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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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 | |||||||||||||||||||||||||||||||||||||||||||||||||||||||||||||||||||||||||||||||||||||||||||||||||||||||||||||||||||||||||||||||||||||||||||||||||||||||||||||||||||||||||||||||||||||||||||||||||||||||||||||||||||||||||||||||||||||||||||||||||||||||||||||||||||||||||||||||||||||||||||||||||||||||||||||||||||||||||||||||||||||||||||||||||||||||||||||||||||||||||||||||||||||||||||||||||||||||||||||||||||||||||||||||||||||||||||||||||||||||||||||||||||||||||||||||||||||||||||||||||||||||||||||||||||||||||||||||||||||||||||||||||||||||||||||||||||||||||||||||||||||||||||||||||||||||||||||||||||||||||||||||||||||||||||||||||||||||||||||||||||||||||||||||||||||||||||||||||||||||||||||||||||||||||||||||||||||||||||||||||||||||||||||||||||||||||||||||||||||||||||||||||||||||||||||||||||||||||||||||||||||||||||||||||||||||||||||||||||||||||||||||||||||||||||||||||||||||||||||||||||||||||||||||||||||||||||||||||||||||||||||||||||||||||||||||||||||||||||||||||||||||||||||||||||||||||||||||||||||||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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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振
? ~ 1449년
1. 개요[편집]
명나라의 환관.
2. 행적[편집]
울주 사람으로 글을 읽어 여러 번 과거 시험을 봤지만 매번 낙방해 현청의 교관으로 있었다. 이후 죄를 지어 귀양살이를 했는데, 황궁에서 환관을 모집하자 스스로 거세해 궁궐을 들어갔다. 환관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어서 글을 좀 아는 왕진은 선생이라 불렸다.
선덕제의 마음을 잘 헤아려 총애를 받았다. 선덕제의 명으로 황태자 주기진에게 글을 가르치게 했다. 왕진은 그를 모시면서 국랑이 되어 글을 가르치지 않고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만 했다. 1435년에 정통제가 즉위하자 그의 스승이었던 왕진의 지위가 높아져 사례감태감이 되었다.
정통제는 놀기만을 좋아해 왕진이 말하는 대로 조정 내의 정치를 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대신은 구실을 만들어 몰아세웠다. 유구가 상주문을 통해 자신을 화나게 하자 감옥에 가뒀다가 죽게 만들었다. 이택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자 철령위로 귀양보내게 했다. 석경이 자신의 집의 환관을 욕했다고 해서 그를 감옥에 가두게 했다.
왕우에게 왜 수염이 없냐고 하자 왕우가 어른께서 수염이 없는데 소인은 어찌 수염이 나겠냐고 아첨했다. 그에게 아첨하는 대신들은 그를 옹부(翁父)라 불렀다. 1449년에 오이라트의 에센이 명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2천 명에게 말을 바치게 하면서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 3천 명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왕진은 거짓임을 알아차리고 조정을 기만했으니 말 가격의 5분의 2만 주고 남아도는 자에게는 밥을 주지 말라고 했다.
7월에 에센이 산시성을 공격하자 정통제에게 친정할 것을 권유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회래로부터 선부에 이르기까지 비로 인해 길이 좋지 않아 사람, 말이 지치고 양초가 떨어진데다가 병사들이 굶어서 죽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대신들이 함부로 전진하지 말 것을 이야기했지만 왕진은 화를 내 그를 붙잡아 조리를 돌렸다. 에센이 매복했다가 정원이 이끄는 부대, 증원부대인 주영, 주면 등을 격파하면서 대신들의 건의로 철수하게 되었다.
무장들은 자형관을 돌아 북경으로 철수하자고 했다. 하지만 왕진은 자신의 고향을 군대가 통과하는 일을 우려하여 후퇴로를 우회한다. 결국 토목보에서 에센에게 포위되어 크게 패하면서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왕진은 그에게 분노한 근위대 장군 번충에게 철퇴로 맞아죽었다.
워낙 실책과 악행을 많이 저지르고 인성도 나빴기에 많은 증오를 받아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뻐했다. 또한 사후 왕진의 일족들이 처벌되며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때 그 재산은 궁궐 같은 대저택이 몇 채나 되고 금은보화가 가득한 창고가 60개나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최만리와 더불어 최종보스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내시부 첩보기관인 동창의 수장이자 조선측을 다방면으로 압박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배역은 원로 배우 이대로.
2019년 드라마 대명풍화에 등장한다. 멍청한 정통제에게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간섭하고 6명의 양아들을 시켜 뇌물을 축적한다. 예부시랑 서유정은 왕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면도까지 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대신들이 젊은 환관 왕진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고 효를 다하기 위해 반대세력을 축출하는 계획을 논의한다. 나중에 에센의 몽골군이 침공해오자 정통제한테 친정에 나서자고 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을 힘으로 누르고 친정을 강행하나 결과는 처참한 패전이었다. 결국 왕진은 그가 저지른 악행에 분노한 번충 장군에게 철퇴로 맞아죽는다.
근육조선에서 수양대군에게 빙의된 주인공이 공물로 가져온 석감(비누)을 마음에 들어한다. 근육을 보고 팔뚝은 증장천같고 어깨는 하늘의 신장(神將)같다며 칭찬하고 이후 우호적으로 대했다. 이후 돈 모으는 데 눈이 멀어 군비 횡령을 일삼고 보총수들의 훈련은 게을리했다가 토목보에서 처절히 깨진 후 분노한 장수 번충에게 살해당한다. 원 역사에선 철퇴에 맞아죽었는데 여기에서는 건조한 날씨에 굳어버린 석감으로 맞아죽었다는 게 깨알 포인트. 사후 두개골은 변소에 던져졌고 그의 일가가 멸족되고 축적한 재산들은 모조리 몰수되었는데, 어찌나 부를 축적했는지 몰수한 재산을 처분하는 것 만으로도 황실 예산 부족이 한동안이나마 해결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선 토목의 변 이후로도 살아남았으나 입지가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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