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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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3대 대왕
고종 | 高宗

파일:강화고려홍릉.jpg
홍릉 전경
출생
1192년 2월 3일
고려
즉위
1213년 8월 27일
고려 양광도 강안전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사망
1259년 7월 21일 (향년 67세)
고려 강도 강화군 류경의 사저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능묘
홍릉(洪陵)
재위기간
고려 왕태자
1212년 8월 19일 ~ 1213년 8월 26일 (1년)
제23대 대왕
1213년 8월 27일 ~ 1259년 7월 21일 (45년 10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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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진(瞋)[1] / 질(晊) → 철(㬚)
부모
부왕 강종
모후 원덕왕후
형제자매
10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안혜왕후
자녀
2남 2녀
종교
불교

대명(大明) / 천우(天祐)
묘호
고종(高宗)
시호
고려: 안효대왕(安孝大王)

: 충헌왕(忠憲王)[2]
절일
경운절(慶雲節)


1. 개요
3. 생애
4. 평가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려 제23대 대왕.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고려가 올린 '안효대왕'(安孝大王)과 원나라가 내린 '충헌왕'(忠憲王)이 있다. 보통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헌안효대왕'(忠憲安孝大王)으로 불린다.

는 '철'(㬚). 자는 '대명'(大明) 혹은 '천우'(天祐). 제19대 명종의 손자이자, 제22대 강종 원효대왕의 아들로, 권신 최충헌의 적(嫡) 매형이자 사돈지간이기도 했다.[1]

치세는 우봉 최씨 일가에게 끌려다니는 굴욕과 몽골과의 전쟁 두 가지로 표현된다. 이 시기의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고려대장경》[2]을 조판했다는 점인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우봉 최씨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는 했다.


2. 시호, 묘호, 존호[편집]


고려가 자주적으로 올린 공식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고종'이란 묘호는 '고조'(高祖) - '고종'(高宗) 등 '고'(高) 자 세트로서 상당히 좋은 묘호인데 한나라 태조 고황제 유방의 존칭이 '고조'였으며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묘호도 '고종'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시호를 받은 임금은 전부 국가가 멸망하기 직전일 때의 임금들이다보니 인식이 좋지 않다.

시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려의 천자로서 받은 독자적 시호인 '안효대왕'(安孝大王)이다. 시호가 아들 원종이 올린 시호뿐인데, 이는 고려가 워낙에 혼란스러웠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다보니 추가적인 시호를 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충헌왕'(忠憲王). 원나라가 제26대 충선왕의 증조부이자 제25대 충렬왕의 조부이니 원나라의 제후로서 3대조를 봉해준 것이다.

고종과 그의 후계자 원종은 묘호를 받고 고려의 천자식 종묘[3]에 안치된 마지막 두 군주였다. 누구의 제후로 안치된 것이 아니기에 원나라가 하사한 시호도 없었지만 1310년에 손자 충렬왕의 시호를 정할 때 원나라는 충렬왕을 포함해 그의 선왕들 2명도 시호를 정했다. 이는 원나라가 그들을 신하로 취급하는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다.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천자'(天子)[4], '만년천자'(萬年天子)[5], '지존'(至尊), '성황'(聖皇)[6], '아황'(我皇), '제'(帝)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는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했으며(외왕내제), 이러한 점은 거란, 여진, 몽골 등 외부의 야만족에 대해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생애[편집]


1192년 1월 18일 아버지 강종태자이던 시절에 태어났다. 5세 때인 1197년 할아버지 명종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원덕태후는 모두 강화도유배되었으며 어린 고종은 어떻게 됐는지 《고려사》에 나오지 않아 알 수 없다.

수창궁 사변 이후, 1212년 아버지가 최충헌에 의해 국왕으로 옹립되면서 서해도 풍주 안악군에서 다시 개경에 돌아왔으며, 이후 만 20세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고령의 아버지 강종이 재위 1년 8개월만에 붕어하면서 1214년 천위(天位)에 올랐다.[7]

1215년 아버지 강종을 태묘에 모시면서 선조들[8]에게 시호를 더하고, 위봉루에서 사면령을 내리며 국정 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규보는 고종에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을 지어 올리며, 고종을 '성황'(聖皇), '제'(帝)라고 찬양했다.[9] 고종은 왕실 제사를 크게 치루며 제18대 의종 이후 추락할대로 추락한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려 한 듯하지만 힘이 없어 최충헌의 눈치를 보는 신세였다. 특히 최충헌은 고종이 움직일 때 왕의 허가도 없이 어가에 같이 타는 무례함을 보이며, 고종을 우습게 봤고 최충헌의 중방이 조정을 마음대로 다루며 왕실의 건물을 부수는 등 만행은 여전했다.

고종 3년, 몽골 태조 칭기즈 칸 11년인 1216년부터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전란을 통해 당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몽골 제국과 고려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문서와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 참조.

1216년 금나라반란이 일어나고, 가뭄이 드는 등 나라 꼴이 막장이 되자 금나라가 구원 요청을 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지만 모두 무시하고 차단했다. 하지만 금나라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온갖 재화를 들고 고려 국경에 와서 당시 밀무역이 흥했다고 한다. 8월에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들이 고려에도 선전포고를 해오자 군대 인사를 재조정했고, 9월부터 작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달단군"(몽골군)이 금나라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참고.

1217년 거란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해와 황주[10]가 속절없이 공격당했다.

1218년 금나라 반란군[11]후요까지 침공하며 북방이 개판이 되었다. 12월에 몽골군이 포선만노와 힘을 합쳐 거란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고려 북방에 들어왔다.

1219년 1월 몽골과 고려의 정식 접촉이 성사됐지만 몽골의 장군들은 무례하고 고려의 예법을 몰라[12] 자신들의 털옷과 활을 찬 채로 고종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려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고종의 안색이 변하고 좌우가 당황했을 때 한 신하

"감히 추한 오랑캐(醜虜)가 지존(至尊)에게 다가갈려 하다니!"[13]

라고 외치며 나가라고 하자 결국 몽골 장군들은 고려 예법대로 고려식 의복을 입고 읍을 했다.[14]

1219년 9월 20일 제5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초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자가 되었다. 1221년 9월 몽골 사신이 또 와서 늘 했던대로 오만하게 굴자 고종은 몽골 사신을 내쫓고 사신을 더이상 받지 않으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해 화를 냈다고 한다. 고종은 고려 국왕이 아무리 왕권이 추락했다고 해도 고려 안에서는 천자(天子)로서 군림했으니 몽골의 무례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1223년 '황태후'(皇太后)를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는데 태황태후는 당시 사망한 희종의 모후 선정태후와 생존해 있던 고종의 모후 원덕태후 2명 중 1명으로 보인다.

1224년 1월 신하들이 최우의 집에서 논의하여[15] 몽골 사신에게 예물을 쥐어주고 화친의 뜻을 담아 돌려보냈다. 근데 이 놈들은 이상하게 비단 등을 국경에서 버리고, 자기들이 요구했었던 수달 가죽만 들고 갔다.

1225년 1월 몽골로 돌아가던 길에 몽골 사신들이 강도에게 살해되었다.[16] 고려는 진상 확인을 한 뒤 강도에게 죽었다고 전했으나 몽골은 이를 믿지 않고 결국 단교했는데 이 사건이 나중에 길고 긴 여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고종은 최우에게 강제로 강화도로 끌려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강화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살면서 온갖 '도량'을 벌였는데 '도량'은 불교 기도식으로, 역대 고려 국왕들이 자주 행했지만 고종만큼 자주 한 국왕이 없었다. 천병신중(天兵神衆) 도량, 공덕천(功德天) 도량, 화엄신중(華嚴神衆) 도량, 인왕(仁王) 도량, 제석천(帝釋天) 도량[17] 등이었다. 보통 도량은 승려가 기도문을 읽는데 몇몇 도량은 고종이 직접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마 국난을 기도로라도 풀길 바랬을 것이고, 실권은 최우가 쥐고 있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이 이 것밖에 없기도 했다. 불공을 드린다는 명목으로 감시 투성이인 을 잠시라도 나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한 몫했을 것이다.

1249년 11월 제6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제2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우가 죽고, 천출이었던 최항이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고종은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1254년 7월 강화도를 잠시 나와 승천부(昇天府)[18]에 있는 궁궐[19]로 가 몽골의 사신들에게 자신이 강도에서 나오겠다고 언급했다.

1257년 4월 제7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제3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이 죽고, 역시 천출이었던 젊은 최의가 집권자가 되었다. 제8대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최의는 선대 최항의 측근들과의 갈등 끝에 1년 정도 밖에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1258년 3월에 그 일족과 함께 주살되었으며(무오정변), 김준이 제9대 무신정권 집권자가 되었다. 1258년 5월과 8월에 다시 바다를 건너 승천부의 궁궐로 가 몽골 사신들을 접견했으며, 강화 협정에 따라 태자 왕전원나라에 입조하러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신하 유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가 결국 1259년 6월 30일에 붕어했다. 그의 유조(遺詔)는:

"내(余) 덕은 박한데 부담은 중하니, 병이 날로 심해진다. 생각컨데 왕위(王位)는 오래 비워 놓을 수 없다.

내(予) 원자(元子)는 덕이 위까지 알려질 정도니 자리를 이어받도록 명한다.

너희 관료와 부서는 사왕(嗣王)의 령을 듣도록 하되 사왕(嗣王)이 떠나있을 기간 동안은 군국(軍國)의 임무는 태손(太孫)이 처리하라.

산릉의 제도는 검소하게 하고 제사는 삼일안에 끝내도록 하라."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조령(詔令)이다.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거부한데다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조(遺詔)에 의해 태손 왕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 왕전은 이듬해인 1260년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50년 뒤인 1310년 7월 을미일, 과거 중국 한나라 제후의 시호는 한나라 황제가 하사했다는 전례에 따라 원나라가 관작 및 시호를 추증하니

'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 고려국 충헌왕(高麗國 忠憲王)'

에 봉해졌다.


4. 평가[편집]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의 시대에는 안으로는 권신(權愼)들이 서로 이어가며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하였고, 밖으로는 여진(女眞)과 몽고(蒙古)가 군대를 보내어 해마다 침입하였으므로 당시 나라의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보위(寶位)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親朝)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社稷)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고려사》<고종 세가> 권 제24.


고려 역대 국왕 중 가장 재위 기간이 긴 임금이었는데 무려 46년이었다.[20] 이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 광무제보다 긴 재위 기간이었지만 존재감은 훨씬 떨어지는데 그 기간 내내 최충헌을 비롯한 우봉 최씨 무신정권에게 권력을 빼앗긴 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도로 옮기며 9차례나 벌어진 몽골 침략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최항 집권기에는 개굴욕을 당하기도 했으며[21] 이러다보니 고종은 얼마나 최씨 무신정권에 쌓인게 많았는지 후에 김준이 마지막 집권자 최의를 죽이고, 이를 아뢰었을 때 공을 치하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그래도 최충헌 집권 때 5세로 우봉 최씨 무신정권의 흥망(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4대)을 모두 지켜본 풍운의 임금이었다.[22] 최씨 무신정권이 망하자 심한 낭비로 이를 질책하는 관리들의 상소가 있었다고 한다. 고종이 대궐을 나와 신하들 집에 머물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미친듯이 바둑잔치에만 빠져 들었다고 한다.[23] 고종의 업적 중 저평가받는 부분이 있는데 자신의 아들인 태자 왕전을 몽골에 입조토록 한 점이다. 고종은 9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몸소 겪으면서 더이상의 전란을 막기 위해 화약을 맺도록 한 것이다. 당시 고종 본인이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 직접 입조할 수 없어 태자 왕전을 입조토록 했고, 이 부분은 몽골도 이해를 해줬다. 무신들의 반발을 누르고 오랜 전란의 시대를 마감케 했지만 그것이 항복으로 평가되기에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고종은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갖은 고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텼으며 재위 기간 동안의 경험을 살려서인지 외세의 도움없이 '무오정변' 때 간접적으로나마 개입하여 자체적으로 최씨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인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가 무신정권이었고, 여몽전쟁이 터진 시점에서 본다면 기구한 군주였다.

동국통감》에서는 그야말로 붙어사는 왕으로 취급받지만 분수를 지켜 장기간의 재위를 했다는 점을 빌려 사직을 지킨 마지막 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권신들을 자체적으로 제거한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장기간의 재위 동안 권신들의 연이은 권력 독점에 손놓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4] 또한 원종에 대한 견제를 다 놓아 안경공 왕창이 원종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결국 안경공이 임연에 의해 왕에 올랐으나 원나라의 압력으로 폐위되어 원종이 다시 왕에 올라 안경공이 제거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그 사이 숱한 역모반란이 터지는 등 후사 문제를 말끔히 해결짓지 못했다. 조선 제16대 인조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었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 반대로 나간 덕택에 고종 나름대로 이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오랜 재위를 바탕으로 무오정변을 이룩하는데 간접적 영향을 주며 내정면에서는 아들 원종보다 그나마 나았으나 권신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파탄내도 지켜만 보았고, 무오정변 이후 왕권을 공고히 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대신 외교에서는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점에서 보면 조선 제11대 중종과 비슷했다. 외치에서 성과를 거두고 권신들의 농락 속에서 재위를 오랜 기간 버틴 것은 높은 평가를 받으나 단지 그뿐이었고, 고려에서는 재위 기간을 놓고 볼 때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군주였으며, 그래서 평타만 치던 왕이었는데 이러한 점은 고려 17대 인종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애초에 고종 자체가 우봉 최씨 정권의 초대 권력자인 최충헌이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할 인물이었다.[25] 결국 즉위 초부터 권력 기반이 전무했기에 4대 62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의 만행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26]


5. 기타[편집]


  • 베트남 교체기때 쩐투도에 의한 리씨 대량 학살을 피해 탈출한 리 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한 명인 리롱뜨엉 황자[27]를 받아줘서 잘 대우한 군주이기도 하다. 리롱뜨엉, 즉 이용상은 '화산군'에 봉해져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 다음 왕조에서 같은 묘호를 받은 군주능호도 '홍릉'(洪陵)으로 한자까지 일치한다. 또한 두 사람 다 재위 기간이 40년을 넘었으며[28], 수명도 만 67세로 일치하고[29] 재위 내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는 절묘한 공통점이 있다. 거기다가 두 임금들의 아들인 원종순종도 각기 원 간섭기일제강점기를 맞이했고, 손자인 충렬왕, 영친왕은 간섭/침략국 황족 배우자를 맞았으며, 증손자인 충선왕, 이구에 이르면 외국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그래도 의 부마('귀르겐')국 형태로 나라가 유지는 됐으나 후자는 아예 나라 자체가 문을 닫은 것이었다.

  • 2019년 11월 고종이 강화로 수도를 천도한 기념으로 강화군 송해면에서 강화천도공원을 조성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attachment/이규보/이규보.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30]
  •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에서 고려 군주로 자주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반적으로 C 대라 저조하지만 매력이 B로 상대적으로 높은게 위안이다. <원조비사> 정발판에서 원판의 희종 대신 플레이 가능 군주로 선택이 되는데 고증에서 오류를 겪고 있다. ## <징기스칸 4>에서는 1229년 시나리오에서 고려 군주로 등장하는데 명종, 공민왕과 달리 35세의 젊은 나이로 시작하며 10세의 원종이 왕자로 있기 때문에 빨리 자식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능력치는 정치 56, 전투 54, 지모 51에 농업 특기가 있어 실권이 없었던 국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고평가 되어 있는 편. 원종과 김경손은 공예소를 만들어 돈을 벌고 이규보를 간첩으로 보내서 금나라완안진화상몽골 제국의 한인 장수로 고종과 문화권이 같아서 빼내기 쉬운 야율초재, 장유, 사천택, 곽간[31]을 빼내고 야율초재사천택도 간첩 유닛으로 돌려서 회령에 있는 젊고 수명도 긴 쿠빌라이, 훌라구 등을 고려로 영입하면 수월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종(무신).jpg}}} ||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배우 이승효[32]가 연기했다. 실제 역사대로 무신정권에 눌려 별다른 힘을 내지 못한 유약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정치적 실권은 최씨 상국들이 대를 물려가며 독점했고 고종의 곁에는 이장용과 소수의 신하, 환관들만이 함께 했을 뿐. 이 때문에 몽골과 전쟁을 시작할 때, 최우가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김약선이 역모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 최항이 권력을 승계할 때 등 극 중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황실에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33]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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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충헌은 고종의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했는데, 고종의 아들인 제24대 원종의 장인이었던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사위였다.[2] 현재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하다.[3] 7묘제 9실 종묘.[4] <이규보 묘지명>, 《보한집》 <권하>.[5]동국이상국집》 17권.[6] 《동국이상국집》 <성황조향태묘송>.[7] 수창궁 사변으로 제21대 희종이 폐위되고, 고종의 부왕인 제22대 강종이 올려지는 과정에서 고종을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강종과 최충헌 사이에 밀담이 오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8] 1대 태조, 2대 혜종, 8대 현종, 13대 선종, 15대 숙종, 16대 예종, 17대 인종, 20대 신종, 22대 강종. 당시 고려 종묘천자식 9실 7묘제였기 때문에 9명에게 올렸고, 사실상 당시 대표적인 군주 전원에게 올린 것이었다.[9]동국이상국집》 19권 기록.[10]황해북도 황주시. 고려 초 황보제공,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황주량 등을 배출한 고구려계 황주 호족의 본거지이다.[11] 포선만노동하.[12] 당시 몽골은 그 어떤 나라도 막지 못하는 최강의 나라였으니 무례한건 당연했고, 고려와는 단절되어 있었으니 고려의 예법을 몰랐다.[13] 《고려사》원문에 실제로 이렇게 기록됐다.[14] 원래 고종에게 절을 해야하지만 그러지 않았다.[15] 여전히 왕권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준다.[16]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17] 일반적으로 제석원에서 이루어졌다.[18] 원래 정주(貞州)로 개경 개성부의 경기(京畿)(부속 도시)였다. 제16대 예종이 자신의 어머니인 명의태후고향이라는 이유로 '승천부'로 떼어냈다.[19] '승천궐'(昇天闕)이라 한다. 승천부에 있는 궁궐이라 승천궐이었다.[20] 2위는 37년의 11대 문종, 3위는 33년 혹은 34년의 25대 충렬왕(충선왕에게 물려준 7개월의 공백기가 있었다). 한국사 전체를 보아도 8번째로 오래 재위했다.[21] 당시 강화도로 도망갔던 최항은 미친 듯이 술잔치를 열어제꼇는데 정작 고종 본인은 왕실 재산이 바닥나는 바람에 점심 식사를 줄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종은 이 일을 지시하기 위해 좌창별감(창고지기) 윤평을 불렀는데 윤평은 2~3번이나 쌩까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라고 고종은 분노하여 윤평을 파직시키려 했으나 "오늘 내쫒아도 내일이면 다시 복귀할 테니 이게 뭔 징계냐"라는 말과 함께 그만두었다. 이쯤 되면 진짜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신세로 동시에 최항이 고종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푸대접했는지 알 수 있다.[22] 그의 할아버지인 제19대 명종도 같은 일을 겪었다.[23] 물론 당시 기준에서도 을 많이 먹었지만 특이하게도 《고려사》의 사관은 '최씨 무신정권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살만해지니까 늙어 노망든거니 적당히 까여야 된다'는 평가를 내렸다.[24] 최우가 죽기 일보 직전, 최항이 연이어 집권하기 직전에도 손을 못썼다.[25] 최충헌이 고종의 할아버지인 명종(제19대)을 폐위시키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이자 고종의 부왕인 태자 시절의 강종을 강화도로 쫓아보내고, 명종의 동생인 신종(제20대)을 왕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신종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희종이 최충헌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여(수창궁 사변) 역으로 폐위당한 뒤 강종이 즉위하면서 고종 역시 태자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26] 희종도 권력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최충헌을 처치하려다가 역으로 그에게 당하고 만다.[27] 당시 대월(베트남)은 외왕내제를 취하고 있었다.[28] 고려 고종 46년, 조선 - 대한제국 고종 43년.[29] 생몰연도가 각각 정확히 660년 차이가 난다.[30] 그런데 고려의 문신 이규보과 동일한 얼굴이다.[31] 동아시아 지역에서 재야 장수로 나온다.[32]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알천 역.[33] 아버지5촌 당숙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이 겪은 일들을 알고 있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