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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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3대 황제
프로이센 제9대 국왕
빌헬름 2세
Wilhelm II


파일:빌헬름 2세.png

이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터 알베르트
(Friedrich Wilhelm Viktor Albert)
출생
1859년 1월 27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황태자궁
사망
1941년 6월 4일 (향년 82세)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도른
재위기간
독일 황제프로이센 국왕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30년 4개월 3주 3일, 11,103일)
서명
파일:빌헬름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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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배우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1881년 결혼 / 1921년 사망)
로이스그라이츠의 헤르미네 로이스 (1922년 결혼)
자녀
슬하 6남 1녀
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아달베르트, 아우구스트 빌헬름, 오스카, 요아힘, 빅토리아 루이제
형제자매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빅토리아, 발데마르, 조피, 마르가레테
가문
호엔촐레른 가문
종교
루터교


1. 개요
2. 생애
2.1. 재위
2.2. 정책 노선
2.3. 해군력 증강
2.5. 퇴위와 말년
2.6.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타국과의 관계
4.1. 영국
4.2. 프랑스
4.3. 러시아 제국
4.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4.5. 이탈리아 왕국
4.6. 네덜란드
4.7. 미국
4.8. 일본 제국
4.9. 대한제국
5. 개인사
5.1. 왼팔 콤플렉스
5.2. 건강
5.3. 성적 취향
5.4. 허세
5.5. 그 외
6. 독일에서의 평가
7. 여담
8. 대중매체
9. 빌헬름 2세의 육성



1. 개요[편집]


독일 제국의 제3대 황제, 프로이센 왕국의 제9대 국왕이자 독일의 마지막 군주.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강제 퇴위 당했다. 패전 이후 네덜란드망명하였고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손에 떨어진 후에 네덜란드 도른에서 사망했다.

옆나라이자 동맹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무려 67년이나 재위해서 잘 부각이 안 되지만 빌헬름 2세도 재위기간은 30년으로 긴 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재위기간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심지어 퇴위당한 이후로도 23년이나 더 살아서 1941년에 사망했다. 만약에 빌헬름 2세가 퇴위 당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재위했었다면 53년을 재위하며 이는 동프랑크부터 독일 제국까지의 모든 군주들 중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것으로 기록됐을 지도 모른다.[1]

카이저 수염의 어원이 된 사람으로, 특유의 수염 스타일로 유명하다.

뜻 자체도 황제지만, 근대 역사에서 '카이저'라고 하면 이 사람을 칭하는 고유명사 비슷한 것으로 굳어져 있다. 지리적인 의미의 독일통일된 후 3명의 카이저(황제)가 있었지만 전임 카이저들이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정치와 외교를 일임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과 달리[2],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여 외교 전면에 나섰으므로 존재감이 크기 때문이다.

여하튼 황제가 된 지 얼마 안 된 1889년에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광부들이 파업에 나서자 강경 진압을 주장한 비스마르크와 다르게 파업 문제에 온건책을 주장하면서 손수 중재를 해주었으며 이후, 총선에서 비스마르크파가 패배하자 이를 계기로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반사회주의자 법을 폐기하며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반영할 정도로 꽤나 유연했고 이후에 사회주의 견제에 나서기는 했지만 복지제도 증설에도 신경썼으며, 독일의 경제와 군사력도 건실하게 성장하여 세계 3위를 기록하는 등 내치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지만[3] 외치에서 소탐대실했고 전쟁도 말아먹으며 패전으로 초라하게 퇴위했다. 그런 점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나폴레옹 3세와도 유사하다. 즉 내수용 정치인이다. 덤으로 빌헬름 2세는 전쟁 전에도 언행도 너무 경박(...)해서 자국민들에게도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던 편이었다.


2. 생애[편집]


파일:51461c51df244686003ddd0139e58d0e.jpg
50세 생일 기념 포스터.


2.1. 재위[편집]



카이저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재위 99일만에 사망하자 황태자였던 빌헬름은 황위를 물려받았다.

파일:황제즉위당시 빌헬름 2세.jpg
즉위 당시 모습.

파일:도이처 카이저 겸 쾨니히 폰 프로이센.jpg
빌헬름 2세 왼쪽에 있는 금색 깃발이 독일 황제기, 오른쪽에 있는 적색 깃발이 프로이센 국왕기다.


2.2. 정책 노선[편집]


파일:attachment/wilhelm_II.jpg
그의 정책유럽을 안정시키고, 그 안정 속에서 균형자, 중재자로서 독일의 국익을 챙기는 것을 중시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는 정반대로 해외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정세의 주도권을 독점하던 대영제국에 버금가는 독일 제국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노선에 반대해 계속 진언을 했지만 빌헬름 2세는 듣지 않았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상에서 물러난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될 당시만 해도 독일 내 여론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 빼고 찬양 일색이었는데, 집권 말기 독선적인 비스마르크의 행태에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4]

아무튼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실각(1890년) 이후 팽창정책에 몰두했다. 덕분에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약간의 식민지를 얻기도 했지만, 독일의 팽창 정책에 위기를 느낀 영국이 고립을 포기하고,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삼국협상이 완성되어 독일은 포위당하게 된다. 해군을 육성하며 식민지를 팽창하는 정책으로 영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의 공화국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싸운 보어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 공화국들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는데, 이 전문은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어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말만 앞세운 것은 아니라서, 보어인들이 캐낸 금과 다이아몬드가 독일산 총포로 바뀌는 걸 본 영국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독일이 1890년대 이후 대외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평판은 악화일로를 달렸다. 결국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으로 대표되는 고립외교 노선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1902년의 영일동맹과 1904년의 영불 화친조약으로 현실화되었다.[5] 또한 빌헬름 2세는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시기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 더불어 진압군을 파견함으로써, 독일 또한 제국주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전까지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독일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던 유럽의 균형은 빌헬름 2세의 이러한 대외 정책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다.

반면 외치와는 다르게 내치에서는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펴기도 했었다. 비스마르크와 본격적으로 충돌했을때가 루르 광산 파업 때였는데 이 때 비스마르크가 강경 대응을 주장하며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아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반면에 빌헬름 2세는 파업을 중재하자는 의견을 보였다.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비스마르크가 금지시킨 사회주의 정당도 허용하고 사회 보장도 확충하고 만 13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을 금지시키고 청소년과 여성들의 노동 시간을 규제시켰으며 노동 재판소를 설치해서 노동 관련 업무를 맡기게 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위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폈고 비스마르크가 탄압에 나섰던 가톨릭 중앙당과도 어느 정도의 화합을 이루기까지 하면서 재임 초기에는 노동 황제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었다. 후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의외지만 당시 독일에서 싹트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6] 그렇지만 재임 중기를 넘기면서 점차 보수화되기 시작해서 자유주의 성향의 총리로 평가받는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재상 재임을 시작으로, 비스마르크급은 아니었지만 국방 예산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등등 보수적인 행보를 보였다.

재위 시절 자신의 정치 슬로건을 "Deutschland über alles(그 무엇보다 독일)"로 내밀었다. 사실 이는 독일의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의 가사 중 일부인데 여기서 슬로건을 따온 듯 하다.[7] 이 당시에 독일인의 노래가 공식 국가는 아니었지만 제2국가 수준으로 널리 볼러지던 노래였다. 아래는 빌헬름 2세의 초상과 그의 슬로건이 씌어 있는 선전 포스터.

파일:external/static.darabanth.com/1373382.jpg

정복욕은 우리를 몰아붙이지 못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선사한 영토를 수호하려는 불굴의 의지만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Uns treibt nicht Eroberungslust, uns beseelt der unbeugsame Wille, den Platz zu bewahren, auf den Gott uns gestellt hat.



2.3. 해군력 증강[편집]


독일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제국이다. 독일은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세계적인 교역지역이고, 우리들은 그 구역을 계속 넓혀갈 것이다. 독일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전함을 가져야 한다.

거함거포주의에 심취한 것인지, 해군을 열심히 육성했다. 해군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을 기용하고 1898년에 함대법을 성립시켜 해군 육성에 대한 예산과 법적 지원을 확실하게 보장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초반에 프랑스 해군에 의해 독일의 해안선이 봉쇄당하여 장기전을 갔을 경우에는 오히려 독일 본토에 프랑스군이 상륙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1898년의 시점에서 독일을 가상 적국으로 삼은 것이 확실해진 러시아 발트 함대와 프랑스 대서양 함대를 모두 대응할 수 있는 해군의 육성은 정말로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영국을 자극하여 양국간 건함 경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영해가 좁은 독일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을 따라잡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도 프-독-러 해군의 성장에 긴장했지만, 보불전쟁을 계기로 프랑스의 1적수가 독일이 되고, 러시아 발트 함대가 동해에서 꼬르륵하며 마음놓고 독일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즉 1:1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도 지속적인 건함경쟁은 부담이 되었고, 1913년에 육군 장관이던 홀데인을 파견하여 서로 건함 경쟁을 중지하자는 제안까지 하였다. 그런데 황제와 티르피츠 제독이 이걸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영국이 두 손을 든다!" 착각하고 무시한 것이 문제였다. 1914년 영국과 독일의 군함 총배수량의 비는 약 2.2:1이었다. 결국 영국 따라잡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영국과 싸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비스마르크가 만들어 놓은 동맹 관계를 말아먹고는 '그 넘들은 필요 없고, 이참에 영국과 새로 동맹 맺자!'며 정책을 펼쳤는데 영국과 친하자면서 보어인에게 무기팔았냐.., 그 과정 중 해군 육성을 추진해서 오히려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애초에 해군 육성을 건의했던 티르피츠 제독의 의도부터가 영국으로부터 독일과의 자발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으니.[8]

국내에서는 군함 덕후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고대 로마도 해군으로 카르타고를 찍어눌렀고 영국도 해군으로 세계를 제패했으니만큼 안목 하나는 뛰어났다. 문제는 아무리 해군력을 키워봤자 제정이 폐지되기 직전까지 영국을 해군력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산업이나 예산 면에서 독일이 영국과 겨뤄볼 수는 있어도, 프랑스-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육군 예산을 뺄 수는 없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iser_generals.jpg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의 주요 장성들이다. 합성 사진이라서 방향이 좀 어색하다. 맨 앞에 다리 꼬고 앉은 이가 빌헬름 2세, 맨 오른쪽에 수염을 두 갈래로 기른 이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 그리고 오른쪽에서 네번째 앉은 이가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육군 장군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Nine_Sovereigns_at_Windsor_for_the_funeral_of_King_Edward_VII.jpg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왕국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 차르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 국왕 마누엘 2세, 빌헬름 2세 본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사촌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2.4. 제1차 세계 대전[편집]


파일:1차대전 포스터.jpg

삼국 협상삼국 동맹의 긴장이 커지는 가운데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빌헬름 2세는 이러한 외교적인 방법보단 군사적인 방법을 더욱 선호하였고, 빌헬름 2세는 이 때 1914년 7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특사인 호요스와의 대담에서 "독일 제국의 완벽한 후원을 믿어도 된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한 후 자신의 개인 요트를 타고 노르웨이로 연례 휴가를 떠났다.

빌헬름 2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은 전제군주제 국가인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의 왕실 인사 살해범을 돕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진 않을 것[9]이며, 중부 유럽의 유일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자제시킨다면 최악의 경우 오스트리아가 동맹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을 것이란 판단도 있었다.[10]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빌헬름 2세의 예상과 달리 즉각 참전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도 정작 제대로 도와준 적이 없어 이번에도 세르비아를 도와주지 못하면 발칸 반도의 유일한 동맹국 세르비아마저 잃어 지중해로의 확장이 완전히 무산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스마르크가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의 발칸 진출에 제동을 걸었을 때부터 독러관계는 악화되고 있었고, 러시아는 독일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게 빌헬름 2세는 무려 캐롤라인 제도에 있었던 막시밀리안 폰 슈페가 지휘하는 동방함대까지 전쟁으로 불러들였다.

개전 후에도 빌헬름 2세는 전시지도자의 면모가 부족했다는 평을 받는다. 최고사령관이자 제국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는 황제로서 승리에 눈먼 장군들을 제어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찍 종결시킬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전쟁사 학자 존 키건이 지적했듯이, 황제는 전쟁 매커니즘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특히 전쟁 후반기에 황제를 뒷방으로 몰아넣고 폭주하는 제국군의 실권자 노릇을 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과감히 내쳤어야 했지만 그러한 단호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1918년 1월 루덴도르프는 황제에게 하극상을 범했는데,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 러시아 측에 적은 영토를 요구했다는 이유였다.[11] 이때 루덴도르프가 황제에게 폐위시키겠다고 대놓고 고함을 치는데도 빌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전쟁에서 빌헬름의 위치는 대외적인 것과는 다르게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루덴도르프만 그런게 아니었는데, 루덴도르프의 후임이었던 빌헬름 그뢰너도 이런 제안을 하였었다.


2.5. 퇴위와 말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36-C0804%2C_Kaiser_Wilhelm_II._im_Exil.jpg

1933년 당시 모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2-11383%2C_Doorn%2C_Kaiser_Wilhelm_II._mit_Gattin_und_Tochter.jpg
1931년 후처 헤르미네와 함께. 오른쪽의 여자아이는 헤르미네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헨리에테로, 후에 빌헬름 2세의 막내 손자이자 빌헬름 2세의 6남인 요아힘 왕자의 아들 카를 프란츠와 결혼한다.[12]

결국 전쟁 막바지 군항 수병들의 킬 군항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하여 퇴위했다. 그 직후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기차 안에서 영국제 커피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망명지인 위트레흐트 주 도른에서 저술 활동을 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이 급격히 멸망으로 치닫던 11월 초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건강했는지 네덜란드 망명 직후 인플루엔자에서 완치되었고 회복했다. 독감으로 앓았던 날짜는 대략 열흘(10일) 정도였다.

본래 승전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빌헬름 2세를 처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대신 이후 정치 활동을 일절 금하겠다는 빌헬름 2세의 약속을 받아낸다. 사실 1차 대전의 근본 원인은 빌헬름 2세보다 막나가는 각국 군부 및 정계, 여론의 책임이 더 크긴 했다. 게다가 19세기적 마인드가 아직도 팽배하던 시절 황제를 전범으로 처벌한다는 건 너무나 불경하고 생소한 개념이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오스만 제국의 황가가 재산을 거의 다 빼앗기고 국외로 도망쳐야 했던 것과 달리 대부분의 재산을 보전했다. 이 재산으로 빌헬름 2세는 위트레흐트 인근에 해자와 29개의 방이 딸린 도른 하우스(Haus Doorn)라는 저택을 60만 휠더에 구입했고 독일에 있는 자신의 옛 황궁에서 가구와 책, 제복, 그리고 값나가는 예술품, 유물들을 58대의 화물차에 실어 도른 하우스로 옮기고 50명의 시종들이 묵을 숙소로 건물을 한 동 더 짓는 등 네덜란드에서 23년간을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파일:빌헬름 2세와 손자들.jpg

네덜란드 도른에서 손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빌헬름 왕자, 빌헬름 2세 본인, 루이스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년 5월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를 몰수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난다. 1956년 도른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빌헬름 2세의 묘소도 여전히 도른 하우스에 있으며, 2014년에는 빌헬름 2세의 현손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이 네덜란드 정부를 상대로 도른 하우스를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파일:도른 하우스.jpg

현재의 도른 하우스. 도른 하우스 앞에 빌헬름 2세의 흉상이 있다.

독일 제국 멸망 이후 본인의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제정이 폐지되고 다음해인 1919년에 첫째 여동생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 공주가 사망했고, 1920년에는 6남이자 막내아들인 요아힘 왕자가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어린 외아들 하나 남겨놓고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빌헬름 2세의 부인인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막내아들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먹었는지 병세가 악화되어 1921년에 사망한다. 1923년에는 고모인 루이제 마리 엘리사베트가 세상을 떠났고, 1928년에 고종사촌형 프리드리히 2세 바덴 대공이, 1930년에는 고종사촌동생인 바덴의 빅토리아가 세상을 떠났고, 1929년에는 첫째 남동생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둘째 여동생 빅토리아가 세상을 떠났고 1932년에는 셋째 여동생인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 그리스 왕태후가 세상을 떠났며, 1940년에는 장손인 빌헬름 황태손이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한다.

그럼에도 빌헬름 2세는 꿋꿋하게 장수했으며, 특별한 건강 문제 없이 오래 살았다. 언젠가 제정이 복고될 거라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할아버지외할머니의 장수 유전자도 물려받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셈. 참고로 같은 동맹국의 황제였던 카를 1세, 메흐메트 6세는 폐위 후 실의 속에서 살다가 단명했다.

파일:빌헬름 3대.jpg

3대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빌헬름 폰 프로이센 전 황태자, 빌헬름 2세 본인, 장손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 전 황태손.

파일:빌헬름 2세와 루이스 페르디난트.jpg

빌헬름 2세와 둘째 손자 루이스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 원래는 형 빌헬름 폰 프로이센 전 황태손이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의 다음 후계자였으나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루이스 페르디난트가 후계자가 되었다.[13] 루이스 페르디난트는 러시아 제국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

파일:빌헬름 2세와 손자부부.jpg
빌헬름 2세와 손자 루이스 페르디난트 부부.

파일:빌헬름 2세의 생일잔치.jpg
빌헬름 2세의 80세 생일 잔치. 형제자매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마르가레테와 헤센카셀 가문과 고명딸 빅토리아 루이제와 하노버 가문, 손자 루이스 페르디난트가 있다.

파일:손자 코를 만지는 카이저.jpg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코를 만지는 빌헬름 2세.(...)

파일:빌헬름 2세와 장증손.jpg
할아버지외할머니처럼 엄청 장수해서 증손까지 보았다. 빌헬름 2세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장남이자 장증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939년생)이다. 1년뒤에는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차남인 미하엘(1940년생)이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14]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생존한 상태였다. 제정복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나치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히틀러에게 비스마르크의 역할을 맡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1차 대전의 책임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고깝게 여겼다. 정확히는 패망에 대한 100% 책임이 아니라 유대인의 간계에 놀아난 책임 때문이었다. 군대도 융커 귀족과 통일 이전 왕국들의 왕족들 중심인 독일 제국군에서 평민층의 국민군으로 만들려고 하는 등 나치당은 국가'사회주의'를 내세운 집단답게 이렇게 계몽주의의 근대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히틀러 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크게 남아 있던 제국의 흔적을 철저히 제거했다.

어쨌거나 히틀러가 빌헬름 2세를 고깝게 여긴 것을 직감했고 그도 점차 폭주해가는 나치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1930년에 열렬한 나치 지지자로 나중에 슈츠슈타펠로 들어가는 4남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호적에서 파버리며 외인 취급했다. 그렇다고 독일 황가에서 나치의 지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매제인 헤센카셀 가문이나 빌헬름 2세의 둘째 부인 등은 나치를 열렬히 지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 앞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빌헬름 2세는 영국이 프리메이슨 치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에는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리 점령 이후엔 우울해하면서, 딸 빅토리아 루이제에게 보낸 편지에는 "평생에 처음으로 독일인인 것이 부끄럽다"고 쓰기도 했다.[15] 일설에는 "이렇게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시각이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아들 아우구스트에 대해 쓴 글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네덜란드가 항복하자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축하하며 그를 '총통 각하(Mein Führer)'로 부르며 군주제 복고를 희망한다는 내용을 보냈는데 히틀러는 카이저의 전보에 기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수행원인 하인츠 링게에게 빌헬름 2세를 멍청이라고 욕했다. 빌헬름 2세를 욕한 것과 별개로, 히틀러는 빌헬름 2세한테 '신중하게 작성한' 답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전보 내용이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 원수도 비시 프랑스 수립 과정에서 어디까지나 그냥 19세기식으로 한 판 붙어서 진 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 프랑스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독일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빌헬름 2세 역시 어디까지나 19세기적인 인물이 전쟁을 보는 관점이었을 수 있다.

나치는 빌헬름 2세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국론 결집 및 왕당파의 지지 확보를 위해 그에게 독일로 귀국할 것을 요청했고 그가 죽은 다음엔 독일에 매장되길 바랐다. 실제로 이들 왕당파 상당수가 막나가는 나치에 질려 나중에 히틀러 암살 및 나치당 전복 음모에 가담한다. 발키리 작전을 활용하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나 녹색 작전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인 육군 소장 한스 오스터 장군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키려 한 오스터 음모사건 등이 있다.


2.6. 사망[편집]


파일:빌헬름 2세 사망 당시 모습.jpg

1941년 6월 4일,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에서 자신이 끝내 꺾지 못한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국 최후의 전성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향년 82세로 생을 마감한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제정 복고가 될 때까지는 독일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네덜란드에 있는 그의 저택 정원에 마련한 영묘(가옥형 묘소)에 안장된다. 당연하지만 이후 독일이 완전한 공화국이 되면서 현재까지도 네덜란드에 묻혀 있게 된다. 그는 두고두고 자신이 가문의 최대 수치이자 프로이센독일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나치 독일 정부는 제3제국의 정통성, 계승성 등을 고려하여 장례식에 독일 국방군 육해공군의 장교들과 의장대를 지원해 주었다. 왕당파 인물들 또한 독일 제국프로이센 왕국 시절의 공무원 및 군인의 예복을 착용하고 참석했다.



빌헬름 2세의 장례식 동영상.

그 후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언론에 다음과 같은 보도지침을 내렸다.

빌헬름 2세는 패배한 체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가 최선을 다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성공적인 결과다.

옛 황제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정선의 거리를 유지한 셈.

파일:빌헬름 2세 묘소.JPG.jpg

빌헬름 2세의 묘소.

장남 빌헬름 황태자1945년자유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부대에게 체포되어 무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자로 구속당했다. 물론 얼마 안가 풀려났지만.


3. 가족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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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프리드리히 황태자와 함께, 1863년.[16]

파일:빅토리아 여왕과 빌헬름 2세.jpg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와 함께 찍은 사진.

파일:빅토리아 황태후와 빌헬름 2세.jpg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후와 함께 찍은 사진.

파일:빌헬름2세와 형제자매들.jpg

빌헬름 2세와 형제자매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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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부부.

파일:역대 독일 황제와 황태자.jpg

할아버지 빌헬름 1세,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아들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와 함께 4대가 찍은 사진. 그리고 독일 제국의 모든 황제와 황태자가 다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기도 하다.

파일:빌헬름 2세의 자녀들.jpg

빌헬름 2세의 자녀들.

파일:빌헬름 2세의 후손들.jpg

파일:빌헬름 2세와 여섯 아들.jpg

빌헬름 1세장손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 이 때문에 영국조지 5세와는 외사촌,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의 황후 헤센의 알릭스에스파냐 왕국 보르본 왕조의 국왕이였던 알폰소 13세의 왕비 빅토리아 유제니 율리아 에나랑 이종사촌 관계이다. 빌헬름 2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 니콜라이 2세는 조지 5세와 이종사촌 사이이지만, 빌헬름 2세와는 사촌지간이 아니다. (다만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의 남편이므로 가까운 인척이 되기는 한다)[18] 이렇게 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은 사촌들사이의 전쟁으로 봐도 된다..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사랑했던 맏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예뻐하였다. 빌헬름 왕자가 17세가 되던 해에 생일 선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산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이다. 친척들 사이의 애칭은 빌리.[19] 특히 전쟁 직전에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개인적인 전보문을 보냈는데, 여기서는 끝날 때마다 "사랑하는 윌리가"라고 썼다. 니콜라이는 "사랑하는 니키가".

조부모가 양육해서, 자유주의적이었던 부모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그리고 어머니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와 어렸을때부터 사이가 안좋았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재위 99일 만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곧바로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 탓에 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3세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다수이며, 빌헬름 1세의 아들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재위 초기의 행보만 놓고 보면 아버지 수준은 아니더라도 꽤나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는 했다.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빌헬름 2세
(Wilhelm II)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빌헬름 1세
(Wilhelm I)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여공작 루이제
(Luise von Mecklenburg-Strelitz)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녀 아우구스타
(Augusta von Sachsen-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von Sachsen-Weimar-Eisenach)
러시아 제국 여대공 마리야 파블로브나
(Мария Павловна Романова)[20]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st I von Sachsen-Coburg u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
(Luise von Sachsen-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21]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Victoire von Sachsen-Coburg-Saalfeld)


3.2. 자녀[편집]


모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소생이며, 독일 제국이 몰락한 이후 빌헬름 2세의 자손들은 기존의 성씨 대신 프로이센(von Preußen)을 성씨로 사용하였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빌헬름 폰 프로이센 독일 황태자
(Wilhelm, German Crown Prince)
1882년 5월 6일
1951년 7월 20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여공작 체칠리에[22]
슬하 4남 2녀[23]
2남
아이텔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Prince Eitel Friedrich)
1883년 7월 7일
1942년 12월 8일
올덴부르크의 여공작 조피 샤를로테
3남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
(Prince Adalbert)
1884년 7월 14일
1948년 9월 22일
작센마이닝겐의 공녀 아델하이트[24]
슬하 1남 1녀
4남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
(Prince August Wilhelm)
1887년 1월 29일
1949년 3월 25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공녀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슬하 1남
5남
오스카 폰 프로이센
(Prince Oskar)
1888년 7월 27일
1958년 1월 27일
이나 마리 폰 바스비츠 여백작
슬하 3남 1녀
6남
요아힘 폰 프로이센
(Prince Joachim)
1890년 12월 17일
1920년 7월 18일
안할트의 공녀 마리 아우구스테
슬하 1남[25]
1녀
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
(Viktoria Luise, Duchess of Brunswick)
1892년 9월 13일
1980년 12월 11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스[26]
슬하 4남 1녀[27]


4. 타국과의 관계[편집]



4.1. 영국[편집]


파일:에드워드 7세와 빌헬름 2세.jpg
파일:Wilhelm-II-George-V-1912.jpg
1908년, 독일 제국 베를린을 방문한 외삼촌 에드워드 7세와 빌헬름 2세.
1913년, 독일 제국군 제복을 입은 사촌 조지 5세(우측)와 영국군 제복을 입은 빌헬름 2세.

그가 추진했던 정책은 분명 반영적인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국을 좋아했다. 본인도 영어가 유창해서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는 영어로 했다. 가끔은 영국에서 휴가를 보낸 적도 있다. 심지어 퇴위 후 망명할 때에도 망명지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영국 차 한잔 부탁한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전쟁 직전까지도 종종 영국에서 선물한 해군 원수의 예복을 "넬슨 제독의 옷"이라며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기도 했다. 그의 영국 사랑은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계속되어, 독일을 베네룩스와의 전쟁으로 인도하고도 그 때문에 영국이 프랑스와 힘을 합칠 것이 확실해 보이자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 小 몰트케 장군을 불러 갑자기 침공 중단을 선언, 몰트케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중단을 명한 바로 이 시점에 슐리펜 계획에 따라서 독일 육군은 이미 룩셈부르크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국민들은 반영(反英)적이지만, 나는 친영(親英)적"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독일 사람들 반응은 안좋았다. 스스로 그렇게 친영(親英)적이라고 주장했으면서, 자신의 외삼촌이자[28] 당시 영국 국왕이였던 에드워드 7세에게 사탄이라는 패드립을 날렸으니 어불성설이다.


4.2. 프랑스[편집]


프랑스와는 그 이전부터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애초에 빌헬름 2세의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 시절에 프랑스 제국을 박살내고 건국한게 독일 제국이니 당연히 사이가 안좋았다.

파일:외제니 전 황후와 빌헬름 2세.jpg
한편 1907년에는 프랑스의 마지막 황후였던 외제니 드 몽티조와 만난적이 있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조인 보나파르트가와의 악연은 빌헬름 2세의 증조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부터 시작됬는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 제1제국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은 13일만에 수도인 베를린이 털리고 왕실이 도피하다가 항복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인조마냥 굴욕을 당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왕비였던 루이제 왕비는 온갖 고생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60년뒤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프랑스 제2제국보나파르트가를 무너뜨리면서 복수에 성공했다.

이때 외제니 황후가 빌헬름 1세의 남편인 나폴레옹 3세를 사면 시켜달라고 펀지를 썼지만 엣날 일을 잊지 않은 빌헬름 1세는 거절하고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다.

외제니 황후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다가 1918년 빌헬름 1세의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퇴위당하고 네덜란드로 도망가자 그대로 돌려보내줬다.


4.3. 러시아 제국[편집]


파일:빌헬름 2세와 니콜라이 2세.jpg

러시아 제국군 제복을 입은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군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 2세.

빌헬름 2세 즉위 이전부터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서로 대치하는 관계가 된다.


4.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파일:호엔촐레른가와 합스부르크가.jpg
빌헬름 2세와 악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왼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빌헬름 황태손,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카를 1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동맹국이다. 같은 게르만족 국가이기도 했고 독일 통일 당시에는 서로 전쟁을 했지만 곧 화해하고 잘 지냈다. 다만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나라라고 탐탁지 않아했지만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는 계속 오스트리아랑 동맹국으로 있었다. 그리고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하면서 전쟁이 시작됐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냅다 말려들면서 둘 다 동맹국으로서 협상국에서 맞서 싸웠으며 결국 패배하고 둘 다 제정이 폐지된다.

파일:빌헬름 2세와 루돌프 황태자.jpg
황태손 시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루돌프 황태자와 함께 찍은 사진. 나이는 비슷하지만 루돌프가 1살 많다. 친불파인 루돌프는 반프랑스 성향의 빌헬름 2세를 극혐해 공석에서만 어울렸고 빌헬름도 루돌프를 고까워 해서 서로에게 굴욕 선사 배틀을 즐겼다. 루돌프가 빌헬름을 만나러 가기 전 "징글징글하다"고 쓴 편지도 있다고. 루돌프는 영국에드워드 7세와 친했는데 빌헬름은 자기 외삼촌에게도 있는대로 개겨서 에드워드 7세도 루돌프 심정을 잘 이해했다. 이렇듯 서로 사이가 안 좋은데다 루돌프가 친불파에 자유주의자인게 거슬려서 빌헬름 2세도 루돌프 사후 암살설의 배후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

파일:루돌프 황태자 부부와 빌헬름 2세 부부.jpg
루돌프 황태자 부부와 빌헬름 2세 부부.

빌헬름 2세와 루돌프 황태자는 비슷한듯 하면서도 상반된 인생을 사는 등 둘의 비교도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4.5. 이탈리아 왕국[편집]


빌헬름 2세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작은 키를 놀리는 것을 좋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을 방문하자 빌헬름 2세는 일부러 체격이 큰 장병들을 선별해서 의장대를 구성해 방문 행사에 동원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작은 키가 더욱 돋보인 것은 물론이다.


4.6. 네덜란드[편집]


빌헬미나 여왕독일 제국을 방문해 빌헬름 2세를 만날 때. 여왕을 작은 나라의 풋내기로 깔본 빌헬름 2세는 "내 병사들 키는 7피트인데 당신의 키는 그들의 어깨밖에 안 되는군."이라고 빈정대자 이 말을 들은 여왕은 "그 말이 맞네요. 근데 우리가 제방을 열면 10피트 깊이로 잠길 겁니다!"라고 미소지으며 맞받아쳤다.[29]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협상국이 독일을 봉쇄할 때 이웃 나라인 네덜란드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퇴위당한 빌헬름 2세의 망명을 받아주고 그를 인계하라는 협상국의 요구를 물리치는 대인배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빌헬름 2세와 사이가 좋은건 아닌지라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 도른 하우스에 거주할때 빌헬름 2세와 만난적은 없으며, 1938년 빌헬름 2세의 차손인 루이스 페르디난트의 결혼식에도 딸인 율리아나를 보냈고 본인은 가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등장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은 나치 독일에 호의적이였으며 일부 왕자들은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년 5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몰수했고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난다.


4.7. 미국[편집]


미국과는 접점이 별로 없어서 두 나라 모두 서로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미국은 그때까지도 영국과 사이가 가장 안좋았고, 프랑스와는 독립 100주년 축하로 자유의 여신상을 받는 등 사이가 꽤 좋았던 반면, 19세기 후반에야 통일국가가 된 독일, 이탈리아와는 서로 소 닭 보듯하는 관계였다.

빌헬름 2세의 전기 작가 요아힘 폰 퀴렌베르크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을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을 접시닦이로나 보내 버릴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빌헬름 2세 뿐 아니라 다른 유럽국가들도 아직 열강 후발주자였던 미국을 그렇게 생각했다.


4.8. 일본 제국[편집]


일본이 근대화할때 영국이 적극 지지해줬고, 영일동맹을 맺는 등 일본이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때 독일이 가진 칭다오는 일본이 쳐서 점령한다.


4.9. 대한제국[편집]


대한제국과 빌헬름 2세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빌헬름 2세는 고종을 동아시아의 카이저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고종과 밀서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 빌헬름 2세는 고종 황제일본 제국에게 먹히기 직전의 대한제국 상태를 세계 각국에 호소했을 당시에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 즉 "한국의 황제"라고 반응해 준 양반이지만 공석에서는 거기까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아무것도 안한것은 아니었는데, 빌헬름 2세는 1902년 고종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동생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30] 빌헬름 2세가 고종의 서한에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당시 영일동맹을 포함해서 영국이 세계 열강과 맺은 군사 동맹이 궁극적으로는 독일을 포위하여 고사시키려는 거대한 음모로 보았기 때문이다.[31] 하지만 실제적인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32] 그나마 보낸 편지도 중간에 일본 측이 가로채는 등 조직적으로 훼방을 놓았다.


5. 개인사[편집]



5.1. 왼팔 콤플렉스[편집]


왼쪽 팔을 거의 못 썼다고 한다. 역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태어날 때 왼쪽 팔이 어머니의 자궁에 걸려서 신경을 다친 바람에 왼쪽 팔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그것에 컴플렉스를 가진 그는 항상 흰 장갑으로 왼쪽 팔이 짧은 걸 감췄다고 한다. 게다가 빌헬름 2세는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왼팔이 저러니 스트레스도 심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왼팔을 부끄러워하면서 감추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살짝 왼쪽에 치우쳐서 찍거나, 무언가를 왼손으로 들거나, 왼손을 주머니에 넣는 행위를 해서 왼팔을 똑바로 펴는 사진이 없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을 때도 왼팔을 주머니에 넣어서 감췄다.


5.2. 건강[편집]


빌헬름 2세는 사실 왼쪽 팔 한 짝만 문제가 있었지, 나머지는 모두 멀쩡했으며, 건강도 매우 좋았다. 스페인 독감에 걸렸을 때도 금방 완치되었으며, 형제 자매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33] 심지어 사촌 동생인 조지 5세보다도 장수해서 조지 5세가 먼저 죽었다.

정력도 좋은지 그는 황후인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사이에서 무려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 중에서 아들수로는 공동 1등으로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으며 막내여돋샏 마가렛도 큰오빠처럼 슬하에 6남을 두었다. 공동 2등은 슬하에 5남을 낳은 조지 5세와 스페인 왕비 유제니.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조지 5세도 아들 부자로 유명했지만 사실 진짜 아들 부자 끝판왕은 빌헬름 2세다. 또한 호엔촐레른 가문은 지금도 빌헬름 2세의 직계 후손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엄청나게 번성했다. 마지막 군주의 직계가 끊겨서 방계 후손이 수장을 이어받은 보나파르트 왕조, 로마노프 왕조, 사보이아 왕조와는 대비되는 부분.

특히 호엔촐레른 왕조가 아들 부자인 게 같은 세대의 다른 군주들이나 마지막 군주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독보적이다.

빌헬름 2세 본인과 같은 세대의 군주들과 비교하면 빌헬름 2세 본인이 6남 1녀, 조지 5세가 5남 1녀, 알폰소 13세가 5남 2녀로 빌헬름 2세가 가장 많고,

다음 세대인 빌헬름 프로이센 황태자가 4남 2녀, 켄트 공작 조지가 2남 1녀, 후안 3세가 3남 1녀로 빌헬름 황태자가 가장 많고.

손자 세대인 루이스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이 4남 3녀, 켄트공작 에드워드 2남 1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1남 2녀로 루이스 페르디난트가 제일 많다.


5.3. 성적 취향[편집]


마조히스트였다. 창녀에게 돈을 주고 비단 스타킹으로 자신을 묶고 가죽 채찍으로 때릴 것을 요구했다고. 이런 성적 취향은 어린 시절에 팔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전기 치료를 받았을 때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나중엔 군사대신 디트리히 폰 휠센-하젤러 (Dietrich von Hülsen-Haeseler)에게 핑크색의 여성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추게 했다. 정부 고관이 지켜보는 파티장에서. 폰 휠센-하젤러는 결국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하지만 이건 딱히 그를 망신시키려고 한 건 아닌 게, 당시에는 파티의 여흥으로 귀족이나 고관 혹은 파티의 주최자 등이 우스꽝스런 복장으로 깜짝 등장하여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일이 간혹 있었는데 이때는 군사 대신 폰 휠센-하젤러가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다. 다만 폰 휠센-하젤러가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양성애 성향도 다분해서 가까운 양성애 친구들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이 낳은 자식이 무려 7명이라는 사실. 독일의 오일렌부르크 스캔들이라고 스캔들에서 오일렌부르크 후작이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 황제도 그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자세한 내막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34]


5.4. 허세[편집]


겉으로는 강한 척을 했지만 사실은 매우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어서[35] 군인들과 어울려 호령하고 그들을 망신 주는 걸 즐겼다고 한다.

쎈 척의 가장 최고봉은 황태자 시절에 일어났는데, 서부식 공연으로 유명했던 '버팔로 빌 쇼'의 여성 멤버 애니 오클리는 입에 물린 시가를 정확히 권총으로 맞출 수 있었던 걸로 이름 높았는데, 빌헬름 2세는 여기에 자진해서 나갔다. 오클리는 훗날 1차 대전 발발 후에 "다시 한 번 시가를 물어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황제는 당연히 무시했다.

꼴마초 정신의 일환으로 벌목도 자주 하였는데 벌목에는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소질을 보여 네덜란드로 망명가서 노인이 됐을 때도 하루 4그루 이상의 나무를 베었으며 베는 손맛, 소위 타격감이 좋은 독일 최고의 참나무만을 골라서 베었고 일평생 최소 4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그의 도끼로 베어 넘겼다. 팔 상태가 안좋음에도 불구한 실로 굉장한 기록인데 그가 허세로 한 취미 중에서는 직업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가장 제대로 된 취미다.


5.5. 그 외[편집]


판단력은 최악이었는데 전쟁으로 지친 제국 전체가 들끓을 때도 상황 판단을 못했다. 군대는 끝까지 황제를 지지하며, 그 힘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오히려 군대도 황제를 증오하며 대놓고 명령을 거부했다. 아연실색한 황제는 "명령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깃발의 맹세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폐하. 오늘날, 깃발의 맹세는 한낱 단어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해외로 망명하는 것밖에 없었다.

청일 전쟁 말기에 앞으로 황인종이 서구의 백인(白人) 사회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황화론(黃禍論)을 펴기도 했고,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만든 게 바로 혈액형 심리학. 자세한 내용은 카이저와 황화론 참조.

위의 황화론은 다분히 영국을 견제하고 독일이 팽창하기 위함이었다는 분석 역시 존재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며 팽창중하여 러시아까지 꺾은 동방의 일본 제국을 주 적으로 삼고[36], 일본과 청나라의 근대화가 완료된다면 온 유럽이 그 무시무시한 인구에 눌려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통해 주요 유럽국 중 러시아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동방에 있는 독일이 국력을 키워 튜튼 기사단의 전례와 같이 동방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고, 겸사겸사 독일을 견제하고자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동양에 힘을 실어주는 영국을 매도했다는 것이다. 당장 황화론 문서의 최상단에 있는 그림을 보자. 용을 타고 날아오는 부처(일본)를 막아야 한다며 유럽을 선동하는 강인한 모습의 독일이 묘사되어 있다. 반면 뒤에서 소극적으로 방패를 땅에 받쳐놓은 영국이 대비된다. 황화론이 누구에 의해 주장되었는지, 누구를 매도하기 위해 쓰였는지를 한번에 알 수 있다.

여담 항목에서도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황화론과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고종을사조약 이후에 서구 열강의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당시 열강 중 사실상 유일하게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공감을 표현해주기까지 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같은 개념. 그 이상의 조치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6. 독일에서의 평가[편집]


평가는 매우 나빠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현명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갈등을 빚다 그를 강제로 쫓아낸 점, 또한 외교의 실패로 인해 독일을 고립시켰고 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그로 인해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강대국 독일을 폭삭망하게 하고 이 때문에 히틀러가 나올 여건도 만들었다는 점 등이 그의 부정적 평가에 한 몫 한다.[37] 비록 빌헬름 2세 본인이 아돌프 히틀러처럼 금기시되는 건 아니지만, 빌헬름 2세의 실책이 독일이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단치히(그단스크), 포젠(포즈난) 등 동유럽 쪽 영토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참혹한 나비효과로 이어졌기 때문에 히틀러만큼 아니지만 나름대로 까이는 중이다.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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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7촌이자 사촌매제인 니콜라이 2세[38]와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빌헬름 2세 시기에 독일이 청나라의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었고,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만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점령은 1차 대전 초기까지 이어졌지만, 이후에 남긴 영향은 칭다오 맥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정도. 그런데 이 칭다오 공격이 러시아의 강경파를 자극했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는 청의 뤼순다롄점령하여 세계적으로 왕따가 되었으며,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저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이기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로만 떠드는 것은 한참 부족하다. 그리고 그 칭다오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 일본에게 정복당한다.

빌헬름 2세는 해당 시기의 영국의 에드워드 7세를 상대로 공식석상에서 그를 사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에드워드 7세는 다름아닌 빌헬름 2세의 외삼촌[39]이었는데 외삼촌이고 뭐고 없었나 보다. 빌헬름 2세가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자를 기독교의 적이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면, 빌헬름 2세가 당시 영국의 독일 따돌리기 정책과 그에 편승하는 영국의 동맹국 및 우호국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아돌프 히틀러도 하지 못한 러시아 정벌을 성공한 황제이다. 1918년 3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독일에게 막대한 양의 물자와 영토를 바친다. 표면상으로는 휴전이었지만 명백한 항복이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서부전선에서 밀려 항복하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졌다. 독일 제국이 항복하자 볼셰비키들은 조약을 파기해 버리고 영토 회복에 나섰지만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붉은 군대폴란드에게도 지는 추태를 보여 결국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다.

미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 황제이기도 하다.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미국 침공 계획 참조. 빌헬름 2세가 얼마나 호전적인 인물이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 물론 현실은 미국은 커녕 영국도 못 넘었지만.

1938년, 히틀러의 수데텐란트 요구녹색 작전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 한스 오스터 소장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키려 한 오스터 음모사건이 계획된 적이 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항목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의 장남인데 빅토리아 여왕이 남긴 자녀가 워낙 많다 보니, 빌헬름 2세의 사촌들이 빌헬름 2세의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어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빌헬름 2세의 외사촌 중 한 명인 스웨덴 왕세자비 마거릿빌헬름 황태자(1882년생)와 동갑이고, 또 다른 외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는 빌헬름 황태자보다 두 살 어리며(1884년생), 이종사촌인 에스파냐 왕비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는 빌헬름 황태자보다 다섯 살 어리다.(1887년생) 하지만 빌헬름 2세의 자식들은 상대적으로 터울이 짧은 편이라 자식이 7명이나 되는데도 나이차가 그리 큰 편은 아닌데, 막내인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40]는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나이가 10살 차이가 난다.

자동차에 대해서는 탐탁치 않게 여긴 모양이다. 일시적인 유행 정도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영국처럼 적기조례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8. 대중매체[편집]



8.1. 소설[편집]



8.1.1. 셜록 홈즈 시리즈[편집]


  •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의 단편작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얼룩에서, 영국의 대외 정책에 불만을 품고 외교적으로 부적절한 서신을 보냈다가 뒤늦게 후회한 '해외의 어떤 왕'이 바로 빌헬름 2세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도 후보에 올라 있다. 다만 사건의 연대와 실제 역사를 비교해 보면 알렉산드르 3세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


8.1.2. 아르센 뤼팽 시리즈[편집]


아예 직접 출현. <813>에서는 '위엄만 있는 좀팽이 황제'로, <포탄 파편>에선 허세쩔고 못된 야심이 넘치는 딱 독재자의 그 모습으로 묘사된다.


8.2. 영화[편집]



8.2.1.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편집]


  • 2021년 말에 개봉할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도 등장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이용당하는 무능의 정점으로 묘사되었다. 배우는 톰 홀랜더.[41]


8.2.2. 원더우먼(영화)[편집]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언급한다. 정황상 가스 공격을 승인한 듯. 어쩌면 아레스 다음가는 작중 흑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8.2.3. 레드바론[편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레드바론>에서 등장한다. 첫 등장에서는 나름대로의 덕담을 하는 인자한 군주로 보이나, 다음에 나올 때는 자기 병사들이 죽어가는데도 옆의 장성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는 본성을 드러낸다.


8.2.4. The Exception[편집]


2017년 작 영화 <The Exception>[42]에서는 영화로써는 특이하게 말년의 그를 등장시킨다. 나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황제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며,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합리화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43] 그러나 자신의 복위를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나치의 본심를 깨닫고, 개심하여 자신의 집에 숨어든 영국 스파이가 탈출하는 것을 도와준다.


8.3.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8.3.1. 심슨 가족[편집]


빌리 더 키드 일당이 부활해서 마을을 점령하는 에피소드에 등장. 스프링필드에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하는 말은 위피, 위피!...심슨 가족 아니랄까봐 찰진 고인드립.


8.4. 게임[편집]



8.4.1. Hearts of Iron 시리즈[편집]


  • 나치즘이 아닐 때 권위주의 독일의 지도자로 집권시킬 수 있다. 2편과 3편은 지도자 목록에 있으나 치트 없이 집권시키기 힘들고, Hearts of Iron IV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있다면 라인란트 대신에 히틀러 축출 루트로 진행해서 나치를 몰아낸 뒤에 중점 선택지에 따라 빌헬름 2세가 복위한다.[44] 또한 Man the Guns가 있다면 네덜란드로 플레이할 때 빌헬미나 여왕이 친정하는 루트로 진행할 경우 독일의 제정복고파를 지원해서 복위시킬 수 있다.[45]
  •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빌헬름 2세가 제위에 계속 앉아있다. 독일 제국은 초강대국으로 등극해 있으며 전쟁으로 벨기에, 벨라루스, 발트 연합공국, 리투아니아를 괴뢰국으로 삼고 우크라이나와 핀란드를 영향력 아래에 두었으며 벨기에에는 삼남 아달베르트를 왕으로 앉히고 핀란드에는 헤센카셀 가문이 이끄는 왕국을 만들었다.[46] 더해서 이전의 협상국들이 가졌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강탈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게임이 진행되면 경제 대공황과 적대국의 성장으로 이런 위치가 위협받게 되고 카이저의 선택에 따라 독일이 패권을 유지할 수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적대국의 공격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왕실은 망명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독일이 살아남으면 1941년 이후에는 서거 이벤트가 뜨면서 황태자가 즉위한다.


8.4.2. 도미네이션즈[편집]


카이저 빌헬름 2세의 피켈하우베가 유물로 등장한다.


9. 빌헬름 2세의 육성[편집]


1914년 8월 6일 전쟁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An das deutsche Volk

독일 민족에게 고함.[47]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elung zu fördern. Aber die Gegner neiden uns den Erfolg unserer Arbeit.

제국 건국 이후 43년 동안 세계의 평화와 평화적인 우리들의 힘찬 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나와 나의 조상들의 뜨거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우리들의 업적 달성을 방해하고 있다.

Alle offenkundige und heimliche Feindschaft von Ost und West, von jenseits der See haben wir bisher ertragen im Bewußtsein unserer Verantwortung und Kraft. Nun aber will man uns demütigen. Man verlangt, daß wir mit verschränkten Armen zusehen, wie unsere Feinde sich zu tückischem Überfall rüsten, man will nicht dulden, daß wir in entschlossener Treue zu unserem Bundesgenossen stehen, der um sein Ansehen als Großmacht kämpft und mit dessen Erniedrigung auch unsere Macht und Ehre verloren ist.

우리들의 동과 서,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모든 잠재적이고 비밀스러운 적대 세력들은 현재까지 우리의 의무와 힘의 의식속에 건재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려 한다. 적들이 사악한 침략을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방관을 고대하고 있다.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싸울 그들은 동맹의 이익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 하여금 굴욕과 함께 힘과 명예를 잃도록 할 것이다.

Es muß denn das Schwert entscheiden. Mitten im Frieden überfällt uns der Feind. Darum auf! zu den Waffen! Jedes Schwanken, jedes Zögern wäre Verrat am Vaterlande.

그러므로 칼날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적은 평화시에 우리를 침공할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라! 무장하라! 주저하고 마다하는 모든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일 뿐이다.

Um Sein oder Nichtsein unseres Reiches handelt es sich, das unsere Väter sich neu gründeten.

우리 아버지들이 세운 우리의 제국의 존속을 위해.

Um Sein oder Nichtsein deutscher Macht und deutschen Wesens.

독일인들의 힘과 독일인들의 생존을 위해.

Wir werden uns wehren bis zum letzten Hauch von Mann und Roß. Und wir werden diesen Kampf bestehen auch gegen eine Welt von Feinden. Noch nie ward Deutschland überwunden, wenn es einig war.

우리는 사람과 말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적들의 세계를 대항해 이겨낼 것이다. 하나였던 독일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Vorwärts mit Gott, der mit uns sein wird, wie er mit den Vätern war.

하느님과 함께 전진하라.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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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위 상관없이 단순히 '군주 재위기간'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더 오래 재위한 군주들이 있긴 하지만 별 의미는 없다.[2] 게다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한지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면서 존재감이 더더욱 없다.[3] 심지어 1차 대전 직전, 독일의 철강 생산량이 영국을 따라잡을 만큼 독일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던 상황이었다.[4] 재상 비스마르크 역시 선대 빌헬름 1세와는 달리 자신을 중용해 주지 않고 사사건건 대립하는 선대 프리드리히 3세와 빌헬름 2세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는 대륙국가 독일이 높은 역량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좌우의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 제대로 한판 붙기에도 벅찬 상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주변 경쟁국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대륙국이 대양으로 나아가 해양국가 대영제국과 붙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내각 운영 방침으로 삼고 황제에게 계속 진언했다. 그러나 황제 빌헬름 2세는 아빠의 죽음에 책임이 컸다고 믿었던 엄마의 나라에 미묘한 열등감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황손과 황태자 시절 19세기 후반의 눈부신 성장을 직접 보아온 그는 영국을 뛰어넘고자 비스마르크가 평생에 걸쳐 이룬 유럽의 미묘한 균형을 평생에 걸쳐 무너뜨리기 시작한다.[5] 영국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가장 크게 수혜를 본 나라는 미국이다. 독일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여지껏 호시탐탐 북아메리카를 겨누던 영국의 대서양 해군 전력이 유럽으로 재편됨에 따라서, 미국은 마음 놓고 라틴 아메리카로 진출하게 되었다.[6] 20세기 초 유럽의 제국의 수장들은 대개 수많은 민족들을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고(이 부류의 끝판왕이 합스부르크 왕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놓고 어떤 민족을 해코지했다간 제국이 결딴날 가능성이 높았으며 국가 자체가 특정 민족의 이익이 아닌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위상이 이후의 국가들보다는 약했다. 따라서 제국의 황제들은 대개 민족들 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면이 강했다. 오히려 제국들이 붕괴된 이후 건설된 민족 중심 공화국들에 의해 소수 민족에겐 헬게이트가 열렸다.[7]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흔히 잘 알려진 군림하는 독일이라는 잘못된 번역이 돌기 시작했다. 독일인의 노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über alles는 '그 무엇보다' 라는 뜻이지 군림한다거나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이 널리 퍼져있긴 했다.[8] 한마디로 계속 군비 경쟁 하다 보면 영국도 지쳐서 "야, 그냥 우리끼리 경쟁하지 말고 차라리 친하게 지내자!"라고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9] 당시 빌헬름 2세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는데, 사라예보 사건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문제이며 전쟁이 난다해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전쟁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들이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10]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각료와 장성들도 다 자리를 비웠다. 소(小) 몰트케 참모총장은 28일 신병 치료를 위해 칼스바트(필젠과 함께 주데텐란트의 주요 도시)로 휴양을 갔고, 해군 장관,과 육군 참모 차장도 휴가를 쓰고 자리를 비웠으며 야코프 외상은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에서 신혼 여행을, 수상 베트만홀베크 역시 자신의 시골집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며 쉬고 있었다.[11] 실제로는 무려 22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받아냈고, 독일 제국판 레벤스라움을 계획했었다.[12] 첨언하자면 카를 프란츠와 헨리에테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프란츠 빌헬름인데 이 프란츠 빌헬름이 러시아 제국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의 삼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증손녀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하여 슬하에 조지 미하일로비치 대공을 낳았다. (현재는 이혼) 즉, 조지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아버지가 독일 황제의 후손이고 어머니가 러시아 황제의 후손인 셈이다. 즉 호엔촐레른가의 일원이자 로마노프가의 일원이다. 빌헬름 2세의 후손인 만큼 빅토리아 여왕의 직계후손으로서 영국 왕위 계승 권한도 있다고 한다. 계승 순위는 140위라서 큰 의미는 없다.[13] 거기다 형 빌헬름은 슬하에 딸만 2명을 두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만일 귀천상혼 배제 원칙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후계자는 루이스 페르디난트가 될 수 밖에 없다.[14] 빌헬름 2세의 생전에 출생한 증손주는 이 둘 외에 장손 빌헬름 황태손(귀천상혼으로 계승권 포기)의 두 딸인 펠리치타스, 크리스타(각각 1934, 1936년생), 외손녀 프리데리케의 자녀들인 소피아 왕대비(1938년생)와 콘스탄티노스 2세(1940년생)도 있다.[15] 1938년 수정의 밤 직후 한 말이라고도 한다.[16] 프리드리히 황태자가 왼팔을 잡아주고 있는데, 이는 어린 빌헬름의 왼팔 장애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황태자의 섹시 포즈와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용 킬트 또한 인상적이다.[17] 원래 남동생 두 명이 더 있었지만 요절했기 때문에 사진에는 없다.[18] 또한 니콜라이 2세와도 먼 친척이기는 한데, 프로이센 왕실 기준으로 하면 7촌, 러시아 황실 기준으로 하면 8촌이다.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의 증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장녀 샤를로테의 증손자이고, 빌헬름 2세는 니콜라이 2세의 고조부 파벨 1세의 3녀 마리야의 증손자이다.[19] 영어로는 "윌리".[20] 파벨 1세의 3녀이다.[21] 조지 3세의 4남이다.[22]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와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의 딸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의 왕비 알렉산드리네의 여동생이기도 하다.[23]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등.[24]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아내인 작센마이닝겐의 공녀 레기나의 둘째 고모이다.[25] 이 사람의 큰아들, 즉 요아힘 왕자의 손자인 카를 프란츠 공은 로마노프 왕조의 현 수장(논란 있음.) 마리야 여대공(니콜라이 2세의 사촌이자 빅토리아 멜리타의 남편 키릴 대공의 외아들 블라디미르의 외동딸)과 결혼했다가 아들 하나(게오르기 공, 1981년생)를 두고 이혼했다.[26] 하노버 왕조 참고. 게오르크 5세의 손자이자 크리스티안 9세의 외손자이다.[27] 그리스 왕국의 왕비 프레데리키[28] 어머니 빅토리아의 남동생.[29] 참고로 키 7피트는 210cm다. 평균 키가 가장 큰 서양에서도 보기 매우 드문 키다. 의장대중에서도 드물다.[30] 물론 하인리히가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우호적이었지만 한국에서 깽판을 쳤다.[31] 영일 동맹은 러시아 제국이 남하해서 대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18세기 이후 끊임없이 대양으로 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발트해와 북대서양으로 나가는 핀란드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중해로 나가는 발칸 반도와 터키, 인도양으로 나가는 아프가니스탄 / 파키스탄, 북태평양으로 나가는 연해주 / 만주 / 한반도를 계속 공략하였으며 영국은 이들 지역에 끊임없이 개입하였다. 영일 동맹과 러일 전쟁은 이런 양국의 세계전략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32] 이것은 영국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압박도 고려해야 한다. 당장 러일전쟁 당시 독일 제국과 프랑스가 러시아 편에서 제대로 개입하지 못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미국이 두 나라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독일 제국에게 보낸 경고는 다음과 같다. "독일과 프랑스, 둘 중 하나라도 러일전쟁에 개입한다면 우리 미국은 일본 제국의 편을 들어 필요한 조치를 다하겠소."[33] 막내 여동생을 제외한 다른 동생들은 본인보다 먼저 사망했다. 심지어 장손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 주니어 왕자가 1940년에 전사했을 때도 살아있었다.[34] 이때 이전에 참모총장직을 역임하였던 헬무트 폰 몰트케의 친척인 쿠노 폰 몰트케도 휘말려 강제 전역당하였다.[35]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에게 휘둘리고 다닌것을 보면 알수 있다.[36] 사실 일본은 유럽 입장에선 별 것도 아닌 국지전급 전쟁 하나하나마다 제국 전체의 국운을 걸고 도박 중이었다. 유럽이 그렇게 떠들던 일본의 팽창과 황화론은 사실 속 빈 강정이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순진한 대중들이거나 이를 이용해먹으려는 정치인들 뿐이었다.[37] 앞에서 언급된 건 패전 그 자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성격이 강하고, 망하게 했다는 내용은 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서 독일의 영토, 식민지, 특허권 등을 잃었고 막대한 보상금(1320억 마르크)을 배상하느라 경제가 파탄나고 지도자를 원망하는 내용으로 미묘하게 다르다.[38]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의 4녀인 헤센의 알릭스의 남편이다. 헤센의 알릭스는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이므로, 그 남편인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의 사촌 매제로서 그리 멀지 않은 인척이 된다.[39] 어머니 빅토리아 황후의 남동생.[40] 1913년 하노버 왕가의 후계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빌헬름 2세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했다. 고명딸 프리데리케는 빅토리아 루이제의 사촌동생인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의 왕비가 되었고, 이후 외손녀가 에스파냐의 왕비가 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죽었다.[41] 동시에 조지 5세니콜라이 2세역도 맡았다.[42] 한국에서는 스파이 전쟁이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으로 번역되었다.[43] 예를 들면 빌헬름 자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측에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베오그라드에서 멈추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그들이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에 대해 주변인들은 '그럼 들어먹을 때까지 보냈어야지'라는 태도로 일관한다.[44] 만약 네덜란드에서 빌헬름 2세의 독일행을 거절하거나, 비동맹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면 아들인 빌헬름 황태자가 빌헬름 3세로 즉위한다.[45] 카이저 복위 후에 네덜란드가 오라녜 만세 루트(비동맹주의) 중점을 마지막까지 마무리하면 동맹국에 가입할 수 있다.[46] 그리고 게임을 하다 보면 조지아에서는 막내아들 요아힘이 이오아킴 1세로 즉위할 수도 있고, 폴란드에는 4남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아우구스트 4세로 즉위할 수도 있다.[47] 대략 당시 시점에서 약 백여 년 전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동명의 글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 글 역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