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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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 | 光海君


파일:attachment/광해군묘/Example.jpg

광해군묘 전경
출생
1575년 6월 14일[1]
(음력 선조 8년 4월 26일)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608년 3월 17일 (32세)
(음력 선조 41년 2월 2일)[2]
한성부 정릉동 행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641년 8월 7일 (향년 66세)
(음력 인조 19년 7월 1일)[3]
전라도 제주목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82)[4]
능묘
광해군묘(光海君墓)[5]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592년 6월 8일 ~ 1608년 3월 17일
(음력 선조 25년 4월 29일 ~ 선조 41년 2월 2일)
제15대 국왕
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13일
(음력 광해군 즉위년 2월 2일 ~ 광해군 15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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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명 [ 펼치기 · 접기 ]
수빈 허씨, 귀인 윤씨, 귀인 홍씨, 소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소원 신씨, 숙원 한씨, 상궁 김개시, 상궁 이씨, 상궁 최씨, 궁인 조씨, 궁인 변씨
'''자녀''' >1남 2녀 (3남 1녀 + 성별 미상 자녀 1명)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경룡(慶龍)[1]
봉호
광해군(光海君)[2]
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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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
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
(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
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
(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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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 여담
5. 가족 관계
8. 관련 다큐
9. 같이 보기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의 제15대 국왕이자,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채 끝내 복위되지 못하여 조선왕실 역사에서 연산군과 함께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끝까지 받지 못한 둘 뿐이었던 임금 중 1명이다. 생전에 받은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라는 존호조차 인조반정 이후 삭탈됐다.


2. 생애[편집]





3. 평가[편집]





4. 여담[편집]



  • 으로서는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 직접 참여 등이다. 최다 존호 보유 기록을 통해 그가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 광해군의 탯줄을 묻은 곳인 태실(胎室)이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산136-1번지 태봉(胎峯)에 남아 있다. 2018년 다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발굴 조사를 실시했고 2022년 11월 1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태실은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로 있었는데 연경동 지방에 도는 이야기 중 하나는 이 일대에 세거하는 인천 이씨 집안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연경동 일대에는 인천 이씨 태봉파(胎峯派)가 살았고 서변동 일대에는 무태파(無怠派)가 살았는데 경술국치 이후 무태파에서는 폐위당한 임금의 태실이라 해서 이를 없애려 했고 태봉파가 반대하는 가운데 무태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태실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에는 인천 이씨의 어느 한 집안에서 태실 자리가 정승이 날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묘를 썼다가 첫째 상주와 둘째 상주가 줄초상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후 어느 날 태실을 깨뜨리라는 점괘를 얻어 태실 주변에 남아 있던 석물들을 깨부수어 태봉못에 버렸는데 그날 밤 그 집안 손자가 갑자기 죽자 사람들이 석물들을 도로 건져내 원래대로 맞춰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태실에 있던 석물들을 인근 주민들이 집을 짓기 위해 부숴서 가져갔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하자 조각을 다시 모아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 있어 위 이야기들의 증거가 된다.

  •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예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서구권처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맞담배를 피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하는데 고기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같은 자료에 '산나물은 더럽다 하여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결과 심각한 배변 장애에 시달렸으며 혈색도 칙칙했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 《계축일기》에는 배변시 매화틀을 호출하지 않고 직접 변소로 거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만 이건 귀찮은 일이 생기면 변소에 틀어박히러 갔다는 추측도 있다.

  • 미신을 매우 신봉했으며 풍수가나 점쟁이들을 늘 가까이 두었고 정책에서도 이들의 결정을 많이 따랐다고 한다.[3] 이런 미신 신봉은 광해군의 궁궐병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선조 말년부터 시작된 창덕궁 공사를 끝낸 광해군은 별궁인 창경궁경운궁 수리를 마쳤는데 1617년(광해군 9년) 느닷없이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경궁)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이는 풍수학자 시문용이 건의하고 승려 성지가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뻔한 일. 이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왕기(王氣)가 흐른다는 풍수가 김일룡의 말을 듣고 한성부 새문동에 궁궐을 짓는데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의 집터로 이렇게 해서 완성된 궁이 경덕궁.[4] 2개의 궁전을 1번에 지으려고 하니 국가 재정이 고갈되는 건 당연지사. 풍수가 이의신이 한양의 지기가 다했으니 교하로 천도하자고 하자 교하 천도를 추진했는데 신하들이 반대해 실패했다. 복동이라는 점쟁이를 신뢰해[5]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물었는데 이후 복동이는 인조반정 이후 바로 처형당한다. 말년에는 칙서를 받는 일도 길일을 택해서 하려고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결국 사신에게 많은 뇌물이 주어져야 했다.

  • 그의 치세 중에 유럽해적들이 조선 해안을 약탈하려고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돌던 풍문같은 것도 아니고 광해군 치세의 인물인 지봉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과 광해군의 치세를 기록한 《광해군일기》에도 실린 기록이다. 해적선이 조선 수군의 막강한 화력에 놀라 도망가면서 배를 나포하는데는 실패했으나 당시의 군관들은 유럽제 선박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6] 이 해적선의 정체는 잉글랜드 해군사략함대로 추정된다. 일단 《지봉유설》에도 이 함대가 잉글랜드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단 이 침략 자체가 잉글랜드 해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지봉유설》의 기록은 광해군 때가 아니라 아버지인 선조 때의 기록으로 추정되는데 《광해군일기》의 기록은 1622년(광해군 14년) 7월 19일자의 것인데 반해 《지봉유설》은 더 이전인 1614년(광해군 6년)에 저술된 이기 때문이다.[7] 이 시기 잉글랜드 국왕은 제임스 1세. 1622년의 해전은 잉글랜드가 아닌 네덜란드 선박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흥양 해전 문서를 참고할 것.

  • 그의 치세 초기인 광해 3년(1611년), 제주 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현이 표류해 온 외국 상선을 해적선으로 몰아 승무원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기빈은 무관으로 유능하다 하여 형식적인 처벌 후 인조반정 후에도 승승장구 했으며, 이때 살해된 외국 상선 선원 중에 류큐 왕국 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해 조선 사람들은 거의 사실로 믿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막상 류큐에 표류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류큐인들은 "그런 일 없었는데?"하는 분위기였고, 오히려 1771년 류큐로 표류했다 돌아온 장한철의 표해록에 따르면 중간에 마주친 베트남 상선 사람들이 "너희 탐라인이 우리 왕자를 죽였으니 우리도 너희를 죽이겠다"고 죽이려 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살해된 것은 베트남 고위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 조선 최초로 후궁 태생의 서자로서 왕세자에 책봉된 인물이다. 광해군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19세기 이전 문헌에서는 광해주(光海主)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양위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다. 다른 3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은 능호도 후'릉'이라 하고 실록도 일기가 아니라 공정왕'실록'이었으며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는 등 묘호만 없다 뿐이지 정식 군주의 대우를 받았으며,[8]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밖에 남지 않았다. 또한, 왕자 시절(세자 책봉 전) 책봉받은 봉호로 불리는 유일한 폐주이다.[9]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산군,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10] 단 셋뿐인 임금 중 하나이다.

  • 조카의 묘호 앞부분에 어질 인(仁)자가 들어간다는 점이 연산군과 공통점이다.[11]

  •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5대 사고로 정비하였다.


5. 가족 관계[편집]


  • 정비: 문성군부인 류씨
    • 첫째: (성별불명, 요절)[12]
    • 아들: 왕자(요절)[13]
    • 아들: 폐세자 이지
    • 며느리: 폐세자빈 박씨[19]
      • 손녀: 군주(요절)[14]
      • 손녀: 현주 이아기[15][16] - 김문거(金文擧)의 처[17]
      • 손녀: 현주(요절)[18]
    • 아들: 왕자(요절)[20]
  • 후궁: 수빈 허씨(粹嬪 許氏)
  • 후궁: 귀인 홍씨(貴人 洪氏)
  • 후궁: 귀인 윤씨(貴人 尹氏)
  • 후궁: 소의 권씨(昭儀 權氏)
  • 후궁: 숙의 원씨(淑儀 元氏)
  • 후궁: 소용 임씨(昭容 任氏)
  • 후궁: 소용 정씨(昭容 鄭氏)
  • 후궁: 소원 신씨(昭媛 辛氏)[21]
  • 후궁: 숙원 한씨(淑媛 韓氏)
    • 서녀 : 현주 - 노주영의 처.[22]
  • 후궁: 상궁 김씨(尙宮 金氏)
  • 후궁: 상궁 이씨(尙宮 李氏)
  • 후궁: 상궁 최씨(尙宮 崔氏)
  • 후궁: 궁인 조씨(宮人 趙氏)[23]
  • 후궁: 궁인 변씨(宮人 邊氏)

아내 문성군부인 류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그 중 3명은 어려서 요절했다.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했던 아들인 폐세자 이지는, 아내 폐빈 박씨와 함께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동반 자살 시도를 했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 한양에서 가위를 보내온 걸 보고 유배지 탈출 계획(탈출기도)을 세웠다. 그리고 그 해 음력 4월, 26일 동안 숟가락과 가위로 땅굴을 파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박씨는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옮겼다. 불행히도 이지는 도주 3일만에 인조의 감시자들에게 붙잡혔는데, 박씨는 폐세자의 도주 당일 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이 안전하게 도망치는지 망을 보다가 그만 군졸들에게 들켜 떨어져 몸을 상했고 이후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스스로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붙잡힌 이지도 자결을 명령받아,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24]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류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우울증홧병 등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류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친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25] 그녀가 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 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서자녀로는 귀인 윤씨에게서 옹주를 1명 낳았는데 옹주는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되었고, 이후 박징원과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후손이 없었으므로, 서녀인 옹주의 후손들(즉, 광해군의 외손자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직접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제향)를 지내고 있다.

손주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26] 후궁 소생의 현주가 1명 있었는데 김문거와 결혼하였다.


6. 광해군묘[편집]





7. 대중매체[편집]





8. 관련 다큐[편집]






9. 같이 보기[편집]




10. 둘러보기[편집]












[1]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산134-1번지에 있는 대구 광해군 태실에 남아 있는 석물을 보면, '王子慶(왕자경), '龍阿只氏胎室(룡아지씨태실)' 등이 새겨져 있어 광해군의 아명이 경룡(慶龍)이었음을 알 수 있다.[2] 봉호는 강원도 춘천(春川)의 옛이름인 '광해주(光海州)'에서 따왔다.[3] 가령 길하다 하면 추진하고 흉하다 하면 추진하지 않았다.[4] 결국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인조반정을 일으켜 이 된다. 김일룡은 이 일 때문에 인조에게 밉보였는지 반정 직후 처형당한다.[5] 계기가 뭔고 하니 계축옥사 당시 저주한 물건들이 궐 안에 있는데 자신을 풀어주면 모두 파낼 수 있으며 중전의 병세도 회복시킬 수 있다며 만일 효험이 없으면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는데 광해군도 귀가 솔깃했는지 그대로 따라주었고 때맞춰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었는지 왕이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6] 당시 유럽에서 군함이나 상선으로 자주 이용되었던 갤리온이라고 추정된다.[7] 《지봉유설》의 기록도 달달한 떡밥이 있는데 조선을 침략한 해적선의 정체가 영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칼레 해전의 명장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사략함대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8] 이는 정종이 후대의 다른 셋과 달리 폐위로 쫓겨난 게 아니라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 동생에게 물려준 것이며, 세종정통성 등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 묘호만 추숭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9] 단종원손→세손→세자→왕을 거쳤으며, 부왕 문종의 유일한 적자였으므로 봉호가 없으며, 작은 아버지 세조에게 강제 양위한 뒤 사육신 사건으로 상왕에서 폐주로 격하되어 새로 노산군으로 봉해진 것이다. 즉, 세손이나 세자 시절에 노산군으로 불린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연산군원자→세자→왕을 거쳤으며 당시 부왕 성종의 적장자였으므로 봉호가 따로 없었다. 그도 단종처럼 폐주로 격하되면서 새로 연산군으로 봉해져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폐주가 되고 나서 왕자 시절에 쓰던 봉호로 다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10] 노산군일기는 후에 단종실록으로 개수(改受)되었으나 알맹이까지 바꾸지는 못했다.[11] 인종, 인조.[12] 정탁의 잡저인 피난행록의 기록에 1592년 5월 12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의주로 피난갈 당시 만삭이던 류씨가 말을 타야할뻔한 걸 심대가 옥교를 구해준 덕분에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고 광해군이 직접 말을 한 적이 있다.# 한양이 함락됐던 1592년 5월 3일, 선조 일행은 이미 의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5월 12일에 류씨가 출산을 했다는 피난행록의 내용은 사실로봐도 무방하다.[13] 세자빈(世子嬪)의 산실(産室)을 배설(排設)하였다. - 《선조 29년 5월 22일 무자 1번째기사》[14] 세자빈 박씨의 소생으로 1614년에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15] 이름 미상의 후궁소생으로 1618년에 태어났다. 《선원록》에서 박징원의 처의 생모는 사대부의 딸 윤씨(士族女尹氏, 폐귀인 윤씨를 칭함)라고 적혀있는 반면, 이아기의 생모는 성씨도 모른 채 그냥 양민신분의 여자(良女)라고 기록되어있다.[16] 간혹 허균의 딸 소훈 허씨를 이아기의 생모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훈 허씨가 입궁한 년도와 이아기가 태어난 년도가 1618년이기 때문에 소훈 허씨의 딸일 수가 없다.[17] 의성 김씨 집안의 김문거에게 하가(下嫁)했다. 의성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문거는 자녀가 없어 김진이라는 양자를 들였다. 김진은 밀양 박씨와 혼인해 김용윤과 김용징을 낳았고 그 이후의 계보는 알 수 없다.[18] 이경무의 딸 후궁 이씨의 소생으로 1620년에 태어났다.[19] 박승종의 손녀[20]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 11월 11일 계해 4번째 기사에 마마(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고 나온다.#[21] 인빈 김씨의 조카[22] 노주영 - 노병진 - 노승규 - 노경환 - 노상민 - 판서 노재무 - 노성욱 - 진주목장 제창종의 처로 이어진다.[23] 광해군의 동서인 조국필의 사촌 여동생이었다.[24] 만약 광해군이 실제 수명대로 만 66세까지 왕에 있었다면, 이지는 (사도세자 같이 되지 않는다면) 만 42세 7개월의 나이에 즉위할 뻔 했다. 이는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영조가 죽었을 때의 나이인 만 41세보다 많은 것이며, 문종은 만 36세, 광해군과 순종 황제는 만 33세에 즉위했으니 이 기록을 갱신했을 나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연산군이 이복 동생 중종만큼 오래 살았다면, 이황도 만 37세에 계승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소현세자 역시 순조롭게 계승했다면 만 37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최고는 효장세자로, 아버지보다 일찍 죽지 않았다면 57세로 왕위 계승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25] 이 때문에 광해군의 고립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당장 아내부터가 현실을 보지 못하는 판국이었으니.[26] 딸이 하나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1] 율리우스력 6월 4일.[2] 세는나이 34세.[3] 세는나이 67세.[4] 폐위 후 그대로 유배지에서 살다 죽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폐모살제를 주장했으나 오히려 그 명분이 발목을 잡아 선왕을 죽이지는 못했다. 연산군이 폐위 후 두 달 만에 죽은 것에 비하면 꽤 장수(18년)한 편. 죽을 때까지 살던 제주 집은 10년 뒤 제주도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이 몇 달 간 거처로 삼게 된다.[5]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의 격식인 이 아니라 일반 왕자의 형식인 '묘'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