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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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제멸망전(百濟滅亡戰)은 삼국통일전쟁의 일부로, 660년 3월부터 660년 9월 1일(음력 7월 18일)까지 나당연합군과 백제 사이에서 일어난 백제 최후의 전쟁이다. 다만, 양측 간의 실질적인 교전은 음력 7월 9일부터 2주 사이에 벌어졌다.
전쟁의 역사적 배경 및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삼국통일전쟁 문서 참조.
2. 전개[편집]
2.1. 웅진강 입구의 전투[편집]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百濟據熊津江口以拒之 定方進擊破之 百濟死者數千人 餘皆潰走
백제가 웅진강의 입구에 의지하여 방어했지만 소정방은 나아가 격파하였다. 백제 사람 수천 명이 죽고 나머지 무리는 무너져 달아났다.
《자치통감》 권200, 660년 8월 기사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의 13만 대군[7] 은 먼저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백제 협공 계획을 완성했고, 신라 육군이 백제의 동쪽에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금강 하구를 통해 백제의 수도권으로 진격했다.
의자왕은 계백, 충상, 상영이 이끄는 군대를 황산으로 파견하는 한편 웅진강(현 금강) 지역 하구에도 군대를 배치했지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에게 돌파당하게 되었다.
2.2. 황산벌 전투[편집]
자세한 내용은 황산벌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편 황산으로 신라군을 막기 위해 파견된 계백, 충상, 상영 등이 이끄는 결사대 5천의 백제군은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 5만과 맞붙게 되었다. 항목 참조.
결국 전력의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은 전멸했지만 신라군과 당나라군의 합류 전략을 하루 동안 지연시켜서 신라군과 당나라군 간 갈등이 발발하기도 했다.(독군 김문영 사건)
2.3. 사비 전투[편집]
王師乗潮, 舳艫銜尾進鼓而譟, 定方將歩騎, 直趍眞校勘 都城, 一舎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웅진강 입구에서 당군의 저지가 실패하고 사비성으로부터 불과 30리 지역까지 당군이 진출하게 되었다. 백제는 최소 1만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서 당군을 공격했지만 사비 부근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당군이 사비성까지 육박하자 의자왕은 패망을 직감하고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도피하게 된다.
사비성에서는 의자왕의 3남인 부여태가 칭왕을 하면서 저항했지만 당나라군이 사비성에 깃발을 꽂자 하루만에 항복하였고 왕자 부여융, 좌평 사택천복 등도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다만 사비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신라군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는 걸 보면 당나라군이 독자적으로 치뤘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기한 기록을 참조할때 당군이 비교적 수월하게 웅진강을 돌파한데 비해 신라군은 주력이 황산벌에서 하루 남짓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4. 의자왕의 웅진성 파천과 항복[편집]
660년 음력 7월 13일 밤 사비성에서 태자 부여효와 웅진성으로 파천하게 되었다. 하지만 웅진성에서도 버티지 못했고 5일 뒤인 660년 음력 7월 18일에 북방령 겸 웅진성주 예식진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체포하고 당군에 항복했다.[8]
이미 당군과 신라군과의 전투로 인하여 2만에 달하는 전력을 상실한 데다가[9] 백제 왕족과 조정인사들이 사비성에서 항복한 점, 백제가 당을 회유했던 회유책 역시 실패했기 때문에 항복한 걸로 해석된다. 하지만 2000년대 당나라에서 예씨 묘지명들이 발굴되고,(예식진 참고)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었는데 손자인 예인수의 묘지에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서 바쳤다고 적혀있어 배신으로 인해 멸망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3. 결과[편집]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의 영역 대부분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당나라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소정방이 당평제비로 불리는 글을 탑의 초층에 각석하면서 백제탑이 아닌 당의 승전탑으로 오인되기도 했었다.
항복하지 않았던 나머지 백제군들은 남잠성과 정현성 등을 점거해 버텼다고 한다. 좌평 정무는 군사를 모아 두시원악(전북 무주군으로 추정)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이어서 귀실복신, 도침, 흑치상지, 부여자신, 부여풍 등이 백제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이들은 663년 백강 전투로 패망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백제 영역의 일부를 점거한 채 나당 연합군과 지속적으로 교전했다.
백강 전투 패배 이후에도 664년 사비성에서 백제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668년 아마(阿麻)의 항복기사[10] 을 보면 백제 멸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저항했지만 백제의 부활로는 이어지지는 못했다. 얼마안가 나당전쟁이 발생해 웅진도독부가 축출당하면서 당이 세워놓은 부여융 정권 역시 백제 지역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당나라군이 패배한 뒤, 신라가 옛 백제 전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된다.
200여년 뒤 백제의 국명을 딴 후백제가 건국되었고 고려 시대의 이연년 형제의 난 또한 백제 부흥을 표방한 점에서 여몽전쟁 이전인 고려시대 전반까지는 백제에 대한 의식이 남아있던 걸로 보여진다.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관성 문제에 대해서는 해당문서 참조.
한편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 측에 붙었던 검일과 모척은 백제 멸망 후 신라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11]
4. 같이보기[편집]
[1] 양측 간의 실질적인 교전은 음력 7월 9일부터 벌어졌다.[2] 경신(庚申)년 갑신(甲申)월 정사(丁巳)일로, 그레고리력 660년 9월 1일 토요일은 음력으로 7월 18일, 율리우스력 8월 29일이다.[3] 김유신의 부대 50,000명, 소정방의 부대 122,711명.[4] 계백의 결사대 5,000명, 사비성 군 10,000명 이상.[5] 계백군(4,980명), 사비성 군(10,000명)[6] 왕과 왕족, 관료 도합 93명, 백성 12,870명[7] 삼국유사에서는 향기(鄕記)를 인용해 당군이 12만 2711명,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기록하였다.[8] 이때 현 충청남도 공주시 신원사(사찰)(新元寺)의 부속 암자인 고왕암(古王庵)에 백제 왕자가 도망쳐 숨었다가 잡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부여융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때 부여융은 사비성에 있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고왕암 전설의 백제 왕자일 가능성은 낮다.[9] 황산벌 전투에서 5천, 웅진강 전투에서 수천명을 잃고 뒤이어 사비 전투에서 1만이 넘게 사망하면서 완전히 소모되버린 걸로 추정된다.[1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아마도(阿麽島)가 전남 여수의 섬으로 나온 점을 보면 전라남도 여수 근처의 섬으로 추정된다.[11] 조국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대야성 성주의 아내가 무열왕의 딸이자 문무왕의 동생이었다. 어떻게 봐도 최소 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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