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군 (문단 편집) ==== [[일본]] ==== 원칙적으로는 [[천황]]이 군주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 줄곧 [[공기]]였으므로 세습직인 [[막부]]의 [[정이대장군|쇼군]]을 포함한 일본 무사정권 최고지도자도 군주로 인정한다. * [[고훈 시대]] * [[부레쓰 덴노]](498 ~ 507)★◎ :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단순히 인간성만 놓고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쇼와 덴노]]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만큼 일본사 최악의 암군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케이타이 덴노]]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사의 여러 폭군들의 행적을 부레츠 덴노에게 갖다붙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서 애매한 감이 있다. * [[헤이안 시대]] * [[요제이 덴노]](876 ~ 884)△◎ * [[가마쿠라 시대]] * [[고시라카와 덴노]](1155 ~ 1158)◎ : 권력 계승 및 유지를 위한 개인수양에는 관심이 없이 장기간의 인세이에만 열중하여 무가정권으로 실권이 넘어간 한 원인이 된다. * [[고토바 덴노]](1183 ~ 1198)◎ : 이 양반이 정치감각이 있었다면 일생일대의 삽질인 조큐의 난은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재위 당시가 3세~18세였기에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 [[무로마치 시대]] * [[아시카가 요시모치]](1394 ~ 1428) : 아시카가 막부의 [[원흉소]]. * [[아시카가 요시마사]](1449 ~ 1473) : [[오닌의 난]] 원인 제공자. 다만 본인이 원인을 제공한 것도 자기가 쇼군에 안 맞다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빨리 물려주려다 벌어진 참사였으니 본인이 쇼군 자질이 없는 건 알았다. *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 :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오닌의 난 이후 사실상 일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므로, 다이묘들 또한 군주라고 볼 수 있다. * [[오다 노부카츠]](1582 ~ 1630)◎ : 이해할수 없는 실책을 일삼아 [[오다 노부나가|아버지]]가 이룬 패업을 사실상 말아먹었다. 그나마 친족들이 다 죽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홀로 유일하게 살아남고 [[오사카 전투|마지막에 판단을 잘해서]]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명맥은 이어나갔다. * [[모리 데루모토]] : 우유부단한 성정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서군의 편을 들었으면서도 오사카 성 안에만 머물러서 우물쭈물하고 있었고, 그 결과 동군이 승리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감봉 조치로 인해 120만석의 대다이묘에서 29만 8천석의 다이묘로 추락했다. * [[미요시 요시츠구]] : 미요시 가의 중신들이었던 [[미요시 산닌슈]]와 [[마츠나가 히사히데]]세력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펼치면서 키나이 제일이었던 미요시 가문을 분열시켰으며,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게 토벌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 [[아사쿠라 요시카게]] : [[노부나가 포위망]]이 성립된 당시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때 적설을 핑계로 철수해버렸으며, 그 댓가는 자신과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이었다. * [[다케다 카츠요리]]◎ : 신겐 사후 오다가와의 세력 격차가 커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나가시노 전투]]를 일으켰지만 대패하였고, 우에스기 가문의 내전인 오다테의 난에서 호조 측이 지원하던 카케토라를 외면해 죽게 만듬으로써 호조와 적대상태가 되어 다케다 멸망 당시에는 사방이 다케다를 적대하는 상태가 되었다. * [[호조 우지마사]]◎ : 다케다 멸망 당시 괜히 관망만 했다가 다케다가 밀리고 있자 황급히 출진하였지만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어떠한 이득도 얻지 못했고, 이후 전국의 지배자로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갈등을 일으키다 오다와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호조 가문을 패망으로 이끌었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도요토미 히데요시]](1585 ~ 1598)★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 그리고 그 두 실책이 원인이 된 도요토미 정권의 멸망으로 일본사 두번째 암군 인증을 했다. 피는 피대로 보고 명분은 명분대로 잃었으며 집안은 집안대로 콩가루 만들어 결국 죽쒀서 개줘버렸다. 적이었던 [[선조(조선)|선조]]가 [[평화|치세]]의 명군이자 [[임진왜란|난세]]의 암군이었다면, 히데요시 본인은 [[센고쿠 시대|난세]]의 명군이자 [[임진왜란|치세]]의 암군이었던 셈이다.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에도 막부]]가 일본을 완전히 안정시키는 데 실패했다면 일본은 제2의 전국시대를 맞이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도요토미 히데츠구 일가도 필요 이상으로 숙청하지 않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견제에 집중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이후의 일본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나리]](1786 ~ 1837) * [[도쿠가와 이에사다]](1853 ~ 1858)◇ : 하지만, 당시 [[일본]]을 방문하여 그를 알현했던 [[미국]] 공사 타운젠트 해리스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이에사다에게 [[뇌성마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서 제대로 된 통치가 애초에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뇌성마비가 아니더라도 병약하여 항상 병석에 눕는 일이 않았던지라, 모든 국정을 중신들이 다 처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 [[일본 제국]] * [[쇼와 덴노]](1926 ~ 1989)★◎ : 같은 ◎표가 붙는 [[부레쓰 덴노]], [[요제이 덴노]], [[고시라카와 덴노]], [[고토바 덴노]]와는 달리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를 보더라도 충분히 암군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통제파]]의 폭주를 그저 방관하고, 확전을 허락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정말 완전히 실권이 없었다는 상당수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 달리 쇼와 덴노는 완전한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그 예가 바로 [[2.26 사건]]이다. 일본 제국 군부의 힘이 강했던 것이지 쇼와 덴노의 힘이 약했던 게 아닌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