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대전

덤프버전 :


비수대전
淝水之戰

시기
383년 11월
장소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화이난화이허 강(淮河) 지류
원인
부견의 천하통일을 위한 남정(南征).
교전국
전진(秦)
동진(晉)
군주
부견
사마요
지휘관
부견
부융†
주서
장천석
주융
장자
양성†
사석
사현
사염
환이
유뢰지
대희
도은
단현
병력
약 1,000,000 명
약 180,000+@[1]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동진의 대승, 전진의 분열.
영향
오호십육국시대의 존속과 남북조시대의 시작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말
5. 서구 사학자들의 병력수 회의론
6. 영향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파일:Battle of Fei River.jpg

"하늘이 을 버렸도다."

(蓋天棄秦也)

-

자치통감》 106권 <진기>(晉紀) 28편, 호삼성(胡三省)의 주해 中.

오호십육국시대 동진전진이 비수(淝水)에서 맞붙은 전투로,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동진이 기적같은 승리를 거머쥔 전투이다. 전진이 승리했다면 중국의 분열기가 빠르게 끝날 수도 있었으나, 이 패배의 여파로 전진이 멸망하게 되고 강북은 다시금 혼란기로 빠져들었으며, 동진 역시 이 승리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내분 끝에 멸망하는 등 5호16국시대의 혼란상이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덧붙여 전투가 벌어졌던 비수(淝水)[2]는 삼국시대 오나라위나라수차례 맞붙었던 합비 일대이다.


2. 배경[편집]


파일:전진-동진.png
전진(분홍색)의 최대 영역(376)
전진황제였던 부견(337~385)은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킨 수문제 양견 이전 천하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으로, 자신은 티베트계 저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차별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 명재상 왕맹을 기용해 성공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화북과 서역을 모조리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북조를 모두 정리했다. 게다가 동진이 점령했던 회하, 장강 일대, 사천 지방[3]도 이미 점령한 상황이어서 이제 남아있는 거라곤 강남의 동진 하나뿐이었다.

부견은 중원 재통일을 위해 남아도는 국력을 총동원해서 대군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부하도, 아들도, 동생도, 아내도, 어머니도, 주요 신하들도, 심지어 부견이 존경하던 스님 도안도 다 반대했다. 바로 그 왕맹도 죽으면서

"우리 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되어 있으니 괜히 집적대지 말고 모용선비족 출신으로 계속 폐하께 아첨이나 하는 모용수강족요장부터 신경쓰시고 기회되면 제거해버리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려 도안이 동진과의 전쟁을 반대하자 부견이 한 말이 있다.

"이 원정은 영토 확장과 인구 탈취의 목적이 아니다. (중략) 영가의 난 이래, 강남에 떠돌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여 인재를 등용하기 위함이며, 무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이 대화에서 부견이 이상적인 통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존재 기간 내내 황제가 귀족들 눈치나 보며 한 순간도 막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동진의 상황을 생각하면[4] 많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전진에 남아 있는 한족들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걸 더 싫어했다는 의미로 생각하자. 사실 좀 냉정히 생각해보면 황제들만 정상이 아니었던 편인 거지 부견의 통일전에 화북에 공세적인 북벌 정책을 펴서 화북왕조들을 당황하게 한 환온의 사례도 있고, 후대에 북벌로 하북을 빼고는 거의 평정한 유유의 사례도 보면 툭하면 분열되고 정치적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오호 왕조들에 비해 동진의 역량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급격한 통일 작업 덕분에 전진 내부에 있는 이민족들이 완전히 동화된 상태도 아니어서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더하자면 동진이 막장스럽게 굴러가기는 했을지언정 한족 왕조의 정통성 우위라는 건 당시 생각보다 꽤나 컸다. 당장 저 위에 나오는 강족의 영수였던 요장의 아버지 요익중이 자녀들에게 자주 한 말이

"자고 이래로 융적이 중원의 주인이 된 적이 없으니 너네는 진에 귀부하고 딴 맘 먹지 말아라."

였다. 뭐 당장 부견의 할아버지 부홍후조랑 틀어지고 나서 바로 동진으로 귀부해 버린 일도 있었으니.... 왕맹이 동진을 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나 전진의 조정, 그리고 부견 휘하 측근들이 반대한 것도 동진의 정통성에 대한 인식들의 연장선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부견은 왕맹이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은 왕맹의 유언을 잘 지켰다. 하지만 부견은 결국 최악의 패배를 낳고 말 비수대전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는 부견이라는 인물 자체가 순수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화북 지역의 통일을 이룬 다음 남쪽까지 아우르는 걸 꿈꾼 것은 스스로를 선대의 진시황이나 한고제처럼 '통일중화제국의 황제'라는 연장선상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저족의 리더가 아니라 한족과 이민족을 아우르는 중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한족과 이민족 가릴 것 없이 인재를 기용하고, 한족의 통치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내부 통일체제 구축이라는 선결과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진을 강행했던 것이다.


3. 전개[편집]


부견이 왕맹 사후 7년째 되던 해, 갑자기 전쟁을 하려 들자 비서감 주융이 찬성했다. 상서좌복야 권익, 태자좌위솔 석월, 양평공 부융, 황태자 부굉, 승려 도안, 장부인, 중산공 부선 등 주위에서 죄다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도 부견은 뭐에 씌였는지 주변에 떼를 쓰더니 위에 언급한 관군장군 겸 하남윤 모용수가 "그럼 하죠."라고 맞장구 좀 쳐주자마자 맹장 장자가 이끄는 선봉 250,000명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까지 모두 870,000명, 여기에 기타 병력까지 합쳐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구성해 동진 침략을 감행했다.[5]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도 100만 대군이라는 묘사 자체는 많이 등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과장이 많이 섞여 들어갔거나 단순히 많은 수의 군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100만 대군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비수대전에 동원된 전진의 군사는 과장이 아닌 병력 편제 자체가 100만이라는 숫자를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 인류사에서 비수대전의 전진군과 수양제고구려 원정 당시 수나라군을[7] 빼면 이렇게 보니 둘 다 끝이 안 좋았다 그로부터 1,000년이 넘어 제1차 세계 대전 때가 되어서야 100만대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실로 놀라운 수치이다.[8][9]

이렇게 된 이유는 부견이 자기 생전에 중국 통일을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통일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남은 국가는 동진뿐인지라 조금만 더 하면 목표 달성이기는 했다. 물론 자기 발 밑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였다.[10] 아마 자기가 덕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감복했으므로 끝이라 보고, 난세에는 조금만 틈을 보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무시한 모양이다.[11] 실제로 부견이 전사한 후에도 일족이 계속 부견의 의지를 받들어 저항했으며, 나중에 배반하는 모용수나 요장 같은 이들도 양심에 찔렸는지 패전 후에도 즉시 부견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왕맹의 유언을 7년 동안 잘 지켜놓고 갑자기 이를 어겨가며 침공을 강행한 것도, 7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천하통일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을 결정하고 나서 부견 본인은 수양(수춘)쪽으로 진격했고, 모용수는 한수를 타고 형주쪽을, 요장은 장강을 타고 형주를 공격했다. 이것은 동진의 수도 건강이 있는 강동과 동진의 중심지이던 형주 일대 중 하나라도 뚫리면 그대로 동진을 멸망시킬 수 있는 포진이었다. 당장 비수대전이 있기 백년전 오멸망 당시에도 이렇게 오나라가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망했고 2백년 후 남진이 이렇게 망하였으니 동진이 당대 최고의 위기 상황은 맞았던 것이다.

부견이 직접 공격한 수양(수춘)이 함락되고, 평로장군 서원희 등이 사로잡혔다. 수양성을 구원하러 온 동진군의 호빈은 회수 서쪽으로 물러나 협석을 지켰지만 이내 포위당해 전진군은 승승장구했다. 한편 북쪽에서 부견이 질량 낙하급 인해전술을 시전하니 동진에서도 막긴 해야겠는데, 동진은 이미 문벌귀족들간 개싸움으로 국력이 막장으로 치달아있었다. 그래도 일단 형주쪽을 공격하던 모용수를 막기 위해서 병력을 동원하고 수도인 건업이 있었던 강동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을 긁어모아보니 80,000명 가량이었다.

절대 우세인 가운데 전진은 대국의 아량을 보인답시고 항복한 한족 출신에 양양태수였던 주서를 동진군에 보내 항복을 권고했는데, 항복은 했을지언정 마음은 동진에 가있었던 그는 바로 전진군의 전략을 몽땅 누설해버렸고, 선봉을 꺾어서 전진군의 사기를 꺾어버리라고 조언해주었다.

동진군은 그걸 기반으로 필승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실로 왕맹이 우려한 그대로였다. 게다가 80,000명은 말이 80,000명이지 수도권 방위를 위해서 동원한거라 상당히 정예병이었다.

일례로 광릉상 유뢰지가 이끌던 5,000명의 동진 북부군이 낙간에서, 전진군 장수 양성[12]과 맞붙었는데 양성이 크게 패배해서 양성을 포함한 15,000명이 죽고 전진의 익양태수 왕영이 사로잡혔다. 그걸 들은 부견과 부융도

"동진의 군사는 약하다더니 누가 그런 말을 했나?"

라고 두려워할 정도였다.(낙간 전투)

그럼에도 부견은 천하통일이라는 욕심도 있었고, 이미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던 걸 뿌리치고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100만이라는 군사를 끌고 나왔던 터라 정치적인 이유로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결국 부견은 여전히 80,000명에 비하면 훨씬 많던 전진군의 수와 강남 왕조에 비하면 언제나 정예였던 군대를 믿고 결전을 벌여서 이기겠다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4. 결말[편집]


수양성(수춘)은 후한 말에 원술이 여러 지역의 군웅들에게 몰매를 맞고 파멸했듯이, 강동 등 그 일대를 전부 장악하고 있지 않으면 수비가 심하게 힘든 성이었다.

결국 부견이 직접 수양성 밖에 나와서 비수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최종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부견은 군대를 강 일대에 틈을 안 두고 배치시켜서 동진군이 비수를 못 건너게 했다.

이에 동진군은 군대를 잠깐 물려주면 우리가 그쪽으로 진군할테니 한 판 제대로 싸워보자고 제안을 했다. 공격한 측이 수도 많은데 계속 지구전으로 나가는 것은 보급 문제나 사기 문제에 있어서 좋은 일은 아니었고, 애초에 한판 승부로 가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부견은 동진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반쯤 건너왔을 때 철기대를 돌격시켜서 동진군을 격퇴하겠다는 전통적인 전술을 사용할려고 했다.

문제는 부견이 안 그래도 사기가 바닥을 기던 전진의 군사들을 제대로 생각못했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낙간에서 진 것과 수도 더 많은데 기세에서 밀려 공격자가 지구전을 하던 태세였는데, 제대로 된 싸움도 없이 군대를 물려주자 이거 동진이 이긴거 아냐?라는 의심이 생겼다.

거기에 전진군이 동진군과의 결전을 위해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x맨인 주서가 전진군 후미에서

"진군(秦軍)이 패했다!"

라고 외치면서 도망쳤고, 전략적인 목표를 위해 후퇴하던 전진군은 진짜로 패배해서 후퇴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모랄빵이 나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병력이 적었다면 부견이나 다른 장수들이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부견은 너무 많은 병력을 데리고 전장에 왔다. 동진군이 강을 반쯤 건넌 상황에서, 한 줌도 안되는 전진군의 장군들이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많은 병력을 통제해서 진정시키며 동진군과 싸우도록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결국 전진군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동진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해야 했지만 모랄빵이 터진 선봉대가 동진이 선봉으로 앞세운 정예 병력을 제대로 못막고, 역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전진군은 처음에는 주서의 거짓말로 인해 전투에서 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동진군이 전진군을 밀어내면서 진짜로 패배하기 시작했고, 강을 다 건넌 동진군의 기병들이 우왕좌왕하던 전진군을 공격해왔다. 결국 전진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비수에서 부견이 깨지는 동안, 모용수는 형주에서 막혀 못오고 있었고, 부견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퇴했다.

파촉에서 시작해 장강을 타고 형주를 공략하기로 했던 요장은 비수대전이 끝날 때까지, 형주로 못오고 있다가 부견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가서 배신해버렸다.

결국 전진이 각지에서 끌어모은 병력들은 거의 전부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전진이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군대는 모용수가 수습한 대략 30,000명 정도라는 참담한 성과를 내면서 비수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이 갑자기 발악하는 개구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튼 꼴[* 이때 머리를 튼 뱀이 몸통을 먹은 것처럼 그려놨다. 그 아래에는 (비유가 이상하지만) "'여하간 이랬대요.라 써 놨다.]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몹시 절묘한 비유이다. 여기에 비수대전에서의 패배 하나로 나라 자체가 막장 테크를 탄 걸 감안하면 이건 머리를 틀었다가 너무 심하게 틀어서 목이 꺾여 죽은 꼴이었다.


5. 서구 사학자들의 병력수 회의론[편집]


비수대전에 참여한 전진군의 병력수는 논란이 있다. 이는 《진서》라는 사료 하나에만 의존하고 있고, 부견이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했다고 쳐도 그걸 세 방향으로 나누어서 진공한만큼 비수에 있었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료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2005년에 타계한 Michael C. Rogers이다. 《진서》는 기본적으로 당태종 이세민 시기에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Rogers는 비수대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당시 편찬을 담당한 당나라 관리들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말리기 위해 부견의 군세와 그 패전의 비참함을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A. 그라프는 Rogers의 주장이 너무 나갔다고 보고, <부견 재기>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부견의 패전이 거대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6. 영향[편집]


전진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이 한 방으로 멸망했다. 닥닥 긁어모아 보낸 병력을 일시에 깡그리 말아먹었으니[13] 힘의 공백이 생긴 건 당연했고, 복속되었던 기존의 이민족 세력들이 대거 들고 일어나 기껏 통일되었던 전진의 광활한 영토를 갈갈이 찢어놓기 시작했다. 차라리 동진을 공격할 때 소수 병력만 보내 패배했다면 반란이 일어나도 막을 힘이 있었겠지만, 이때의 전진은 그럴 힘이 전혀 없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Map_of_Sixteen_Kingdoms_6.png
비수대전 이후 중국의 형세[14]
앞서 부견에게 전쟁하자고 홀로 부추겼던 선비 모용부모용수후연(後燕)을 건국했다. 부견은 자신이 멋지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거기에 왕맹이 조심하라고 그리도 충고하던 신하인 강족의 수령 요장은 독립해서 후진(後秦)을 세웠고, 역시 신하이던 선비 모용부의 모용홍도 덩달아 독립하여 서연을 세워서 힘빠진 전진을 틈만 나면 쳐들어왔다. 또 일시적으로 전진에게 복속되었다가 군사를 준비하던 선비 걸복부에서는 전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여러 부족을 협박해서 병합해 100,000여 명에 이르는 무리를 이루어 농서 일대를 장악하고 서진을 건국했다. 게다가 남쪽에선 동진이 비수대전의 대승을 틈타 사천성을 쳐들어감과 동시에 화남 일대에선 황하까지 도달해 전진 영토의 절반 가량을 수복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을 넘어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부견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려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이들을 제압할 힘이라곤 없었고, 특히 서연이 자리잡은 화음이 수도 장안의 코앞이었던 관계로 본진을 수비할 병력마저 모자라 대다수의 지방은 포기하고 장안으로 집결시키기에 급급한 상태였다. 결국 전진은 비수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불과 1년 만에 장안 정도를 빼면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국으로 전락해버렸다.

385년 서연(西燕)은 끝내 장안까지 도달했고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부견은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전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부견은 장안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은 옥새를 요구했으나 부견은 요장을 마구 꾸짖으며 거절했고, 요장은 그를 신평의 한 절에 감금했다가 후에 교살했다. 그리고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뭔가 찬양과 비하를 섞은 듯하다.

부견의 핏줄은 대부분 도륙났지만 그나마 부견의 서자인 부비가 뒤를 이어 전진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그도 1년 만에 후진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며 일족인 부등, 부등의 아들 부숭이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394년 부숭이 걸복부의 서진군에게 잡혀 죽으면서 전진은 아예 멸망했다.

당시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은 승전보가 올 무렵 100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열종 효무제 사마요[15]가 보낸 사신이 전황은 어떤지 묻자 역시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한참 바둑을 두고 있다가, 승전 보고서가 도착하자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한쪽으로 치우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사신이 보고서에 뭐라고 써있었냐 묻자 담담하게

"우리 애송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구려."

라고만 말했다.[16] 그래도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해서 바둑돌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그만 원치 않는 자리에 잘못 두었는데, 이를 본 사신이

"나쁜 수로군요."

라고 지적하자 사안은

"이 정도에 동요하다니 늙어서 주책이군요."

라며 허허 웃었다.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야 막사에서 기뻐하며 날뛰었고, 문턱에 나막신이 부딪혀 굽이 박살나는데도 모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동진은 군사를 보내 전진을 공격했다. 384년에 응양장군 유뢰지가 환성, 상용태수 곽보가 위흥, 상용, 신성 등 세 군을 함락시켰다. 또한 양전기가 성고를 점령하고 전진의 양주자사 반맹을 격파했다. 경릉태수 조통이 양양을 공격해 전진의 형주자사 도귀를 달아나게 했고, 전진의 낙주자사 장오호는 풍양을 점령한 후 동진에 투항했으며, 사현 및 환석건과 함께 북벌을 단행해 전진의 서주자사 조천을 팽성에서 쫓아내고 점령했다.

9월에는 사현이 팽성의 내사 유뢰지를 시켜 전진의 연주자사 장숭을 공격해 견성을 점령하고 하남의 성보들을 모두 귀순시켰으며, 음릉태수 고소가 전진의 청주자사 부랑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기세가 오른 동진은 전진을 공격해 연주, 청주, 사주, 예주 등을 평정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수적인 열세를 딛고 비수대전에서 멋지게 승리한 동진은 더욱 마음 놓고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했다. 효무제 사마요가 후궁한테

"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내일부턴 탱탱한 애들 끼고 잘란다."

라고 농담했다가 열받은 그 후궁이 자던 황제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을 정도였다. 결국 동진은 비수대전의 승리의 주역이던 북부군의 쿠데타로 나라의 기반이 무너졌고, 북부군 사령관 유뢰지(劉牢之)의 부하였던 유유(劉裕)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멈출 수 있었던 혼란스러운 난세는 이후로도 206년 동안 계속되었고, 나중에 수나라 고조 문제 양견이 남북조를 통일한 589년에서야 끝나나 싶더니 이 항목과 비슷한 살수 전투를 저지르고 다시 혼란기인 수당교체기가 왔다가 당나라가 들어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7. 같이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17:28:33에 나무위키 비수대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형주를 지키던 거기장군 환충의 서부군 10만에 정로장군 사석이 이끌던 8만, 그리고 북부군까지 포함[2] 본래 '水' 자는 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대어의 '강'의 의미로도 쓰였다. 우리가 쓰는 '강'(江)이라는 한자는 원래 장강만을 뜻하는 고유명사였던 것이 의미 확장을 거친 것이다. 역시 강물을 뜻하는 '하'(河) 역시 본래는 황허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며, 보편적인 의미의 강물은 다 '수'(水)라고 불렀다. 한국에도 과거에 강의 명칭을 이렇게 썼다. 패수, 살수, 한수 등이 그 예이다.[3] 동진이 성한을 멸망시킨 지 수십 년 만에 북조에 빼앗겼다.[4] 서진과 동진 전부 합쳐도 제대로 된 황제가 명제, 효무제 잘 쳐줘도 무제, 회제, 성제. 이게 끝이다. 성제와 목제는 능력이 있었으나 요절(게다가 목제는 부검 결과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했고, 강제, 애제는 무능했으며, 폐제와 공제는 능력 자체는 있었으나.....[5] 더 놀라운 것은 동시에 서역으로도 100,000명의 원정군을 보냈다![6] 물론 이런 장부상 병력들은 정확하진 않다. 의외로 군대 규모가 큰 경우, 장부상 병력을 다 채우지 못한 사례가 많다. 몽골 제국도 리즈 시절 때 장부상으로는 대략 160만 명의 대군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고, 아는 게 좀 있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후한 말기 적벽대전때 오나라에서도 조조가 80만 명의 대병력을 보낼 것이라는 편지를 받고 난 후, 손권이 80만 병력을 어찌 막냐는 발언을 하자 주유가 "그거 뻥튀기고 18만+@임."이라며 50,000명의 병력을 준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당시에도 뻥튀기 논란이 있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때 조조가 언급한 80만이라는 걸 사실이라고 본다고 해도 100만보다 적다. 거기다 하나 더, 적벽대전 당시 동오의 병력도 조조에게 압살당할 차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7]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당시에 대해 《자치통감》은 병사만 113만 명, 수송대는 그 2배라고 기록하고 있다.[8] 다만 수나라 이후 당나라는 효율적으로 군사를 편제하고 통솔하기 위해 가용 규모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즉 무식하게 머리수로 닥돌하는 이전 방식과 다르게 오히려 병사의 수를 줄이고 정예병 양성에 노력을 기울인 방식 덕분에 당나라는 전진과 수나라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보유하고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후대의 통일왕조인 원, 명, 청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중원의 송나라 역시 전시에 가용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 100만 명이 넘었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복무중인 상비군만 50만 명이 넘었으나 송나라 조정의 성향 때문에 수비 치중 및 공격시에는 앞서 당나라처럼 소규모 정예부대를 차출하여 보냈다.[9] 다만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100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숫자 자체가 오히려 전진의 패배 원인 중 일부라고 볼 여지도 있다. 비수대전의 패배 원인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랄빵 전염으로 인한 전군 붕괴'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편제상으로 100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했다는 것은 곧 전쟁 경험이 없는 백성들을 대규모로 징병했다는 뜻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투 경험이 없는 징집병들은 쉽게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며 모랄빵에 대단히 취약하다. 차라리 20~30만이라도 비교적 정예병으로 편성되었다면 동진에 대한 전력 우위는 유지하면서도 일시적인 혼란이 곧바로 전군 붕괴로 이어지는 참사는 피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10]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서 보듯이 현대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원래 사람 심리가 한 번 좋은 것만 보기 시작하면 적신호가 얼마든지 들어와도 다 무시하거나 반박하게 되어 있으니[11] 다만 비수대전 직전 부견의 통치력은 안정적인 상태로 국내에 특별히 활동적인 저항세력이 없었고, 대규모 병력 동원도 무리없이 가능했음을 생각해 볼 때 만약 동진 원정에 성공했다면 국내의 불안정 문제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쉽게 수습되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대규모 대외원정의 성공은 황제(부견)의 권위와 위상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동진 원정에서 부견의 실수는 '유해무득의 멍청한 짓을 했다'기 보다는 '이기면 크게 따지만 졌을 때 안정판이 없는 도박판에서 성급히 올인을 외쳤다'가 져서 싹 날린 것에 더 가깝다. 뭐 올인을 외치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본인이야 자기가 절대 지지 않을 판이라고 생각했겠지만.[12] 수양쪽에 있었던 부견과는 별개로 강동을 공격하고 있었다.[13] 물론 100만 대군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은 아니고, 대다수는 살아서 전진 땅으로 도망쳤지만, 어차피 군사력이란 건 징집하고 편성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14] 파란색은 선비 걸복부의 서진, 분홍색은 저족 여씨의 후량, 후량 남쪽의 무색인 곳은 선비 모용부토욕혼, 녹색은 강족 요씨의 후진, 후진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서연, 서연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후연, 후연 북쪽은 선비 탁발부북위, 북위 북쪽은 튀르크계 고차(퇼레스), 남쪽의 노란색은 한족 사마씨의 동진이다.[15] 동진의 제13대 황제[16] 당시 동진군 총사령관이었던 사현은 사안의 조카였고 그 밖에도 사안의 동생 및 아들 등이 참전해서 이들을 '우리 애송이들'이라 부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