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군 (문단 편집) ==== [[중국]] ==== * [[하나라]] * [[걸왕]](B.C.1652? ~ B.C.1600)◎: 다만 하나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은지라 애매한 감이 있다. * [[상나라]] * [[제신]](B.C.1075 ~ B.C.1046)◎: 하걸상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위의 걸왕과 함께 걸주로 엮이며, 성군의 대명사가 요순이라면 이들은 폭군의 대명사격이나, 현재는 명군과 거리가 먼 것과는 별개로 주나라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폄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주나라|서주]] * [[소왕(주)|소왕]](B.C.995 ~ B.C.977):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성왕(주)|할아버지]]와 [[강왕(주)|아버지]]가 이룩한 성강지치를 파탄내서 주나라의 쇠퇴를 유발한 장본인. * [[여왕(주)|여왕]](B.C.871 ~B.C.841) * [[유왕]](B.C.781 ~ B.C.771)▲: 서주에서 동주로 전환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장본인'''이자 유명한 [[포사]] 이야기의 주인공. * [[춘추시대]] * [[위선공]](B.C.718 ~ B.C.700) * [[위영공]](B.C.534 ~ B.C.493):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춘추]]나 [[논어]]에서 대놓고 깔 정도로 무능한 군주다. 특히 말년에 후계자선정에서 진짜 한국에서 방영하는 일일드라마 수준의 정치암투를 벌여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시호가 영공(靈公)인데 靈이라는 한자가 정신적으로 혼탁해서 나라를 망치는 군주에게 주는 시호로 역시 후한의 [[영제(후한)|영제]]의 영도 바로 이 靈이다. 그만큼 위나라에서도 나라를 망친 군주라고 판단한 것. * [[제양공]](B.C.697 ~ B.C.686)★▲: 난세에 [[막장]] 군신이 들끓었던 춘추전국시대 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개막장 패륜 군주였다. * [[관이오]] 사후 [[제환공]](B.C.685 ~ B.C.643)▲ * [[제경공(26대)|제경공]](B.C.547 ~ B.C.490)◎: 전성기에는 [[안영]]과 [[사마양저|전양저]]를 중용하여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가기는 했으나 후계자 선정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망명 공족 전(田)씨의 세력 확장을 방조하여 여(呂)씨가 끊어지는 원인을 초래했다. * [[전국시대]] * [[위혜왕]](B.C.369 ~ B.C.319): 인사면에서 실정을 저질러 [[손빈]], [[공손앙]] 등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이 타국에서 뜻을 이루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하서지방을 진나라에게 내주고 대량으로 천도하게 된다. 옛 수도권인 하동 지역은 이후로 진나라에 계속 털리다가 결국 반세기 이후 진나라에 완전히 뺏기게 된다. [[제위왕]]과의 회견에서 보물 에피소드는 덤. * [[초회왕]](B.C.328 ~ B.C.299):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 친진파를 중용하여 타국의 신용을 잃었으며 이마저도 진나라의 유인에 넘어가 억류되어 객사라는 최후를 맞게 된다. * [[연혜왕]](B.C.278 ~ B.C.272): 제나라 정복으로 잘나가는 [[악의(전국시대)|악의]]를 시기하여 반간계에 넘어가 이를 내쳐서 결국 거의다 먹기 직전이었던 제나라를 토해내었다. * [[조도양왕]](B.C.244 ~ B.C.236): 간신의 참언을 듣고 [[염파]]를 내쳤으며 멀쩡한 적장자인 [[조가]]를 폐하고 총첩출신의 아둔한 [[유목왕|조천]]을 세우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장평의 대패 이후에도 그나마 나름 버텨오던 국가의 역량은 본격적으로 도양왕 대에 이르러 기울어지게 된다. * [[송강왕]](B.C.328 ~ B.C.286): 초기에는 주위 소국들을 정복하며 송나라를 전국칠웅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키웠으나 시간이 지나며 교만해졌고 결국 본인 대에 나라가 망한다. * [[제민왕]](B.C.324/B.C.300 ~ B.C.284): 전국시대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제나라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암군이다.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지속적으로 성과를 거두면서 점차 거만해지고 다른 국가들의 정치에 간섭하고 [[맹상군]] 등 명재상들을 내쫓으면서 제나라를 국제적 왕따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결국 [[악의(전국시대)|악의]]가 이끄는 연나라 대군에 의해 제나라가 [[전국칠웅]] 중 가장 먼저 멸망할 뻔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부하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건 덤이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제정신 못 차리다 죽었다. * [[제왕건]](B.C.264 ~ B.C.221): 진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지만 군왕후가 섭정하던 시절에는 그럭저럭 나라를 꾸려간 편이었다. 군왕후 사후 내부로는 [[후승]]의 전횡을 방조했고 외부로는 세객들의 말만 듣고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아 결국 망국의 군주로 전락했다. * [[진(통일왕조)|진]] * 천하통일 이후의 말년의 [[시황제]](B.C.247 ~ B.C.210): 최초의 중국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말년의 치세가 좋지 못하여 그의 사후 나라는 막장꼴이 되게 된다. * [[이세황제]](B.C.209 ~ B.C.207)★▲: 중국사 암군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막장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항우한테 관중이 함락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단 4년에 불과했다. 만약 그가 명군이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주류 민족을 가리키는 단어는 [[한족]]이 아니라 '진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초한쟁패기]] * [[항우]](B.C.206 ~ B.C.202)★: 용맹과 군사적 능력은 중국 역사상에서도 늘 거론될 만큼 막강했지만 정치 역량이 형편없었다. * [[전한]] * [[무제(전한)|무제]](B.C.141 ~ B.C.87)◎: 한나라의 황금기의 중심에 섰던 황제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무리한 정복전쟁과 토목 공사와 지나친 신하 숙청으로 [[문제(전한)|할아버지]]와 [[경제(전한)|아버지]]가 이룩해놓은 [[문경지치]]를 파탄냈고 개인적으로 의심이 많은 성격 탓에 말년에는 [[무고의 화]]를 일으켜 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 [[성제(전한)|성제]](B.C.33 ~ B.C.7) * [[애제(전한)|애제]](B.C.7 ~ B.C.1) : 초기에는 개혁에 열의를 가지고 임하였으나 한계에 부딪혀 [[공민왕|절망한 나머지 동성애에 빠졌다]] * [[신나라#s-2|신]] * [[왕망]](A.D.9 ~ A.D.23)★▲ * [[후한]] * [[안제(후한)|안제]](106 ~ 125) * [[환제(후한)|환제]](146 ~ 168) * [[영제(후한)|영제]](168 ~ 189)★: 정치적으로는 당고의 금을 통해 자신에게 간언하는 청류파 지식인들과 신하들을 탄압했고 관직을 채소 등 물건처럼 팔아치우고 [[십상시|환관에게 휘둘려]] 사실상 후한을 멸망시킨 장본인. 이러한 막장 통치로 [[소제(후한)|소제]]와 [[헌제]]가 [[동탁]]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삼국지의 시작 * [[중나라|중]]: 원술이 칭제하고 세운 비정통 국가. * [[원술]](197 ~ 199): 변변한 능력도 없으면서 칭제하여 사방을 적으로 돌려 몰락했다. * 후한 말의 군벌들: 당시 후한은 동탁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고, 군웅들이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자사와 태수의 구분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각지의 군벌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니 사실상 군주로 볼 수 있다. * [[동탁]](189 ~ 192): 엄청난 폭정으로 사실상 후한을 붕괴시켰다. * [[공손찬]](189 ~ 199): 폭정을 일삼아 몰락했다. 유우를 죽인 것은 원소에게 명분을 준 실책이었다. * [[이각]](189 ~ 198): 동탁 사후 [[곽사]]와 함께 [[삼보의 난|중원을 초토화시켜]] 한나라를 완전히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 [[여포]](192 ~ 198): 항우와 마찬가지로 정치 능력이 결락된 탓에 결국 조조가 하비성을 침수시키면서 사로잡혀 죽는다. * [[원소(삼국지)|원소]](191 ~ 202)◎: 우유부단한 데다 독선적이고, [[전풍]]과 [[저수]]의 계책을 듣지 않고 곽도의 말만 믿어 [[관도대전]]에서 패하고도 봉기의 모함을 듣고 전풍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죽이는 등 자기 자신의 과오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만 급급했고 결국 [[장합|많]][[고람|은]] [[허유|인]][[선우보|재]][[진림|들]][[신비(삼국지)|이]] 조조 측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여기에 저수의 만류에도 장남 원담을 폐출시켰으면서 청주의 지배권과 군권을 준데다 [[원상]]을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여 후계 구도를 꼬아버렸다. 그러나 유력한 군벌이었던 [[공손찬]]을 패사시키고 개판 2분 전이었던 하북을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시킨 정치력과 6년상과 반동탁연합을 결성하고 일족의 몰살을 동탁에 저항하는 명분으로 써먹은 쇼맨십, 관도대전 이전의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적 능력만큼은 높이 평가받는다. * [[원담]](202 ~ 205): 원소의 장남이지만 폐출되어 원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정치력과 쇼맨십은 뛰어났으나 본인은 군사적 능력만 뛰어날 뿐 정치적으로는 무능했다. 청주 정복 후 뇌물을 주는 자는 병역을 면제하고 아부하는 자만 가까이 해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했다. 곽도와 신평의 부추김만 듣고 원상을 습격해 형제간 내전을 일으키고, 원상에게 패한 뒤 왕수의 만류에도 곽도의 조언만 듣고 형제간 조조를 끌어들이는 선택을 했는데, 이는 원가를 멸망시키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결국 원상이 업성을 잃은 사이 원상을 공격해 원상의 군사들을 빼앗고 조조의 뒤통수를 쳐 기주의 절반을 차지했으나 결국 조조에게 공격당해 곽도와 함께 죽는다. 다만 앞에도 말했듯이 공손찬의 수하 [[전해]]를 격파하고 청주를 정복하는 면모를 보아 군사적 능력은 출중했다. * [[원희]](202 ~ 207): 아버지는 정치력과 군사적 능력 모두 출중하고, 형과 동생 역시 군사적 능력은 출중했으나 본인은 원상이 조조에게 패해 업성을 잃는 것을 방관하고 형 원담에게 패한 동생 원상을 받아들였으나 부하 장수들을 관리하는 것도 실패해서 부하 장수인 [[초촉]]과 [[장남(삼국지)|장남]]에게 공격당해 동생과 함께 오환에 의지하게 되었다. * [[유표]](? ~ 208)◎: [[화흡|당대를 살았던]] [[왕찬|많은 문관들은]] 큰 뜻을 가진 자라면 유표를 섬겨서는 안 된다고 평했다. 실제로 유표는 형주에 안주하는 데 급급했으며, 채씨 일가에 휘둘려 결점이 없는 적장자 유기를 내쫓다시피 했으며, 장선과 진생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하는 등 군사적으로 무능한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정치적 능력은 상당했다. * [[유장(삼국지)|유장]](194 ~ 219): 장로, 감녕, 조휘 등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거나 동주병의 소요에 미온하게 대응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여 익주의 민심을 잃었고, 결국 유비에게 익주를 내주고 항복한다. 그나마 사람은 좋았다. * [[고정(삼국지)|고정]](? ~ 218): 익주 남부에 살던 이민족인 수족의 왕인데 능력도 없으면서 촉한에 반기를 들었다 토벌당한다.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 [[위(삼국시대)|조위]] * [[조조]](추존)◎: 후한 말기에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고 전임 권력자들의 폭정에서 후한 정권을 안정화시킨 것은 공이나, 본인도 장기적인 전략보다 빠르게 힘을 키우는 정책을 선호해 후대의 폐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성격적으로는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있어 [[서주 대학살]]을 위시로 한 학살을 저지르거나[* 서주 대학살 말고도 관도대전 후 원소군 병사 생매장, 왕필이 살해당한 후 관리들에게 OX 퀴즈를 내어 O를 택한 관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여자 한 명 취하려다 [[조앙|아들]]과 [[조안민|조카]], [[전위(삼국지)|부하]]를 잃는 [[장수(삼국지)|참극]]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순욱|공신을 비롯해]] [[공융|눈 밖에난]] [[최염|인재들을]] [[모개|숙청하는]]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한중 공방전 때에는 장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결국 하후연이 전사했음에도 오히려 하후연의 군재를 폄하하여 무마하려 했으며, 한중에서의 승기를 타고 관우가 북진해올 때에는 대오전선을 완전히 비우는 실책까지 저지른다. 결국 이런 실책들은 작게는 위의 통일을 막았고 크게는 정주민인 한족의 약화로 이후 5호 16국 시대가 열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조 본인은 실책을 저지르는 중에도 북방 이민족들을 약화시키기도 했고, 실책들도 그의 사후 유지를 이어받은 후대가 개선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조조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평가 받지는 않고 있다. * [[조비]](220 ~ 226)◎: 인성에 문제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비상시 황실의 방패막이 될 수 있는 황족과 외척을 지나치게 배척했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소외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창]], [[조식(삼국지)|조식]], [[하후상]]이다. 자신의 동생인 [[조창]]과 [[조식(삼국지)|조식]]을 죽이거나 소외시킨 것은 그나마 황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핑계라도 댈 소지가 있으나, [[하후상]]을 죽게 만든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가뜩이나 황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외척과 황족들을 배제하고 방계친척 위주로 그것을 대체한 상황에서 하후상이 죽자, 유사시 황실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막 역할을 할 인물은 [[조진]], [[조휴]]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는 두 인물이 죽을 경우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진]], [[조휴]]가 연달아 죽은 후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조상(삼국지)|조상]]은 [[조진|자신의 아버지]]와 [[조휴|숙부]]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조상(삼국지)|조상]] 일파가 [[사마의]] 일파에 의해 [[고평릉 사변|숙청]]당하자 [[위(삼국시대)|위나라]]는 바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구품중정제[* 제안한 사람은 [[진군]]이지만, 실행을 명한 건 조비다.] 실시로 귀족 세력이 대대손손 관직을 해먹게 만들어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귀족들이 황권을 위협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또 아버지 [[조조]]의 삽질인 [[적벽대전]]이나 [[유비]]의 삽질인 [[이릉대전]]급의 임팩트가 없어서 그렇지 재위기간 동안 총 3번의 남정을 시도했으나 전부 손권에게 막혀 실패했다.[* 다만 위-오 국경은 천혜의 요새라는 것을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게다가 정사를 돌보는 것보다도 수렵을 좋아하였고, 아첨하는 오질을 가까이 하고 간언하는 포훈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처형해버렸다. * [[조예]](226 ~ 239):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 위나라를 지키고, 내정도 여태껏 잘하더니 말년에 과한 사치와 향락을 부렸고, 계통이 불명확한 [[조방]]을 무리하게 후계로 지명하여 [[조상(삼국지)|조상]]의 실정 및 이후의 [[고평릉 사변]]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아주었다. 또한 위서 양부전을 보면 조예는 일시적인 기쁨과 노함으로 신료들을 대하였으며, 자주 궁전을 짓느냐고 인부들을 대거 차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년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씨앗이 있었던 셈이다. * [[촉한]] * [[유비]](221 ~ 223)◎: 오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이릉대전]]을 일으켰으나 그 전쟁에서 패배해 촉한의 인적 자원을 크게 상실했기에 암군이라는 의견이 있다. 고대의 전쟁은 통치자의 감정적인 사유로 인한 전쟁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켰다며 적절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고, 형주의 지방 행정력을 장악하기 위해 공안으로 천도하기까지 한 오나라의 시도나 오의 형주 지배력이 약할 때 유비에게 호응한 반란이 제법된 것을 감안해 무조건적인 유비의 실책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 [[유선(삼국지)|유선]](223 ~ 263)◎: 말년의 모습은 반박의 여지 없이 암군이다. [[황호]]를 등용해 국정을 말아먹은 건 엄연히 실책이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위에 맞서기 위해 모이는 와중에 앞장서서 '''항복을 선언'''하였다. 다만 삼국지가 제갈량의 죽음 이후로 거의 생략이 되고 유선의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나지만, 유선의 치세는 장장 41년이나 되고 유선이 항복한 것도 제갈량 사후 무려 29년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말년에 암군으로 전락하기 이전에는 재상의 도움을 받아 무난하게 통치했을 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유선은 장완 병사후 새로 재상이 된 동윤의 간언을 못마땅해하며 진지와 황호를 가까이하였다. 아무래도 황권 강화를 꾀하려다 역으로 환관에게 잠식당한 모양이다.] * [[오(삼국시대)|손오]] * [[손책]](192 ~ 200)▲: 원술의 밑에서 여강 태수 [[육강]]을 살해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이후에도 호족에 대한 강경책과 유화책을 균형 있게 사용하지 못하여 기반의 결집력을 약화시켰으며 오군 태수 [[허공(삼국지)|허공]]을 살해해 피습당한 후에는 의심이 많아져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우길]]선인에게 괜히 누명을 씌워 죽여버리는 바람에 원귀가 된 우길선인에게 죽임당했다. 이러한 문제는 차기 지도자인 손권이 육손을 포섭하면서 해결하였다. * [[손권]](200 ~ 252): 이궁의 변 이전에도 [[사섭]] 사후 교주에서 벌인 짓이나 [[여일]] 등 간신배를 신임하고 그의 말에 따라 충신들을 유폐하는 등 암군의 기질을 보였다. 그리고 외교에서도 실책을 저지르는데, '''[[공손연]]을 끌어들여 대위전선을 형성하려 하였으나 사신들의 목만 날아가고 말았다.''' 고구려와도 비슷한 시도를 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 [[손휴]](258 ~ 264)◎: [[손침]]을 처단하기는 했지만 무능한 [[복양흥]]과 장포 등 가신들에게 휘둘려 새 정치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손호가 즉위하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지게 된다. * [[손호]](264 ~ 280)★△: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옹립한 복양흥과 장포를 숙청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해 손씨 친족들을 많이 죽였다. 이외에도 잦은 숙청, 잦은 천도, 잦은 연호 교체 등 전형적인 왕권 강화 행보를 보여 중신들과 작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오나라의 멸망이 단순히 폭군 손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위나라-오나라 간 국경은 천혜의 요새인데 반해 촉-오 국경은 평지라서 촉나라가 진나라에 복속된 이후로 오나라는 훨씬 불리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대 황제인 손휴도 촉의 멸망 이후 나라 걱정을 하다가 요절했다.] 그래서인지 손호를 비롯한 망국의 군주들은 아주 막장이 아닌 이상 재평가 여론이 생기기도 한다. * [[동연]][* 표면상으로 위에 복종했으나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 [[공손공]](221 ~ 228): 무능하여 조카에게 폐출당했다. * [[공손연]](228 ~ 238): 대놓고 위에 반기를 들고, [[가범|반대하는]] [[윤직|신하들]]을 처형했다. 그 결과는 요동이 완전히 복속되는 것이었다. 237년의 교전에서 강을 낀 방어를 통해 [[관구검]]을 패퇴시킨 걸 보면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자충수가 맞는다. * [[서진]] * [[사마소]](추존): [[사마의|아버지]]는 매우 유능했고, [[사마사|형]] 역시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으나 본인은 그저 포악하기만 하고 무능했다. 거기에 [[조모(삼국지)|현위황제]]를 살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음에도 본인은 여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가충]]을 죽이는 대신 실행자인 성쉬와 성제형제에게 책임을 떠남기는 행동을 저질렀다.[* 황제 살해는 아버지나 형도 명분을 위해 하지 않았던 일이다. 심지어 [[사마사|형]]은 [[조방|황제]]가 자신을 암살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폐위하는 선에서 끝냈다. 결국 이로 인해 진나라 황실은 정통성 결여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게 되었으며, [[사마염]] 사후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군약신강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기 자신도 이렇게 막장인데 유선을 비웃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이 사람의 아들이 사마염이다. * [[무제(서진)|사마염]](265 ~ 290): '''초대 황제이자 창업군주인 주제에 암군이다.''' 황제가 뇌물 수수를 일삼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신하들로부터 환제와 영제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다만 재위 초반엔 태강의 치로 일컬어지며 호평받았다. * [[혜제(서진)|사마충]](290 ~ 301)◆ * [[5호 16국]] * [[유요(전조)|유요]](319 ~ 328): 폭정을 벌였으며, 술에 취해 군대를 지휘할 정도였다. * [[석호(후조)|석호]](334 ~ 349)★: 후조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 [[부견]](357 ~ 385)▲◎: 말년에 [[비수대전|자만으로 판단을 그르친 탓에 나라를 말아먹었고]], 그 덕에 선비족이 다시 활개치게 되어 [[후연]]과 [[북위]]가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요장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 [[모용보]](396 ~ 398): 후연의 제2대 황제. [[모용수|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결국 난한의 반란으로 후연이 쇠퇴하는 계기를 만들어내었다. * [[모용희]](401 ~ 407)★▲: 후연의 제4대 황제. 수양제의 전생이 아닐까 정도로 폭군이자 암군이다. 게다가 상대는 [[광개토대왕]]과 북위의 [[탁발규]] 등이 활약하고 있었는지라,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한 것은 덤이다. 다만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함락시키는 군재를 보여주긴 했다. * [[남북조시대]] * [[동진]]: 사마진의 모든 황제들이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명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황제들이 다 암군이었다. * [[강제(동진)|사마악]](342 ~ 344) * [[목제(동진)|사마담]](344 ~ 361) * [[애제(동진)|사마비]](361 ~ 365) * [[효무제(동진)|사마요]](372 ~ 396) * [[사마덕종]](396 ~ 419)◆ * [[초(위진남북조)|환초]] * [[환현]](403 ~ 404): 능력도 없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나, 곧바로 [[무제(유송)|유유]]에게 격파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동진 멸망의 씨앗이었다. [[한당]]-[[한종]]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호부견자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송(남조)|송]]: 창업 군주 [[무제(유송)|유유]], 그나마 내정을 제대로 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은 [[문제(유송)|유의륭]],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던 마지막 군주 [[순제(유송)|유준]] 제외하고는 무슨 저주라도 걸린양 '''암군과 폭군으로 도배가 된 최악의 막장 왕조'''였다.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도 순위권 안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군재를 갖춘 위진남북조 시대 최고의 명장 창업군주 [[무제(유송)|유유]]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황하 이남의 땅을 대부분 장악했고, 무엇보다 촉한 멸망 이후 오랫동안 대가 끊겼던 '한의 유씨 황실 복원'이라는 국가 이념까지 계승하게 돼, 한황실 400년의 치세를 겪어 '황제는 유씨만이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당시 중국의 민중들을 매혹할만한, 당대 기준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대의명분까지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암군과 폭군들이 줄줄이 출몰한 끝에 59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유의륭 이후 정말이지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걍 범군 정도만 두세 명 정도 더 출현했더라면 우리가 아는 남북조 시대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북한]]의 [[백두혈통]]과 함께 부탄의 [[왕축 왕조]]와 정반대인 셈. * [[소제(유송)|유의부]](422 ~ 424)★△▲: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황음무도한 암군이라 결국 폐위당했다. * [[효무제(유송)|유준]](453 ~ 464)★: 간언하는 자를 탄압하고 지나친 사치를 부려 국고를 바닥나게 하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 [[전폐제(유송)|유자업]](464 ~ 466)★▲: 사치향락과 근친겁탈에 빠져 온갖 기행을 저지르다 재위 1년 만에 살해당했다. * [[명제(유송)|유욱]](466 ~ 472)★: 이 사람도 사치향락과 음란행위에 빠져 살았다. * [[후폐제(유송)|후폐제 유욱]](472 ~ 477)★▲: 살인이 일상이던 미치광이 소년. * [[제(육조)|제]]: 유송 못지않은 막장 왕조였다. * [[전폐제(남제)|소소업]](493 ~ 494) * [[후폐제(남제)|소보권]](498 ~ 501)★ * [[양(육조)|양]]: 송, 제와 비슷하다. * [[무제(양)|소연]](502 ~ 549)◎: 본래 양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며 명군으로 평가받던 군주였으나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하여 불교에 크게 심취하고 중앙의 귀족과 황족은 사치의 극한을 누리며 양나라를 말아먹었다. 이 때문에 양나라 중앙 군대는 무너져 내렸고 후에 [[후경]]의 난으로 감금되었다가 [[아사]]했다. * [[효원제]](552~555): 개인적으로는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긍정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했다. 서위가 수도를 포위한 상황에서 태평하게 백관들에게 노자를 강의하는 답없는 행보를 보였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수집했던 '''책 14만권을 전부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 [[한나라(동음이의어)#s-2.4|한]] * [[후경]](551 ~ 552): 반란을 일으켜 양무제를 실각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 역량이 형편없었던 탓에 후경의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 반란으로 양나라는 사실상 망했다. 결국 이익을 본 것은 서위뿐이었다. * [[진(육조)|진]] * [[후주(남진)|진숙보]](582 ~ 589) * [[북위]] * [[탁발규]](399 ~ 409) * [[선무제]](499 ~ 515): 제위 초반부터 외척인 고조에게 국정을 맡겼고, 이들에게 휘둘리는 정치를 했다. 자귀모사[*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제도]라는 악습을 폐지한다는 점은 좋았으나, 문제는 그 수혜자가 바로 북위 후기를 말아먹은 주범인 [[영태후]]라는 점에서 이것마저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정책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효문제]]가 실시한 한화정책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 황족고관들의 사치를 방관하였다. 결국 그의 사후 북위는 [[육진의 난]]의 혼란에 휩싸여 휘청거리다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며 멸망하게 된다. * [[북주]] * [[우문윤]](578 ~ 579): 엄청난 폭정으로 수나라 건국의 빌미를 제공했다. 명군인 [[우문옹]]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 [[북제]] * [[고양(북제)|고양]](550 ~ 559)★ * [[고담(북제)|고담]](561 ~ 565)★ * [[고위]](565 ~ 577)★ * [[수나라]] * [[양제(수)|수양제]](604 ~ 618)★▲: 능력만큼은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 능력을 사치와 지나친 원정, 주색잡기에 사용하여 결국 나라를 말아먹었다.[* 이 개짓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버지 [[수문제]]가 난세를 정리하자마자 최고치로 끌어올린 국력을 [[당태종]]의 [[정관지치]] 시대에도 수문제의 국력에 한참 못미칠 만큼 중국을 수십 년에서 백 년 가까이 퇴보시켰다.] 그래서 중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부황인 수 문제를 부하 장형을 시켜 시해하고 즉위하였다. 명군이자 성군인 아버지를 시해하고 암군이자 폭군인 아들이 즉위한 셈이다. * [[당나라]] * [[태종(당)|당태종]](626 ~ 649)◎: 명군으로서 당나라의 첫 번째 전성기를 열었지만, 말년에 무리한 [[고구려-당 전쟁|고구려 침공]]으로 당나라의 국력을 깎아먹은 점만큼은 중화권 내에서조차 혹평을 듣는다. 사실 고구려에 패한 것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말년에 남긴 실책으로는 무리한 고구려 침공 뿐만 아니라 충신들의 간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후계자 문제 등에서 일을 그르친 것도[* 장남이 문제를 일으켜 폐태자되자 4남을 밀어주다가 종국에는 9남인 당 고종을 밀어주었다.] 있다. * [[중종(당)|당중종]](684, 705 ~710)▲: 흔히 위황후 일파에게 휘둘린 암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복위하자마자 돌궐의 흥기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708년에는 장인원으로 하여금 삼수항성을 쌓게 하고 또 튀르기시, 힐알사(키르기즈)와 동맹을 맺어 돌궐 포위망을 형성하였으나 돌궐 북벌이 실현되기도 전에 암살당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 [[측천무후|성신제]](690 ~ 705)◎: 내준신 등 혹리들을 통한 공포정치로 많은 사람을 숙청으로 죽였지만 이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몇가지 내치 관련 업적도 성공하였으며 그때에 백성들은 살기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신제를 악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유교 때문에 긍정적인 면은 없애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표현한 데다가 아예 황제가 아닌 황후인 '측천무후'라고 주로 불리는 등 많은 폄하를 당했기 때문에 폭군이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외치면에서는 완벽히 실패한 인물로 이 점 때문에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나라의 대표적 외교정책인 기미정책이 이 시기부터 파탄을 맞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발해가 탄생하고 토번이 흥기하였으며, 돌궐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기미정책의 파탄으로 인해 당 중기~말기의 국방은 기존의 제도인 부병제로는 도무지 지탱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 절도사가 탄생하였다. [[안사의 난|그리고 강해진 절도사들의]] [[황소의 난|폐해로 인해]] [[주전충|당나라는 끝내 멸망하였다.]] 어찌본다면 당나라가 절도사에 휘둘리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래도 명재상 [[적인걸]] 등을 등용해서 당 현종 초기[* 어디까지나 초기 한정이다.]에 당이 발전할 수 있게 기틀을 닦은 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치세의 명군이자 난세의 암군''', 혹은 '''내치의 명군이자 외치의 암군'''이라고 평가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천보 연간(742 ~ 756) 이후의 [[현종(당)|당현종]](712 ~ 756): 간신 [[양국충]]에게 놀아나서 [[안사의 난]]의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반란 진압을 위해 본인이 퇴위하는 지경에 이른다. * [[숙종(당)|당숙종]](756 ~ 762): 반란으로 엉망이 된 당나라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인물. 당 의종을 제외한다면 당 최악의 암군으로 불릴 만한 정도의 인물이다.[* 굳이 의종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국가를 재건하려는 의지도 없이 대놓고 말아먹은 의종과는 달리 적어도 황제로서 노력은 했다는 것 정도이지만, 결과는 앞에서 말했듯이 파멸적이었다.] * [[대종(당)|당대종]](762 ~ 779): 거듭된 전란 속에서 내놓은 대책이라고는 절도사들의 권한을 인정해 번진할거 시대를 만든 것뿐이었고, 명장 곽자의에게 의존하면서 본인은 손을 놓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곽자의에게 의존했다고 하지만 암군이라면 으레 명장을 의심해 숙청했다가 위기를 맞기 쉬운데 그런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고 어찌되었든 외적들을 자력으로 물려쳤고 권신들 통제도 성공해서 [[숙종(당)|아버지]]보단 낫다고 평가받는다. * [[순종(당)|당순종]](805)▲: 처음에는 개혁에 열의를 가지고 임하였으나, 지병으로 완전히 백치가 되어 왕숙문 일파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게다가 혁신파의 분열도 막지 못했다. 결국 아들 헌종의 묵인 하에 왕수징에게 살해되었다. * [[목종(당)|당목종]](820 ~ 824): 아버지 헌종이 원화중흥으로 살린 나라를 말아먹은 군주로, 제2차 환관 시대를 연 군주이다. * [[경종(당)|당경종]](824 ~ 827): 목종의 아들로, 똑같다. * [[무종(당)|당무종]](840 ~ 846): 도교에 심취하여 환관에게 놀아나는 당 조정을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며, 단약 중독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 [[의종(당)|당의종]](859 ~ 873): 당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당나라 최악의 암군'''. * [[희종(당)|당희종]](873 ~ 888): '''[[황소의 난]]'''이 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상격구와 도박에 빠지고 국정을 손에서 놓은 군주. * 연: 안록산이 칭제하고 수립한 나라. * [[안록산|광렬제]](756 ~ 757)▲: [[북경|범양]]에서 거병할 때만 해도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많은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하북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을 함락시키는 등 굵직한 성과'''를 내었지만, 이때 칭제한답시고 진군할 시기를 놓쳐 당나라에 숨돌릴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도 [[홍농]], [[장안]]과 [[동관]]까지 함락되었느니 당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휘하 군대의 학살을 방조해 민심이 돌아섰고, 본인도 말년에 포악해졌으며,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을 밀어주려다 안경서에게 시해되었다. * [[안경서]](758 ~ 759): 아버지 안록산을 죽여 반군의 구심점을 와해시켜버렸다. 기어코 사사명에게 시해된다. * [[오대십국시대]] * [[후량]] * [[주전충]](907 ~ 912)▲: 기껏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했건만 주색은 기본이고 자식들과의 갈등도 심해 아들들에게 살해당한다. 그나마 이존욱과는 달리 백성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 [[후당]] * [[이존욱]](923 ~ 926): 초반에는 주전충을 관광보낸 뒤 후량을 멸망시키고 주변 번진을 전부 쓸어버림으로써 후당을 개창하고 심지어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도 격퇴하는 등 명군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안정기에 접어들자 해이해진 것인지 평소 즐기던 음주가무 및 연극으로 소일했고 내정에서도 막장 가도를 달린 끝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 [[후진]] * [[석경당]](936 ~ 942): [[연운 16주]]를 [[거란]]에 들어바친 암군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 [[요나라]] * [[세종(요)|요세종]](947 ~ 951)★▲: 선대 왕들과 달리 외치 확장에 실패하였으며 알코올 중독자라서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기여해줬던 [[야율찰할]]에게 죽임을 당했다. 묘호가 세종인데 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는지 모를 정도로 암군이자 폭군이다. * [[목종(요)|요목종]](951 ~ 969): [[야율찰할]]을 제거한 것과 [[시영]]이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침입해오자 잘 막은 걸 말고는 업적이 전혀 없다. [[세종(요)|요세종]]처럼 알코올 중독자인 데다가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 게으른 임금이라는 수왕이라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 [[흥종(요)|요흥종]](1031 ~ 1055) * [[도종(요)|요도종]](1055 ~ 1101) * [[천조제]](1101 ~ 1125)△ * [[금나라]] * [[희종(금)|금희종]](1135 ~ 1150) * [[해릉양왕]](1150 ~ 1161)★▲: 강간이 일상이던 황제. * [[위소왕(금)|위소왕]](1208 ~ 1213)▲ * [[선종(금)|금선종]](1213 ~ 1224) * [[송나라]] * [[북송]] * [[휘종(송)|송휘종]](1100 ~ 1126)★: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중요한 건 이 사람의 신분은 '''황제'''라는 것이다. 금과 힘을 합쳐 요를 멸망시킨 뒤, 요의 패잔병을 끌어들여 금을 치려 했지만, 이를 듣고 화난 금 태조가 군을 몰아 쳐들어오자, 무책임하게 [[송흠종|아들]]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물러났다. 그리고 결국 자신은 [[정강의 변]]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 [[흠종]](1126 ~ 1127)◎: 기껏 금나라와 화의를 맺어놓고 쥐뿔도 없는 신세에서 그걸 깨버려 [[정강의 변]]의 진짜배기 굴욕을 겪는다.[* 휘종이 참사를 열었지만 흠종이 잘 수습했다면 송나라는 요나라 시절보다도 더 기어야 하지만 화북일대는 보존할 수 있었겠지만 흠종의 실책 때문에 정강의 변이란 대참사가 터졌다. 당장에 이름의 어원이 된 '정강'은 그의 재위기에 쓰인 연호다.] * [[남송]] * [[이종(송)|송이종]](1224 ~ 1264) : 정신상태가 동양판 [[카를로스 2세]]라 볼 만한 송도종을 사랑하는 동생 영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후계자를 책봉시켰다. * [[도종(송)|송도종]](1264 ~ 1274)◆ * [[명나라]] * [[성화제]](1464 ~ 1487): 초기에는 [[대인배]]의 면모도 보여주고 혼란도 수습하는 등 긍정적인 행보를 걸었으나, 말년에 방술에 빠지고 만귀비를 비호하는 등 실정을 많이 저질렀다. 자세한 내용은 [[성화제|해당 문서]]로. * [[명 4대 암군]] * [[정덕제]](1505 ~ 1521)◎: 혼자놀기의 진수. 그러나 이 양반은 국정운영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재위기간 내내 놀기만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평가가 갈리며, 심지어는 [[명나라]]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밑의 3명의 황제와는 격을 달리하는 모습이 많았다. * [[가정제]](1521 ~ 1567): 명나라의 명대신 [[해서(명나라)|해서]]가 이 양반 앞에서 대놓고 연호 '가정'의 의미를 다르게 불러서[* 원래 의미는 도타울 가(嘉), 아름다울 정(靖)인데, [[동음이의어|같은 발음의 다른 의미]]로 집 가(家), 깨끗할 정(淨)이라고 바꿔 불렀다. '집이 깨끗하다' 라는 의미인데, 청소를 해서 깔끔한 게 아니라 '''가난해서 집안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다.] 깠으니 말 다했다. * [[만력제]](1572 ~ 1620)◇: '''중국사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을 정도의 희대의 암군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은 만력제가 '''30여 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서라고''' 후대의 역사서인 명사에서도 언급하기도 한다. 중국사 최초로 '''파업을 한 황제'''다. 자국이 우선인데도 조선에 병력과 구휼미를 무리하게 보내 고려천자라는 멸칭을 얻은 일아 파업을 시작한 만력제가 유일하게 정무를 펼친 일이다.[* 조선이 망하게 두었으면 본토가 전란에 휩싸일 것이 뻔했으므로 그의 판단이 옳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본국은 전혀 돌보지 않아서 다 말아먹은 것이다.] 자식을 차별하여 후계자인 [[태창제]]와 [[천계제]]의 권력이 불안정해진 결과를 낳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우울장애]]가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그의 황릉과 유골을 작살내는 바람에 자세한 건 알 수 없게 되었다. * [[천계제]](1620 ~ 1627)◎◆ : 마에스트로. 동생인 [[숭정제]]는 실책은 있었을지언정 망국이 확실한 명을 구하려고 고군분투 했지만 자신은 정무에 무관심하고 목공에만 몰두했으며, 옛 금나라 황릉터를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후금이 빡치는 실책을 만들었다. 다만 천계제는 할아버지인 만력제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사연이 있다. [[천계제|해당 문서]]로. * [[숭정제]](1611 ~ 1644) : 형인 천계제에 비하면 책임감이 있고 열심히 했지만 성격적인 결함이 심했고 정말 무능했다. 이러다보니 각종 실책을 저질러 나라를 망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되어서 암군일수밖에 없다. 특히 숭정제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으나 조금이라도 좋은 판단력을 가졌으면 잘할수도 있었는데 본인의 아집과 실책으로 말아먹었으니 암군이라고 비난받을수밖에 없다. * [[청나라]] * [[건륭제]](1735 ~ 1796)★: 과거에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자 중국 최후의 명군[* 현재는 후술할 내용대로 건륭제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면서 아버지인 옹정제가 실질적인 중국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족]] 왕조에 국한하면 명나라의 [[홍치제]]가 마지막 [[명군]]이다.]으로 꼽혔으나,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단지 선대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을 뿐인 암군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다. 무엇보다 말년은 척 암군. 추가로 [[백련교도의 난]]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도 건륭제다. * [[도광제]](1820 ~ 1850): 검소하고 청렴했으며 아편 척결에 앞장섰지만 그 외에는 무능했다. * [[함풍제]](1850 ~ 1861): 만장일치로 문종이라는 묘호가 아까운 청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함풍제 사후에 [[양무운동|동치중흥]]이 없었다면 청나라의 멸망은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 [[서태후]](1861 ~ 1908) * ~~[[선통제]]~~(1908 ~ 1912, 1934 ~ 1945)△◎: 청나라 황제로 있을 때는 너무 어려서 허수아비라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만주국에서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암군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애초에 [[만주국]] 자체가 일본의 괴뢰국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런 의미에서 ◎표기도 추가한다. * [[태평천국]] * [[홍수전]](1851 ~ 1864): 남중국의 중심 도시인 [[난징]]을 틀어쥐고 한 때 베이징 근처까지 원정군이 도달하는 등 체제 전복을 성공적으로 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실상은 청나라 내부가 워낙 병들어있어서 잠시 성취할 수 있었던 요행에 불과하였으며 홍수전은 사이비 교주 그 이상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석달개]]나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 같은 걸출한 부하들을 두고도 끊임없는 견제와 숙청으로 자신의 세력을 끊임없이 깎아먹었고, 나라에는 도덕적 광신주의를 강요하면서 자신은 하렘을 건설하는 등 통치자로서 한심한 면모를 보였다. 결국 태평천국은 청나라의 대안 세력이 되지 못한 채, 한때의 대형 반란으로서 종식되고 만다. 홍수전에게 [[쑨원]]만큼의 역량이 있었다면 한족 국가 재건은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 * [[위안스카이]](1915 ~ 1916)△: 만약 그가 [[홍헌제제|친위쿠데타]]로 황제가 된 일과 별개로 [[조구 1세]]처럼 훌륭한 업적[* 이 때문에 알바니아에서는 민주화 이후 왕정복고 국민투표도 있었고 2013년 당시에는 왕정복고 찬성 여론이 64%나 되었다.]을 남겼다면, [[한족]] 최후의 명군이라는 평가는 명나라의 [[홍치제]]가 아니라 위안스카이 본인이나 그 후손들 중 1명이 받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위안스카이는 이미 황제가 될 때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혀서 명군이 되고 싶어도 못 되었을 것이나 그가 황제가 되기 전의 행보를 보면 설사 순조롭게 황제가 되었더라도 명군이 될 순 없었을 것이다. ~~황제를 배신하고 제국을 배신하고 공화국을 배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