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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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국 제2대 국왕
다윗
דָּוִד


파일:external/img.posterlounge.de/poster-koenig-david-spielt-die-harfe-1382750.jpg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 왕.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 1622년 작(作)
이름
히브리어: דוד בן ישי (다비드 벤 이샤이)[1]
아랍어: داوود (다우드)[2]
영어: David (데이비드)
출생
기원전 1040년경
이스라엘 왕국 가나안 베들레헴
(現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사망
기원전 970년 (향년 70세)[3]
이스라엘 왕국 예루살렘
재위 기간
이스라엘 국왕
기원전 1010년 ~ 기원전 970년 (40년)
지파
유다 지파
전임자
사울. 이스보셋
후임자
솔로몬
부모
아버지: 이새
형제
형 7명, 누나들도 몇 명 있다고 한다.
배우자
미갈[4],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밧세바 등
자녀
아들: 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솔로몬
딸: 다말
손주
손자: 르호보암
증손자: 아비얌
현손자: 아사
후손: 예수
묘소
예루살렘 다윗성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그에 대한 논란
2.2. 출세의 시작
2.3. 사울에게서 도망다닌 시기
2.4. 왕으로의 즉위
2.5. 타락
2.6. 압살롬의 반란
2.7. 그 이후
2.8. 노년과 왕위 이양
3. 평가 및 의의
4.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
5. 다른 문학작품과의 연계성
6. 그 외



1. 개요[편집]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을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파면시켰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셈이냐?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두었다." (중략)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온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5]

야훼께서 말씀을 내리셨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상 16장 1~12절 (공동번역 성서)


나의 힘이신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나의 방패, 승리를 안겨주는 뿔, 나의 산채, 나의 피난처, 포악한 자들의 손에서 이 몸 건져주셨으니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 내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나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셨다.

시편 18편 1~3절[6]

(공동번역 성서)


이스라엘 왕국 제2대 왕.

이스라엘을 40년간 통치하였으며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시키고 오랜시간 평화를 이룩한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목동, 음악가, 시인, 군인, 정치가, 예언자, 왕이었으며 유대교의 토대를 다지고 종교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통합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한 성서에서도 다윗의 왕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가 출현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야훼의 신임을 받은 왕이다.[7] 다만 밧세바라는 여자 문제로 말년은 쓸쓸하고 후세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8]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석륵과 후삼국 시대의 왕건과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과 그에 대한 논란[편집]


이스라엘 12지파유다 지파 소속이며, 어린 시절에는 양치기 일을 했다. 그가 성장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부족들의 집합에서 왕조 국가로 바뀌는 시점이었으나, 초대 왕이었던 벤야민 지파의 사울은 히브리 율법과 예언자들의 조언을 무시하면서 종교 세력과 마찰을 빚은 데다가,[9] 새로이 나타난 해양 민족 필리스티아(불레셋)와의 싸움에도 패하여 인망을 잃었으며,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에 마음의 병까지 앓고 있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중 권위가 있었던 예언자 사무엘에 의해 양치기 소년이었던 다윗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논란을 읽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사실들이 있다. 먼저 고대에는 남성 성인만이 사회적 활동을 하고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집안에서 재산과 가족에 대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10]이었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처분[11]도 가장의 권한이었다. 셋째로 장남은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이 될 사람으로 집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무엘이 아들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성인이 아닌 다윗을 뺀 것이나, 아버지가 안 계신 자리에서 장남이 '어린아이'[12]인 다윗이 맡겨진 일을 두고 놀러 온 것에 대해 혼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무엘의 명령에 거스르는 이새의 태도 또한 후대의 포도원을 달라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명을 거스르는 나봇의 태도로 볼 때 특이할 점이 없었다. 고대사회를 현대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혼동들이다.

다음은 다윗이 이새의 친자가 아니거나, 서출 자식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들이다.
  1. 콩가루 같은 다윗 집안
  2. 사무엘이 아버지 이사이에게 "네 아들 다 데려와라"라고 했을 때 형들과 달리 다윗은 양을 치며 그대로 외면되어 있었고
  3. 맏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서 정상적인 형제 관계라고 볼 수 없는 서술(사무엘상 17:28)[13] [14]
  4.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시편 27:10, 공동번역성서) 라는 다윗의 서술 존재와
  5. 다윗의 여색과 자녀 양육 실패가 있다.
첫 번째의 근거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이다. 사무엘하 17장 25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이라는 서술이다.

압살롬은 요압 대신 아마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 아버지의 이름은 이드라였다. 그런데 그는 요압과 이종간으로 그 이모의 이름은 스루야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으며 외조부의 이름은 나하스였다.

사무엘하 17:25 (공동번역 성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족보는 '아버지의 자녀'[15] 또는 '가문의 유력한 사람의 형제'[16]로 서술을 한다. 다윗의 형제들은 다 '이새의 아들' 이라고 서술하는 데 비해 요압, 아비새, 아사헬, 아마사 같은 다윗의 조카들은 아버지가 아닌 이새의 딸 '스루야'의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고 스루야를 '이새의 딸'이 아닌 '나하스의 딸'[17]로 서술하고 있다. 이로 가정할 수 있는 사실은 스루야는 이새의 피를 잇지 않았고, 이새는 나하스의 아내였던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하자면 나하스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이새의 아들들을 낳지 않았고, 이새의 아내는 최소 둘 이상이었으며, 이후 스루야의 가계 인물들에 관한 서술로 보아 스루야를 위시한 영향력이 최소 다윗의 대부터 크게는 많은 유다인에게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무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새의 태도. 이스라엘 부족 연맹의 영도자가 한낱 깡촌의 지방 유지를 방문한 상황에서 사무엘의 권위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 다윗을 부르지 않은 이새의 태도를 보면 다윗을 크게 신경쓰지 않은 느낌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이새는 다윗이 자기 아들이라는 인식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으로 사무엘 호출 문제는 전통적인 유목이나 농경사회에서 성인식[18]를 치르지 않은 소년의 사회적인 위치는 매우 낮은 게 보통이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통상의 막내자식이면, 그것도 성인 의식을 거치기 전이라면 대개 집 부근에서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베들레헴이 비록 깡촌이라고는 하나 이새는 그 지방의 유지이고 보아스[19] 때부터 물려받은 그런 재력이면 차라리 농사일을 시킬지언정 굳이 막내아들을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상대적으로 천시나 받는 양치기로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근거로는 골리앗을 상대할 무렵, 전쟁에 나간 세 형을 방문했을 때, 다윗의 의분을 듣고 엘리압이 다윗을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을 대하는 태도가 친형제라고 보기에 너무 강경하다는 점이다.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 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상 17:28 (공동번역 성서)

공동번역성서의 어감으로는 나이 든 맏형이 아직 철부지 꼬마같은 동생을 단순히 나무라는 식의 다소 완곡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다는 점은 감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그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네가 어쩌자고 여기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들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너는 싸움을 구경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사무엘상 17:28 (성경, 가톨릭)

2004년판 가톨릭 성경에서는 정말 서출에게나 할 만한 독설을 퍼붓는다. 이를 토대로 한 근거에 대반 반박 역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다윗의 현 상황을 서술하는 구절과 비교, 분석해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골리앗이 참전한 전쟁 이전에 사울이 다윗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당시 다윗은 생각보다 유명인이었다. 사울의 악사 겸 무기 관리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천거로 들어갔기 때문이다.[20][21] 이 배경을 가지고 보게 되면, 어느 정도의 공신력이 이미 다윗에게 있었음에도 다윗을 걱정한다기보다 무시하고 있는 뉘앙스가 충분히 공동번역에서도 묻어난다. 그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전쟁 중에 진지로 몸소 찾아온 동생에게 형이란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다는 말이 그렇다면 집안에서 다윗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시편에서의 다윗의 심경 서술이 있다.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시편 51:5 (공동번역 성서)

이 구절이 태어나기 전부터 짊어지게 되는 원죄를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다윗의 어머니가 이새의 정실부인이 아니었고 이새와의 불륜을 통해 다윗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맥이라면 불륜을 저지른 부모가 죄인이지 다윗이 복중태아인 상태인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은 이상하다. 죄를 저질러 타락한 상태의 출생이라 죄인이라 자칭하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 자체가 원죄의 인정이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27:10 (공동번역 성서)

확실히 이것 하나만 보고 다윗이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았다는 서술이라기엔 비약이라는 의견이 있으니 이 부분은 뉘앙스와 번역의 차이로 생길 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문제는 다윗의 삶에 대한 서술에서 실제로 그러했던 뉘앙스가 강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윗의 삶에서 나타난 심리학적인 분석. 많은 발달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에서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도 큰 영향을 주며, 그러한 성향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부모가 되어서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남아의 성장 과정에서 이성에 대한 경험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나중에는 성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위축되고 고립된 환경은 의존적, 내성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자녀교육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서술은 없지만 다윗은 최소 아내 5명에 후궁 10명에 동녀 1명을 두었다. 왕이 되면 일부다처와 축첩이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22], 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을 저질렀을 때, 그 남편은 자신의 37충복 중 하나인 우리아였다. 다윗과 우리아의 관계가 멀지 않았고, 추측상 우리아-밧세바 부부가 신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그리고 일평생 다윗은 내성적인 성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평생을 유다와 기타 이스라엘 지파들의 눈치를 보았고, 요압에게 일평생 휘둘렸으며 말년에는 아들 솔로몬에게 의존하며 복수를 부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방임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압살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다윗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과 심리학 이론을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다윗이지만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자에게서[23] 들을 지키곤 했다. 현대 사회에서 양치기는 언뜻 생각하기에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양치기매우 힘들고 고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직업이었다. 양들을 데리고 산과 언덕을 돌아 다니느라 운동량이 격하게 많았고, 성경의 언급에 의하면 산과 들에 맛있는 양을 노리는 맹수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고대의 양치기는 매우 건장하고 강인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다윗의 이미지는 작고 나약한 소년이 아니라 야생에서 단련된 강인하고 굳센 청년이었을 듯하다.[24] 그렇다고 해서 꼭 헬스 트레이너마냥 우락부락하고 거대한 남성의 이미지를 생각할 것만도 아니다. 단련되었다고 해도 마초화랑, 악진, 잔 다르크 등의 예를 생각해 보자. 게다가 실제로 그의 용모는 "혈색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25]고 묘사되는데, 그 미모 덕에 사울 왕의 시종이 된다.

그리고 양치기 일을 하면서 꽤나 투석구를 잘 사용했던 것 같다. 양치기들이 투석구(Sling)를 사용하는 묘기를 보이는 동영상을 보노라면 다윗의 이야기는 마냥 허풍은 아닌 듯.

  • 다윗의 출생에 대한 논란에 반대되는 근거는 이렇다.
    1. 먼저 큰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삼상 15장 28절의 사무엘이 사울 왕의 왕권이 상실되었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새로운 왕을 세우리라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퍼졌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두려움에 떨었던 장로들) 즉 어쩌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와서 자신들을 불렀을 때, 자기 아들들 중 장자 엘리압을 가장 유력한 차기 왕후보로 보았을 수도 있으며, 엘리압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선지자 사무엘도 엘리압을 보고 삼상 16장 6절...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라고 오해하기도 할 정도...)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들에서 양이나 치던 막내아들 다윗에게 하느님의 왕의 계시(기름부음)를 받자 놀랐을 것이고.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여겨졌을 엘리압의 권위가 깎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즉 다윗이 왕이란 신분으로 생각하면 엘리압은 큰 형이지만 다윗의 종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엘리압이 아직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양치기 동생을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며,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압이 다윗에 대한 편견으로 '교만'함을 꼬집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윗이 양치기로 있었을 이유는 이스라엘의 재산분배 제도에 있다. 성경 사무엘상에서는 다윗이 엘라골짜기로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때, 양치는 자들에게 맡겼다고 나와 있다. 이스라엘은 장자가 2배의 몫을 취하고 나머지 형제들이 나눠 분배받는 재산 분할 제도가 있었다.
이새의 아들들이 다윗까지 합쳐서 8명이었고 '스루야의 아들들'인 다윗의 조카이자 부하들이 다윗보다 더 많은 나이대이거나 비슷한 나이대임을 생각했을 때,(요압, 아비새, 아사헬) 다윗의 형들과 다윗의 나이차가 꽤 났다는 것과, 이미 가정을 꾸릴 정도로 장성한 형들은 어느 정도 재산을 분배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다윗이 자신의 분깃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이새의 할아버지인 보아스는 큰 부자였고 토지 즉, 농경을 하였다. 다윗이 농사일이 아니라 양을 쳤다는 것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했기에 축산을 분깃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1. 시편 27편을 통한 다윗이 이새의 다른 부인을 통한 자식이라는 주장이 아닌 것에 대한 근거는 이렇다. 시편27편에는 (2절)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윗이 이 시편을 지었을 때의 상황이, 사울 왕에게 쫒기는 시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울에게 쫒기는 당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채, 급히 도망쳐와 배고픈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하느님께 드린 후에 물려진 빵)을 주어 먹게하고, 다윗이 잡았던 골리앗의 검(당시에 동기, 금속제 병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즉 무기를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있음을 통해서 다윗이 성읍이나 마을에 거주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즉 이때 다윗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기위해선 사울에게 밀고하거나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배경이 있어서 다윗의 친족이나, 부모님조차 다윗을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중에 가족들이나 도망쳐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찾아오지만, 이 후의 일이고 다윗이 도망자로 지냈던 세월이 7년이 넘는 것을 상정한다면 족히 몇 년간은 의절당했을 수도 있다.)즉 이런 상황배경에서 지었던 시편이기에 이 구절이 다윗의 서자출생을 암시하는 자료로는 매우 근거가 들어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 그리고 골리앗을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는 오해(?)에 대한 근거로는 일련의 사건들과 인과관계를 조금만 알면 알 수가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침을 통해서 일개 악사였던 다윗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 들었고,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라고 여인들의 노래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이 다윗을 결정적으로 시기하게 되었다.(즉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왕권 상실과 이웃에게 왕권이 갈 것이라는 이 예언이 확실하게 사울에게 각인되는 사건이었다.)
또한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의 수하로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시에 동족을 칠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라는 것을 가드 장수들이 친히 춤으로 묘사함을 봤을 때, 골리앗과 다윗이 싸웠던 사건은 블레셋에서도 큰 사건이었고 동일하게 파악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윗이 사용한 물매는 숙련자가 가공한 당시의 최대 능력을 낼 수 있는 그런 탄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상 17장 40절에 시내에서 매끄러운돌 다섯을 골라서 제구에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도 다윗이 물가에서 돌을 골랐다는 표현이 있으며, 또 물매질 하여 돌로 골리앗을 사살했다기보다는 정확하게 하자면, 물매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다윗의 손에 칼(금속 병기)이 없었기에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다윗이 나오는 성경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5명의 거인 골리앗과 그의 가족들이 나오는데, 이 모든 거인이 다윗의 손과 다윗의 부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숫자 5는 연합국이었던 블레셋(가사, 가드, 아스돗, 에글론, 아스글론)을 나타내는 상징수이기도 하며 금속병기를 가진 강대한 해상전투민족(바이킹과 비슷한?)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지, 다윗의 부하들이 골리앗을 잡았다는 표현은 그 어느 구절에도 없다.


2.2. 출세의 시작[편집]


키노르[26] 연주와 노래에 능했으며, 그 실력이 왕실까지 알려져 사울 왕의 전속 악사 겸 가수 겸 무기 관리인로서 궁정에 발을 디딘다. 그러다 블레셋(필리스티아)의 거인 전사 골리앗과의 싸움에 뛰어들어 투석구로 돌을 날려 이마 정중앙을 맞춘 다음 그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벰으로써 가수가 아닌 영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골리앗을 죽인 것이 다윗이 맞느냐 하는 것은 성경 내부의 구절들의 상호모순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사무엘기 상권 17장 49절~50절을 보면 분명 이새의 아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죽은 사람은 하나인데 죽인 사람이 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합리화하기 위해 후대에 기술된 역대기 상권 20장 5절에는 베들레헴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죽인 것은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였다면서 뜬금없이 골리앗의 동생을 출현시킨다. 골리앗의 죽음과 그를 죽인 이에 대한 전공 자체에 대한 서로 다른 3가지 구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엘하난 문서 참조.

어쨌든 이후로도 다윗이 이스라엘군의 장군으로 공을 세워 나가자 그를 칭송하는 열기가 높아졌고 사울 이상으로 인기를 끌자,[27] 질투와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사울이 공주와의 결혼을 빌미로 그를 위험 지역에 보냈지만 오히려 요구한 공보다 더 큰 공을 세워 왕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매우 친한 사이가 된다.[28]

그 사이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에게 반했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결혼지참금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혹은 이마껍질) 100개를 요구하자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200개를 까다 바치면서 미갈을 얻는다.


2.3. 사울에게서 도망다닌 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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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그러나 그것이 더 문제가 되어 결국 그가 왕위를 노릴 것이라는 불안감과 질투에 사울은 다윗의 암살을 시도하고, 사울의 딸인 자신의 아내 미갈과 사울의 아들인 자신의 문경지우 요나단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먼저 다윗은 사무엘이 살고 있는 라마에 있는 나욧(예언자 공동체로 해석)으로 피했으나, 사울이 병력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일제히 성령에 취해 예언을 하면서 맥없이 돌아가는 일이 발생한다. 세 차례 파병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자 결국 사울이 직접 쳐들어오지만, 오히려 라마 나욧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울 역시 성령에 취해 옷을 벗고 누울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어 예언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심지어 사무엘 눈 앞에서 벌거벗고 있었다.). 사무엘에게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다윗은 보호를 받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사무엘 및 선지 생도들에게 누를 끼쳤다는 심적인 부담을 느낀 탓인지 아니면 사울이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르지만, 다윗은 사무엘의 곁을 떠나 다시 도주의 길에 오른다.

나중에 다윗의 처지와 소문을 들은 반(反)사울 인사들이 다윗이 숨어있는 아둘람 동굴로 속속 모이게 되고, 다윗은 이들 400명을 규합하여 여기저기 도망다녔다. 이때 사울을 가까이서 죽일 기회가 2차례 있었으나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여도 되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신념을 지켜 각각 옷자락, 물병과 창을 가지고 돌아간다.

  • 첫 번째의 경우 다윗이 숨어 있는 엔게디 황야까지 쫓아온 사울이 부하들을 추적 보낸 뒤 혼자 볼일을 보고 있을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다윗이 몰래 다가가 옷자락을 베어 가져간 뒤 이를 사울에게 제시하며 자신은 사울과 대적하거나 그를 죽이려 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힌다.

  • 두 번째는 요압의 동생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 한복판을 잠입해 사울의 물병과 창을 챙겨 나와 어느 정도 위험 범위에서 벗어나자 사울 진영을 향해 소리를 질러 사령관 아브넬에게 "내가 네 주인 얼굴까지 보고 갔는데 너는 왕을 안 지키고 뭐하고 있었냐? 네 주인의 창이랑 물병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봐라."며 아브넬을 질책하고 이어 사울을 불러서는 자신이 왕의 적이 아님을 밝히고 그의 시종을 보내도록 부탁하여 창과 물병을 돌려주었다. 이것을 증거로 사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없앨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게 왕을 해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왕께서는 저를 계속 해치려고 하십니까?"라는 말로 호소한다.

다윗에 자비에 사울이 감복하여 돌아가는 일도 있었으나 이 평화도 잠깐뿐이었고 여전히 사울과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다. 이후 다윗은 아예 유대 땅을 떠나 필리스티아와 아말렉 등이 맞닿아 있는 국경 지대에서 일종의 용병으로 지내게 된다.

이때 자기를 푸대접한 나발이라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 해프닝이 발생한다. 당시 다윗은 나발의 양들과 양치기들을 보호해 준 적이 있어서 나발과도 연이 좀 있다. 그런데 이후에 다윗의 식량이 떨어졌는데, 마침 나발이 양털 깎는 행사(농경사회로 치면 가을걷이 축제)를 열자 식량을 요구했지만 친 사울파인[29] 나발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이 누군데 감히 나한테 먹을 걸 달라고 하느냐?"라고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물론 친(親)사울파가 아니더라도 다윗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사울에게 찍힌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마냥 도와주기 어려울 수는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라도 하다못해 난색을 표하거나 "널 도와주면 사울이 날 해칠 것이다."라는 식으로 돌려 말했으면 모를까, 나발은 여기에 "근래 들어 억지로 제 주인을 떠나는 종들이 많다"라며 대놓고 사울 왕을 배신한 반역자 취급을 하면서 "다윗은 누구고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라고 한 것. 이건 정말 다윗이 누군지 몰라서가 아니라 "다윗? 사울 왕을 배신한 듣보잡 반역자 주제에 어디 뻔뻔하게 기어들어 오냐?" 하고 대놓고 조롱한 것이다.

이런 나발의 배은망덕한 모습을 본 다윗은 분노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나발을 당장 쳐죽일 기세를 보이자, 나발의 집안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나발의 시종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주인 때문에 다 죽게 생겼습니다."라고 대놓고 험담을 하고, 이를 들은 아비가일도 다윗에게 "제 남편은 그저 자기 이름대로[30] 행동하는 사람일 뿐입니다."라며 용서를 구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의 빠른 대응과 사과로 기분이 풀린 다윗이 이를 용서하면서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장작, 나발은 태평하게 자기 집에서 주지육림을 벌이며 먹고 마시던 중, 자신에게 쳐들어 오던 다윗을 부인이 말렸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열흘 뒤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사망한다. 이에 다윗은 과부가 된 아비가일을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첫 부인이었던 미갈은 왕궁에서 다윗을 도망시킨 후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이후 다윗은 적국 블레셋의 가드 지역으로 피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죽을 뻔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피신 당시 다윗은 블레셋의 영웅이었던 골리앗을 죽일 때 썼던 칼을 차고 있었는데, 이것이 블레셋인들의 어그로를 끌어 신하들 앞에 끌려가게 된 것. 이때 다윗은 대문에 몸을 비비적대며 수염에 침을 흘리고 미친 척을 하자, 아기스 왕[31]은 "나한테 미친 놈이 모자라서 이런 놈을 데려온거냐?"라며[32] 역정을 내며 쫓아내 다윗은 목숨을 건진다. 이후 한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다윗은 다시 한번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잠시 신변을 맡기고, 국경지대에 위치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받게 되어 가족 및 가신들, 휘하 용병단을 이끌고 이주한다.

이후 블레셋과 사울 왕가의 전쟁에 참전할 상황에 처했다. 객장 신세인 다윗은 거절할 수 없어 반쯤 끌려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일 뻔 했으나[33] 다윗을 경계하던 필리스티아의 신하들이 이스라엘과의 양동 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배신 가능성을 이유로 크게 반대하여 다윗의 참전은 없던 일이 된다. 그때만을 기다리던 다윗은 그 길로 블레셋을 빠져나와 시글락으로 향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동족상잔의 침극을 피하게 하셨다"라며 찬송한다. 그러나 와보니 시글락은 이미 폐허가 되어 가족들이 납치된 상태였고, 가족을 잃었다는 현실에 절망한 부하들에게 돌로 맞아 죽을 뻔했지만, 기도하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버려진 이집트 인 노예의 안내를 받아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러 출격해 유다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이윽고 침입자들과 싸우고 이긴 뒤에 전리품을 나눠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결국 엄청난 유다인들의 지지 속에서 시글락 및 주변 필리스티아 주변의 땅을 가지고 유다로 귀환한다. 한편 이때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벌인 전투에서 사울 왕과 사울 왕의 세 아들 모두 전사하게 된다.

사울 왕과 아들들이 패배해 죽었다는 소식은 시글락에 있을 때 듣게 되었는데, 아말렉 출신의 패잔병이 다윗을 찾아와 "사울 왕이 '블레셋 놈들에게 죽기 전에 나를 죽이라' 하길래 그를 죽였습니다. 증거물로 그의 왕관과 고리도 가져왔어요.[34] 나 잘 했죠? 데헷" 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하느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시해했다고? 이놈의 목을 쳐라"였다.[35] 이후 다윗은 크게 슬퍼하며 사울과 요나단을 추모하는 시를 짓는다. 일명 활 노래.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4. 왕으로의 즉위[편집]


사울 왕이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 패하여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자, 유다로 복귀하여 헤브론에서 유다 부족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반면 사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인 이스보셋[36] 역시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내전 상태가 되나, 다윗을 지지하는 유다 지파의 인구가 많고 다윗 자신의 명성이 높아서 점차 사울 왕가 지지세력은 힘이 약해지면서[37] 결국 이스보셋의 측근 아브넬의 전향 및 암살, 이스보셋의 암살로 완전히 붕괴하고 만다.[38] 성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온 뒤 기쁨에 겨워 춤추다 맨몸을 노출시켰다는 사건의 후일담대로, 다윗은 자신의 전처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과 동침하지 않음으로써 사울의 피를 받은 아이가 왕가에 후계자로 들어오는 걸 원천적으로 막았다.

참고로 이 미갈과의 관계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사건이다. 원래 미갈은 그 오빠인 요나단과 마찬가지로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부왕 사울의 살해 위협에서 다윗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위험할 수 있는 일들을 벌였다. 다윗 또한 그녀를 얻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여서 사울에게 포피를 바쳤었고, 그래서 자신이 그녀의 정당한 남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왕위에 앉자마자 미갈은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증하며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문제는 사울 왕이 다윗이 미갈과 헤어진 이후에 그녀를 개가시켰다는 것. 다윗은 도망치던 당시 미갈을 데리고 도망치는 대신에 혼자서만 도망쳤으며 이후 두 사람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미갈이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10년 가까운 도피생활 동안 남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그 사이 다윗은 새로운 아내를 두 명 이상 맞아들였으며, 그 소식을 미갈이 접하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부왕의 명령으로 그녀 또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상황이었는데 문제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남편을 죽이려 한 아버지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녀는 전 남편의 명령으로 다시금 후궁으로 불러들여가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미갈이 다윗의 궁으로 가는 길목까지 그녀의 현 남편은 울면서 따라오다가 다윗의 신하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자 결국 되돌아갔다는 기록이 성경에 분명하게 있으며, 이는 미갈과 그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을 추측케 한다. 그런데 미갈이 돌아온 왕성에서 그녀의 신분은 폐출된 것이나 다름없는 전 왕의 딸이자, 다윗의 다른 왕비와 후궁들보다 아래가 되었으며, 그녀를 다시 데려오도록 명한 현 남편 또한 그녀에게만 충실한 그때의 인물은 아니었다. 즉 다윗과 미갈이 헤어진 이후로 그들 각자가 겪어온 삶의 길이 있었고, 미갈의 입장에서는 다윗에게 예전처럼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는 심적인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을 수도 있다.

통합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여부스 인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다윗성을 쌓고 지방을 전전하던 성궤를 옮겨와 정치적, 종교적인 수도로 만든다. 또한 필리스티아 등 주변 민족들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복속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다윗의 통치로 통합 이스라엘 왕국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한다. 동쪽 암몬에서 새 왕인 하눈이 즉위하자 다윗이 선왕 나하스를 조문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냈는데[39], "조문하러 온 게 아니라 정탐하러 온 거다"라는 휘하 관리들의 말을 믿어버린 하눈이 사신들을 잡아 수염을 반이나 깎아버리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을 도려내 돌려보낸 것이다.[40] 거기에 모자라 약 3만 3천여 기의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전갈이 오자 분노한 다윗은 돌아온 사신들을 여리고로 보내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은둔하게 한 뒤 요압과 아비새에게 정예군사들을 붙여 암몬 족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2.5. 타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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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에서 부하들도 성궤도 그 전쟁터에서 암몬과 싸우고 있던 어느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궁 위 옥상에서 산책을 하던 다윗은[41] 궁궐 마당에서 목욕하던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를 궁으로 데려와서 NTR을 행했고 그녀의 남편이자 자기에게 충성하던 군인 우리야를 모략으로 전사하게 한 사건을 일으킨다.[42]

자신과의 불륜으로 밧세바가 임신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야에게 이실직고하는 대신에, 그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하게 해서 불륜을 감추려고 하는 꾀를 쓴다. 그렇지만 충직한 군인 우리야는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 왕 다윗과, 그 왕의 종인 제가 왕의 군인이자 저의 전우들이 전쟁터에서 구르고 있는데 혼자서 편안히 아내와 함께 휴가를 보낼 수 없습니다"라며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43]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야에게 왕명으로 술을 내려 마시게 하여 취하게 했는데도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병사들과 같은 막사에서 잤다. 꾀에 걸려들지 않는 우리야를 전전긍긍하던 다윗은 결국 군인은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악용해서 우리야를 자연스러워 보이게 없애 밧세바를 과부로 만든 뒤 차지하자고 마음먹는 데 이른다. 그리하여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야를 가장 위험하고 승산도 없는 전투의 선두에 세우라 명령하여 충직한 신하이자 장수인 그를 적의 손을 빌어 전사시켜 버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듣고 흐느껴 울던 밧세바를 그 상이 끝나자마자 왕궁으로 데려와 처로 맞이한다.

참고로, 우리야는 다윗의 용사들 중 한 명으로, 성경에서 800명을 죽인 요셉-밧세벳, 블레셋과 맞선 알르아살, 삼마 등과 함께 이름이 적혀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유대인도 아닌 히타이트인데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다윗을 따른 인물이었다. 즉, 다윗의 가장 뛰어난 부하들 중 한 명이자,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그를 섬겨온 충신인 인물이었다. 당연히 다윗과는 매우 친하고 긴밀한 관계였을 것이다. 그런 부하의 아내를 빼앗듯이 취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더 말이 필요 없는 범죄로 본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다윗을 제대로 꾸짖었다. 평소 율법을 지키던 작자가 왕이 나가야 하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부하들만 보내놓은 후, 자면서 쉬고 있기나 했다는 불성실은 그렇다 쳐도 그 직후에 간음, 중상모략, 불륜, 간접적 살인 등 십계명에서 하지 말라는 걸 다 저지르고 있으니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것이 사랑(사랑은 오래참음등등)의 하나님이시다. 나단은 다윗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었고 부자에게는 소와 양이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반려동물처럼 아끼는 어린 암양 한 마리만 있었는데, 어느날 손님이 오자 부자가 자기의 넘쳐나는 대신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이자 그가 사랑하는 딸 같은 그 암양을 잡아다가 자기 손님에게 대접했다"라는 비유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듣던 다윗은 길길이 화를 내며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야 하고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4배를 배상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나단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며 일침을 놓고, 우리야를 속이고 그 아내를 빼앗고 결국에는 그를 죽이기까지 한 이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고 천명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을 것이며 칼이 다윗의 집안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를 전했다. 여기에 더해 다윗의 처들이 NTR당할 것인데 너는 비밀스럽게 했지만 는 백주(대낮)에 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까지 남겼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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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그제서야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쳤고 예언대로 다윗은 죽지 않지만, 밧세바가 출산한 아기가 큰 병에 걸리고 만다. 그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음에도 결국 그 아이는 죽어버렸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다윗은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인 뒤 목욕하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왕이 그 비보를 듣고 더 심하게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신하들은 이를 보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다윗은 "아기가 죽기 전에는 이렇게 열심히 간구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주실까 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고 대답한다. 하느님 뜻대로 다 행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와 동침한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에게 다른 아들을 얻는데, 그가 바로 솔로몬이다.

나단이 찾아온 건 목욕하던 밧세바를 데려다 간음하고 수 개월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여러 꼼수를 부려서 우리야를 밧세바에게 여러 번 보내고자 했지만 우리야가 계속해서 언약궤와 부하들의 곁을 지키며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고 버티자, 마침내 우리야를 죽게 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의 일이므로 일의 발단부터로 치면 약 9개월 정도 후에 해당한다. 즉 다윗은 그동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은폐한 채 간음에서 차도살인, 홀로 남은 밧세바를 NTR을 하는 등 오히려 죄를 가중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도 대외적으로는 멀쩡히 왕 노릇 하고 있었겠지만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고 일종의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는 '영적인 암흑기'에 처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파란만장한 일생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름 높았으며 후대의 왕들에게도 “다윗만큼만 해라”는 식으로 기준점이 되는 위대한 왕 다윗에게 있어 최악의 흑역사다. 질책하는 나단의 메시지에서는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라는 대목이 등장하고 다윗도 “내가 주 앞에 죄를 지었다”고 시인하였다. 먼 훗날에 쓰여진 복음서에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라고 적혀 있다. 당시에는 물론이고 후대의 유대인들이 보기에도 밧세바의 정당한 남편은 우리야였고, 존경하는 다윗 왕이지만 이 사건만큼은 '이건 아니다'라는 인식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에도 유다 임금 아비야에 대한 내용에서 다윗에 대해 우리야 사건말고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만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야 사건은 열왕기 저자들조차 부인할 수 없는 큰 과실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후손인 요시야에 대해서 다윗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평하면서 '요시야의 악행은 없다.' 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면 간접적으로 요시야가 다윗보다 더 나은 평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성경상으로는 다윗이 더 대단하긴 하다. 다윗은 그 신실함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왕조가 끊기지 않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아들인 솔로몬이 말년에 흑화하여 분노를 샀지만 나라를 절단내어 반만 물려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퉁쳤고, 이후에도 중간중간 악한 왕들이 나와도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즉각적인 보복을 받는 것에 비해 신벌로 고생하게는 해도 므나쎄 이전까지는 망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시야는 하느님의 분노가 너무 커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을 신실하게 믿고 또 그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했음에도 단지 멸망을 한 대 늦췄을 뿐이었다.

2.6. 압살롬의 반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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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드 시몬의 <암논의 암살>
혼란의 절정은 아들인 압살롬의 반란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다윗의 큰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인 다말강간하고, 이에 격분한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암논은 다말에게 욕정을 품고, 사촌 요나답과 공모하여 꾀병을 부리면서 아버지에게 "다말을 보내서 나를 간호하게 해 달라"라고 청하여 다말을 자기 침실로 유인했다. 다말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빠를 간호하러 갔다가, 암논이 흑심을 드러내자 기겁하여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차라리 아바마마께 정식으로 날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라"라고 설득도 하며 이러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암논은 끝내 듣지 않고 힘으로 다말을 강간했다. 직후 다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45] 암논은 그대로 다말을 내쫓았는데, 다말이 "나를 강간한 것보다도 이대로 내쫓는 것이 더 큰 죄악"이라며 항변하였으나[46] 암논은 역시 들은 체도 않고 종들을 시켜 다말을 끌어내게 했다. 이에 다말은 자기 옷을 찢고 머리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뒤 비통하게 울면서 친오빠 압살롬을 찾아갔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압살롬은 몹시 분개하면서 다말을 자신의 집에 데려가 보호했다. 다만 그는 이 일을 공론화하거나 암논에게 가서 따지거나 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기만 했고, 다말에게도 "일단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라고 했는데, 전후 정황상 동생이 당한 일에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사건을 왕위 계승 경쟁에서 암논을 공격할 빌미로 삼을 생각이었고 또 부왕이 이 일을 어찌 처리하는지를 지켜보려고 했던 듯하다. 본인이나 힘없는 여동생이 처벌을 호소하는 것보다 부왕이 친히 죄를 묻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기도 하고. 그런데 다윗은 암논이 이복누이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노여워했으나 그뿐, 암논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고 사건을 유야무야 넘겨버렸다.[47]

이후 압살롬은 2년 뒤 바알하솔에서 자신의 양들을 털깎이하는 행사를 열고 성대한 잔치를 열어서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암논을 포함한 모든 형제들을 초청했다. 압살롬이 그 동안 원한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으므로 암논은 그를 경계하지 않고 잔치에 참석했는데, 바로 그 잔치에서 압살롬은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함으로서 누이의 원한을 갚고는 어머니의 친정인 이웃 나라로 도망쳤다. 이 소식은 당연히 다윗에게 전해졌는데 처음에는 "압살롬이 다른 왕자들을 다 죽였다"라는 오보가 전해지는 바람에 다윗이 크게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나자빠졌다. 하지만 곧 다른 왕자들은 무사하다는 보고를 받는다. 요나답[48]이 "압살롬은 암논이 여동생을 강간한 일로 원한을 품고 있었으니, 암논만 죽고 다른 왕자들은 무사할 것"이라고 얘기해서 겨우 분위기가 진정됐는데, 그가 얘기하기 전까지 다윗은 압살롬이 다말을 위해 직접 복수에 나섰을 가능성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다윗은 심한 충격을 받았지만 일단 암논의 잘못이 원인이기도 하니 압살롬에게 "네가 암논 죽인거 눈 감아줄 테니 너도 이쯤 하고 그만두거라" 하면서 용서하고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이쯤되면 알겠지만 다윗은 가족 간의 끔찍한 만행을 제대로 수습할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당장 율법에는 강간도 금지하고 있고, 이복남매와의 관계도 근친상간으로 간주하여 금지하고 있으니, 암논이 이복동생을 억지로 강간한 일은 말 그대로 천인공노할 범죄이자 악행이다. 제 아무리 첫째 왕자라도 율법을 저질렀으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사로운 부정(父情)을 앞세워 암논에게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고 사건을 어영부영 덮어버리는, 지극히 불공정한 처사를 보였다. 피해자인 다말도 다윗의 딸이라는 점을 볼 때, 이는 아버지로서도 대단히 잘못된 처사였다.

이후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한 뒤 외할아버지인 그술 왕에게 도망가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다윗의 부름으로 돌아온 후에도 부왕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후 본인이 아버지보다 더 나은 왕이 될 것이란 자신감이 넘쳤던 압살롬은 여론을 조작하여 반 다윗 세력을 형성하고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까지 점령한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 궁을 지키게 하려고 남겨둔 후궁들을 강간했는데[49],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는 전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이 왕권의 완전한 계승을 의미했다. 다윗이 우리야를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대가로 받은 저주의 예언이 최악으로 돌아온 것으로 다윗은 그녀를 은밀하게 범했지만 압살롬은 휘장만 쳐놓은 침대를 거리에 내놓고 백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잠자리를 가졌다.

야훼여! 나를 괴롭히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나를 넘어뜨리려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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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1~2절(공동번역 성서) 예루살렘을 나서면서

그 사이 다윗은 일단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정적들에게 여러 차례 모욕을 당하게 된다.[50]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 후새라는 친구이자 신하를 예루살렘에 남겨뒀는데, 후새는 압살롬에게 칭찬일색을 늘어놓아 압살롬의 환심을 사고, 압살롬의 측근이자 책사였던 아히도벨[51]이 "소수 정예를 결성해 빠르게 다윗을 쫓아가 잡겠다"라는 작전을 제안하자, "지금 다윗은 머리 꼭지가 돌 대로 돌아 잘못 건드렸다간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질 거다"라고 반박하며 이스라엘의 전 병력을 규합해 다윗을 몰살시키라는 작전을 제안한다. 압살롬은 후새의 작전을 채택했지만 사실 이것은 다윗과 후새가 짠 고도의 낚시로... 당시 이스라엘은 병력이 수도 예루살렘에 집결해 있는 것이 아니라 12지파 지방에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규합하려면 그들이 집결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똑같지도 않은 무려 12지방에 떨어져 있는 군단이 하루아침에 떡하니 동시에 모이는 것도 불가능하니 한마디로 다윗이 피신하여 자기 군대를 재편성 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이후 마하나임에서 근왕세력을 결성한 다윗의 반격으로 결국 압살롬은 패배하여 노새를 타고 도망치던 도중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려 매달렸으며, 결국 요압에게 붙잡혀 요압과 그 부하들의 창에 찔려 생을 마감한다.[52] 자식을 죽일 마음이 없었던 다윗은 압살롬을 척살한 사령관 요압과[53] 그와 사이가 멀어졌다[54] 다만 이건 단순히 괘씸죄를 가지고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요압의 개인적인 판단이 어떠하였든 왕인 다윗의 명령은 일단 압살롬을 생포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요압이 왕명을 어긴 것이고, 요압이 왕명을 어긴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통합 이스라엘 왕위를 다투던 시기에 투항해왔던 이스보셋 군대의 사령관 아브넬을 암살한 것이 있다. 물론 아브넬이 헬갓핫수림에서 요압의 막내 동생이었던 아사헬을 사살한 원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엄연히 군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보전하기 위해 적진에서 투항해 온, 그래서 왕이 중용하기로 마음 먹은 자를 자신이 개인적 원한을 빙자해 멋대로 죽인 것이다. 실제로 다윗은 이 암살 사건의 소식을 듣자마자 공식적으로 요압을 저주하여 아브넬 암살 사건과 자신이 아무 관련이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면 별로 감이 안 올지도 모르지만, 이스보셋의 실질적 비선실세나 마찬가지였던 아브넬을 포섭함으로서 내전을 조기 종결시킬 기회를 잡은 다윗 왕이 요압의 독단적 행동에 빅엿을 먹은 것이다.[55] 자세한 것은 압살롬요압 항목 참고. 이것이 아도니야-솔로몬의 분쟁의 한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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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최후[56]

2.7. 그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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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실시한 인구 조사를 묘사한 그림.
다윗은 하나님이 불어넣어준 마음에 따라 인구 조사를 한다.[57] 성경에 왜 인구조사가 죄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구조사라는 행위 자체가 야훼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군사력)을 더 믿는다는 의미이므로 불순종과 교만이라는 두 가지 죄목에 해당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허나 사람마다 해석이 미묘하게 다르다.[58]

한편 전근대의 많은 문화권에서 인구조사(특히 정확한 인구조사)는 곧 학정(虐政)으로 여겨지던 것과 연관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전근대 국가에서 인구조사의 목적은 결국 정확한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정확한 인구조사를 하려 들면 "사람 수 따박따박 세서 그에 맞춰 세금 따박따박 걷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개개인의 소득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맞춰 일정 비율의 세금을 거두는 발전된 조세체계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인구조사 해서 적정 세액 파악하는 게 왜 학정이냐?'라고 여길 수 있지만, 행정 기술 및 교통 통신 기술의 한계가 뚜렷하여 정확한 납세자 규모 파악이 힘들고, 그 반대급부로 각 개인에 대한 조세 부담이 무겁던 전근대에는 인구(=납세자)수가 정확하게 파악되면 세금이 견디기 힘들게 무거워진다고 여기고, 따라서 대략 '전이랑 인구 큰 변화 없지? 그러면 세금도 전이랑 비슷하게 내라' 정도로 넘어가는 정치를 너그러운 정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도 조선시대까지 왕이 정확한 인구조사를 지시하면 모진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줄이었고[59], 조정래태백산맥을 보더라도 인민군이 점령지에서 농업 소출 파악을 위해 이삭에 달린 알갱이 개수까지 세자 "저걸 다 세서 세금을 매기겠다는 거냐"라고 분노와 공포에 질리는 농민의 일화가 다뤄지며, 청나라 시대에도 강희제가 정세(인두세)를 고정하자 폭발적으로 인구가 성장(자연인구 뿐 아니라 인구조사를 통해 파악된 인구 자체가 폭증)하기 시작한 사례등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전근대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인구조사 자체가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밑밥까는 죄로 여겨졌다는 것.[60]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서 나쁘게 묘사되는 요압마저도 인구조사를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하여 말렸는데, 다윗이 오히려 강행했다는 점이다.[61] 양심에 찔린 다윗은 야단맞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한다.[62] 이때 야훼는 7년 가뭄, 적군이 침공해서 3달 동안 개고생, 3일 동안 전염병, 이 셋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고 다윗은 "적군보단 당신께 혼나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다"라는 말로 전염병 페널티를 골랐음을 우회적으로 말한다.[63] 그렇게 전염병으로 7만 명의 백성이 죽고 만다. 이후 다윗은 하느님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한 농부의 밭을 사서 재단을 쌓아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백성이 고통받아야 하냐며 자기와 자기의 가문을 벌해달라"라고 기도한다. 다행히 다윗은 용서받아 전염병은 사라졌고 다윗이 번제와 친교제를 드린 장소에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다.

사울을 처음으로 세우려고 할 때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한 말을 생각하면, 사실상 기록의 버릇이기보다 기록된 시기와 의도에 대한 차이이다. 사무엘기의 저자는 왕이 중앙 집권을 할 때 백성들의 저항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었고, "손해가 무척 나는 일이었지만 신의 뜻(혹은 왕의 뜻)을 대변한 일이었다"라는 당시의 공식 기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기는 의외로 동시대의 궁중비사에 박식하기 때문에 궁중 근무 선지자나 내관급의 신하가 서술했거나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사무엘의 사망 소식도 기록된 것이 사무엘기다. 이 경우 사무엘 사후의 사무엘기는 사무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하나의 근거.

하지만 역대기 상하권은 이스라엘이 초유의 쇠퇴와 멸망을 겪은 에 기록된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이 이런 죄를 저질러 하느님께 벌을 받아 망했다는 기록의 의도가 짙다. 즉 초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혹에 빠져 멸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의 의미에서 과거의 문제되었던 사건을 '사탄의 유혹'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역대기 상하권이 구약의 동시대를 다룬 사건에 비해서 다른 시각을 가진 경우가 무척 많다.

그래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위의 두 내용은 서로 보완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사탄이 주로 쓰는 전략은 백성들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여 야훼를 격노하게 하고, 야훼는 곧 이스라엘에게 항상 걸어놓는 가호를 거두는 것이다. 가호가 거둬지면 사탄은 합법적으로 악을 허용하여 땅을 망가뜨리거나 사람들을 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상태에서 회개하면 다시 야훼의 은총이 내려 사탄의 행동이 멈추고, 파괴된 땅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백성의 죄로 야훼의 보호가 풀렸고, 사탄이 다윗을 충동질해서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2.8. 노년과 왕위 이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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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자[64] 아들인 아도니야[65]가 요압의 후원을 받아 다른 자식들, 특히 솔로몬을 제치고 왕이 되기 위해 멋대로 대관식을 거행해 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가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해 달라 요청해서 다윗의 정식 후계자는 솔로몬이 되었다.

다윗의 퇴위와 죽음 이후, 솔로몬은 아버지가 여러 가지 문제로 살려두었던 정적들과 형제인 아도니야, 그를 후원한 요압을 처단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당시에 목숨은 건졌으나, 다윗 말년에 그의 침대 시중을 든 처녀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하는[66] 등 왕위에 대한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다가 처형당했다.

다만, 사독과 함께 공동 대제사장을 맡은 아비아달은 죽이지는 않고 그저 파면하여 고향인 아나돗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종교계의 거물이라[67] 손을 대기 어려웠고, 부왕과 오랫동안 환난을 함께 해왔으며, 무엇보다도 그 원인이 다윗이 젊었을 때 저지른 과오의 대한 책임도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 사유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가던 다윗은 도중에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제사장 아히멜렉과 만나면서 "왕에게 받은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인데, 먹을 것과 쓸 만한 무기 있느냐"이라고 거짓을 말했고, 이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아히멜렉은 음식과 골리앗의 칼을 주어 보냈다. 사울의 목자장이던 에돔인 도엑이 이를 보고 사울에게 밀고했고, 사울 왕의 분노를 사게 된 아히멜렉의 가문은 아들 아비아달을 제외하고 몰살당했다. 가까스로 도망간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는 이후 다윗에게 의탁했던 것이다. 참고로 아비아달은 사무엘기에 나오는 대제사장 엘리의 현손으로, 사무엘이 어렸을 당시 아비아달의 고조할아버지인 엘리는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 때문에 대제사장직에서 박탈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바가 있었다. 현손대인 아비아달 때 그 예언이 성취되어, 아비아달의 가문은 다시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제사장의 후예 두 계열 중 하나인 이다말 계열의 엘리 가문의 대제사장직은 완전히 끊기고,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 가문만이 대제사장직을 이어가게 된다. 사무엘 유년 당시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정적의 경우 정처 없이 피난하는 다윗을 집요하게 쫓으며 조롱하던 시므이가 있엇는데 당연히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자 죽을 날만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용서받았으나 그는 왕을 모욕한 데다 여러 인물과 얽혀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를 주시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솔로몬은 그에게 유폐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시므이는 자신의 도망친 노예를 쫓아 유폐된 지역을 나가 이를 빌미로 선왕의 일까지 트집 잡혀 결국 처형당한다.[68]

그 뒤 솔로몬도 초기엔 아버지처럼 정치를 잘했지만 말년에는 각종 우상숭배와 색욕 등으로 인해 이스라엘 왕국을 말아먹었고, 그 아들 르호보암 대에 가서는 나라가 두동강이 난다 이후로도 계속 치고 받고 싸우다 여기에 우상숭배까지 더해지고 북이스라엘 역사상 악한 왕 네임드 반열에 등극한 아합의 딸과 혼인을 하자 왕의 사후에 왕의 손주들을 비롯해 왕가의 혈통을 끊어놓기까지 한다. 다행히 어린 왕손의 누이가 제 동생을 빼돌려 감추고 장성하여 왕위를 되찾아오지만, 그 왕도 흑화해 은인의 뒤통수를 치는 짓을 하고 그 후손들 역시도 같은 짓을 반복해 '회개하다 흑화하다 망하는 내용'이 대략적인 이스라엘 역사서의 내용이다. 선지자 나단의 예언 후로 다윗의 가정은 피와 칼이 끊이지 않는데다가, 나중에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대낮에 왕궁 옥상에서 다윗의 첩들까지 취했으니 결국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회개하고 야훼의 사랑을 받은 다윗이었지만, 어찌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이 스노우 볼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까지 이어지게 된다. 다윗이 이룩한 통합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대에 분열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갈라졌다.


3. 평가 및 의의[편집]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사도행전 13:22)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유다의 왕들의 기준


사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가져온 왕이라서 주인공 보정으로 넘어가는 일이 있지만 솔로몬~르호보암 연대에 있었던 외국인과의 우호 관계 및 우상숭배가 이 시대에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암논의 강간 범죄 때 그의 죄를 처벌하지도, 왕족 자리에서 폐하지도 않은 점, 그리고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이 외가 왕국으로 도망간 점은 모두 왕자의 외가쪽, 즉 정략결혼의 세력 분배에 따른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됐든 그는 이스라엘-유대의 가장 중요한 영웅이자 왕으로서 그와 관련된 성경 기록도 많으며, 기독교에 의하면 그의 혈통이 '왕중왕'인 예수로 전해져 그의 왕가는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가가 되었다고 한다. 즉, 하느님이 믿음의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올려놓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자식 농사는 무척 나빴다. 언급되는 자식들 중에서 장자인 암논은 이복누이를 강간했고, 압살롬은 왕위를 계승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아도니야 역시 멋대로 대관식을 치르다가 용서 받았음에도 정신 못 차리고 부왕의 첩을 탐내는 등 인간성에 문제가 많은 이들이었다. 거기다 그나마 나아 보이는 솔로몬조차도 말년에 하는 짓거리를 봐선…[69]

다윗은 여러모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예루살렘을 건설하여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치열하게 싸울 성지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그다. 물론 사울 때부터 그 단초를 보이긴 했으나, 이스라엘이 다윗 아래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나라 꼴을 갖추고 복잡한 중동 정세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이스라엘과 훗날의 팔레스타인 지역 국가들에겐 재앙이 되기도 했으니, 다윗 왕 시대에 군사•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해서 여러 강적들을 두들겨 준 것은 좋았으나, 아람아시리아의 발목을 열심히 잡아주던 이 중요한 시기에 하필이면 다윗 왕에게 일격을 당해서 아시리아의 급성장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성장한 아시리아는 그때까지 대여섯 차례에 걸쳐 지배와 종속, 정복 관계를 뒤바꾸던 바빌로니아를 끝내 굴복시키고 메소포타미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나중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패망한 걸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융성기를 연 성군이 동시에 패망까지 준비한 셈이니 그야말로 아이러니. 하지만 이 책임을 모두 다윗에게만 전가할 수는 없고, 아람의 약화는 후일 북이스라엘과의 잦은 싸움도 한몫 했다고 봐야 한다.

후대에는 굴욕을 많이 당했다.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7세가 쳐들어오자 그와 협상을 하기 위해 다윗 왕의 능을 털어서 은 3,000 달란트를 마련해 뇌물로 주고 포위를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예루살렘이 그간 수많은 침공과 점령, 파괴를 겪었는데 다윗 왕의 능에서 은 3,000 달란트라는 거금이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 시대로부터 불과 100년 이후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기록했으니 무조건 신빙성이 없다고 하기도 힘들다.[70]

현재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마르코의 다락방 기념 교회 밑 지하에 다윗 왕의 무덤이라는 것이 전한다. 물론 이 무덤은 진짜 다윗 왕의 무덤은 아니고 십자군 시대에 예루살렘 왕국에서 마르코의 다락방 기념 교회 밑에 다윗 왕을 기념하는 무덤을 세웠을 뿐이다. 십자군이 만든 이 가묘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신자가 함께 예배를 올리는 몇 안되는 곳이다.

근데 다윗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나라가 안 망한 게 신기할 정도로 그의 치세 때 국가 막장 테크가 연속으로 터졌다.

  • 왕은 되었지만 왕 되자마자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이스보셋)[71]
  • 이를 어찌어찌 합쳐놨더니 옆나라가 2번이나 쳐들어오고
  • 이를 또 무찔렀더니 이번에는 먼 이웃나라가 시비를 걸어서 쳐들어가 박살을 내놓고
  • 그 와중에 밧세바를 범하는 NTR을 저질러서 밧세바의 할아버지인 유능한 신하[72]가 사표를 내버렸고
  •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방목해서 키운 큰아들(암논)이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하고 그 배다른 여동생의 오빠가 빡쳐서 그 큰아들을 살해했으며
  • 그 동생내미를 용서했더니 더 삐딱선을 타서 반란 일으켜 내전으로 번지고[73]
  • 이 반란을 어찌어찌 막았더니, 어떤 양아치 하나(세바)가 반란 또 일으키고
  • 또 정리하고 나니 역병 돌아 사람들 떼죽음 당하고(인구조사 사건)
  • 말년에는 부하들한테 전쟁터에서 짐짝 취급 받았으며
  • 후계자를 정해놓기만 하고 공표하지 않는 바람에 또 다른 욕심쟁이 아들내미(아도니야)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등.[74]

다름이 아니라 다윗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그에게는 허락치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에게 성전건축을 하게 하시고 대신 다윗이 시키지도 않은 성전을 세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겨 다윗 왕조는 최소한 망하지는 않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었다.[75]

거의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살았는데, 이 때문인지 군부와 각 지파의 입김이 상당히 셌던 모양.[76] 그러나 전쟁 영웅이었던 다윗의 지속적인 왕권 강화 덕분에 후계자인 솔로몬의 치세 동안 각 지파의 수장과 선지자들이 솔로몬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였다.[77]

사실 성경상 다윗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 바로 밧세바를 불륜했던 건데, 문제는 그것 때문에 다윗의 집안에서 말 그대로 칼이 떠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나라가 두동강이 나서, 둘 다 약해져서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여자 하나 잘못 건드려서 그 대가로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것을 보고, 몇 번이고 목숨의 위험을 겪었으며 (그것도 자식에게) 종국엔 죽음 다음에도 다윗 본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완전히 박살나버리는 엔딩을 맞은 것. 이걸 보면 다윗의 간통에 야훼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의 사무엘하 3장에서는 "사울 왕실과 다윗 왕실 사이의 싸움은 오래 계속되었다. 다윗은 갈수록 강해졌고 사울 왕실은 갈수록 약해졌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사울의 장군인 아브넬이 죽은 사울의 후궁인 리스바를 겁탈하자, 이를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문제 삼았는데 오히려 아브넬은 화를 내며 "내가 사울과 당신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당신을 다윗한테 넘겨주지 않았는데 하찮은 여자 일로 나를 꾸짖는 것이오? 이 나라 사울 왕실을 다윗한테 넘겨주어야겠소."라고 협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평화적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사울의 가문과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힘으로 권력을 빼앗았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폭력적인 쿠데타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아울러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한 노역을 줄여주지 않자, 그들은 화가 나서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어디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것이 없구나. 다윗이여, 이제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구약성경 열왕기상 12장 16절)."고 울분을 터뜨렸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의 조상인 다윗에 대한 반발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편집]


사실은 실존을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성경의 내용과는 달리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당시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은 사마리아에서 계속 쥐고 있었고, 아래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다스렸다는 다윗과 솔로몬의 궁궐로 추정되는 건물은 막상 매우 작은 저택 정도였지만 사마리아에서는 성서의 이스라엘 왕국 묘사처럼 레바논 삼나무와 상아로 장식된 화려한 궁궐 유적이 나왔으며, 주변 국가의 기록에서도 오므리, 아합, 예후 등 이스라엘 북왕국 국왕들은 실존이 확인되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다 남왕국은 막상 독립국가가 아닌 이스라엘의 봉신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단 다윗에 대한 당대의 금석문 기록이 단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고, 게다가 그마저도 다윗 사후 약 100여 년 뒤의 기록인데, 성서에서 선지자 엘리사아람 왕으로 세운 것으로 나오는 하사엘 2세가 건립한 텔 단 비문에 유다 왕 아하시야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를 "다윗 집에 속한 자"라고 부른 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하게 다윗의 이름이 기록된 경우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다윗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아서 왕처럼 후대 유다 왕들이 정통성을 위해 과장해서 기록한 전설상의 인물이거나, 실존했더라도 유다 지파의 족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이스라엘 12지파는 사실은 별개의 부족이었다가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야 통일되어 이스라엘로 묶이게 되었고 그 중 유다의 족장 여호사밧아합의 딸 아달리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결혼동맹을 통해 이스라엘의 종속국이 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연방체제에 편입되었다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정복 이후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유다 왕국요시야 왕이 아시리아가 물러간 옛 이스라엘 땅을 잠시 차지하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 왕이었고 그 후손 요시야가 다시 이스라엘을 통일한다'고 선전하며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지지를 얻고 있다.참고

다윗이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데, 다윗이란 이름은 지휘관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다위둠"에서 온 것으로 사울 휘하의 장군으로서, 또는 사울에 대항하는 반란군 대장으로서 받은 별명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랑과 관련된 어근 ד-ו-ד (dwd)에서 유래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인데다가, 기원전 22세기의 아카드 왕 두두(𒁺𒁺, du-du),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에 기록된 이집트 관료 두우두(𒁺𒌑𒁺, du-u₂-du)등 실재했던 인명과 같은 계통의 이름으로 보는 입장도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없다.

2005년 다윗왕의 궁궐이라는 곳이 발견되었다.[78]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발굴이 된, 다윗의 궁으로 추정되는 궁궐은 일명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Large Stone Structure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구조물을 발굴한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굴된 이 건물의 벽의 한 변은 약 2.5~3m 두께로 동서로 30m에 이른다.

이미 예루살렘은 이 잡 듯 다 뒤져서 평면적으로는 더 다른 건물터가 나올 데도 없다. 지형상 홍수나 산사태, 습지 등 건물을 삼킬 정도의 지질이나 자연 재해가 있지도 않고 나무로 궁을 지었다면 방화로 인한 인멸도 있겠지만 그 동네는 석조 건물 위주라 기초도 찾을 수 없다면 그냥 다른 건물 터가 없는 거다. 소소한 유물 정도는 앞으로도 더 나오겠지만 더 이상의 대형 구조물들의 터는 찾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물론 수천 년 간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고 고고학자들이 뭣 모르고 상부 건물을 날려 버린 경우에는 건축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바닥을 찾기가 힘들 수는 있다.

그렇기에 발굴된 결과를 볼 때 연대의 논란이 있지만 고고학자 에일라트 마자르에 의하면 그 건물과 연결이 되었다고 주장이 되는 높이 18m 정도의 Stepped Stone Structure와 같은 거대한 석조 건축물도 있기 때문에 다윗의 궁전이 없없다고도 그렇다고 해서 얼마 만큼의 규모로 건축이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단정을 짓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무튼 책임자 에일랏 마자르를 포함을 한 발굴 팀들은 다윗왕이 건설을 한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지만 일단 10헥타르 정도의 최대 4천 명 정도 거주를 하는 지역으로 흔히 이야기를 하는 촌락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롤프 크라우스(Rolf Krauss)는 다윗의 궁궐 터에 대해 "지방 둥우리"라고도 일컫고 있다. 이 유적의 경우 부족 국가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는데 즉, 추장의 저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능한 규모라는 것.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결과로는 성서의 사아라임으로 확인이 된 곳이 고고학자 요세프 가르핑켈(Yosef Garfinkel)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는데, 발굴이 된 유적과 그 곳에서 발견이 된 유물이 해석되면서 기원전 10세기 경 다윗의 유다 왕국이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고 있다. 고고학자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는 "다윗의 예루살렘은 그 시기 예외적인 크기의 망대를 지닌 약 4㏊(4만㎡)의 도시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한 도시와 망대는 강력한 통치자의 세력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열왕기상 10장에 의하면 다윗의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라고 하며, 다윗의 궁궐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실제로 발굴되어 이스라엘 정부에서 공인하고 지키고 있는 다윗의 궁궐 터의 규모 자체가 애초에 그 찬란하던 나라의 흔적과는 거리가 멀다.

5. 다른 문학작품과의 연계성[편집]


다윗의 이미지와 에피소드는 이후 아서 왕이나 카롤루스 대제 등 중세 기사도 문학에 등장하는 위대한 왕의 이미지와 에피소드에 차용되기도 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리하는 것을 명시한 부분은 마리오 푸조의 영화 대부에서 그대로 패러디된다. 성경을 좀 읽어봤다면 유쾌한 장면.

80년대 KBS에서 방영된 영화판에서는 금발의 다윗이 나온다. 저예산을 자랑하는 열악한 수준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충실하고 자잘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다윗을 숨겨주었다고 성직자들을 도륙하는 사울의 모습이나 용병 생활을 하는 다윗도 묘사한다. 문제는 성우 이정구가 소년 다윗도 더빙했다는 것.

1985년 리처드 기어가 나온 영화 'King David'는 압살롬과 다말 스토리까지 그렸는데 고고학적인 고증이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래에 언급된 코딱지만한 흙벽돌 왕궁이라든지…[79] 영화 자체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고증의 정확함 덕분에 지금도 유튜브에 king david richard gere 라고 치면 이 영화의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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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갈과 결혼하는 다윗(리차드 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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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밧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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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김청기 감독이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바 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영화 벤허의 포스터와 판박이다.

Fate 시리즈에는 서번트로 등장.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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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이총기 감독이 더 킹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었었다.
그림체나 연출 스타일에서 드림웍스의 이집트왕자나 디즈니작품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덕분에 국산 애니인줄도 몰랐던 사람이 은근 많다고한다.
작화와 노래는 수준급이나 선교라는 주제에만 치우친 나머지 짙은 종교색체나 원작의 임펙트있는 시퀀스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겉햝기식 급전개로 진행하는등 밋밋한 각색때문에 비종교인들에게 어필하진 못하여 흥행에선 실패하였다.[80] 현재는 유튜브에 저화질 풀버전만이 남아있다.

6. 그 외[편집]


솔로몬과 함께 시편의 주요 저자로서 유명하다.[81]

그가 살았던 삶이 참 굴곡이 심하고 고달팠던지라, 시편에는 그의 절절한 사연이 많이 묻어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자신을 도와달라며 간구하는 모습들이 서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화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시편의 유명한 여러 구절들은 서양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사랑받으며 기억되고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등장하는 잭슨 이병은 적을 저격하기 전에 성경 구절을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그 읊는 구절이 바로 다윗의 시편이다.

현대에는 그가 조울증을 앓고 있었건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조증 특유의 과장된 자신과 돌출 행동을 보이다가도 "눈물로 밥을 해 먹는다"[82]라는 등, 우울증 증세에 해당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다재다능한 행적 이면에 예민한 감정선으로 고생한 것만은 확실하다.

집안에서도 그리 대우와 기대를 받지 못한 끄트머리 아들이었고, 사무엘이 찾아왔을 때처럼 들에서 양을 보면서 노래와 악기로 찬양하며 혼자 있던 일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목동 일은 천시받고 고된 일이었다. 다윗이 자신이 돌보는 양들 잡아먹으려는 사자와 곰을 해치운 전과가 있다고 했는데 다르게 보면 사자와 곰을 상대할 일이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 붓기 위해 방문했을 때도 따로 언급하기 전까지 다윗을 부를 생각조차 없었으며, 다윗이 부친의 명으로 군에 입대한 형들에게 식량을 주러 갔을 때 형은 동생인 다윗에게 폭언을 내뱉기까지 했다.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과 진실로 깊은 교제를 나눌 기회가 많았음이 그를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 빚어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체면조차 벗어던지고 춤추는 다윗의 묘사는 모든 계명 중의 으뜸인 “모든 것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의 한 예로 자주 언급된다. 그와 별개로 이런 성장 배경이 그를 일종의 애정결핍적인, 갈구하는 면을 만들었고, 밧세바와의 간음도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나태함으로 가드가 풀린 것이 원인이지만 이런 성격 또한 한몫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확실한 건, 다윗은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했다는 것이다. 예술적으로도 조예가 있었는지, 수금을 매우 잘 다루고 다윗의 시편은 종교적 가치를 떠나서 문학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녔다 평가받는다. 군사적 자질을 말할 것도 없고 상당히 다재다능했던 인물.

다만 거리낄 것이 없어진 왕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아들인 솔로몬은 엄청난 단위의 여자를 두었다), 그런 이유로 밧세바에 집착했다기엔 나단을 통해 책망받을 때에도 언급되듯이 다윗이 고를 수 있는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굳이 자신의 충신의 아내를 범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결국 다윗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고 설령 성격적 배경이 타당한 이유라고 해도 그것이 그의 소행을 정당화시켜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받았을 때에서나마 사울처럼 변명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리에 들어선다. 물론 회개한다고 처벌받지 않는 건 아니라서 본인의 가정과 나라가 개박살이 나버렸다.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라는 묘사가 있다. 여기에서 '붉다', '아름답다'는 말이 보통 여자의 외모를 칭찬할 때 쓰는 말인 걸 생각하면, 현대 기준으로 미소년에 가까운 외모였을 듯. 다만 요새야 미소년이란 명칭이 자랑일지 몰라도 저 시대에는 우락부락한 마초가 남성미의 표본이었기에, 남자가 예쁘다는 것은 곧 놀림거리였다.[83] 이 묘사는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여길 때도 나오는데 현대식으로 바꾸면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이 맞짱 뜨자고 하다니 가소로운 것" 정도가 된다. 드웨인 존슨이나 제이슨 모모아 같이 생긴 골리앗 앞에 한류 아이돌 같이 생긴 소년이 맞짱을 뜨자고 나타난 것 같은 상황.

잠입이나 은신에 재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일화가 몇 개 있는데,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가 잠든 진영으로 잠입해서 망토를 조금 자르고 창과 물병을 가져가 자신은 왕위를 노릴 의도가 없음을 보여준 일화[84]와, 전쟁에서 패해 쫓기고 있을 때 은신한 곳 입구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자 추적병들이 인기척도 못느끼고 그냥 거미가 거미줄 친 거 보니 아무도 없을 거다며 그냥 가버린 것,[85] 적장의 침소에 침입해 칼을 훔쳐 피 안흘리고 싸움을 끝낸 일화가 있다.[86] 세번째의 경우 적장이 칼을 깔고 자고 있어 포기하려다 모기가 적장을 물어 적장이 몸을 움직여서 빼앗긴 했지만, 그때까지 경비병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침투한 것만 보면…

구약과 신약 시대라는 배경을 공유하는 코란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다우드라는 이름[87]으로 불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인류 최초로 철갑을 벼려낸 대장장이로 나온다. 성경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로 골리앗을 이기고 왕이 되었다는 등 막강한 피지컬 및 실전 능력에 카리스마가 뛰어난 인물[88]로 묘사된다.

다윗의 막장CCM 그룹 '다윗의 장막'을 패러디한 그룹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만든 유명한 누드 조각상 다비드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연하겠지만 물론 르네상스 시대가 인간에 대한 탐구 때문에 누드로 표현한 것이지 실제의 다윗은 사람들 앞에서 누드로 다니진 않았다.

서양권 인명 중 데이비드, 다비드, 다비트라는 이름이 이 사람으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1] '이새(가톨릭에서의 표기는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라는 의미이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w 발음이 v 발음이므로 다비드(Davīd)에 가까우나, 고대 히브리어로는 다위드(Dāwīḏ)에 가까웠기 때문에 '다윗'으로 음역되었다.[2] داوود(Dāwūd)와 발음이 유사한 داود(Dāwūd)로 표기하기도 한다. 실수로 구글에 دود(dūd)라고 치면 식욕 뚝 떨어지는 사진이 뜨니 주의할 것.[3] 기원전 962년 설도 있다.[4] 사울의 차녀로 절친 요나단의 여동생이다.[5] 여담으로, 성경 전체에서 외모가 준수했다고 기록된 남성은 다윗과 요셉 단 둘 뿐이다. 사실 당시 멋짐의 기준은 다윗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현대의 멋, 소위 잘생쁨이라 일컫는 것에 근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 다윗의 말년에, 그의 적들이 모두 멸하고 난 평안한 상태에서 쓴 시라고 한다.[7] 마태오 복음서 1, 9, 21 장 시편 132편 등[8] 사무엘하 12장 10절[9] 성경의 표현으로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 사무엘이 집전해야 할 제사를 사울이 먼저 집전해버린 것이 문제이기도 했으며, 왕위에 오르면서 본래의 성정을 잃고 오만해지고 방탕해졌다고.[10] 이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십계명의 계명과, 부모를 경외하라레위기 19장 3절에서 유추가 가능하다.[11] 매매, 인신공양 등[12] 성인이 아니라는 의미이다.[13] 이때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킬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이 위기상황에 아무리 동생이 미워도 아버지와 동생의 안위보다 가축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것이다. 게다가 에리압은 근무는 서지도 않고 전선을 이탈까지 했다. 에리압이 얼마나 집에서도 밖에서도 제멋대로인 망나니였는지 알수 있는 내용이다.[14]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상 17:28, 공동번역성서)[15] 예)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16] 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17]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에서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맞아들여야하는 풍습이 있었다.(과부의 부양과 가계유지를 위해) 거기다 그 경우에는 그 아내와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가져도-후계자 문제로 자신의 아이가 아닌 형제의 아이가 되는 풍습이 있었다. 창세기나 마태복음에서 확인 가능하다.[18] 특정한 관습이나 결혼과 같은 통과의례[19] 룻기의 인물로 이새의 할아버지이자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룻기 서술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거부였다고 한다.[20] 시중들던 한 젊은이가 말하였다. "소인이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한 아들을 알고 있는데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씩씩하고 날랜 용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야훼께서 함께 해주시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18, 공동번역성서)[21] 이리하여 다윗은 사울을 찾아와 그를 시중들게 되었는데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자기의 무기 당번으로 삼았다. (사무엘상 16:21, 공동번역성서)[22] 사실 신명기에 이미 왕이 될 자는 많은 아내를 두지 말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마음이 미혹될 수 있다는 이유인데 이것으로 보면 다윗의 장남이자 제 형을 죽인 압살롬이 모친의 외가인 왕국으로 도주했다가 돌아왔을 때도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 이방공주와의 혼인으로 인한 외교일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23] 사무엘기 상권 17장 34~37절에 있는 내용은 자기 PR. 문맥의 의미도 하느님께서 지켜주신 거지 때려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자슬링이나 나무 작대기는커녕 소총으로도 잡기 힘들다. 성서에 나오는 표현도 막 때려잡고 무쌍 찍는 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아줌마처럼 을 물어갈 때 쳐서 빼오는 수준. 물론 때려잡는 일이 현실에서나 현대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엄청 어려울 뿐.현실 사례[24] 실례로 로마 제국에서 검투사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도 이탈리아 남부 일대를 휩쓸면서 그곳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군대로 적극 편입시켰다. 목동 생활에 익숙하던 그들이 척후 또는 기병으로 매우 쓸모가 있었기 때문.[25] 사무엘상 16장 12절[26] 구약시대에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현악기. 이스라엘 밖에서는 워낙 생소한 악기인지라 서양권에선 리라(악기)로, 한국에선 수금(手琴)이나 비파로 번역했다.[27] 성경에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다"라는 노래가 민간에 떠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8] 요나단이 미갈의 남자 형제(오빠인지 남동생인지는 불명)이기 때문에 그가 다윗에게 있어서 처남이 되는 것이다.[29] 나발이 사는 지역은 블레셋과 아말렉 등에 의한 잦은 약탈이 일어나던 장소였다. 사울이 당시 크게 아말렉을 한 번 싹 쓸어주었으니(사울 왕의 기념비까지 있다.) 사울에게 호의적일 수밖에.[30] 나발은 '어리석다'는 의미라고 한다.[31]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고대 블레셋 통치자를 뜻하는 칭호.[32] 이 대목에 대해 탈무드의 다윗 왕 이야기에서는 아기스 왕의 공주가 미치광이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33] 다윗이 블레셋으로 몸을 맡긴 건 단지 변덕스러운 사울이 죽이려 들자 피하기 위함이었지, 적국의 힘을 빌려서 사울을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사울이 신께 기름부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죽이려는 것을 꺼렸다.[34] 사울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울 옆에 있던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고, 이 자는 차마 왕을 죽이지 못해 망설였다. 그래서 사울은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하였다(지켜보던 그도 따라 죽었다). 다윗에게 보고한 병사는 다윗의 적이었던 사울을 죽였다고 하면 상을 받을 거라 생각해 거짓 보고를 한 것.[35] 공명심에 눈이 멀어 거짓 보고를 했다가 쓸데없이 명을 재촉한 이 병사가 아말렉 출신이라는 점은, 과거에 아말렉 민족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적대한 것과 그 이후로 사울 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적대해온 것에 대한 저주의 결과로도 해석되기도 한다.[36] 이스보셋(Ish-bosheth, איש בושת)의 본명은 에스바알(Eshbaal, אשבעל)인데, 이름에 바알(Baal)이 들어가는 구절에 대해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의미의 '보셋(bosheth, בושת)'으로 고친 후대 기록자들의 가필이다. 바알중동 지방의 토착신 중 하나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곧잘 하나님 대신 섬기곤 해서 하느님의 분노를 사곤 했다. 마찬가지로 사무엘기의 인물 므비보셋(Mephibosheth, מפיבושת)의 본명도 므립바알(Merib-baal, מריב בעל)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 사울 시기에는 '바알'이 '엘'과 같이 단순히 '신'이라는 일반 명사로서 하느님을 지칭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울이 하나님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긴 했어도 배교한 적은 없기 때문.[37] 이스보셋이 왕이 될 당시 나이가 40이라고 쓰여 있으나, 앞뒤 부분에서 계산해 보면 어린 애였다. 따라서 사울과 자기 형 3명이 참전했던 필리스티아와의 전쟁 당시에 참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울의 측근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를 취하는 것에 한 마디를 했지만, 아브넬의 권세에 밀려 데꿀멍하고 살았다. 한마디로 이스보셋은 허수아비 왕이었다.[38] 이스보셋을 암살한 자들은 그 목을 들고 와 다윗에게 진상하며 "이제 이스라엘 땅에서 당신을 대적할 사람은 없습니다. 박수~"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사울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놈의 목을 쳐라.[39] 나하스는 사울에게 제일 먼저 패전한 왕이다. 그래서인지 사울의 정적이던 다윗을 슬그머니 후원해줬다. 그 호의에 답하려 한 것.[40] 고대 및 중세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수염은 남성성을 상징했으며 이를 훼손하는 것은 큰 모욕으로 여겨졌다. 호라즘 왕국이 몽골 사신단 중 일부의 수염을 잘라냈다가 개빡친 칭기즈 칸에게 처참하게 짓밟혀 멸망했고, 고려에서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정중부의 수염을 불로 지졌다가 나중에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살해당했으며, 러시아 제국에서도 표트르 대제러시아 귀족들에게 유럽 귀족들처럼 면도를 하라고 명령하자 귀족들이 들고 일어난 걸 보면 알 수 있다.[41] 이 전쟁은 1년 넘게 이어져 원래 전통대로면 왕도 출전을 해야 하는데도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고 낮잠을 자며 한가롭게 보낸 것이다. 일부는 다윗이 간음죄를 진 것은 이렇게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반나절 넘게 낮잠을 자는 나태함의 후폭풍이라고도 해석한다.[42] 여기서 비롯된 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e)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윗처럼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회 지도층이 윤리적으로 타락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43] 사실 정상적인 마인드를 가진 군인이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 군대도 훈련 기간만 해도 휴가를 제한한다. 하물며, 고대 사회에서 그것도 전쟁 중에 부하하고 상관이 전장에서 구르고 있는 와중에 자기한테만 특별 휴가를 주고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없던 의심도 생길 판이다.[44] 더 무서운 건 이것이 꾸짖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훗날 압살롬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45] 성욕을 충족하고 나니 더 이상 볼 일이 없게 된 것.[46] 당시 율법에는, "처녀를 강간하였을 경우 은 50세겔로 배상하거나 피해자를 아내로 맞아 수치를 없애 주어야 한다"라는 규정과 "강간범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었다.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뒤 그대로 내쳤다는 것은, 다말에게 피해를 보상해 줄 생각도, 본인이 죗값을 치를 생각도 없었다는 뜻이다.[47] 왜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느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정되는 점들이 있다. 하나는 암논이 장남. 그러니까 당시엔 왕위를 이어야할 후사였기에 제대로 처벌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두번째로는 죽은 밧세바와의 사생아나 후술될 압살롬 사건 등으로 보아 자식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다윗이었기에 자식이 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처벌하고 싶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도 남의 아내를 탐하여 그 남편을 죽이는 등의 성과 관련하여 이미 큰 죄를 저질렀기에 그러한 자신이 자식을 훈계할 입장이 아니라고 여겨 죄악감으로 인해 처벌할 수 없었다 등이 있다.[48] 암논이 다말을 유인해 강간하도록 헌책을 했던 그의 사촌[49] 이 아이디어는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전향한 모사 아히도벨이 낸 것이다. 그는 밧세바의 외할아버지로, 다윗이 외손녀를 강제로 취한 일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50] 대표적인 것이 사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시므이라는 자에게 돌을 맞을 뻔한 것. 이에 분노한 신하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다"라고 말하며 만류한다.[51] 다윗의 최측근이었는데도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 편에 붙었는데 사실 그는 밧세바의 외할아버지였다. 자신의 책략이 채택되지 않자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집으로 돌아가 자살한다.[52] 압살롬이 매달린 모습은 한 병사가 발견했는데 요압은 그 병사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으면 상을 받았을텐데 왜 죽이지 않고 나에게 알리냐?"하고 책망하지만 그 병사는 더 큰 보상을 준다해도 압살롬을 죽일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요압이 직접 나선 것.[53] 책망한 적은 없다. 단지 출정하기 전 압살롬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부탁은 한 적이 있지만.[54] 게다가 이 당시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지나치고 적나라하게 애통해 해서, 다윗의 편에서 선 군대들은 분명 승리했음에도 분위기는 그야말로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요압의 직언을 통해 정신차리긴 했지만 여기서 다윗이 두 번째 병크를 저질렀는데, 바로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아마샤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해버렸던 것. 이는 자신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병사들과 장교들의 노고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데. 단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괘씸죄 때문에 논공행상을 그릇되게 한 게 문제다.[55] 이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 중 다수는 요압이 다윗 왕의 '신하'라기보다는 거의 러닝 메이트에 가까운, 왕권을 위협할 만한 실권을 가진 권력자였다고 보고 있다.[56] 이스라엘에서는 나무에 메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로 취급이 되는데 압살롬의 자랑스러운 풍성한 머리털로 인해 나무에 메달리게 되었다는 묘사를 보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부왕을 배신하고 역모를 저지른 자의 최후가 어떠한 것인지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57] 다만 성경 구절에 따라 사탄이 인구 조사의 마음을 불어넣었다는 대목도 있다.[58] 군사력을 믿는게 왜 죄인가? 출애굽기의 인구조사는 왜 문제가 없는 것인가? 다윗을 부추긴 것이 있는데도 왜 다윗에게 책임이 돌아가는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59] 왜냐하면 조선 왕조의 국시인 성리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가급적 백성들한테 세금을 적게 걷어서 조세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일부러 호구(인구) 조사나 토지 조사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60] 다만 유럽에서는 오히려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백성들에게 알뜰하게 세금을 거두는데 중세 유럽의 행정은 교회가 담당했고 당시 분위기상 교회는 가톨릭을 의미했으며 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있었고 시대적 분위기상 가톨릭 신자가 아닐 순 없었기에 국가 체계에는 안 잡혀도 가톨릭 체계에는 잡힐 수 밖에 없었다.[61] 게다가 요압도 다윗의 강행에 짜증이 나서 일부 지역의 인구조사는 생략해버렸다.[62] 해당 내용에 대해 사무엘기 하권 24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죄로 인해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역대기 상권 21장 1절에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했다"라고 되어 있어서 문제가 된다. 전자는 일견 '이건 야훼가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후자는 '이건 사탄이 한 것'이 되어 상호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 전반에 따른 가르침은 야훼가 징계의 의미로 사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결국은 하느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에 그때그때 허락된 이상의 악행을 할 수 없으며(욥기 참조), 이 경우는 하느님이 그 제어를 어느 정도 풀어서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키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63] 가뭄 7년도 적군 침공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국력이 쇠해지기 딱 좋으니까. 전근대적인 농업사회임을 감안하면 현대의 경제위기에 견줄수 있다.[64] 열왕기 상권 첫머리에는 왕의 침대를 데우기 위해 수넴 여자 아비삭이라는 젊은 처녀가 그와 함께 잤으나 성관계는 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당시 중동 지역에는 늙어 죽어가는 권력자의 몸을 낫게 하려고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덥히는 관습이 있었는데, 사실상 그 처녀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말이다.[65] 아도니야가 계승권에서는 더 우위에 있다.[66] 당대엔 왕만이 선왕의 후궁을 가질 수 있었다.[67] 초기 이스라엘의 왕권은 종교적 권위에 크게 의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제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단의 대표이자 킹 메이커였던 사무엘과 틀어지면서 똥망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것만 봐도….[68] 애초에 유폐명령을 내릴 당시 유폐된 지역을 벗어나면 사형이라고 언급까지 한 데다 시므이 본인도 동의했으며 심지어 야훼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했다.(왕상 2:42) 왕을 모욕했음에도 즉결 처형이 아닌 생존할 기회가 일차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친 노예를 잡겠다고 뛰쳐나갔으니 왕의 명령을 무시한 죄로 사형을 안 당할 수가 없는 상황.[69] 사실 구약성경 속의 왕이나 사사들의 상당수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중에 하나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인구가 국력으로 통하던 시대인데다 유목민족인 이스라엘의 특성상 다산과 축첩은 당연한 문화이기도 하지만 몇몇 인물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스트랄한 수준을 보이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다윗과 그 아들인 솔로몬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식들이 많이 생겨나다보니 후계구도가 상당히 불분명해져서 자기 형제 70명을 싸그리 죽여버린다거나 자기 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막장스런 일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70] 요한 힐카누스가 턴 무덤이 다윗 왕의 무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무덤 도굴로 자금을 마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예수 관련 구절로 신뢰성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지만 예수에 대한 구절은 후대 익명의 기독교인이 부분적으로 가필한 것으로 거의 확정되었으므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71] 사실 엄연히 따지면 이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유다의 왕이 되었다. 게다가 정통성으로만 보면 오히려 전 왕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있었으니 사실상 다윗의 유다 왕 등극은 내란죄에 해당된다. 하지만 결국 이스보셋의 2인자이자 사울의 삼촌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귀순하면서 다윗에게 나머지 지파들이 힘을 주기 시작한다.[72] 그것도 당대 이스라엘 최고의 지략가이자 책사 아히도벨. 정 이해가 안간다면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을 아히도벨에, 다윗을 유비에 놓아보면 된다. 말그대로 그 제갈량이 유비에게 반기를 든 그림과 같다. 정사로 본다면 진궁의 사례로 보면 된다.[73] 여기에 책사 아히도벨이 합류해서 진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갈 뻔했다.[74] 열왕기 초반 참조[75] 그런데 사실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는데 썼던 재원과 시간을 보면, 위와 같은 시기에 성전을 건축하는 건 거의 나라기둥을 뽑는 일이 아니었을까도 싶다.[76] 사실 유목제국의 특성 중 하나가 각 분파와 파벌의 힘이 상당히 강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몽골 제국도 황제권이 상당히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유목민은 아니지만 전쟁을 상당히 많이 벌린 고구려 같은 경우도 생각보다 왕권이 약했다. 반면 유목민족인 여진족이나 투르크인이 세운 나라이지만 중앙권력이 상당히 강했던 청나라오스만 제국은 어느 정도 영토와 군사력이 확보된 이후 유목민을 농민으로 전환하고 행정력을 보강하여 정주 제국으로 전환한 사례이다.[77] 사실 건국 초기에 수많은 개업 군주들이 많이 하는게 바로 대규모의 숙청작업이기도 하다. 그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놔야 후대에 왕조가 안정적으로 클 수 있기 때문. 사실 다윗이 어마어마하게 사람을 많이 죽이긴 했지먼 당장 똑같이 구약시대 인물 중에는 자기 형제 69명을 싹다 죽여버린 사람도 있고 먼 훗날 지구 반대편에는 신하 한명 잡겠다고 그 사람의 일가친척과 친구, 제자는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죄다 잡아다가 죽여버린 영락제 같은 사례도 등장한다.[78] 참조.[79] 그 때문인지 다윗이 죽는 결말부에서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신의 뜻이 아니라 네 뜻을 따라라"라고 유언하는 장면이 있다.[80] 아이러니하게도 목사 및 교인들의 무단 대량복제 유포 때문에 회사가 파산되었다고한다.[81] 다만 현대에는 다윗이 직접 지은 것도 있지만 다윗에게 바치는 노래 같은 것까지 전부 '다윗의 노래'로 뭉뚱그려 묶었다는 게 의견이 많다.[82] 시편 80:5. 시편에는 다윗의 울적한 감정선이 잘 드러난다.[83] 굳이 저 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대에도 5-60대 이상의 남자 앞에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으로 오해당할 소지가 크다.[84] 이때 사울 옆에서 같이 자던 사울의 조카 아브넬에게 "넌 장수 자격도 없다"라고 디스한 건 덤.[85] 여기에는 다윗은 평소 거미를 싫어했고 때문에 다윗이 쫓기다 동굴에 이르렀을 때 거미가 있는 걸 보고 싫어서 안 들어가려다가 너무 몰려서 할 수 없이 들어갔는데 뒤이어 온 추적병들은 동굴의 거미를 보고는 다윗은 거미를 싫어한다고 했으니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 돌아갔다고 살이 붙여지기도 한다.[86] 뒤의 두 일화는 탈무드에서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며 보여준 3가지 일화들이다. 다른 하나는 미친 사람인데, 다윗이 위험한 상황에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자 아무도 그를 못 알아보고 그냥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87] 코란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상당수를 아랍식 이름으로 부른다.[88] 대장장이는 직업 특성상 힘이 세지만 금속 중독에 노출되기 쉬워서 전장을 누비기는 의외로 힘들다. 단신에 추남이 되는 것은 보너스, 그런데 그 패널티가 없는 듯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왕까지 했으니 당대인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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