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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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명나라의 황족으로, 영락제의 차남이자 어머니는 인효문황후 서씨다.
2. 행적[편집]
2.1. 난폭한 황족[편집]
용모가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지만 인성이 막장이었다. 특히 성품이 흉악하면서 사나웠는데, 학문을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며 경박했고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홍무제 때, 왕자들을 모두 불러 경사에서 학문을 배우게 했는데 주고후만은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언동이 가벼워 홍무제는 손자 주고후를 미워했다. 홍무제가 붕어하자 아버지 주체를 따라 도성으로 와서 형 주고치와 함께 경사를 지키다가 주고후의 외삼촌인 서휘조[1] 가 주고후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보고는 법도를 지키라고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고 멋대로 서휘조의 말을 훔쳐 타고는 서휘조와 건문제한테 인사도 없이 도성을 떠나는 무례함을 보였다. 도성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행패를 부리며 백성과 관리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난의 변 때, 아버지 주체를 따라 종군해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갔다.[2] 동창에서 패해 주체가 달아나고 장옥이 전사하자 고후는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조정의 남군을 격퇴했으며, 연의 군사가 포자구에서 서휘조에게 패하자 기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주체가 "내 힘이 피곤하지만 용감하게 다시 싸워야 한다."고 하자 주고후는 직접 선봉장이 되어 기병을 이끌고 남군을 물리쳤으며, 이 공으로 영락제는 주고후를 형 주고치보다 더 총애한다. 그러나 주고후는 자기 능력만 믿고는 교만하고 방자해 법을 지키지 않았다.
2.2. 난폭한 황자[편집]
영락제가 즉위하자 황태자를 세우는 것에 논의하면서 기국공 구복, 부마 왕녕선 등의 무신들과 일부 대신들은 주고후가 공이 많다는 것을 들어 장남인 주고치 대신 주고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이 주고후가 공이 많고 재주가 뛰어났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언행이 좋지 못한 것을 들며 반대를 했다. 영락제는 주고치가 몸이 좋지 않은데 주고후를 대신 세울 수 없어 고민을 하다, 주고치의 아들이자 영락제의 장손인 주첨기의 자질이 좋다는 해진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고치를 황태자로 세운다.
주고후는 영락제가 한왕에 봉해 영지는 운남에 있었지만 귀양이라고 항의하며 남경에 남아 봉지에 가지 않았고, 자신을 당 태종에 비유해 천책위[3] 의 호위를 받으며[4]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 1415년에 청주를 봉지로 고쳐 받았지만 부임하지 않고 그대로 도성에 남았다. 영락제가 북방을 순시하러 도성을 떠나있는 도중 주고후는 군사들을 몰래 모아 사병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도성의 백성들을 약탈하는 행패를 부린다. 이때문에 병마지휘사 서야려(徐野驢)가 주고후의 일당을 벌하자 격분하여 직접 찾아가 철퇴로 서야려를 때려죽였다. 게다가 황제의 기물까지 멋대로 사용하는 등[5] 더욱 오만 방자하게 행동한다. 나중에 북방을 순시하고 돌아온 영락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주고후가 도성에서 저지른 악행과 아버지의 기물을 멋대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크게 분노하여 즉각 주고후를 체포하여 끌고 와 질책한 다음 그의 의관을 벗겨 서금문에 가둔다. 영락제는 주고후한테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난 터라 그를 서민으로 폐하려 했지만, 형인 황태자 주고치가 용서를 빌어준 덕분에 주고후는 군대를 몰수당하고 안주를 봉지로 고쳐 받은 다음 도성에서 쫓겨났으며 영락제가 죽을 때까지 도성으로 오지 못하는 선에서 처벌이 그치게 되었다.
2.3. 주고후의 난[편집]
영락제가 사망하고 홍희제를 거쳐 선덕제가 즉위하고 주고후는 선덕제로부터 하사품을 다른 황족들보다 많이 받는 특혜를 누렸으나 여전히 오만 방자했다. 나중에는 1426년 8월에 안주에서 오군도독부를 세워 산동 도지휘인 근영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며, 목청을 북경에 보내 영국공 장보와 내통하게 했다. 그러나 장보가 목청을 붙잡아 명나라 조정에 고발하면서 발각되었다.
주고후는 음모가 들통나자 맨 처음에는 낙안주의 군대를 소집하여 저항했다. 그러나 선덕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 낙안주 성까지 오면서 민심이 흩어지고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도 전의를 상실하여 하나같이 그의 명령을 듣지 않자 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투항하기로 하는데,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하룻 동안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기와 반란 문서들을 불태우고 지하 갱도로 도망치다가 감시하던 관군에게 붙잡혔고 수도로 압송된다. 조정의 신하들은 주고후가 그동안 저질러온 악행과 죄가 크다고 간언하며 하나같이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선덕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고후를 서민으로 폐하여 가족들과 함께 서안문 안의 소요성에 감금했다. 대신 주고후의 부하들과 그와 내통한 사람들은 전부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변방으로 추방된다.[6] 이후 주고후와 가족들은 소요성에 감금되어 살다가 선덕제가 소요성으로 찾아오자 갑자기 주고후가 뛰쳐나와 선덕제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선덕제는 이번만큼은 용서하지 않기로 작정하여 근위병들을 시켜 주고후를 제압한 다음 300근이나 되는 구리독에 집어 넣어 덮게 했는데, 주고후는 힘이 세서 구리독을 머리에 이고 있는 채로 일어섰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 선덕제가 그를 다시 집어넣은 다음 나오지 못하게 큰 돌을 올려서 눌러버리고 독 위에 불을 피우게 하자 구리독이 불에 녹으면서 주고후는 불에 타 죽었다. 그의 아들들 역시 모두 처형된다.
3. 평가[편집]
전체적으로 보면 뛰어난 인재였으나 난폭하고 오만한 막장 인성과 역량에 걸맞지 않은 터무니없는 야심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다가 화를 초래하여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특히나 형 홍희제와 조카 선덕제가 자신을 황족으로서 너그럽게 잘 대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려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형과 조카의 은혜를 원수로 보답하려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선덕제는 주고후가 저지른 죄와 악행을 고려해보면 즉시 반역죄로 3대를 멸문시켜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숙부이자 황족임을 감안하여 유폐시키기만 하는 큰 자비를 베풀어주었는데, 주고후는 잘못을 뉘우치긴 커녕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에 적반하장으로 앙심을 품고 조카이기 이전에 황제인 선덕제를 폭행하면서 끝내 자신은 물론 아들들의 처형까지 자초했으니 이 정도면 막장 그 자체다. 아마도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락제와 신하들의 걱정대로 황제가 됐다면 영락제 열화판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락제가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쿠데타를 통해 황위에 오른 것과 달리 주고후는 명분도 없는 쿠데타, 그것도 조선의 계유정난보다도 더더욱 명분이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정통성 문제 또한 영락제보다 훨씬 심해졌을 것이다. 변수에 따라서는 금나라의 해릉양왕처럼 쿠데타로 황위에 올랐다가 쿠데타로 몰락하는 꼴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7]
주고후 본인과 달리 주고후의 아들들은 주고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식의 기록이 정사와 야사를 막론하고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주고후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쿠데타 시도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황위 계승권과 상관없는 방계 황족으로서 무난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주고후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과 비뚤어진 인간성으로 자기 아들들까지 함께 죽게 만든 셈이다.
4. 대중매체[편집]
2019년 드라마《대명풍화》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매우 크다. 하지만 난폭한 성품을 지녀 문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폭력을 자주 일삼아 작중에서 인망은 말그대로 바닥이다. 특히 작중의 인성은 말 그대로 막장 그 자체인데, 동생을 아껴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자신의 잘못을 감싸준 형인 홍희제조차 그가 먹는 약에 소량의 독을 넣어 형이 일찍 죽게 만들었다.[8] 이 때문에 아버지인 영락제도 주고후에게 속을 썩는다. 나중에는 계속된 행패로 인망이 나빠지자 아버지도 더는 참지 않고 그를 변방으로 추방시켜버리고 황위 계승에서도 완전히 배제해버린다. 이에 주고후는 충격을 받고는 적국인 오이라트와 내통해 황위에 오르려 했다. 선덕제 즉위 후 군사를 일으켰으나 장수와 병사들이 그냥 투항해버리면서 반란에 실패하고 체포된다.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고 우겸과 자신의 사생아를 혼인시킨다. 화형에 처해지는 역사와 달리 처자식을 직접 죽여서 체포되었고 이를 이용한 선덕제가 그에게 친족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하여 처형되는 최후를 맞는다.
2009년 드라마《정화하서양》에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주고치보다 훨씬 무식한 것으로 표현된다. 연왕이 거병하고 주고후는 군량 수송 임무를 맡았는데, 성동격서 당하여 군량을 모두 잃었다. 형과 달리 아버지의 대항해 정책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다만 대항해가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찬성했다. 시박사를 맡게 되면서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했다. 나약한 형을 대놓고 무시하며 자신이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감추지 않는 단순한 성격이라 가족과 신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무식해서 조정에서 정견을 말하기만 하면 신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왜구와 결탁해 무기를 팔기도 했으며 사형수들을 빼돌려 일본에서 사병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딱히 선악구도가 존재하지 않는 이 작품에서 메인 빌런을 맡고 있으며 형보다 분량이 많다.
2022년 드라마《산하월명》에 등장한다. 홍무제가 '고후'란 이름을 지었다. 공부 시간에 매를 날리러 가기도 했다. 엄마 말 잘 듣는 형을 싫어한다. 행실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많이 맞았다. 사촌인 태자가 북평을 시찰하자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태자로 정했으면 반대의 상황이었을 거라며 안타까워 했다. 홍무제는 주고후가 겉만 주체를 닮았다고 평가했다.
드라마《대왕 세종》에서 등장한 적이 있다. 조말생이 세종에게 그에 대해 언급하는데, 말로는 '주고후'라고 하면서 자막으로는 '주고구'라고 오타가 났다. 시종일관 조선을 견제하는 명나라의 상황을 대강 보여주기 위해 주고후의 반란을 아주 잠깐 다뤘는데, 황제의 측근인 왕진이 첩보를 입수하고 쉽게 제압한다. 왕진이 주고후를 체포하고 대뜸 폴더인사를 박더니 "귀한 분을 정~중히 뫼셔라."는 명을 내리는데, 잠시 후 들려오는 아주 처절한 비명 소리가 일품. 마침 협상차 명나라로 건너온 여진족 추장 이만주가 이를 보고 쫄아서 명에게 붙고 조선(= 세종)을 적대하게 된다.
5. 둘러보기[편집]
[1] 홍무제의 측근이자 충신인 서달의 아들.[2] 주고후는 힘이 세고 승마와 궁술을 잘했다.[3] 명나라에서 황궁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하는 황제 직속의 근위대다. 인원은 5,000명이다. 황제의 친위대를 자신의 경호로 청하는 참람된 행위와 그 천책위의 연원, 즉 태자를 타도하고 즉위한 당 태종 이세민의 호칭이 천책상장임을 살펴보면 자신이 태자의 자리를 대체하겠다는 역심 인증이나 다름없는 셈이다.[4] 물론 주고후 독단으로 하지 못하고 영락제에게 간청하여 호위를 받게 되었다.[5] 영락제의 용포와 말, 수레를 멋대로 썼다. 이 정도면 패륜에다 반역죄나 다름없는 셈이다.[6] 640명이 처형되고 1500명이 유배되었으며 720명이 변방으로 추방되었다.[7] 그런데 해릉양왕은 적어도 쿠데타의 명분은 충분했다는 점에서 쿠데타 자체는 옹호받을 만한 인물이다. 해릉양왕이 쫓아낸 금 희종이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단지 금 희종을 쫓아내고 황위에 오른 인물이 하필이면 어마어마한 호색한인 해릉양왕이라서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8] 다만 실제 홍희제는 선천적으로 병약한 데다 운동을 매우 싫어하고 식탐이 심하여 비만을 포함한 성인병을 심하게 않고 있었기에 원래부터 건강이 나빴다. 특히 홍희제는 황제로서는 1년도 안 되어 사망한 것이지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46세로 당시로서는 많은 나이였기에 요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는 병약한 체질에 비해 오래 산 셈이다. 21세기로 치면 선천적으로 병약하고 성인병을 앓기까지 하던 사람이 60대나 70대까지 산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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