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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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Louis-Napoléon Bonaparte


프랑스 제2제국 초대 황제
나폴레옹 3세
Napoléon III


파일:Franz_Xaver_Winterhalter_Napoleon_III.jpg

출생
1808년 4월 20일
프랑스 제국 파리
사망
1873년 1월 9일 (향년 64세)
대영제국 켄트 치슬허스트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848년 12월 20일 ~ 1852년 12월 2일
재위기간
프랑스인의 황제
1852년 12월 2일 ~ 1870년 9월 4일
서명
파일:나폴레옹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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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보나파르트 가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
어머니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배우자
외제니 드 몽티조 (1853년 결혼)
자녀
루이나폴레옹
그 외 사생아들
신체
160cm[1]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망명과 반란
2.3. 프랑스 정계 진출
2.4. 프랑스 대통령
2.5. 프랑스 황제
2.5.1. 뛰어난 내치
2.5.2. 제국주의적 외치
2.6. 보불전쟁과 몰락
3. 평가
3.1. 인간적인 매력
3.2. 내치
3.3. 외치
4. 출생의 비밀?
6. 여담
7. 매체에서



1. 개요[편집]


L'empire, c'est la paix.

제국은 곧 평화다.

1852년 보르도 연설[1]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2]이자 마지막 황제라는 매우 아이러니한 타이틀의 소유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이다.

본명은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황제가 되기 이전에 그의 이름을 줄여서 부를 때는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Napoléon Bonaparte)라 칭했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1808년에 태어난 아들이다. 즉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피를 간접적으로나마 모두 물려받은 것이다. 오르탕스가 바람 피워 낳은 사생아라는 주장도 있으나 증거 부족으로 공인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의혹에 대해서는 아래 출생의 비밀 항목을 참조.

루이 보나파르트는 아내인 오르탕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오르탕스가 남편과 별거하게 된 후 애인이던 플라오 백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샤를 드모르니(Charles de Morny)인데, 그는 정치가로 활약하며 이부형의 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다.


2.2. 망명과 반란[편집]


7세인 1815년에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 패배로 인해 몰락하면서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인 그도 망명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베른바덴을 거쳐 스위스 투르가우 주 아레넨베르크(Arenenberg)에 정착하였고, 독일어를 쓰는 김나지움에 진학했다.

15세인 1823년에 어머니 오르탕스를 따라 로마로 이주했으며,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교황의 이탈리아 지배에 반대하던 이탈리아인 민족주의 단체 카르보나리에 몸담았다가[3] 오스트리아 제국과 교황의 어그로를 동시에 끌어서 이탈리아에서 1831년에 쫓겨나 스위스로 다시 돌아왔다.

스위스로 돌아온 이후에는 스위스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4], 이후 여러 저서를 저술하여 보나파르트 가문의 제정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명 보나파르트주의의 시작이었다.

한편 1830년에는 보나파르트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부르봉 왕정7월 혁명으로 무너졌고, 루이필리프 1세가 새로운 프랑스 국왕이 되어 7월 왕정이 들어섰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 극단 왕당파와 극단 공화주의자 진영의 사상 간 극한대립이 이어지던 프랑스에서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중도파인 루이필리프 1세 역시 프랑스 국민 모두에게 만족스런 왕은 아니었다. 1835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민중과 군대가 합세하는 봉기를 일으켜 7월 왕정을 뒤집어엎고자 했으나, 호응이 적어 실패했다. 루이필리프 1세는 보나파르트 가문보나파르트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부르봉 왕정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약했고, 이에 따라 루이 나폴레옹도 추방이라는 가벼운 형벌만을 받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어머니 오르탕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위스로 돌아왔다. 오르탕스가 죽은 이후로는 그의 재산을 상속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프랑스 정계에 진출할 야망을 품었다. 1840년에는 프랑스로 밀입국해 볼로뉴에서 1835년과 마찬가지로 민중과 군대가 함께하는 봉기를 선동했으나 역시 호응이 없어 실패. 루이 나폴레옹은 다시 프랑스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이필리프 1세가 사면권을 행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프랑스 북부 앙 요새(Château de Ham)에 수감되었다. 수감 시절 루이 나폴레옹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 사상을 담은 책을 저술하였다.

1846년 피렌체에 있던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가석방을 요청했으나 루이필리프 1세는 이를 거절했고, 이에 그는 석공으로 위장하여 탈옥한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나폴레옹의 카르보나리 참가 경력을 들어 입국을 거절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피렌체 대신 벨기에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갔고,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2.3. 프랑스 정계 진출[편집]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수립되자,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귀국하여 정계에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보나파르트주의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공화주의자들의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그의 귀국에 대해 냉담했다. 일례로 그는 런던에 있는 상태로 1848년 4월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공화파 제헌의회 의원들과 갈등을 빚고 포기했다.

이런 그에게 기회를 준 건, 공화국 임시정부가 6월 노동자 폭동을 강경하게 진압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공화국을 냉대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회로 본 루이 나폴레옹은 9월의 제헌의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계에서 얼간이로 비웃음을 받았는데,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독일어 억양이 묻어나는 프랑스어를 구사한데다가 눌변이라 다른 의원과의 토론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TV와 라디오 방송이나 인터넷이 없어 구전을 돌리거나 신문, 공문을 통해 토론 내용을 전달하던 시대였던 것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헌의회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채택했고, 이에 따라 1848년 12월에 모든 성인 남성이 유권자 자격을 가지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듣보잡 취급받던 그가 호기롭게 대통령에 출마한 것은 6월 노동자 폭동 이후 보수파들이 소유권 보호, 가톨릭 윤리와 가족을 모토로 한 "안정당"(Parti de l'Ordre)을 창당하여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보나파르트주의의 계승자, 프랑스의 영광 재현을 내걸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보통선거에서 7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다. 이는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장마리 르펜을 상대로 82%로 압승하기 전까지 역대 최고 득표율로 남아있었다.

그의 득표 가운데 3분의 2 가량은 보수 세력의 텃밭이었던 소농들에게서 나왔으며, 2월 혁명 당시 사민주의 이념에 기반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창하였다가 부르주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한 노동자들 역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그에게 몰표를 던져주었다.


2.4. 프랑스 대통령[편집]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에게는 왕자 대통령(Prince-président)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국민들로부터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공화파 위주의 국민의회에서는 냉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그의 정적들 대부분은 그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만 의지하는 바보 정도로 생각했기에 갈수록 군주처럼 변하는 그의 언행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 임기 초기 루이 나폴레옹은 그를 지지해준 안정당의 오딜롱 바로(Odilon Barrot)를 총리로 임명하고 안정당 위주의 내각을 구성했으며, 정국은 총리 위주로 돌아갔고 루이 나폴레옹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1849년에 1848년 혁명의 여파로 교황 비오 9세가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봉기에 밀려 로마에서 쫓겨나자, 안정당(Parti de l'Ordre)의 요구로 그는 프랑스군을 파견해 봉기를 진압하고 교황을 복귀시켰다. 좌파는 이 일을 강경하게 비난하여 폭동으로 루이 나폴레옹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국민의회의 좌파 의원 30명이 제명되는 숙청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작 교황을 복귀시켜놓고는 안정당의 요구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에 세속 정부가 들어설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안정당과도 대립하기 시작했다. 안정당 소속인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 오딜롱 바로(Odilon Barrot)를 비롯한 내각 구성원 다수는 루이 나폴레옹에 반발해 총리직을 사임했고, 루이 나폴레옹은 총리 없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국민의회로부터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게 할 수 있었던 건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한 이후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의회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는데, 이는 중하류층을 국민의회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통과될 리 없는 선거권 회복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는 방식으로 중하류층의 지지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헤게모니를 쥐려면 다시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당시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5] 헌법 개정을 통한 연임을 시도했다. 그러나 의원의 3/4를 확보하지 못해 무산되었다.

1851년 12월 2일, 그는 삼촌처럼 군대를 동원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1851년 프랑스 쿠데타) 이 친위 쿠데타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전일에 이루어지도록 일부러 계획했다고 한다. 쿠데타 방식은 대통령령을 통해 선거권을 예전 수준으로 회복함과 동시에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6] 공화파의 중심지인 파리에 군사를 두고 공화파 정치인들을 체포해 공화파의 저항을 틀어막는 방식이었다. 그의 쿠데타는 친위 쿠데타의 전형이 된다. 그리고 12월 20일에 루이 나폴레옹은 쿠데타 인정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열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어 12월 21일과 22일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압도적인 찬성을 얻었다. 헌법 개정의 골자는 대통령 임기 10년 연장, 대통령 연임 제한 폐지, 의회에 대해 법안 제출을 담당하는 국참사원(Conseil d'État) 창설, 국민의회를 통과한 법률안을 재심의하는 상원(Sénat)[7] 창설 등인데 국참사원 의원과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므로,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는 끝장났고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그 뒤로는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각종 대통령령과 포고령을 시행하여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의회는 모든 남성 유권자의 선거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었지만 별 권한이 없었고, 그마저도 대통령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지 않는 의원은 반강제적으로 사직을 당해 의회 역시 루이 나폴레옹에 장악되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큰아버지를 따라 황제가 될 생각이었으나,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명목상으로나마 공화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민주주의 공화제 말살, 독재 체제 완성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지는 저항은 없었고, 이에 1852년 10월에 "어떤 사람들은 '제국은 곧 전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제국은 곧 평화다.'라고 말하겠다."고 언급하여 황제가 될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고, 이에 루이 나폴레옹의 꼭두각시인 상원에서 황제 즉위 국민투표를 발의하였다. 국민투표는 1852년 11월 21일과 22일에 치러져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고, 이에 루이 나폴레옹은 12월 2일에 정식으로 제국을 선포하고는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정통성이 그의 아들 샤를 나폴레옹에게 계승되었으나, 샤를이 후사 없이 사망했으므로 자신이 그 정통성을 잇게 되었다고 강조하여 프랑스 황제에 오른 적이 없는 샤를 나폴레옹을 나폴레옹 2세로 추존하고 자신을 나폴레옹 3세로 칭했다.


2.5. 프랑스 황제[편집]


파일:Apotheosis_of_Napoleon_III.jpg
나폴레옹 3세의 신격화[8][9], Guillaume-Alphonse Harang Cabasson, 1854년
그는 19세기 초중반의 프랑스를 관통하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큰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혼란을 진정시키고, 제국주의 시대에 걸맞는 확장 정책을 펼쳤다.


2.5.1. 뛰어난 내치[편집]


그가 집권한 19세기 중반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당장 반세기 전 군주의 목을 자르고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짓밟아 제국을 세웠으며, 이 여파로 인해 군주가 계속 바뀌었다.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1832년으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민생이 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큰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각 세력 간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파리혁명에 동참하기는커녕 무엄하다며 왕당파의 편에 섰던 대부분의 지방 세력들에게 나폴레옹의 이름값은 상상 이상이었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과 왕당파들의 불만은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 잠재워질 지경이었다.

그는 같은 시기 그의 라이벌이었던 비스마르크와 유사하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심을 부추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1851년 공휴일 및 주말 작업 금지 제도, 1852년 공공부조 제도, 1855년 빈곤층 무료 급식 제도 등을 도입하였다. 또한 1860년을 기점으로 그는 그의 제정이 충분히 안정되었음을 느끼고 1864년 결사, 쟁의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1868년 집회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나폴레옹 1세백일천하 당시 약조한 자유 제정(帝政)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제롬 보나파르트가 추진하던 민주적 보나파르티즘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앞선 정책들에 더해 시민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젊을 적 런던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의 런던은 당연히 파리보다 발전된 근대 도시였다. 이에 런던을 동경하여 혼란스럽고 전근대적이던 파리를 런던보다 더 근대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을 파리 지사로 임명하고 1853년 파리 개조 사업(Transformations de Paris)[10]을 실시하였다. 우리가 오늘날 익숙한 파리의 거리의 모습은 대부분 이 시기에 설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도시 전체를 개조하는 대사업을 통해 가도를 넓히고 공공위생의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막강한 황제의 재가 아래 거의 전권을 쥐고 도시를 재설계한 오스만 남작의 설계는 21세기인 지금도 교통을 제외하면 큰 문제나 변화 없이 굴러가는 파리의 모습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거리의 가스등, 에투알 광장, 생오귀스탱 교회 등이 그의 치세에 세워졌다.

그의 치세에 정치의 안정 및 각종 개혁에 더불어 자본주의 역시 발달하였는데, 1865년에는 수표 사용, 1863년 유한책임회사 제도, 1867년 유한회사 제도를 승인하였다. 각종 해운 회사가 설립되고, 대형 백화점[11]을 설립되는 등 다양한 발전 성과를 보였다.

상기한 노동 인권의 성장에 더불어 프랑스 여성 인권 역사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많다. 1861년 여성 최초로 바칼로레아 입학생이 생겼으며, 1866년에는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의약학 대학에 여성 입학생이 생겼다. 인구 500명 이상인 지자체에는 여성 교육을 위한 여학교를 개교할 것을 명령하기도 하였다.[12]

이외에도 근대의 산물인 철도, 전신, 차도, 하수도, 가스등, 근대 항구 등을 설치, 정비하였다. 수치상으로 철도 총연장 13,000km 설치, 차도 설치 총연장 3배 증가, 전신 설치 총연장 40,000km, 하수도 설치 총 거리 340km 등.


2.5.2. 제국주의적 외치[편집]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펴서 베트남 침공, 제2차 아편전쟁, 병인양요,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을 치렀다. 1858년에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무관심한 것 때문에 로마에서 분노한 암살자들의 폭탄 공격을 받았으나 경상으로 목숨을 건진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주범 펠리스 오르시니는 체포된 후 황제에게 감화되었고 나폴레옹 3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신경 쓰게 된다.

1863년 ~ 1864년에는 멕시코에 개입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친(親)프랑스 괴뢰국을 세우려 책동했으나,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이 거세게 항의하자 물러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중동에서는 이집트에 적극 진출하고 남미에서는 안데스 산맥 일대를 통괄하는 친프랑스 국가를 세우려 하는 등의 확장책을 펼쳤으나 대부분의 경우 다른 열강들과의 갈등이나 황제 개인의 허영으로 인해, 대부분의 해외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선전했음에도 결국 실리적인 성과를 크게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의 사르데냐를 지원해 안시샹베리사부아 지역과 니스를 획득했으며[13]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등 어느정도 대외적인 업적도 있다.

외교 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원인이 영국을 적대한 데 있다고 보고 영국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질 수는 없었지만, 아편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에서 그런대로 협조가 가능했고, 이것만으로도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프랑스가 베트남 등으로의 확장을 시도할 때도, 영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강하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확장이 영국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들어 영국은 프랑스 대신 떠오른 육상제국 러시아 제국을 제 1의 경계대상으로 삼고 유라시아 전역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며 견제했고, 결국 프랑스는 과거보다 영국의 견제에서 자유로운 입장이 되었다.

또한 벨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주요 유럽 국가와 자유 무역을 위한 관세 협정을 맺어 무역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조선에도 세력을 뻩으려는 시도를 했다. 1866년의 병인양요가 그의 치세에 벌어졌다. 다만 1846년의 개항 요구는 7월 왕정 시절이라 나폴레옹 3세와는 관계없다.

해군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하고 체계적인 해군 증강계획을 세워 세계 최초의 철갑함과 증기추진 전함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건조 중인 것을 포함하여 전열함 51척[14], 프리깃함 82척[15], 코르벳함 38척[16]을 주력으로 하는 336척까지 도달했고, 이러한 막강한 함대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18세기 이후 다시 한번 영국 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르본 왕조이사벨 2세가 쫓겨나면서 발생한 스페인 국왕 선출 문제에서 노련한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끌려다니는 외교로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거기에 위에서 언급한 멕시코 문제[17], 병환의 악화 등 계속되는 악재로 인해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후반부터 권력을 하나둘 내려놓으면서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를 꾀했다. 보불전쟁 직전 즈음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황제의 손을 떠난 상태였고, 실권은 의회가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라인강 소(小) 라인란트, 자를란트, 팔츠 지방 란다우룩셈부르크[18], 벨기에를 집어삼키려 집적거렸으나 이는 영국을 자극해서 영국의 여론이 친프로이센으로 기울어 프로이센에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삽질이었으며 결정적인 패착으로 꼽힌다. 프랑스 여론이 비스마르크에게 거하게 낚여 1870년에 보불전쟁을 개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으며 이로 인해 완전히 망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전쟁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여론은 프로이센과 전쟁을 해야한다며 들끓었고 나폴레옹 3세조차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민중의 지지로 황제가 된 포퓰리스트였고, 민중의 요구를 무시했다가는 민중들의 불만을 사게되어 폐위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는 순전히 위정자들의 결정에 의해 전쟁이 벌어지는 전근대 국가와 달리 '근대적 민족주의'가 확립된 국가에서는 시민의 여론이 위정자들의 등을 떠밀어 전쟁이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2.6. 보불전쟁과 몰락[편집]


백부 코스프레를 하면서 직접 전선으로 출전했으나 정작 그의 군사적 능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데군데 들리는 포성과 함성 소리, 병사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나머지 보다 못한 측근들이 얼굴에 혈색이 돌게 보이게끔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여러 차례의 삽질 끝에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하며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는데,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프랑스군 진지 내를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다. 그를 수행하던 장교 하나는 포탄에 맞아 죽었고 옆에 있던 군의관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이 인간이 여기에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 내내 어떤 명령도 내린 것이 없다.


결국 1870년 9월 1일 오후 항복하여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에 파리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황제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기에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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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독일의 화가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1818 ~ 1885) 작품,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

독일 카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복위를 꿈꾸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총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가 완전히 몰락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더 이상 제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19] 1871년 3월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권좌를 되찾기 위해 지지자들을 모아 쿠데타를 다시금 계획했지만 1873년 1월 요로결석[20]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프랑스에서 제정 관계자 1만 명 이상이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유해는 당초 망명지인 틸즈허스트의 마을묘지에 묻혔지만,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배려로 햄프셔 북동쪽 판버러(Farnborough)에 있는 성 미카엘 대수도원(St Michael's Abbey)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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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주치의와의 대화가 "스당에서 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내용이었을 정도로 죽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겁쟁이로 매도당하는 걸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가 죽자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그에게 아첨하던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쏴죽인 조르주 당테스 남작이었다.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여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폐위와 몰락 이후 숨어서 살며 20년 넘게 비참하게 살다가 83세인 1895년에 쓸쓸하게 죽었다.


3. 평가[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것도 아니다.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

작가 빅토르 위고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무리의 병정들에 둘러싸여 있던 1804년의 꼬마 하사관 다음에는 한 무리의 부르주아지에게 둘러싸인 1851년의 콧수염쟁이.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

그는 보나파르트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사실상의 창시자로서, 그의 치세는 근대적 독재자의 선례를 만들었다.[21] 최초의 근대적 독재자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큰아버지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수많은 전공과 치적을 이루며 황제로서의 위업을 세웠다면, 나폴레옹 3세는 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하고 국민투표란 정치적 수단을 강요했다. 지식인과 급진 사상가들에게 이는 치욕적인 일이기에[22] 반대하는 소요를 일으켰으나, 나폴레옹 3세에게 손쉽게 진압당했다. 1852년 ~ 1870년 사이 나폴레옹 3세는 큰아버지를 본받아 외치에 신경을 기울여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샤르데냐 왕국을 도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굴복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보이와 니스를 얻었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의 양보를 얻어냈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청나라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 진출해 프랑스의 위력을 외견상으로 보였으며 비록 큰 실패로 끝났지만 멕시코 원정도 시도했다.

국내에서도 시운의 상승을 맛봤는데, 알래스카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결과 프랑스의 경제활동이 자극되어 성장세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번영, 자신감,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을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소규모 자영농과 가톨릭, 기업가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어 세력을 넓혔고, 수도 파리를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 수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파리를 다시금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권위주의와 개인의 매력에 의한 성과였을 뿐, 강력한 체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860년에 프랑스 노동자들은 영국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방법을 배워와 국내 노동운동 활성화를 일으켰고, 이는 기업가들이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지지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1860년대에는 황제의 추문이 폭로되어 인기를 떨어뜨렸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864년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을 부여하고, 1868년 노동조합 조직을 허락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선거에서 반 나폴레옹계 의원들이 진출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도발이 터지자 전쟁을 감행한 나폴레옹 3세는 패배해 폐위되었다.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외교에서는 실패했던 나폴레옹 1세와 정반대로, 나폴레옹 3세는 외교와 정치적인 감각은 괜찮았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끔찍함 그 자체였다.


3.1. 인간적인 매력[편집]


인간적인 매력은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아편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능란했다. 순애녀로 유명한 그 영국빅토리아 여왕이 그를 가리켜 (자신의 남편인) 앨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했을 정도니 인간적인 매력은 확실히 대단했던 모양.

또한 국정 운영 능력은 썩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순수한 정치력, 즉 인기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추측되며, 특히 대중 정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한다.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가 정적으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을때 이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가장 애용한 것은 국민투표였다. 그래서인지 에릭 홉스봄은 저서《자본의 시대》에서 이 사람을 샤를 드골의 선배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 들어와서는 수정주의 계열 역사학자들로부터 추후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하는 민주주의를 견습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가 국가주의자들에게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안전을 약속하고, 왕당파에게는 자신 역시 군주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고 농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하면서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자의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가난뱅이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폴레옹 3세는 다양한 욕망을 가진 집단들에게 (실제로는 그 모든 약속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믿게 만들 수 있었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대중적 호소력을 통해 실체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이로써 현실성 없는 기대와 추상적인 국가적 영광의 이미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을 휩쓴 파시즘적 광풍의 효시로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 시절 정적들이 그를 나폴레옹의 후광에 의존한 광대라고 평가했던 것처럼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즉, 대중에게는 상당히 폭넓은 인기와 지지를 얻었던 데 비해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에게는 평가가 극히 나빴던 것이다. 그의 정치 스타일을 파시즘의 효시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보인 이와 같은 태도는 선동가를 지나치게 경멸하고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다가 근현대사 최대의 참극을 불러온 파시즘에 대한 경멸적이지만 미온적인 대처의 효시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3.2. 내치[편집]


상기한 바와 같이 도시 개발과 각종 인권 정책 추진, 형식적이나마 의회 제도의 발전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집권 초기에는 보나파르티즘을 내걸고 강력한 황권을 동경하였으나 내각제, 의회제를 유지하고 말년에는 각종 자유를 인정하며 의회제를 확대하였다. 그의 황권 아래 통제되는 근대적 민주주의와 의회 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정작 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혹독하게 탄압했고, 1856년에는 요로결석으로 고생하여 정치 공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인간적 매력은 있을지언정 제왕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않은[23] 그의 부족한 리더십으로 인해 측근들이 강력한 황권에 기생하여 막후정치를 하기도 하였다. 1863년 임명된 재상 외젠 루아르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부황제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습은 훗날 파시즘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독재자의 전형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귀스타브 르봉은 이러한 모습들을 바탕으로 군중심리를 출판하기도 했다.


3.3. 외치[편집]


스페인 국왕 선출 문제를 비롯해 멕시코 내전 개입,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불전쟁이라는 대실책으로 인해 외치에선 굉장히 무능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프랑스령 알제리를 발판으로 하여 아프리카에 상당한 규모의 식민지를 구축하였으며[24], 인도 제국 성립에 맞서 베트남라오스, 캄보디아를 차지한 후 코친차이나, 나아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축하는 등 우리가 아는 광대한 프랑스 식민제국은 이 시기에 만들었을 만큼 외치에서도 성과를 거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4. 출생의 비밀?[편집]


한때 나폴레옹 3세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 아니라,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 오르탕스불륜을 해서 낳은 혼외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이미 19세기 당대에도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정적들이 제기해온 뿌리 깊은 의혹이었다. 애초부터 루이오르탕스는 사이가 나빴는데, 오르탕스의 어머니 조제핀의 불안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억지로 정략결혼했기 때문에[25], 이들 부부의 관계는 누가 보더라도 소원했다. 거기에 루이는 사실 동성애자이며 오르탕스도 공공연히 바람을 피운다는 설이 나돌면서 의혹을 부채질했다. 이것이 확대되면서 나폴레옹 3세 혼외자 설로 번진 것이다. 결국 루이-오르탕스 부부는 이로 인해 사이가 더욱 나빠져서 끝내 파경을 맞게 된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혼외자설이 근거 없는 악의적인 비방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루이 보나파르트오르탕스는 자식을 얻기 위한 억지스러운 부부 관계를 이어갔기 때문에, 임신을 위해 둘이 동거한 시기를 각종 기록으로부터 재구성할 수 있다. 둘 사이에는 이미 1802년에 첫째 아들 나폴레옹 루이 샤를 보나파르트(Napoléon Louis Charles Bonaparte), 1804년에 둘째 아들 나폴레옹-루이 보나파르트(Napoléon-Louis Bonaparte)를 낳아 의무(?)를 다한 상태였기에 당초에는 자식을 더 낳을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1807년 5월에 첫째 아들이 크룹(후두기관기관지염)으로 5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만일을 위해 자식을 한 명 더 갖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에 셋째 자식을 갖기 위한 목적으로 1807년 8월부터 임신할 때까지 다시 동거하게 된다.[26] 나폴레옹 3세가 태어난 1808년 4월 20일로부터 역산해보면, 임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둘이 한창 동거 중이던 때가 잘 들어맞는다. 이런 의도적인 동거 시기에까지 무리하여 바람을 피울 가능성은 극히 낮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는 루이 보나파르트오르탕스의 아들임이 확실하다는 이야기이다.[27]

그런데 2010년대 들어 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 혼외자설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프랑스 유전인류학 연구소에 재직하는 제라르 루코트(Gérard Lucotte) 박사가 나폴레옹 1세의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Y-DNA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나폴레옹의 Y염색체 DNA는 하플로그룹 E1b1b1c1(E-M34)에 속한다. 이후 루코트 박사가 후속 작업으로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의 후손들을 분석한 연구가 보강되면서 보나파르트 집안 남자들의 Y염색체 DNA는 하플로그룹 E1b1b에 속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의 유해에서 채취한 머리카락과 기타 혼외자 후손에서 채취한 DNA 분석에 의하면 이들은 다른 하플로그룹 I2a2a에 속한다. 이는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가 적어도 부계 쪽으로는 친족 관계가 아님을 시사한다.

이러한 유전학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19세기 당대에 반대파들이 공격하던 대로 나폴레옹 3세는 오르탕스외도를 통해 낳은 혼외자라는 설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별거 이후 오르탕스와 플라오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게 확실한 샤를 드 모르니[28]와 닮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되고는 한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는 기존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도 만만치 않아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둘째, 나폴레옹 3세가 루이오르탕스의 아들이나, 오히려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이부형제였다는 설명이다. 외도한 사람이 어머니 오르탕스가 아니라 할머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29]라는 이야기이다. 레티치아가 코르시카에 살던 시절에, 코르시카에 주둔하던 프랑스군 장교들과 교분이 깊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적지 않게 떠돌던 풍설이기도 했다. 이 설은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Y염색체 DNA가 다른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되며, 나폴레옹 3세의 출생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연구와도 배치되지 않는다. 또한 이 경우 나폴레옹 3세가 나폴레옹 1세의 조카라는 사실도 유효하다. 나폴레옹 1세와 루이가 모계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첫째 설명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지지를 받고 몇몇 프랑스 현지의 서적언론기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의 DNA 검사가 아직 이뤄지지 못한데다가, 할머니인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의 외도 사실을 확인할 다른 방법도 없어 전반적으로는 흥미로운 가설 정도로 치부되는 상황이다.

셋째, 루코트 박사의 분석을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주로 연구에 활용한 나폴레옹 3세 친족들의 유해 시료가 불완전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관련 문헌에도 나오지만 이 연구에서는 사망 직후 유해에서 채취해서 박물관,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체모, 모발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 본인 및 아들의 유체 시료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상태도 좋지 않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 3세의 하플로그룹 분석 결과는 공인된 학술저널에 실리지도 못했다. 이를 명확하게 확인하려면 루이 보나파르트 및 나폴레옹 3세의 관을 열고 보다 확실한 DNA 시료를 채취해야겠으나, 이를 원하는 정당한 이해관계자나 역사적 필요성이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가지기 힘들다.[30]

나폴레옹 3세의 출생의 비밀은 여전히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입증할 자료도 부족하고, 정밀한 자료를 원하는 관계자도 없는 상황이다. 보나파르트 가문 내외 모두 나폴레옹 3세를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으로 인지했으니, 역사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 아들인 나폴레옹 황태자가 만약 후사를 남겨 대를 이어 보나파르트 가문을 이었으면 훗날에라도 이 문제가 거론되어 친자확인 검사라도 시행할 수 있겠지만, 그가 독신인 채로 자식도 없이 아프리카전쟁터에서 전사해서 가계가 단절됐으니, 논란의 여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손이 잇고 있다.

여담으로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시절에 그의 숙부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그에게 "폐하께서는 나폴레옹 1세 폐하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놀리자, 나폴레옹 3세가 "숙부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 분처럼 친척들에게 시달리고 있는걸요."라고 역관광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5.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보나파르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대통령 취임 당시 40세로,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39세의 나이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프랑스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 보통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키가 작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나폴레옹의 키는 당대 평균키보다 오히려 더 컸고[31], 진짜로 키가 작은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 키가 불과 160cm 였다고 한다. 덕분에 큰아버지인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는 루머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나폴레옹1세의 친아들 나폴레옹 2세는 오히려 키가 아주 커서 약 180cm의 장신[32]이였기에, 나폴레옹 3세가 진짜 보나파르트 혈통이 아니라는 정황 증거가 되면 됐지, 진짜 나폴레옹이 작은 유전자라 보기는 어렵다.
  • 지도자의 인간적인 매력은 곧 지도자의 사생활로 연결되는 것인지, 색욕이 매우 왕성하여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유럽을 전전하던 중에도 각지에 자신의 정부를 두고, 봉기에 실패해 영국으로 망명해 런던에 거주할 때도 해리엇 하워드라고 하는 여배우를 정부로 삼았다. 반대로 아내오스만 제국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33]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34] 진짜 문제는 외도에 대한 보상으로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선 외제니 황후에게 양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외제니 황후가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서 교황청의 편을 들며 프랑스가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들인 노력에 초를 치는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 당대의 인물 여러 명이 이 사람으로 인해 사망했다. 당대의 화가인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나폴레옹 3세가 선전포고를 하면서 발발한 보불전쟁에 최하급 장교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35] 나폴레옹 3세의 강요아닌 강요로, 이미 베니토 후아레스라는 대통령이 존재하고 있던 멕시코황제로 즉위했다. 그렇게 나폴레옹 3세는 꼭두각시로 내세운 막시밀리아노 1세의 이름을 팔아가며 멕시코에서 전횡을 일삼다가, 정작 실컷 이용해먹은 막시밀리아노 1세가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죽을 위기에 몰리자 눈꼽만큼도 도와주지 않아서 결국 그가 총살당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막시밀리아노의 아내 샤를로트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전유럽에 도움을 청했지만, 결국 그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려 남은 평생을 강제로 유폐당한 채로 살아야 했다.
  • 나폴레옹 3세의 언어구사력에 대해서 "독일어 같은 프랑스어, 프랑스어 같은 독일어, 이탈리아어 같은 영어, 영어 같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는 평이 있다. 실제로 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 스위스[36]에 장기간 체류했었던 탓에, 독일어 억양이 짙게 배인 프랑스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다고. 그리고 독일어는 프랑스어 억양이 배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모든 분야에 대해서 알고 있긴 한데 전부 어설프다는 냉소적 해석이 섞인 평가로 볼 수 있다.
  • 프랑스 미디어 사업체인 비방디의 창립자다. 원래는 나폴레옹 3세 때 프랑스령 알제리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는 일을 하는 프랑스 정부 산하의 공기업이었는데, 이 기업이 민영화된 후에 미디어 재벌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 시온 의정서는 원래 나폴레옹 3세를 풍자하는 일종의 꽁트에서 주어만 유대인으로 바꾼 수준이다. 상세는 항목 참조.

7. 매체에서[편집]


대체역사소설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등장하는데, 포로로 잡힌 원 역사와는 다르게 스당에서 친정에 나서고 전사한다. 정확히는 흉갑기병대와 함께 작품 중 고종 이원철의 모범을 본받아 샴페인모르핀을 들이마시고 선두에서 돌격을 감행하다 온 몸에 총을 맞고 전사한다! 이에 짧게는 전선의 모든 병사들이[37], 길게는 모든 프랑스 국민이 황제의 복수에 눈이 뒤집혀 모든 것을 프로이센 타도에 걸게 되어 역사개변을 일으키게 된다. 여담으로 조선이 싸바싸바를 잘해주자 조선의 근대화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준덕에 주인공인 이형이나 독자들에게 고려천자 2세라고 불린다.

《제국의 보나파르트》에서는 자신이 상대적으로 주위에 적을 많이 만들었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된 외젠 보나파르트(주인공)과 일부러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그에게 몰아준다. 원 세계관처럼 보불전쟁을 일으키나 외젠이 준비해 둔 물자들을 바탕으로 진통제를 먹어가며 스당 전투에서 장기전을 펼친 끝에, 적에 의해 사망하면서 이후 파리에서 시가전을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고, 향후 '황제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프로이센과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프랑스 애니메이션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에서는 초반에 주인공의 조상과 함께 폭발사고로 사망한다. 하지만 보불전쟁에서 승리했거나 황태자 외젠 보나파르트에게 제위를 물려줬는지 나폴레옹 3세 사후에도 제국은 유지된 것 같다.
[1] http://dicocitations.lemonde.fr/citations/citation-105257.php[2]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는 '대통령'직이 없었다.[3] 당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을 좋게 보았다. 나폴레옹이 비록 괴뢰국이나마 이탈리아 반도 북부 전역을 한 정치체제 안에 아울러 후일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4] 포병장교로 입대했는데, 이는 큰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포병장교였던 예를 따른 것이다.[5] 연임은 불가능했고 중임은 가능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었으므로, 다시 합법적으로 대통령을 하려면 1852년 임기 만료와 함께 퇴임한 후 1856년 선거에 출마해야 했다.[6] 당시 프랑스 헌법에서는 지금과 달리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이 없어서 불법이었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이를 강행했다.[7] 본래 제2공화국은 국민의회만이 입법권을 갖는 단원제였다.[8] L'Apothéose de Napoléon III[9] 그림 설명을 하자면 나폴레옹 3세가 1852년 황제로 즉위하고, 1855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 제국 내외에 그의 권위를 홍보하기 위해 내걸 용도로 그려진 그림이다. 요약하자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신의 가호와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림은 크게 상, 중, 하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림의 핵심인 중부에는 사자 가죽을 쓴 힘의 상징 헤라클레스와 그리스 투구를 쓴 지혜의 상징 아테나가 이끄는 삼두마차에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의 적백청 삼색기를 들고 서 있다. 그들의 뒤로는 각각 회화, 조각, 건축을 상징하는 세 천사가 따르고,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가 공정을 상징하는 저울과 권위를 상징하는 칼을 들고 관용을 상징하는 사자 위에 앉아있으며 그녀를 보좌하는 두 화신들이 함께한다. 그림 상부에는 나폴레옹 3세의 머리 위로 황권을 상징하는 월계관을 씌워주는 천사가 날아간다. 상부 우측의 두 천사는 나폴레옹 3세의 정당성을 나타내는데, 항아리는 보통선거를, 양피지는 그 정당한 선거를 통해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서 공인되었음을 알린다. 상부의 중앙에는 하이라이트로 나폴레옹 1세가 등장한다. 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그의 위로 지나가며, 천국에서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원수들이 일제히 새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림 하부에는 카두케우스를 든 상업의 신 헤르메스와 뿔을 든 풍요의 여신 아말테아, 낫을 든 농사의 여신 데메테르가 나폴레옹 3세를 향한다. 그들의 옆에는 큐피트가 나폴레옹 3세의 제국문장을 들고 있다. 종합해보면, 총체적으로 나폴레옹 3세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인 회화.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그림의 중앙 상단에 있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를 우러러보는 각도를 만들어내었다.[10] "Travaux haussmanniens"이라고도 한다. 직역하자면 "오스만 토목 공사."[11] 르봉마르셰, 프랭탕[12] 이건 엄밀히 따지면 외제니 황후가 옆에서 건의한 영향이 크다. 치세 초기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많지 않았다.[13] 그 전까진 사보이아 왕조의 영토였다.[14] 그 중 범주함 37척, 스크류함 14척[15] 범주함 40척, 스크류함 23, 외륜함 19척[16] 범주함 18척, 증기함 20척[17]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즉위시킨 뒤 멕시코를 프랑스의 영향권에 두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는 공화국이었고 그 결과 멕시코는 황제와 대통령이 공존하는 국가가 되었다. 결국 막시밀리아노 1세는 멕시코에서 총살당했다. 이때 막시밀리아노 1세의 아내인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가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그저 "그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프랑스 내부에서도 황제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했다. 여담으로 샤를로트 공주는 이후 조국인 벨기에로 돌아갔지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미쳐버렸고, 당시 벨기에의 국왕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레오폴드 2세도 그녀를 냉대했다고 한다.[18] 국내 서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라인란트 전체를 요구했다는 서술이 많은데 요구한건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팔츠 지방 바이에른 왕국령 란다우와, 중립국 룩셈부르크였다. 이는 빈 회의 때 초반 프랑스 국경을 1792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축소시키려 했을 때, 프랑스령으로 남았으나 백일천하로 취급이 더 가혹해져서 1790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수정되어 독일 연방에 할양된 영토로 소(小) 라인란트라고 칭한다. 출처는 세계외교사(김용구)[19] 기존의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던 보수세력들이 양대 왕당파인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로 지지를 옮겼다. 이들 양대 왕당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2공화정처럼 3공화정도 단명하고, 군주점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오를레앙가에 앙심이 있던 앙리 5세가 즉위를 거부함에 따라 계획이 트러졌고, 결국 1876년 총선에서 정권을 상실하고, 공화파가 의회 다수파를 지속적으로 차지함에 따라 공화정이 정착되었다. [20] 요로결석이 심각했는데 비둘기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21] 굽시니스트시사인 만화에서 전두환의 5.17 내란을 루이 나폴레옹식 쿠데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유신정권에 비해) 유화적인 정책과 서울시 건설 사업은 나폴레옹 3세의 내치 정책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22] 대표적으로 빅토르 위고.[23] 그는 젊을적 나폴레옹 1세의 몰락 이후 각종 정치적 활동을 했으나, 그의 활동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당대 프랑스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뒤집어엎으려는 혁명가에 가까웠다.[2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알제리 일대는 사실상 프랑스 본토와 동일하게 여겨졌다.[25] 조제핀은 남편 나폴레옹의 어머니 및 형제자매들과 사이가 나쁜데다가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후로서 입지가 탄탄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동생 루이와 조제핀의 딸 오르탕스를 결혼시켜 태어난 아이를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삼는다면 나폴레옹의 핏줄도 방계로나마 이어지고, 동시에 조제핀의 외손자가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면 조제핀의 위상도 굳건해진다.[26] 후사를 잇는다는 측면에서 이는 결과적으로 적절한 선택이었다. 둘째 나폴레옹-루이도 불과 26세이던 1831년홍역으로 요절하고 만다.[27] 오르탕스에게는 이혼한 후에 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공인된 사생아 샤를 드 모니가 있었으며, 이 경우 오르탕스는 아이를 하급 장교의 성을 따 만든 가짜 호적에 올리고 유급 양부모에게 넘겼지 억지로 루이의 아들로 만들지 않았다.[28] 모르니 공작[29]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어머니[30] 비슷한 케이스로 앨버트 공이랑 바덴의 체칠리에도 있다.[31] 당시 프랑스인 평균키 164cm고, 나폴레옹은 168cm이다.[32] 장교 시절에 측정. 이후 얼마 못가 병이 나서 그만 두고 요양하다가 20대 초반에 사망.[33] 말이 총독이지 당시의 이집트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또한 그의 조상이던 무함마드 알리 초대 이집트 총독부터 이스마일 파샤의 후손들까지 총독직을 세습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이후엔 이집트 최후의 왕조로 진짜 세속군주화 되었다.[34] 그러나 이는 루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애초에 외제니 황후는 몸이 안좋아 아들인 루이 나폴레옹을 낳고선 남편과의 성관계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정도이다.[35]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남동생이기도 하다.[36] 독일어권 지역인 투르가우[37] 총 13만의 프랑스군이 병 부사관 장교 너 나 할 것 없이 황제의 복수를 위해 프로이센을 향해 착검 돌격을 실시했다. 당연하게도 프랑스군은 대략 1만의 포로만을 남기고 전멸했으나 프로이센군 역시 병력 절반이 갈려나가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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