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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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제2대 가독부
무왕 | 武王

출생
680년대 추정
발해
사망
737년 8월 이전 (향년 50대)
발해
재위기간
발해의 태자[1]
연대 미상 ~ 719년 4월
제2대 가독부
719년 4월 ~ 737년 8월 (18년)
능묘
진릉(珍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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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대(大)

무예(武藝)
부모
부왕 고왕
자녀
대흠무
대도리행
대번
대의신
대욱진
작호
계루군왕(桂婁郡王)[1], 발해군왕(渤海郡王)
시호
무왕(武王)
연호
인안(仁安)


1. 개요
2. 출생
3. 당나라 침공
3.1. 배경
3.2. 1차 침공 - 등주성 전투
3.3. 신라의 개입과 자객
3.4. 2차 침공 - 마도산 전투
4. 외교
4.1. 당나라
4.2. 일본
5. 가계
6. 기타
7. 연표
8. 《신당서》 기록



1. 개요[편집]


"대국은 마땅히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임수를 쓴단 말인가?"

- 무왕, 『구당서(舊唐書))』}}}

"지금 명황(당현종)은 위엄으로는 대무예를 당하지 못하고, 은혜로 대문예를 감싸지 못하였다. 소인들 마냥 사기를 치다가 작은 나라에 망신을 당하고 자기 나라 관리를 파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수치가 아니겠는가!"

今明皇威不能服武藝, 恩不能庇門藝, 顧效小人為欺誑之語, 以取困於小國, 乃罪鴻臚之漏洩, 不亦可羞哉!

- 사마광, 『자치통감(資治通鑑)』[2]}}}


발해의 제2대 가독부이자 대조영의 장남이다. 건국한 지 불과 30여 년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 발해를 이끌었고, 특히 당시 당나라로 망명한 동생 대문예 문제 등과 관련하여 당대의 최강국인 당나라와 대결하여 2차례의 선제 공격으로 승리하였다.

2. 출생[편집]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다. 대무예의 동생인 대문예가 705년에 당에 숙위로 입조한 점으로 보아 늦어도 680년대 경에는 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대세다. # 680년대 경은 그의 아버지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 집단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의해 영주로 강제 이주되어있을 때이다. 그의 유년 시절은 아직 발해가 건국되기 전이었던 것이다.


3. 당나라 침공[편집]



3.1. 배경[편집]


698년 발해가 건국된 후 719년 고왕(대조영)이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무왕(대무예)이 즉위했는데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였다. 그리고 발해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들에 대한 정복 사업을 벌였다. 당나라는 발해 건국 초기에는 동모산의 작은 세력이라 생각했는지 크게 경계하지 않고 먼저 사신을 파견해 발해를 회유했지만 무왕 대에 들어서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장이 꽤 거슬렸는지 슬슬 발해에 대해 견제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의 땅 즉 지금의 하바로프스크로 발해의 후방에 있던 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려고 했다. 당나라가 발해의 후방을 직접 통치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관리를 요청하면서 이전까지 잘 해오던 보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방의 당나라와 후방의 흑수말갈이 정치적 결합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커져갔다. 발해는 앞뒤로 공격받게 생긴 셈. 50여 년 전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기 때문에 당나라의 이러한 조치는 발해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발해 무왕은 아들이자 왕자인 대도리행을 당나라로 보내 당의 조치에 항의했다. 그러나 당현종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발해 무왕 대무예는 동생 대문예와 장인어른 임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했다.

당시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문명을 고루 흡수한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 및 과학 기술, 수많은 병사와 강력한 무기를 갖춘 강성한 세계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개원지치). 그리고 건국 초기 당나라에서 숙위로 8년 동안 머물렀던 대문예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해 무왕이 대문예에게 당나라와 연합한 흑수말갈을 치라고 한 것이다.

대문예는 무왕의 명이 세계제국 당나라와의 전면전까지 갈 수 있는 국가존망이 걸린 일이라고 여겨 이 전쟁이 내키지 않았지만, 무왕은 그를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흑수말갈의 국경 지대에서 대문예는 형인 무왕 대무예에게 다시 한번 고구려도 당나라에게 망했는데 이건 아니다란 식으로 흑수말갈을 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보냈고, 이에 무왕은 분노하며 대문예를 소환했다. 그러자 무왕에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한 대문예는 군영을 탈출하여 당나라로 망명했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크게 환영하고 벼슬을 하사했다. 비슷한 720년대 후반 시기에 발해 부여부의 대수령 낙사계라는 인물이 당나라로 투항한 것을 그의 묘지명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대문예 외에도 전쟁 반대파가 있었고, 결국 일단의 반대파 무리들이 비슷한 시기에 축출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이에 격분했고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해 당대 제국의 황제인 당현종에게 대문예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현종은 무왕의 요구를 묵살하고 대문예를 피신시킨 후 멀리 귀양보냈다고 발해에 거짓 통보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현종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무예는 화가 폭발했고, 이후 당에 보낸 국서에는 파격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바로 신생국 발해가 당대 동아시아 패권국이자 세계 최강의 대국 중 하나였던 당나라의 황제 현종을 신의가 없다고 직설적으로 꾸짖은 것.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떻게 속일 수가 있소이까?

바라건대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이시오!

구당서


이에 당현종도 역시 화는 났지만, 사실 무왕이 지적한데로 구라를 먼저 친 것도 당나라이고, 그렇다고 자기들 편들다 망명해온 대문예를 팽할 수도 없어 모양만 빠진 채 시간만 끌고 있었는데, 7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와있던 발해 왕자 대도리행이 갑자기 죽는다. 무왕의 장자로, 발해-당의 외교 친선을 위해 노력하다 병으로 사망한다. 그러자 우유부단하던 당나라의 태도도 달라진다. 당현종은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대문예를 죽이라는 무왕의 요구를 거절하며, 아무리 그래도 친형이 친동생 죽이는 게 맞냐고 타이르는 동시에 더는 심기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협박성 신호도 보내며 무왕을 구슬린다.

경은 당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짐을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 왔으나

경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 대문예를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암시를 한 것. 당현종의 협박인 셈.
이에 무왕은 분노했고 당나라를 먼저 침공하는 결단을 내린다.


3.2. 1차 침공 - 등주성 전투[편집]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당 침공을 명했다. 732년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발해 수군 함대는 황해로 진격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 등주(지금의 산동성 펑라이 시)였다. 당시 등주는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다. 수많은 무역선들이 항로를 따라 등주로 들어왔다. 또한 등주는 당나라 수군의 거점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배를 출격시킨 곳도 이곳 등주항이었다.

만약 당나라가 발해를 친다면 당나라의 군사는 등주항에서 출발할 것이었다. 선제공격으로 당나라 수군 거점을 무너뜨려야 이후 당군의 반격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732년 9월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성을 침공했다. 발해군의 기습적인 상륙작전에 당나라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등주 자사 위준이 발해군에게 살해되었다. 기습 선제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발해 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쓰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고,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구제하기위해 세금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세금 지출계획을 바꿔,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해야만 했다.


3.3. 신라의 개입과 자객[편집]


발해군의 기습 공격을 전해듣고 분노한 당현종은 급히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의 기세를 누르지 못했다. 당황한 당나라나당전쟁 이후 서먹한 관계였던 신라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733년 1월 신라의 성덕왕은 약속대로 병력 10만 명을 파견했지만, 기록상으로는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신라 군사 중 절반이 죽어 발해와는 제대로 된 전쟁도 못 해본 채 성과없이 돌아왔다.

다만 기록에는 신라 병력 10만 명 중 절반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과연 신라가 이 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며 무리한 공격을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견해도 있다. 신라보다 인구와 군사 동원 규모가 더 많던 고려와 조선조차 20만명은 국민을 거의 총동원해야 가능한 병력이었는데, 10만명을 동원했다가 절반이 죽으면 발해 측에 역공을 당해도 군사가 없어 손을 쓸 방법이 없어진다. 즉 10만 명 자체가 이후 소손녕의 허세처럼 실제로는 1~2만 명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크거나 아예 처음부터 신라는 싸울 생각이 없었고 공격하는 하기만 하고는 당나라에 엄청 공격을 세게 한 것처럼 거짓으로 알렸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건 나당전쟁으로 서먹서먹했던 관계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신라는 이때 (큰 병력 손실이 없었다는 전제하에) 외교적으로 이득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어쨌건 당은 나당전쟁에서 패한 뒤 사실상 묵인했던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이때 정식으로 인정했고, 신라는 다시 당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게다가 발해라는 신흥강국의 부상으로 당과 신라는 고구려 시즌2인 발해 견제를 위해 손을 잡은 면도 있었을 것이다. 대동강 이남의 경우, 당나라에게는 먹지도 못하는 떡이니 신라 소유를 인정해주고, 신라는 아예 뒷말 나올 일 없애서 좋으니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한편, 신라군이 퇴각했다는 소식에 급해진 당현종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했다. 총사령관은 그동안 숨어 있었던 동생 대문예. 이에 분노한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 제2의 수도였던 낙양으로 자객을 보내서 동생 대문예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런 당나라의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암살기도에 당현종도 대노했다.


3.4. 2차 침공 - 마도산 전투[편집]


그러자 무왕도 가만있지 않고 다시 제2차 당나라 침공전에 나섰다. 이미 당군이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기에 그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733년 만리장성 바로 앞 마도산(이후 '도산'으로 바뀜)으로 발해군은 거란과 연합하여 진격했다. 마도산 공격은 제1차 공격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무왕이 직접 친정에 나서 진두지휘했다. 이 전쟁에서 당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구당서》엔 당군 6,000명, 《신당서》엔 당군 10,000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신당서》 <오승자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 무왕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

고 되어 있다. 이러한 때 당나라 조정은 발해의 침공을 막는다고 정신이 없었다.《자치통감》을 보면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케 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주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을 통해 당 조정이 발해군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즉, 발해군이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전쟁을 펼친 셈이다.

또한 당현종은 발해 무왕이 만리장성을 넘어올 것을 걱정해서 마도산에 새로운 병력을 투입한다. 그리고 당군은 큰돌로 요충지를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가까스로 발해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전쟁은 생각보다 흐지부지 마무리되지만, 마도산 전투를 계기로 당나라는 신생국쯤으로 얕잡아본 발해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발해 역시 국가적 자신감을 얻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정책들을 추진해나간다.

당장 2차례의 당나라 침공 후, 무왕은 중경 서고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발해의 땅이 넓어졌기 때문에 국가 규모에 맞게 중경(현주 서고성)으로 옮긴 것. 현주는 이전 수도 동모산에 비해서 날씨가 적당하고 강이 흐르는 넓은 분지 지역이라 주변 여건이 좋았다.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해당된다.

이후 당은 발해의 내정에 쉽게 간섭하지 못했고, 무왕은 국정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발해의 당나라 정벌은 신생국이지만 절대 강대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결과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당나라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발해는 전쟁의 발단이었던 흑수말갈 정복을 마무리짓고 후방을 안정화시킨다. 흑수말갈은 이때 발해에 복속됐지만 이후로도 발해인 주류와 이질적인 정체성을 유지했고 발해의 지방 지배가 약화되는 9세기 말에 떨어져나간다.


4. 외교[편집]



4.1. 당나라[편집]


무왕 초기에 당나라와의 관계는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당나라의 흑수부 설치 문제 및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 등으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후 730년 대낭아 억류 사건이 발생한다. 대낭아는 무왕의 아우로 73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당해 736년에야 풀려났다. 또 732년 발해 장수 장문휴의 등주 공격, 733년 거란과 연합해 마도산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736년 아들 대번이 파견되고, 그 덕에 6년간 억류된 대낭아가 736년에 풀려났다. 그리고 737년에 3차례 사신을 파견해 관계가 개선되면서 적대관계가 다소 풀리게 되었다.


4.2. 일본[편집]


발해왕이 아룁니다. 산하(山河)가 다른 곳이고, 국토가 같지 않지만 어렴풋이 풍교도덕(風敎道德)을 듣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일본의 기틀을 연 이후 대대로 명군(明君)의 자리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발해왕은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너무 멀어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어진 이와 가까이 하며 우호를 맺고 옛날의 예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어 이웃을 찾는 것이 오늘에야 비롯하게 되었습니다.

《속일본기》, 728년 1월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넘는 게 가장 가깝고 안전한 루트다. 조선 시대의 조선통신사도 대한해협을 통해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날씨가 안 좋고 바닷길이 험해서 고생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남쪽은 신라 땅이니 동해를 건너가는 수밖에 없었다. 727년의 첫 사절단은 폭풍을 만나 홋카이도로 표류했고 아이누족과 싸우다 여덟 명만 살아남아서 728년에 겨우 교토에 도착해 천황에게 국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당시 도쿄와 니가타 동쪽에서 에미시, 에조라고 통칭되는 아이누 계통의 군장국가들이 자체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 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꽤 많은 교류가 있었다.

문왕 이전의 발해는 지리적으로 적성국인 당나라, 신라, 북방민족에 둘러싸였기에 바다 건너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했다. 특히 무왕 대 발해는 당나라와의 관계가 파탄 수준이었기에 당의 우방인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대일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5. 가계[편집]


  • 아버지: 대조영
  • 장인 혹은 외숙부: 임아
  • 종형: 대일하[3]
  • 동생: 대문예
  • 동생: 대호아大湖雅
  • 동생: 대림大蕃
  • 동생: 대낭아大郞雅
  • 아들: 대도리행
  • 아들: 대흠무(문왕)
  • 아들: 대번大蕃
  • 아들: 대의신大義信
  • 아들: 대욱진大勗進


6. 기타[편집]


  • 행적에서 공격적이고 냉정한 성격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고구려대무신왕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임금으로 볼 수 있다. 대무신왕이나 발해 무왕이나 건국 초기 정복 군주라는 공통점에다 가까운 가족에게 냉정했고 모험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차가운 면모는 건국 초에 국가의 기틀을 잡아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양.
  •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를 좀 회복했으며 당시 강대국이었던 당나라를 상대로 2차례에 걸쳐 크게 승리로 이끈 정복 군주이자 명장이다.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크게 패한 당나라는 더이상 발해에 대해 침공이나 내정 간섭을 하지 못했으며 중국 본토를 두들겨 패고 아수라장을 만들었는데 한창 전성기라던 당나라가 제대로 대항을 못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발해 역사상 최대 영토를 정복하여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과 함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비교되는 편.
  •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조영의 기록 중 '고려구장'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대조영이 고구려 시대 때 활동했던 장수였다면 발해 건국 당시 대조영은 최소 50대 정도로 추정된다. 이렇게 되면 대무예 위에도 형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고구려부흥운동 과정에서 자식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실질적인 장남이 대무예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발해 군주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소재가 판명된 군주이며, 능호는 진릉이다.

7. 연표[편집]


719년, 고왕 대조영이 죽자 아들 무예가 왕으로 즉위하다
720년 8월, 당나라가 무왕 대무예의 적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을 책봉하여 계루군왕으로 삼다
720년 9월, 당나라가 낭장(浪將) 장월래(張越來)를 보내다
720년, 대도리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21년, 대수령(大首領)을 당에 파견하다
722년, 미발계(味勃計)를 당나라에 보내 매를 바치다
724년 하조경(賀祚慶)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를 하다
725년, 오차지몽(烏借芝夢)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를 하다.
726년, 대도리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26년 11월 신축일, 아들 대의신(大義信)이 당나라에 입조하다
727년 9월 21일, 고인의(高仁義) 등을 일본에 보내 교류하다
727년, 이진언(李盡彦)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28년(일본서기 쇼무 덴노 5년) 1월 17일, 발해 고제덕(高濟德)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4]
728년(일본서기 쇼무 덴노 5년) 2월 16일,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다
728년 4월 계미일, 당에서 숙위로 있던 대도리행이 죽다
728년, 어부수토(夫須討)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29년, 아우 대호아(大湖雅)와 대림(大琳)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0년 1월, 아우 대낭아(大郞雅)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0년(일본서기 쇼무 덴노 덴표 2년) 8월 29일, 발해에 갔던 일본 사신이 돌아오다
730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731년 1월, 당나라에 새해 인사를 하다
732년, 대성취진(大姓取珍) 등 120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2년, 대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그곳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다
733년 1월, 당나라가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다
733년, 자객을 보내어 대문예를 살해하려 하다
736년, 수령(首領) 율기토(聿棄討)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737년,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대흠무가 즉위하다


8. 《신당서》 기록[편집]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크게 영토를 넓히자
또 전중시(殿中寺)와 종속시(宗屬寺)를 두었는데, 각 시마다 대령(大令)이 있다.
문적원(文籍院)에는 감(監)을 두었다. 영과 감 밑에는 소령(少令), 소감(少監)이 각각 있다.
태상시(太常寺), 사빈시(司賓寺), 대농시(大農寺)에는 각 시마다 경(卿)이 있다.
사장시(司藏寺), 사선시(司膳寺)에는 각 시마다 영(令)과 승(丞)이 있다.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의 8위가 있으며,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1명씩 있었다. 대체로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 이와 같았다.
관리의 품계는 질(秩: 벼슬의 차례를 뜻함)로 표현하는데,
3질 이상은 자색 옷에 상아 홀[5]과 물고기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찬다.
5질 이상은 분홍색 옷에 상아 홀과 물고기 모양의 은빛 주머니를 찬다.
6질과 7질은 연분홍색 옷을 입고, 8질은 녹색 옷을 입는데, 모두 나무 홀(木笏)을 찼다.

발해의 민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율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가자미이다.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과 낙랑의 배가 있다. 나머지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비슷하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 동북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속하였다.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이 책봉을 내려 왕위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입조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대무예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 대문예와 외숙 임아(任雅)에게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무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등지는 셈이 됩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 군사가 우리보다 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은 굳세고 강했다고 할 만하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못하니, 임금께서 저들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당나라에 귀순해 오니, 당현종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사신를 보내어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요청하였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방에 거처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유배보냈다"라고 꾸며서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발해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칙서를 보내도록 전하였다.

대무예는 당현종이 전후 사실을 숨긴 것을 알아채고 글을 올려 "폐하는 거짓을 천하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라고 꾸짖으니, 그 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데 있었다. 이에 당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하여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내쫓았다고 회답하였다.

10년 뒤에 대무예가 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대문예를 보내어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의 군사를 동원시켜 반격하고,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6]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측은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가 이 제안을 계기로 국교 회복을 염두에 두고 군대를 출진했으니 마침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3m)이나 쌓여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죽으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을 모아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치고 살아났다. 하남부(河南府)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대무예가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무왕(武王)이라 시호를 올렸다.

[1] 발해고 같은 역사책에는 태자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삼국유사에서 고왕이 죽고 세자가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세자가 대무예로 추정된다.[2]자치통감』에서 무왕이 당현종을 꾸짖는 부분에 단 주석이다.[3] 대조영의 형의 아들로 추정된다. 무왕이 임아와 함께 흑수말갈 정벌을 맡긴 것으로 보아 신임했던 왕족이었던 모양.[4] 정확히는 727년에 보냈던 고인의 등 발해 사신들이 이때 와서야 겨우 일본의 헤이조쿄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동해를 건너던 와중에 바람을 잘못 타서 하필이면 일본 열도 북쪽 에조치(에미시의 땅)에 들어가는 바람에 수령 고제덕을 비롯한 몇 명만 겨우 빠져나와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살해되었다. 이런 식으로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가려다 실수로 에조치에 닿는 바람에 에미시들에게 살해된 적이 이후로도 몇 번 더 있었다.[5] 홀(忽)은 관복과 함께 쓰이는 것으로 손에 드는 도구. 왕에게 아뢸 문제를 잊지 않으려고 써 놓을 수첩같은 것. 길다란 판자처럼 생겼다. 이후에 수첩용도는 사라지고 의례용으로 쓰임.[6] 다만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김사란이 아닌 김유신의 후손 김윤중이 신라군을 이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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