초맹반(衛國抄猛班)[29]이라는 맹군(猛軍) 소속의 병력들로 재편성을 해서 2군 6위의 업무를 할 정도였는데 이들 규모가 고작 400여명에 불과했다.[30] 특히 최씨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편제는 형식만 남고 사문화되었고 그저 관직명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관직 자리에 불과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고 앞서 언급된 도방(都房)이나 삼별초(三別抄)같은 무신집권자들의 사병집단이 이들 편제를 흡수하면서 정식 중앙군으로 체제가 전환되며 정규군 노릇을 했다. 그로 인하여 고려대몽항쟁은 제대로된 조직적인 저항과 이전의 여요전쟁이나 여진정벌전과 같은 대규모 정규군이 동원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중앙군이 이런 상황이니 지방군인 주진군-주현군의 전투병력 핵심인 보승(保勝)·정용(精勇)의 보병-기병도 규모가 축소된다. 특히 보병에 비견되는 보승은 노역부대인 1~3품군과 차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대몽항쟁 이후에는 원의 간섭으로 인하여 아예 대규모 정규군은 보유가 사실상 금지당하면서 2군 6위체제의 부활이나 군제개편은 꿈도 꿀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원종기인 무신정권 말기에 중앙군으로는 친위대인 후벽(後壁)이 존재했으며 이들 수장을 무신관료로 후벽장군(後壁將軍)이 맡았다.[31] 동시에 삼별초의 난으로 인하여 고려는 처음부터 군사제도를 재정비해야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원의 간섭과 통제에 의하여 겨우 재편 할 수 있었던 군사제도는 임금의 친위부대인 홀치(忽赤)[32]와 용호군이 재조직된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충선왕기에 용호를 호분(虎賁)으로 고쳤는데, 그 후 친어군(親禦軍)으로 고쳤고 그 후에 또 다시 용호군 편제를 구성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술될 것처럼 이 용호군은 원 만호부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홀치를 중심으로 몽골식 관제의 영향을 받은 우다치(亐多赤)/조라치(詔羅赤)/내속고치(內速古赤)/팔가치(八加赤)/겁설(怯薛)&겁설관(怯薛官)/파오치(波吾赤)라는 고려왕 직속의 숙위군 및 중앙군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했으나 당연하게 몽골의 만호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지방군으로는 농민들을 강제징집한 익군(翼軍) 밖에 없었고 이는 카다안의 침입에서 고려군이 제대로된 전력을 대응하지 못하고 에 군사를 청하는 등의 군사력이 사실상 없는 수준으로 심하게 쪼그라들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군사훈련조차도 의 통제를 받아야했기에 사실상 할 수 없었다. 당시 그나마 남아있는 고려 중앙군 혹은 관군을 통제할 목적으로 은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고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병관(兵官)들이 존재하거나 몽골군 편제에 소속되는 형태였기에 위에 언급된 고려 왕실 직속의 중앙군들은 정말 소수의 호위-숙위 병력들이고 그 대부분은 이러한 의 만호부나 정동행성과 같은 원나라의 고려통제목적의 관청에서 통제 받았다.[33] 익군이 고려 정규군으로서의 그 명맥을 이어가는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게 허약해진 국방력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라는 사태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망가진 고려군은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 반원정책과 더불어 기존의 원나라식 중앙군 제도를 전면개편하게 되며 충용위(忠勇尉) / 근시위(近侍尉) / 별보위(別保尉) / 자제위(子弟衛) 4위가 친위대겸 중앙군으로서의 역할 기능했다. 이 총 4위에는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위장(尉長), 대장(隊長) 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고려가 한참 쇠퇴할 때라서 고려 전기와 같은 전면전이 가능한 체계적인 중앙군과 지방군 제도는 완전히 부활하지는 못했다. 중앙군이 4위체제로 부활을 했으나 결국 전면전을 치루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전력이었고 그나마 중앙군 규모만 겨우 왕실 및 도성방어만 겨우 가능한 수준으로 확대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공양왕 대까지는 최영과 이성계를 포함한 신흥 무인 세력의 사병[34]과 다를 바 없는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이 정규군 역할을 했다. 그 외 훗날 의금부로 이어지는 순군만호부 또한 존속하며 헌병군 역할을 수행했다.


3. 해군(수군)[편집]


고려 초기~ 중기에는 과선(戈船)을 전투함으로 사용했고 대몽항쟁이 끝나는 원간섭기 시점에서는 누전선(樓戰船)을 주력 전투함으로 이용하였다. 왕건이 태봉의 장군으로 있던 시절에 만든 배는 갑판에서 말을 달릴 수도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삼남 지방에 수백 척의 정규 함대를 체계적으로 육성해 수만 규모의 해군을 상하번으로 운용한 조선 수군과 달리, 고려는 중앙의 수천을 제외하고는 필요할 때 민간 선박을 징발해 급조하는, 즉 정규군으로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35] 차이가 있다. 이유는 비용 문제로 여겨지는데, 건국 초기부터 거란이라는 강력한 국가를 주적으로 상정하다 보니 모든 군사력이 개경과 북방에서 육군을 중심으로 짜여졌다.[36] 추정 인구 300만으로 30만 군대를 끌어모은 고려는 중앙과 북방의 병력 유지에 현지 물자뿐 아니라 삼남의 물자도 투입해야 했으니 대규모 해군을 상시 유지할 순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수적으로 규모가 조선 수군에 비해 작은 것과는 별개로 중앙군에 별도의 편제를 만들어 놓을 만큼 위상 자체는 낮지 않았다. 개국 초기부터 후백제와의 전투에 수군을 동원해 나주를 공략하기도 했던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지방에는 선병도부서라는 수군 관서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시인 진명현(鎭溟縣)과 존재했고, 지금의 경상도 동해와 남해 일대의 예주(禮州: 영덕군 영해읍), 울주(蔚州: 울산), 양주(梁州: 양산), 금주(金州: 김해) 등 4곳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慶州)와 아울러 동남해도(東南海道)라는 행정구역을 정하고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를 두어 해안 방어와 대일 교섭을 맡았는데, 마찬가지로 1049년1060년 쓰시마 섬에서 표류해 온 고려인들을 김해를 통해 고려로 돌려 보낼 때에도 동남해선병도부서가 관련 업무를 맡아 조정에 보고했다.

동남해선병도부서의 본영은 이후 문종 때에 경주에서 김해로 옮겨진다. 초기 선병도부서의 해안 방어의 대상은 왜구 그리고 여진족 해적이었는데, 고려로부터 '동번'이라 불리며 고려 조정에 조공하고 관직도 받아갔던 이들은 현종 때에는 고려 거란 전쟁으로 동북변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지금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경상도에 이르는 한반도 동해안 군현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1019년 여진족 해적이 고려 해안은 물론 일본의 쓰시마와 이키 및 다자이후까지 쳐들어가 약탈을 벌이고 인민을 납치해 가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귀환하던 이들 해적을 동남해도부서 소속 고려 수군이 그 귀환하는 길에 공격해서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인 259명을 구하여 김해를 거쳐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일본은 다자이후까지 쳐들어와 인민을 약탈한 해적의 주체 및 배후가 고려가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이들 해적이 약탈한 포로 가운데에는 고려인도 많았던 데다[37] 결정적으로 고려 수군이 이들을 진압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인들을 구출해 돌려 보냄으로써 서로 관련이 없음을 인증했다. 일본을 공격했던 해적의 정체가 여진족이며 고려에서는 '도이'라고 불리는 족속들이라는 것도 진작에 일본측이 해적의 침공 당시 잡은 고려인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하지만 일본 조정은 도이 해적은 고려 수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뒤에도 예전 신라 해적들이 일본 서해를 휩쓸며 일본 조정의 견면을 약탈했던 과거도 있고,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하는 애들이니 이번 도이라는 것의 침공도 고려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며 고려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않았다. 도이 해적과 약탈을 함께하다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 고려인이 세 명 끼어 있기도 했고.

조위총의 난 때 상설 편제 해군을 거느린 서경군과 개경군이 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고려 수군은 치명타를 입었으나 삼별초가 유명무실해진 중앙군 조직을 대체해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재건했고 몽골과의 전쟁으로 강화도로 도읍이 옮겨가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고려 해군의 항해술은 몽골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 원정 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 수 있다"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그러다 고려 후기에는 나라가 기울면서 해군도 완전히 쇠퇴하며 유명무실해졌다. 배는 조운이나 대외 교역을 위해서라도 계속 만들어졌으므로 항해 기술 자체는 보전하고 더욱 진보했다고 하지만, 그 배를 사용할 수군을 양성하는 데 있어서 원나라의 눈치를 많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원으로 도망친 고려인들이 걸핏하면 "고려 조정은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강화도로 들어갈 틈만 노린다"고 참소를 거듭해 원에서 아예 고려의 선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도 고려사에 남아 있을 정도다. 선천적으로 해상전에 쥐약이기도 했고, 고려가 대몽항쟁을 명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나 이후에도 삼별초가 바다를 옮겨 다니며 해상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등 고려의 바다에 결코 좋은 기억은 없었던 원은 고려가 강화도로 들어가겠다는 말만 나와도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원의 눈치를 보며 수군을 제대로 양성하지 어려웠던 환경상의 약점은 이후 그것이 노출되면서 고려 후기의 사회를 제대로 흔들어 놓는다. 14세기 원의 퇴조 및 일본에서의 정세 변동으로 초래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고려는 제대로 된 수군을 갖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왜구를 제대로 막지 못하여 심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최영을 중심으로 고려군 수뇌부는 해군을 재건하는 걸 넘어 확대, 증강하기 위해 사력을 기울였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가 도입되고, 정지에 의해 수기신호 체계가 정착했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정립된 대 왜구전 교리는 진포 해전관음포 전투에서 왜구들을 격파하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제해권을 되찾게 만들었고 박위대마도 정벌을 거쳐 조선 수군으로 이어진다.

'해군'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직제에서 해군장군(海軍將軍),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 등 해군(海軍)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있는 것. 이밖에도 수군이나 선사(船師), 선병(船兵)이라는 용어도 같이 쓰였다.

4. 병력 규모[편집]


고려의 병력 동원력은 전근대 한국사 왕조들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역사서에도 고려가 외침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여러 차례 동원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사서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일 뿐이며 실제 고려가 동원한 병력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라고 보는 주장크게 과장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이 둘 다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 태조는 8만 7,500(고려사)에서 10만(삼국사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였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오늘날의 학계 일각에서는 실제 동원된 병력은 훨씬 더 적었다고 추정하는 견해 또한 분명 존재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신편 한국사》의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 구조》 중 군사 조직 편에서 해당 파트의 집필자인 조인성 교수는 이러한 기록들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전쟁사에 흔히 나타나는 병력 과장 사례[38]의 하나로 보았다. 조인성 교수 외에는 정경현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먼저 한적이 있다.[39]

반면 고려 초기 군제사나 후삼국 통일 전쟁사와 같은 주제에 천착한 이기백(고려병제사연구), 김갑동(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임용한(전쟁과 역사 1), 이도학(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류영철(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연구) 등 주요 연구자들은 저와 같은 사료상의 수치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려처럼 열에 하나가 군인인 준병영국가화된 케이스가 전근대 동아시아사에 아주 드문일도 아니었다. 조위와 대치한 촉한도 열에 하나가 군인으로 추정되며, 인구 1억의 송과 적대한 추정인구 3~500만 서하는 장정들도 모자라서 전쟁포로와 외국인 용병, 여군들까지 정규편제로 존재했으니 고려 이상으로 심각했다. 압도적인 체급의 국가를 적국으로 돌렸을때는 이런식으로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켰다.

여요전쟁등의 국토방위전쟁에서 실제로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였을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병력중 상당수는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훈련을 받는 부병의 수준도 못되는 말 그대로 농사나 짓다 창하나 쥐고 급조되어 끌려온 잡병수준이었다.[40] 당장 위에 서술되어있는 전기 고려군의 편제만 봐도 정규군이라 할수 있는 2군6위의 장부상 병력이 4만5천을 넘지 못했고 이조차도 군인전의 부족으로 붕괴되어 갔다. 대규모 외침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이 정도 규모가 고려가 보유한 인적, 물적 자원의 최대 한계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육군
    • 후삼국시대일리천 전투: 8~9만명(기병 4만 7천 5백기/ 보병 약 4만명). (상술한것처럼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수치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 정종 시기 예비군 광군: 30만명[41]
    • 여요전쟁: 2차 30만명[42], 3차 20만명[43]
    • 여진정벌: 본대 별무반 17만명
    •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1차: 1만5천여명
    • 삼별초의 난: 1만명(정부군)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차 1만4천7백명, 2차 2만7천명
    • 홍건적의 난: 제1차 2만명, 제2차 20만명
    • 제1차 요동정벌: 오녀산성 공격 1만 5천여 명
    • 목호의 난: 25,605명
    • 제2차 요동정벌: 5만명(전투병 3만8천명), 군마 2만필

  • 해군
    • 정종 시기에 예성강의 함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 삼별초의 난 시기에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며 징발한 함선은 1천여척이나 되었다. 정부군이 탐라정벌을 위해 동원한 함선은 160척이다.
    • 원나라의 일본원정의 시기에 고려수군은 함선 900척[44]을 동원하였다. 이 많은 함선을 고작 4개월 동안 3만 5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제작하였다.
    • 1366년 전라도도순문사 김유는 전선 100척으로 탐라의 목호를 정벌하려하였고 1374년 목호의 난 정벌시에는 병선 314척을 동원하였다.
    • 이작도해전에 고려 해군은 전선 80척을 동원하였다.
    • 정지관음포 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47척을 동원하였다.
    • 최무선진포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100여척을 동원하였다.
    • 제1차 대마도 정벌에 전선 100척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병력동원이 얼마간의 과장이 섞였음을 고려하더라도 고려는 때때로 상당한 규모의 대군을 동원하였는데 이런 대규모 병력 동원은 고려가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지방분권제에 가까웠던 덕분에 가능했다. 이런 정치 구조는 조선과 고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고려의 지방은 향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개국 초의 소위 호족이란 집단에서 분화한 이들은 고려 조정에 세금만 올려보내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으며 촌락별, 읍별 방위체계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지방은 독자적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특히 양계(북계, 동계) 지역은 사실상 전 남성인구가 현역/예비역 군인이고 모든 마을과 촌락이 요새화되어 있었다.[45]

하지만 이러한 군제는 지방이 중앙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험요소를 품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 정규군은 몽골의 침공 전에 이미 묘청의 난조위총의 난으로 심각한 내란에 시달렸다. 내란의 여파가 워낙 심해서 여몽전쟁 때 제대로 된 전쟁 수행도 힘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조휘, 탁청, 이안사처럼 적국과 기득권을 보장받으려는 지방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지방이 배신할 위험도 컸다. 좋은 예로 여요전쟁때는 강조가 패했을때 현종이 수도를 버리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파천하는데 지방에선 지원군을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대군을 동원하고 나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각기 다른 집단에 속한 무장집단을 긁어모은 형태이다보니 일률적인 지휘가 쉽지 않았다. 상장군과 대장군들의 합좌기관이었던 중방에서 하듯이 야전에 나서서도 지방군대의 사령관들과 합의를 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을 끌어내야할 책임이 총사령관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총사령관과 사령관들 간의 합의가 실패하거나 사령관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것이다. 1차 여몽전쟁때의 안북성 전투는 대표적인 합의 실패사례인데 흔히 딸이 최우와 재혼한 대집성이 자신의 뒷배로 다른 지휘관들을 찍어눌러 성밖에 나가싸우려다 패한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최우 덕을 본 부분은 패전 후 처벌을 받지 않은 부분이다. 대집성이 최우의 권위를 내세워 다른 지휘관들을 찍어 눌렀다면 전투 당일 다른 진주와 지병마사가 성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대집성 혼자 나가게 놔둔 점이나 채송년을 비롯해 살아남은 지휘관들이 별다른 문책 없이 넘어간 점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물론 고려의 군제에는 이렇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장점도 많았다. 우선, 중앙과 지방의 공조가 원활하기만 하면 병력 동원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중앙정부가 무리해서 행정력이나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도 지방으로부터 병력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의 방위체계에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 지방이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어서 외침에 한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조선보다 부족한 인구와 생산력으로도 외적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조위총의 난을 거치며 고려군은 주력군이 대거 소모된 상태에서 1차 여몽전쟁을 맞아 개경의 중앙군이 괴멸되고, 북계는 적을 막고 군사를 징발하는 체계 자체가 소멸되었기에 이어진 전쟁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어진 전쟁으로 주현군까지 차례차례 각개격파 당하며 고려군의 영광은 막을 내린다. 단순히 병력만 소모된게 아니라 전시과로 대표되는 기존 경제 체제 자체가 무너진터라 중기 이후론 말그대로 동원이 필요하면 나라를 거덜내고 백성의 피고름을 쥐어짜 군대를 유지하는 방식이 이어졌고 말기엔 상설화된 원수직이 제각기 특정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지방의 군대가 군벌화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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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전 목록[편집]


※ 순서는 연대순대로 전쟁명, 상대명, 상대편의 병력순으로 기재함.


  • 여요전쟁
    • 상대세력: 거란족
    • 상대병력
      • 1차: 80만명(거란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6~8만명으로 본다.)
      • 2차: 40만명(거란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20만명으로 본다.)
      • 3차: 10만명


  •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 상대세력: 후요
    • 상대병력: 불명[46]

  • 여몽전쟁
    • 상대세력: 몽골족
    • 상대병력[49]
      • 1차: 3만명[47]
      • 2차~9차: 불명(최대 3만명 이하로 추정[48])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50]





  • 나하추의 침공
    • 상대세력: 나하추
    • 상대병력: 수만 명


  •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침입
    • 상대세력: 여진족
    • 상대병력: 불명

  •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의 침입
    • 상대세력: 원나라
    • 상대병력: 불명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 상대세력: 왜구
    • 상대병력
      • 1350년 제1차 순천부 침입: 100여척
      • 1350년 제2차 순천부 침입: 66척
      • 1350년 합포 침입: 22척
      • 1351년 자연도, 삼목도 침입: 130여척
      • 1352년 합포 침입: 50여척
      • 1363년 수안현(守安縣)[51] 침입: 213척
      • 1364년 갈도(葛島)[52] 침입: 200여척
      • 1364년 진해 전투: 3천여명
      • 1374년 합포 전투: 350여척
      • 1376년 부령현(扶寧縣) 침입: 50여척
      • 1376년 홍산대첩: 불명
      • 1377년 제주도 침입: 200여척
      • 1377년 하동군 침입: 40여척
      • 1377년 김해 침입: 130여척
      • 1379년 진주 침입: 보병 2천여명, 기병 7백여기
      • 1380년 홍주 침입: 100여척
      • 1380년 진포해전: 500여척
      • 1380년 황산대첩: 불명
      • 1383년 관음포 전투: 120여척
      • 1385년 함주(咸州)[53] 침공: 150여척

  • 여진족 장수 호발도(호바투: 胡拔都)의 침입
    • 상대세력: 여진족
    • 상대병력: 최대 기병 4만기로 추정[54]

  • 목호의 난
    • 상대세력: 목호[55]
    • 상대병력: 기병 3천여기 이상




6. 참고 자료[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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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금필, 홍유, 배현경 등등.[2] 일리천 전투 참조. 고려사에서도 10만명을 동원했다고 기록된건 후백제를 확실히 멸망시키기 위해 출정한 마지막 일리천 전투때 뿐이고, 그 이전에는 대부분 한 전투에 1만~3만명 정도를 동원한게 일반적이다.[3] 최언위의 아들인 최광윤에 의해 거란의 침공 계획이 탄로났다. 최광윤은 오월에 유학갔다가 거란에 포로로 붙잡혔는데, 거란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높게 사 벼슬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란에서 관리 생활을 하던 최광윤이 거란의 고려 침공 의도를 알아채고 고려에 이를 밀고했다.[4] 현종 초기 개심사 석탑 조성에 동원된 광군을 지휘한 것도 향리세력들이었다.[5] 성종 문서의 군대 편제 재편 항목 참조.[6] 6위는 광종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7] 보승은 보병 정용은 기병 편제로 보는 경우가 있으며 차후 주진군의 경우에는 정용을 초군(抄軍) 또는 초정용(抄精勇)으로 분류했다.[8] 출처: 고려의 무비(武備)와 전투, 한국콘텐츠진흥원[9] 무신정변을 일으킨 2군은 군주의 직할 부대였는데, 말하자면 군주의 직할 부대가 군주를 배반한 것이다.[10] 군인 주체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군반씨족설, 부병제설, 절충설 등이 존재한다. 출처 역사비평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 비평사, 2009년, p188 - 189[11] 중군(中軍)-전군(前軍)-후군(後軍)-좌군(左軍)-우군(右軍)[12] 중군(中軍)-좌군(左軍)-우군(右軍)[13] 3군으로의 완전 적용은 공양왕때이다.[14] 다만 오늘날과 똑같지 않은 부분도 꽤 있다. 오늘날의 육군 대장은 조선시대의 정2품 판서급에 준하는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15] 대장쯤 해당된다.[16] 당시는 병부상서도 정2품이 아닌 정3품이었다.[17] 중장쯤 해당된다.[18] 준장 내지 소장쯤 해당된다.[19] 대령쯤 해당된다.[20] 중령쯤 해당된다.[21] 소령쯤 해당된다.[22] 대위쯤 해당된다.[23] 중위쯤 해당된다.[24] 사극에서는 위를 교위라고도 한다.[25] 소위쯤 해당된다.[26] 유명한 이자연척준경이 이 녹사 직을 위임했었다.[27] 수춘궁 문서의 태자부 항목 참조.[28] 초정용(抄精勇)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기병부대로 비견되는 경우로 본다. 보승(保勝)은 보병.[29] 별무반이라는 표현에서도 있듯이 고려군에서 반(班)이라는 편제는 특수목적으로 만든 편제 단위라고 할 수 있다.[30] 다른 호위반들인 견룡반, 중금반, 도지반, 백갑반들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호위군 전력은 위국맹초반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1] 귀족자제들인 세가의 제자들이 맡았다고 한다.[32] 충렬왕원종 15년에 에 볼모로 다녀온 의관 자제를 모아서 만들었으며 편제로는 홀치청(忽赤廳)을 중심으로 임금의 호위를 맡은 군사는 대전홀치(大殿忽赤), 세자의 호위를 담당한 자는 세자부홀치(世子府忽赤)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는 4번(番)으로 구성했다가 원종 16년에 3번으로 다시 축소개편후 충렬왕 즉위후에는 4번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33] 이때문에 권문세족과 같은 친원파들이 중앙군 병력을 이용해서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며 아래 언급되는 공민왕기에 여러차례 반란과 친원파 숙청등을 통하여 이 문제가 개선된다.[34] 대표적인게 이성계의 사병인 가별초가 있다.[35] 재미있게도 정규 수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은 일본도 비슷했는데, 지방 권력이 중앙 정부보다 강했던 일본도 정부 주도로 체계적인 정규 수군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해상 활동에 종사하던 아마비토(海民)라 불리는 바닷가 주민들을 현지 고쿠시나 슈고들이 휘하에 조직화해서 해상 무사단을 꾸렸으며 필요할 때마다 소집해서 이용하는 식이었다. 단지 정규 조직으로써 해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만 가지고 고려의 해상 국가로써의 면모를 과소평가 내지는 과장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36] 조선의 경우는 개국 군주부터가 왜구 토벌의 공적을 바탕으로 민심을 얻었고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의 명분에도 왜구가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왜구 방비 문제에 싫어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명나라를 명목상 대국으로 섬기겠다고 천명한 판에 북쪽으로 명나라와의 국경에 병력을 투입하기는 어려웠다.[37] 도이가 일본에 출몰하기 1년 전에 울릉도의 우산국이 도이들에게 공격을 당해 아예 나라 자체가 멸망해 버렸다. 이때 우산국 난민들은 고려로 도망쳐 왔고, 고려가 울릉도라는 섬을 직접 관리하게 된다.[38] H. Delbrück, History of the Art of the War within the Political Framework, Vol. 1:Antiquity, trans. W.J. Renfroe, Jr. (London:Greenwood Press, 1975), 30쪽 이후 참조.[39] 정경현, 고려 태조의 일리천 전역, 한국사연구, 1988[40] 군역을 지지않는 농민층을 백정(白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이들도 전쟁에 투입되었다.[41] 실제로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동부대였다.[42] 통주 전투에서의 동원 병력이다. 통주 전투는 한국사에서 가장 큰 회전이었다. 고려군 30만과 거란군 20만, 도합 50만 대군이 싸운 대회전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고려군의 참패였다.[43] 귀주대첩에 동원된 병력이다. 고려군 20만명과 거란군 10만명이 격돌해 도합 30만 대군이 싸운 회전이었다. 이 전투는 고려군이 승리했다.[44]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다.[45] 고려시대 수묵화인 독화로사도나 고려도경 등에 단편적으로 남은 기록을 검토해보면 고려시대의 촌락은 평지가 아닌 산이나 골짜기 같이 방어하기 편한 지형에 형성되어 있었을 확률이 높다. 조선처럼 평지에서 농사짓지 않았다.[46] 유민 9만명이 넘어 왔다고 한다. 9만명 전부가 군인은 아니라해도 엄청난 숫자이니 실 병력도 수만은 되었을 것이다.[47] 3만은 고려를 침공한 몽골 병력의 최대치다. <고려사절요>에 "삼군이 동선역에 진을 쳤는데 돌연히 8천여 명의 몽골군사가 급습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몽골군이 3개 부대로 편성해 진격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몽고군의 수는 대략 24,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48] 고려와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보여지는 몽골군의 침공 병력은 많아야 대게 1만명 남짓이다. 결코 3만을 넘어갔던 적이 없었다.[49] 대체적으로 최대 3만 이하의 병력으로 침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50] 1차 원정에서 몽골군의 지휘관 훈둔이 말하길, "비록 몽골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51] 현 김포시[52] 현 하동군[53] 현 함흥시[54] 실록이나 고려사 등에서는 이 당시 호발도의 군사 규모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것도 아닌데, '이지란신도비'에서는 당시 호발도가 동원했던 병력이 무려 4만 기병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55]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