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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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당나라의 장군.
강주 용문현 사람으로 평민 출신이며 본명은 설례(薛禮)로 흔히 알려진 인귀(仁貴)는 자(字)이다. 족보에 의하면 삼국지에 여포의 부하로 나오는 설란의 15대손이다.
2. 생애[편집]
당나라의 맹장인 설눌의 아버지로 무예에 능하였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는데 가난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조금 나아지겠지?”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는데, 기록에 의하면 설인귀의 부인인 유씨가 사람은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법이니 이장은 나중에 하고 황제의 휘하에서 종군하라고 권유하자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입대했다고 한다.
장사귀 휘하에서 안시성에 이르러 이르러 적장을 참살하면서 용맹을 알리기 시작했다. 645년에 고구려-당 전쟁 때 주필산 전투에서 흰 옷을 입고 미친듯한 활약을 펼치는 설인귀의 모습이 당태종의 눈에 확 꽂혔고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당태종은 저 흰옷의 장수를 자신의 앞에 데려오라 명하여 유격 장군으로 임명한다. 당태종은 “짐의 장수들이 늙었는데 마침 경을 얻었도다! 짐은 오늘 승리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노라!”라고 말하며 칭찬한다.
658년에 우령군 중랑장으로 적봉진을 점령하고 다음 해에 석성을 공격하며 물러갔다.
659년 고구려의 황산을 침공해 고구려 장수 온사문이 이끄는 병력과 교전하였다.[3]
661년에 철륵이 10만의 병력으로 난을 일으켜 당군을 공격하자 적진을 향해 돌격하여 화살 3발로 적장 3명을 죽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진격하여 적들을 격파하였고 같은 해에는 고구려 대규모 원정에 참가했다.
그러다 667년에 3차 여당 전쟁에서 신성,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을 점령하고 회군하였으며 668년에는 3천의 병력으로 부여성을 점령하고 이후에도 평양성 전투에도 공을 세웠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안동도호부의 도호가 되어 고구려 땅을 다스렸으며 670년에 토번이 강성해지고 당의 서북 변경이 위험해지자 고종의 명으로 10만 군사를 이끌고 토번을 공격하였지만 대비천 전투에서 곽대봉[4] 이 설인귀의 명령을 듣지않아 치중을 전부 잃어버리는 바람에 토번의 명장인 가르친링에게 참패,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였다.[5]
당시 패전의 여파는 엄청나서 설인귀가 그간 쌓았던 공로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뻔 하였으나, 설인귀를 총애했던 당고종이 그를 비호해준 덕분에 목이 달아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듬해인 671년에 설인귀는 다시 군사령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설인귀는 대비천 전투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나당전쟁에 참여해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676년에 기벌포 전투에서 패하였다. 대비천에 이어 기벌포에서도 대패하자 이번에는 고종조차도 설인귀를 감싸주기 어려웠는지 이후 설인귀는 한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고종의 총애는 그치지 않아서 설인귀는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682년에 돌궐이 공격하자 당고종은 설인귀를 보내 이를 격퇴하도록 하였는데 그 과정이 드라마틱했다. 당시 돌궐군의 장수는 당 군대의 사령관이 설인귀라는 말을 듣고는 “설인귀는 이미 죽었을텐데 그럴리가 있겠느냐?”며 반신반의했다. 이때 설인귀가 앞으로 나와 투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이에 기겁한 돌궐군은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 일화에는 비록 과장이 많지만, 그만큼 설인귀가 당나라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683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죽은 후 좌효위 대장군, 유주 도독의 직위를 받았다. 다만 대비천 전투 당시에 잃었던 작위와 봉호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6]
3. 기타[편집]
- 당 고종은 설인귀를 몹시 총애하였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배경이 있었다. 설인귀가 황궁 경비를 담당하던 시절, 뒷산에서 일어난 홍수가 황궁을 덮쳐 고종의 침실까지 물이 밀려들어 온 일이 있었다. 이때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설인귀 만큼은 목숨을 걸고 황궁에 남아 경보를 울려서 고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종은 이후 평생토록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설인귀의 크고 작은 실책을 모두 비호해주었다. 설인귀가 대비천과 기벌포에서 크게 패하였음에도 수차례 용서를 받았던 것도 고종의 무한한 설인귀 사랑 덕분이었다.
- 무인으로서는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대표적인 무용담으로는 황제 앞에서 기사술을 시연하는데 어찌나 강궁이었는지 그가 쏜 화살이 5중 쇠갑옷을 관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에 서술된 세 명의 철륵족 선봉장을 세 개의 화살로 사살한 무용담에서 당시 군중에서는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관문으로 되돌아오네(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이라는 말이 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흰 전포를 입고 전장을 질주해서 ‘백포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또한 방천화극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방천화극과 활을 잘 쐈다는 걸 보면 어쩐지 조상인 설란의 상관인 여포와 이미지가 겹친다.[7]
- 뛰어난 무력으로 명성이 천하에 퍼졌지만 고구려, 신라, 철륵, 토번과의 전국을 놓치는 등 대전을 치르는 사령관으로서의 실적은 미묘하다는 점도 여포와 비슷하다. 심지어 소정방, 이세적 시절이었으면 대장감이 아니라 참수감이었다는 악평까지 있었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아 중형을 받지 않았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당대 네임드로 이름이 알려진 장군이다.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뛰어난 무공 때문인지 많은 민간 전설을 남기기도 했으며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많았다. 송나라 말기부터는 전설이 소설화되어 이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여러 소설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현대 중국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자주 나올 정도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인기 많은 역사 속 무인 중 1명이다. 역사 기록에서 설인귀는 한족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전설도 있는데 [9] 때마침 薛자가 흔한 성씨가 아님에도 한국부터 중국, 돌궐, 토번에 이르기까지 인지도 있는 인물들을 배출하다보니 사극 등에서는 외국 출신으로 신분세탁돼서 나와도 위화감도 덜하다.[10]
- 조선에서도 인기가 많았는지 조선시대에 <설인귀전> 등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국민정서(?)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쟁 이야기가 재미있고 농사꾼이 심기일전하여 산전수전 다 겪고 나라의 영웅이 된다는 스토리는 어딜 가나 매력이 있는 듯 하다. 파주 출신으로 산신령이 되었다는 야담이 가장 유명하다.
- 중국의 경극인 <독목관>에서는 아예 연개소문을 쓰러뜨린 영웅으로 나오는데 연개소문에게 쫓기는 당 태종을 보호하기 위해 연개소문과 싸우는 진주인공 히어로적인 역할로 나온다. 연개소문이 용의 힘을 갖춰 5자루의 칼을 휘두르는 중원 정복을 노리는 먼치킨 대마왕으로 나오고 설인귀는 그를 활로 응수하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
- <설인귀전기>는 이름 그대로 설인귀를 주인공으로 한 중국 드라마로 2006년 방영되었으며 설인귀 역은 배우 보검봉이 연기했다. 한국 언론에서는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한국 사극들[11] 에 맞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드라마라고 보도했으나 사실 설인귀전기는 이런 사극보다도 훨씬 먼저 제작되었다.[12] 내용적으로도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한국 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주적인 고구려/연개소문도 발요/철세문으로 개명당해서 나오며 이세민도 상당히 초라하게 나온다. 이 드라마에서 당나라vs발요(고구려) 전쟁은 지나가는 소재에 불과하며 설인귀와 조정 내부의 간신배들 사이의 갈등을 끌어내기 위한 트리거에 불과하다. 작중 중간보스 포지션인 철세문을 상대할 때에는 철세문이 유일한 대항마로 거의 구세주로 활약하지만 좋은 모습은 딱 거기까지. 미천한 신분에 컴플렉스를 가져서 아내가 적극적으로 대쉬하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간신배의 말빨에 속아서 온갖 공적을 세웠음에도 그 공적들이 먹튀당했으며 나중에는 간신배의 계략으로 술에 취해서 누명을 쓰게 되는데 술이 깨지 않아서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져 주변인들은 어떻게든 그를 살리기 위해 생고생한다. 이후 서량의 정벌을 위해 다시 기용되지만 그 조건으로 자신을 암해하던 간신배 척결을 내걸었는데 이 중요한 복수마저도 본인이 뭘 못하고 주변인들이 계략을 짜서 실행한다. 서량 정벌도 순탄치 않아서 아들인 설정산이 나섰다고 엔딩에서 내레이션으로 언급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심하고 본인 스스로 거의 하는게 없는 답답한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다.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유태웅이 연기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무장을 통틀어 고구려군 지휘관들과 대등하게 겨루고(여자들이었지만) 킬 마크를 따낸 유일한 인물. 전쟁에 나가기 위해 참가한 비무 대회에서 다수의 기병대와 겨뤄 압도했었고 제1차 고구려-당 전쟁에서는 쌍검녀를 시종 압도하다 죽여버리고 연수정은 1번째 대결에서는 팔에 상처를 입히고[13] 2번째 대결에서 화살 하나로 꿰어버리는 등 무용으로는 중국의 무장 중 원탑이지만(사실상 연개소문과 김유신 다음으로 작품 중 3위 무력)[14] 작중 입지는 그냥 잘나가는 당나라 장군 중 1명. <삼국지연의>의 장면을 많이 써먹은 작품임에도 의외로 방천화극을 사용하는 모습이 반영이 안되고 검을 무기로 사용한다. 고구려 멸망시에 나이가 56세였는데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이후 갑자기 폭삭 늙어버렸다. 이제 막 관직에 오른 젊은 무장이 10년 정도 흐른걸로 늙어버린데다 자기 아버지뻘 나이인 소정방이 오히려 젊게 분장하고 후배처럼 묘사되는 바람에 둘의 나이와 경력이 역전해 버리기까지 했다.[15]
5. 둘러보기[편집]
[1] 오늘날의 산서성 윈청시(지급시) 허진(河津)시(현급시) [2] 안동 도호 재임 기간.[3] 해당 열전 등에는 이겼다고 나오지만 신당서 고려전 등에는 주어를 일부 뭉뚱그려서 졌다는 기록도 있다.[4] 곽효각의 아들이다.[5] 토번은 내분으로 약화된 토욕혼을 점령한 상황이었고 가르 가문이 대세를 잡고 있었다.[6] 이게 안 돌려준 것인지 생략된 것인지는 불명이다. 금석문에서는 여전히 봉작으로 칭해진다.[7] 다만 여포는 실제로는 "화극"이 없는 시대에 살았다. "극"은 전한 시대부터 주요 무기였고, "화극"은 남송 이후부터 생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때마침 여포 역시 극이랑 친한 인물이긴 하다.[8] ‘민족’이라는 말이 붙듯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중국사의 제갈량, 관우 같은 영웅들보다 외세에 저항해 싸우거나 이민족을 격퇴한 역사 인물들을 일컫는다. 일제의 침공을 겪은 후 현대에 와서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은 인물들이다.[9] 물론 전설이나 야담의 수준에서의 이야기다.[10] 때마침 설인귀랑 같이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한 설계두도 있다.[11] MBC 드라마 <주몽>, SBS 드라마 <연개소문>, KBS 드라마 <대조영> 등.[12] 중국은 드라마를 사전제작에 검열까지 하는데다가, 방영 플렛폼의 선정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방영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린다. 칭기즈칸(드라마)는 촬영종료후 방영까지 6년걸렸다. 예전에는 웹방영이 없었기 때문에 촬영후 방영도 못하고 창고에서 잠자는 드라마도 많았다.[13] 심지어 연수정이 제대로 찔러들어간 칼을 손으로 잡아 막는다.[14] 안시성 전투 당시 연개소문과 제대로 겨루었는데 상당한 합을 나누었지만 설인귀가 밀리는게 확연히 드러났다. 김유신의 경우는 거의 대등하게 겨루다 김유신의 검이 먼저 부러졌기 때문에 무력 순위를 매기자면 이렇게 된다.[15] 사실 실제 역사에서 경력, 직위 등 무엇으로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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