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대한제국)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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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국왕 | 대조선국 초대 대군주
고종 | 高宗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태황제 | 高宗 太皇帝


파일:2104CF37569DA0F7358A6A.jpg

대한제국군 대원수 군복 차림을 한 고종
출생
1852년 9월 8일
조선 한성부 정선방 구름재동 흥선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즉위
1864년 1월 21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919년 1월 21일 (향년 66세)
식민지 조선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곁방
(現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 함녕전)
능묘
홍릉(洪陵)
재위기간
조선 제26대 국왕
1864년 1월 21일 ~ 1895년 1월 12일
대조선국 초대 대군주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
대한제국 태상황
1907년 7월 19일 ~ 1910년 8월 29일
덕수궁 이태왕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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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재황(載晃) → 형(㷗) → 희(熙)
부모
생부 흥선헌의대원왕
생모 순목대원왕비
양부 문조 익황제
양모 신정익황후 조씨
형제자매
3남 3녀 중 3남
배우자
정실 명성태황후 민씨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
자녀
4남 1녀[1]
종교
유교 (성리학)
신체
153cm, 70~73kg[2]
아명
명복(命福)

명부(明夫) / 성림(聖臨)

주연(珠淵)
군호
익성군(翼成君)[3]
전호
효덕전(孝德殿)
묘호
고종(高宗)[4]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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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
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
(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5]
연호
개국(開國, 1895년 ~ 1896년)
건양(建陽, 1896년 ~ 1897년)
광무(光武, 1897년 ~ 1907년)
절일
만수성절(萬壽聖節)
섭정
대원군 이하응 (1864년 ~ 1873년)
황태자 이척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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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진

1. 개요
2. 이름
7. 고종의 항일과 망명 시도
9.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
9.1. 사진
9.2. 어진
9.3. 기타 그림
10. 고종과 서양문물
10.1. 사진
10.2. 자동차
10.3. 음식
13. 관련 문서
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연호개국(開國),[1] 건양(建陽),[2] 광무(光武).[3] 절일은 만수성절(萬壽聖節).[4]


2. 이름[편집]


이름이 4개이다. 아명 '명복(命福)'과 초명 '재황(載晃)', 인 '형(㷗)'과 '희(熙)'이다.

'명복(命福)'은 임금이 되기 전에 썼던 이름으로, 철종 승하 이후 차기 임금으로 정해진 후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더 어릴 때에는 '개똥'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귀한 자식일수록 천한 이름으로 불러야 액운을 막아 오래 산다하여 불린 이름이다.

'재황(載晃)'은 즉위하기 직전에 잠깐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졌을 때 임시로 개명한 이름이다. 철종이 승하한 직후인 1864년 1월 16일부터 즉위식을 거행한 같은 달 21일까지[5] 단 6일 동안만 사용했다.[6] '명복'은 아명이었고 정식 이름이 아니었기에, 원래대로라면 15세 정도에 관례를 치르면서 본가의 항렬자에 맞춰 정식 이름을 지어야했다. 그런데 고종이 12세에 왕위를 이으면서 익종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더 나이들어서 흥선군의 아들로서 받아야 했던 이름을 정식 즉위 직전에 형식적으로 받은 것이다. 흥선군 일가에서 고종 세대의 항렬자는 '재(載)O' 자였고 여기에 맞춘 이름이 '재황'이다. [7]

'형(㷗)'은 조선국 국왕, 대한제국 황제까지 경술국치 이후부터는 이태왕 시절까지는 '희(熙)'로 사용했던 정식 이름이다.[8] 상술했듯, 고종은 문조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명목상 헌종의 동생이 되었고, 따라서 헌종의 휘 '환(烉)'의 '火' 발을 따라 '형(㷗)'으로 개명한 것이다. '㷗'의 독음은 '희', '형' 2개로 알려져 있으나 고종 이름의 발음은 '형'이 맞다.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형'으로 적혀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逈(멀 형)'을 써두었다.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고종의 이름을 '형'으로 발음한다고 적은 이상, '희'보다는 '형'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다만, 경술국치 이후 죽기 직전까지 썼던 이름은 또 다른 이름인 '희(熙)'자를 썼다.[9]


3. 즉위 배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즉위 배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청과의 영토 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고종의 항일과 망명 시도[편집]


1908년이위종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이범윤, 안중근, 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정미년)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領導)”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하얼빈 의거는 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황제의 강제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특사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황제와 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고종은 망명을 해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총 5번의 시도가 있었던듯 보이며#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의 확산으로 인한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10]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두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 일본군에 의한 강제 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11]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12]4번째 망명시도는 고종은 1910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 했었다.[13] 즉 고종은 병탄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 망명시도 이전에부터 고종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상황이었다. 1902년 12월 서울 경운궁에서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했고 베베르는 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은 2015년에서야 밝혀졌는데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로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로는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로 김인수도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반일첩보활동은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한러 합작으로 운영되던 상하이 정보국이 1905년 11월경 일시 해체되면서 끝이나게된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한다.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하게된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났고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한국의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이된다.

참고로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이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분과 고종의 반일 친러 행보는 당시 일본의 강한 경계를 받았고 이에 일본은 러시아측에 러시아 국적자인 김인수가 대한제국의 참령으로 복무하는게 옳지 않다는 식으로 러시아측에 강하게 항의하게되지만 '빅토르 김이 비록 러시아 국적자이지만 한국 출신이므로 한국군에 복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앞에와 같은 전문을 보내면 쿨하게 씹었고 이후에도 김인수는 대한제국에서 고종 황제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시종무관 겸 첩보원으로 계속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러일전쟁이 터짐에 따라 결국 러시아로 탈출하게된다.[14]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15]·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협력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 이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황태자 영친왕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대한제국 황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北京)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경운궁을 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은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崩御)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의병들의 주 거점이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된다.

참고로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외국 대사관은 관습적으로 해당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했고 현재도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그에 비등한 지역으로 여기고 있으니 아관파천이나 춘생문 사건까지 포함하면 총 7차례 시도를 했고 성공은 아관파천 한번이 된다.


8. 가족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황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편집]


근대의 황제답게 사진어진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다른 조선의 군주와는 다르게 신문 삽화나 포스터 같은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9.1. 사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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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일가를 한데 합성한 사진[16]
1918년에 영친왕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사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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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1884년에 창덕궁 농수정에서 찍은 고종 생애 첫 사진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왼쪽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 오른쪽 사진이다.[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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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s621420.vk.me/tM62QsRpwCU.jpg}}}
파일:attachment/고종(조선)/Gojong.png}}}
군복 차림의 고종
연미복 차림의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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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고종(조선)/2_demonic8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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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햇에 프록 코트를 입고 모피 망토를 두른 서양복식 차림의 고종
1918년 1월 15일의 고종. 장소는 덕수궁. 이 때 당시는 이태왕.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20]


9.2. 어진[편집]



파일:attachment/gojongurjin22.jpg

파일:attachment/gojongurjin33.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rtrait_of_Gojong_01.jpg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1) #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2) #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3) #



파일:external/file2.instiz.net/c0b85c9c05a140efd75df1def489950d.png


파일:고종.jpg

1872년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고종 어진
작자 미상의 원유관 강사포본 고종 어진[21]
동강 권오창의 고종 전신 어진 #


9.3. 기타 그림[편집]


한국의 군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어진을 제외하고도 신문삽화포스터같은 그림이 남아 있는 황제다. 그전에는 감히 함부로 그릴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신문의 만평이라는 것이 풍자적이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안타까운 그림이 많다.

파일:24416_9437_576.jpg
파일:_1426428723_f6b6.jpg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호머 헐버트가 발행한 《Korean Newspaper》에 실린, 을사조약을 그린 삽화[22]
일본에서 그린 고종 강제 퇴위 풍자화
러일전쟁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프랑스 정치만평 그림엽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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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8월 12일 프랑스 잡지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삽화로 조정의 모습을 그렸다.
1903년 11월 23일 미국 잡지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지면에 실린 에밀리 브라운 관련 가십성 기사
1899년 10월 19일 잡지 《배니티 페어》에 실린 고종의 컬러 캐리커쳐, 원화작가인 프라이(Pry)[24]가 그린 것을 석화 인쇄했다.

파일:20392067124ecac762d8ad9.jpg
파일:1903_emperors-2.jpg
1906년 일본 도쿄에서 인쇄된 《세계 20대국 군주 어존영》이란 포스터로, [[메이지 덴노|{{{#683235 메이지 덴노}}}]] 뒤편에 배치시켜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그 와중에 광서제랑 메이지 천황의 중간에 낀 빌헬름 2세
1903년 5월의 그림으로 옆의 그림과 거의 유사한 프로파간다 포스터[25]


10. 고종과 서양문물[편집]


개화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적극적으로 애용했다. 사실 이것은 청나라의 광서제나 일본의 메이지 등 다른 군주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다만 한중일에서 제일 국가 재정이 빈곤하고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 시점이 늦은 것을 볼 때 구한말에 급속도로 서양문물이 빨리 쏟아진건 고종의 영향이 크다.

고종의 서양문물에 대한 얼리어답터 기질이 워낙 유명해지면서 이런식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10.1. 사진[편집]


사진 문단에 많은 사진들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시절의 보통 조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특히 초기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 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26]


10.2. 자동차[편집]


고종은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군주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 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 문화재 318호,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 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27]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했고,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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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긴 어차


순정효황후가 탔던 어차


10.3. 음식[편집]


2017년, 창덕궁에서 '와플 틀'이 발굴되었다. 이와 동시에 '카스텔라 틀'도 발견되어, 와플카스텔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 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28] 음료로는 커피사이다를 주로 마셨다고 한다.

특히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커피 애호가답게 커피 맛에도 굉장히 민감하여, 김홍륙 독차 사건 당시 아편을 탄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알고 바로 뱉어내 위험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순종은 커피가 처음이다보니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다량을 들이켜 구토와 피설사를 반복하다 기절하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몸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아이스크림도 먹었다고 한다. 외국 문물이 마구 들어오던 시대에 왕으로서 모든 것을 첫 번째로 접했기 때문에 다양한 식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29][30]


10.4. 에스페란토[편집]


한국에서 에스페란토 (인공어)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 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한편으로 당시에 에스페란토가 얼마나 국제적으로 촉망받던 대상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도 에스페란토를 배우기도 했다.


10.5. 미터법[편집]


도량형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1894년 국제미터원기와 국제킬로그램원기를 도입해 왔다. 미터협약이 체결된 지 19년만이라는 이른 시기이다.


11.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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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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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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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군
영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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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1] 조선 왕조가 개창된 1392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연호가 아니라 기년법(紀年法)의 일종이다. 1894년(개국 503년) 갑오개혁 때부터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때의 조치는 '국내외 모든 공문서·사문서에 개국 기년을 사용토록' 한 것이며, 실제로는 1876년(개국 485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과의 조약에는 개국 기년을 사용해 왔다. 1896년 건양 연호 사용 이후에도 칙령 등에서 개국 기년이 혼용된 예가 있다.[2]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3] 1897년(광무 원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 이 때문에 고종을 '연호+(황)제'의 호칭으로 부를 경우 '광무황제(光武皇帝)' 혹은 '광무제(光武帝)'가 되나 실록에서도 용례가 나오지 않으며 현대 학계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냥 대한제국 고종시기 때의 연호는 光武(광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4] 이 외에도 흥경절(興慶節),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등 절일이 있다.[5] 음력 계해년(1863년) 12월 8일 ~ 12월 13일.[6] 출처: 《이태왕왕족보(李太王王族譜)》.[7] 원래는 인평대군 8대손의 항렬자로, 원래 인평대군파 출신인 고종 일가는 남연군(고종의 할아버지)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한 후에도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1868년부터는 흥선대원군이 아예 인평대군 7대손 '응(應)' 자 부터 그 아래 항렬자 전부를 덕흥대원군의 모든 후손들이 사용하게 했다.('응'자 항렬은 덕흥대원군 기준 11대손이고, 고종의 '재' 항렬은 12대손이다.) 고종 시기 기록을 보다가 '이재O'이란 왕족이 나오면 고종의 형제 또는 형제뻘 종친으로 생각하면 된다.[8] 1931년1940년이왕직에서 편찬한 《이태왕왕족보(李太王王族譜)》《왕공족보(王公族譜)》를 보면 이태왕의 이름이 '㷗'으로 적혀있다.[9] 고종의 원래 형인 흥친왕의 이름과도 같다.[10] 박종효,2002,101 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11] 박종효,2002,73 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12] 박종효,2002,74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13] 외교통상부,2003, 223~224 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14] 이후 대한제국의 장교이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10년만에 러시아 제국의 대령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인수는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서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하게되었으며 김인수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 많은 연해주 지역의 항일의병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지금도 러시아에는 김인수 참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후손들도 할머니(김인수의 손녀)에게 설명을 듣기전까지는 조상님이 한국인이고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대령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한다. 그 이유가 일단 본인들 외모는 100% 백인 외모이고 제정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 제정 러시아의 장교이자 간부였던 김인수의 성을 계속 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모두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한다.[15] 의친왕비 덕인당 연안 김씨의 아버지.[16]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정실 의친왕비 김씨,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촬영 시기가 불확실한데다가 인물의 비율과 광원의 위치가 어색해 사실상 조작 및 합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딱 봐도 의친왕영친왕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가 주변과 괴리가 큰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기사 참고.[17] 1918년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황실 가족이 단독 사진이 아니라 여러 황족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유사한 서열을 갖는 사람을 배치하며 각각의 인물들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사진과 같은 서열 배치 및 거리 차이를 감안한다면 왼쪽 사진은 원래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만 찍힌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8]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19] 사실 오른쪽은 제대로 된 컬러 복원이 아니라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바닥도 다르고 얼굴(특히 순종의 얼굴영유아 같다...)이나 복장도 묘하게 다르다.[20]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듯하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보도자료 [21]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22] '일본이 한황(韓皇, 한국 황제)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늑정, 억지로 정함)'이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 황뎨(황제)라고 쓰인 옥좌에 앉아 식은 땀을 흘리며 분노하고 있는 고종 황제와 왼편의 을사오적 뒤편에서 일본도를 들고 협박하는 일본군과 오른편에서 비웃고 있는 일본인들이 그려져 있다.[23] 메이지 덴노니콜라이 2세 사이에 끼인 고종황제의 난처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중간에 끼어 있는 고종황제의 모자 형태가 익선관이 아닌 사모이긴 하나 중간에 엉뚱한 도승지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그려 넣었을 리는 없고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사무라이불곰같은 상징이 아닌 각각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구한국 역시도 동물이나 대표적 일반사람의 모습이 아닌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고종 황제로 보인다. 서양인의 무지이기도 할 테고 정밀묘사화가 아닌 풍자만평이기 때문에 중요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묘사한 풍자이다. 물론 세 명을 개인으로서 짚어서 그린 그림은 아니고 각국 정부, 더 나아가 국가를 세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 만평에 그려질 만한 수위의 그림. 과거 군주들 같으면 상상도 못할 그림으로 의금부에서 관계자를 색출할 만한 그림이다. 또한 이 그림은 다른 방면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고종황제가 한국 역사상 최고지도자이자 정치인이자 공인이자 특정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시사만평에 풍자된 사례 중 하나라는 것이다.[24] 구석에 그의 사인이 있다.[25] 가운데 서있는 16번이 메이지 덴노이고 13번이 고종 황제다. 메이지 덴노 옆에는 한자로 '日本國皇帝'(일본국 황제)라고 적혀있는 반면 고종 옆에는 '高麗國王'(고려 국왕)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정식 칭호인 '황제'라고 불러주기는커녕 국호조차 제대로 쓰지 않았으니 일부러 깎아내린 것이다.[26]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 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 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27] 1910년대 초에 10대밖에 만들지 않아 보관된 과거 조지 5세가 타던 차량 1대 외에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또 있었던 것이다.[28] 이 때문에 경복궁 내부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카페에서 와플을 팔면서 '고종이 즐겼던 와플'이라는 홍보문구를 적극적으로 걸고 있다.[29] 음식 문단의 출처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308/89001446/1[30] 사실 이상한 것이 없는 게 서양 문물에 대해 그리 탐탁치 않았던 메이지 덴노 역시 매일 1끼 이상은 양식과 양과자를 즐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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