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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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실록에 기록된 무오사화의 계기
3. 사실
4. 배경
5. 김일손의 사초
6. 주요 과정
7. 《조의제문(弔義帝文)》, 《화술주시(和述酒詩)》
7.1. 김일손 저술의 문제점
8. 결과
9. 이후
9.1. 무오사화 정리
9.2. 억압받은 사실 기록
10. 사화(士禍)냐, 사화(史禍)냐?
11.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무오사화( 또는 戊午[1])는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로 성종때 성장했던 김종직 일파가 실록의 사초 문제로 숙청당한 사건이다.

2. 실록에 기록된 무오사화의 계기[편집]


급기야 사국(史局 - 실록청)을 열어 (이)극돈 이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祖)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29일, 후대 중종 때 무오사화의 전말을 밝힌다고 정리한 기사


무오사화는 보통 훈구파 이극돈유자광이 손잡고 청렴결백한 사림파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 인식이 반영된 기록은 연산군일기에서 무오사화를 총정리한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기록에는 무오사화의 시작을 성종실록의 편찬을 총지휘했던 좌의정 훈구파 이극돈과 사림파인 사관 김일손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2]을 한 걸 보고 김일손에게 수정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일로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때마침 성종의 사초에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게 된다.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항우에게 살해되었던 초회왕의 사례를 들어 세조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됐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시놉시스다. 예로부터 패드립은 왕도 뚜껑 열리게 만들 수 있다

이극돈은 위에서 언급한 일과 그 외에도 사림파와 자주 대립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사림파의 스승격의 위치였던 김종직과 엮어서 사림파를 숙청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을 유자광한테 전해줬다.

그리고 유자광도 《조의제문》의 엄청난 파괴력을 느꼈고, 마침 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둔 자신의 시를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자마자 떼어내어 불살라 버린 일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던지라,[3] 어느 날 새벽에 몰래 연산군을 찾아가 이를 고해바친다. 이에 연산군은 유자광의 부추김에 넘어가 당장 김일손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여기서부터 무오사화가 시작된다.

즉, 쉽게 요약하자면 각자 다른 이유로 사림파에게 원한이 있었던 두 훈구파 대신이 마침 조의제문이라는 훌륭한 떡밥을 알게 돼 단순무지한 연산군에게 떡밥을 던져 힘들이지 않고 사림파를 제거했다는 것이 무오사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3. 사실[편집]


일단 위의 갈등 이야기도 1차 사료인 연산군일기에 실린 서술이긴 하지만, 이는 중종 때 사관이 무오사화 과정을 총정리한다고 집필한 것이다. 신빙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일기에서 이극돈의 행동에 대한 기록들을 날짜별로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순되는 기록이 상당히 많다.

일단 이극돈과 사림파의 관계를 살펴보면, 관계가 안 좋긴 했다. 김일손이 이극돈을 까는 사초[4]를 썼고 그것이 국문 과정에서 드러나 추궁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극돈과 김일손의 관계에서 일의 발단은 이극돈이 이조판서 시절 김일손을 이조좌랑[5]으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이극돈은 김일손에 대해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평했다. 그래도 나중에 김일손이 이조좌랑이 되기는 했지만 이때 이 일로 김일손이 원한을 품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훗날 김일손도 이극돈에 대해 다분히 감정적인 확인도 안된 소문을 사초에 기록했고 더 나아가 김일손은 이극돈이 붕당을 획책한다며 탄핵하여 이극돈이 파직까지 당하면서 둘의 관계는 원수처럼 됐다. 그래서인지 이런 둘의 관계는 이극돈 무오사화 배후설의 떡밥이 됐다.

즉 이극돈이 김일손의 이조좌랑 임명에 반대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림, 특히 김일손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사람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당장 사림파는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훈구파에 의해 옹립된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세력이었지, 그 능력을 인정해 등용한 자들이 아니었다. 성종이 이들을 중앙 정계로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냥 초야에 묻혀서 학문이나 닦던 사람들이었고, 실무 능력은 형편없었다.[6]

그중에서도 김일손은 후술할 사초 건만 보더라도 사초를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쓰는[7], 관료로서의 능력이라곤 없는 인간이었다. 근데 그런 인간을 당하관(정삼품 이하) 인사, 즉 실무 관리직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8]인 이조좌랑에 앉히려고 하니 상식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김일손에 대한 이극돈의 비방도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황희의 경우처럼 공식적으로 이를 알리고 수정을 요청하면 될 일이었고[9], 사실이라면 애초에 공문서인 사초를 개인의 청탁만으로 함부로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이극돈은 예종시절에 세조실록 집필에 참여하면서 자기 부하들이 사초를 함부로 빼돌려 수정하다가 목이 날아간 사건인 민수사옥[10]을 옆에서 제대로 겪어본 사람이다.[11]

그러니 개인적으로 사초를 고쳐달라는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것을, 실록청 당상이고 예종 때 시절에 민수의 옥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 이극돈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후술하겠지만,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내용이 너무 난잡해서 실록청 직원들이 소위 개무시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극돈 입장에선 자신에 대한 김일손의 사초가 기분 나쁘더라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사라질 이야기를 굳이 (정치적이든 진짜든) 생명까지 걸어가며 공론화할 이유가 없었다.[12]

이극돈 개인의 능력을 살펴보면, 능력이 없는 주제에 아부를 잘해 승진했다는 김일손 등의 주장 또한 억측이다. 이극돈은 학식, 판단력, 실무 능력 등 어느 하나 빠질 곳 없는 실무형 관리였다. 실록에서도 이극돈이 '숭정대부 행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된 소식을 전하면서 "이극돈의 정밀함은 그의 형제들이나 심지어 그의 아비보다도 정밀하여… 이때[13]에 이르러 이극돈이 윗자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당연히 여겼다"라고 언급할 정도이다.[14]

후술하겠지만 이극돈의 행동이 무오사화를 키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극돈은 연산군을 최대한 말리려고 애쓴 사람이다. 사초를 보려는 연산군을 저지하고, 무오사화 전개 과정에서 이후 문제가 되었던 다른 사관들의 사초를 내놓지 않은 것도 이극돈이다. 물론 그가 사림파를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15], 그렇다고 강경 처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되려 연산군에게 밉보였는지, 그는 사화 이후 삭탈관직을 당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 무오사화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결국 이극돈은 사림파가 치기어리고 능력 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권력에 위협을 느끼고 숙청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유자광의 경우는 애매하다. 그가 무오사화 과정에서 사초를 임금에게 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내용이 난해했던 《조의제문》의 뜻을 연산군에게 알려준 사람도 사람도 유자광이고, 사림파와 사이가 나빴던 것 또한 사실이다.[16]

하지만 이것을 유자광의 원한 때문으로 보기도 부적절한 것이, 우선 유자광과 김종직은 김종직이 살아있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서로 크게 갈등을 빚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성종 때) 유자광이 현석규 사건으로 파직 후[17][18] 복귀할 때 복귀를 지지한 사람들 중 한 명이 김종직이었고[19], 위에서 말하는 현판 사건도 구체적인 근거가 없이 (중종 때) 사관의 평으로 넣어둔 야사였을 뿐이다. 오히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던 시절에는 유자광에 대한 무고를 저지른 무고자 박성간이 처형[20]당했는데, 만약 김종직이 그런 식으로 상관을 모욕했다면 단순 파직이 문제가 아니라 이 무고죄의 주범으로 찍혀서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그리고 유자광이 사건을 취조하는 사람이었지만, 사건의 발발 원인은 《조의제문》이 아니었다. 《조의제문》은 그저 사건의 확대를 불렀을 뿐이다. 《조의제문》은 분명히 김종직이 쓴 글이었지만, 《조의제문》을 사초에다 넣고 《조의제문》이 단종과 세조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밝힌 사람은 유자광이 아니라 김일손이었다. 유자광은 이것을 취조하고 발표했던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다.

결국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삼사를 약화시키는데 요긴하게 잘 이용한 사태였다. 사림이 여태 언론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 임금을 능멸한 것으로 규정한 연산군이 직접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일으킨 것이다.

4. 배경[편집]


먼저 당시 국왕 연산군과 대간들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당시의 임금이었던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통치 방식에 대하여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바로 성종이 대간이 간하는 일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이치에 어긋나도 다 들어주었다는 것.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어린 나이와 낮은 계승 순위에도 훈구파의 힘을 빌려 용상에 앉은 임금이라 초창기에는 훈구파가 국정을 총괄했었다.[21]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친정을 하려니 훈구파의 세력이 자기가 어떻게 손을 쓰기 힘들 정도였던 터라 그들을 상대할 무기로 사림들을 대간에 배치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성종 옹립에 앞장섰던 한명회 등의 원로 훈구 대신들이 하나 둘 나이가 들어 죽고,[22] 또 대간들이 줄기차게 훈구 대신들을 까준 덕분에 훈구파의 힘은 예전보다 확실히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부작용이 나타났다. 대간들의 발언력과 영향력이 성종의 통제권 밖으로 나갈 정도로 큰 것이다.[23]

이로 인하여 성종은 재위 기간 내내 훈구 대신들과 대간의 사림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을 키우는 식으로 줄타기를 하며 조선을 이끌었다. 비록 후대는 그런 통치 방식을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좋게 이야기해 주기도 하지만, 정작 성종 스스로는 "나는 명색이 이 나라의 왕인데 이렇게 신하들한테 시달리며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24]

그러나 연산군은 아버지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성종이 대간에게 이렇게 고생을 한 건 전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25] 출신과 고작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에서 비롯됐지만, 연산군은 왕의 정실 부인이 낳은 첫째 아들, 즉 적장자(嫡長子)였고 20세 나이에 즉위했다. 적장자라는 확고부동한 정통성에, 딱 좋을 나이에 즉위했던 것이다.[26]

당시 '적장자 왕세자'라는 지위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적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조선에서[27] 크나큰 메리트라 할 수 있었다. 추측이지만, 아마 이 때문에 연산군의 주변에서도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다음 왕위에 오를 게 확실한 왕세자 연산군을 떠받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 환경 속에서 연산군 스스로도 왕과 왕족에 대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자랐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곧 조선"이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갖고 자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28]

그런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자라는 연산군의 눈에 '조선의 왕인 아바마마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별 시답잖은 것까지 이리저리 물고 늘어지며 지들 말 들으라고 설치는 대간 놈들'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 결과 대간에게 짜증과 울화통은 터뜨리더라도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그들의 악다구니를 결국은 다 들어주었던 아버지 성종[29]과 달리, 연산군은 대간들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매우 단호하게 물리쳤다. 이에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여 보겠다고 평소 같으면 가만히 둘 문제까지 거의 게거품을 물며 덤벼들었다.

연산군 즉위 초기의 기사를 보면 대간들은 연산군 즉위 초기에 소위 '신고식 모드'에 들어갔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이 아버지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에서 대간은 '인'을 주장했고, 대신은 '성'을 주장했는데 '성'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대간들이 '성'을 주장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대간의 존재 이유는 언로(言路)를 열기 위함이고, 언로를 열려면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지 연산군의 주장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주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이 의견을 낸 것에 처벌이 아니라 기각된 것만으로도 언로를 막는다며 성종 때부터 반대했던 이들이다.[30]

이 과정에서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능상)'를 혐오하는 개인적 성향을 지닌 데다 임금이 하는 일에 무분별하게 태클을 걸던 대간들에게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연산군과, '임금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견제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 역사상 가장 대간들에게 관대했던 성종 치하 25년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시콜콜 잔소리를 매우 위험한 수위로[31] 해댄 대간들은 필연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연산군 초기의 국정은 혼란스러웠다.

당시 인사 업무는 최종적으로 대간이 동의해야 확정되었는데 대간들이 툭하면 연산군이랑 싸우면서 총파업을 해대니 인사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러니 행정이 제대로 될 리가. 그나마 실무적인 부분은 잘 굴러가서 백성들의 삶은 괜찮았다고 하는데, 이게 우리들에겐 놀라운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연산군이 자제를 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과 대간들의 대립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연산군이 즉위한 해인 1495년에 벌어졌던 불교 문제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아버지를 위해서 '수륙제'[32]를 지냈다. 이 수육제는 조선이 개국한 이래 모든 왕들이 다 지냈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치 아래 불교 타도를 외쳤던 신하들도 자신들이 죽을 때는 공공연하게 지냈으며, 인수대비까지 찬성한 일에[33] 대간들이 벌 떼같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34][35]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까지 상소를 올려서 연산군을 거든 노사신을 파직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연산군은 상소가 과도하다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조리 하옥하고 추국하는데, 대간들이 성균관 유생들을 하옥하면 안 되고 대간들은 말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루에 한 번 정도 비율로 이어졌다.

다른 예로는, 훗날 중종의 외숙부가 되는 윤탕로를 통해 불경을 편찬하게 하는데, 이 문제로 대간들의 반대가 다시 반복된 일도 있다. 그 외에 정미수를 당상관으로 임명하는데, 정미수가 문종의 외손(정종(부마)과 경혜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이 반대해 몇 개월을 끌었다.

그 다음엔 정도전의 후손[36] 정문형을 우의정에 임명하는데 이것도 결사반대로 또 몇 달을 끌었다. 대간이 이때 이유랍시고 들이민 건 그냥 '특별히 공을 세운 게 없다'라는 이유뿐이었다. "정도전은 감히 종친들을 해치려 한 자[37]무인정사태종대왕께서 친히 처단하신 자입니다. 그런 자의 후손을 중용하는 건 안 됩니다."같은 것도 아니고.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왕조 시대에 왕이 한번 내린 결정은 쉽게 되돌릴 수가 없다. 그 자체가 왕이 잘못을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왕의 권위 자체에 큰 흠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 왕으로 넘어가 버리면 "자식인 현왕이 아버지인 선왕의 흠을 드러낸다=불효하는 왕"이라는 논리로 더더욱 큰 결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큰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공이 없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왕이 직접 내린 인사 결정을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연산에게는 "우린 당신의 권위 따위 우습다"는 뜻으로 보이게 된다. 연산군도 이에 대해 답답해하며 "지금 의논하는 걸 보니 정문형이 어떤지는 말도 하지 않고 대간들의 말만 나오고 있다. 내 말은 우습게 여기고 대간들은 두려운 건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 13권, 연산 2년 3월 29일 정미 3번째기사) 그 다음에는 노사신에 대한 탄핵이 다시 몇 개월.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문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적장자 왕세자로서 자부심이 강했으며 아버지가 대간들에게 휘둘려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을 보아왔던 연산군과, 말발과 비판이 자신들의 존재 근거라고 믿었던 대간들 사이에서 양보란 곧 죽음이라는 것.[38] 자연히 즉위 이후부터 성종과는 다르게, 대간에 대해서 강성(強性)인 연산군과 대간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대간들을 하옥하고 정거[39]하는 등 어느 정도 채찍을 쓰기도 했지만, 우의정 정문형의 임명을 취소하고 그럴 듯한 비판은 칭찬하는 등 당근도 많이 내밀었다.

노사신, 윤필상 등의 피혐[40]에는 "다 내 결정이었으니 내 책임이다"라고 보호해서 대신들과 사이가 좋았고, 승지급들을 매개로 대간의 제어를 시도했다. 하지만 대간은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았고, 이렇다보니 연산군의 성격이 아니라도 이런 식의 부드러운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타협적인 삼사의 태도는 김일손김종직 등의 처리 문제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때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됐다. 연산군과 훈구 대신들이 김일손과 김종직 등에게 적용한 범죄는 단연 '대역죄'였다. 연산군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이자 선왕 성종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세조를 모독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사는 이보다는 보다 더 온건한 쪽의 처결을 주청하며 다른 의견을 내버렸다.[41]

그러자 연산군은 삼사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대간 니네들이 김종직-김일손 무리와 같은 편인 게 아니라면 이렇게 나올 순 없다"면서 대간들을 김일손, 김종직과 연루시키며 삼사의 대간들을 마침내 직접 처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에 질려버릴 만큼 대간들에게 시달리던 훈구 대신들은 연산군의 대간 손봐주기에 적극 동참했다.

5. 김일손의 사초[편집]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는 주로 사관으로 활동했다. 다만 업무 능력은 정말 떨어져서 사관의 업무인 사초 작성을 자기 멋대로 뒤죽박죽 써버렸고, 이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성종실록을 집필할 때 실록청 당상 윤효손(尹孝孫)은 '(김일손의 사초는) 날짜에 따라 기사(記寫)하지 아니해서, 어느 날 아래에 편입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고 언급하는 등 실록청 관리들에게 무시당할 정도였다.[42][43]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개인 일기장에 적어도 문제가 될 법한 것들을 사초에 잔뜩 써놨다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성종의 할아버지요,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를 모독하고 그의 집권이 부당하다는 글들이었고, 일부는 왕실을 모욕하는 글들도 있었다. 그나마 근거라도 정확히 썼으면 모르겠는데, 하나같이 소문에 불과한 카더라급이거나 "근거? 그게 뭔데?" 하는 내용이었다.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 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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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12일 기사

  • 김일손은 허반에게서 들었다고 증언했는데, 정작 허반은 자기 집안의 소문 중 '의경세자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 권 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하고, 권 씨가 안 먹자 세조가 화를 내고 권 씨가 달아났다'는, 김일손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소문을 알려 줬다. 그걸 저렇게 마개조해서 적어 놓은 것이다.
김일손의 사초 중 가장 근거 없는 내용이자 위험한 내용이다. 당장 세조는 정희왕후 외의 후궁은 다른 왕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고, 그나마도 수양대군 시절 으로 들였다가 왕이 된 후 후궁으로 격상한 것뿐이지 이후 새로 후궁을 들인 적은 없었다. 여기에 조정 회의 때 '내 아내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던데 말이야'라는 식으로 정희왕후의 의견을 인용할 정도의 애처가였다.
물론 왕가의 간통 여부는 왕가에서 증명해 주지 않는 한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고 특히 내명부의 불륜 문제는 왕위 계승과 직접 연관되는 사항이라 특히 신중하게 써야 했는데[44] 김일손은 그러지 않았다. 이걸 들은 연산군이 "실록은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써야 하는데 어찌 (누구한테) 들은 걸로 썼냐?" 라고 할만큼 공정성에 문제가 큰 일이었다. 더불어 덕종의 후궁이라는 기록도 연산군에게는 엄청난 모욕이 될만한 내용인데 덕종(의경세자)는 연산군의 할아버지, 즉 성종의 친부이기 때문이다. 성종은 의경세자의 아들로 계승했는데도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보다 급이 확 떨어지는 사생아 출신이라는 말이 나도는 것은 치명타급이었다

소릉의 재궁(문종의 부인인 현덕왕후의 관)을 꺼내 바닷가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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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12일 기사

  • 계유정난과 관련된 야사에서 이 이야기가 자주 나와서 이를 사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현대에도 많다. 현덕왕후를 소릉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터가 크게 좋은 자리가 아니었을 뿐, 바닷가와는 거리가 먼 위치다. 무엇보다 정말 바닷가에 버렸다면 중종 때 현덕왕후를 다시 소릉에 묻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정사'인 실록에 올리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노산군의 시체를 숲속에 버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이가 없으니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 한 동자가 어느 날 밤에 와서 시신을 짊어지고 달아났는데,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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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13일 기사

  •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이것도 사실로 착각되는 김일손의 날조 중 하나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그냥 방치했고 이를 엄흥도가 몰래 묻어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도는데, 중종실록에는 아전이었던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는 것과 그 무덤의 위치를 당시 영월 지방 아이들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중종실록 즉 시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는커녕 단종이 죽고 60년 지난 뒤인데도 주변 사람들은 거의 다 알았다. 다만 노산군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국왕의 예로 장사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45] 무엇보다 세조실록에서는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세조실록라고 기록했고, 이게 국가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세조실록에서는 동네 아전이 묻어준 정도면 충분히 예를 갖춘 것이라고 봤을 수도 있고, 사림들 입장에서는 저건 암매장이고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평가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처참할 정도로 과장되어 있는 데다 공식적 기록인 세조실록의 내용과 다르게 기록했으며,[46] 이름 모를 동자가 등장하는 등 이건 소설 한 구절이지 사초에 걸맞는 내용이 절대로 아니다. 정 남기려면 '~~가 남긴 글에서 보았다'라는 식의 출처라도 제대로 명확하게 남겨야 했다. 게다가 이 자체가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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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12일 기사

  • 이 구절은 당시 역적 취급을 받던 황보인김종서에게 역적이라는 표현 없이 일반인처럼 써서 문제가 되었는데, 김일손은 그 이유를 두 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자기가 볼 때 이들은 역적도 아니고 세조는 절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죽였다고 비난하는 말이 된다.
실제론 이 두 사람은 절개를 지킬 새도 없이 죽었다. 김종서는 세조가 건네준 글을 읽다가 세조의 종 임어을운의 철퇴에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세조 측이 보낸 무사들이 오자 자기를 그냥 체포하는 건 줄 알고 갔다가 죽었다. 황보인은 명에 의해 궁에 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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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12일 기사

  • 김일손은 이것을 박경에게 들었다고 진술했고, 박경은 이것을 동대문(東大門)에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승려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찌라시가 붙어있기에, 이것을 김일손에게 알려줬다고 진술했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충 감이 오겠지만, 김일손의 사초는 그야말로 왕실을 능멸하기로 작정한 지경이다.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더욱이 자존심이 강하고 왕의 권위를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던 연산군으로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큰 문제였다.

왕실의 권위 문제를 둘째 치더라도 이 과정에서 김일손의 처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엄연한 공식 역사 기록이고, 사초는 그 1차 초안인데 거기에 확인이 불가능한 소문성 기사를 그것도 제 입맛대로 왜곡해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며 제멋대로 집어넣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초를 중요히 여겨서 쉽게 삭제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세종실록 편찬 때도 "황희는 재산도 넉넉하지 않고 장인에게 노비 셋만 물려받았는데 저리 잘사는 건 매관매직을 했기 때문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라고 사관이 사고를 쳤다. 논란이 이어지고 삭제하자는 분위기가 우세했지만 어쨌든 사초를 삭제하지는 않는다고 결정되어 세종실록 10년(1428) 6월 25일자에 실리게 됐다. 사초도 아니고 실록으로 완성됐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손하는 519년 내내 어떤 정권이 됐든, 수정실록을 다시 쓰면 썼지 기존 실록을 도로 뜯어서 수정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실록은 단순한 역사 기록 수준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왕들이 결정을 할 때 참조 지침, 내지는 관습법 같은 역할도 하는 문서였다. 당장 김일손 일당이 왜곡한 내용을 살펴보면 관련 인물의 후손들의 복권 및 공신 임명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특히 연좌제가 있던 조선에서는 후손의 범죄를 가감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 즐비하다. 더불어 조선 시대에 불륜은 파혼이 문제가 아니라 장 90대[47]에 달하는 중범죄여서[48] 불륜 문제를 조작한 것은 조선 시대 기준으로 누구 하나 골로 보내려고 작정한 수준이다. 그것도 일반 평민도 아닌 왕실 종친들을 대상으로 한 조작이다.

세조의 부당한 집권을 사림 출신으로서 개인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사관의 본분을 잊고 확인 없이 소문성 기사를 집어넣은 것은 현대의 관점으로 봐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하물며 그 세조의 증손이 왕이고, 그 왕이 다른 사람도 아닌 '왕권 지상주의자'인 연산군인 시절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문제는 세도정치 시대의 최대 세도가라도 극형을 못 면하는 문제이다.[49]

이렇게 김일손이 저지른 사고가 커서 그런지 연산군이 폐위된 후 김일손이 복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손이 했던 짓을 저지른 사례는 다시는 안 나왔다. 달리 말하면 복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권이 이루어진 중종 치세부터에서도 후세조차 김일손이 명백히 잘못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이러한 과오를 절대로 덮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반면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주요 과정[편집]


성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즉위한 연산군은 이극돈 등등의 관리들에게 성종의 실록을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1차 기록인 사관들의 사초를 모았고 이중에는 김일손의 사초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김일손의 사초는 훈구파(+연산군)와 사림파의 갈등 이전에 그냥 못 쓴 사초라서 국가 기록물인 실록에 넣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성종실록 편찬 초기에는 묻혔다.

그러나 1498년 실록 편찬이 마무리가 되어갈 때 즈음에 성종실록의 편찬 책임자인 이극돈은 한치형의 언급을 계기로 김일손이 사초에 뭔가 이상한 짓을 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기사에 적힌, 이극돈이 해당 사건에 대한 항변 상소에 따르면 이극돈은 이후 노사신 등과 의논하여[50] 공식적으로 이를 수정할 것을 논의하고, 이후 7월 9일에는 좌의정 어세겸 등과 같이 김일손이 쓴 이 초특급 찌라시를 목격하게 된다. 이극돈은 상소에서 자신은 16일에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고 항변했지만, 이 발언은 연산군한테 안 죽으려고 항변한 것으로 보이며[51], 실제 이극돈의 행동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이 찌라시를 숨기거나, 적어도 김일손 주변인으로 사건을 축소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난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터무니없는 기록을 보고선, 노사신과 더불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냐?"라며 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김일손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극돈은 이것을 연산군에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냥 넘길 경우 자신에게도 책임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이극돈은 여러 사람들에게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는데, 그 중 마지막으로 물었던 유자광이 이 이야기를 듣자, "아니,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라고 반문하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과 같은 대신들에게 "우리들은 세조 대왕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이 찌라시를 알려야 한다고 설득했고, 결국 이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1498년 7월 11일, 김일손의 스캔들 기사는 결국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 연산군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이에 연산군은 바로 김일손이 쓴 사초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원칙적으로 임금이 사초를 직접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극돈은 처음에는 극렬 반대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근거 없는 소문을 사초에 집어넣어서 왕조를 능멸이라는, 거의 역모에 준하는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해 대신들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문제되는 부분만 직접 선별하여 연산군이 이를 보는 것으로 절충했는데 이마저도 무오사화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7월 12일, 연산군은 고향으로 낙향해 있던 김일손과 허반을 잡아와서 직접 국문(鞫問)했는데, 의경세자의 후궁 기사를 시작으로 김일손에게 문제의 기사의 출처를 묻기 시작했다. 김일손이 출처를 밝히면서 연루자들이 하나하나 체포되었고, 왕에게까지 소리를 높이던 대간들조차도 단체로 입을 다문 채로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52] 이 당시까지만 해도 문제의 초점은 그 스캔들 기사의 출처였다. 그런데 사초에 적혀있던 김일손의 다른 기사 부분이 추가로 적발되면서,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게 된다.

7. 《조의제문(弔義帝文)》, 《화술주시(和述酒詩)》[편집]


바로 이때 《조의제문》과 《화술주시》가 걸려들었다.

7월 13일에 김일손을 심문하던 도중에 단종의 시신에 대한 기사를 추궁하자, '김종직이 단종의 일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분개했고, 때문에 자신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었다'면서 김일손 본인이 직접 실토했다.

사실 《조의제문》은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한 글이 아니었다. 워낙 내용도 어렵고 은유가 많았는지라 도대체 김종직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알아듣기도 어렵고 제 스승이 사적으로 쓴 글을 국가 기록인 사초에다 끼워 넣었다는 일 자체가 김일손의 관료 부적격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53]

하지만 김일손의 증언을 계기로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해석하기 시작했고, 이틀 만인 7월 15일에《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해석해서《조의제문》이 계유정난을 비난하는 글[54]이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유자광의 보고를 들은 연산군은 이에 분노해 7월 17일에는 대신들에게 《조의제문》과 그 뜻을 알려주면서 "이 새끼들 봐라!? 이따위 생각을 품고 있던 주제에 그걸 숨기고 내리 세 조정을 섬겼단 말이냐? 무서워서 내 몸이 다 떨린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신하들도 동조했는데, 영의정 윤필상이 즉각 "글이 너무 사악해서 감히 입으로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두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대역죄를 적용하시어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소서"라고 요청하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신하들이 이 의견을 따라서 그들을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김일손과 마찬가지로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과 홍한까지도 앞을 다퉈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라고 청했다. 표연말과 홍한은 연산군 초기에 연산군에게 사사건건 트집 다 잡았던 사람들인데도, 막상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자기들 스승의 시신을 찢어발겨야 한다고 스스로 고할 정도로 물러선 것이다.[55] 심지어 가장 온건한 의견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는 않은데 이미 죽은 놈을 또 찢을 거나 있습니까? 작호만 거둡시다."[56]였을 정도였다. 물론 이 사람들은 '왕실을 모독한 반역자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곧장 국문장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김종직의 제자들이 조의제문의 내용 때문에 역모죄로 잡혀 들어오면서 무오사화는 절정에 이른다. 여담으로 이 김종직의 제자들을 가려내는 과정도 어처구니없던 게 그 명단을 김일손이 또 사초에다가 적어놔서[57] 김종직의 제자들은 빠르게 잡혀 들어갔다.

7.1. 김일손 저술의 문제점[편집]


김일손 일파의 문제점은 두 가지인데, 바로 자신들이 못마땅해하는 세조와 그 후손들인 국왕들에게서 봉록을 받아먹는 관료 생활을 했다는 것과,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글을, 그것도 국가의 공식 공문서이자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에 들어갈 자료인 사초에 적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진정한 문제는 후자의 사초 문제. 전자는 당대의 유교 윤리상으로 문제가 된다면, 후자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김일손 일파는 속으로는 "세조는 왕이 아니라 모리배들이 세워준 우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세조가 주는 벼슬을 받고 국가의 녹을 먹어온 것이다.[58] 그뿐만 아니라, 벼슬살이를 하면서 그 관직을 이용해 몰래 비난을 일삼아 온 셈이었다. 이것은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농락함.)의 죄로, 당연하게도 전근대 시대엔 대역죄나 다름없었다. 당장에 김종직의 제자라던 표연말과 홍한이 군사부 일체를 버리고 스승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세조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생각을 품었거나 비슷한 내용의 의견을 표출했더라도 그 방식이 '관료'로서가 아닌 '선비', 즉 지식인 개인으로서의 모습이었다면 문제의 성격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을 것이다. 그 역시도 결국엔 국왕과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발각되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나라고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신왕조의 개창에 참여하지 않고 은둔한 선비들이 그 나름대로 추앙받았던 것처럼, 비록 현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의 절개라고 해도 그 절개 자체는 아름답게 여기는 인식이 유교 전통 내에서는 확실히 있었다. 조선의 국왕인 태종이 새로운 왕조 조선을 위해 일해달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논지로 조선 왕조 자체를 부인하면서 낙향한 길재를 직접 높이 평가해줬던 일 등등을 생각해 보면, 조선에서도 관료가 아닌 사람들의 사상은 반란 수준이 아니라면 상당 부분을 보장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단종의 죽음과 그 지지자들의 죽음은 수백\년이 지난 후에도 다들 억울하다고 여겼던 걸 감안하면 일개 선비로서는 충분히 그런 기록을 남길 만했다. 실제로 이렇게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켜 벼슬을 버린 이들은 생육신이라 불리면서 후일 시호를 받거나 추증을 받는 식으로 절개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세조 비판 세력의 경우 대체로 세조 정권기 및 그 이후에 벼슬에 올라 녹봉을 받으며 일을 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논쟁이 사육신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소개되어 있어서, 이들에 대한 복권이 꽤나 나중인 조선 후기에나 이루어지는 배경 겸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선조 때 사육신을 재평가해서 복권시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헐 세조 밑에서 벼슬하며 봉록 먹어놓고 이 짓 했는데 뭔 헛소리?"라면서 씹기도 했었다.[59]. 또한 이황조식에게 비난받았던 이유도 "처사라는 것이 벼슬할 거 다 했는데 뭔 놈의 처사?"였던데, 이처럼 처사가 절개를 지킨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선 벼슬을 안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근데 김일손 일파는 둘 다 얻으려고 했으니까 문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리 세조가 가장 정당성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대도 왕실 입장에서는 이를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고, 세조는 당시 중흥의 선조로 취급받았으며, 단종 비 정순왕후가 그 시점에도 살아있는 등 끽해야 2세대쯤 전의 사건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으며, 노산군에 대한 첫 제사를 국가에서 지내 준 것이 중종 대이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왕실 명부 선원록에서 노산군의 이름을 뺀 것도 중종 대다.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된 것은 수백 년 후인 숙종 시대의 일이었고[60], 그 무덤이 폐허가 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고도 아무도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세조 이후대의 국왕들 모두가 그 세조의 자손들이자 후예들이다. 숙종 때 노산군이 복권될 당시에 단종 복위를 주청한 집권 세력도 노론과 소론 등등의 서인계 붕당들이었는데 이 서인계 붕당들도 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운 훈구파의 후신 붕당[61]이기도 했다.[62][63] 그랬기 때문에, 당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을 능멸한 행위였다. 한마디로 왕실에게 있어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 전부가 반란의 무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연산군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감히 증조부를 모욕한 역적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숙종 때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권될 때 그것을 강력히도 주청한 송시열이나 권상하 등도 세조의 즉위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고, 단종 사사도 세조의 본뜻이 아니라고 주장했었을 정도다.[64][65][66] 물론 숙종이 민회빈 강씨를 사면시킨 것처럼 그냥 깔끔하게 정리하는 경우도 있었긴 했지만 이것도 결국 왕이 결단을 해서 가능한거였다. 결국 왕이 마음에 있지 않는 이상 언행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게다가 해석 여지에 따라서는, 아예 세조의 뒤를 이은 왕통까지도 부정한다는 혐의까지 받을 수 있다.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에서 핵폭탄급의 위력을 발휘했던 게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더불어서 마찬가지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과 유사한 내용인 화술주시까지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연달아 사림 세력들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은 사림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대간들이 터져나가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정리하면 김일손의 혐의는 기군망상, 근거 없는 소문으로 사초를 훼손한 죄, 선조를 모욕해 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모죄의 세 가지이며, 하나하나가 극형에 처해질 만한 수준이다.

이러니 연산군이 흉폭하거나 옹졸한 인물이라서 김종직을 부관참시할 것을 명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전근대 시대 국왕이라면 왕실을 능멸한 반역자들에겐 인정사정 안 봐주고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했다.[67] 더군다나 연산군은 이때까지만 해도 폭군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개념적인 군주였다. 그리고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입장에서는 김종직이나 김일손을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데, 세조한테 개소리하면서 대들다가 털린 김종직[68]을 아버지가 성은을 베풀어서 중용해 줬는데, 이따위 글이나 쓰며 그 선왕의 조부를 모독하고 있었으니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치를 떨 만도 했다. 김일손의 동기인 표연말과 홍한이 스승인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라고 다른 대신들처럼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과 가장 온건한 의견을 낸 사람들이 김종직에게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려줘도 마땅찮다는 이야기를 한 게 괜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도 확실히 이 일이 떨떠름했는지, 김종직과 김일손을 신원할 때에도 그 두 사람은 성종한테 죄를 지었다고 밝혔고, 나중에는 위 소문의 제공자였던 허반의 딸에게 노비를 주는 건의를 거부하거나 유자광을 다시 공신으로 복권시키기도 했으며, 그 이후엔 무오사화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이극돈[69]도 신원해 주려다 실패하는 등등[70] 무오사화를 불편하게 본 행동들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종은 연산군의 동생이자 성종의 적차자로 똑같이 세조의 증손자인지라 조상을 모욕한 사건을 그냥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중종 때 거짓말[71]와 달리 이 일이 성종 생전에 그의 귀에 들어갔다면, 평소 신하, 특히 터무니없는 것조차 꼬투리 잡아 괴롭히던 대간들에게 마지못해 져주던 성종이라도 조용히 넘어갈 가능성은 극히 낮았을 것이다. 성종은 정통성 문제로 평생 골머리를 잡던 인물로, 할아버지의 정변은 둘째 치고 왕위 계승 3순위였던 처지에 1순위, 2순위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로 왕이 되어서 더 그랬다.[72] 이런 와중에 일족의 역린을 건드리다 못해 뽑으려 드는 이런 글을 알았다면 분노는 둘째 치고 이 기회에 대간들 눈치 안 보고 왕 노릇 좀 해보자는 생각으로 인정사정없이 숙청했을 것이다.

특히 말년의 성종은 사림의 악다구니와 30대 후반이라는 원숙한 나이 덕에 대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늘어나는 등 대간들이 '우리 전하께서는 이전과 다르게 엄청 변했어요.'라고 할 만큼 달라졌다. 더군다나 성종이 별것도 아닌 일들로 억지를 부리며 대드는 대간들을 그냥 넘어간 건 그들이 성종이 중요시하는 유교적인 도덕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다리가 세 개 달린 닭이 태어난 일에 대해 왕의 탓이라고 대간들이 따지자 미신을 가지고 그런다며 불쾌해했으며, 반대로 유교적 도리를 어겼다고 판단된 폐비 윤씨, 어우동에 대해선 법을 무시하면서 극형을 내렸다. 성종의 이런 행적을 보면 무오사화마냥 유교적 군신 관계에 배치되면서 자신의 정통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사건에 성종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8. 결과[편집]


이후 줄줄이 사초들이 공개되었다. 김일손의 동료였던 다른 사관들도 김일손만큼은 아니지만 악의적인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은 걸 역사랍시고 사초에 기록하며 세조를 까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사초에 불순한 말을 쓴 사관들이 차곡차곡 걸려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가 걸려든 사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태가 역모급으로 확장된 이상 용서는 없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썼다는 것도 큰 문제인데 감히 왕실 능욕급의 사초를 생각 없이 썼다는 게 그 당시엔 봐줄 만한 일도 아닐뿐더러, 애당초 관직 생활 하는 이 사관들이 죄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름대로 배웠다고 할 만한 이들인데 이 정도면 생각 없이 역모를 저질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73][74]거열형. 이목, 허반은 참수형, 강겸[75], 표연말, 홍한 등은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형에 처해졌고, 이들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 또 사관이었지만 무오사화 이전에 죽은 신종호는 관작 삭제를 당했다.그래도 이 정도면 가벼운 거다. 이 밖에 사림파의 무수한 사람들이 대부분 유배를 당했고, 김일손에게 소재를 제공해 준 사람들도 유배를 당했다. 특히, 예천 권씨들이 많이 죽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반대로 두 번째 사화에서는 광주 이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표해록의 저자인 최부도 김종직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일로 유배를 당했다.

연산군은 이들이 형을 당하는 과정을 모든 관리가 지켜보게 했고, 이 과정에서 낯을 가리거나 참석하지 않았던 관리들도 처벌받았다. 실록청 관리들 중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파직되었고,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은 좌천되었으며, 조위는 유배당했다. 이후 유자광은 8월에 다시 이 일을 끄집어내, 남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유배시켰다.

사실 이때 사림파는 역모 혐의 등으로 가루가 될 뻔했다. 이때 유자광은 "이자들의 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간당들 일체를 뿌리 뽑아 버려야 조정도 깨끗해지고 뒤탈도 없을 것이다"라며 사림을 초토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훈구파이며 사림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사림으로부터 소인배 소리를 듣던 노사신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최대한 죽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앞에 했던 유자광의 말에는 "무령군은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청론(淸論)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지 없는 게 나라의 복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그 덕분에 사형이 확실시되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유배형으로 끝났다. 사림파도 그의 은혜를 생각해서, 나중에 《연산군일기》 등에서 유자광 등 다른 훈구파는 죽어라 비난하지만 노사신은 잘 비판하지 않는다.[76]

노사신은 김일손의 사초 파문이 대형 옥사로 번질 듯하자 사안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다음과 같은 말들로 사림을 옹호했다. "연루자를 국문해야 하겠지만, 제자라고 모조리 국문하면 소요가 일까 걱정이 되옵니다.", "종직은 대역죄로 논하는 게 당연하지만, 김일손 등은 사문만을 찬양했으니 종직과 죄를 같이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77]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등. 노사신이 자신을 공격하던 사림을 이렇게 적극 옹호한 이유는 대간이 약해지면 신권 자체가 약해지고, 지나치게 강화된 왕권은 유교 정치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대승론(大乘論)적 시각에 근거한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노사신은 무오사화가 마무리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는데, "신의 소원은 상벌이 적절히 행해지게 되는 것과 전하께오서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는 것뿐이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다만 이 기사는 후대에 유자광의 무오사화 행적을 정리한다면서 넣은 기사로(연산 4년 7월 29일 기사) 해당 날짜의 기록은 크게 다르다. 우선 해당 기사의 출처로 예상되는 연산 4년 7월 26일의 사초 관련자 처벌 내용 기사를 살펴보면 노사신의 경우 "청론(淸論)하는 선비 등을 언급한 내용은 해당 기사는 물론 전후로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범 김일손을 역모죄 주범이 아니라 단순히 따른 종범으로 주장해서 능지처사가 아니라 참수형으로 낮추자고 주장했고 이걸 보면 정리 기사는 어느 정도 앞뒤가 맞다.

그러나 문제는 유자광의 경우로 정리 기사에는 유자광이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26일 기사에서 유자광은 처벌을 막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처음에 참수형으로 정해졌던 강겸(姜謙)을 정상 참작 여지가 있다고 주장해서 감형을 요청했고, 오히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저서 강겸(姜謙)은 참수형에서 곤장 100대에 강계 지역으로 유배형으로 감형받는다. 이 내용을 정리해 보면 정리 기사에서 유자광이 강력 처벌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이극돈은 당대 최고 명문 광주 이씨로서, 무오사화 당시 그의 벼슬은 좌찬성이었다. 다시 말해 차기 정승 1순위 자리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 때문에 다시는 정승직에 못 오르고 판서로 관직을 마치게 된다. 거기다가 어찌 보면 아무 잘못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후세에는 무오사화의 원흉, 주모자로 낙인찍히게 되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 버리고 만 셈이다. 더군다나 그 5대손인 이이첨도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까였다.

1년 뒤, 충청남도 천안의 유분 등 유생 몇 명이서 이것을 꼬투리 삼아 지들끼리 "바야흐로 걸주의 세상이네. 윤필상과 유자광은 남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어진 선비들을 죽여 재산을 타는구만", "금년에 바람 불고 천둥 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김종직이야 말로 진정한 충신이지", "그놈(유자광)을 쏘아 죽여버리겠다"라는 말을 했다가 박원성의 고변으로 들통나 목이 달아나거나 유배되었다.[78] 이 사건만 봐도 얼마나 상황 판단 못 하는지 알 수 있다.


9. 이후[편집]



9.1. 무오사화 정리[편집]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이 종식되고 과거 연산군 시대의 패악들을 정리하면서 무오사화 또한 조정에서 뒷수습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무오사화에 대해 사림들은 무오사화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이 일들을 야기한 자들(특히 유자광과 이극돈)에 대해 결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무오사화의 뒷정리는 상당한 시간과 수많은 정쟁을 거쳤다. 왜냐하면 훈구파들도 똑같이 얻어터진 갑자사화의 경우 복수심에 불타오른 훈구파들도 집단으로 가세해서 책임 추궁과 피해자들의 신원,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큰 난관 없이 이루어졌지만 무오사화는 세조의 정당성 논란이 있기 때문. 중종 또한 세조의 후손이기에 자신의 선조의 정당성 논란에 대해서 용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하나씩 정리됐다.

우선 중종은 무오사화에 대해 신원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의제문의 문제로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파악한 뒤, 중종은 김일손과 같은 직접적 피해자와 연좌된 사림, 관료들의 신원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피력하며 신원을 간접적으로 보류했다.

이에 대해 반공 공신들조차도 김종직 김일손이 세조를 모욕했으니 처벌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말과 글로 인해 한 것이니 당사자들만 처벌해야지 연좌제로 인해 연좌된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함을 피력했다.[79] 결국 중종도 납득하여 공신들의 주장을 수용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이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사림은 무오사화의 참사를 야기한 유자광을 집중적으로 성토했고, 자신이 타겟팅이 되었음을 직감한 유자광은 적극적으로 자신은 세조의 은덕을 받은 충신이며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한 김종직과 자손들은 마땅한 처벌을 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무오사화를 야기한 자신의 행적을 변호했다.(중종실록 2년 2월 2일). 즉 유자광은 무오사화가 세조의 정통성 문제 제기에 대한 진압임을 주장하며 세조의 정통성 비판을 용납할 수 없는 중종의 입장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사림의 분노는 유자광의 간접적인 협박과 무오사화 정당성에 대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거세게 불이 붙어 대간에 의해 무오사화의 참사에 대해 유자광의 책임과 처벌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결국 사림의 거센 반발에 견디지 못한 중종이 항복하였고, 유자광과 유자광의 자식들에 대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 와중에 사림에서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핵심적인 사안을 찌른다. 사실 무오사화는 조의제문으로 인한 세조의 정통성 문제에 대한 사실 지적과 함께 사초 기밀이 함부로 누설된 사건이었다. 실제로도 조선 역대 임금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중대함을 인식하여 사관들이 외부의 간섭 없이 기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연산군 때 이것이 어지럽혀진 것이다. 사림들은 무오사화 본질은 김종직, 김일손의 세조에 대한 정통성 비판이 아니라 사국이 누설된 것이며, 이렇게 누설된 사례는 앞으로도 부정적인 전례로 남아 이후 사관들이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사관들이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수 있다며 무오사화에 대한 세조의 정통성 문제에만 집착한 유자광과 훈구들의 논리를 깨버렸다.[80]

이후 무오사화의 뒷수습이 마무리됐다. 김종직, 김일손을 신원하라는 중종(조선)의 명이 내려졌고, 신원되면서 김종직은 우의정으로 벼슬을 올려 증직하였고 시호도 되돌려 받으며 기존의 무오사화에 대해 김일손, 김종직, 관련 인물들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추궁하던 것에서 180도 바뀌어서 최종 승자는 사림으로 막을 내렸다.

9.2. 억압받은 사실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외부의 간섭 배제와 그에 대한 역사의 공정성과 역사의 기록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김일손의 조의제문 인용 자체는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용납할 수 없는 조선 시대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관리의 매우 경솔한 시도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 것은 사관으로서 역사적 사실 기록이라는 본질적인 의무에 매우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다.[81]

때문에 조의제문과 무오사화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들도 조의제문 내용을 실은 건 당시에는 세조의 정통성 훼손이며 선대 임금의 정통성 훼손에 대해 조선 왕조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 이에 대해 탄압할 수밖에 없었으며 김일손이 지나치게 눈치가 없고 경솔했다는 것이지 김일손이 역사를 왜곡 날조했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82]

실제로도 세조의 정통성 변명과 왕실의 정통성 능멸이니 같은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는 현대의 평가는 세조의 즉위후 업적을 배제하면 명백하게 세조의 명분 없는 강압적 왕위 찬탈과 단종 살해라고 보고 있다.

게다가 현대로 갈 필요도 없는 게, 조선만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지나서 세조의 정통성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어진 조선 후대부터 이미 단종을 복위시키고(숙종) 장릉배식록(정조) 등을 행하면서 세조와 단종 중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사실상 결론지어진 상태였다. 불편한 진실인지라 직접적으로 말은 안했을 뿐. 조선 후기엔 단종 뿐만 아니라 단종 복위 관련해서 죽은 사람들도 신원되고 이미 국가와 사림들 사이에서 충신들이라고 제사까지 지내는 판국이였다. 다만 조선 중기까지는 사대부와 민간에서만 제사를 지내줬을 뿐이고, 왕실은 여전히 사육신을 역적이라 간주했다.(선조)

10. 사화(士禍)냐, 사화(史禍)냐?[편집]


사화(士禍)란 말 그대로 선비[士]가 불행[禍]을 당한 것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오사화는 무오년(戊午年)에 일어난 사화(士禍)라 하여 무오사화란 이름이 붙은 것이고. 그러나 상술(上述)되어 있듯, 이는 사초(史草)가 방아쇠가 된 면이 크다. 그래서 무오사화는 사서(史書)에 관련된 필화(筆禍), 혹은 사필(史筆)로 인해 비롯된 옥사(獄事)라 하여, 史禍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또한 결과론적이긴 하나, 이 사건으로 인해[83]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역대 임금들이 함부로 실록을 읽거나[84] 집필에 간섭하지 못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무오사화가 '폭군 연산군과 간신 유자광의 악행'이란 평가를 받게 되면서[85], 연산군 이후의 임금들이 만약 실록에 손이라도 대려 하다간, "아니 되옵니다! 그건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란 아주 훌륭한 방패막이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의 사관들은 보통은 김일손처럼 막 나가지도 않고 적당한 선에서 행동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다분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 무오사화 자체는 다른 사화에 비해 처벌의 명분이 충분했기에, 만약 연산군이 무오사화 이후에도 그 전처럼 왕 노릇 하다가 임종했으면, 역으로 후대 왕들이 김일손 같은 일을 안 저질렀는지 확인하려고 왕이나 권력자가 주기적으로 사초를 들춰 보는 안 좋은 선례가 될 뻔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왕위 찬탈하고 단종을 죽인 건 그 시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나쁜 짓인 거 다 아는데 뭔 사림들이 자초한 거냐, 걔네가 바보냐?" 하는 의견이 있는데, 사건의 시작은 세조에 대한 찌라시 기사를 실록에 실은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기록이 발견되어 일이 커진 것이다.

설령 조의제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조에 대한 찌라시 기록을 실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역죄에 해당하며, 아무리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해도 엄연히 그 후손이 왕위에 앉아 있는데 다른 것도 아닌 실록에다 기록해 놓았기에 이는 충분히 죽음을 부르는 행동이었다. 요즘 시대에도 자기 조상의 나쁜 점을 부각시키거나 터무니없는 내용을 기록하면 고소나 항의가 들어와도 할 말이 없는데, 하물며 전제 군주제 국가인 조선에서, 그것도 왕실의 역린을 뜯어버리는 짓을 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이 나쁘다는 것이 명백한 팩트임을 잘 안다고 해도 당시 조정으로서는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고, 심지어 그렇게 비난하고 있으면서 그 세조의 후손인 왕들 밑에서 관료 생활을 했으니 숙청을 당하게 된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과 홍한이 동기인 김일손과 스승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라고 앞다퉈서 요청한 것과 연산군에게 대들던 대간들도 입 다물고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다만 연산군의 실각 이후 대간들은 무오사화에 대해 이를 야기한 자들에 대한 처벌과 무오사화로 피해를 본 사림들의 신원을 주장한다.

11. 창작물에서[편집]


연산군 시대의 두 사화 중 하나이지만, 연산군 시대를 다루는 창작물에서는 갑자사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 출생의 비밀, 패륜, 별별 이유를 갖다 붙인 잔학한 숙청 등 여러 막장 드라마 클리셰가 뒤섞여 임팩트를 남기기 좋은 갑자사화와 달리, 무오사화는 실록의 사초와 왕실의 정통성 문제라는 다소 딱딱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자사화의 내용을 부각시키고 정작 무오사화는 상대적으로 축소하거나 아예 삭제하는 사례도 많다. 예를 들어 맹꽁이 서당의 경우 갑자사화는 물론 연산군의 사소한 악행들까지 일일이 상세하게 묘사했지만 정작 무오사화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사극왕과 비》 후반부가 무오사화의 과정을 큰 생략 없이 잘 그리고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다. 드라마 자체가 실록에 대단히(왜곡된 기록까지도) 충실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김일손 및 관계자들의 발언이 정사에 실린 대로 큰 각색 없이 묘사되고 있으며, 노사신이 유자광을 자제시키려는 모습 등의 세부적인 기록도 잘 살렸다. 거열형과 참수형 등 고어한 처형 장면도 묘사되었다. 이후 《왕과 나》에서도 무오사화가 묘사된 바 있다. 임권택 감독의 1988년 영화 <연산일기>에도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기존의 연산군 관련 사극보다 정사에 더 기초를 둔 작품이라, 즉위 초기 수륙재를 둘러싼 대간들과의 갈등에서 무오사화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사료에 충실하게 묘사된 편이다.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조용히 넘어간 갑자사화와는 달리, 무종조에 개혁을 반대하며(조총 개발 반대, 저화 유통 반대 등) 어그로를 끌며 깝치던 대간들을 조지기 위한 명분으로 크게 키워서 대숙청을 했지만, 노사신과 유자광 등이 목숨을 걸고 상소한 탓에 김일손 등 2명을 능지처참, 김종직 부관참시, 2명은 참수형으로 타협했고, 다른 관련자는 모조리 울릉도로 귀양보내는 걸로 끝났다, 피는 좀 덜 흘렸지만 정치 세력으로서의 사림은 원역사보다 심하게 박살 났다.

[1] 무오사화에 한해 역사 史자를 넣어 史禍라고도 부른다. 왜 이렇게 부르는지는 본문 참고.[2] 이극돈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고, 성종 사망시 국상 중에도 기생이랑 놀아났으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기록.[3] 다만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는 있지만 전후 관계를 비추어 보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일화다.[4] 史草, 사관이 쓰는 사기(史記)의 초고(草稿)[5]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일컫는 말이다. 관직 서열은 낮은 편이지만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인사를 좌우할 수 있는 요직이다. 동서분당이 시작된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도 이조전랑(吏曹銓郞) 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다.[6] 조광조도 학자로는 적격이었을지언정 정치가로선 낙제급으로 영 아니었다.[7] 애초에 조의제문 같은 잡글을 역사 기록인 사초에 끼워 넣는 것 자체가 해선 안 될 짓이다. 쉽게 말하자면 국가 기록원에 들어가는 공식 자료에 정부의 공인하는 타이틀도 없는 일개 문인이 쓴 시를 멋대로 넣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민주 사회에서도 공인 기록물의 중립성에 흠결을 내는 문제인데, 심지어 전제 왕정인 조선 시대에 임금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글을 넣었으니...[8] 정삼품 이상부터는 국왕이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이조전랑은 최고의 요직이였고, 훗날 동서붕당의 원인이 될 정도로 조선 시대에 요직이었다.[9] 다만 황희는 수정하기로 합의까지 한 기록도 실록에 있는데, 실록을 수정했다는 전례를 남길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결국 그대로 실렸다.[10] 세조때 사관이던 민수가 사초에 훈구파를 비방하던 내용을 많이 실었는데, 이것이 세조실록을 만들면서 모이게 되자 훈구파 대신들의 보복이 두려워 자신의 사초를 몰래 수정했다 걸려서 처벌받은 사건이다.[11] 사건 당사자 중 원숙강과 강치성은 참형, 최명손과 이인석은 충군(군역을 지게 하는 유배형의 일종), 주동자 민수도 원래는 참형이었으나 (예종이 세자였을 때 민수가 서연관을 맡았었고 민수가 울면서 대답하는 걸 보고 예종이 사형 대신 유배로 줄였다는 얘기가 있다) 장 100대를 맞고 제주의 관노가 되는 것으로 처결되었다.[1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여기에다가 자칫하면 자기만 망신당하기 쉬울 일이라고 서술했다. 이 짓을 했다가 민망한 사초들만 드러났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13] 예순이 넘었다.[14] 성종실록 성종 23년(1492) 1월 22일 기사 당시 둘째 형인 이극증과 셋째 형인 이극감은 죽고 없었지만, 제일 큰 형인 이극배가 살아있을 때였다! 그리고 동생인 이극균도 살아있었으며, 특히 이극균은 사림파 인사인 김굉필을 추천했다.[15] 사초를 내오지 않은 것도 사림을 보호하기보다는, 이후 다른 사관들이 왕 눈치를 보아 직필을 어려워 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실제로 조선 시대 내내 왕들이 사초를 보고 싶어 하면 "전하, 선왕께서는 보지 않았사옵니다."라고 신하들이 저지하기 일쑤였기에, 만일 이번 일로 연산군이 사초를 보면 후대 왕들도 걸핏하면 보려고 들것이 우려된 모양이다.[16] 사실 유자광은 태생적으로 사림파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출신부터 양반가 자제이며 유학으로 무장한 사림파와, 서자 출신이며 왕에게 아첨해 출세한 유자광이 사이가 안 좋은 건 당연한 일.[17] 유자광은 사림들에게 임사홍과 함께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는데, 복귀에 자그마치 5년이나 걸렸다. 웃기면서도 이상한 건 정작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사림들이 더 목소리 높여서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사실. 그것도 유자광 탄핵시 붙였던 소인이란 호칭까지 붙여가면서 말이다.[18] 사실 현석규가 한명회, 정창손, 정인지 등의 훈구파와 거리를 두었고 유자광에게 탄핵당했다는 이유로 사림파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석규 또한 엄연한 훈구파였으며, 게다가 왕실의 인척이었다. 다만 주류 훈구파와 거리를 두었으며, 성종의 총애를 받는 성종 친위 세력에 속한 비주류 훈구파였다.[19] 성종실록 175권, 성종 16년 2월 4일에 기재되었다.[20] 의금부에서 그의 가족까지 멸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이 박성간만 처형하도록 선처했다.[21] 사실 세조도 말기에 신공신들을 요직에 앉혀서, 구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으며, 예종도 어떻게든 공신들을 견제해 보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를 거듭했다. 이에 성종은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사림파들을 등용시킨 것이다.[22] 세조 시대 거물들 중 청렴결백했고 당시 대신 중 유일하게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구치관은 성종 1년(1470년)), 세조의 큰 처남이자 정희왕후의 오빠인 윤사분과 정희왕후의 인척이자 한명회의 친척인 한계미는 성종 2년(1471년), 장원급제자 출신의 최항과 안순왕후의 아버지이자 예종의 두 번째 장인이자 세조의 사돈인 한백륜과 정희왕후의 인척인 성봉조는 성종 5년(1474년)), 세조의 왼팔이었고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신숙주와 살인마 정승이라고 불렸던 홍윤성은 성종 6년(1475년), 세조에게 총애받았던 재정관료 출신인 조석문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학자 출신이자 훈구파의 브레인이던 이석형은 성종 8년(1477년), 신숙주의 처남인 윤자운과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집현전 대학자 출신이자 역시 훈구파의 원로였던 정인지와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고발한 김질은 성종 9년(1478년), 훈구파의 원로이자 핵심인물인 김국광과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서원군의 사위인 현석규는 성종 11년(1480년), 무관 출신의 중신이자 왕실의 인척이던 박중선과 훈구파의 핵심 중진인 정효상은 성종 12년(1481년), 정희왕후의 인척이자 한명회의 친척이던 한계희는 성종 13년(1482년),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던 학자 출신인 강희맹은 성종 14년(1483년), 훈구파의 중진인 이승소와 성종의 총애를 받은 중신인 성임은 성종 15년(1484년), 세조의 작은 처남이자 정희왕후의 동생이던 윤사흔은 성종 16년(1485년), 정희왕후의 인척이자 한명회의 친척이던 한계순과 이계전의 아들인 이파는 성종 17년(1486년), 훈구파의 수장 격인 한명회와 사육신을 밀고한 원로 정창손은 나란히 성종 18년(148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로도 음서 출신으로 요직을 했던 권감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자 많은 문집과 시를 남겼고 많은 역사서와 저서를 남긴 서거정은 성종 19년(1488년),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자 훈구파 내에서 개혁적인 성향을 보이고 관료로써 뛰어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인 정난종과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자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진 무관 출신의 대신인 어유소는 성종 20년(1489년), 정희왕후의 측근이던 홍응은 성종 23년(1492년), 세조의 외숙부이자 소헌왕후의 남동생이던 심회는 성종 24년(1493년), 성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자 폐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했던 허종과 이극돈의 둘째 형인 이극증은 성종 25년(1494년)에 세상을 떠났다.[23]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대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딱 4명만 검색어가 1천 건이 넘는데, 성종, 연산군, 중종, 그리고 선조다. 중종이 9천 건이 넘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2천 건이 넘는 성종, 1500여 건이 연산군, 1천 건을 간신히 넘긴 선조로 이어진다. 참고로 세조는 100여 건 정도이고, 태종이나 세종, 재위 기간이 길었던 영조 등은 600여 건 정도이다.[24] 실제로 재위 25년(1494) 시점에서는 짜증이 폭발했는지 대사헌이 "요즘 대간의 청을 물리치기만 하니 우려스럽습니다." 라는 불평을 했을 정도다. 성종이 30대 나이로 단명해서 그렇지 제외 말년에 기존과 다른 강경한 행보를 보여준 것을 보면 성종이 어느 정도 장수했으면 후반기에는 다른 행보를 보여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편에서, 즉위 초기 대간들의 억지를 봐 주지 않고 강경대응하는 아들 연산군의 모습을 성종이 내심 부러운 눈치로 쳐다보는 묘사가 있었다.[25] 선왕인 예종은 성종과 삼촌 관계에 불과했고 예종의 적장자도 따로 있었는 데다가, 성종에게는 자기보다 연장자인 친형 월산대군도 있는 상황이었다.[26] 비록 모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고 사사된 몸이었다고 하나 연산군이 태어났을 때는 엄연한 국모였다. 그리고 성종도 이것이 연산군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27] 우선 2대 임금인 정종 이방과는 태조 이성계의 차남, 3대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남, 세종은 이방원의 3남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이유 역시 차남. 단종 이홍위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저 왕자 신분으로 살았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산군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임금이었던 문종은 세종이 사가에 있었을 때 태어났고, 문종의 외동아들이었던 단종은 연산군 즉위 시점에는 반역자로, 폐위 상태였다. 연산군이 태어난 날 임사홍은 "지금까지 세자 저하들이 모두 사저에서 태어나 이런 경사가 없었습니다" 라고 경하를 올렸다. 단종은 폐위 여부와 별개로 궁에서 태어났을 당시 세손이었으니 임사홍의 말은 사실이다.[28] 사실인 것 같다. 연산 10년 이후의 행적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29] 성종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대간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주고 밀어준 게 성종 본인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30] 당연한 소리지만 대간의 존재의의는 일의 집행이 아니다. 의견을 내고 조언하고 자문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결정은 왕이 하고 정책에 도움을 주는건 정승과 판서들이다. 대간들의 의견은 참고나 반영만 할 뿐 이들의 의견을 주류로 택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럼 의정부와 육조가 있는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대간은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 타 부서의 권한까지 범하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31] 돌보다 값이 싼 구리로 만든 수로를 보고 밑도 끝도 없이 사치스럽다고 주장하여 이미 다 만들어진 구리 수로를 철거하고 돌로 새로 만들게 하지를 않나, 다리 셋 달린 닭이 태어난 것도 아무튼 왕 잘못이니 반성하라고 하지를 않나, 하여간 대간들은 온갖 트집이란 트집은 다 잡아가며 성종에게 악다구니를 써댔다. 물론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면 뭐든지 왕을 탓하는 구조이긴 했다. 재이론에 따라 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이게 왕이 뭘 못해서 그러는 거다 식으로. 다만 보통 특이한 동물이 태어났다 같은건 그 사실만 기록하고 딱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숙종 년간에는 기형 고양이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여러건 등장하지만 그냥 그런 고양이가 태어났다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32] 水陸祭.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 의식이다.[33] 왜 인수대비가 의견을 냈냐면 결심이 서지 않았던 연산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비를 찾아가 의견을 구했기 때문이었다.[34] 물론 인수대비가 이전에도 강력하게 불교를 옹호했기에 잔뜩 긴장했을 수는 있겠다. 당장에 몇년 전 있었던 금승법 제정때도 대비와 대신, 대간이 충돌했다.[35] 연산군일기 연산군 즉위년(1494) 12월 26일 기사[36] 정도전의 아들들 중 장남인 정진이 무인정사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이후에 태종이 복권해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정진에겐 정래와 정속이란 두 아들이 있었고, 정문형은 이 중 정속의 아들이다. 즉 정문형은 정도전의 증손자.[37] 후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정도전은 태종 및 그의 세력에게 철저히 폄하당하긴 했지만 명백한 반역자로 취급당하지는 않고 종친 모해죄, 즉 왕자들을 비롯한 종친들을 해치려 했다는 살짝 어정쩡한 죄목이 걸렸다. 정도전의 후손들이 연좌제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벼슬에 오를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38] 아닌 게 아니라 성종 대에 좋은 대간이란 왕이 열 받아서 화내도 그러거나 말거나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온갖 구실로 엄청난 수위의 비판들이 왕에게 가해졌다. 성종 문서 참조.[39] 停擧. 유생에게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로, 대개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걸릴 때 내리는 벌이었다. 심할 경우 평생 과거를 못 보게 하는 영영정거(永永停擧)가 있었다.[40] 避嫌. 탄핵을 받은 자가 혐의가 풀릴 때까지 업무를 보지 않고 근신하는 것.[41] 물론 사안이 사안인지라 삼사에서 나온 의견 중 가장 약한 의견도 죽여 마땅하지만 이미 죽었으니 그럴건 없고 작호만 거두자는 것이었다. 삼사도 결코 분위기를 못 읽은건 아니었다.[42]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7월 25일 기사[43] 쉽게 말하면 역사서 초본을 기록하는데, 정리하기 편하게 연도별로 정리해 놓아야 할 것을 "1453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142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고, 1462년에는 이런 일이..." 처럼 개판으로 정리해 놨다는 것이다.[44] 반란과 내전은 물론, 왕조가 복잡하게 얽힌 유럽에서는 국가 간의 전쟁까지 벌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45] 관련 사건 사고가 몇 건 터진다.[46] 생육신으로 이름 높고 육신전을 쓴 남효온이 위에 언급된 소릉 복원 관련해서 중앙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세조효장대왕'이라는 공식 직함은 물론이고, 사육신의 난에 대해서는 '병자년에 여러 간신들이 난을 선동하다가 잇달아 복주(伏誅)되고' 라고 묘사하고 있다. 더구나 남효온은 이름값은 있어서 여러 번 언급이 되지만, 정식 관직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유학'이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뒤로는 육신전을 써도 앞으로는 정식 명칭과 정식 기록을 따라야 된다.[47] 당시 장은 30대 정도만 맞아도 살이 터져나가고 피가 낭자했는데, 90대면 대놓고 죽이지만 않을 뿐 사실상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천천히 죽으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고 하니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48] 의외로 조선에서 불륜은 성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처벌되었다. 합법적으로 들인 첩이나 진짜 매춘을 업으로 하는 창기가 아닌 일반 여성과 간통할 경우 일반인이면 얄짤없이 곤장을 맞아야 했고, 선비조차 장형을 못 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어찌저찌 피했더라도 서원으로 끌려가 조리돌림당한 후 제명 처리되고 집안 노비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꼴로 전락해야 했다.[49] 흔히 착각하는 것과 달리 세도정치 기간의 안동 김씨 가문 사람이라도 역모에 연루되면 죽어야 했다. 안김 A, 안김 B, 안김 C, 그리고 다른 성씨인 D가 있다고 생각하자. 이때 가장 세가 크고 권력이 강한 A가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B와 C는 "D의 욕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감소를 감수하고 A를 살린다"와, "A를 이 기회에 걷어내고 권력을 꿀꺽한 뒤 D에게도 떡고물을 주어 자기 편으로 만든다" 중 무엇을 고를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왕이 작정하고 안동 김씨를 쳐내려고 한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같이 엮여서 피할 길이 없지 않는 이상 안김 B와 안김 C는 안김 A를 버리고 D에게 붙을 길을 택한다. 아무리 세도정치가 판치던 시대였다 해도 왕이 명분 잡아서 작심하고 덤비면 조정 물갈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순원왕후가 죽고 조대비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상황에서 흥선대원군과 협업해 고종을 왕으로 세우자 안동 김씨의 세도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50] 당시 노사신은 영의정이었고, 조선 시대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우두머리인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게 보통이었다.[51] 당연하지만, 이 사실을 계속 숨겼다면 연산군에게 역적으로 찍혀서 일가족과 함께 사형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52]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까딱하면 반역죄가 적용될 법한 일인지라 아무리 기가 센 대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나섰다가는 목이 날아갈 우려를 크게 해야만 했다. 다르게 보면 그 대간들조차도 입 닥치고 있어야 했을 정도로 일이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53] 현대로 치면 지도교수가 젊었을 적 온라인 커뮤니티에 쓴 뻘글을 제자가 국가기록물에 박아넣었다고 보면 된다.[54] 실제로 김일손이 그럴 의도로 사용했다. 단종 일 때문에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서 분노를 표출했다는 증언만 봐도 객관적으로 진실을 보고한 셈. 과거에는 이 과정에서 유자광의 악의적인 왜곡이 들어갔으리라는 시각도 많았으나, 솔직히 유자광이 아무리 깡이 좋은 무인 출신이라 해도 연산군의 지령이 내려진게 아닌 이상 함부로 장난질을 할만큼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의견이다.[55] 이렇게 노력을 했지만 표연말과 홍한은 이미 단단히 찍힌 탓에 유배형에 처해져 유배지로 가던 도중 비참하게 객사했고, 사후 갑자사화에도 연루되어 시신마저 도로 끄집어내 부관참시를 당한다.[56] 해석하자면 살아있을 때 극형에 처해줘도 마땅찮기는 한데, 이미 죽은 자의 시신을 건드려 봤자 무의미하니 가볍게 처리하자는 의견. 어찌 되었건 김종직의 죄를 확연히 인정하면서 대차게 규탄하고 있었다.[57] 누가 누구의 제자인 것은 조선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것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냥 제자 전체를 싹다 명단으로 적는 짓도 사초에 할 일은 아니다. 김일손이 사초를 얼마나 엉터리로 적었는지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58] 비록 소설이지만 육신전에서 세조가 "네가 지금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준 봉록은 왜 먹었느냐?"라고 묻자 "나으리가 준 녹(봉급)은 하나도 먹지 않고 우리 집 창고 안에 고이 쌓아 두었소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조사해 보니 과연 그랬다더라는 식의 일화가 있다는 점과 크게 대비된다. 참고로 육신전도 선조 때 박계현이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추천했지만, 선조는 그것을 읽은 후 대노하여 "책을 모두 거둬서 태워 없애고 이야기하는 자도 처벌해야겠다."는 발언을 했으나 신하들이 말려서 그만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이때 선조가 읽은 후 남긴 평 중에서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었다, 이 저자가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는 내용이 있었다. 한낱 소설인 데다 세조와 촌수가 꽤 벌어진 선조도 저렇게 격분했다는 것. 김일손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59] 육신전의 내용을 보더라도 "너희는 내게 칭신하고 내가 준 녹봉을 받지 않았느냐"는 세조의 힐문에 "공문 다시 읽어봐라. 신(臣) 자가 아니라 거(巨) 자 썼다" 라거나 "니가 준 녹봉 받기만 하고 하나도 쓰진 않고 창고에 고대로 쌓아놨으니까 확인해 봐라"고 답변하는 등 거의 말장난처럼 보이는 대답을 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사실 육신전을 쓴 남효온 본인도 저런 변명이 구차한 말장난임을 몰랐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교적 윤리관에서 차라리 군주를 섬기기 싫어 낙향을 하면 했지, 일단 섬기면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정당화가 거의 불가능한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었기에 이런 결함이 있다고 인정하면 도저히 사육신을 긍정적 주동 인물로 만들 수가 없었고, 정 긍정적 주동 인물로 등장시키려면 구차한 말장난과 억지 변명으로라도 이 흠을 부정해야만 했다는 것.[60] 단종으로 복권되고 사육신이 복권된 이후에도 김종서, 황보인 등은 바로 복권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복권된 것은 한참 더 지나서 영조 때였다.[61] 기성 사림, 온건 사림, 노당, 대윤, 소윤이 합당을 하면서 서인이 된 듯하다.[62] 효종 때 서인 산당의 영수인 김집,그리고 현종, 숙종 때 서인의 핵심 인물인 김만중, 김만기, 김익훈, 김만채, 김진구, 김진규 등은 훈구파 대신 김국광의 후손이고 게다가 기묘사화에 동조한 김극핍과 을사사화를 부추긴 김명윤과도 가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송시열의 수제자 김수항, 김수흥, 김창집도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학조대사의 후손이었다. 그 외에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신익상신숙주의 후손이었다. 또한 숙종 때 송시열의 강력한 수제자였던 이단하이여도 중종 때 단경왕후의 신원을 반대한 이행의 후손이었다. 특히 그들은 을사사화의 주범인 이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김수항 가문은 인목왕후-김제남 가문과 인척인데 김제남의 선조 역시 기묘사화에 동조한 김전이었다. 김전의 후손들도 대부분 서인이 되었다.[63] 더군다나 그 당시 서인의 명문가들은 거의 대부분 훈구파의 후손들이 대부분 많았다. 게다가 이이명, 이사명, 이건명, 이관명 등의 선조도 단종복위운동을 고발한 정창손과 인척으로 얽혀져 있다. 또한 서인이 추진하는 국혼산림이나 혈연관계도 대부분 훈구파의 국혼정책이나 혈연을 이어받은 것이었다.[64] 조선 후기에 단종이 복권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했어도 세조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의견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에 우유부단한 행보를 보이기는 했지만 나름 능력이 뛰어나고, 업적도 제법 있는 신숙주가 변절자로 타겟이 잡히면서 집중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세조가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독재 정권이 끝난 이후로도 세조를 미화하는 드라마들이 여러 차례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권상하 등의 노론 대신들은 동시대에 제기된 단경왕후 추숭에는 반대했다.[65] 그 당시에 단경왕후 추숭론도 제기되었지만 별전을 지어주는 선에서 끝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수근의 후손들은 대거 남인계 인사가 되는데, 이서우, 윤휴, 권대운, 목내선, 목창명, 민희, 허목, 허적, 홍우원, 이원정, 이담명, 오정창, 오시수, 오시복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교류가 잦았다. 당연히 송시열 등의 서인 세력과는 악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서인 대신들 중에는 공신들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낮은 관직에 있었거나 한직, 말단 지방관 등의 벼슬을 지니고 있었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남인 세력이 실각한 환국에 연루되지 않았고 가문이 화를 입지 않았다.(그것으로 보면 남인이 최초로 집권한 갑인예송과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이후에도 중앙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는 거다.) 그나마 단경왕후가 숙종 때 별전이 지어지고 영조 때 복권된 것도 신수근 후손들이 남인이면서도 높은 벼슬이나 중앙관직에 나서지 않고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만약 신수근 후손들이 높은 벼슬을 얻고 중앙 관직에 나섰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했다면 신수근의 후손들은 노론 세력에게 사문난적으로 찍히거나 간흉, 흉물로 간주되거나 그게 아니어도 크게 비난을 받는 상황에 처해서 단경왕후 신원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앙 관직에 진출했거나 고위직에 오르거나 정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남인 인사들(허적, 허목, 윤휴,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이원정, 오정창, 민암, 오시수, 홍우원, 유혁연, 이서우, 이담명, 유명천, 유명현, 심재, 이우정)은 남인이 몰락한 뒤에 노론 세력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정치적인 수난을 많이 겪었는데, 그뿐 아니라 그 후손들은 관직에 나서지도 못했다.[66] 우암 송시열의 경우 단종 복권과 김종직 추증에는 찬성을 넘어서 열렬히 추진을 했었지만 단경왕후 추숭에는 좀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7] 중국 청나라 명군 순치제는 반역 혐의와 황실 능멸 행위를 한 도르곤이 죽은 뒤 부관참시했고 아들인 성군이었던 강희제삼번의 난을 일으킨 오삼계를 난이 평정한 후 그의 시체를 부관참시한 사례도 있다. 심지어 강희제는 사형에 대해선 굉장히 신중해서 제위 중에 전체 중국에서 사형시킨 사람이 100명도 안 되는 해도 많았다. 당시 중국 인구는 억 단위 가까이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강희제가 부관참시까지 했다는 얘기다. 거기다가 강희제는 오삼계의 일족들도 멸했고 마찬가지로 주요 가담자인 경정충의 일족 역시도 멸족했다. 그리고 왕을 살해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반역죄로 다스리는 행동이 아니였다. 군주가 명군이거나 성군이더라도 임금과 왕실을 모욕하는 글을 쓰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그 예로 영락제 시절 방효유가 영락제를 연적찬위라고 가리키며 역적이라고 모욕하는 문장을 쓰자 분노한 영락제가 방효유의 십족을 몰살시킨적도 있고, 문자의 옥이라 하여 강희제옹정제도 반체제가 쓴 글이 파자하면 반역에 가까운 글이라 역모죄로 다스렸다. 조선의 영조도 자신이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글을 쓴 준론의 잔당들과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들을 역모죄로 다스렸으며, 영조의 손자인 정조 역시도 자신을 모욕한 글을 쓴 김하재를 역모죄로 처벌했다.[68] 세조가 실무능력을 위해서 문관들에게 잡학 7학을 가르쳤는데, 이것을 선비의 일이 아니라 부당한 일이라면서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69] 전술했듯이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해야 했었다.[70] 중종실록 1511년 06월 16일 기사.[71] 김종직과 김일손의 복권을 주장하던 신료들이 성종도 조의제문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72] 2순위인 친형 월산대군은 의경세자의 장남이며 1순위 제안대군은 선왕의 적장자다. 이런 둘을 제치고 성종이 즉위한 것은 순전히 장인을 잘 둔 덕이었으니 골머리를 앓는 건 당연하다.[73] 그의 형인 권경우도 이때 연좌되었으나 아내가 폐비 신씨의 6촌이라 죽음은 면하고 강릉부의 관노로 예속되었다. 이후에도 연산군은 권경우를 빨리 조정에 복귀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 권경우는 1501년에 죽었으며 생전에 "폐비 윤씨를 여염집에 놓아선 안 된다"라 간한 적이 있어서 갑자사화 때에도 무덤에 편안히 있었다.[74]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간한 게 폐비 사사로 직행했다(...) 참고로 권경우와 함께 이런 주장을 편 이가 더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채수다. 이 둘은 이 문제의 포문을 열어 성종 시기엔 잠시 처벌을 받기도 했다.[75] 이 강겸의 처벌 과정이 좀 특이한게 원래 강겸은 참수형이었지만, 유자광의 변호로 유배형으로 경감된다. 강겸이 김종직의 제자인 걸 생각해 보면, 실록의 유자광이 김종직에 대한 악감정으로 무오사화를 벌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강겸은 이후 갑자사화 때 유배지 강계에서 능지처사를 당하고 아들 강형도 참수된다.[76] 이런 점들이 사림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소인배이니 군자답지 못하다느니 하는 비판이 반대를 위한 반대, 공격을 위한 공격임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런 사례는, 사림이 자신들과 대립하면 소인배라고 비난하며 끌어내리려 한 거지, 사람됨이나 능력, 학문적 소양 등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옳기는 했다. 노사신의 경우 성종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학문적 소양이야 충분히 검증되었고 자신을 무자비하게 까대던 사림들을 옹호한 걸 보면 사람됨도 좋은 편이다. 반면 유자광은 서자 신분에 이런저런 약점으로 인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수 없었지만 왕의 충견 역할에 더럽고 궂은 일을 도맡아야 했다. 때문에 이런 인물에 대해 좋은 평이 남을 리 만무. 학문적으로도 노사신과 비교하면 부족하다. 무재가 있다는 특출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 동양에서 무재는 별 취급 안 하는 건 평화로운 시대에선 다 똑같았다. 설령 사림파가 아닌 다른 이들이 평가해도 유자광은 호평을 듣기 어렵다. 하지만 위에도 나오듯 사림파는 그 전에는 노사신도 간신이라고 비난하며 파직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저들부터가 현석규를 소인이라 비판하더니 임사홍, 유자광을 몰아낼 때는 현석규를 소인이라 했다고 몰아내려 했다.[77] 위에 김일손의 행적을 보면 이 말을 꺼낸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까딱하면 (더군다나 평소 연산군에게 찍혔다면) "저 자식도 같은 놈입니다!" 라는 얘기가 돌아다녀 같은 꼴이 되거나 정말 낮은 등급으로 처벌받아도 다시는 벼슬할 꿈도 못 꾸게 되었을 테니. 노사신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평소 사림들에게 간신배란 말을 들을 정도로 연산군을 옹호해 왔다는 것.[78]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1월 30일 임술 2번째 기사[79] 과거와 달리 강성해진 사림에 대한 유화적 정책과 사림에 대한 포용의 일환이였다.[80] 이는 틀린 말은 아닌 게 전례가 중요시되었기에 이 일로 사관들이 제 기량을 못 펴고 왕의 입맛에 맞는 글만 올리면 그건 공정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사관의 존재가 유교 정치의 근간 중 하나라는 점을 보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문제는 김일손은 그 권한을 남용하여 왕실을 비방하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 올렸으며 쓰잘데기없는 잡글을 싣는 등 3번째는 그냥 사관 자리에서 쫓겨나기만 해도 될 일이지만 첫 번째외 2번째는 영응대군부인 이야기만 빼면 당시로서는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지나치게 권한이 축소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방기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김일손의 경우엔 그 권한을 남용한 정도가 무려 왕실에게까지 이르렀고 그 점은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는 절대 묵과할 수 없으며 특히나 세조의 정통성까지 건드리며 세조 관련 가짜뉴스급의 이야기까지 올린 것은 당시에는 사형은 못 피할 일이다.[81] 나름 강조까지 했지만 사실 이건 매우 틀린 말이다. 상기한 내용들을 자세히 봤으면 알겠지만 김일손은 사실을 기록한게 아니라 오만 잡글과 잡설을 검증 없이, 심지어는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여 기록한 폐급 관리였다. 왕실에 대한 정통성 공격 측면에서도, 유교적 관점에서의 표리부동함에서도, 사관으로서의 직무 수행 태도도 모두 한심한걸 넘어 밥버러지 수준이라 고문 끝에 죽은게 딱히 동정받을 여지도 없는 관리였다. 단지 사후 훈구와 사림의 정치투쟁 속에서 정치적 푸쉬로 운 좋게 신원되었을 뿐이다. 무오사화의 문제라면 김종직과 김일손만 찢어죽이고 끝냈어야 될 일을 연산군이 정치투쟁으로 이용하며 연좌제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지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정의를 행하다가 잡혀죽었다는 점이 아니다. 본문의 상찬은 김일손이 아니라 스토커 짓까지 불사하다가 유배되어버린 민인생이 받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김일손은 멍청하고 눈치없는데 의도까지 불순한 케이스여서 동료와 동기들마저 "찢어 죽여야 마땅하다" 고 욕을 했던 것이고, 민인생은 멍청하고 눈치없는데 의도는 순수한 케이스여서 후대에 들어 직첩도 복구해주고 죄도 면해준 것이다.[82] 다만 그렇다고 해도 김일손의 행위는 매우 부적절했다. 세조를 비판하고 싶거든 조의제문 같은 잡글을 넣어서 돌려깔 게 아니라 '사신은 논한다. 역적 수양이 제위를 찬탈하고 임금을 시해하여 오늘 연산에까지 이르니 천하가 도탄에 빠지고....' 라고 쓰는 게 올바른 사관의 태도일 것이다. 무엇보다 세조의 찬탈을 비판할 거면 애당초 출사를 하면 안됐다. 역적의 후손 밑에서 왜 벼슬을 하는가?벼슬은 해야겠고 까고는 싶은데 자기 목숨은 아까웠나보지 당연하지만 벼슬, 목숨, 사상 세 가지 모두를 끼고 갈 수 없다면 어떻게든 끼고 가라는 것이 아니라 버릴 때는 버리라는게 유교의 지론이다. 벼슬과 목숨이 아까우면 세조를 비판하지 말았어야 했고 세조를 비판하고 싶거든 벼슬하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김일손은 사초에 소위 주작질을 한 인간이라 왜곡 날조 문제에서도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인간이다.[83] 정확히는 연산군이 폭군으로 전락하면서. 다른 왕의 시대에 벌어졌다면 왕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않았을 사건이다.[84] 국정 운영에 참고하기 위해 실록의 내용을 찾긴 했지만, 임금이 직접 실록을 읽어보는 게 아니라, 사관에게 지시하면 사관이 실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는 형태로 이루어졌다.[85] 이는 이후 사림이 다시 권력을 쥐고, 그것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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