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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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경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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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경
全利卿 | Chun Leekyung


파일:동계올림픽전이경1.png

출생
1976년 1월 6일 (48세)
충청북도 옥천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숭의초등학교 (졸업)
신반포중학교 (졸업)
배화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
종목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주종목: 1000m, 1500m
신체
163cm, 58kg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2.2. 1991-92 시즌
2.3. 1992-93 시즌
2.4. 1993-94 시즌
2.5. 1994-95 시즌
2.6. 1995-96~1996-97 시즌
2.7. 1997-98 시즌
2.8. 은퇴
3. 은퇴 이후
4. 수상 기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여자 쇼트트랙, 아이스하키 선수이며 現 스포츠 행정가 및 지도자, 해설가이다.


2. 선수 경력[편집]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2연속 2관왕

세계선수권 3연패(1995-1997)
1997-98 월드컵 시리즈 초대 우승자
국내 동계올림픽 최다 금메달리스트[1][2]


2.1. 어린 시절[편집]


1976년 1월 6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1.7kg의 미숙아로 태어났다. 위 협착증과 항문 협착증을 달고 태어나 생명의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기고 몸이 허약해 5살부터 YMCA아기스포츠단에, 6살 때 수영을 배우다 7살 때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며 스케이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생존을 위해 운동을 배우던 그녀는 숭의초등학교 2학년 때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쇼트트랙으로 종목을 변경한 다음 종목 변경 1년 만에 초등학교 6학년 만 12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 척추분리증으로 고생을 하는 바람에 동갑내기 라이벌 김소희에 밀려 2인자로 머물렀다.


2.2. 1991-92 시즌[편집]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이 처음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라이벌 김소희와 함께 만 16세의 나이로 출전했으며 500m 준준결승에서 3위로 떨어졌다.[3]


2.3. 1992-93 시즌[편집]


1993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 준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4. 1993-94 시즌[편집]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000m에서 당시 최강자 나탈리 램버트를 제치고 우승하면서 여자 쇼트트랙 사상 최초 올림픽 2관왕에 올랐다.


2.5. 1994-95 시즌[편집]


1995 세계선수권에서 3관왕에 오르면서 첫 번째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을 했다.


2.6. 1995-96~1996-97 시즌[편집]


1996 세계선수권에서도 2연패를 달성했다. 이때부터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강자라 불리는 양양(A)가 등장하면서 그녀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1997 세계선수권에서 양양(A)와 포인트 동점으로 공동우승을 하며 한국 최초 세계선수권 3연패에 성공했다.[4]


2.7. 1997-98 시즌[편집]



2.7.1. 월드컵 시리즈[편집]


쇼트트랙 월드컵이 최초로 열렸고, 세계 최초 월드컵 우승자가 되었다.


2.7.2.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편집]


파일:external/moreissue.files.wordpress.com/eca084ec9db4eab2bd-eb8298eab080eb85b8-ec98aceba6aced94bd.jpg
첫 경기인 500m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파이널 B에서 1등을 한 뒤 결승전(파이널 A)에서 1명이 실격, 1명이 DNF(경기를 완주하지 못했다.)되면서 동메달을 땄다.[5] 3000m 여자 계주에서도 대회 2연패를 이루면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000m에서도 역시 금메달을 따며 2연패를 이뤘다.[6]특히 1000m 결승전에서 중국양양(A)와의 접전과 막판 날밀기로 넘어져가면서 금메달을 딴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양양A는 그 과정에서 실격처리되었고 양양S가 은메달을 받았다. 이로서 그녀는 대한민국 올림픽 도전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2관왕 2연패[7]에 올랐고 금메달 4개로 한국 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총 메달 개수 5개로 한국 쇼트트랙 최다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8]

여담으로 위 사진의 장면 때문에 국제빙상연맹에서는 날 들이밀기를 할 때 스케이트의 날이 들리면 실격이 선언되도록 규정을 뜯어고쳤다. 원래 날 들이밀기는 김기훈 이후로[9] 대한민국 선수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기술이었는데, 이 대회에서 전이경과 김동성이 함께 이 기술로 금메달을 획득한 그 시점에서 규정을 개정해버리는 바람에 대한민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걸 개정한 것이냐는 논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10]


2.8. 은퇴[편집]


올림픽 직후에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양양(A)에 이은 종합 2위를 한 뒤 돌연 은퇴선언을 했다. 은퇴 당시 여자 쇼트트랙 선수로는 (당시 인식으로는) 적지 않은 나이(만 22세)[11]였고 고질적인 부상과 목표의식 상실, 그리고 전성기에 돌입한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 선수인 양양(A)의 존재 등 여러 요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대한민국 쇼트트랙 선수 중 남녀 통틀어 가장 많은 수상내역을 보유하고 있는 쇼트트랙 여왕이며 약체였던 한국 여자 쇼트트랙을 세계 최강의 위치로 올려놓은 선수이다. 또한 김동성과 함께 1990년대 후반 쇼트트랙 열풍을 불러 일으켜 1990년대 초중반 쇼트트랙 세대를 만든 선수이기도 하다. 이 두 선수의 영향을 받아 쇼트트랙을 시작한 선수가 변천사, 성시백, 안현수, 이정수, 이호석, 진선유 등이면 말 다했다.


3. 은퇴 이후[편집]


파일:75033142_10_HD.jpg
연세대학교를 다니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IOC 선수위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러나 자크 로게 위원장의 추천으로 4년 간 IOC 선수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스포츠 행정가 양성 지원사업으로 대한체육회(KOC)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갔다오기도 하였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과정에도 참여했다.

2003년에는 골프 세미프로 자격증을 얻기도 했고, 쇼트트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5년 여자 아이스하키를 시작하여, 2006년 말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할 예정이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출전은 좌절되었다.

2010년 결혼 이후 부산에 거주하며 부산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고있으며, 이외에도 대한빙상경기연맹 이사 및 빙상발전위원회 위원 등 스포츠 행정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계에 진출하려는 시도도 했었는데, 2010년 3월 26일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산광역의원 출마를 희망했으나 공천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7-18 시즌 4차 월드컵에서 정말 오랜만에 해설을 보았다. 다만 그녀가 코치를 맡고 있는 싱가포르 쇼트트랙 팀[12]이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하여 올림픽에서도 해설위원을 계속 맡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올림픽에서 SBS 해설위원과 감독을 병행했다. 그러나 해설위원 평가는 좋지 못하다. 혀짤배기라 발음이 씹히는 경우가 많아서 해설이 듣기 거슬리고 다소 흥분을 잘하고[13] 명단에 없는 선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공부를 너무 안해온 티를 내기도 했다. 그래서 팬들이 게시판에다가 항의글을 쓸 정도로 심히 좋지 못하다. 그렇지만 해설을 할 때는 배기완 아나운서와 영혼의 캐미를 자랑하였다. 2021년 2월 16일 대한빙상경기연맹 이사로 선임되었다.


4. 수상 기록[편집]


대회



올림픽
4
0
1
세계선수권
9
11
3
세계 팀선수권
4
2
0
아시안 게임
1
2
2
유니버시아드
2
3
2
합계
20
18
8

파일:오륜기(여백X).svg 올림픽
금메달
1994 릴레함메르
3000m 계주
금메달
1994 릴레함메르
1000m
금메달
1998 나가노
3000m 계주
금메달
1998 나가노
1000m
동메달
1998 나가노
500m[14]
파일:국제빙상경기연맹 로고.sv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 요빅
종합
금메달
1995 요빅
1500m
금메달
1995 요빅
3000m
금메달
1996 헤이그
종합
금메달
1996 헤이그
1500m
금메달
1997 나가노
종합
금메달
1997 나가노
1500m
금메달
1997 나가노
3000m
금메달
1998 비엔나
3000m
은메달
1993 베이징
종합
은메달
1993 베이징
1500m
은메달
1993 베이징
3000m
은메달
1995 요빅
3000m 계주
은메달
1995 요빅
1000m
은메달
1996 헤이그
1000m
은메달
1996 헤이그
3000m
은메달
1997 나가노
3000m 계주
은메달
1998 비엔나
3000m 계주
은메달
1998 비엔나
종합
은메달
1998 비엔나
1000m
동메달
1993 베이징
3000m 계주
동메달
1994 길드퍼드
3000m 계주
동메달
1997 나가노
1000m
파일:국제빙상경기연맹 로고.svg 세계 팀선수권
금메달
1992 노베야마
단체전
금메달
1995 조테미어
단체전
금메달
1996 레이크플래시드
단체전
금메달
1997 서울
단체전
은메달
1994 케임브리지
단체전
은메달
1998 보르미오
단체전
파일:아시안 게임 로고.sv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6 하얼빈
1000m
은메달
1990 삿포로
3000m 계주
은메달
1996 하얼빈
1500m
동메달
1990 삿포로
1000m
동메달
1996 하얼빈
3000m
파일:FISU 로고.svg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95 하카
1500m
금메달
1997 무주·전주
3000m
은메달
1995 하카
3000m 계주
은메달
1995 하카
3000m
은메달
1997 무주·전주
3000m 계주
동메달
1995 하카
500m
동메달
1997 무주·전주
1000m

[1] 원래 최다 메달리스트 기록도 가지고 있었으나,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이승훈이 남자 매스스타트 동메달을 획득하며 2위로 밀렸다.[2] 하계올림픽을 포함한다면 양궁김수녕사격진종오가 있다. 두 사람 모두 금메달 4개를 가지고 있지만, 전이경과 달리 메달 1개를 더 가지고 있다.[3] 3000m 계주는 참가 자체를 못했고 1000와 1500m는 없었다.[4] 그 당시에는 동점이면 공동으로 우승하는 제도가 있었다. 1999년부터는 동점일 경우 슈퍼파이널 성적으로 순위를 정한다.[5] 참고로 여자 500m의 최고 성적이며 그 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박승희가 동률을 이뤘다. 참고로 박승희는 결승으로 올라갔다.[6] 두 번째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선수 이상화다. 이상화는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2연패를 달성했다.[7] 하계올림픽의 경우는 양궁의 박성현이 여자 개인전 및 단체전 2관왕 2연패를 노렸으나,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인전에서 중국 관중들의 무개념 소음 응원에 집중력이 흔들려 중국의 장쥐안쥐안에게 금메달을 빼앗기고 말았다.[8] 후배들 중 5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낸 선수들은 현재까지 이호석, 박승희, 최민정이 있다. 단독 최다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로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승훈(6개)이 있다.[9] 김기훈의 날 들이밀기는 앞발은 빙판에 붙어 있었지만 뒷발이 들린 채였다. 자세히 확인하고 싶다면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계주 결승전을 찾아보자.[10] 다만 공식적으로 이 규정을 바꾼 이유는 선수끼리의 경합이 많은 쇼트트랙의 종목 특성상 스케이트의 날이 들리면서 선수가 날 때문에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선수 보호 대책으로 개정한 것이고, 시기가 좋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을 뿐이다. 사진에 나온 위 상황에서도 큰 일이 없이 넘어갔기에 추억거리로 남았지만 자칫하면 전이경 본인이 양양A의 날 때문에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쇼트트랙에서도 날 들이밀기를 볼 수는 있지만 스케이트를 빙판에 붙여야 하기 때문에 시전 난이도가 높아져서 아무래도 이전보단 덜 나오는 편임에도 황대헌이 날을 지면에 붙인 채로 들이밀기를 하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긴 하다.[11] 실업팀이 없었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0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은퇴하는 것이 당연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20대 중후반에도 선수 생활이 가능해졌다.[12] 2015년 싱가포르 쇼트트랙 국가대표 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2018년까지 활동했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싱가포르 국가대표 팀 감독으로 활동했다. 비록 샤이엔 고를 출전시켰지만 빙상 볼모지인 싱가포르게 꽃을 피우고 싶다는 포부를 남기기도 했다.[13]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쇼트트랙 남자 1500m에 출전했던 김동성이 결승에서 당당하게 1위로 골인하고도 아폴로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을 강탈당하자 배기완 캐스터와 함께 크게 흥분하여 "김동성 선수, 얼음판에 그대로 누워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하고 일갈했던 것은 아주 유명하다.[14] 이때 딴 메달이 박승희가 메달을 따기 이전까지 유일한 대한민국의 여자 500m 쇼트트랙 메달이었다. 원래는 준결승전에서 탈락하여 5-8위전으로 밀렸고, 거기서 가장 먼저 들어와서 5위가 되었는데, 결승전에서 2명이 실격을 당하는 바람에 3위가 되었다.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메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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