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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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2세
Edward II


파일:Edward_II_-_detail_of_tomb.jpg

왕호
에드워드 2세
(Edward II)
이름
카나번의 에드워드
(Edward of Caernarfon)
출생
1284년 4월 25일
웨일스 귀네드 카나번 성
사망
1327년 9월 21일 (향년 43세)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버클리 성
장례식
1327년 12월 20일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글로스터 성당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307년 7월 8일 ~ 1327년 1월 20일
배우자
프랑스의 이자벨 (1308년 결혼)
자녀
에드워드 3세, 존, 엘레노어, 조앤, 아담 피츠로이(사생아)
아버지
에드워드 1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형제
엘레노어, 조앤, 알폰소, 마거릿, 메리, 엘리자베스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재위 초기, 그리고 가베스턴
2.3. 내부 분열, 그리고 휴 데스펜서
2.4. 치세의 종말과 폐위
2.5. 죽음과 사후
3. 평가
4. 그 외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명군이었던 에드워드 1세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부왕인 에드워드 1세의 빛나는 업적에 반비례하여 실정만을 거듭하였으며 결국은 아내와 아들에게 폐위당한 후 의문사했다.

실정을 많이 저질러 중세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그 악명높은 존 왕과 탑을 다툴 정도로 암군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 동안에 잉글랜드는 내부적으로는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가베스턴[1]과 휴 데스펜서 등과 같은 간신배들이 날뛰어 분열과 정쟁이 격화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등을 비롯한 외부 세력과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뼈아픈 타격으로 손꼽힌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에드워드 2세는 1284년에 에드워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드워드 1세에게는 이미 앞서 존, 헨리, 알폰소 등을 비롯하여 4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이들은 대부분이 10살을 전후한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 에드워드 1세에게 있어서 에드워드 2세는 나이가 45세가 되어서야 얻은 소중한 후계자였다. 1307년, 부왕인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정벌을 위해 원정을 나가있던 중에 진중에서 병들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2세는 겉모습만큼은 아버지를 닮아 건장한 체구의 장신이었으며 잘생긴 외모를 타고난 미남이었다. 또한 그는 말타기를 좋아하고 싸움도 잘 했던 것으로 전한다.[2] 그러나 냉철하면서도 대담하고 또한 성실한 면모가 있었던 아버지 에드워드 1세와는 달리 그의 성격은 게으르고 안일했으며, 또한 소심하고 의지가 박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아들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에드워드 2세가 왕자 시절에 자신의 친구(혹은 동성연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가베스턴에게 퐁티뉴의 땅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자 분노하여 그의 머리채를 잡아채서 손찌검을 했을 정도였다.[3]

에드워드 2세의 성품은 좋게 말하면 소탈한 편이라서 마부나 음유시인을 비롯하여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또한 필요할 때에는 어느 정도의 결단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버지와 같은 위엄과 국정을 이끌어갈만한 안목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정치와 군사지휘 등에도 무능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부왕에게 눌려 살았던 귀족 세력들의 도전과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4]


2.2. 재위 초기, 그리고 가베스턴[편집]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에 총신이었던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가베스턴(Piers Gaveston, 1284 ~ 1312)을 콘월 백작으로 임명하면서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가베스턴은 에드워드 2세와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던 사람인데, 에드워드 2세는 그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에드워드 2세의 동성연인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조차도 아들과 가베스턴의 관계를 염려하여 그를 해외로 추방하였으나 에드워드 2세는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곧바로 그를 불러들여 요직인 콘월 백작에 앉혔다.

가베스턴은 본래 프랑스에 위치한 잉글랜드의 봉토였던 가스코뉴[5]의 기사 가문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무예가 뛰어나 마상창시합에서 수많은 우승을 거두었고 전쟁에도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 챔피언 기사였다. 하지만 성품이 드세며, 교만하고 오만방자하여 잉글랜드의 다른 귀족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콘월 백작이 되자마자 국왕의 자문을 독점하는 등 권력욕도 매우 강하여 의회의 반발을 샀다. 이후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필리프 4세의 딸인 프랑스의 이자벨과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에 가 있던 동안에 의회에서 제동을 걸어 가베스턴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에드워드 2세는 겉으로는 이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가베스턴을 아일랜드의 관리인으로 파견하였고, 겨우 1년 만에 다시 불러들였다.

1310년, 에드워드 2세의 사촌인 랭커스터 2대 백작 토머스 플랜태저넷(Thomas, 2nd Earl of Lancaster, 1278 ~ 1322) 등의 귀족들은 왕이 저지르는 실정과[6] 가베스턴의 전횡 등을 보다 못하여[7] 본격적인 견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의회를 개최하여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반면에 국왕의 권리는 제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혁 법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새로운 법령의 규정을 따르려 하지 않자,[8] 분노한 귀족들은 1312년에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개혁 법령 발표 당시에 쫓겨났던 가베스턴은 에드워드 2세의 도움으로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가 그를 증오하는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국왕의 결정과 재판도 없이 반역죄로 참수형에 처해졌다.[9]

절친한 사이였던 가베스턴의 죽음을 계기로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과 의회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나마 1313년에 왕비 이사벨라가 나서서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면서 의회는 국왕과 화해하고 다시 왕에게 충성을 서약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화해에 불과할 뿐이었다.


2.3. 내부 분열, 그리고 휴 데스펜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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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최악의 영국인 10명'을 선정. 다만 현직 정치인은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잭 더 리퍼
토머스 베케트
에아드릭 스트레오나
존 왕
리처드 리치 경
6위
7위
8위
9위
10위
타이터스 오츠
윌리엄 오거스터스
휴 디스펜서 더 영거
토머스 아룬델
오스왈드 모슬리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1314년, 부왕인 에드워드 1세에게 패배하여 아일랜드로 달아났던 스코틀랜드로버트 1세가 세력을 키워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포하자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정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전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군에게 참패하였고, 이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해버렸다. 반면에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한 로버트 1세는 알렉산더 3세 이후로 끊어진 스코틀랜드 왕통을 이어나가는 데 성공했으며 독립된 스코틀랜드 왕국을 건설하여 오늘날까지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10]

배넉번 전투에서의 참패로 에드워드 2세의 정치적 위상은 바닥까지 추락하였다. 국왕에 대한 의회의 간섭은 더욱 강해졌고, 의회의 우두머리였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국왕의 자문관이 되어 국정을 주도할 수 있는 실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 토머스와 귀족들 또한 잉글랜드가 처한 난국을 타파할 만한 자질은 갖추지 못하였으며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게다가 의회는 당장 시급한 정치사회적 개혁에도 미온적이었다. 1314~1317년에 걸쳐 잉글랜드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11] 세금인상으로 경제와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과 내부 분열로 몸살을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가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서 스코틀랜드가 북쪽 변경과 아일랜드를 침입해 약탈하였고, 프랑스는 잉글랜드령의 영토인 가스코뉴를 넘보았다.

그 사이에 펨브루크 백작인 에이머 드 발랑스를 주축으로 한 중도파 귀족들의 당파가 들어서서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간의 불화를 중재하고 침입해 온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하면서 정국은 잠시 안정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318년 경에 휴 데스펜서(Hugh Despenser the Yonger, 1286 ~ 1326)라는 에드워드 2세의 또다른 총신이 등장하면서 정국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능한 가베스턴과는 달리 권모술수와 책략에 능하며 한층 더 교활했기 때문에 가베스턴보다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휴 데스펜서는 템브루크 백작의 당파가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에 에드워드 2세의 시종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다.[12]

휴 데스펜서는 비록 유능하기는 했으나 성격은 야비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정적에게는 자비가 없는 편집증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13] 그는 왕의 총애를 얻은 이후로 에드워드 2세와의 관계를 악용하여 잉글랜드의 또 다른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데스펜서는 관직 임명에 관련된 인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사기와 무력행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들의 재산과 영지를 갈취하여 웨일즈 일대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막대한 부와 권력을 쥐게 된 휴 데스펜서가 귀족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충돌하게 되리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마침내 1321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휴 데스펜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북쪽 변경의 귀족들과 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1322년에 반격을 시도하기 위해 진압군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버러브리지에서 반란군과 격돌했다. 이 싸움에서 에드워드 2세는 반란군을 완벽하게 격파했고, 승리는 국왕군에게 돌아갔다. 주모자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붙잡혀 처형당하였으며, 그 외의 주동자들은 전사하거나 전투 후 남김없이 체포되어 감금, 처형당하였다.

이처럼 반란을 진압하고 의회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에드워드 2세는 죽은 가베스턴의 복수를 마무리지었고, 라이벌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의 오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죄던 귀족 의회의 칙령들을 모조리 폐기함으로써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드워드 2세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그의 치세 또한 곧 종말을 맞이하였다.


2.4. 치세의 종말과 폐위[편집]


1322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함께 반란을 주동하였다가 런던탑에 유폐당하였던 로저 모티머라는 귀족이 잉글랜드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티머는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에도 에드워드 2세와 휴 데스펜서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렸다. 이때에 마침 가스코뉴 지역을 두고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 또한 모티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14]

한편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던 휴 데스펜서는 성품이 탐욕스러운 탓에 반대파들의 땅을 몰수하여 큰 부를 쌓아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한다. 급기야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인 이사벨라와 그 아들인 왕세자 에드워드 3세의 영지마저 건드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사벨라는 크게 격노하며 남편에게 휴 데스펜서를 내치라고 간언했으나 에드워드 2세는 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에드워드 2세와 이사벨라의 부부관계도 매우 나빠졌다.[15]

1325년, 이사벨라는 어린 아들인 에드워드 3세 등과 함께 가스코뉴 분쟁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자신의 친정이었던 프랑스의 파리로 파견되었다. 이사벨라는 그곳에서 에드워드 2세의 원수였던 모티머를 만났는데, 그녀 또한 이미 에드워드 2세와 휴 데스펜서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터라 왕을 몰아낸다는 모티머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1326년에 왕비 이사벨라와 모티머는 홀란드와 질란드, 그리고 프랑스 왕실로부터 지원받은 병력을 거느리고 잉글랜드에 상륙했다.[16] 평소에 에드워드 2세와 휴 데스펜서 부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잉글랜드의 유력 왕족들과 귀족들도 반란군과 맞서 싸우라는 에드워드 2세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사벨라와 모티머의 반란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귀족들에게 버림받은 에드워드 2세는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그를 추적한 병사들한테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이에 휴 데스펜서 부자는 에드워드 2세를 위해 어떻게든 사람들을 설득하여 대항하려고 했으나, 워낙에 인망이 좋지 않았던 그들의 말이 귀족과 시민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휴 데스펜서 부자 또한 시민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17]

이후 이사벨라와 모티머는 1327년 1월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합법적으로 에드워드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세자 에드워드를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주교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는 뻔한 일이였다. 의회에 출석한 각 신분의 대표자들은 이사벨라와 왕세자 에드워드 3세를 지지하며, 전원 에드워드 2세의 퇴위에 동의하였고 에드워드 2세는 사실상 폐위된다. 케닐위스 성에 머무르고 있던 에드워드 2세는 의회에서 자신의 퇴위가 결정되었다고 통보를 받자 결국 아들인 왕세자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났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에드워드 3세가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2.5. 죽음과 사후[편집]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 버클리 성[18]에 감금되었다. 이 사건이 몰고 온 파장은 상당한 것이었다. 비록 에드워드 2세가 왕비와 대다수의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왕위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잉글랜드에서 멀쩡히 잘 살아있는 왕을 폐위하여 감금하고 그 아들을 왕으로 옹립한 일은 유래가 없는 사태였다. 그 때문인지 감금당한 에드워드 2세를 탈출시키려는 시도도 3차례나 일어났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감금당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1327년 9월 21일,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사벨라와 모티머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폐위당한 에드워드를 살해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에드워드 3세가 모티머를 참수할 때 내걸었던 명분이 반역죄와 더불어 에드워드 2세의 살해죄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2세의 장례식은 국왕의 장례 절차에 따라 정석적으로 거행되었다. 아내 프랑스의 이사벨라와 아들 에드워드 3세는 죽은 전왕(前王)의 관을 실은 마차가 떠날 때에 무릎을 꿇고는 슬피 울었다. 또한 이사벨라는 훗날에 자신이 죽으면 에드워드 2세의 심장이 들어있는 병과 함께 묻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 요구는 그대로 시행되었다.

에드워드 2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일설에서는 위로부터 사주를 받은 감옥의 경비병들에게 폭행을 당해서 맞아 죽었다고도 하였다. 또 어떤 전승에서는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그 항문에 꽂아넣어서 창자를 꿰뚫어 죽였다고도 하였는데, 이는 에드워드 2세의 남색 의혹을 염두에 둔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19] 또한 다른 야사에 따르면 신분을 숨기고 프랑스잉글랜드 혹은 스코틀랜드 어느 수도원에 유폐되어 수도자로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된 후에 권력을 장악한 왕비 이사벨라와 총신 모티머는 어린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모티머 또한 무능하며 탐욕스러운 인물이었기에 전횡을 일삼는 등 많은 문제를 빚어냈다. 그래서 귀족들의 증오를 받았고 에드워드 3세는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모티머의 꼭두각시로 지냈으나 장성한 후에는 어머니의 세력을 꺾고 모티머를 죽여 무너진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인 에드워드 2세와 대비될 정도의 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김으로써 에드워드 1세의 위업을 계승하였다.


3. 평가[편집]


에드워드 2세의 치세는 그야말로 귀족들과 의회와의 피비린내나는 정쟁, 그리고 외부 세력과의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강압적으로든 혹은 회유적으로든 잉글랜드 내부의 귀족들과 불만 세력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등을 군사적으로도 압도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의 골이 에드워드 2세 때에 곪아 터져버리고 말았는데, 불행히도 에드워드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결국 에드워드 2세 때의 잉글랜드는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극심한 우환에 시달렸고, 때문에 오늘날에는 여러모로 부왕의 빛나는 업적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배넉번 전투에서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점은 그의 실책 중에서도 뼈아픈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는 아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켜주려 노력하다 원정 길에 병사했지만 정작 에드워드 2세 본인이 스코틀랜드 공격에 실패하면서 아버지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2세는 비록 필요할 때에는 완고함과 결단력을 발휘하여 정적들을 무찌르고 정권을 장악하는 등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는 분명 무능했다. 특히 성격이 안일하고 성실하지 못해서 향락에만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총신들에게 자문을 독점케하거나 정치를 위임하는 등의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실제로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가베스턴과 휴 데스펜서를 비롯한 탐욕스러운 간신배들이 왕의 총신이 되어 정치를 좌우하며 국정을 혼란케 하였고, 이는 에드워드 2세가 귀족들과 왕비의 반발을 사서 폐위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비록 말년에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지나칠 정도로 높은 세금을 부과해서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초석을 닦는 위업을 달성했던 아버지 에드워드 1세와 비교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의 치세 동안에 빚어진 혼란이 모두 에드워드 2세만의 탓이라고 보기에도 문제는 있다. 비단 에드워드 2세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나 모티머 등도 에드워드 1세처럼 잉글랜드를 잘 이끌어갈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토머스만 하더라도 생전에는 국왕의 자문관까지 지내면서 국정을 주도할 만한 실력자가 되었지만, 때마침 닥쳐온 기근과 외국과의 갈등, 귀족들 간의 권력다툼을 원만하게 처리할 만한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으며 결국 에드워드 2세와 무력충돌까지 일으켰다가 패하고 죽었다. 에드워드 2세를 몰아낸 모티머 또한 마찬가지로 훌륭한 정치가라고 할만한 자질은 갖추지 못했고 가베스턴과 휴 데스펜서와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전횡을 일삼았다.

4. 그 외[편집]


에드워드 2세는 왕족 치고는 취미가 독특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훌륭한 체격과 승마 실력을 물려받았으며 그만큼 말타기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시와 연극을 즐기고 하류층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등 어느 정도의 교양과 친화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랑 파기, 지붕 잇기 등 왕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취미도 있었다.

에드워드 2세 본인이 가베스턴 등을 총애한 나머지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에,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이사벨라가 낳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실은 에드워드 2세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20] 다만 이는 신빙성이 매우 낮은 속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에드워드 2세가 이사벨라와 전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사벨라가 낳은 에드워드 3세를 아들로 인정했을 리가 만무하다.[21]

다만 그와는 별개로 에드워드 2세가 남색가라는 의혹은 당대에도 분명 존재했던 것 같다. 그의 총신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던 피에르 가베스턴이나 휴 데스펜서 등을 그의 동성연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신하기는 어렵다. 에드워드 2세의 남색가 의혹은 여러 이야기에서 발견되는데, 예컨대 에드워드 1세는 가베스턴과 에드워드 2세의 관계를 부적절한 것으로 의심하여 가베스턴을 해외로 추방하기도 하였고,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이사벨라 왕비는 프랑스로 건너가서는 "제삼자가 저와 남편 사이의 유대를 끊어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고도 한다. 휴 데스펜서가 처형당하기 직전에 거세를 당했다거나 혹은 에드워드 2세가 달군 쇠꼬챙이에 항문과 창자가 꿰뚫려 죽었다는 전승도 그가 남색을 즐겼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태자(세자)들의 전통적인 칭호인 웨일스 공의 시초도 에드워드 2세이다. 부왕인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침공하여 승리한 기념으로 에드워드 2세를 웨일즈의 영주로 임명하고 이런 칭호를 내려주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도 이러한 전례를 따라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똑같은 칭호를 주면서 이 일이 후대에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에드워드 2세의 삶을 주제로 한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 제목도 <에드워드 2세>. 당시로서는 최초의 실질적인 역사극 중 하나로, 후대의 영국 연극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다. 훗날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이 연극은 1991년에 데릭 저먼이 감독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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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피터 헨리가 열연했다. 여기서 엄청난 찌질이로 묘사된다. 하는 일이라고는 늘 병풍처럼 서있다가 말 몇마디 잘못하거나 실수를 저질러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 전부다. 극중에서도 동성애적인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아버지 에드워드 1세가 에드워드 2세의 동성연인을 성의 창문 밖으로 던져 살해하는 장면도 나온다.[22] 사실 에드워드 2세가 아버지 못지않은 장신의 거구인데다가 개인적으로는 꽤 뛰어난 싸움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무시한 좋지 못한 고증이다.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타임라인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그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암살당했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항문에 도롱을 꽂은 후 그것을 통해 달군 쇠를 쑤셔서 장기를 태워죽였다고 한다. 이는 영국 극작가 말로가 쓴 '에드워드 2세'에서 묘사된 그대로이다.

그 외에 드라마 끝없는 세상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래도 해당 작품은 브레이브 하트보다는 고증에 신경을 썼기에 지나칠 정도로 찌질하게 폄하되었던 모습에 비하면 나름 포스있게 묘사된다.

브레이브 하트 이후의 시기를 다룬 영화 <아웃로 킹>에서도 등장한다. 영국 출신의 배우 빌리 하울이 맡아서 열연했다. 마찬가지로 찌질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는 찌질함으로 묘사되고 고증에 맞게 강건한 전사로 나온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DLC '서쪽의 군주들'에 추가된 에드워드 1세의 캠페인의 화자로 등장. 아버지의 업적에 짓눌려 부담스러워하는 인물로 나왔다. 이후 캠페인 본편에서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가 자기 아들은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고 까는 것으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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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캐머런이 대학교 시절 가입 신고식으로 돼지 머리와 구강성교를 했다는 루머로 악명 높은 옥스퍼드 대학 피어스 개버스턴 클럽이 이 사람의 이름을 땄다.[2] 실제로 배넉번 전투에서 그를 죽이려고 덤벼든 스코틀랜드 기사들을 근위병들과 함께 직접 싸워 격퇴시켰다.[3] 가베스턴과 에드워드 2세의 관계는 이후로 잉글랜드 정계에 적지 않은 파란을 불러왔다.[4] 사실 부왕인 에드워드 1세 때도 에드워드가 자주 벌이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좋지 못한터라 과도한 세금 징수 때문에 귀족들이 이를 두고 자주 왕에게 반항했다.[5] 지금의 프랑스의 누벨아키텐주와 오트피레네주[6] 정치를 할 생각은 안 하고 향락에만 빠져사는데다 정책 결정도 그저 가베스턴의 말만 듣고 신하들과 의논도 없이 결정하다보니 실정을 연달아 저질렀다.[7] 당시 의회가 발표한 40개의 칙령 중에서 절반인 20개나 되는 칙령이 가베스턴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만큼 가베스턴은 국정을 엉망으로 했고 의회의 증오를 많이 받았다.[8] 에드워드 2세도 아버지처럼 절대군주제를 추구했던 터라 왕권을 약화시키는 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9] 당시 반역죄에 대한 재판은 국왕의 결정이 필요했다.[10] 잉글랜드 측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굴욕적이면서도 뼈아픈 패배였다.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가 생전에 쌓아올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에드워드 2세의 행적 중 최악의 실정으로 손꼽히지만, 사실 그 못지 않게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영국 귀족들의 책임도 상당했다. 이후의 정국을 보더라도 귀족들의 실정이 에드워드 2세에게 지지 않을만큼 심각했다. 즉 에드워드 1세의 치세를 이어나갈 만한 능력을 지닌 이가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를 제외하곤 별로 없었다.[11] 다만 이때의 기근과 전염병은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발생하여 유럽 전역의 문제였다.[12] 참고로 에드워드 2세 때에 활동했던 휴 데스펜서는 두 사람이 있는데 서로 이름이 같은 부자(父子) 관계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Hugh Despenser"와 "Hugh Despenser the Yonger"라는 명칭으로 구분한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에드워드 2세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실각당하고 나란히 처형당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휴 데스펜서란 두 사람 중 아들이다.[13] 조선시대 한명회도 권력과 돈에 대한 탐욕이 대단했지만 여진족 정벌 전공이나 다른 정치적 업적(예: 면리제)을 세운 것에 비하면 데스펜서는 전공이나 정치적 업적 따위는 없었다.[14] 때마침 프랑스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신서(臣誓)를 요구했던 것도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 간의 갈등을 촉발했다. 당시에 잉글랜드의 왕은 명목상으로 프랑스의 영토 일부를 봉토로 받은 프랑스 왕의 신하였는데 이 문제를 두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다.[15] 애초에 정략결혼이였던지라 에드워드 2세는 이사벨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직후 있었던 피로연에서는 왕비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가베스턴과만 이야기했다는 기록조차 있을 정도. 특히 에드워드 2세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까지 얻을 정도로 대놓고 바람을 폈다. 일설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공공연히 자신의 아내도 죽일 수 있다는 위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벨라가 에드워드 2세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로 그를 보좌하면서 사이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상술되었듯 휴 데스펜서의 이사벨라 공격과 에드워드 2세의 방관이 그녀를 에드워드 2세의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16] 의외로 프랑스 왕실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17] 이때 귀족들과 시민들이 휴 데스펜서 부자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아버지 데스펜서는 참수당한 뒤 시신이 조각나 개들에게 던져졌고, 아들은 대역죄인에게 선고되는 형벌인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져 끔찍하게 처형당했다.[18] Berkeley Castle, 지금의 글로스터셔주 스트라우드[19] 다만 이건 말 그대로 가능성이 낮은 썰에 불과하다. 일단 쇠꼬챙이에 대한 일화는 에드워드 2세가 죽은 지 60년 가까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등장했고, 아무리 탐학한 왕이라도 이런 식으로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한다는 것은 중세의 사고방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죽었다면 몸에 처참한 암살의 흔적이 안 남을 수가 없다. 실제로 살해당했다면 독살되거나 자다가 교살당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20] 심지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아예 윌리엄 월레스의 핏줄인 것 마냥 묘사된다. 물론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윌리엄 월레스는 이사벨라가 영국에 오기 4년 전에 처형당했다.[21] 애당초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인 이사벨라 외에도 정부를 두어 사생아를 낳았던 일도 있었다. 그의 남색 스캔들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여색을 밝혔던 점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다시 말해서 양성애자였을 거라는 이야기이다).[22]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더니, 군사적인 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애인을 데리고 가서 군사 고문이라고 둘러댔다가 에드워드 1세의 화를 돋우었다. 실제로 에드워드 1세는 에드워드 2세와 동성연인이라는 의혹을 받았던 가베스턴을 해외로 추방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