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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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제8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義政

파일:아시카가 요시마사.jpg
생몰년도
1436년 1월 20일 ~ 1490년 1월 27일
재임기간
제8대 정이대장군
1449년 ~ 1473년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즉위
2.2. 정치적 무능과 사치
2.3. 오닌의 난과 히가시야마 문화
2.4. 죽음
3. 인물 평가
4. 조선과의 관계
5. 대중 문화



1. 개요[편집]


무로마치 막부의 제8대 쇼군. 재임 중 오닌의 난이 일어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정치에는 매우 무능해서 암군으로 평가되나, 건축, 다도, 정원 조경 등 예술에 관심이 많아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花)'를 꽃피우는 역할을 했다. 긴카쿠지 창건도 이 사람이 했다. 요약하자면 무로마치 막부판 송휘종.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국왕(日本國王) 미나모토 요시마사((みなもとノ(よし(まさ]로 기록되어 있다.[1]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과 즉위[편집]


1436년 6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미토라(三寅). 아버지 요시노리는 원래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제비뽑기로 선출된 쇼군이었는데, 공포정치를 펼치다 가키쓰의 난으로 암살되었다. 요시노리 암살 이후 요시마사의 형인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7대 쇼군으로 즉위하였으나, 불과 8개월 만에 요절하는 바람에 동생인 요시마사가 8살의 나이로 쇼군에 즉위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13세까지 쇼군에 취임하지 못하였으며, 그 동안의 기간에는 쇼군이 공석이었고 당연히 이 기간에 쇼군의 권위는 대단히 추락했다. 20살에 히노 도미코와 혼인한다.


2.2. 정치적 무능과 사치[편집]


요시마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정치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으며, 결국 사치에 탐닉하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 정치권력은 호소카와, 야마나, 하타케야마 같은 유력가문이 휘두르게 되었다. 막부의 재정상태 악화로 정실인 히노 도미코 같은 경우는 사채와 같은 재산축적에 열을 올리면서 악명을 높였다.


2.3. 오닌의 난과 히가시야마 문화 [편집]


상기하였듯이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였고, 본인이 빨리 은퇴하고 싶은 마음으로 성급한 후계자 결정을 하여 오닌의 난을 유발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요시마사의 사치는 예술과 건축분야의 발전을 이끌어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花)를 꽃피우는 역할을 했다. 오닌의 난의 상세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4. 죽음[편집]


오닌의 난으로 결국 친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9대 쇼군이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결국 요시마사는 이전에 후계자로 지명했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의 아들이자 본인의 조카인 요시키(=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양자로 지명하고 1490년에 죽었다.


3. 인물 평가[편집]


정치로는 무능한 암군이었고, 예술에서는 유능한 군주였다. 정확히 송휘종의 그것과 비슷하다. 요시마사 치세 중 발생한 오닌의 난센고쿠 시대의 시발점이 된다.


4. 조선과의 관계[편집]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이 사인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올린 서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6179) 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6180) 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이에 수년 전에 사선(使船)을 귀국(貴國)에 보냈더니, 이르시기를,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포궤(包?)6181) 를 명(明)나라 조정에 바쳐서 전년[前歲]을 사례하라.’고 하시었는데, 행사(行使)가 불궤(不軌)의 죄(罪)를 범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누방(陋邦)은 근년에 동벌 남정(東伐南征)하느라고 군사(軍事)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능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자못 돈어(豚魚)6182) 의 신(信)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 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二子]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자천(資薦)하였을 뿐입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는 곧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하여 누방(陋邦)에서 복(福)을 심는 신령한 도량[靈場]입니다. 근자에 회록(回祿)의 변(變)을 만나서 구관(舊觀)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곡(年穀)이 익지 않고 재앙(災殃)이 자주 이르러서 이제 장차 승당(僧堂)을 경영하려 하는데, 대방(大邦)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즐겨 이루기가 어렵겠습니다.
그윽이 명하여 의염(義廉)·생관(生觀)·교직(敎直) 등에게 집사(執事)를 치의(致意)하게 하였습니다만, 무릇 우리 나라가 부처[佛]를 섬겨 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귀국(貴國)의 비로 법보(毗盧法寶)를 얻은 소이(所以)이니, 대저 하나의 장서[一藏]를 얻은 것은 그 큰 것을 내려 줌입니다. 더구나 구(求)함을 따름으로써 상도[常]를 삼으시니, 누방(陋邦)이 엎드려 청(請)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仁)의 고찰(古刹)을 세우면서 1만 민(緡)을 주는 것을 얻어, 윤환(輪奐)을 아름답게 고치었으며, 이제 또 천룡 만당(天龍滿堂)의 해중(海衆)이 폐하의 비음(庇蔭)을 입으면 어찌 서북(西北)을 바라보며 만세(萬歲)의 축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토의(土宜)가 변변치 못하오나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남았으니, 때를 따라 아끼어 보전하소서.”
하고, 별폭(別幅)은 채화선(綵?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 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 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 흑칠 잡색 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이었다.
*상국(上國): 조선(朝鮮)을 말함
*폐하(陛下): 세조를 말함
*대방(大邦): 큰 나라를 의미함. 여기서는 조선을 가르킴
*누방(陋邦): 일본을 말함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조공물품과 함께 조선에 보낸 서한에 조선의 세조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 자신은 '누방'으로 조선은 '대방(大邦)'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록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6)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노카미(伊勢守(いせノかみ) 마사치카(政親(まさちか)가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우(唐虞)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주(伊周)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금상 황제(今上皇帝): 성종(成宗)을 말함
*폐하(陛下): 성종(成宗)을 말함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신하도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러주었다.[2] 실록

재임 당시 조선국왕세조를 직접 '폐하'라 호칭하며 조공 서한을 보내는 등 당대 조선과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에 성종 시절에도 일본 측에서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러주었으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에도 성종을 황제라 계속 불러준것을 보면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재임 시기부터 형성된 우호적인 양국 관계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퇴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대중 문화[편집]


쇼군으로서의 업적이 없고 무능했기 때문에 영화나 소설같은 경우 본인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오기보다는 오닌의 난, 또는 부인인 히노 도미코와 관련된 작품의 조연급으로 나온다. 그나마 TV로 나온 작품이 부인인 히노 도미코의 생애를 다룬 NHK 대하드라마 꽃의 난(花の亂).

근육조선에선 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술에만 관심이 있다. 수양대군의 힘과 안평대군의 예술 실력을 보고 홀딱 반해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낸다. 특히 안평대군의 실패작 중 하나인 낙양시전도를 보고 좋아하며, 이 그림이 금과 같으니 그에 걸맞는 절인 은각사를 지어 모셔놓겠다고 한다. 이후 조선이 뿌린 인삼 씨앗에 대한 대가로 일본서기 등 고문서를 필사하도록 허락해 주고, 조선에선 이야기도 꺼내지도 않은 탐광자, 대장장이, 어부 등 기술자들도 보낸다. 그러나 인삼은 씨앗만 보내고 정작 중요한 키우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고 일본의 기후나 지질도 인삼에 전혀 맞지않아서 기껏 키워낸 인삼도 더덕만도 못한 삼이 되었고, 일본은 인삼에 대한 탐욕 때문에 혼란을 맞이하고 갈라지게 된다. 결국 원 역사대로 시바 가문의 후계자를 본인 맘대로 정하는 실책을 저지르며 모든 다이묘들에게 버림받아 카츠모토가 이끄는 호소카와 가문의 정변에 의해 쇼군자리에 퇴출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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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일본국왕(日本國王)의 호칭은 조카인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까지 실록에서 기록되다가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끝나고, 한참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국왕으로 기록된다.[2] 쇼군이 보낸 사절이 아니고 일본국왕(쇼군)의 회수납정소(관직이름) 이세노카미 마사치카가 보낸 사절이다. 그러나 당시 이세노카미는 따로 있어 마사치카가 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수가 없다. 유력해보이는건 당시 무로마치막부의 정소집사이자 이세노카미였던 이세 사다치카가 아닌가 싶은데 사다치카(貞親)와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