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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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용어
3. 어진의 제작과 봉안
4.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어진
4.3.1. 감신총 벽화(?)
4.3.2.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추정)
4.9. 대한민국
4.10. 표준영정 및 현대 복원본
4.10.1. 삼국시대~남북국시대
4.10.1.1. 가야
4.10.1.2. 고구려
4.10.1.3. 백제
4.10.1.4. 신라
4.10.1.5. 발해
4.10.2. 고려
4.10.3. 조선
4.10.3.1. 조선 태종
4.10.3.2. 조선 세종
4.10.3.3. 조선 단종
4.10.3.4. 조선 세조
4.10.3.5. 조선 성종
4.10.3.6. 조선 경종
4.10.3.7. 조선 장조
4.10.3.8. 조선 정조
4.10.3.9. 조선 문조
4.10.3.10. 조선 고종
5. 외국의 현존하는 어진


1. 개요[편집]


/ Royal portrait

초상화를 일컫는 말.


2. 용어[편집]


어진이라는 표현은 의외로 늦게 생긴 말이다. 어진이라는 단어 외에도, 본래 쉬용(晬容)[1], 진용(眞容), 영정(影幀), 왕상(王像) 등 여러 가지 단어[2]를 사용했지만, 조선 숙종 39년(1713) 숙종 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이이명(李頤命)이 건의하여 '어진'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했다.

영자(影子)는 왕이 지칭하는 것이므로 신하로서는 감히 지칭할 수 없고, 영정(影幀)은 그 뜻이 회화를 열어 펼친다는 뜻이니 족자(簇子)로 꾸며진 것이 아니면 칭할 수 없는 것이다. 수용(睟容)이란 단순히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니 부를 바가 못 되며, 어용(御容) 역시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전신(傳神)이란 사(寫)으로 불려 왔으며, 또한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전(殿)이라 하므로 왕의 화상 역시 어(御)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승정원일기》 숙종 39년(1713) 5월 6일


승정원일기 해당 일자에 복구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몇 글자씩 빠진 내용이 있다. 이 때문에 중간에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해당 단락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이명이 아뢰었다. “막 어용(御容)의 초본(草本)을 내었을 때의 비망기에서 영자(影子)라고 하교하셨는데, 이는 상께서 스스로 칭하시는 것이지 아랫사람이 감히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3]

. 영정(影幀)의 정(幀)은 자서(字書)를 살펴보니 그 음은 쟁(諍)이고 그 뜻은 펼쳐서 그림을 그린다[開張繪畫]고 하였으니 쟁틀[諍機; 淨機]이라고 부르는 그림틀이 정(幀)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틀을 펼치는 것을 말한 것이지 마무리하여 족자로 완성한 후에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4]. 전부터 수용(睟容)에 사용해 왔는데 【3글자 빠짐】 갑자기 변하였는데, 선대 임금의 수용(睟容)을 일컫는 말이니 또한 오늘날 일컬을 만한 말이 아닙니다[5]. 【여러 글자 빠짐】 어용(御容)은 자못 투박합니다[6]. 무릇 전신(傳神)하는 것을 모두 사진(寫眞)이라고 일컬었으니 어진(御眞)이라 일컬어 【3,4글자 빠짐】 뭇 아랫사람들과 문서에서 어진(御眞)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7].”

김진규가 아뢰었다. “진(眞)이라는 글자는 【4글자 빠짐】, 이제 어진(御眞)이라 일컫는 것이 진실로 괜찮지만 다만 면목이 생경(生硬)한 듯합니다.[8]

송나라 인종 때 구양수(歐陽脩)가 어용(御容)을 【3,4글자 빠짐】 하였는데 그 차자(箚刺)에서 곧바로 용(容)자로 화상(畫像)을 지칭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옛사람의 문자 습관에 기인한 것이지만 【4,5글자 빠짐】 이와 같으니 이제 어용(御容)이라고 칭하는 것 또한 무방할 듯합니다.”

상이 말하였다. “송나라 때 어용(御容)이라는 글을. 【6,7글자 빠짐】 지난날 영자(影子)라고 한 하교는 내가 일컬은 것이다. 【7,8글자 빠짐】 영희전(永禧殿, 조선 임금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을 진전(眞殿)이라고 하고 있으니 어진(御眞)이라는 호칭이 좋을 듯하다.”

頤命曰: “御容初出草本時備忘中, 以影子爲敎, 此乃上所自稱, 而非在下者之所敢稱號也。影幀之幀, 考見字書, 則其音諍, 其義則開張繪畫云矣。畫機之稱以諍機, 似是幀矣。然則乃張機之謂也, 非粧成簇子後可稱。而自前用之於睟容, 【缺三字】 猝變, 旣是先朝睟容之稱號, 則亦非今日之所可稱也。【缺數字】 御容則殊涉樸直。凡諸傳神, 皆稱寫眞, 則稱以御眞, 【缺三四字】 群下及文書, 以御眞稱之, 未知何如?”鎭圭曰: “眞字【缺四字】, 今稱以御眞固可, 而第面目似生。宋仁宗時, 歐陽脩【缺四字】御容, 其箚中直以容字稱畫像。此雖因古人文字之節, 【缺四五字】如此, 今以御容稱之, 亦似無妨矣。”上曰: “宋時【缺六七字】御容之文矣。向日影子之敎, 蓋是自我所稱, 【缺七八字】 永禧殿旣云眞殿, 則御眞之稱似好矣。”

승정원일기》 숙종 39년(1713) 5월 6일


다만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조선 말기까지 '어진'이라는 용어 외에도 '어용'이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되곤 했다. 어찌됐건 공식 명칭은 '어진'으로 정했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어진으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3. 어진의 제작과 봉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진/신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진/고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진/조선~대한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어진[편집]


고려시대까지 정식적으로 그려진 어진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신라의 어진에 관한 기록과 당서에 고구려 왕 초상화를 제작했다는 기록과 같이 임금의 초상화를 그려 모시는 것은 고대에도 존재했으나, 고대의 어진은 하도 오래됐다보니 원본이 남아있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겠지만, 고려시대의 어진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일일이 모아서 불태우거나 땅에 묻었다고 한다. 문화재 파괴 고려 임금 불태운 세종 1426년 도화원이 간수하고 있던 고려 역대 군왕의 초상화를 태우고, 1428년에는 전국에 퍼져 있던 역대 고려왕의 그림과 조각상을 모아서 개성에 가져가 묻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왕씨 학살, 숭유억불을 비롯해 고려시대 색채를 지우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작 고려사를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전면 개수시킨 것도 세종 본인이다

세간에는 조선 이전의 초상화라고 주장하는 그림들이 몇 떠돌고 있지만, 아래 삼국시대, 고려시대 어진은 그린 이가 확실하거나 혹은 사서에 등장하는 어진으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에 등재했다.


4.1. 고조선[편집]



4.1.1. 환인, 환웅(천제, 天帝)[편집]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실린 초상화. 김대중 정권 시절 북한과 교류가 활발할 때 국내에 소개된 사진이다.


4.1.2. 단군왕검[편집]


파일:attachment/UploadedFiles/Dangun.jpg
천진전단군화상 (1920년 추정)

1920년대 제작했다고 추정하는 그림이다. 대종교가 생긴 지 10여 년도 안된 때라 대종교 영향을 받거나 아예 대종교에서 그렸으리라 짐작한다.

파일:AKR20190923078800005_01_i_P4.jpg
단군 초상화(1883년)

현재 국내에 소장된 단군 초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 2019년에 발견되었다. 초상화 오른쪽 아래에 써진 화기(畵記)에는 광서 9년(1883년)에 그려졌다는 내용이 있다.#


4.1.3. 기자왕[편집]



파일:기자 자서여.jpg


기자조선의 첫번째 국왕 기자의 초상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때문에 현대 사학계에서는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4.2. 가야[편집]



4.2.1. 수로왕[편집]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충치가 수로왕의 영정을 그렸지만 나중에 그 영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수로왕의 이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수로왕의 영정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


4.3. 고구려[편집]


당서에 고구려 왕 초상 및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고구려 왕의 어진과 초상 유물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다만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동명성왕이 그려져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동명성왕의 어진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


4.3.1. 감신총 벽화(?)[편집]




파일:Y0JryvH.jpg

파일:0kzJw8b.jpg
감신총에 있는 벽화들

북한의 용강군 신령면 신덕리에 있으며 대략 약 4세기에서 5세기의 사이의 고구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9]

특히 위 초상들의 가운데 인물들은 다른 인물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크게 그려져 분명 높은 신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의 왼쪽 초상의 인물은 왕이 쓰는 흑라관과 왕이 입는 홍포를 입고 있어 이것이 고구려 왕의 초상이라는 추정도 있으나 이것만으로 왕으로 단정하기는 힘들다. 홍포를 비롯한 음양오행 풍습이 당시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건이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음양오행을 통한 치행(治行)은 고려 태조 때가 처음이다. 조선의 유교적 통념으로 고구려 벽화의 의관에 담긴 의미를 재단하는 것은 무리한 억측.

하지만 왼쪽 초상에 있는 인물 역시, 왕일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오른쪽 초상의 인물이 앉아 있는 연화대에 앉아 있고, 왼쪽 초상의 위에 그려진 천 역시 오른쪽 초상의 천과 비슷한 것을 보면 왼쪽 초상 인물이 왕이 아예 아니라고 판단하기에도 애매한 부분.

오른쪽의 초상은 감신총의 다른 분묘인데, 비록 얼굴은 훼손되었으나 인물 뒤 그려진 장막에 왕(王) 자가 수도 없이 적혀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감신총이 왕릉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감신총을 비롯한 왕(王)자문 벽화고분을 왕릉으로 추정하지 않고 있다. 규모, 벽화 내용, 축조 지역 등을 고려했을 때 왕릉 급의 무덤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왕' 표식이 적혀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며, 이 때문에 훼손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0]

벽화 자체는 의외로 잘 남아 있지만, 가장 심하게 도굴을 당한 무덤 중 하나라서 내부 유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4.3.2.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추정)[편집]



파일:external/pds23.egloos.com/a0053134_4f94614a2e080.jpg

왕릉인지조차 불명확하나, 북한의 안악군 안악 3호분을 발굴한 북한 학계 및 한국 소장파 학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이 고국원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 일본 및 한국 원로 학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이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귀족 동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그림이 고국원왕의 어진인지 확정된 것은 아니며 미천왕이라는 소수의 의견도 있다.


4.4. 백제[편집]


백제의 경우. 고구려, 신라와 달리 왕 초상 및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구세관음상이 성왕을 본따 만든 초상이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온조왕이 그려져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온조왕의 어진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나 복장이 일본 복식과 비슷해서 당대에 그려진 온조왕의 어진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은 낮다.


4.4.1. 성왕[편집]



파일:attachment/hrtemplebudda.jpg

그림은 아니고 호류사 몽전에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구세관음상이 있다.[11]


4.5. 신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진/신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6. 태봉[편집]



4.6.1. 궁예[편집]



파일:궁예 (칠장사 벽화).png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의 궁예 벽화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칠장사에 있는 궁예의 모습을 그린 벽화이다.


4.7. 고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진/고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8. 조선 ~ 대한제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진/조선~대한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9. 대한민국[편집]


군주의 초상화가 아니라서 어진은 아니지만 국가의 원수(元首)란 점에서 비슷하므로 간접적으로 서술한다. 당연히 현대 국가라서 사진과 초상화의 상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두 형태로 모두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 초상화 문서 참조.


4.10. 표준영정 및 현대 복원본[편집]


현재까지 남아 있진 않지만 상상에 근거하여 그린 어진이 몇 가지가 있다. 쉽게 말해 상상화. 당대의 의복과 외모 묘사를 반영하는 것은 화가 본인의 능력에 달렸다.

그러니 실제 모습과는 달라 실제 모습이 이렇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성왕의 경우엔 남아있는 유물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에 등재된 어진들 중 정부표준영정(政府標準影幀)으로 등재된 것은 국가가 공인한 영정이다.


4.10.1. 삼국시대~남북국시대[편집]



4.10.1.1. 가야[편집]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00029_STD.jpg

수로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49호


파일:구형왕 표준영정.jpg

구형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62호


파일:이진아시왕 표준영정.jpg

이진아시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97호


4.10.1.2. 고구려[편집]

파일:external/www.kculture.or.kr/pic_kwanggaeto_01.jpg
광개토대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4호


4.10.1.3. 백제[편집]

파일:성왕 표준 영정.jpg
파일:attachment/hrtemplebudda.jpg
성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75호
구세관음상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지는[12] 호류사 몽전 구세관음상을 기반으로 제작한 대한민국 표준 영정이다.

파일:무왕 표준영정.jpg
백제 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71호


4.10.1.4. 신라[편집]

파일:선덕여왕 김덕만.jpg
파일:선덕여왕 표준영정.png
선덕여왕

2018년 새로 부인사에 안치한 영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98호

파일:external/da-arts.knaa.or.kr/P0000052_1470.jpg
태종 무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2호

파일:attachment/munmuwang123.jpg
문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3호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12003212_4.jpg
파일:attachment/rladbtls.jpg
흥무대왕(興武大王) [13] 정우성화백 作
김유신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9호

신라 표준영정 들 중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흥무대왕, 선덕여왕본 중 2018년에 그려진 선덕여왕 표준영정을 제외하고는 엄밀히 말해서 재현 오류다. 금관의 경우 학계에서는 김씨왕조 초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고, 무열왕이 당 태종에게 칭신하고 책봉을 받으면서 당나라의 관복을 사여받아 온 후로 신라 왕들은 당나라식으로 사모단령을 입었다.[14]


4.10.1.5. 발해[편집]

파일:external/www.newscj.com/161127_122262_1648.jpg
고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86호


4.10.2. 고려[편집]


파일:external/sunday.joins.com/20225216.jpg
고려 태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66호

파일:external/www.minjog21.com/3341_9670_418.jpg
태조 왕건의 능인 개성 현릉에 있는 태조 어진

파일:external/www.daejonilbo.com/20140409010004922000000102.jpg
개태사에서 제작한 왕건 어진

왕건의 어진은 3곳의 사찰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곳인 개태사가 위에 나온 왕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어진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4.10.3. 조선[편집]



4.10.3.1. 조선 태종[편집]

파일:태종 이방원 어진.jpg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태종[15]


4.10.3.2. 조선 세종[편집]



파일:세종대왕.jpg
파일:external/www.womaneconomy.kr/9205_10126_4112.jpg
세종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2호
세종 김학수 화백이 그린 어진

어진을 그린 김기창이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의 어진이 남아있지 않으며 보통 사람을 그릴 때는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닮게 그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는 내용이다.결국 흡사하게 그렸다는 얘기 아닌가

4.10.3.3. 조선 단종[편집]

파일:단종의어진.jpg
파일:ec6ClWt.jpg
단종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00호
권오창 화백 작
단종 김호종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어진


4.10.3.4. 조선 세조[편집]

파일:나무위키+하위문서.png   하위 문서: 세조(조선)/어진



4.10.3.5. 조선 성종[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0222112854a000a010-001.jpg
성종 우승우 화백이 그린 어진이다.


4.10.3.6. 조선 경종[편집]

파일:경종 어진 상상도.jpg
경종 우승우 화백이 그린 어진이다.#


4.10.3.7. 조선 장조[편집]

파일:gvWWObl.jpg
장조(사도세자) 우승우 화백이 그린 어진이다.


4.10.3.8. 조선 정조[편집]

파일:나무위키+하위문서.png   하위 문서: 정조 어진


4.10.3.9. 조선 문조[편집]

파일:external/492599fec1d20f7f7caa57f6fc961965304d6757835f3b92ae33ac10273f4db1.jpg
권오창 화백이 복원한 어진이다.


4.10.3.10. 조선 고종[편집]

파일:고종.jpg
전신 어진


5. 외국의 현존하는 어진[편집]


중국의 경우엔 고대의 경우 역대제왕도권 등이 남아있고 당나라도 당고조, 당태종 등은 온전한 어진이 남아있고 다른 황제들도 상반신과 용안을 묘사한 어진이 남아있다. , , , 의 경우엔 모든 어진들이 온전히 남아있어 보기가 쉽다. 명나라의 각 황제 문서청나라의 각 황제 목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몽골도 원나라 카간과 황제들의 초상화가 현존해 남아있다.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 왕국의 경우 어진을 우구이 또는 오고에(御後絵)라고 불렀다. 신과함께를 연상시키는 화풍과 구조가 인상적인데 불교 탱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이전에 찍어둔 흑백사진들이 남아 복원할 수 있었다. 쇼신 왕, 쇼엔 왕, 쇼네이 왕 문서에서 볼 수 있다.

유럽의 경우엔 매우 많이 남아 있다. 후대의 상상화는 물론 중세 당대의 그림도 많다. 후대 상상화는 의복묘사에서 재현을 하지 않는 오류도 벌어지지만 1903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 상상화처럼 중세 당대보다 외모에 대한 기록을 신경쓴 경우도 있다. 역시 각 왕들의 문서마다 배치되어 있으니 참고. 다만 15세기 이전 중세시대의 경우 당대에 남긴 것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문서에 따라 중세시대의 상상화와 근대의 상상화가 섞여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구분하는 방법은, 그림체가 단순하고 밋밋하면 중세시대, 화려하고 입체감있으면 근대의 그림체이다. 군주는 아니지만 잔 다르크/특징 문서를 보면 중세시대와 근대의 그림체 차이를 알 수 있다. 15세기 이후, 특히 전신 그림의 경우는 확실히 당대에 그린 초상화들이다.

일본에서는 천황 부부의 사진, 초상화를 어진영(御真影)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천황들의 문서를 보면 나와있는 어진영들은 대부분 에도막부 중반기에 제작된 상상화이다. 참고로 제국주의 시절에는 이 어진영을 말 그대로 천황처럼 존대하는 것을 강요했다. 학교에서 화재가 났을 때 이 어진영을 대피시키려다가 사망한 교사를 찬양하거나 해군 군함이 침몰할 때 해야할 인원 대피는 안하고 어진영 구한다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많았다. 참고로 북한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고 김정일 초상화를 불 속에서 가져나온 군인은 이후로 팔자가 폈다.

[1] "쉬"는 오타가 아니다. "수용"이라고도 한다.[2] 이외에도 진(眞), 영상(影像), 진영(眞影), 성용(聖容), 왕영(王影), 영자(影子), 어용(御容) 등이 사용되었다.[3] '영자'라는 말은 왕이 스스로 일컫는 말이지, 신하가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뜻[4] '영정'에서 '정'은 펼치는 형태의 그림을 나타내는 것으로, 족자로 꾸민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뜻[5] '수용'이라는 말은 단순히 왕의 모습을 그린 것이지, 초상화를 일컫는 말이라고 보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뜻[6] '어용'이라는 말은 투박하다는 뜻[7] 이때까지 초상화를 사진이라 일컫었으니, 왕을 의미하는 어()를 붙여 어진으로 하자는 의미[8] 익숙한 표현이 아니라는 뜻[9] 이 시기는 봉상왕에서부터 장수왕까지의 재위기간, 혹은 그 전후에 해당한다. 현재 이 무덤이 5세기 전반경 무덤으로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고 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본격적으로 숭불정책을 시작한 소수림왕 이후의 왕 또는 5세기 전반경에 왕이 었던 사람이 장수왕이니까 장수왕으로 비정하는 것도 가능하다.[10] 고구려의 왕릉들은 도굴에 취약한 편이었다. 미천왕의 묘도 전연 군대에 의해 도굴되어 유해를 탈취당했던 전적이 있다.[11] 이설로는 쇼토쿠 태자의 외모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2] 이설로는 쇼토쿠 태자의 외모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쇼토쿠 태자는 실존 인물인지 불분명하다.[13] 김유신은 왕위에 오른적은 없지만 사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14] 다만 왼쪽에 있는 선덕여왕 영정도 사모단령을 입지 않았지만, 왕관의 외관은 다음 진덕여왕 때까지 전통적인 금(동)관을 썼을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삼척이나 단양 등에서 7세기식 금동관이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세부 형태를 제외하면 큰 문제가 없지만, 새 날개 모양 관장식을 꽂은 고깔 모양의 내관은 상투를 꽂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자 왕이나 왕족들만이 쓰던 것이다.[15] 실제 어진은 이미 조선시대때 소실되어 헌릉봉향회에서 2013년에 새롭게 제작된 상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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