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니콜라 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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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아우어슈테트 공작, 제1대 에크뮐 공
루이니콜라 다부
Louis-Nicolas Davout
1er duc d'Auerstaedt, 1er prince d'Eckmuhl


파일:attachment/루이 니콜라 다부/다부.jpg

<Le Maréchal de fer>
강철 원수
<La Bête de Hambourg>
함부르크의 짐승
출생
1770년 5월 10일
프랑스 왕국 욘 아눅스
사망
1823년 6월 1일 (53세)
프랑스 왕국 파리
신체
172cm
재위
초대 아우어슈테트 공작(1er duc d'Auerstaedt)
초대 에크뮐 공(1er prince d'Eckmühl)
바르샤바 공국의 총독
한자 동맹의 총독 및 전쟁광관
사비니쉬르오르주의 시장
국적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파일:프랑스 국기.svg→[[부르봉 왕정복고|

파일:프랑스 국기(1814-1830).svg
]]
군복무 기간
1788년 ~ 1815년
계급
제국 원수(프랑스 제1제국)
지휘군단위
연대군단(보병)
참전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즈마프 전투
네르빈덴 전투
켈 포위
아부키르 전투
울름 전투
이집트-시리아 원정
마렝고 전투
예나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차르노베 전투
아우어슈테트 전투
아일라우 전투
에크뮐 전투
바그람 전투
워털루 전투
백일천하
러시아 원정
살타노브카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보로디노 전투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뱌지마 전투
크라스노이 전투
베레지나 전투
함부르크 포위전
로켄쿠르 전투
브리엔 전투
서훈
프랑스 육군원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생루이 훈장
철왕관 훈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흰독수리 훈장
에두알 개선문 동쪽 13열
가족
장 프랑수아 다부(부)
루이 알렉상드르 다부(남동생)
샤를 이시도르 다부(남동생)
루이즈에메줄리 르클레르(부인)

1. 개요
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2.2. 러시아 원정, 그리고 함부르크 공방전
2.3. 백일천하와 그 후의 이야기
3. 이야기거리
4. 다부 가문



1. 개요[편집]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전쟁 장관

다부는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앙드레 마세나, 장 란, 루이가브리엘 쉬셰와 함께 나폴레옹 없이도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원수 중 하나였다.[1] 또한 그루시 저리가라 할 정도의 열성 보나파르티스트였던 그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나폴레옹의 강한 신뢰와 총애를 받았다.

2. 생애[편집]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편집]


욘(Yonne) 주의 아노(Annoux)에서 장 프랑수아 다부(1739~1779)의 아들로 태어난 다부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가문 출신답게 브리엔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기병연대로 배속되었고, 1788년에 입대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귀족 출신임에도 혁명을 지지[2] 했으며, 같은 연대 안에 있던 동료들과는 반목했다. 이 때문에 다부는 군적을 말소당하고 투옥당했으며, 그대로 인생이 끝나나 싶었는데 마침 정권이 바뀌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고, 다시 군적을 회복하여 복무할 수 있었다.

1792년에는 지원병 군단을 지휘하여 플랑드르 전역에 참가, 각지를 전전하다가 1793년 3월에서 벌어진 네에르빈덴 전투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여 여단장으로 진급...했지만 직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의해 발동된 "귀족사관추방령"에 의거해 파면(...)당하고, 그동안 활약했던 활약상도 죄다 스크랩당했다(...). 그 후 약 1년간을 고향 아노에서 군사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지인의 도움으로 다시 복직하는 데 성공하고, 드제 장군 휘하에 들어가게 되고 드제와 친교를 맺었다. 그 후에 드제 장군의 부하로서 6년간 라인 전역과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다. 한편 드제의 소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만나게 되는데, 다부가 나폴레옹에게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나폴레옹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1800년 6월에 벌어진 마렝고 전투에서 다부는 친구이자 전 상관이었던 드제를 잃었다. 드제 사후 나폴레옹의 측근으로서 행동하게 되었고 1801년에는 친구 르클레르 장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1800년의 마렝고 전투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부대를 지휘한 다부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전투 후 사단장으로 승진,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으로부터 집정 근위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독일.폴란드 원정 당시 프랑스 대육군 제3군단을 맡았고,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3]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는 거의 2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안드로메다로 관광보냈다.[4]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1만 명의 사상자와 3000명의 포로를 냈는데,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70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예나 전투에서 격파한 프로이센군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나 아우어슈테트에 있던 다부로부터 전해진 보고에 의해 놀랐고, 다부는 나폴레옹에게서 큰 칭찬을 받았다.[5] "내 사촌이여, 자네의 빛나는 무훈에 대해 진심어린 찬사를 보내네. 자네가 잃은 용감한 병사들을 애도하지만, 그들이 영광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자네 군단의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내가 크게 흡족해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그들은 나의 존경을 받을 만하네. 자네의 소식을 더 보내주고, 자네 군단을 나움부르크에서 휴식시키게."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가장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는 영예도 누렸다.[6]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폴레옹이 다부의 승리를 치하하자 다부는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절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 주시는 그것만으로 저는 족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원수가 되고 공작이 된 원수1호가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7][8]

그 후 맺어진 틸지트 조약으로 만들어진 바르샤바 공국의 군정관이 되었고, 1807년에는 초대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Davout_in_chudov.jpg
모스크바 추도프 수도원에서 동료와 담화를 나누고 있는 다부.

거기에 더해서 1809년 에크뮐 전투와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809년에 그동안 노고한 공으로 에크뮐 대공이 되었다.


2.2. 러시아 원정, 그리고 함부르크 공방전[편집]


1812년에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는 러시아를 정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서게 되는데 다부는 여기서 대육군 제1군단[9]을 지휘했고, 나폴레옹을 따라 활약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동장군에게 패배하여 돌아오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다부에게 함부르크 군관구의 지휘를 맡겼고, 비교적 러시아의 바깥에 있었던 다부의 제1군단이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엘베강 하류지역의 수비를 강화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지면서 함부르크도 공격받게 되었다.

함부르크는 라인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도시였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이곳으로 심심하면 놀러오는 카자크와 동맹군 부대가 출입을 못하게 되어 자유가 되었지만 1813년 5월 28일에 다부가 이끄는 13군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곧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다부는 시내의 모든 자원을 징발해서 [10] 함부르크 방어에 쏟아부었다.

다부는 여기서 근성을 발휘하여 1년 이상을 버티면서 완강히 저항했다.[11] 그러다가 1814년에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고된 뒤 루이 18세나폴레옹 항복했음이라고 하자 함부르크에서 나와 프랑스에 귀환하게 되는데, 그때가 나폴레옹이 퇴위당한 지 1개월이 더 지난 때였다.


2.3. 백일천하와 그 후의 이야기[편집]


1814년에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 돌아온 다부에게 루이 18세가 내린 명령은 불명예로운 은퇴 명령이었다. 그에 매우 화가 났던 모양이었던데다 나폴레옹 1세의 열성적 지지자라서 1815년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의 휘하로 들어가 다시 나폴레옹 황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준 자리는 다부가 있어야 할 곳인 전장이 아닌 전쟁장관의 자리였다.[12] 전쟁장관으로 지명되자, 다부는 최대한 빠르게 프랑스군을 재정비하고 조직했다. 그러나 3개월 뒤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는 아군을 맞았다. 그 후 파리를 개방하고 파리 협약에 서명을 했다.

그 후 다시 왕정복고가 일어났고, 다부는 또다시 파면당하면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옛 동지였던 원수가 재판을 받게 되자 스스로 변호인을 자청하여 네를 적극적으로 변호함으로써 파리에 다부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 때문에 부르봉 왕가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당하는 곤욕을 치르게 되지만 3년 뒤인 1819년에 다시 전직 원수로서 명예회복을 하게 되었다. 그 4년 뒤인 1823년 6월 1일 다부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파일:attachment/루이 니콜라 다부/다부의_무덤.jpg
다부의 무덤.


3. 이야기거리[편집]


다부는 말 그대로 강한 군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부는 매우 엄격했으며,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과 복종을 요구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일례로, 다부는 병사들에게 적국의 마을에 대한 약탈 행위를 금지시켰는데, 이를 어긴 병사는 사형에 처했다. 그래서 다부가 맡았던 제3군단은 다른 부대에 비해 아주 질서정연했다고 한다(나폴레옹 토탈 워에 붙은 유럽 캠페인의 다부 원수의 특성 중 한가지는 번역 기준으로 '호랑이 교관'이다).

다부는 고집이 세고 완고한, 그리고 말수도 적었던 전형적인 사나이 스타일이었다. 특히 베르나도트와는 결투 직전까지 갈 뻔했다.[13] 그나마도 나폴레옹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둘 중 하나가 죽었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다부는 사교나 사회 활동보다는 가정에 충실한 성실한 가장이었다.

고집 세고 완강한 성격 때문인지, 다부는 군대 내의 많은 동료들과 많이 반목했다. 베르나도트는 말할 필요도 없고, 뮈라와는 러시아 원정 중이던 1812년에 심하게 갈등을 빚었던 적이 있고,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와도 반목했다.

하지만 친구 없는 사람은 없듯이, 미셸 네 원수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 외에 다른 원수들 - 니콜라 우디노, 로랑 드구비옹 생시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4] 다부와 가장 친했던 친구는 그의 부하이기도 한 샤를 에티엔 구딘 드라사블로니에르라는 사람인데, 프랑스군에서 가장 뛰어난 사단장이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으나 1812년에 스몰렌스크에서 전사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충성하여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였다. 나폴레옹도 그런 다부를 가장 신뢰했고, 전장에서 보인 신기에 가까운 활약으로 다부는 더욱 존경을 받았다. 그랬기에 다부는 제1차 왕정복고가 일어나자 부르봉 왕가에 대해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냈고, 나폴레옹이 귀환하자 나폴레옹의 밑으로 다시 복귀했다.

다부는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빈틈없는 전술가이자 엄격한 기강의 준수자로 어리석은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병사들과 보좌관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략가였고, 명장이었다.

다른 나폴레옹의 원수들에 비하면 그나마 편안하게 임종을 맞은 사람으로서[15]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으로서 매우 존경받을 자격과 가치가 있다.

여담이지만 다부는 전혀 불륜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첫 번째 부인이 있었기는 했지만 이후 친구의 여동생을 신부로 맞이한 뒤에는 서로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4. 다부 가문[편집]


고조부 - 니콜라 다부(Nicolas d'Avout, 1616년 ~ 1661년)
증조부 - 니콜라 다부(Nicolas d'Avout, 1645년 ~ 1723년) = 증조모 - 클로딘 드가빌로(Claudine de Gabillault)
조부 - 니콜라 다부(Nicolas d'Avout, 1686년 ~ 1742년) = 조모 - 카트린 드솜(Catherine de Somme)
부 - 장 프랑수아 다부(Jean François d’Avout, 1739년 ~ 1779년) = 모 - 이름불명
본인 - 루이니콜라 다부(Louis-Nicolas Davout, 1770년 ~ 1823년) = 부인 - 루이즈에메줄리 르클레르(Louise-Aimée-Julie Leclerc, 1772년 ~ 1868년)
처남 - 샤를 빅투아르 에마뉘엘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 1772년 ~ 1802년) = 처남의 부인 - 폴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 1780년 ~ 1825년)
장녀 - 조제핀 루이즈 앙투아네트 다부 도에르스태드(Joséphine Louise Antoinette Davout d'Auerstaedt, 1804년 ~ 1821년)
차녀 - 아델(Adèle, 1807년 ~ 1885년)
장남 - 나폴레옹루이 다부(Napoléon-Louis Davout, 1811년 ~ 1853년)
삼녀 - 아델라이드루이즈 데크뮐 드블로크빌(Adélaïde-Louise d'Eckmühl de Blocqueville, 1815년 ~ 1820년)
이외에 4명을 제외하고 6명이 있었다.
남동생 - 루이 알렉상드르 다부(Louis Alexandre Davout, 1773년 ~ 1820년) = 알리스 폴린 파리조(Alice Pauline Parisot, 1786년 ~ 1856년) 자크 파리조(Jacques Parisot, 1747년 ~ 1816년)
쥘 알렉상드르 피에르 다비드(Jules Alexandre Pierre David, 1811년 ~ 1880년) = 샤를로트 아멜리 핍스(Charlotte Amélie Phipps, ? ~ ?)
루이 마리 알렉상드르 샤를(Louis Marie Alexandre Charles, 1843년 ~ 1844년)
루이(Louis, ?년 ~ 1890년) = 파니 에게베르그(Fanny Egeberg, 1841년 ~ 1899년)
루이 마리 알렉상드르(Louis Marie Alexandre, 1846년 ~ 1880년)
마르게리트(Marguerite, 1854년 ~ 1944년)
알베르(Albert, 1858년 ~ 1886년)
알프레드 마리 줄스(Alfred Marie Jules, 1860년 ~1885년)

루이즈 아델라이드 주느비에브(Louise Adélaïde Geneviève, 1810년 ~ 1883년) = 알퐁스 드샤프들렌(Alphonse de Chappedelaine, 1810년 ~ 1884년)
알렉산드린(Alexandrine, 1812년 ~ 1823년)
알렉상드르(Alexandre, 1815년 ~ 1895년) = 크리스티안 프랑수아즈 다부(Christiane Françoise d'Avout, ?년 ~ ?년)
마리 루이즈(Marie Louise, 1843년 ~ ?년)
마리 베아트릭스(Marie Béatrix, 1846년 ~ ?년)
크리스티앙 마리 앙리(Christian Marie Henri, 1848년 ~ 1870년)
루이 마리 오귀스트 다부(Louis Marie Auguste d'Avout, 1850년 ~ 1905년) = 마르게리트 마리(Marguerite Marie, 1856년 ~ 1931년) 슬하 3녀를 낳음
알퐁스(Alphonse, 1854년 ~ 1926년) = 마리 드카르네트레스송 드코에틀로공(Marie de Carné-Trécesson de Coëtlogon, 1851년 ~ 1931년)
안 마리 크리스티안 레오니 다부(Anne Marie Christiane Léonie d'Avout, 1881년 ~ ?년)
마리 앙투아네트 베아트릭스 이본 다부(Marie Antoinette Béatrix Yvonne d'Avout, 1883년 ~ ?년) = 장 바티스트 샤를(Jean Baptiste Charles Fidèle Thomas de Tricornot, 1879년 ~1965년)
알렉상드르 조제프 마리 앙리 다부(Alexandre Joseph Marie Henri d'Avout, 1890년 ~ 1950년) = 드니즈 마리 모베야르크(Denise Marie Maubaillarcq, 1901년 ~ 1954년)


남동생 - 샤를 이시도르 다부(Charles Isidor Davout, 1774년 ~ 1854년) = 클레르 드슈베리(Claire de Cheverry, 1804년 ~ 1895년)
레오폴드 클로드 에티엔 쥘 샤를 다부(Léopold Claude Étienne Jules Charles Davout, 1829년 ~ 1904년) = 알리스 드보아즈(Alice de Voize, 1845년 ~ 1935년)
나폴레옹 클레르 에메 마르게리트(Napoléonie Claire Aimée Marguerite,1869년 ~ 1952년) = 프랑수아 다루(François Daru, ?년 ~ ?년)
마리마틸드(Marie-Mathilde, 1871년 ~ 1955년) = 조제프 가스파르 드베르티에 드비지(Joseph Gaspard de Berthier de Bizy, ?년 ~ ?년)
클레르 마리 마르게리트(Claire Marie Marguerite, 1873년 ~ 1967년)
루이스 니콜라 마리 베르나르 다부(Louis Nicolas Marie Bernard Davout, 1877년 ~ 1958년) = 엘렌외제니프랑수아즈마리 에티냐르 드라폴로트(Hélène-Eugénie-Françoise-Marie Étignard de Lafaulotte, 1880년 ~ 1946년) 슬하 14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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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별명은 바로 그 유명한 짐승(The beast).[2] 이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위가 정규 사관귀족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3] 이때 병사들을 48시간 강행군을 시켜놓은 뒤에 이어진 공세를 끝까지 버텨냄으로써 승리에 공헌했다.[4] 다부의 제3군단은 28,000명이었고, 다부가 맞아 싸운 프로이센군은 63,000명이었다. 게다가 대포의 수도 너무 열세였다. 다부는 대포 45문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 프로이센군은 230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투 초기 프로이센 지휘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눈에 총상을 입어 전선에서 이탈해버렸고 이와 함께 최전방을 지휘하던 슈메타우(Friedrich Wilhelm Carl von Schmettau) 장군도 프랑스군의 총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프랑스군과 달리 경직되있던 프로이센의 체계는 혼란에 휩싸였고 예비 병력을 제대로 투입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뒤를 이어받은 빌헬름 3세는 완강하게 버티는 다부를 보고 나폴레옹의 본대라고 착각하여 겁을 집어먹고 후퇴해버렸고, 오히려 다부가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5] 나폴레옹은 다부로부터 전해진 보고를 듣고는 "그가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했다. 왜냐면 다부가 근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다부 혼자서 아무런 지원없이 프로이센 본대를 격파해버린 것을 처음에는 완전히 못 믿었지만 전투 후 상황이 더욱 확실해지자 다부를 굉장히 칭찬했다.[6] 훗날 역사가들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이렇게 평한다. "나폴레옹은 예나에서 이길 수 밖에 없는 전투를 이겼고 다부는 아우어슈테트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이겼다."[7] 참고로 베르나도트도 다부와 함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했었다. 베르나도트는 다부를 원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무시하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했다(...). 심지어 아우어슈테트와는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이 일로 인해 다부와 사이가 매우 틀어지게 된다. 그래도 사실 베르나도트도 나폴레옹 전에는 나름 인기있는 장군이었는데...[8] 사실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전부터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는 베르나도트가 아우어슈테트에서 다부를 지원하지 않은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었는데, 둘 다 원래 혁명 지지파 출신으로 나폴레옹과 결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다. 다부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의 남편의 여동생의 남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형의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이었으나, 다부가 나폴레옹 지지파인 반면, 베르나도트는 반대파였고, 나폴레옹은 집권과정에서 다부를 통해 베르나도트를 견제했다. 이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다부에게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있어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첨언했는데, 이 때문에 나폴레옹과 사이가 껄끄럽던 베르나도트는 예나로 가야 잘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버렸다...[9] 7만 명이 넘어가는 규모의 대군단이었다. 그야말로 대육군.[10] 각 가정마다 반년이상의 식료품을 비축하도록 강제했는데. 상식적으로 모든 시민이 이게 가능할리가 없는 요구였다. 안그래도 주둔군때문에 식료품이 비싸졌는데 그걸 시민들까지 비축하려니 밥값이 금값이 된것. 이런 명령을 준수하지 못한 시민은 함부르크 밖으로 내쫒았으며 그 중에 천명 이상의 시민이 밖에서 굶어죽었다[11] 공방을 벌이고 있을 당시 함부르크의 상태는 심히 열악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넉넉하고 그럭저럭 버틸만 했는데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동맹군으로 인해 인력은 점점 줄어드는 데다 다부의 E 덕분에 빈약한 방어도와 쥐꼬리만큼의 식량밖에는 없었다고 한다(...).[12]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수도인 파리를 맡기고 싶어서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차라리 그루시가 더 나았을 것이다. 그루시는 나폴레옹에게 헌신적이고 충성심이 강한 남자였고 군보다는 사단의 지휘에 적합한 사람이었다.[13]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후, 다부는 자신을 도우러 오지도 않고 그냥 멀뚱히 서서 구경만 했던 베르나도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결투를 신청했다! 심지어는 다부의 무덤에서 베르나도트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알 수 있다고 한다(...).[14] 우디노 원수는 나폴레옹도 인정한 잔혹하고 병사들에게 무자비한 원수다(...).[15] 베르티에는 의문사, 란과 베시에르는 포탄에 맞아 사망, 뮈라와 네 원수는 붙잡혀서 총살, 다른 원수인 에두아르 모르티에는 코르시카인 주세페 피에스키의 기관총 난사에 맞아서 순직, 포니아토프스키는 익사 등. 예외가 있다면 마크도날과 주르당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