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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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제4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출생
1744년 9월 25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베를린 성
사망
1797년 11월 16일 (향년 53세)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대리석 궁전
재위기간
프로이센 국왕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786년 8월 17일 ~ 1797년 11월 16일
(11년 2개월 4주 2일, 4,10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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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아우구스트 빌헬름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여공작 루이제
배우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1765년 결혼 / 1769년 이혼)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1769년 결혼)
자녀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루트비히 카를, 빌헬미네, 아우구스타, 하인리히, 빌헬름
형제자매
빌헬미네, 하인리히, 에밀
가문
호엔촐레른 가문
종교
칼뱅파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5. 가족관계



1. 개요[편집]


프로이센 왕국의 제4대 국왕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2. 생애[편집]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생존한 아들 중 둘째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백부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식이 없고 아버지가 일찍 죽은 영향으로 14살 때부터 추정 상속자로 취급받았다. 친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페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친자매[1]인데다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왕비가 자식이 없는 영향으로 예쁨을(?) 받았고 큰아버지와 삼촌들이 열심히(?) 전쟁에서 구르며 영토를 확장한 덕을 톡톡히 봤다.

1786년 왕위에 오를 때는 별 존재감이 없었는데 선왕 프리드리히 대왕이 워낙에 존재감이 높은지라 "우리들의 늙은 프리츠가 죽으니 듣보잡 뚱보가 왕이 됐네!?" 정도의 반응... 인기를 올리기 위해 재임초 프리드리히 대왕이 말년 인기 하락 주 원인이던 국가 독점 담배 전매를 폐지했다. 대신 커피 같은 다른 사치품에서 세금을 올렸다.

가정적으로는 상당히 막장이었다. 1765년에 결혼한 첫번째 아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2]와는 결혼 초기부터 불화하며 따로 애첩을 두는 등의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음악가와 바람을 피워 임신하고 야반도주할 계획을 세웠다가 들통나자 강제로 구금시키고 1769년에 이혼했다.[3] 이혼한지 3개월만에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레데리케 루이제와 두 번째로 결혼하여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결혼 생활을 계속 하면서 애첩에게 다섯의 자식을 따로 얻었다. 아예 쓸모 없는 짓은 아니어서 사생아 중의 한 명은 손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시절 총리를 지낸 브란덴부르크 백작이다. 그리고 말년에 애첩 하나를 또 얻었다. 그렇게 해서 사생아까지 합쳐서 슬하에 16자녀를 얻었고 51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재위 중에는 행운이 따랐다. 호엔촐레른 가문 방계들이 다스리던 남독일의 안스바흐바이로이트에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자 진압할 능력이 없는 방계 혈족들이 프로이센에 대신 좀 다스려 달라고 영토를 고대로 들어 바쳤다. 그러나 경솔하게 오스트리아에 낚여서 혁명 프랑스를 쳤다가 이건 아닌듯 싶어서 중간에 도로 빠졌는데[4]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프랑스와 강화하는 나라라 하여 매우 반가워했고, 1795년 바젤 평화조약으로 라인강 서쪽의 코딱지 만한 영토를 프랑스에 넘기는 대신 프랑스로부터 영국동군연합이던 하노버 선제후국의 점유를 승인받았다. 당연히 다른 유럽 국가들한텐 얍삽하고 비열한 행동으로 욕은 많이 먹었다. 그리고 동쪽 국경에서는 1792년, 1795년 제2차,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여 영토는 재위 초기보다 2배 이상 늘어났다.


3. 평가[편집]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재위기간의 유럽은 계몽주의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맞이했는데, 전제군주제를 지지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에서도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개혁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현대적인 토지법 발효, 신하들의 종교의 자유 보장, 제2차,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해 프로이센의 영토를 많이 늘린 것 정도의 업적이 있으나 그가 주도적으로 한 것은 없었다.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암군. 백부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광 덕분에 본인의 무능함이 가려졌으며, 뚱보 잉간(der dicke Lüderjahn)이라는 멸칭까지 붙었다.


4. 여담[편집]




5. 가족관계[편집]




파일:Frederica Louisa of Hesse-Darmstadt.jpg

두번째 아내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5]
1녀
요크와 올버니 공작부인 프리데리카 샬럿 공주
(Princess Frederica Charlotte, Duchess of York and Albany)
1767년 5월 7일
1820년 8월 6일
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6]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Friederike Luise von Hessen-Darmstadt)[7]
1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1770년 8월 3일
1840년 6월 7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5남 4녀[8]
2녀
크리스티네 공주
(Princess Christine)
1772년
1773년

2남
루트비히 카를 왕자
(Prince Louis Charles)
1773년 11월 5일
1796년 12월 28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9]
슬하 2남 1녀
3녀
네덜란드의 왕비 빌헬미나
(Wilhelmine, Queen of the Netherlands)
1774년 11월 18일
1837년 10월 12일
빌럼 1세
슬하 2남 2녀[10]
4녀
헤센의 선제후비 아우구스테
(Augusta, Electress of Hesse)
1780년 5월 1일
1841년 2월 19일
헤센의 선제후 빌헬름 2세
슬하 3남 3녀
3남
하인리히 왕자
(Prince Henry)
1781년 12월 30일
1846년 7월 12일

4남
빌헬름 왕자
(Prince Wilhelm)
1783년 7월 3일
1851년 9월 28일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슬하 2남 2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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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삼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가 고모 필리피네 샤를로테와 결혼하면서 겹사돈을 연이어 맺었다. 참고로 아이러니하게도 루이제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둘 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주적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종사촌이었다.[2] 외삼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와 고모 필리피네 샤를로테의 딸로 고종 사촌 겸 외사촌이다. 아무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의 사이에서 딸 프리데리케 샤를로테를 낳았고, 프리데리케는 조지 3세의 차남 요크 공작 프레드릭과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내연남이었던 음악가 피에트로는 야반도주 계획이 실패하면서 체포되어 참수당했고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의 불륜을 도와준 그녀의 오빠 빌헬름 아돌프 역시 프로이센군 장교의 지위를 내려놓았고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약물로 뱃속의 아이를 지운 뒤 이혼당했다.[4] 여담으로 이때 친정을 나간적이 있는데 애첩들도 모두 데리고 나갔다가 부리나케 도망갔다.[5] 1746년 11월 8일 ~ 1840년 2월 18일[6] 조지 3세의 차남이다.[7] 1751년 10월 16일 ~ 1805년 2월 25일[8]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 왕자 등.[9] 위에 나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아내 루이제의 여동생이다. 즉, 겹사돈. 첫번째 남편 루트비히 카를과 사별한 뒤 재혼한 두번째 남편 졸름스-브라운펠스의 공자 프리드리히 빌헬름과도 사별하고,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하노버의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와 재혼하면서 하노버의 왕비가 되었다.[10] 빌럼 2세 등.[11] 헤센의 카를 공자비 엘리자베트, 바이에른의 왕비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