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네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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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 제7대 왕
尚寧王
쇼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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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네이 왕의 어진[1][2]
출생
1564년
사망
1620년 (향년 56세)
재위년도
1589년 ~ 1620년

1. 소개
2. 평가
3.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편집]


쇼네이 왕(尙寧王, 재위 : 1589년~1620년)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 제7대 국왕이다. 신호(神號)[3]는 티다가스웨아지오소이(日賀末按司添 てぃだヵすゑあじおそい)로 뜻은 해의 마지막 임금님이다. 쇼네이 왕은 3대 국왕인 쇼신 왕의 현손자, 우루쿠우둔(小祿御殿(うルクうどぅん)[4]의 창설자인 우라오소이왕자(浦添王子) 유형(維衡)의[5] 증손자, 우라오소이왕자(浦添王子)[6] 홍업尙弘業의 손자, 요나쿠스쿠왕자(與那城王子) 의尙懿의 아들이며 6대 국왕인 쇼에이 왕의 재종질[7]이자 서양자인데 이는 쇼에이 왕에게 아들이 없이 딸만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쇼에이 왕에게는 아우 킨우왕자(金武王子) 구久가 있고 상구의 아들이자 친조카가 여섯이나 되건만[8] 굳이 종친서양자로 삼아서 근친혼에 모계 계승까지 저질렀다. 그래도 종친서양자로 삼은 걸 보아 모계계승에도 역성혁명은 막으려고 한 것 같지만 정 아우와 친조카가 싫어서도 재종질이라서 소목지서에 맞으니 송고종송효종에게 그랬듯이 계자(系子)로 들여서 물려주면 되건만 굳이 근친혼을 한 것은 아직 류큐에 종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9]

쇼네이 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류큐 왕국에게도 출병을 요구했으나 쇼네이 왕은 이를 거절했다.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류큐 왕국은 명나라의 제후국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모두 끝나고 일본도쿠가와 이에야스 천하가 된 이후인 1609년, 명나라가 망해가고 있자 이 틈을 노린 사쓰마 번시마즈 타다츠네가 류큐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에 쇼네이는 시마즈 가문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류큐 왕국은 사실상 비독립국인 채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일본과 명나라 모두에 양속(兩屬)하게 되었다. 추후 명나라가 멸망하자 형식상으로는 그 후신인 청나라에게도 조공을 바쳤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에 소속되었다.

쇼네이 왕은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에도로 압송되어 이 당시의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였고, 나중에 류큐 왕국으로 돌아갔다.

1613년에는 종전조약을 맺었지만 그 대신 아마미 열도를 할양하고 엄청난 양의 공물을 감당하게 했다. 류큐 왕국은 이것을 인두세로 충당케 했는데, 이로 인해서 각 마을에서는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을 죽이거나 먼 곳까지 나가서 하루종일 일만 하게 하였다. 이 가혹한 조치는 메이지 정부 때 일본 영토로 공식 편입된 지 30년이 지난 1900년에서야 폐지되었다.

2. 평가[편집]


사실상 자주국으로써 류큐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쇼네이 왕 이후에도 왕조는 이어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에도 막부[10]의 괴뢰국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까지 왕조가 지속된 이유는 왕을 몰아내면 그곳의 주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형식상으로 류큐 왕국을 살려놓으면 중국과 조선의 관계처럼 형식적인 사대외교를 통해 조공무역을 2배로 할 수 있고, 일본의 상품을 중국 등지나 조선에 팔아먹기 딱 좋기 때문이다.[11]

류큐 왕국의 역사상으로는 굉장히 치욕적인 왕이자 최악의 암군으로 여겨진다. 이유는 명색이 왕국이 일본의 일개 번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류큐 왕국을 침략한 시마즈군은 겨우 3000명 정도였고 비록 류큐 왕국이 약소국이었지만 자체적으로 4000병력을 뽑아낼정도는 되었기에 류큐입장에서는 해볼만한 싸움이었다.[12]출처


3.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마에다 케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 꽃의 케이지란 만화에서 주인공의 연적으로 후반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나름대로 현명한 국왕으로 나오지만...

1993년 NHK에서 23부작 대하드라마[13][14]로 방영한 '류큐의 바람 (琉球の風 DRAGON SPIRIT)'이 이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순신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며 일본인으로 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형과 류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동생의 갈등과 향토애를 그린 작품이다.

징비록에서 류큐의 사신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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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큐 왕국 국왕의 어진을 우구이 또는 오고에(御後繪)라고 부르는데, 불교 탱화의 영향을 받아 임금을 부처님처럼 표현해 위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논문으로 다루었다.#[2] 유독 류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럽의 일부 국가 군주들의 어진들 중에도 종교화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 있는데, 특히 이콘을 연상케 하는 동로마 제국 황제들의 어진이 대표적이다.[3] 화풍시호 류큐[4] 우둔은 류큐미야케다.[5] 무려 디위나 폐세자가 되었다. 외쳐! EE![6] 왕손인데도 칭호가 왕자다.[7] 7촌 조카[8] 심지어 넷째 조카 쇼호(尙豐)가 나중에 즉위했다.[9] 류큐에도 종법이 받아들여져 중하급 사족은 동족혼을 꺼렸지만 상급 사족과 왕족은 기득권을 배타적으로 지키기 위해 혼인의 문호가 좁다 보니 동족혼이 성행하였다. 히가시온나간준(東恩納寬惇)이 소개한 바로는 상온尙溫왕에게 책봉부사冊封副使 이정원李鼎元이 왕과 성이 같은 비妃가 있어서 왜 겨레붙이끼리 결혼하냐고 묻자 그 왕비가 사실 제1 상씨 왕조의 후손이라고 둘러대고 아예 족보를 주작하였다. 정작 쓰지 않은 게 함정. 논문[10] 정확히는 사쓰마 번에 복속된 상태였다.[11] 애초에 류큐의 지리학적인 특성상 중국과 조선,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 경유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12] 물론 어디까지나 병력규모만 따지면 그렇다는거지 전투경험이나 무기등 세세하게 따지면 류큐 왕국이 불리했던건 사실이었지만 엄연히 화약 무기도 갖고 있던 류큐 왕국의 무장 수준이 시마즈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딸린다고보기만도 어렵고 임진왜란 당시 오랜 평화에 군기강이 해이해진 조선이 수적 열세에도 여러번 왜군에게 승리한 것에 비해 류큐 왕국은 너무나도 형편없이 깨졌다.[13] 기존 NHK의 대하드라마가 1년동안 방영하는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경우. 1993년은 유일하게 NHK가 반년씩 대하드라마를 방영한 해이다. 상반기에는 '류큐의 바람', 하반기는 오슈 후지와라씨의 몰락을 그린 '불타오르다(炎立つ)'.[14] 특이하게도 오프닝곡이 관현악이 아니라 일반 가요풍의 가사가 있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