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신라 (문단 편집) == 군사 == [include(틀:역대 한국의 군사조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 갑옷과 투구.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 말머리 가리개.png|width=100%]]}}}|| ||<-2> {{{#000,#fff {{{-1 신라 초의 갑옷과 말머리 가리개.}}}}}} ||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기록을 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총사령관인 국왕이라도 6부병 부하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는데 이는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대표였지 그들 모두의 위에 초월적으로 서는 위상은 아니었던 게 이유다. 하지만 나물 마립간 때부터 슬슬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찍어눌러서 씹어버리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는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나물 ~ 소지 마립간 때까지 신라 임금들이 걸핏하면 딴지를 걸어대는 진골들에게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늘날 경북 서남부, 충북 남부 추풍령 일대를 왕실 직할령으로 키우면서 그 일대에서 진골들과는 무관한 정예 부대를 육성한 게 이유다. 이후로 지증왕 때부터 등장하는 습보계 왕가는 눌지계 왕실에게서 승계한 추풍령에 더해 고구려에게서 수복한 '고구려 고지'인 경북 북동부 조령 일대을 또 하나의 직할지 비슷한 영역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옛 6부병 체제의 유산을 청산해낸다.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가 큰 변화를 겪게 되며, 초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지방군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뀐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583년), 낭당(郞幢: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http://tip.daum.net/openknow/38855872|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 단위로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10,000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삼국 전쟁 말기 고구려 원정, 그리고 이후 [[달벌대전]] 때에는 10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참으로 특이한 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흥왕 이래로 서라벌 방어 부대 편제와 서라벌 왕궁 방어 체제를 완전 분리한 것이었다. 서라벌 방어 정예 부대는 당연히 서라벌 거주 왕경인들을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서라벌 왕궁 근위대는 지휘관이든 병사든 서라벌인들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근위대는 앞서 신라 왕실이 진골들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척한 추풍령과 조령 등에서 자원 입대를 받았으며, 왕궁 근위대장 자리는 아예 진골은 임명되지 못하게 하여 왕궁 내 무력 집단에 서라벌 거주 진골이나 6두품 등이 진입하는 건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이는 이미 진흥왕 때부터 진골 집단이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 광범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왕실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비슷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고대 원수정 로마의 최측근 왕궁 경비대원은 전원 게르만인이었고, 동로마도 최측근 경비대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치역학과 무관한 노르만인 바랑기였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뿌리가 같고 평소에는 왕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진골을 왕궁 경비에서 제외한 것이 특이해보인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이 전성기 때부터 진골의 위험성을 인지한 것이다.] 군복무 기간은 삼국사기에 실린 [[가실]] 열전에 의하면 3년인 듯 하지만, 워낙 전쟁이 많았던 [[난세]]인 삼국시대다보니 한없이 연장되는 일이 많았던 듯 하다. 가실은 6년이 지나서야 결혼을 약속했던 설씨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일본과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나다보니 군복무도 혹독했는지 6년만에 나타난 가실은 너무 초췌해져 처음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장 [[삼년산성]]을 비롯해,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산성]]을 쌓았는데 가실 같이 병역의 의무를 짊어진 장정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나당전쟁]]을 마지막으로 [[통일신라]]부터는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수백년간 거의 없는 평화기가 찾아오게 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원래 신라였던 지역 3주인 [[9주 5소경]]으로 편제하고 국왕 직속으로 수도에 출신별로 아홉 개 서당(誓幢) 부대, 그리고 지방 각 주에 하나씩 정(停) 부대를, 단 전방지역인 [[한주]]만 2개 부대씩 해서 9서당 10정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주마다 만보당 2개 부대를 각각 배치해 지방을 방어하였다. 이들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 * 신라 중앙군 || '''부대명칭''' || '''출신지''' || '''창설 시기''' || ||{{{#8b00ff 녹금서당(綠衿誓幢)}}} ||<|3>신라 ||583(서당) || ||{{{#00cc00 자금서당(紫衿誓幢)}}} ||625(낭당) || ||{{{#0000ff 비금서당(緋衿誓幢)}}} ||672(장창당) || ||{{{#0000ff 백금서당(白衿誓幢)}}} ||<|2>[[백제]] || ||{{{#ffffff 청금서당(靑衿誓幢)}}} || ||{{{#ff0000 황금서당(黃衿誓幢)}}} ||[[고구려]] || ||{{{#ffcc00 벽금서당(碧衿誓幢)}}} ||<|2>[[보덕국]](고구려계) || ||{{{#404040 적금서당(赤衿誓幢)}}} || ||{{{#ff0000 흑금서당(黑衿誓幢)}}} ||[[말갈]]([[예맥]]계 [[위말갈]]) || * 신라 지방군 || '''주둔한 주'''[* 색상은 전주를 제외한 해당 주의 만보당 부대의 상징색이다.] || '''10정 부대명'''[* 색상은 해당 부대의 옷깃 상징색이다.] || '''부대 주둔지의 현재 지명''' || ||<|2>[[한주|{{{#404040 한}}}{{{#00cc00 주}}}]]|| 남천정(南川停) ||[[경기도]] [[이천시]]|| ||{{{#ff0000 골내근정(骨乃斤停)}}} ||[[경기도]] [[여주시]]|| ||[[삭주|{{{#00cc00 삭}}}{{{#ffffff 주}}}]]|| 벌력천정(伐力川停) ||[[강원도]] [[홍천군]]|| ||[[명주|{{{#404040 명}}}{{{#ff0000 주}}}]]||{{{#8b00ff 이화혜정(伊火兮停)}}} ||[[경상북도]] [[청송군]]|| ||[[웅주|{{{#8b00ff 웅}}}{{{#0000ff 주}}}]]||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충청남도]] [[청양군]]|| ||[[완산주|전주]]||{{{#ffffff 거사물정(居斯勿停)}}} ||[[전라북도]] [[임실군]]|| ||[[무주|{{{#ff0000 무}}}{{{#ffcc00 주}}}]]||{{{#ff0000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전라남도]] [[나주시]]|| ||[[상주|{{{#ffcc00 상}}}{{{#8b00ff 주}}}]]|| 음리화정(音里火停) ||[[경상북도]] [[상주시]]|| ||[[강주|{{{#ffcc00 강}}}{{{#00cc00 주}}}]]|| 소삼정(召參停) ||[[경상남도]] [[함안군]]|| ||[[양주|{{{#0000ff 양}}}{{{#ffffff 주}}}]]|| 삼량화정(三良火停) ||[[대구광역시]] [[달성군]]||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었으나, 이후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유목민 출신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장창]]을 주 무기로 하는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따로 구성해 운용하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주 쪽샘지구 C10호분 신라 마갑1.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LhYVvwkh0c)]}}}|| ||<-2> {{{#000,#fff {{{-1 [[경주 쪽샘지구 C10호분 신라 마갑]]과 신라 [[중장기병]] 복원도.}}}}}} || 기병의 전체적 비중은 적었지만 소수의 정예 기마병을 육성했고, [[경주시]]와 인근 [[가야]] 지역인 [[함안군]]에서 상태가 좋은 마갑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탑승자와 말 전체를 갑옷으로 감싸는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이 유물로 밝혀졌다.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板甲)을 주력으로 운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으로 [[찰갑]](札甲) 운용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진천]]의 [[천보노]]라는 우수한 [[쇠뇌]], 그리고 거점 수비에 쇠뇌를 사용하는 노사(弩士)를 몇천명씩 배치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쇠뇌보다는 [[국궁]]을[* [[총기]]가 들어오는 이후에는 [[화승총]]]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신라의 [[군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850&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해당 링크]]. 이러한 신라의 군제는 통일기에 격변을 거쳤고, 통일한 이후 경덕왕에 의해 한차례 더욱 정밀한 군제 개편을 거치게 된다. 경덕왕의 군제 개편으로 구서당은 완전 해체되었고[* 다만 이는 구서당을 통해 흡수했던 고구려, 백제, 말갈인들을 더욱 차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시기가 되면 적어도 서라벌에 살았던 이들은 왕경인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인지 조상이 고구려인이든 백제인이든 말갈인이든 완전히 신라인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구서당 부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서라벌 방어 부대는 육기정 부대로 제개편되어 서라벌로 향하는 여섯 경로를 방어하도록 구체적인 임무를 받았으며, 일본이 침공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부산으로부터 경주 방어선을 구축했다. 위에서 상술한 정예 쇠뇌부대들도 물론 그 방면에 배치되었다. 또한 발해나 여진을 대비해 동북방 국경 부대도 대폭 확충되었고 전면적인 요새 정비 사업도 행해졌다. 태봉과 고려가 생각보다 여진족이 북쪽으로부터 내리누르는 압력에 고생한 편인데, 경덕왕의 이런 군제 개편에 아주 덕을 많이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세한 부분은 [[경덕왕]] 문서로. 이후 [[김헌창의 난]]을 거치면서 신라의 지방군 동원 체제가 생각보다 취약하고,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게 확인되자 이번에는 [[헌덕왕]] 때부터 종심 방어선 체제 구축이 시작되어 [[헌강왕]] 때 끝을 본다. 통일신라의 중후기에 행해진 신라 임금들의 주도면밀한 군제 개편 작업 및 축성 작업 등은 [[후삼국시대]] 때도 후삼국의 쟁패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덕왕]], [[헌강왕]] 문서로. 신라 [[수군]]의 활약상은 [[우산국 정벌]], [[기벌포 전투]] 등 다방면에서 전하지만 수군의 편제에 대해서는 육군에 비해서도 기록이 훨씬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본기와 직관지를 참조하면,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가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문무왕]] 18년(678) 선박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 침공 당시 기록을 토대로 [[당항성]]에 소속된 신라 [[황해]] 함대가 100척에 6,500여명 규모일 것으로 이상훈 교수는 추산했다. 이들은 병선(兵船), 대선(大舩), 거함(巨艦)으로 표현되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규모가 큰 전투함으로 볼 수 있으며,[* 이 100척을 당 수군에 대한 보급선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비전투함은 조선(漕船, [[수송선]]) 등으로 불러 전투함과 구분해 기록했기 때문에 이상훈 교수는 전투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신라 육군과 별개로 당나라 수군과 오늘날의 경기도 앞바다에서 합류해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금강]] 하구에서 백제 수비군을 물리친 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에서도 시기별로 수군의 규모나 편제가 달랐을테고, 신라 국토 구조를 보면 신라 수군의 주력은 [[남해]]와 [[동해]]에 배치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황해 함대 기록만으로 신라 수군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