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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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
Crimean War
Guerre de Crimée
Kırım Savaşı
Кримська війна
Крымская война
날짜
1853년 10월 16일 ~ 1856년 3월 30일
장소
러시아 제국 크림 반도, 캄차카 반도
교전국
교전국1
교전국2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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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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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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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프랑스군 309,268명
영국군 107,864명
오스만 제국군 235,568명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 21,000명
총 673,900명
러시아 제국군 750,000명
그리스군 1,000명
불가리아 의용병 3,000명
세르비아 의용병 2,000명
압하지아 의용병
쿠르드 의용병
총 760,000명
피해
사상자 230,000명
사상자 522,200명
결과
프랑스, 영국, 오스만 제국 연합군의 승리
파리조약 체결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러시아 제국의 패배
4.1. 러시아 제국: 개혁의 시작
4.2. 오스만 제국
5. 영향
5.1. 러시아 제국
5.2. 프로이센 왕국
5.3. 오스트리아 제국
5.4.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5.5. 그리스 왕국
5.6. 전쟁 기술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115118-004-DC4A3F8A.jpg

2시간 전만 해도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가지가지의 꿈과 욕망에 차 있던 사람들이, 몇 백의 사람들이, 이제는 피범벅이 된 굳은 손발을 팽개친 시체가 되어, 능보에, 참호에, 이슬이 촉촉이 내린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세바스토폴의 장례 교회의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샛별은 사푼 산의 산마루 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깜박이던 별들은 서서히 하얘져 갔다. 불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아침 노을이 동쪽 하늘 한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줏빛의 긴 구름이 엷은 야청빛 지평선을 따라 흩어져 달려갔다.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태양이, 생기에 찬 온누리에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며, 또다시 둥실 떠올랐다.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 이야기》


1853년 10월 4일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랑스 제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이름은 전쟁 중후반기 이후의 주전장인 크림 반도에서 따온 것인데 실제로는 크림 반도에서만 싸웠던 것은 아니다. 1877~1878년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또 있기 때문에 제1차 동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나 메리 시콜과 같은 간호사들이 이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나이팅게일의 위인전을 읽은 사람들이나 간호학도들이라면 뭔지는 몰라도 이름은 한 번 들어봤을 전쟁이기도 하다.


2. 배경[편집]


근본적인 배경은 러시아의 지중해 출구 확보 문제였다. 러시아는 1771년 흑해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로 크림 반도를 거점 삼아 흑해에서 세력 확대에 나섰다(남하정책). 16세기 이래 흑해는 크림 칸국과 상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는데, 크림 반도를 확보한 러시아가 이 지역에 요새와 항구를 건설하고 해군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동유럽과 캅카스를 놓고 수백 년 간 충돌해온 앙숙인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잠시 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손을 잡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적대 관계로 변했다. 러시아는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오스만 제국 치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 등을 구실로 오스만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양 해협의 통행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였던 대영제국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급부상한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호락호락 지켜보지 않았다. 영국은 1838년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가로 통상 협정을 맺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군사·경제·정치·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문제의 사후 처리를 위해 주요 당사국인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여기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까지 끌어들인 영국이 런던 해협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켰다.

한편 1851년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부활시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성지관할권, 요컨대 예루살렘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요구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를 받아들이자 이전부터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성지의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러시아와 충돌은 더욱 불가피해졌다.

영국의 압력으로 일단 해협의 통제는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캅카스발칸 반도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국경분쟁을 유도하며 국지적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기회를 엿봤다. 결국 1853년 7월, 러시아가 오스만에 예속된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촉즉발의 위기가 터졌다.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성기의 국력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던 반면,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꺾은 후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열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누구도 오스만이 러시아의 위협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던 영국은, 전면적인 참전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오스만 정부에 강경대응을 권유했다. 또한 오스만 정부도 도나우 강 유역의 속국(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들을 내주면 수도인 코스탄티니예가 코 앞인 터라, 군사적으로 이를 격퇴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쟁을 결심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 및 성지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던 프랑스 제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3. 전개[편집]


30초만에 보는 크림 전쟁의 전개

선전포고는 기세등등하게 했지만, 골골거리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나폴레옹을 꺾고 한껏 기세가 오른 러시아 제국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1853년 11월 30일, 아나톨리아 북부의 항구 도시인 시노페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오스만 해군은 나히모프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해군에게 참패, 11척의 함선 중에서 단 1척의 코르벳만이 살아남아 도망쳤다. 이때 러시아군은 근대화된 폭발형 포탄의 도입에 힘입어 사상자 수 37 대 3,000이라는 압도적인 교환비를 얻을 수 있었다. 뒤이어 캅카스에서의 국지전에서도 오스만군은 러시아군에 참패했다.

해가 바뀐 1854년, 시노페 해전에서 사실상 와해된 오스만 해군을 대신하여 영·프 연합 함대가 흑해에 진입, 오스만 제국의 흑해 통상로를 보호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프 양국은 3월 28일,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선전포고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이에 당황한 러시아는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나히모프 제독이 세바스토폴 수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육상에서 연합군 병력들을 격퇴하기로 한다.

  • 흑해 전역
4월 22일, 영-프 해군 연합함대가 오데사 항구를 포격했고 러시아 선박 24척이 격파되면서 오데사 항은 해군 기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영-프는 우세한 해군력을 토대로 케르치 등 러시아의 흑해 주요 항구를 봉쇄하여 러시아 해군의 주요 요충지를 포격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3층 전열함 4척과 2층 전열함 12척 그리고 60문의 대형 프리깃 4척이 격파당하고 다수의 소형함들을 잃었다. 10월 17일, 영-프 연합해군이 흑해의 킨번 반도를 포격했고 해안포대가 저항했으나 연합국 해군 주력 함선은 철갑선이어서 큰 피해는 없었다. 결국 킨번 반도의 수비 병력은 항복해야 했다.

  • 크림 반도 전역
같은 해 9월, 영·프·오 3국 연합군 20만이 크림 반도 칼라미타 만에 상륙했고 인근의 마을은 별다른 저항은 없이 항복했다. 총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포함한 상륙작전은 9월 14일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 연합군의 칼라미타 상륙을 예상하지 못한 러시아 지도부는 깜짝 놀랐다. 이를 요격하려던 러시아군은 3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9월 20일, 알마 강 전투에서 연합군과 격돌했다. 러시아 방어군은 초기에 고지대를 점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그러나 연합국 포의 사거리는 러시아보다 더 길었고 인근의 절벽에서 일방적으로 적 진지를 포격해 러시아군을 공황상태에 빠트렸다. 결국 영국군의 공세와 프랑스군에 의한 좌익의 궤멸로 인해 수많은 러시아군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도망가면서 첫 번째 전투는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의약품의 부족으로 인해 연합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10월 17일, 크림 반도의 핵심 전략요충지인 세바스토폴 요새가 연합군에 포위당했다. 포위된 요새를 구원하기 위한 시도가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나 모두 연합군에게 격퇴되었으며, 오히려 연합군은 아조프 해 연안에 위치한 러시아군의 다른 요새를 추가적으로 포위 공략하는 등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10월 25일,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연합국은 러시아군에 패배를 당한다. 그러나 연합국의 전략적 우세는 뒤집어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11월 5일, 인케르맨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연합국 병력의 4배나 되는 4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세바스토폴 포위를 풀기 위한 공세를 했음에도 화기 성능 차이에 의한 전투력 격차로 인해 1만 5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채 패퇴해야만 했다.
11월 14일, 연합국의 수송선 30척이 폭풍에 침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겨울철 혹한이 들이닥치면서 연합국의 공세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적지에서 겨울을 나게 된 연합국은 추위와 질병으로 인해 비전투 사상자가 속출했다.
1855년 1월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훗날의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 열강의 지원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러시아에 선전포고, 연합국에 가담하였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약 1만의 정예 병력을 파병했는데, 연합군 사이에서 비교적 유능한 군대로 평가받았다. 2월 17일, 러시아군이 유파토리아의 오스만 군 진지를 공격해 연합국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도리어 오스만 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군은 실추된 위상을 약간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1855년 3월 2일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서거로 러시아의 사기가 꺾였고,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에 불리해졌다. 5월 24일, 연합국이 케르치에 상륙을 하면서 러시아의 보급로는 악화되었고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영웅이었던 나히모프 제독도 7월 16일,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8월 16일, 러시아군은 체르나야 강 인근에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여기서도 패퇴하고 말았다. 9월, 연합군이 세바스토폴을 향해 최종 공세를 취했고 마침내 9월 11일 세바스토폴 요새에 프랑스의 삼색기가 휘날리며 세바스토폴도 함락되었다.
핵심 전선인 크림 반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전세는 연합군에게 완전히 기울었다. 여기에 영국은 특유의 전방위적 공격을 단행했다.

  • 아조프 해 전역
연합국은 러시아군의 보급망을 악화시키기 위해 우세한 해군력을 토대로 아조프 해의 주요 항구들을 포격했다. 이로 인해 항구에 축적된 막대한 식량이 전선에 전달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함선과 항구가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카자크 기병대의 분전 덕분에 연합국의 상륙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 캅카스 전역
캅카스 전역에서는 오스만 군이 지리멸렬한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질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러시아군의 카르스 요새 포위로 인해 도시 전체가 경제난에 시달리다 결국 1855년 11월 29일, 카르스 수비군이 항복했다. 러시아군이 승전을 거듭하던 유일한 전역이었다.

  • 발트 해 전역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초로 발트 해에 작전을 개시한 영국 함대는 핀란드 대공국 남부 해안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요새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여 무참히 박살냈다. 핀란드의 올란드 제도와 헬싱키 항구의 조선소도 영국의 무자비한 포격을 맞았다. 연합국 함대는 러시아 요새포보다 더 먼 사거리에서 일방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러시아 함대는 대응은커녕 제대로 요격조차 하지 못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진입만 겨우 저지했으며 백해에서도 아르항겔스크, 콜라 등이 영국의 포격을 당했다. 자국령의 주요 항만에 가해지는 영국의 전방위적 공세에 러시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지만 연합국의 상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

  • 태평양 전역
태평양에서는 캄차카 반도의 요충지인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도 2차에 걸친 공격으로 인해 점령되었다.[4]

1856년이 되자 러시아는 전쟁 수행 의지를 상실했다. 병력 손실은 급격하게 늘어 갔고, 국가 재정도 나빠졌으며 전세 악화에 따른 민심 이반도 심각했다. 연합군이 크림 반도를 넘어 우크라이나 지방까지 밀고 올 가능성이 있었으며, 수도 일대의 해상 물류는 영국 해군의 봉쇄로 마비되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공개적으로 참전 위협을 했고, 프로이센 왕국스웨덴도 이에 동조할 조짐을 보이자 더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3월 30일,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4. 결과: 러시아 제국의 패배[편집]


인명 피해가 유달리 큰 전쟁이었는데, 러시아만 해도 최소 14만에서 최대 5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만 제국이 10만 ~ 17만, 프랑스가 10만, 영국이 2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의 차이는 병력 투입 수준에 비례하는 편으로 사상률은 전반적으로 비슷했으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차이가 커서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영국은 병사자가 1만 6천 명 정도였던 반면, 프랑스는 최대 6만 명에 달하는 병사자가 발생했다. 물론 프랑스군이 30만, 영국군이 10만이었다는 것과 규모가 클수록 전염병 확산이 쉽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대규모 인명 피해로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유럽이 겪은 최근의 전쟁 중 이 정도 인명 피해를 낸 것은 나폴레옹 전쟁 뿐이었는데, 크림 전쟁은 단기간에 60만이 넘는 피해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피해를 전염병 때문이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전사자보다 크리미안콩고출혈열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사자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크림 전쟁부터 사상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때까지 유럽은 여전히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전열보병이 전쟁의 주 전술로 애용하고 있었기에 크림 전쟁 종전 후 5년 뒤인 미국남북전쟁에서 막대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도 유럽 지도자들은 양키 촌놈들이 제식도 안 맞추고 산개하다가 다 죽는다고 생각했으며[5] 남북전쟁이 종전한 지 40년 뒤에 발생한 러일전쟁 또한 그저 일본군이 무모하게 적 진지에 돌격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수십만 명의 전사자들이 연달아 속출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희미해졌다.


4.1. 러시아 제국: 개혁의 시작[편집]


패전한 러시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엄청난 양보를 해야 했다. 국경은 전쟁 이전으로 강제 조정당했으며 흑해 함대를 해산하고 흑해 연안의 요새들도 철거해야 했다. 도나우 공국[6]에 대해 영유권은 영구히 포기하고, 이 지역은 세르비아와 함께 오스만에 형식상 예속된 자치령이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도나우 강 유역의 자유 통행권도 인접국에게 내주고[7] 오스만 제국 내부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다. 이런 굴욕적인 결과는 표트르 대제 이래로 스웨덴도 밟고 나폴레옹도 몰락시키며 패배를 모른다고 자부하던 러시아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개전 초기에는 자신만만하던 니콜라이 1세도 날이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지고 결국에는 패전이 확실해지자 이로 인해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의 강철 같은 의지는 완전히 꺾여버렸으며 황태자 알렉산드르가 연합국과 치욕적인 협상에 임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심신이 쇠약해지던 니콜라이 1세는 결국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나마 러시아는 크림 전쟁 직후에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에서 고전하던 청나라압박하는데 성공해 1860년 연해주와 외만주를 포함한 300만 평방 킬로미터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영토를 손에 넣고 동해를 거쳐 남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패전으로 러시아에 불리했던 여러 조항들은 1871년에 런던 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대부분 무력화되고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지지를 받아 거의 15년 만에 크림 전쟁의 상처를 씻어내고 흑해 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8] 그리고 러시아는 크림 전쟁 후 20여 년 만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일명 제2차 동방전쟁)에서 압승하여 크림 전쟁 때의 복수를 하고 염원하던 발칸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군사 개입 위협과 외교적 균형을 목표로 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노련한 외교술로 인해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얻어낸 권리의 상당수를 포기해야 했고, 이때부터 러시아는 증오의 화살을 독일에 돌리게 된다. 다만, 그 복수를 하는 데는 67년이 더 걸렸다.

전후의 러시아는 패전 원인을 분석해 근본적인 국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령을 비롯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운송 인프라 부족이 패전의 주요 원인이라 봐서 19세기 후반 내내 전국적으로 철도 건설, 정비 붐이 일었다. 전장이던 흑해 연안에도 철도망이 촘촘하게 깔렸고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광업, 제철업도 발달했다. 돈바스의 공업화는 유럽 전체로 봐도 가장 급격한 공업화였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오스만 제국은 단독으로는 러시아에 확실히 상대가 안 된다고 봐도 될 정도로 국력 차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개혁은 구체제를 완전 뜯어고치진 못하고 일부 분야에 한정됐고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귀족 지주들을 비롯한 기득권의 저항도 거세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2세 역시 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지 못했고, 내부적으로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도 심했다. 그리고 1866년 이후, 차르가 보수화되면서 개혁이 크게 후퇴했으며 농노 해방령은 불공평하게 토지를 분배하고 농민들에게 막대한 토지 상환금을 안겼다. 개혁의 후퇴와 불철저하게 이루어진 농노 해방령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높은 상황에서 제2차 동방전쟁의 승전으로 얻어낸 대가마저 비스마르크에게 농락당해 날려버리자, 정부의 무능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불만이 급증하고 차르 체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에 기반한 반정부 세력이 급성장하고, 알렉산드로 2세도 인민주의 단체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4.2. 오스만 제국[편집]


오스만 제국은 승리에 도움을 준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자국 내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 강화 및 권리증진을 약속했고 그 외에 갖가지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갖가지 추태를 보이며 더이상 그 옛날의 오스만이 아님을 재확인시켰다. 전쟁 전개 과정을 보면 초반 시노페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이 러시아에게 완전히 박살난 후에 영국과 프랑스가 대신 싸워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오스만 이후 오스만은 여러 차례의 개혁을 통해 나름대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서구 역사학자들의 재평가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군은 당대의 인식처럼 무능하지 않았다. 발라클라바 전투의 경우는 앞서 대포가 탈취된 사건만 해도 영국군은 오스만군이 러시아군의 공세가 시작함과 동시에 붕괴했다고 비난했지만, 당대의 기록과 유물 측정이 알려주는 진실은 튀르크군은 최소한 3시간 이상 외부의 도움 없이 버텨냈고, 자만하던 영국군이 정보 부족으로 전선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늦게 합류했던 것이었다. 즉, 분전하던 오스만군이 물자 부족과 장시간의 전투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뒤늦게 도착한 영국군이 오스만군이 고전하는 것만 보고 이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영국군은 오스만군을 신뢰하지 못해서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제외하면 오스만군을 비전투 노동부대로만 이용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영국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는데, 1783년까지 크림 칸국을 봉신으로 두어 크림 반도에 대한 각종 정보를 확보하고 있던 오스만군이[9] 영국군에게 이를 갈며 "비겁하고 무능한 우리는 후방에서 일이나 할 테니 잘난 네놈들이나 알아서 싸워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영국군에게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 후대 영국 역사학자들은 영국군의 큰 피해는 같은 연합군이었던 오스만 제국군을 무시하고 무모한 전술을 구사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생각보다 잘 싸우고 활약했으나, 연합군은 이들이 밀리는 것만 보고 무시했다가 자기들 피해만 더 키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10]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의 얘기는 당시 서구인들이 가졌던 문화적 편견에 대한 반론일 뿐이지 오스만 제국이 건재하고 군사력이 쓸 만했다는 건 결코 아니다. 악조건을 버티는 오스만 제국 병사의 역량과 국가와 군대의 역량은 엄연하게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환자였고 스스로의 힘으로 러시아를 막을 힘이 없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이집트 속주를 다스리던 무하마드 알리가 독립하겠다고 오스만 제국 황제 마흐무트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내부위기조차 스스로 어쩌지 못해 러시아와 서방의 도움으로 넘어가는 판국이었다. 이 위기도 이집트를 후원한 뒤 삼키려는 프랑스와 그걸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파워게임으로서 오스만이 그야말로 서양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음을 뜻한다.

게다가 개혁을 하긴 했지만 눈 가리고 아웅인 데다가 지방에는 여전히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서 다민족간 결속력이 거의 제로였기 때문에, 강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종교나 인종 문제로 광범위한 반란을 선동해서 전쟁 수행 능력을 손쉽게 깎아먹을 수도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 정부는 수입의 일부를 수입 관세에 의존했는데, 이것도 영국이 자유무역이 최고라면서 관세를 내리도록 부추긴 바람에 타격을 받았다. 정부에 돈이 없으면 상비군 유지에도 타격이 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할 일이었고, 따라서 크림 전쟁만 해도 시노프 해전에서는 러시아의 압승이었고, 육전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최후 통첩 등으로 후방이 불안해진 러시아가 전력을 투입하지 않았음에도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상륙 전까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압도하고 있었다. 서방국가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무난하게 승리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실제로 20여년 뒤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러시아에 참패했다.


5. 영향[편집]



5.1. 러시아 제국[편집]


당시 러시아로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그리스 왕국을 제외하고 러시아를 지지해주는 나라가 없었다. 1849년 혁명 때, 대군을 투입해서 혁명을 대신 진압해준 오스트리아 제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러시아의 도나우 강 연안 점령을 발칸 반도에서의 권리 침해로 생각하고 강력하게 반발하여 오히려 참전의사까지 보였다.[11] 러시아는 전면전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포기함으로써 간신히 무마시켰다. 결국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다.[12]

여기에 프로이센 왕국도 러시아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1850년 올뮈츠 협약에서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립이지만 내심으로는 러시아의 패배를 원했다.

전후 러시아는 유럽 전역에 팽배한 반러 감정과 맞서야 했으며,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외교적 성과는 적었고 각국과의 관계 개선은 지지부진했다. 크림 전쟁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1863년에 알벤스레벤 협정을 체결해 프로이센과 화해하는 데 성공하면서 러시아는 겨우 외교적 고립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77년에 오스만을 상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는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명분과 토대를 잘 쌓아둬서 영국과 프랑스도 자국 국민들조차 이교도인 오스만보단 유럽인이 낫다고 옹호하는 여론이 있을 정도라 크림 전쟁처럼 본격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불가리아 독립군 등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의 수도 이스탄불 코앞까지 밀어버렸고, 오스만에게 매우 굴욕적인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는다. 다만 이 조약의 내용이 지나치게 가혹해서 영국이 다시 나서서 위협한 끝에 베를린 회의로 타협한다.


5.2. 프로이센 왕국[편집]


크림 전쟁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는 프로이센으로 평가받는다.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막대한 전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었고, 훗날 독일 통일 중에 크림 전쟁 때 중립을 고수하고 폴란드 반란 진압을 도와준 것으로 러시아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된 점도 프로이센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 때 나빠진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인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으로 변모한 후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친선관계였다. 양면전선을 막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러시아 둘 중 하나와는 친해져야 했는데 보불전쟁을 통해 더 이상 관계가 악화될 수조차 없던 프랑스와의 외교는 사실상 불가능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친해져야 했고 또 같은 게르만 민족이기에 오스트리아와도 친해져야 했다. 문제는 이토록 사이가 나쁜 두 나라를 함께 어우르는게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베를린 회의로 인해 삐걱대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수완 덕에 적어도 유지는 되고 있었지만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킨 후에는 아예 파탄이 나버린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는 새로운 동맹을 찾게 되는데 그게 하필 영국과 프랑스였고, 그 결과 독일 제국은 양면전선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에 대비하여 슐리펜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그마저 문제가 많고 또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해서 1차대전의 참호전으로,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5.3. 오스트리아 제국[편집]


반면 오스트리아는 카를 페르디난트 폰 부올 백작 (Karl Ferdinand Graf von Buol-Schauenstein, 1797 ~ 1865) 이 중립을 깨고 프랑스를 편들어 줘야만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지역의 영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프 연합군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충수였다. 프랑스는 왈라키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연합해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영토를 빼앗았다.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오스트리아는 스스로의 손으로 빈 체제신성 동맹을 깨뜨렸고, 이탈리아 왕국독일 제국 탄생의 산파가 되었다. 또한, 1872년 삼제동맹을 맺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5.4.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편집]


또 하나의 승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었다. 1848~49년의 혁명 기간 중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분투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패배하여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책임을 지고 퇴위까지 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 때문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재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다른 열강을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을 채택하고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참전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는 파리 강화 조약에서 당장 눈에 띄는 이익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카보우르의 예측대로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참전은 훗날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각국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영국이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참전을 환영했다. 크림 반도에 투입한 자국 병력이 프랑스군보다 적어서 동방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는 프랑스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59년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중립을 지킨 반면, 프랑스는 사르데냐-피에몬테와 연합했다. 영국은 이탈리아의 통일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영향으로 통일되어 이탈리아 반도가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은 경계하고 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상대적 약화는 유럽의 세력균형과 프랑스 재흥방지 정책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기 인도차이나에서의 반란과 중국에 대한 영불연합작전을 펼쳐야하는 입장에서 세력균형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돕거나, 프랑스에 전면적으로 딴지를 걸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개입을 묵인하고 자신은 중립을 유지하였다.


5.5. 그리스 왕국[편집]


한편 그리스 왕국은 고토 수복을 부르짖으며 러시아와 연합해 오스만 제국을 침공했으나, 연합국인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일으켰다. 영·프 연합군은 그리스의 항구 도시들에 포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피해를 견디지 못한 그리스는 양국에게 애원하다시피하며 강화를 요청했다. 영·프 양국은 그리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그리스가 보유한 일부 도서 지역에서의 함대 주둔권과 해군 기지 건설권을 받아내어 지중해 동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러시아를 견제했다. 괜히 고토 수복을 외쳤다가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만 입은 그리스는 국민 여론이 폭발해서 국왕이었던 오톤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위해야 했다.


5.6. 전쟁 기술[편집]


1853년 11월 30일에 일어난 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은 당시까지 실전에 투입된 적이 없는 '터지는 포탄', 즉, 작렬탄을 처음 사용했다. 기존의 철로 만든 단순한 포탄의 발사 원리는, 적절한 양의 화약을 포탄과 함께 밀어넣고 난 뒤, 그 포탄을 발사하여 순수 운동 에너지로만 적을 피격하는 포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선 내 화약을 보관하는 장소를 운 좋게 피격하지 않는 이상, 함선 자체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으며, 함선이 침몰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1822년 프랑스에서 이론으로 발명된 '폭발하는 포탄' 기술은 1824년 프랑스 및 다른 나라에서도 정식 교리로 채택되었으나 실전에 투입된 적이 없었던 기술이었다. 이 신기술을 등에 업은 러시아 제국 함대는 오스만 제국 함대 11대 중 10대를 대파하여 침몰시켰으며 이러한 성과는 기존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해전을 계기로 포탄의 개념이 완전히 뒤바뀌고, 목재 범선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철갑함이 주류가 된다. 참고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철갑선의 일종인 데바스타시옹급 부유 포대를 투입했다. 부유 포대라는 이름처럼 해상에서 제대로 된 기동은 불가능해서 다른 함선들이 예인해야 했으나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장갑 때문에 흑해의 러시아군 요새를 공략할 때 활약했다.

미니에 탄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전쟁이다. 개발국인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도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을 막 도입하여 전쟁 중 사용하였고, 영국의 경우 세바스토폴 공방전 중 저격수와 감적수 2인 1조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반면 러시아군은 아직 대부분 활강식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보병 화력에서 열세를 보였다. 미니에 탄을 사용하는 전장식 소총은 이후 남북전쟁에서는 주력화기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만 기술 발전으로 인해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후장식 소총에 밀려 빠르게 구식화되어 열강 군대에서는 몇년안에 대부분 퇴출되거나 후장식 소총으로 개조된다.

통신 기술의 발전도 두드러졌다. 밑에도 나오지만 사진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장의 모습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고, 유선전신망의 발달로 크림 반도에서 프랑스나 영국까지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크림 전쟁에서 종군 기자들이 활약하게 된다. 한편 병사들의 비참한 생활이나 장교들의 무능함을 신문을 통해 민간에 널리 알리는 역할도 하여 이후 전쟁에서 언론의 역할이 증가하게 된다.

영국은 전쟁 중 크림 반도에 세계 최초로 군용 철도를 부설한다. 이 철도는 발라클라바에서 세바스토폴 포위망까지 이어져 보급 물자를 수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6. 여담[편집]


  • 여기서 힘을 합쳤던 영국과 프랑스는 1856년 이 전쟁이 끝나고 불과 몇 달 뒤에 이번엔 둘이 손 잡고 중국을 침공한다. 이것이 제2차 아편전쟁이다. 다만 크림 전쟁에서는 두 나라가 무려 40만 대군을 투입해도 러시아 중심부까진 못 들어간 반면, 제2차 아편전쟁에서는 겨우 20분의 1 정도인 2만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베이징 근교까지 밀고 들어가서 청나라의 무릎을 꿇렸다. 19세기에 얼마나 동서양의 국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러시아도 여기에 숟가락을 얹어 베이징 조약을 통해 중국 영토였던 연해주를 뜯어간다. 다만 이는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도 숨은 공신이었다.

  • 의류인 래글런가디건, 그리고 발라클라바가 이 전쟁, 특히 발라클라바 전투와 관련되어 있다. 발라클라바 전투 당시 영불 연합군 총사령관인 래글런은 워털루 전투 당시 팔을 잃었기에, 팔을 잃은 본인과 부상병들에게 래글런 소매가 달린 옷을 보급한 것이 래글런의 기원[13]이며, 발라클라바 전투 당시 경기병대의 돌격을 이끈 지휘관인 카디건이 부상자들에게 입고 벗기 편한 스웨터 형식의 조끼를 보급하며 가디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복면 대용으로 자주 매체에 등장하는 발라클라바는 크림 반도의 추위에 대응하기 위한 영국 병사들의 방한장비였다. 세 의류 전부 발라클라바 전투, 특히 경기병대의 돌격과 함께 유명해지게 되었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 이름 때문에 '크림(Cream) 때문에 전쟁을 한 건가?' 하는 오해를 사곤 한다.

  • 2022년 3월 1일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 지명을 러시아어식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식으로 표기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크림반도에서 크름반도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크림 전쟁도 크름 전쟁으로 명칭을 바꿔야 하는거냐는 혼란이 일기도 했다.

  • 이 전쟁은 러시아, 연합군 할 것 없이 무능한 지휘관들이 넘친 전쟁으로 악명이 높다. 영국 언론은 이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을 올빼미로 묘사하며 머리가 텅텅 비었다고 조롱했다. 그나마 낫다고 평가받은 건 프랑스군이었다.

  • 그럼에도 유능한 지휘관들은 있었다. 러시아군의 경우,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지휘한 코르닐로프, 나히모프, 이스토민 등은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았으며 크림 전쟁으로 로리스멜리코프, 토틀레벤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군도 당대 오스만 군부의 전설인 오마르 파샤가 이끄는 루멜리아 군단은 각국으로부터 유럽의 정규군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디르 파샤, 이스칸디르 파샤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 발라클라바 전투는 전장에서의 의사 소통 및 명령 체계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대표적 사례로 이후 전쟁사 및 부대 지휘 체계 교육에 꼬박꼬박 등장하게 된다. 이 전투는 또한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싸운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전쟁 중 추위를 견디기 위해 방한의류인 발라클라바가 발명되었다.

  • 전쟁 중과 그 후, 영국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부각되었다. 나이팅게일은 야전 병원 및 군의료 체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위생의 도입), 근대적인 야전 병원 체계가 구축되었다. 이전까지 야전 병원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게 병원이냐 화장실이냐?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전장에서 치료를 받은 부상자보다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부상자의 사망률이 더 높아서 '병원증'(hospitalism)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였다. 그 정도로 야전 병원의 상태가 열악했다는 이야기.

  • 연합군에서 활약한 간호사는 또 있다. 메리 시콜(1805~1881)이 그 주인공. 자메이카 출신의 크리올로서 호텔 운영과 무역업에 종사하던 여성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자메이카 전통 의술을 써서 전염병을 치료하고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간호사로 가려고 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러자 개인 자격으로 크림 반도로 와서 전선에 치료소를 짓고 사비로 병사들을 치료했다. 연합군뿐만 아니라 적군이었던 러시아군도 치료했으며 전후에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터키, 프랑스 3개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크림전쟁 종전 이후 묻혔고 오랫동안 찬양되어 오던 나이팅게일과 달리 피부색으로 차별받아 알려지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와서야 재평가되면서 알려졌다.

  • 러시아군에서도 유명 간호사로 다샤 세바스토폴스카야(Даша Севасто́польская 1836~1892[14])가 있었다. 세바스토폴 해군 기지에서 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던 다샤 세바스토폴스카야는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세바스토폴의 주민들과[15] 함께 간호소를 세워 병사들을 치료하고 러시아군 최초의 간호사가 되어 전선에서 활약했다. 의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다샤는 최선을 다해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위로했으며 그녀는 세바스토폴이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알렉산드르 2세로부터 훈장과 상금을 받고 세바스토폴의 병원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 미국 장군 조지 매클렐런(1826~1885)은 관전무관으로 참가했다. 이때는 매클렐런이 엄청 유능하게 느껴질 때라...[16]

  • 이 전쟁에 참전한 사람 중 영국의 장군이자 제7대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드넬은 평소에 단추 달린 스웨터를 즐겨 입었는데, 이것이 가디건의 유래다.

  • 사진이 촬영된 전쟁이다. 다만, 사진 기술이 좋지 못해서 사진 1장을 찍으려면 20분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해서 움직이는 전투 동작 같은 것은 찍을 수 없었고 전투 전의 군복을 착용한 병사들이나, 전투가 끝난 후 현장을 찍은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나먼 고국에서 전쟁을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전쟁을 실감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war_1455102c.jpg
1855년 전장에서 휴식하는 병사들을 담은 영국군 선전사진
파일:external/46-236-36-161.servers.dedipower.net/2500618.jpg
오스만 제국군 보병대

  • 세계 최초로 종군 기자가 활약한 전쟁이기도 하다. 윌리엄 하워드 러셀(1820~1907)이란 영국 기자가 바로 그 인물로 나이팅게일도 그의 취재로 알려지게 된다.

  • 베릭어폰트위드#[17]라는 마을이 크림 전쟁의 종전협정 서명에서 누락된 관계로 이 마을이 100여 년간 러시아 및 그 후신인 소련과 계속 전쟁을 벌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해당 문서 참고. 그러나 문서 내용처럼 이 사실은 상당한 과장이다.

  • UMA 중 유명한 모스맨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 전쟁 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관련 포스트


  • 영국 작가 재스퍼 포드의 서즈데이 넥스트 시리즈에서 크림전쟁은 130여년을 끌고있고 영국 내부 여론마저 양파로 갈려서 결말이 안보이고 있다. 영국 정부 뒤에서 암약하는 골리앗 주식회사의 짓이라는 게 뒤에 밝혀진다.

  •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설정상 언급된 전쟁이다. 당시 마법 정부 총리가 여기에 불법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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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국기.svg 영국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1707-1816).svg.png 포르투갈 왕국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네덜란드 공화국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793-1844).svg 오스만 제국
나폴레옹 전쟁
1803 ~ 1815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국
제1차 프랑스-멕시코 전쟁
1838 ~ 1839
파일:700px-Flag_of_Mexico_(1823-1864,_1867-1893).svg.png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벨기에 혁명
1830 ~ 1831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연합왕국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파일:태평천국 국기.svg 태평천국
제2차 아편전쟁
1856 ~ 1860
청나라
코친차이나 원정
1858 ~ 1862
파일:external/www.worldstatesmen.org/vn_tonki.gif 대남국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
1861 ~ 1867
파일:Bandera_Histórica_de_la_República_Mexicana_(1824-1918).svg.png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
시모노세키 전쟁
1864
파일:external/x181.secure.ne.jp/35203.gif 조슈 번
병인양요
1866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 ~ 1871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청불전쟁
1884 ~ 1885
파일:청나라 국기(1862-1889).svg 청나라
프랑스-시암 전쟁
1893
파일:태국 국기(1855).svg.png 시암
파쇼다 사건
1898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의화단의 난
1900 ~ 1901
파일:의화단 기.png의화단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러시아 내전
1918 ~ 1920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극동 공화국
터키 독립전쟁
1919 ~ 1923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대국민의회
프랑스-시리아 전쟁
1920
파일:시리아 아랍 왕국 국기.svg 시리아 아랍 왕국
리프 전쟁
1925 ~ 1926
파일:Flag_of_the_Republic_of_the_Rif.svg 리프 공화국
스페인 내전
1936 ~ 1939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제2공화국 파일:스페인국 국기(1936-1938).svg 스페인 국민전선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태평양 전쟁
1941 ~ 1945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파일:필리핀 제2공화국 국기.svg 필리핀 제2공화국
북아프리카 전역
1940 ~ 1943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서부전선
1939 ~ 1945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1943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서아프리카 전역
1940 ~ 1942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 ~ 1954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민주 공화국
6.25 전쟁
1950 ~ 1953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알제리 전쟁
1954 ~ 1962
파일:알제리 국기.svg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
바밀레케 전쟁
1955 ~ 1964
파일:300px-Cm-upc1.png 카메룬 인민연합
제2차 중동전쟁
1956
파일:이집트 국기(1953-1958).svg.png 이집트
이프니 전쟁
1957 ~ 1958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가재 전쟁
1961 ~ 1963
파일:브라질 국기(1960-1968).svg 브라질
서사하라 전쟁
1977 ~ 1978
파일: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국기.svg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카반 작전
1979
파일: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기.svg 중앙아프리카 제국
리비아-차드 분쟁
1986 ~ 1987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리비아
걸프 전쟁
1990 ~ 1991
파일:320px-Flag_of_Iraq_(1991-2004)_svg.png 이라크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쿠웨이트 공화국
르완다 내전
1990 ~ 1994
파일:Rwandan_Patriotic_Front_Flag.svg.png RPF
보스니아 전쟁
1992 ~ 1995
파일: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진달래 작전
1995
파일:코모로 국기.svg 코모로
코소보 전쟁
1999
파일: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 ~ 2020
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탈레반 정권
제1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2002 ~ 2007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FNCI
차드 내전
2005 ~ 2010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진자위드
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2010 ~ 2011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코트디부아르군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COJEP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FPI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리비아
사헬 내전
2011 ~ 현재
파일:지하드 깃발.svg 알 카에다 파일: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국기.svg ISIS 파일:보코 하람 엠블럼.png 보코하람 파일:안사루 깃발.svg 안사루
말리 내전
2012 ~ 현재
파일:아자와드 국기.svg MNLA 파일:지하드 깃발.svg 알 카에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
2012 ~ 현재
파일: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기.svg 셀레카 파일: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기.svg 반 발라카
이라크 내전
2014 ~ 2017
파일: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국기.svg ISIS
예멘 내전
2018 ~ 현재
파일:예멘 국기.svg 최고혁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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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사.[2] 니콜라이 1세가 전쟁 중 사망하면서 니콜라이 1세의 자리를 알렉산드르 2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했다기보단 평화협정을 맺는 것에 주력했다.[3] 이는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전쟁수행에서의 특징이자 주특기였다. 7년 전쟁 때도 영국은 스페인을 상대로 쿠바, 필리핀, 우루과이, 포르투갈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였다. 당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해군 전력도 부족한 데다가 이를 분산시켜야 했으니 속수무책. 제해권을 쥔 나라만이 가능한 전략이었다.[4] 규모는 훨씬 작지만 여기서도 러시아군은 영웅적으로 항전했는데, 포문 수가 3배나 많은 연합군 함대의 포격을 견뎌내고 상륙하는 1,000여명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큰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후퇴했지만, 이듬해 본국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시 공격을 당하면 함락 당할 것이 뻔하다는 판단하에 동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Nikolay Muravyov-Amursky, 후일 아이훈 조약을 주도한 사람)는 도시 전체를 비울 것을 명하였고, 방어군은 눈보라를 틈타 4월 중순 연합군 선박의 감시를 피해 탈출했다. 5월 말 돌아온 연합군 함대는 빈 도시를 점령했다. 비록 도시는 점령당했지만 러시아 해군은 첫 번째 전투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러시아의 첫 철갑선에 페트로파블롭스크란 함명을 붙였고, 이 함명은 이후에도 세바스토폴과 더불어서 러시아 해군, 소련 해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함명 중 하나가 되었다.#[5] 잘 알려져 있지만 남북전쟁은 전열보병과 함께 산개와 은엄폐 사격, 참호전, 백병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6]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인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7] 말이 인접국이지,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려한 조항.[8]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1863년 폴란드 봉기 당시에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알벤스레벤 협정을 맺어 봉기 진압에 협조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러시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프로이센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데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영국이 크게 반발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수완을 발휘해 영국의 반발을 무마해주었다.[9] 다만, 크림 반도에 대한 최신 정보는 러시아군이 앞서 있고, 크림 타타르인과 크림 반도의 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고 러시아를 지지하기도 해서 러시아군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그래도 좀 오래 되어서 러시아보단 밀리긴 했지만 정보가 있고 그에 기반한 전술을 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던 게 오스만인데 영국은 이를 무시해버린 것.[10] 여기에다가 영국은 육군 관련해서 매관매직이 보편적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분명 그 당시로서는 여러모로 장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군대의 질적 문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고 여기서 그 대가를 치뤘다.[11] 사실 개전 시기만 해도, 니콜라이 1세는 범기독교 세력 vs 오스만 제국 구도로 오스만 제국을 분할해 나눠가질 것을 희망했지만,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 편에 서자 할 수 없이 동방정교회를 믿는 범 슬라브인 vs. 오스만 제국 구도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게 전쟁 초기에는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 안에도 타 민족의 지배에 불만가득한 슬라브인(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의 발칸 민족들) 인구가 다소 있었고, 따라서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오스트리아 제국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저 구실을 허용한다면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분할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허용되기 때문이었다.[12] 하지만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군사적 공백지나 다름없게 된 땅을 집어먹은 것이라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 지역은 프랑스의 후원으로 1862년 루마니아의 전신이 되는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이 성립된다.[13]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전신인 새 영어사전 1903년 판본부터 기록된 내용[14] 영어로는 Dasha from Sevastopol라는 뜻인데 별명이다. 본명은 다리야 라브렌티예브나 미하일로바(Darya Lavrentyevna Mikhailova)이다.[15] 세바스토폴 방위군의 가족들로, 그들의 아내이자 자매였고 딸들이었다.[16] 사실 군사적으로 유능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압도적으로 앞섰음에도 남군이 더 강하다고 링컨 대통령 명령까지 거부하여 결국 30대 중순 팔팔한 나이로 장군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후임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율리시스 S. 그랜트인데 둘이 같은 해에 죽었다.[17] 영국 지명에서 rw를 /r/로 발음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