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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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ichard_II_King_of_England.jpg
왕호
리처드 2세
(Richard II of England)
별칭
보르도의 리처드
(Richard of Bordeaux)
생몰년도
1367년 1월 6일 ~ 1400년 2월 14일
재위기간
1377년 6월 22일 ~ 1399년 9월 30일
대관식
1377년 6월 17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3px-Richard_II_Signature.svg.png

1. 개요
2. 즉위 과정
3. 폐위 후 죽음
4. 평가
5. 부인들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영어: Richard II (리처드 2세)
프랑스어: Richard II (리샤르 2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1] 나름 뛰어난 정치력을 갖고 있어서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의회와 견제세력들을 효과적으로 억누르고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귀족들의 반발에 역공을 당해서 폐위된 후 죽는다.

잉글랜드 역사에서 리처드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했는데 리처드 2세는 그마나 전쟁터에서 죽지는 않았다.

2. 즉위 과정[편집]


후에 리처드 2세가 되는 보르도의 리처드(이후 이 문서에서는 리처드 2세로 명명한다)는 에드워드 3세손자이자 흑태자 에드워드켄트의 조앤차남이다. 하지만 이었던 앙굴렘의 에드워드가 요절하면서 사실상 에드워드 3세의 장손이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외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1순위로 올라선다.

리처드 2세는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때 리처드 2세는 런던탑까지 농민들에게 함락당한 상황에서 와트 타일러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대담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와트 타일러가 리처드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타일러가 데리고 온 수천의 농민군이 그가 죽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었으므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고 리처드 2세의 부하들마저 모두 도망가려고 했는데, 이때 14세의 리처드 2세는 오히려 농민군 앞으로 말을 몰고 달려가 자신이 그들의 왕임을 선언하면서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명령했다. 놀랍게도 농민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소년 왕을 떠받들었는데, 이는 중세 사회에서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서의 왕의 권위가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 상황이 나아지자 리처드 2세는 농민들에게 약속했던 권리를 모두 철회하고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을 명령하며 농민들의 뒤통수를 쳤는데, 이 사건은 그의 치세 내내 계속된 왕권의 지나친 강화와 공포정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리처드 2세가 왕이 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왕과 의회와 충돌은 심각해졌다. 리처드 2세는 서퍽 백작 마이클과 옥스포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등의 총신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였고 대귀족들이 중심이 된 의회가 이런 식의 통치를 달가워할 리 만무했다. 의회와의 마찰은 1386년 양 세력을 중재하고 있던 그의 숙부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계승 문제로 떠난 시기에 표면화되었는데 의회는 국왕의 최측근 중 하나인 서퍽 백작 마이클을 탄핵하고 11인 위원회를 개설하여 '당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물론 리처드 2세는 이러한 결정을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의회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의회파의 우두머리격인 5인의 청원파 중 한 명이자 막내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마스가 리처드의 측근들을 탄핵하며 리처드 2세에게 증조부 에드워드 2세의 선례를 기억하라는 위협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리처드 2세는 왕에게 대항하는 모든 시도는 반역이라고 주장하며 법을 고치는 등 강경하게 나갔다. 그러자 청원파는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리처드 2세의 총신 옥스포드 백작을 격파하는 실력행사에 나섰고, 신변의 위험을 느낀 리처드 2세는 일시적으로 의회에게 굴복하였다. 이후 1397년까지 양 측은 표면상으로는 화목하게 지냈지만, 리처드 2세는 칼을 갈며 청원파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1397년, 8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사병들을 기르고 추종자들을 강력하게 결속시키는데 성공한 리처드 2세는 의회에 대한 반격에 나서 5인의 청원파중에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투옥, 살해하고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반역죄로 처형해 버렸으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추방하는데 성공한다.[2] 그해 9월 남은 2인의 청원파인 헨리 볼링브로크와 토머스 드 모브레이가 다투는 일이 생기자[3] 헨리와 모브레이 둘 다 추방해 버림으로서 청원파에 대한 복수를 완료했다.


3. 폐위 후 죽음[편집]


1399년 곤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 2세는 헨리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의 영지마저 몰수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4] 리처드 2세가 추구하던 친프랑스 정책 덕분에 프랑스로 추방된 헨리가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보였고, 기고만장해진 리처드 2세는 웨일즈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시도가 반역이라는 법을 제정하는 등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데, 그해 5월 정국이 아직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방문계획을 세웠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이는 반란의 기회만을 엿보던 의회파에게 결정적으로 틈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제대로 통치를 못하고 그의 동생이자 반 잉글랜드 강경파인 오를레앙 공 루이가 프랑스의 실권자가 되면서 리처드 2세의 친프랑스 정책이 지리멸렬해졌고, 이는 프랑스로 추방된 헨리가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결국 그가 추방하였던 헨리를 필두로 하는 반란군이 잉글랜드로 침입하는 데 성공하고 [5] 헨리의 상륙이 알려지자 리처드 2세의 공포정치에 신물이 난 귀족들이 속속 헨리에게 합류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리처드 2세는 1399년 8월 급히 잉글랜드로 돌아와 진압에 나서나 이미 거의 모든 귀족들이 헨리의 편에 선 상황에서는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6] 결국 헨리의 반란군이 리처드 2세가 있는 플린트 성까지 진군해오자 리처드 2세는 막을 힘이 없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로 헨리에게 항복하고 폐위되었다. 폐위 과정에 대해 의회의 공식 기록에서는 그가 순순히 폐위에 동의했다고 하는 반면, 다른 연대기에서는 엄청나게 격노하여 제대로 말조차 못하다가 헨리를 반역자라고 저주하고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폐위된 그는 새로 왕으로 즉위한 헨리 4세에 의해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약 4개월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전해 내려오는 바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헨리 4세가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굶겨 죽였다는 말도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2세'에서는 헨리에게 제거당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실제로는 리처드 2세가 헨리 4세와 귀족들이 보낸 자객들한테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도유식을 통해 정당하게 즉위한 왕을 폐위시키는 일은 중세 기준으로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고,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던 만큼 헨리 4세 입장에서는 리처드 2세를 제거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을 것이다. 리처드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흑태자의 후대는 단절되었다.


4. 평가[편집]


리처드 2세는 옷차림[7]은 물론 외모와 머리모양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으며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고[8] 손수건을 고안하기도 했다. 성격은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이며 발작적으로 폭력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가족, 측근 등에게는 관대했다고 한다. 어린 왕이 즉위한 틈을 타 그의 숙부들이 왕위를 노리고 벌어진 분쟁은 결국 훗날에 더 크게 터졌는데 그게 장미전쟁이다. 시인 제프리 초서의 후원자로 알려져있다.

이런 점을 보면 한국의 단종과 굉장히 비슷한 면이 많다. 요절한 아버지로 인해 어린 나이에 왕권을 이었으며 강력한 숙부들 사이에서 휘둘리기 딱 쉬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30대까지 장성해서 나름대로 왕권 강화를 위해 숙청을 가하다가 패배한 것이니 단종과는 차이가 있다.(그러면 명나라 건문제[9]) 현존하는 공식 초상화 때문에 소년왕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망 당시의 모습을 가장 흡사하게 표현한 그의 무덤 조각을 보면 수염까지 난 장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종과 비교한 것은 어디까지나 포지션상 유사하다는 것이지, 단종처럼 안타깝거나 불쌍한 이미지를 주는 왕은 아니다. 사실 할 건 다 해보고 죽었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 그러나 동정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도유식을 통해 성별된 적법한 군주였고, 중세의 정치문화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현대인들의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이때문에 헨리 4세는 평생 찬탈자라는 굴레에 시달렸으며, 헨리 5세는 리처드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줌으로써 자기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다.

흰 사슴을 표장으로 삼은 사병 집단을 양성해서 전제정치를 시도했고, 과거 자신을 위협했던 5명의 대귀족을 복수의 명분으로 차례차례 제거해버렸다.[10] 더하여 왕의 말이 곧 국법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귀족들을 협박하거나 적당한 명분을 붙여서 영지와 재산을 마구 몰수하기도 했다. 와트 타일러의 난 진압 시에도 민란 지도자 와트 타일러를 회담장에서 살해하고, 농노들의 자유를 약속해놓고는 나중에 번복하자 분노한 농민들이 다시 일으킨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한테서도 신망을 잃고 만다.

왕이 강력한 권력을 추구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의문할 수도 있는데, 리처드 2세는 중앙집권국가의 왕이 아닌 봉건제 국가의 왕, 그것도 의회 중심의 정치가 발달한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왕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곧 죽음이라는 협박은 봉신과 군주 간의 계약을 근거 삼아 상호 존중하는 봉건제도를 전면부정하는 행위였다.

리처드 2세 이전에도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사례는 많았고, 실제로 이루어 낸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의회와 귀족들을 상대로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는 상호 존중 관계에서 성립했던 것이며, 그런 왕들도 여차하면 반감을 품은 귀족의 반란으로 한 방에 훅 갔다. 반면 리처드 2세는 오로지 힘에 근거한 압력과 공포를 내세워 권력의 강화를 추진했고, 이과정에서 귀족과 평민 간에 했던 약속을 어기는 일도 예사였다. 이는 권리와 목숨 양자를 위협받은 유력 귀족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리처드 2세의 추종자들이 단단히 결집해 있는 지라 자칫하면 전국적인 내전으로 불거질 가능성이 커서 참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불만은 헨리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적당한 명분과 교체할 후계자를 얻게 되자 급격히 폭발하고 만다.[11]

5. 부인들[편집]


첫 부인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4세 딸 앤이었고 금슬도 좋았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고 12년 만에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3년 후 샤를 6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지만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헨리 4세는 이자벨을 자신의 아들 헨리 5세와 결혼시키려고 하였으나 단념하고 친정으로 보냈다. 이자벨은 사촌 샤를 도를레앙과 재혼했으나, 3년 뒤인 1409년 딸 잔을 낳던 도중 죽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BBC에서 The Hollow Crown 이라는 제목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가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007 시리즈Q로 알려진 벤 위쇼가 리처드 2세를 맡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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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밀히 말하면 리처드 2세의 왕위를 계승한 헨리 4세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리처드 2세의 사촌으로 플랜태저넷 가문에 속해 있지만 헨리 4세가 제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켜서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리처드 2세를 끝으로 플랜테저넷 왕조가 단절된 것으로 본다.[2] 남은 청원파 2명 중 리처드 2세의 사촌이자 곤트의 존의 아들인 더비 백작 헨리 볼링브로크는 애런들 백작을 앞장서서 비난하며 왕 편에 서서 해리퍼드 공작이 되었고, 노팅엄 백작 토머스 드 모브레이 역시 리처드 2세의 편으로 갈아타서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죽이는데 앞장선 공으로 노퍽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이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3] 헨리는 모브레이가 자신에게 왕이 자신을 숙청할 계획을 짜고 있다며 반란을 권유했다고 고변했고, 모브레이는 결코 그런 일이 없다며 부정했다.[4] 사실 이것도 무조건 좋은 행동만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추방된 몸이라고 해도 당시 랭커스터의 영지는 합법적으로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갖던 토지였고 그건 당시 영국의 법이 확고하게 보장하는 바였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강화된 권력을 바탕으로 영지를 몰수해 버렸는데, 이건 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전통적으로 신성하던 국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귀족의 마땅한 권리를 무시한 행동이었다. 특히 국왕이 언제든지 자신들의 영지도 마찬가지로 빼앗으려 칼을 들이밀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귀족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이게 결국 헨리에게 반란을 일으킬 합당한 명분을 준 것은 물론 다수의 귀족들이 리처드 2세를 배신하고 헨리를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5] 이때 헨리는 자신의 상륙을 막으려는 노섬벌랜드 백작에게 자신은 그저 리처드 2세에게 빼앗긴 부친의 영지를 되찾으러 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을 노섬벌랜드가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리처드 2세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있는 상황이라 헨리의 상륙을 방조해 주었다.[6] 특히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리처드 2세의 폐위를 결정했다.[7]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합한 한 벌이 제각각 거의 2만 파운드(한화 3천만 원가량)에 달했다고 한다.[8] 중세인들은 흔한 편견보다는 훨씬 더 목욕을 좋아했다. 목욕문화가 쇠퇴하는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9] 반란을 일으킨 숙부 주체가 전투 중에 죽을까봐 안절부절 못했던 유약한 건문제와는 달리, 리처드 2세는 난폭한 성품과 한번 적으로 간주한 상대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복수심을 갖춘 인물이었다. 자신의 왕권을 제한한 숙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고문해서 죽이는 등 건문제와는 성격에서 영 딴판인 인물이다.[10] 그중 하나가 바로 친척이자 랭커스터 왕가의 시초인 헨리였다. 재빨리 태세전환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한패였던 영주 아렌델을 맹렬히 비난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얼마 안 가 프랑스로 추방당한다.[11] 특히 왕비를 프랑스 왕의 딸인 이자벨로 맞이하고 프랑스에 유화적인 친불정책도 시행했는데 이는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던 귀족들과 백성들을 반발하게 만들었다.[12]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성격과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 왕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