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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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 | |||||||||||||||||||||||||||||||||||||||||||||||||||||||||||||||||||||||||||||||||||||||||||||||||||||||||||||||||||||||||||||||||||||||||||||||||||||||||||||||||||||||||||||||||||||||||||||||||||||||||||||||||||||||||||||||||||||||||||||||||||||||||||||||||||||||||||||||||||||||||||||||||||||||||||||||||||||||||||||||||||||||||||||||||||||||||||||||||||||||||||||||||||||||||||||||||||||||||||||||||||||||||||||||||||||||||||||||||||||||||||||||||||||||||||||||||||||||||||||||||||||||||||||||||||||||||||||||||||||||||||||||||||||||||||||||||||||||||||||||||||||||||||||||||||||||||||||||||||||||||||||||||||||||||||||||||||||||||||||||||||||||||||||||||||||||||||||||||||||||||||||||||||||||||||||||||||||||||||||||||||||||||||||||||||||||||||||||||||||||||||||||||||||||||||||||||||||||||||||||||||||||||||||||||||||||||||||||||||||||||||||||||||||||||||||||||||||||||||||||||||||||||||||||||||||||||||||||||||||||||||||||||||||||||||||||||||||||||||||||||||||||||||||||||||||||||||||||||||||||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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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貴[1]
삼 마에 귀할 귀. 魔鬼가 아니다.
1543년(가정 22) ~ 1618년(만력 46)
1. 개요[편집]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 본래 후이족 출신이었으나 전향하여 명에게 충성을 바쳤다.
2. 생애[편집]
1543년 산서성 대동 우위(右衛)[2]
현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숴저우시(朔州市) 유위현(右玉縣).
당대 사람들에게 명나라 북방 지방의 명장 가문인 이성량의 철령 이씨 가문과 더불어 동이서마라고 불렸고,[3]
"마씨는 장수로서의 재능이 많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철령 이씨와 더불어 동이서마라 하였다(麻氏多將才. 人以方鐵嶺李氏, 曰 東李西麻)."라고 명사 마귀 열전에서는 말한다.
만력 3대정 중 첫 번째이자 내몽골에서 벌어진 보바이(발배)의 난에서는 보바이를 지원하던 몽골을 무찔러 보바이를 지원을 하는 것을 막았으며 몽골과 보바이가 연합하려 하자 직접 몽고 부락에 쳐들어가 근거지를 불태운다.[4]
당시 장량보까지 진격한 이여송의 군대가 적과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밀고 밀리던 와중에, 몇백기 남짓의 기병을 이끌고 측면을 기습지원하며, 이여송과 연계하여 적을 패퇴시켰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만력제에게 비왜총병관(備倭總兵官)으로 임명되어 명의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파병되었다. 조선에서 정말 열심히 싸운 대표적인 명의 장수로 직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 사로병진책이 개시되자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연합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나,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경상 등지에서 왜군을 압박하다가 1598년 왜군이 철수하자 명으로 귀환하였다. 분명 장수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고 열심히 전쟁에 임하였을 뿐 아니라,
보통 육군 총사령관 유정과 해군 제독 진린, 그리고 여기에 (이순신 때문에 수군을 더 잘 아므로&정유재란 말기에는 노량 해전 빼고는 잘 안 알려져 있으므로) 등자룡 정도가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 권율, 정기룡, 한명련을 조선 최고의 장수로 뽑았다.[6]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휘하 명나라 군졸이 조선 민간인을 약탈하다가 실수로 죽게 한 일이 있었는데, 선조는 그 군졸을 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귀에게 일렀으나 "그가 비록 꼭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살인하였으니 그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면 이곳의 사람들이 반드시 「살인을 했는데도 벌을 주지 않더라. 」고 하면서 앞으로 중국에는 법도가 없다고 말할 것이며, 우리 군사들도 또한 「살인을 한 자도 벌이 없더라. 」고 하여 장차 우리의 법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명령을 어기더라도 법도를 엄숙히 세우고자 하므로 명령을 따르지 못한다"고 말한 뒤 그 군졸을 처형했다.[7]
선조 30년 7월 5일 갑오 2번째기사
이후 요동 반도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1612년 차하르의 호돈토(虎墩兎)가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랴오양 목가보(穆家堡)[8]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랴오양현(遼陽縣) 무지아진(穆家鎭).
3. 기타[편집]
아들인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麻巖)은 조부와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에 후금(後金)과의 싸움인 심하 전투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였다.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남경통판겸 조병독량사로 산둥성 등주의 군량을 배를 타고 순찰 감독하다가 1627년(조선 인조 5년) 9월에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만에 황해도 풍천에 이르렀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조상이 되었다. 상곡은 중국 허베이성에 있는 지명이다.
[1] 삼 마에 귀할 귀. 魔鬼가 아니다.[2] 현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숴저우시(朔州市) 유위현(右玉縣).[3] "마씨는 장수로서의 재능이 많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철령 이씨와 더불어 동이서마라 하였다(麻氏多將才. 人以方鐵嶺李氏, 曰 東李西麻)."라고 명사 마귀 열전에서는 말한다.[4] 당시 장량보까지 진격한 이여송의 군대가 적과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밀고 밀리던 와중에, 몇백기 남짓의 기병을 이끌고 측면을 기습지원하며, 이여송과 연계하여 적을 패퇴시켰다고 한다.[5] 보통 육군 총사령관 유정과 해군 제독 진린, 그리고 여기에 (이순신 때문에 수군을 더 잘 아므로&정유재란 말기에는 노량 해전 빼고는 잘 안 알려져 있으므로) 등자룡 정도가 유명하다. [6]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7] 선조 30년 7월 5일 갑오 2번째기사[8]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랴오양현(遼陽縣) 무지아진(穆家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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