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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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여진 훌리가이 부족의 족장
2대 석가누

3대 이만주

부족 멸망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李滿住, ? ~ 1467년

건주여진 훌리가이 부족의 추장으로 아하추의 손자, 석가노의 아들. 가족과 함께 조선군에 살해당하며 대가 끊겼다.


2. 생애[편집]


명나라여진족 분류에서 건주여진에 속하는 훌리가이 부족의 추장이다. 이만주의 조부 아하추[1]이성계의 부하였으나 이성계 사후 아하추의 손자 이만주는 조선과 대립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의 주적으로 세조 말까지 조선에 복종하는 척 하며 조선과 명을 괴롭혔다.

1424년에 달단에게 쫓겨 1만 호를 이끌고 압록강 중류의 파저강 지역으로 이주해 옹촌 근처의 올랍산성 남쪽 기슭에 거주했으며, 1433년 4월에는 조선의 함길도 여연을 침입했다가 최윤덕, 김효성에게 격파당했다. 1437년 9월에 조선에서 이천을 보내 공격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신빈현 소자하 상류의 호난합달 산 아래로 피했다.

1447년에 이만주는 명으로부터 도독동지에 임명되었고 1455년 12월에는 명 조정에서 이고납합을 도독동지로 대신하게 하면서 이만주에게는 건주위의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1467년에 명이 북원 공략에 집중하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빈집이 된 요동을 공격했다. 이에 명이 분노하였다.

1467년 조선 측에서는 의주목사 의공이 사냥을 하던 중에 조선 군인이 여진족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이 즉각적인 보복을 논의하던 중에 명이 조선에게 협공을 제안했다. 요동에서 조선의 군사작전은 명나라로서도 무척 신경 쓰이던 일이였으나 마침 조선과 명의 목적이 일치했다. 조선은 이시애의 난 토벌에 동원된 군대를 다시 편제하여 1467년 9월 강순이 이끄는 중군(中軍) 600명과 궁수부대, 어유소가 이끄는 좌군(左軍) 5,400명, 남이가 이끄는 우군(右軍) 4,300명으로 구성된 1만에 이르는 군대를 출정시켰다. 9월 29일 이만주의 건주 근거지를 초토화하고, 30일 이만주의 수급을 베었다. 온다고 하던 명나라 군대는 오지 않았으니 '조선군이 명군이 오지 않아 먼저 토벌했노라'는 방문을 써 붙이고 10월 2일 철군한다. 이때 이만주의 수급을 벤 장수가 진장(陳將) 유자광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기록이 있다.

오랫동안 조선과 명을 괴롭혀 온 것치고는 최후가 참 허무한데, 조선군이 공격하려는 줄 예상 못 했는지 가족과 측근들과 함께 근거지에 남아 있다가 일망타진 되었다. 사실 이건 조선조차 예상 못한 것으로, 애초에 세조는 군대를 출정시키면서도 "이만주는 이미 도망쳤을 것이다. 먼저 나서서 싸우다가 조선군 때문에 놓쳤다는 트집을 잡힐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며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이 당시 조선이 건주여진을 잠깐 점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 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명나라 황제 성화제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전자에 짐(朕)이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정토(征討)하려고 하여 왕으로 하여금 천병(天兵)을 협조하게 하였는데, 이제 왕의 주문(奏文)을 얻어 보고 배신(陪臣)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姜純) 등을 보냈음을 알았다. 강순 등은 군중(軍衆) 1만여 명을 거느리어 압록강(鴨綠江)·발저강(潑猪江) 2강(江)을 건너 올미부(兀彌府)의 제채(諸寨)를 공파(攻破)하고, 역로(逆虜) 이만주(李滿住)·이고납합(李古納哈) 부자(父子) 등을 죽이었으며, 그 부속(部屬)의 두축(頭畜)을 참획(斬獲)하고 그 여사(廬舍)에 쌓아서 모아 놓은 것을 불살라 그들이 약탈한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人口)를 얻게 하고, 배신(陪臣) 이조 참판(吏曹參判)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치니, 이미 왕이 가져다 바친 적속(賊屬)은 관례에 따라 인구(人口)를 처치하여 친히 완취(完聚)하게 하여 주었고, 우축(牛畜)은 군둔(軍屯)의 종자로 주었다. 진실로 왕은 대대로 돈독하고 충정(忠貞)함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짐(朕)이 척찰(尺札)로써 왕에게 명하고 왕의 나라의 군중(軍衆)이 해동(海東) 에 향응(響應)하여, 짐의 장수와 군졸이 벼락같이 빠르고 바람같이 몰아, 내외(內外)가 합세(合勢)하여 역로(逆虜)가 와해(瓦解)하였으니, 왕은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짐과 왕은 군신(君臣)이 마음을 한가지로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이제 내관(內官) 강옥(姜玉)·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백금 문금(白金紋錦)·서양포(西洋布)를 주고, 그 강순(康純)·고태필(高台弼) 등에게도 또한 각각 주어서 그 노고를 정표(旌表)하니, 왕은 그것을 공경하여 받으라. 국왕(國王)에게는 은(銀) 1백 냥(兩), 청여의규심 융금(靑如意葵心絨錦) 1단(段), 백지록수대보상화 융금(柏枝綠壽帶寶相花絨錦) 1단(段), 청련구화 융금(靑蓮球花絨錦) 1단(段), 단반홍전지보상화 융금(丹礬紅纏枝寶相花絨錦) 1단(段),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 대홍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大紅紵絲) 2필,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 흑록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黑綠紵絲) 2필,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 청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靑紵絲) 2필, 소암화팔보골타운 대홍저사(素暗花八寶骨朶雲大紅紵絲) 1필, 소청육운 저사(素靑六雲紵絲) 2필, 소암골타운 대홍저사(素暗骨朶雲大紅紵絲) 1필, 소앵가록육운 저사(素鷪歌綠六雲紵絲) 2필, 남채견(濫綵絹) 4필, 홍채견(紅綵絹) 8필, 백서양포(白西洋布) 10필(匹)을, 영병관(領兵官)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에게는 각각 은(銀) 20냥(兩), 직금흉배호표 대홍저사(織金胸背虎豹大紅紵絲) 1필, 소앵가록육운 저사(素鷪歌綠六雲紵絲) 1필, 소청육운 저사(素靑六雲紵絲) 1필, 소흑록육운 저사(素黑綠六雲紵絲) 1필, 홍채견(紅綵絹) 3필, 남채견(藍綵絹) 1필(匹)을 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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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합출(阿哈出) 또는 어허추(於虛出)로도 표기되어 있다.[2]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