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케테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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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ᠬᠥᠬᠡᠲᠡᠮᠦᠷ(몽골어 표기)/Köke Temür(영문 표기)
(? ~ 1375)
코케테무르는 원나라 및 북원의 장군이자 군벌이다. 그는 원나라 최후의 명장으로 꼽히는 인물로서 나라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코케테무르의 일대기는 원나라 말기의 혼란이 어떠했으며, 거대한 제국이던 원나라가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코케테무르는 몽골인이지만 몽골인들이 원나라[1] 를 세워서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후 중국 내륙인 하남성(河南省) 침구현(沈丘縣)[2] 에서 태어났다. 코케테무르의 본명은 왕보보(王保保)[3] 였지만 훗날 원의 황제 혜종으로부터 코케테무르[4] 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게 된다.[5]
왕보보의 어머니는 차칸테무르의 여동생이었으므로 왕보보는 원래 차칸테무르의 외조카가 되었지만, 자식이 없었던 차칸테무르가 여동생에게 부탁하여 왕보보를 자신의 양자로 거두어들여서 기르게 되었다.
오래지않아 중국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도적으로 바뀌었고, 그들이 궐기하여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는데, 반란의 규모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서 원의 조정(朝庭)에서는 이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 차칸테무르는 이러한 시국에 분개하여 사람들을 모았고,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홍건적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왕보보는 그로 인해 어려서부터 군대에서 자라게 되었다.
2.2. 양아버지의 원수를 갚다[편집]
차칸테무르는 대륙 각지를 전전하며 가는 곳마다 홍건적들을 크게 쳐부수었고, 그가 거병한 지 10년째가 되는 1362년에는 적의 세력이 거의 멸망하여 산동(山東)의 익도(益都)[6]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음력 6월 15일[7] , 차칸테무르는 거짓으로 항복해왔던 홍건적의 장수 전풍(田豐)과 왕사성(王士誠)에게 암살당하게 되어 승리를 눈앞에 두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왕보보에게 차칸테무르의 권한을 그대로 물려주고 계속해서 전투를 이끌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왕보보에게 '코케테무르'라는 새 이름을 하사하였다.
코케테무르는 어떠한 동요와 지체도 없이 성을 맹렬히 공격했다. 성을 공격할 때마다 사졸들의 앞에서 솔선하여 선두에서 싸웠으며, 장수들과 작전을 논할 때면 반드시 양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코케테무르는 공격하는 중에 적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분노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적들은 그런 코케테무르를 몹시 두려워하여 온 힘을 다해 성을 막았다. 적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코케테무르는 공격의 방법을 바꾸었는데, 장교와 병사들을 시켜서 성 주위에 대대적으로 땅굴을 파 익도성의 내부와 통하도록 하고는 그 굴로 침투하여 적들을 공격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코케테무르는 음력 11월 4일[8] 에 익도성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전풍과 왕사성은 성이 무너지자 그대로 코케테무르에게 살해당했고, 두 사람을 따르던 부하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코케테무르는 싸움에서 이긴 뒤 차칸테무르의 제삿상을 차리고 그 위에 전풍과 왕사성의 심장을 각각 도려내어서 바쳤다. 끝까지 익도를 지켰던 홍건적의 수장(守將) 진노두(陳猱頭)와 패잔병 200여명은 모두 몸을 포박하고 형구(刑具)를 채운 뒤 조정으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복수를 끝낸 코케테무르는 익도에 호응하여 배반했던 거주(莒州)[9] 도 마저 공격하여 무너뜨리니 이로써 산동 지역의 홍건적들은 온전히 평정되었고, 코케테무르는 산동을 지킬 수비군을 배치한 뒤 1363년 2월에 하남으로 귀환한다.
그렇게 중원(中原)의 홍건적들이 모두 평정되자 원은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는 듯 했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본거지로 돌아간 코케테무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회를 노려 코케테무르의 세력권을 빼앗으려는 양아버지 차칸테무르의 숙적 베이르테무르였고, 두 사람의 격돌은 나라를 멸망하게 만드는 거대한 내전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2.3. 숙적과의 대결이 황실의 갈등으로 커지다[편집]
베이르테무르는 차칸테무르와 마찬가지로 홍건적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었지만 진(晉), 기(冀) 지역을 차칸테무르로부터 빼앗기 위해 그와 계속 다투어왔었고[10] ,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사이가 몹시 나빴다. 조정에서 사신을 여러차례 보내와 두 사람을 말렸기에 베이르테무르는 일시적으로 차칸테무르에 대한 공격을 멈췄었지만, 그는 차칸테무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재개했다. 이로써 차칸테무르가 베이르테무르에게 품었던 증오는 코케테무르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1363년에 어사대부 라오데이샤[11] 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토겐테무르[12] 가 황태자에게 간언하다 그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대동(大同)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대동은 베이르테무르의 본거지였다.
라오데이샤, 토겐테무르와 모두 친했던 베이르테무르는 두 사람을 그대로 숨겨주었고, 조정에서 두 사람을 찾는 관리를 보내올 때마다 쫓아냈다. 조정의 명령을 거스르는 베이르테무르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역모였지만 이러한 일을 하고도 베이르테무르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 혜종이 베이르테무르의 배후에서 은밀히 지시하여 꾸민 일이기 때문이었다. 라오데이샤는 혜종이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신하였기에 혜종은 황태자를 자주 꾸짖으면서 라오데이샤에 대한 수색을 그만두라고 명령했지만 황태자는 혜종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갈등이 계속되자 황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조정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코케테무르의 편에 붙어서 도망자들을 잡아낼 방책을 상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무렵에 코케테무르는 본거지를 하남에서 태원(太原)으로 옮겼던 터라 베이르테무르의 세력권과 거리가 가까워졌다.
혜종과 황태자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서로에 대한 원망은 황제를 편들고 있었던 베이르테무르와 황태자를 옹호하는 코케테무르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었다. 두 사람은 기존에 벌여왔던 군사적 충돌을 계속하는 것도 모자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조정에 글을 올려 서로를 모함하기에 이르렀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다.
1364년, 황태자의 측근인 승상 초스간[13] 과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박부카가 베이르테무르와 라오데이샤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황태자에게 알리니 황태자가 대노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베이르테무르의 관직을 박탈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청했다. 비록 조정이 황태자 일당에게 장악되어 있었기에 혜종은 하는 수 없이 황태자의 요청에 따랐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베이르테무르의 분노만 사는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 명령에 제대로 화가 난 베이르테무르는 마침내 명령을 거부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라의 경사(京師)인 대도(大都)로 진격해왔다.
혜종은 베이르테무르가 대도로 진격해오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기에 초스간과 박부카를 베이르테무르에게 인질로 보내서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베이르테무르는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코케테무르는 대도에 있는 부하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베이르테무르를 막도록 했지만 부하들이 모두 베이르테무르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격파되어 그를 막는데 실패했다. 결국 베이르테무르는 혜종의 지지를 받고 조정을 수중에 넣게 된다.
패배한 부하들 중 백쇄주(白鎖住)는 황태자를 데리고 대도를 빠져나와 코케테무르가 있는 태원으로 도망쳐오니 코케테무르는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코케테무르는 백쇄주에게 군사를 내주어 어양(漁陽)에 주둔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지속적으로 조정의 동향을 살폈다.
코케테무르가 태원에서 황태자를 보호하며 베이르테무르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생각에 골몰해있는 중에 황태자는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 그는 당나라 숙종이 안록산의 난을 겪는 도중에 피난지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선례를 본받아서 자신도 코케테무르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태원에서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품었다. 결국 그는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코케테무르를 비롯한 신하들의 지지를 구했지만 코케테무르가 다른 신하들과 함께 만류하자 이내 그만두었다.
1365년 4월, 베이르테무르가 황태자파의 내외적인 저항들에 부딪히게 되어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를 알아차린 코케테무르는 군사를 일으켜서 대동을 공격하였다. 코케테무르는 음력 4월 17일[14] 에 대동을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공격한 지 열흘만에 성을 무너뜨렸다.
코케테무르의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황태자는 그에게 대도로 진격하여 베이르테무르를 완전히 토벌할 것을 재촉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혜종의 명령이 내려왔다. 그 명령은 백쇄주를 도성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하고 황태자를 황궁으로 소환하여 입궐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와 더불어 베이르테무르의 잘린 목도 태원에 전해졌는데, 대동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황궁에도 전해지자 이를 들은 혜종이 하는 수 없이 환관들을 시켜서 베이르테무르를 먼저 주살(誅殺)하고 그를 따르던 일당도 내친 뒤에 그와 같이 조치한 것이었다.
코케테무르가 황태자와 함께 대도로 가고 있는 도중에 황태자의 모후(母后) 기씨는 코케테무르에게 서신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입궁할 때 그의 모든 군대를 같이 이끌고 와서 궁궐을 포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읽은 코케테무르는 혜종이 황태자에게 양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기씨가 자신의 위세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코케테무르가 비록 황태자를 지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황제인 혜종을 거역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태원에서 황태자의 제위 등극을 만류했었던 코케테무르는 기씨의 지시를 따라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고, 대도까지의 거리가 30리 정도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연 명령을 내려서 호위 행렬에 참여한 자들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군대를 태원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코케테무르는 이로써 혜종에게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를 행한 것이었지만, 이 때문에 기황후는 물론이고 황태자도 그에게 앙심을 품게 되어 뒤에 그 여파가 겉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혜종 또한 겉으로는 코케테무르를 융숭히 대접하나 내심으로는 황태자를 옹호하던 그를 껄끄럽게 여겼으므로 코케테무르가 조정에서 겪게 될 분란은 필연적인 미래였다.
2.4. 내전을 끝냈지만 나라의 멸망은 막지 못하다[편집]
1365년 가을, 코케테무르가 황태자와 함께 대도에 도착하여 입궁하자 혜종이 그를 우승상(右丞相)으로 높였다. 이로써 코케테무르는 좌승상인 바시르[15] 와 함께 승상이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나, 바시르는 코케테무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의 지위가 엇비슷할지라도[16] 관록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코케테무르의 파격적인 승진은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그를 재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코케테무르는 군재(軍才)가 뛰어난 전형적인 장수였지만 내정에는 경험이 전무하여 직책에 걸맞는 일을 해내지 못했고, 그가 지시를 내린다고 해도 그를 꺼리고 무시하는 조정의 구신(舊臣)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코케테무르는 우승상이 된 지 두어 달 만에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강(江), 회(淮) 지역의 적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조정을 떠나게 해달라고 혜종에게 청했다. 이때 황태자도 혜종에게 군사를 이끌게 해달라고 청했는데[17] , 황태자를 꺼림칙해하던 혜종은 코케테무르의 손을 들어주어 그를 하남왕(河南王)[18] 으로 봉하고 나라의 모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특권을 내려주었다.
코케테무르가 강회 지역의 형세를 살피니 적들의 세력이 모두 강성하여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혜종에게 하사받은 권한을 통해 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자신의 휘하로 집결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수들이 코케테무르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이사제(李思齊)로, 그는 원래 차칸테무르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민병대를 일으킨 인물인데다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워왔었기에 지위가 높았다. 그는 차칸테무르와 함께 섬서(陕西) 지역의 도적들을 토벌한 뒤 중앙으로 향한 차칸테무르와는 다르게 그대로 섬서 지역에 눌러앉아서 일대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사제는 코케테무르가 자신의 지위를 능가하여 나라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속으로 큰 불만을 품었다.
코케테무르의 격문을 받아보게 된 이사제는 크게 분노하여 부하들에게 고함지르듯 소리쳤다.
내가 네 아비와 교분을 맺었을 때[19] 너는 머리카락조차도 제대로 마르지 않았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감히 내게도 격문을 돌려서 명령을 한단 말이냐!
이 소식을 들은 코케테무르는 깊게 탄식하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황제의 명령(詔)을 받들어서 나라의 모든 병사들을 모으고자 하는 것인데, 나라를 지키는 장수들이 이렇게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어떻게 도적들을 토벌한단 말인가!
싸움이 길어지자 원 조정에서는 코케테무르에게 사신을 계속 보내와서 이사제와 화해할 것을 종용했는데, 분노를 이기지 못한 코케테무르는 홧김에 조정의 사신 천하노(天下奴) 등을 때려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코케테무르의 이러한 발호(跋扈)를 경계하게 되었다.
1367년 가을, 혜종이 명령을 내려 황태자에게 모든 군대를 통솔하게 했고, 코케테무르에게는 군사를 동쪽으로 옮겨 강회 지역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이사제는 군대를 옮겨 천촉(川蜀)을 평정하도록 명령했지만 모두가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때 코케테무르의 부장이었던 맥고는 코케테무르가 조정에서 내린 명령을 거듭 따르지 않자 그가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를 잃고 더 이상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코케테무르를 배신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맥고는 코케테무르에게서 위휘(衞輝)[26] , 창덕(彰德)을 탈취했으며, 그곳들 중 창덕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는데, 창덕은 코케테무르가 장수들에게 격문을 돌릴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었다.
맥고가 코케테무르의 죄목들을 나열하여 조정에 알리고[27] 코케테무르를 맹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서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군원(撫軍院)[28] 을 설치하고 황태자에게 그 관청을 관장하게 하면서 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오로지 코케테무르를 막는 데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이쯤만 되어도 코케테무르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조정에서는 코케테무르를 끝장낼 생각을 가졌던 것인지 계속해서 그를 압박하는 명령들을 잇달아 내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코케테무르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맥고를 충신으로 칭송하고, 갖가지 관직과 칭호들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맥고가 코케테무르에게서 빼앗은 세력권까지도 그대로 인정해주어 코케테무르의 다른 부하들도 주장을 배신하고 조정의 편에 서도록 유도하였다.
코케테무르는 원래 혜종으로부터 나라의 모든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었고, 당시에도 그 권한이 똑같이 유지되었지만 무군원의 설치로 인해 그의 권한은 자연스럽게 황태자에게 이양되어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무군원에서 산동, 산서, 하남, 하북 지역을 맡을 사령관들을 각기 다른 사람들로 임명하는 바람에 코케테무르의 지휘권이 흩어져버렸고, 이 명령으로 인해 코케테무르는 섬서에서의 싸움을 그만두고 산서의 택주(澤州)로 물러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코케테무르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무군원에서 산서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장수가 명령이 내려진 뒤에 얼마 못가서 죽은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산서 지역만큼은 코케테무르가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다.[29]
또한 코케테무르를 따르는 관료들에게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과 더불어 코케테무르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갖가지 공작들이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조정에서 벌인 공작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코케테무르의 부장이던 관보와 이경창(李景昌) 등을 조정으로 소환한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설득하여 코케테무르를 따르지 않게 하였고, 그들이 설득에 응하면 그 대가로 높은 관직과 막대한 양의 재물을 포상으로 주었다. 특히 관보는 조정으로부터 허국공(許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은 후 코케테무르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코케테무르가 내리는 명령과 지시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결국 관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맥고와 힘을 합치고 코케테무르를 공격하게 된다.
관보의 배신은 맥고의 반란과 함께 코케테무르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관보와 맥고 두 사람은 모두 싸움을 잘하는 효장(驍將)이었던데다[30] 차칸테무르가 활약할 때부터 활동하여 공을 많이 세워왔었기에 코케테무르의 군대 내에서 지위가 높은 거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코케테무르의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굳건하게 마련했던 산서 지역의 기반까지도 흔들리게 되었으며, 두 사람과 코케테무르의 혈투는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코케테무르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들이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것과 자신이 명령을 감당하기 버겁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전에 저지른 잘못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조정의 명령들에 순순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끝내 섬서의 장수들에게 본거지에서 나와 동쪽으로 진군하여 그를 압박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내려지자 코케테무르도 마침내 크게 분노하게 되었다.
1368년, 조정에서는 중서좌승(中書左丞) 손경익(孫景益) 등의 관리들을 태원으로 파견하여 그곳에 부임하도록 했지만 코케테무르는 부하들을 보내서 태원으로 오는 조정의 관리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고, 이 때문에 그동안 표면적으로나마 코케테무르의 권위를 인정해줬었던 조정의 태도가 완전히 돌변하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혜종의 명령에서 잘 드러난다.
코케테무르는 원래 차칸테무르의 종실(宗室)이 아니었지만 짐(朕)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 그에게 차칸테무르의 관직과 임무를 물려받게 해주어 후세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도록 장려했다. 그뿐 아니라 재상의 자리까지 내주어 나라의 관청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에 더하여 코케테무르를 왕으로 높여서 나라의 군대를 오로지하도록 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코케테무르는 짐의 총애만을 믿고 방자해져 제멋대로 굴면서 외적을 토벌할 생각은 하지 않고 관섬(關陝)에서 아군과 병사를 다투어서 그 지역을 얻으려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맥고가 대의(大義)를 외치며 코케테무르의 간사함을 들춰내려 하고, 관보는 코케테무르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고 오로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두 사람은 코케테무르의 죄악을 조사하여 나라의 법이 바로 세워지는 것을 바라는 충신들이다. 토로[31] 와 이사제는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내려와 충신들과 힘을 합치고, 짐의 뜻을 받들어 코케테무르를 토벌하여라.[32]
코케테무르가 그동안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었던 하남왕의 왕작은 박탈되었으며, 차칸테무르의 옛 장수였던 위새인불화(魏賽因不花)도 코케테무르의 토벌에 추가적으로 투입되었다. 섬서 지역을 지키던 장수들은 방어에 성공하긴 했어도 코케테무르와의 싸움에서 밀렸었기에 별다른 반격을 해보지도 못하고 수세로 일관했었지만 조정의 압박과 숨막히는 견제로 인해 코케테무르의 세력이 이전과 다르게 볼품없어지자 관보, 맥고 등과 연합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그를 압박하니 코케테무르의 세력권은 날마다 그들에게 잠식당했다. 결국 코케테무르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택주에서 진녕(晉寧)으로 달아나니, 관보와 맥고가 그 틈을 타서 택주와 노주(潞州)를 순식간에 장악해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주원장이 장사성을 멸망시켜 강남을 평정하고 명(明)을 건국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의 대장군 서달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북벌에 나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산동 지역을 모두 평정한 뒤 중원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이사제는 코케테무르에게 사람을 보내서 하북에까지 군사를 이끌고 나왔던 일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사죄하는 한편, 인근 지역을 대대적으로 약탈한 뒤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섬서로 회군한다.
한편 코케테무르에게 가장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서 그의 기반 세력권이었던 산서 지역을 대부분 수중에 넣은 관보와 맥고는 남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는 명의 대군을 막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코케테무르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인 진녕과 태원을 마저 공격해서 무너뜨리고 코케테무르를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하였다.
코케테무르는 두 사람이 한창 산서 지역을 공격해왔을 때 싸우는 대신 성을 비우고 병사와 물자들을 챙겨서 달아나는 행위를 반복했었으며, 두 사람이 싸워서 결판을 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와도 무시하였었다. 그렇게 불리한 싸움들을 계속 피한 코케테무르는 그의 세력권을 대부분 잃게 되었지만 병력과 물자만큼은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한편 맥고 쪽은 점령하는 지역이 늘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에게 공급할 물자가 부족해지게 되어 약탈로 물자를 충당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코케테무르는 맥고의 군대에 간첩을 심어서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반격의 시간을 기다렸는데, 맥고가 군사를 이끌고 기현(祁縣)[33] 을 약탈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코케테무르는 밤을 틈타 재빠르게 군대를 일으켜 기현에서 맥고의 군대를 급습하였고, 이 한 번의 싸움에서 코케테무르는 관보와 맥고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두 사람을 모두 붙잡는다. 차칸테무르와 베이르테무르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원의 기나긴 내전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붙잡힌 맥고의 무리 중에는 조정에서 파견된 단사관(斷事官)이 있었는데, 코케테무르는 그를 조정에 돌려보내어 혜종에게 두 사람을 어떻게 처분할 지 묻게 하니 혜종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이 명령이 전해짐과 동시에 관보와 맥고는 그대로 코케테무르에게 살해당하니, 이때가 윤7월 초하룻날[34] 이었다.
혜종은 코케테무르가 원한을 품고 이긴 기세를 몰아서 대도를 공격할까봐 매우 두려워했고, 결국 코케테무르를 압박하던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코케테무르를 견제할 목적으로 세웠던 무군원은 결국 폐지되었으며, 무군원의 설치를 제안했던 핵심 인물들 중 한 사람인 바얀테무르[35] 는 혜종의 명령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감옥에 수감된 코케테무르의 심복들인 손저(孫翥), 조항(趙恒)이 석방되었고, 조정에서 코케테무르를 견제하고 비방하는데 앞장섰던 관리들은 모두 삭탈관직되어 대도에서 쫓겨났다.
코케테무르는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바뀐 조정의 동향을 전해듣고 혜종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정성과 충성심을 밝히니 혜종 또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음을 밝히면서 예전에 코케테무르가 저질렀던 잘못들은 물론이고 그를 압박하기 위해 내렸었던 조정의 모든 명령들도 없던 일로 하겠다고 회답했다. 황제는 추가적으로 박탈했었던 코케테무르의 옛 관직과 작위들을 모두 회복시키고 위휘, 창덕을 탈환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때는 이미 명의 대군이 중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대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이 무렵에 서달의 군대는 이미 직고(直沽)까지 무너뜨린 상태였다.
명군이 대도로 다다를 무렵에 코케테무르는 군대를 추스르고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기녕(冀寧)[36] 으로 물러나고 있었는데,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군대가 온전히 정비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군대를 이끌고 간다고 해도 나라를 구원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으므로 대도로 가는 대신 그대로 기녕으로 물러났다.
코케테무르가 기녕에 도착한 날, 대도로 이르는 관문인 통주(通州)가 명의 북벌군에게 함락당했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혜종은 2일 뒤에 가속들과 궁녀들을 데리고 대도를 빠져나와 몽골 초원을 향하여 북쪽으로 도주했다. 마침내 음력 8월 2일[37] , 서달이 도성(都城)의 제화문(齊化門)을 열고 대도에 입성하니 이로써 원이 멸망하게 되었다. 코케테무르가 관보와 맥고를 격파하여 기나긴 내전을 끝낸 지 딱 한달만의 일이었다.
2.5. 서달과의 싸움에서 연달아 패배하다[편집]
코케테무르는 원이 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태원을 근거지로 삼아서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때마침 명의 장수 탕화 등이 산서로 침입하여 회경(懷慶)[38] 을 무너뜨리고 택주, 노주의 항복을 받아내며 진격해오고 있었다. 코케테무르는 부장 한찰아(韓札兒)에게 군대를 내주면서 그에게 택주를 빼앗도록 하고, 자신은 택주를 지키기 위해 출격한 명의 지원군과 한점(韓店)[39] 에서 격돌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이는 명과의 전투에서 거둔 북원의 첫 승리였고, 승전에 고무된 혜종은 코케테무르에게 대도를 공격하여 되찾을 것을 명령한다.
코케테무르는 안문(雁門)[40] 에서 출격하여 거용관을 탈취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서 대도를 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서달이 대도를 지키러 오는 대신에 태원을 공격해오자 코케테무르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서달의 공격에 매우 당황하여 보안주(保安州)에 이르자마자 황급히 군대를 되돌려 태원을 지키기 위해 급히 회군하였다. 그러나 코케테무르는 회군하기 무섭게 서달에게 갑작스러운 야습을 당하게 되어 크게 낭패하였고, 결국 감숙(甘肅)을 향해 달아난다[41] . 이때 코케테무르는 그의 오랜 본거지였던 태원은 물론이고 그 성에 남아있었던 4만여 명의 병사들도 모조리 잃게 되어서 산서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태원의 상실은 뼈아픈 패배였지만, 영하(寧夏)로 달아난 코케테무르는 감숙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패잔병들과 귀족 세력의 군대, 그리고 차칸테무르의 옛 부하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원의 잔여 세력들을 결집하여 권토중래한 그는 1369년 5월에 장량신(張良臣)[42] 이 서달에 대항하여 그의 본거지인 경양(慶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43] 한찰아를 파견하여 원주(原州)[44] , 경주(涇州)[45] 를 무너뜨리고 장량신의 후방을 지원하면서 명의 수비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결국 8월에 장량신이 서달에게 토벌당하여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코케테무르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서달이 남경(南京)으로 회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연말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난주(蘭州)를 공격한다.
처음에는 코케테무르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난주성은 코케테무르의 지휘 아래 북원군에 철저히 포위되어 외부와 고립되었으며, 음력 12월 13일[46] 에는 코케테무르가 난주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한 명의 장수 우광(于光)과 마난탄(馬蘭灘)에서 격돌하여 그 군대를 쳐부수고 우광을 죽였다. 그러나 난주의 수비장 장온(張溫)이 성을 철통사수하는 바람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해도 난주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고, 코케테무르를 주시하고 있던 서달이 토벌군을 이끌고 서안(西安)에서 나와 난주로 진격해오자 코케테무르는 어쩔 수 없이 난주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는데[47] , 코케테무르는 침아욕(沈兒峪)[48] 에 이르러 서달의 명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코케테무르와 서달은 보루를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싸웠지만 코케테무르 쪽에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다. 서달이 그의 부장 등유(鄧愈)를 보내서 코케테무르를 견제하게 하였는데, 등유가 코케테무르의 군대를 공격하여 북원군 2천여 명을 참수하는 등 양군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서달의 진영을 살핀 코케테무르는 부장 엄봉선(嚴奉先)에게 1천의 기병을 내주고 방비가 허술해보이는 서달의 동남쪽 진영을 불시에 야습하게 했는데, 이 작전은 효과를 거두어 그곳을 지키던 명군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서달이 재빨리 혼란을 수습하는 바람에 야습은 헛수고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군대를 정비한 서달은 날이 밝자 대대적으로 반격하여 코케테무르의 본진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코케테무르가 그 기세에 눌려 서달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니 서달은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짓쳐들어왔고, 코케테무르의 본진은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이 싸움으로 코케테무르가 감숙에서 끌어모았던 대군은 말 그대로 전멸[49] 당했다.
침아욕 대전에서 당한 참패는 태원에서의 패배보다 막심했는데, 엄봉선이나 한찰아 등 싸움을 잘하던 부장들을 모조리 잃었을 뿐만 아니라 코케테무르의 호위병들조차 단 한 명도 남지 못했다.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진 코케테무르는 달랑 처자식만 낀 채로 영하를 향하여 달아났다. 그를 따르는 병사조차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기에 일신의 무용에 의지하여 추격자들로부터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을 지켜냈던 코케테무르는 영하에서 길을 막는 큰 강을 맞딱드렸는데, 이에 절망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뗏목과 노를 만들어서 기어이 강을 건너 최종 목적지인 카라코룸[50] 으로 처절하게 달아났다. 이번의 대패로 인해 코케테무르는 중국 내륙에 남아서 명과 싸우던 옛 부하들과 지지자들을 모조리 잃게 되었으며, 중국 내륙에서의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서 이후 3년 동안 중국 내륙으로 한발짝도 들이지 못하게 된다.
코케테무르가 북쪽으로 도망친 황제를 찾아 카라코룸에 도착했을 때, 기존의 황제였던 혜종은 이미 죽고 없었으며, 황태자가 뒤를 이어 새 황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군의 공격을 피해서 새 황제를 따라 달아난 옛 관리들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북원 정권의 주요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황태자의 신분에서 벗어나 새로 황제가 된 소종은 황태자 시절에 사사로이 품었던 원한을 잊고 코케테무르를 승상으로 삼아서 병권은 물론이고 국정까지 맡기는 등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2.6. 고비 사막에서 서달의 북벌을 막아내다[편집]
북원의 거듭된 패배를 목도하고 코케테무르의 생존을 확인하게 된 명 태조 주원장은 1372년이 되자 서달을 총대장으로 삼고 그와 다른 장수들에게 15만의 대군을 내주어 코케테무르를 영원히 없애버리고[51] 북원을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지시했다. 서달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한다는 소식을 접한 코케테무르는 중국 대륙에서의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 알고 있었기에 서달을 고비 사막에까지 끌어들여 공격할 계획을 짰다. 우선 코케테무르는 본진에 대군을 남겨놓고 자신은 소수의 군대만을 이끌어 서달을 요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가장 먼저 야마천(野馬川)[52] 에서 명군(明軍) 맞아 싸웠지만 패배하여 달아났다.[53] 코케테무르는 계속 달아나다가 토라하(土剌河)[54] 에 이르러서 명군과 재차 교전했는데, 토라하에서의 싸움도 야마천의 싸움과 똑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코케테무르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명군의 선봉대에 쫓겨 달아났다.
마침내 서달이 지휘하는 5만의 명군이 영북(嶺北)으로 깊숙히 진격해와서 카라코룸의 코앞에까지 이르자, 코케테무르는 자신의 본대와 부장 하종철(賀宗哲)의 군대를 일제히 일으켜 서달의 군대를 에워싸고 공격하니 이번에는 서달이 매우 불리하였다. 코케테무르는 기세를 타고 명군을 닥치는대로 마구 살상하니 이 싸움에서 죽은 명군이 수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서달은 오히려 침착하게 대응하여 남은 병사들에게 보루를 쌓게 하고 엄하게 방비하니 코케테무르가 그 방어를 뚫지 못하여 서달의 북벌군을 전멸시키지는 못했다. 비록 코케테무르는 명나라의 북벌군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지만, 명의 15만 북벌군 중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서달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북원의 멸망을 막아내고 명 태조 주원장의 뜻을 꺾는데 성공했다. 그와 더불어 코케테무르는 주원장을 포함한 명나라 사람들에게 그의 악명을 제대로 떨치게 되었다. 영북 대전의 패배를 겪은 명군은 코케테무르가 살아있는 동안에 국경의 요새 밖으로 나와서 북원의 군대를 공격하는 일이 매우 드물게 되었다.[55]
2.7. 명나라의 국경지대를 교란하다[편집]
고비 사막에서 명군을 격파한 코케테무르는 그 다음해가 되자 본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명의 영토를 다시 침범해왔다. 6월에는 군대를 파견해서 안문을 공격했으며, 11월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동을 공격했다. 그러나 모두 서달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격퇴당하여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고, 승산이 없어진 코케테무르는 폭설이 내리는 틈을 타서 다시 카라코룸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는 대동에서 패배한 뒤로 다시는 직접 명의 영토를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틈이 날 때마다 그의 지휘를 받는 부하들에게 병사들을 딸려 보내어 산서 지역의 국경지대를 끊임없이 교란하고 약탈하게 하니 서달도 코케테무르가 죽기 전까지는 남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북평(北平)에 남아 북원군의 공격들을 막게 되었다.
2.8. 주원장의 회유를 거절하다[편집]
차칸테무르가 산동으로 진격하여 홍건적들을 거의 평정하게 되자 강회 지역의 사람들은 차칸테무르의 위세를 두려워하였는데, 주원장 또한 차칸테무르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사신을 보내서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얼마 뒤에 차칸테무르가 죽고 코케테무르가 그 뒤를 이어 산동의 홍건적을 완전히 평정하고 하남으로 귀환하자 주원장은 코케테무르에게도 사신을 보내서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지만 코케테무르는 오히려 주원장이 보내온 사신을 억류하였다.[56]
주원장은 그 뒤로도 직접 글을 써서 코케테무르에게 보낸 것이 7번이었지만 코케테무르는 그 글들에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 뒤에 원이 주원장이 건국한 명에게 패망하고 코케테무르 또한 서달에게 패배하여 중국 내륙에서 쫓겨나게 되었음에도 주원장은 끊임없이 코케테무르를 회유하려 하였지만 코케테무르는 이전과 같이 주원장의 회유를 번번이 거절한다.
주원장이 코케테무르에게 보낸 마지막 사자는 이사제였는데, 그는 1374년에 주원장의 명령을 받고 코케테무르를 찾아간다. 이사제가 도착하자 코케테무르는 이사제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사제가 돌아가려 하자 코케테무르는 중무장한 기사(騎士)들을 보내서 이사제 일행을 포위하였고, 이사제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한다.
이사제가 이에 답했다.우리 주사(主帥, 코케테무르)께서는 대접에 대한 답례로 공(公, 이사제)의 보물을 원하십니다.
그러자 코케테무르가 보낸 기사들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나는 멀리서부터 가져온 보물 하나 없이 이 곳에 왔소.
이사제는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결국 그의 왼팔을 잘라낸 뒤에 떠났고, 그 뒤에 이사제는 왼팔을 절단하면서 얻은 후유증으로 인해 열병에 시달리다가 얼마 못가서 죽게 된다. 그러나 주원장은 자신의 요구가 계속 거절당하고 해를 입는 사신들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코케테무르의 한결같은 마음에 더욱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그러시다면 공의 한쪽 팔이라도 남겨주시지요.
2.9. 최후[편집]
코케테무르는 1375년 소종을 수행하여 같이 금산(金山)[57] 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 언급되는데, 그가 죽은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서마다 차이[58] 가 있다.[59]
3. 가족[편집]
그의 아내 모(毛)씨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했으며, 자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60]
남동생으로는 앞서 언급되었던 토인테무르가 있었다. 그 또한 형과 마찬가지로 여러차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원나라에서 관직이 섬서행성평장정사(陝西行省平章政事)에까지 이르렀다. 토인테무르는 혜종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호종(扈從)했으며, 이후로도 요직을 지내면서 북원의 주요한 관료가 되었다. 토인테무르는 1388년에 막북(漠北)에서 명의 북벌군과 싸우다 포로로 잡히게 되었는데, 그는 포로로 잡혀있는 와중에 반란을 획책하였지만 실패하여 처형된다.
여동생[61] 은 1370년에 코케테무르가 서달에게 격파당할 무렵에 응창(應昌)[62] 에 남아 있었는데, 명의 북벌군에 기습을 당하여 응창마저 함락당하자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 뒤에 그녀는 명 태조 주원장의 둘째 아들인 진왕(秦王) 주상(朱樉)과 혼인[63] 하였으나 1395년에 주상이 죽자 순장당했다.
4. 평가[편집]
확곽은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명사》에 수록된 유기의 평가
어느 날, 태조(太祖)는 나라의 제장(諸將)들을 모두 불러모으고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그대들은 천하(天下)의 기남자(奇男子)가 누구라고 보는가?"
이에 장수들은 하나같이 답하였다.
"상우춘 장군은 채 1만이 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도 천하를 횡행하였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으니 상우춘 장군이야말로 진정한 기남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태조가 웃으며 답한다.
"상우춘이 인걸(人傑)이기는 하였지만 내가 얻어서 신하로 기용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왕보보를 신하로 얻지 못하였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기남자가 아니겠는가?"
태조는 마침내 왕보보의 누이동생을 진왕비(秦王妃)로 책봉하였다.
《명사》에 수록된 명 태조 주원장의 평가
확곽은 백전불굴(百戰不屈)의 정신으로 선대의 의지를 이으려 했지만 끝내 한을 품고 죽었다. 진우정은 참된 의지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양왕(梁王)은 납합출(納哈出)이 나라를 배반한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니 이들 모두가 원의 충신이다. (후략)
《명사》「확곽첩목아등전(擴廓帖木兒等傳)」의 결언(結言)
(전략(차칸테무르에 대한 평가)) 확곽첩목아는 그의 부친에 비해 군사적 재능이 조금 못 미쳤고, 그 때문에 변방으로 쫓겨나서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죽을때까지 나라에 충성하고 부친의 의지를 이으려고 하였으니 명태조(明太祖)가 그를 기남자라고 말한 것은 지당하다.
《신원사(新元史)》「확곽첩목아전(擴廓帖木兒傳)」의 결언(結言)
역사가들은 코케테무르를 그의 양아버지이자 스승과도 같은 존재인 차칸테무르에 비해 능력이 못 미치는 인물로 평가[64] 할지언정 그가 원의 마지막 명장이자 북원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북원에는 코케테무르가 죽자 더 이상 그와 같은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 나오지 않았고, 이로 인해 1388년에 일어난 명나라의 북벌은 막아내지 못하게 된다.
5. 창작물[편집]
- 《징기스칸 4》파워업키트에서는 1370년에 시작하는 시나리오 4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 53, 전투 82, 지모 72이고 특기는 등용, 기동, 돌격, 연사, 복병, 병과 적성은 보병 B, 궁병 A, 기병 S, 수군 E로 몽골이 몰락하는 시대인 이 시나리오 북원의 에이스이다. 정치는 다소 떨어지지만 등용 특기를 가지고 있어 같은 시나리오의 고려의 에이스 이성계와 거의 대등하다.
- 《의천도룡기》에서는 여주인공 민민테무르의 오라버니로 등장한다.[65] 한족식 이름은 왕보보. 저물어가는 원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던 실제 역사상의 행적이 무색하게, 소설이나 작품에서는 자질이 동생보다 못 미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 《무사》의 줄거리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작중 등장하는 북원 병력들은 코케테무르 휘하의 병력들이다. 명나라군이 코케테무르의 누이
조민를 납치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출병했다는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