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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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의문점
5.1. 목종의 국정 운영과 업적
5.2. 목종의 건강
5.3.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
5.4.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권세
5.5.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행보
5.6. 유행간의 대량원군 즉위 반대
5.7. 궁궐 화재
5.8. 대량원군의 승려 생활
6. 재구성
7. 대중매체에서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康兆의 政變

1009년(고려 목종 12년, 기유년),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2차 여요전쟁에서 요나라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침공 명분이기도 하다.[1]


2. 배경[편집]


이 정변의 배경은 최소 십수 년 전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5대 왕인 경종 임금은 27살이라는 젊은 보령[2]에 붕어하여 경종의 부인 중 하나였던 헌애왕후는 졸지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 순간에 부군을 잃고 독수공방하며 지내던 그녀에게 김치양이라는 남자가[3] 중 행세를 하며 그녀가 머물던 천추궁에 출입하며 접근, 마침내 둘은 사통을 하기에 이른다.[4] 이에 추잡한 소문이 널리 번졌고, 이 소문을 들은 고려의 6대 왕이자 헌애왕후의 동복오빠였던 성종은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후, 그를 멀리 유배 보낸다.[5] 이렇게 헌애왕후의 사통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997년에 성종이 붕어하고, 헌애왕후의 아들이 고려의 7대 왕 목종이 즉위하자 상황이 달라진다. 왕의 모후였던 헌애왕후는 목종이 이미 18살이 되었음에도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하며 섭정했으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리게 된다.[6][7] 권력을 잡은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불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벼슬을 하사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비할 데 없이 총애하면서[8] 갑자기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使)에까지 파격 승진시켰다.[9]

관리의 인사권을 장악한 김치양은 많은 충신과 의로운 선비들을 배척했고,[10] 그의 친척과 일당들을 모두 요직에 앉혔으며, 권력을 바탕으로 뇌물을 공공연히 받으며 삼백여 간에 달하는 큰 집에 화려한 정원과 연못을 꾸몄고, 그 집에서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관계를 맺는다. 또한 성수사(星宿寺)와 시왕사(十王寺)를 세워 그 절들에 자신의 역모에 귀신들이 돕기를 바라는 뜻의 기괴한 초상화들을 걸고, 역심이 담긴 글귀를 종에 새겼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치고자 했으나, 어머니 천추태후의 상심을 염려해 시행하지 못했다.

목종도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다. 유행간(庾行簡)이라는 미남을 끌어들여 남색(동성애) 관계를 맺고, 그를 합문사인(閤門舍人)으로 벼락출세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교지를 내릴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먼저 물은 다음에야 시행할 정도로 지나치게 총애하였다. 당연히 유행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여서 측근 신하들은 그를 왕처럼 대했고, 유행간 또한 교만해져 관료들을 업신여겼다. 지은대사(知銀臺事)·좌사낭중(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이라는 발해(渤海) 사람도 별다른 재능이 없었는데도 목종으로부터 큰 총애를 받는다. 목종은 유행간과 유충정에게 각각 수방(水房, 왕의 음식이나 연회를 담당하는 부서)의 관리들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그 둘이 출입할 때 수행원들을 대동하는 것이 마치 왕처럼 분수에 넘쳤다고 한다.[11] 이는 목종 측근 세력의 지나친 권력 비대화와 그로 인해 국가 기강이 어지러워졌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1003년(목종 6년), 마침내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아들까지 낳는다. 이렇게 되자 그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는데 그 계획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목종이 아들이 없을 시 왕위 계승권자 1순위인 대량원군 왕순이었다. 이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12살이었던 그를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숭교사(崇敎寺)로 보냈다가 다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보낸 후, 사람과 독이 든 음식을 여러 차례 보내 살해를 시도한다. 대량원군은 목종의 보호와 스스로의 조심성,[12] 신혈사의 노승 진관(津寬)의 기지[13] 등으로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해 나간다.[14]

1009년(목종 12년) 봄, 목종이 상정전(詳政殿)에서 연등행사를 관람하던 중에 궁궐 기름 창고에 불이 나 번져서 천추전까지 태우는 큰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15] 목종은 잿더미가 된 전각과 창고를 보며 상심하다가 앓아누워 정사를 볼 수 없게 된다. 유행간, 유충정, 최항, 채충순 등 몇몇 신하들만 목종의 병석에서 숙직했고, 재상을 포함한 나머지 신하들이 목종에게 병문안을 오면 유행간이 ‘왕께서 기력이 점점 나아지시니 나중에 따로 부르겠다고 하셨다.’며 가로막았다.

3. 전개[편집]


병석에 누운 목종은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 첫째, (유행간과 더불어) 자신의 최측근 신하인 유충정에게까지 김치양이 포섭을 시도했다는 것을 유충정의 편지를 통해 보고받는다.[16]
  • 둘째,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대량원군 독살 시도를 대량원군의 편지를 통해 보고받는다.
  • 셋째, 숙직 신료 중 하나인 이주정(李周禎)마저[17] 김치양에게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18]

이에 목종은 숙직 신하 중 하나인 재추(宰樞)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대량원군으로 왕통을 잇게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19] 유충정은 의논을 위해 감찰어사(監察御史) 고영기를 보내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들였고,[20] 목종은 그들과 논의한 끝에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와 낭장(郞將) 문연(文演), 이성언(李成彦), 고적(高積) 등 열 명을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하는[21] 한편 추가로 채충순에게 '유행간이 대량원군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니 유행간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였으며, 개성부참군(開城府參) 김연경(金延慶)에게도 명하여 군사 1백 명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대량원군을 영접하게 하였다.[22]

한편 목종은 보안 유지를 위해 김치양에게 붙은 것이 파악된 이주정을 서북면 도순검부사(都巡檢副使)로 임명해 즉시 떠나게 하고,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를 맡고 있던 강조(康兆)[23] 궁궐로 불러 자신을 호위하라는 명을 내린다.

강조는 왕명을 듣고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龍川驛)에 이르러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安北都護)의 장서기(掌書記) 최창(崔昌)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강조에게,

  • 1) 현재 주상(목종)은 매우 위독하다.
  • 2) 개경으로 오라는 왕명은 사실 태후와 김치양이 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조가 두려워서 그를 유인하여 제거하려고 사칭한 거짓 왕명이다.

라는 거짓말을 하며[24] '속히 본진으로 돌아가서 크게 군사를 일으키셔야 강조 자신과 사직을 지킬 수 있다.'고 했고, 그들의 말을 믿은 강조는 자신의 본영으로 돌아간다.

천추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보내 절령[25]을 봉쇄한다. 이에 강조의 아버지는 종의 머리를 깎아 중으로 위장시키고, ‘왕이 이미 죽었으며, 간흉들이 권세를 휘두르니 개경으로 군사를 끌고 와서 국난을 바로잡으라.’는 내용의 편지를 지팡이에 숨겨 강조에게 보낸다.[26]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강조는 목종의 죽음을 확신하고, 부사(副使)인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과 함께 군사 5000여 명을 이끌고 진군하다가 평주(平州, 현 황해북도 평산군)에 이르러 목종이 살아있는 것을 알고 한참 망설인다.

그러나 그의 여러 장수들이 ‘여기까지 왔으니 그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에 동의한 강조는 목종까지 폐위시키기로 결심하고 계속 진군하였다.

개경에 진입한 강조는 분사감찰(分司監察) 김응인(金應仁)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대량원군을 데려올 것을 명하고, 목종을 만나 김치양 일파와 유행간 일파의 전횡이 국난을 불러온 것을 지적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수습하는 동안 용흥사(龍興寺)나 귀법사(歸法寺)에 가 있을 것을 권하자 목종은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김응인에 앞서 목종의 명으로 대량원군을 데려오기 위해 신혈사로 간 황보유의 일행은[27] 강조가 보낸 김응인과 만나서 함께 개경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튿날 강조의 부하 이현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을 들어오며 소란을 피웠고, 이에 놀란 목종이 두려워하며 유행간을 체포해 강조에게 보낸다.[28]

급사중(給事中) 탁사정(卓思政)과 낭중(郞中) 하공진(河拱辰)이 모두 강조에게 신속히 가담하고, 궁궐에 군사들이 난입하자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목종은 태후와 함께 통곡하며 채충순, 유충정과 함께 법왕사(法王寺)로 간다. 이에 최항(崔沆)이 강조에게 “옛적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던가?”하며 따졌고, 강조는 아무 대답도 못한다.[29][30]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아서 대량원군 일행을 기다리던 강조는 갑자기 군사들이 만세를 부르자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하며 주위를 수습하였다.[31]

마침내 황보유의 일행과 함께 도착한 대량원군이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식을 올리니 이가 곧 고려의 8대 왕인 현종이다.

4. 결과[편집]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비롯한 7명은 처형당하고, 이주정을 포함한 30여 명은 먼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폐위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이라는[32] 칭호를 받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에 의해 감시를 받게 된다.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忠州)로 향하였는데[33][34] 목종이 최항을 통해 강조에게 말을 요청했으나, 한 필 밖에 안 보내서 민가에서 한 필을 더 구한다.

목종이 적성현(積城縣,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이르자 강조가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 독약을 올렸고, 목종은 마시기를 거부한다.

이에 김광보가 왕을 호위하는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강조가 (목종이) 약을 거부하면 군사들을 시켜 죽이라고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멸족을 당하게 된다.’고 하여 안패는 강조의 명령대로 그날 밤 목종을 시해한 후, 목종이 자결하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문짝으로 관을 짜 임시로 관아에 목종의 빈소를 차렸는데 강조가 사람을 시켜 고을 창고의 쌀로 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천추태후는 황주(黃州, 현 황해북도 황주군)로 돌아가 21년 간 살다가 현종 20년(1029)에 정월 숭덕궁(崇德宮)에서 66살로 죽으니 유릉(幽陵)에 장사지냈다.

강조는 중대사(中臺使)가 되었다가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얼마 후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군 총사령관이 되어 30만 고려군을 이끌게 된다. 그리고...


5. 의문점[편집]


정변의 배경은 이렇게 요약된다.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강한 권력욕을 실현하는 태후와 그녀의 비호를 받는 김치양이 전횡을 일삼았지만, 목종은 나약해서 이를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행간 등을 지나치게 총애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이 위독해지자 대량원군을 독살하여 왕씨의 대를 끊은 후,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하는 음모를 꾸며서 고려의 사직은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이를 의심케 하는 정황이나 생각할 여지가 있는 서술들이 상당히 많다.


5.1. 목종의 국정 운영과 업적[편집]


목종은 재위 초중기에 매우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로 인한 업적도 상당한데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 민생 관련: 흉년이 들자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조세와 공물을 탕감하였다. 노인들을 예우했으며, 각 산천에 훈호를 붙이기도 한다. 이는 민속 신앙을 신봉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 왕실 관련: 어머니 천추태후를 포함해서 선왕들과 그 왕비들에게 존호를 올리고, 제사 방식을 확정하였다.
  • 신하 관리: 병들거나 세상을 떠나는 노신들을 넉넉히 예우하면서[35] 한편으로는 비리를 저지른 신하들을 엄히 단죄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 불교 진흥: 숭덕사와 진찰사 등 사찰을 짓고, 승려들의 계급을 올려주면서 법호도 내려준다.
  • 교육 진흥: 학문이 있으면서 교육에 힘쓰는 자들을 파악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한다.
  • 국가 체계 정비: 과거제와 전시과 등 법률들을 정비했고,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직책들과 지방관을 맡은 인사들을 선별하여 정리하였다.
  • 언론: 관리들에게 현재 국정 문제를 지적할 것을 명하여 폭넓게 의견을 수렴하였다.
  • 서경 관련: 서경을 호경으로 개칭하고, 자주 서경에 찾아가 그 곳의 관리들과 백성들을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강조와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 외교 관련: 송나라요나라 양쪽 모두를 상대로 무난하게 외교 관계를 이어 나간다.

특히 목종의 가장 큰 업적이 수많은 인재를 등용했다는 것과[36] 북방에 많은 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한 것인데[37] 이는 훗날 일어나는 제2, 3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38]

아이러니한 것이 만약 이러한 행보와 성과들이 목종 본인의 의지와 판단력에 의한 것이라면 '천추태후에게 목종이 휘둘렸다.'는 고려사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반대로 천추태후가 주도하여 이룬 성과들이라면 '천추태후는 전횡을 일삼는 악녀였다.'는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39] 이렇듯 오랜 세월을 거치며 굳어진 '목종 재위 시기의 고려는 태후의 전횡으로 매우 혼란했다.'는 통념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되고, 이는 정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볼수록 더욱 커진다.


5.2. 목종의 건강[편집]


하루는 왕이 채충순을 불러 침실로 들어오게 한 후 좌우를 물리치고, ”과인은 병이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소. 그런데 바깥에서 왕위를 넘보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경은 알고 있소?” 라고 물었다. (중략) “나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곧 세상을 뜰 것 같은데,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만 남아 있소. 경과 최항은 평소 충의를 지닌 신하이니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구원하여 사직을 다른 성(姓)에게 주지 않도록 하시오.” 라고 당부하였다. (중략) “내가 친히 선위(禪位)하고 싶으니 빨리 보내 늦지 말도록 하시오. 만약 나의 병이 나을 경우에는 성종께서 나를 책봉하였던 전례와 같이 일찌감치 후사를 못박아 놓으면 왕위를 넘겨다보는 자들이 없을 것이오.

- 고려사 채충순 열전 中 -


한 열전 안에서 목종이 자신의 건강을 얘기하는 것인데 내용이 크게 다르다. 병이 회복되고 있다고 하면서 갑자기 점점 위독해진다고 하고, 드물게 회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독하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임에도 자신의 병이 나아서 확실히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변 당시 30세라는 목종의 젊은 나이, 그가 활쏘기와 말을 잘 타서 술과 사냥을 좋아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40] 대량원군을 후계로 삼는 글을 쓰는 채충순에게 그가 직접 먹을 갈아 주었다는 기록,[41] 후술하겠지만 그가 대량원군 후계 작업에서 보인 치밀함, 폐위된 그가 충주로 향하면서 직접 태후의 말고삐를 잡거나 밥시중을 들었다는 기록 등 정변 당시 그가 위독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매우 많다.

또한 목종이 얼마 못 살 정도로 위독했다면 딱히 후환이 될 여지가 없는 그를 굳이 강조가 폐위하고, 심지어 암살하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42] 목종의 건강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나빴다는 기록은 완전한 허구 또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목종이 후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면 차라리 자신의 동성애 성향으로 후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43]

5.3.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편집]


기록에서는 목종을 한 마디로 '김치양과 태후가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는데 어머니에게 가로막혀 이를 저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려 유행간 등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더욱 정치를 어지럽게 만든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묘사하는데, 전술했던 목종의 의욕적인 국정 운영 기록과 함께 이를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많다.

1) 목종은 자신의 의지로 유행간과 유충정을 권신으로 만들고, 방해가 되는 이주정을 지체없이 서경으로 보내는 등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하였다.
2) 목종은 대량원군 즉위 계획을 진행하며 채충순, 최항, 황보유의, 김연경, 문연, 고적, 이성언, 강조 등 상당한 수의 신하들을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였다.

이 기록들은 '김치양이 인사권을 독점하여 온 조정이 그의 일파로 가득 찼다.'는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목종 개인만을 보더라도 재위 기간 동안의 나이와 즉위의 정통성으로 볼 때 군주로서 권력이나 정치적 기반이 약할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기록에서 목종이 김치양을 내치지 못한 이유를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권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천추태후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서'로 드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바꿔 말하면, 목종에게는 김치양을 제거할 권력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제현은 논평에서 '역사를 거울삼아 대비했어야 했다.'며 목종을 비난했는데, 반대로 최씨 정권에 휘둘린 고종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으며, 되려 잘 참아서 왕실을 회복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고종 이전, 무신정권 시대에 재위한 강종, 희종, 신종에 대한 고려사의 논평들 역시 하나같이 '권신 제압이 불가능했다.'고 서술하는 것과 목종에 대한 논평 내용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목종이 전술했던 왕들과 달리 권신들(김치양과 태후, 그들의 일파)을 제압할 권력은 있었음을 사관들의 논평을 통해서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목종이 대량원군 후계 작업 과정에서 보인 치밀함은 전술했듯이 목종이 위독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하는 근거이면서 그의 정치력도 재고하게 만든다. 목종은 끝까지 유행간을 총애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유행간이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자 채충순에게 '유행간이 모르게 보안을 유지할 것'을 당부했고, 마찬가지로 방해가 되는 변절자 이주정을 서경으로 보냈다.

얼핏 보면 보안 유지를 위한 당연한 조치이니 대단찮아 보이나, 눈여겨볼 것이 목종은 이주정을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삼아 서경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직책은 당연히 서북면 도순검사의 직속 부하인데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는 강조였다. 요사에는 강조가 서경 유수였다고 하니 어떻게 봐도 목종은 이주정을 강조에게 보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종은 김치양과 천추태후 몰래 이주정을 제압하기 위해 이주정을 강조의 직속 부하로 보내고, 강조에게는 개경으로 와서 자신을 호위하라는 명과 함께 이주정을 제압 또는 제거를 지시하는 내용의 책략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가적으로 목종은 수방(水房)의 서리들을 유행간과 유충정에게 나누어 통솔하게 했는데[44] 이는 측근일지라도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비대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목종은 유행간이 대량원군 후계 작업에 반대하자 그를 배제하고, 유충정을 통해 채충순과 최항을 동원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은 사실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상당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5.4.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권세[편집]


전술했듯이 목종의 권력에 대해서는 약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이 많은 반면 김치양과 태후의 권세는 기록에서 묘사되듯이 온 나라의 요직을 그들의 일파로 채워 왕이었던 목종도 막을 수 없었고, 심지어 고려의 사직까지 위태롭게 할 정도로 강했는지를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많다.

일단 전술했듯이 많은 신하들이 목종의 대량원군 후계 작업에 참여했으며, 목종에 의해 이주정이 서경으로 가는 것을 태후와 김치양은 그저 수수방관했다. 이주정은 목종의 입직신료(入直臣僚)라서 김치양과 태후 입장에서는 목종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훌륭한 정보원이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면 당연히 상당한 군권도 있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획득이든 유지든 무력을 바탕으로 하며, 어느 나라이든 최고 권력자에게 국군통수권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고, 그래서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변에서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는 목종이 대량원군을 데려오는 계획을 진행하고, 강조가 개경으로 진입하는 동안 어떠한 군사적 대응도 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목종이 대량원군을 보위하기 위해 보낸 인원은 열 명 정도이고, 그나마 황보유의 같은 문신이 포함된 숫자이다. 대량원군이 가까이 왔을 때 그를 영접, 호위하기 위해 목종이 개성부참군(開城府參) 김연경(金延慶)과 함께 보낸 병력도 백여 명이다.[45] 그런데 김치양은 목종이 대량원군을 데려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며칠 간 눈치만 살폈다고 한다.[46]

그 둘이 강조를 막으려는 조치 또한 기록상으로 볼 때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태후가 강조의 소식을 듣고 절령에 사람을 보내 통행을 제한한 것이 전부이다. 백 번 양보해 실제로는 그들이 강조를 막으려고 군대를 동원했었는데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가정해도 결국 강조는 개경 진입에 성공했으니 그들은 방어자의 이점을 업고도 5천 정도의 군대를 막지 못 할 만큼의 병력만을 동원한 것이다. 태후가 강조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절령을 봉쇄했고, 강조의 아버지가 이 봉쇄를 넘어 강조에게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종을 보냈으며, 그 편지를 읽고 강조가 군대를 동원했으니 태후와 김치양이 강조의 움직임을 몰랐거나 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김치양과 태후가 인사권을 장악해서 모든 요직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앉혔고, 그 권세를 토대로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군부의 요직들은 김치양 일파가 독점 또는 상당 부분을 차지했어야 정상인데[47] 목종이나 강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대비할 시간 또한 충분했던 그들이 이렇듯 많은 군사력을 동원한 정황이 전혀 없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당시 고려에서는 조선과 달리 사병(私兵)도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었다. 김치양이 재산을 크게 불려서 삼백여 간에 달하고 정원과 호수마저 화려한 집을 지을 정도였다면 사병을 육성할 재력도 그에게 충분히 있었을 것이고, 하다 못해 그와 태후의 친족들과 일파들이 많았다면 그들의 사병들만이라도 동원해서 강조의 군대는 몰라도 백여 명의 대량원군 일행은 쉽게 제거할 수 있었을 텐데 기록상으로 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의 행보를 알면서도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린 것이 된다.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세력이 크지 않았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기록도 있다. 강조는 정변 이후 유행간과 김치양 부자를 포함해 7명을 처형하고, 역시 양쪽 모두를 합해 30여 명을 귀양보냈는데 이는 당시 조정을 양분한 두 일파를 전부 제거하는 정변이었음에도 피를 굉장히 적게 본 것이다.[48] 곧 있을 거란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어 인재 손실을 최소화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감안해도 불온한 인물들을 숙청하지 않았다가 그들이 전시에 변절하면 엄청나게 위험하므로[49] 강조가 인재 손실을 염려하여 반드시 제거해야 할 사람들까지 살려뒀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이 대목은 분명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천추태후가 목종이 (당시로서는 장성한 나이인) 18살임에도 섭정을 했다.'는 기록은 흔히 읽는 이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18살은 장성했다고 여겨졌고, 섭정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들을 떠올리게 하여 불필요하게 섭정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태후와 그와 대비되게 군주로서 큰 약점이 없음에도 어머니를 통제하지 못하는 유약한 목종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사실이라도 '천추태후는 권력욕이 강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있어도 '목종이 천추태후에게 재위 내내 휘둘렸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 목종은 18살에 왕위에 올랐으며, 12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목종이 친정해도 되는 상황인데 태후는 장기간 섭정을 계속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목종은 이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이 사실임을 가정하면 내용상으로는 거짓이 아니면서, '목종이 태후 때문에 김치양을 제거하지 못했고, 정변 직전에 위독했다.'는 기록과 함께 '정변 직전의 고려는 목종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태후와 그녀의 비호 받는 김치양을 제압하지 못해 정치가 어지러웠다.'는 전혀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상황을 암시하여 현종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의 서술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목종이 비록 장성한 상태로 즉위하였으나, 즉위 직후여서 그가 국정을 전부 파악하고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자 태후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잠시 정치에 참여한 것 정도의 사실을 '현종의 집권 이전 고려는 군주인 목종이 18살임에도 태후가 섭정하며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로 비약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진짜 천추태후가 '섭정'이었는지도 의문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이 대목을 “어머니 황보씨(皇甫氏)를 높여서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함께 청정(聽政)했다.”고 나오는데, '(수렴)청정'과 '섭정'은 다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임금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수렴=垂簾)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다(청정=聽政)'는 뜻으로 청정의 주체가 특정 날짜에 군주와 조정에 동행하여 조언하고, 반문을 받는 형식이었다. 세자가 받는 후계자 수업의 일종인 대리청정(代理聽政)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섭정(攝政)은 여후의 임조칭제(臨朝稱制)에서 비롯되었다. 여후는 황제를 대신해 조회에 참석하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 여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 마디로 청정이 임금을 '보좌'하는 정도라면 섭정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었는데 전술했듯이 목종은 전혀 섭정을 받을 이유가 없었으니[50] 태후의 정치 관여는 최대로 따져도 동사강목에서 쓰인 '청정'이란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그러나 '청정'이란 것이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막후정치인데, 전술했던 인사권 의문을 보면 천추태후가 막후정치를 하던 실세라고 볼 수도 없다. '막후정치'의 실세는 왕명을 대신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음은 물론 임금과 함께 정전에 가는 일조차 드물 정도로 '섭정'보다는 직접적으로 드러내놓고 정치를 하는 측면은 적으나, 그래도 인사권만큼은 확실히 장악하여 주요 보직 상당수에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한다. 그들이 실세 권력자와 먼저 국사를 논의하여 결정된 사안을 임금에게 시행할 것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임금이 먼저 그들과 상의 후 그들이 실세 권력자에게 임금과 논의한 사항을 전달하면 실세 권력자가 가부나 수정할 것을 논의하여 임금에게 요구하는 형태로 진행되면서 임금에게는 그에 대한 거부권이 거의 없다고 볼 정도는 되는 것이 바로 막후정치이다.

얼핏 보면 막후정치의 대명사인 흥선대원군신정왕후 조씨와 동맹을 맺고, 운현궁을 거점으로 세도정치에 의해 배제되었던 친족들을 기용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으니 천추전을 거점으로 김치양과 함께 정치를 한 천추태후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명목상 청정을 끝내고도 죽을 때까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왕위를 위협하며 갈등을 빚은 대원군과[51] 목종이 자신과 김치양을 제압하려고 군대를 움직이는데도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천추태후의 권세가 동일했다고 볼 수는 없다.

생전 천추태후가 여후서태후는커녕 정희왕후, 문정왕후, 정순왕후 김씨, 신정왕후 조씨, 하다 못해 명성황후가 가졌던 권력 정도는 있었는지 후술할 그들의 납득할 수 없는 행보들을 종합하여 고려하면 이러한 의심은 더욱 커진다.


5.5.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행보[편집]


일단 기록에서는 기괴한 초상화와 종에 새겼다는 글귀를 김치양이 역심을 품고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드는데, 너무 추상적인 서술로 그 그림이나 글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나 해석이 담긴 기록이 없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현종이 즉위 전에 지었다는 두 수의 시들이 기록에 남아있는 것과 대비되며, 그 초상화와 글귀의 내용이 명백히 역심을 드러냈다면 현종에게 유리한 사실임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것은 미심쩍은 대목이다.

또한 태후와 김치양의 역모 계획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목종)의 후계자로 만드는 것이었다는 기록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물론 김치양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면 이는 역성(易姓)이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더라도 반역임에 틀림없으나, 김치양과 태후가 목종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쥔 상황에서 자신들의 아들을 옥좌에 앉히려고 생각해 낸 방법이 '목종의 후계자로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봤을 때 개연성이 떨어진다.

김치양과 태후의 이 계획은 김치양 아들의 장성과 목종의 노쇠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기록상 태후와 김치양은 이 계획을 그들의 아들이 태어난 1003년에 세웠다. 그런데 당시 목종은 20대 초반이고, 설령 1009년에 이 계획을 세웠더라도 김치양의 아들은 7세이고, 목종은 30세 청년이다.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모르는 반란 계획을 세우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52] 실제로 이 계획이 적당한 시기에 창칼을 앞세워 목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후계자 자리를 얻어낸다는 계획이라 해도 이상한 게 그렇게 되면 급작스런 군사 반란으로 목종을 폐위시키는 것보다 명분적인 측면이든 성공 확률이라는 실리적 측면이든 아무런 이점이 없다. 순순히 역성(易姓)을 허락하고 자신의 손으로 사직을 끝낼 왕은 절대로 없으므로,[53][54] 어차피 저항을 받아야 된다면 갑작스런 군사 반란을 계획하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높다.

물론 위화도 회군 이후의 이성계, 무인정사 이후의 태종, 계유정난 이후의 세조, 12.12 사태 이후의 전두환이나 아예 생전에 왕좌에 오르지 못한 조조, 사마소 등 실권자가 왕좌에 앉을 기회를 기다리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권력과 위상은 확고히 다지고 더더욱 키워나가지만 전술했듯이 태후와 김치양은 정변 당시까지도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이 많다.

더군다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지방 분권적 측면이 강했고, 심지어 초기라면 왕실이 대표인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까웠다. 존속 기간을 보더라도 당시 고려 왕실은 100년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이 고려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의식에 자신들은 고려의 신민이라는 생각과 왕씨 사직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히 자리잡힌 상황이 아니었다.[55][56] 훗날 고려 왕조에서 일어난 이자겸의 난, 무신정변, 이성계의 조선 개창 등과 비교해도 반란이 성공하기 쉬운 상황이었는데도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이러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대량원군 암살 시도 기록은 개연성은 고사하고, 황당할 정도이다. 일단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아들이 태어나서 그들에 의해 대량원군이 강제로 중이 된 게 1003년이고, 강조의 정변은 1009년에 일어났으므로 그들은 자그마치 6년이나 궁 밖에 살면서 변변한 호위도 못 받는 대량원군을 제거할 여유가 있었다. 경호가 없다면 자객이나 방화가 독살보다 더 확실한 제거 방법이기도 하고, 이를 차치해도 독살이 실패했다면 태후와 김치양이 다양한 방법의 암살 시도를 했어야 정상이며, 실제로 있었다면 상세히 기록해서 김치양과 태후를 비난할 수 있는데 기록된 구체적인 암살 시도는 독살 미수뿐이다. 두루뭉수리하게 태후가 대량원군을 죽이려 여러 번 사람들을 보냈다는데 이 암살자들로부터 대량원군을 지켜낸 건 오직 진관이라는 노승 한 명 뿐이고, 그가 6년 동안 고려 최고의 권력자들이 계획한 암살 시도를 저지한 방법이란 것이 대량원군을 구덩이에 숨긴 후 찾아 온 암살자들에게 '대량원군은 놀러나갔다.'고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종합하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신들의 계획에 가장 큰 장애물인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는데 궁 밖에서 변변한 호위도 못 받는 그를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 오직 독살만을 고집하다가 번번이 노승 한 명의 거짓말에 속아서 6년 동안이나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역모란 것은 실패하면 자신과 주변인들의 목숨을 잃는 것으로 당연히 당사자는 성공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여 분명하고 신속히 행동하는데 이렇듯 김치양 일파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다.[57]

전술한 모든 것을 종합해 고려하면 목종과 천추태후, 김치양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에 미심쩍거나 서로 모순되는 부분들이 매우 많아서 '왕이었던 목종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권세가 고려를 좌지우지했고, 심지어 그들이 역모를 계획하여 고려 왕실이 위태로울 정도였다.'는 정변의 배경이 되는 상황 자체가 의심된다.

5.6. 유행간의 대량원군 즉위 반대[편집]


유행간은 간신 여부와 별개로 엄연히 목종의 친위 세력이었기에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와는 정적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김치양의 아들이 왕이 되면 유행간은 숙청 대상이 되므로 유행간은 왕씨 사직과 목종에 대한 충성심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량원군의 즉위에 찬성해야 앞뒤가 들어 맞는다.

그런데 그는 같은 처지에 있던 유충정과 달리 대량원군의 즉위에 반대하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유충정이 목종의 후계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채충순과 최항에게 '내가 가면 수행원이 많아 보안이 새 나가므로 두 분께서 오셔라.' 했는데 이것도 가까이에 있는 유행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목종은 강조가 유행간 제거를 주청했고, 목종은 '무슨 말인지 이미 안다.'며 거부하다가 이현운이 행패를 부리니 겁먹고 비로소 강조에게 유행간을 보냈다고 한다. 목종은 유행간이 대량원군 즉위를 반대하며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그를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비호한 것인데 이것도 참 이상한 대목이다.

유행간이 김치양 일파의 회유로 이주정처럼 변절했는데 목종이 이주정의 경우와 달리 구체적으로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변절이 아니라 유행간이 김치양과는 별개의 목적으로 대량원군 즉위를 반대했을 가능성도 더러 있다. 전자라고 해도 목종에게 대량원군 후계자 책봉을 반대했다면 이유를 들었을 것인데 타당성이 전혀 없는 말을 하면 변절 사실이 드러날 것이므로 나름 일리있는 주장을 했고, 그래서 목종은 부득이하게 유행간을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하되 그를 내칠 의도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5.7. 궁궐 화재[편집]


전술했듯이 목종의 건강은 위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목종이 병을 핑계삼아 신하들도 만나지 않고 누워 있던 것은 다른 이유일 것이다. 기록에는 목종이 앓아 누운 원인을 궁궐의 기름 창고에 화재가 나서 창고는 물론이고 전각이 불탔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화재 기록에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 두 가지가 있다.

1) 천추태후의 거처인 천추전(千秋殿)에 옮겨붙은 것
2) 당시 궁궐 안에서 연등행사가 벌어지고 목종이 이에 참여한 것

상상에 많이 의존해야 하나, 이 화재가 어머니인 태후를 의식해 정치적으로 김치양을 제거할 수 없으니 사고를 위장해 김치양을 제거하기 위해서 목종이 의도한 화재일 가능성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궁궐 안 전각에 불이 나면 방화라는 것이 드러나므로 천추전과 가깝고 큰 불을 내기 용이한 기름 창고에 몰래 불을 내 천추전을 태우는 큰 화재를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목종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가 천추전에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김치양 제거가 중요해도 어머니까지 죽게 할 수는 없었던 효자 목종은 궁궐 안에서 연등행사가 벌어지는 것을 노린 것이다. 왕궁 안에서 벌어지는 왕실 행사, 더군다나 왕이 참석하는 행사라면 왕실의 어른인 태후도 반드시 참석해야 하므로 연등 행사에 참석하느라 태후가 천추전을 비우고 김치양만 남은 그 기회를 노려 계획을 시행한 것이다.

말 그대로 가설이긴 하나, 이것이 사실이고 전술한 목종의 건강이 사실 나쁘지 않았다면 이후에 목종이 병을 이유로 두문불출한 이유도 여러 가지로 추론이 가능하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해서 낙심하여 (기록에서 나오듯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까지는 아니나) 정말 건강이 나빠졌을 수도 있고, 결국은 어머니를 거스르고 김치양을 숙청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확정하면 은밀히 진행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으며, 위독한 척 연기를 하여 김치양의 반란을 유도해서 확고한 숙청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5.8. 대량원군의 승려 생활[편집]


물론 고려 시대에는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을 출가시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러한 사람들을 소군(小君)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있을 때 그에게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이 정치적으로 부담을 주는 일을 막고자 한 것이고, 당시 목종의 아들이 없을 경우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대량원군은 그에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 기록에서는 태후가 자신과 김치양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강제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전술했듯이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이 태후와 김치양에게 밀리지 않았다고 볼 여지들과 실제로 목종이 마음을 먹자 순식간에 후계자 작업이 진행된 것, 태후와 김치양이 목종이나 조정 신하들에게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현재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인 대량원군이 부담돼서 출가시킨다.'라고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량원군의 출가에 목종이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권력 구도 문제로 추정된다.

정변 직전 대량원군을 보호하려는 목종의 행보 때문에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으나, 입지가 확고해진 후계자의 위상과 권력이 미래를 염두에 두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재임 중인 군주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거나 심지어 능가하여 오랜 시간 함께 한 동지나 부자지간이라도 예외 없이 갈등과 견제가 일어나는 예는 수없이 많다.

  • 싱가포르국부 리콴유1990년 고촉통한테 싱가포르 총리직을 넘겨주고 은퇴했지만 이른바 "선임장관"이라는 자리에 앉아서 상왕이 되었다. 2004년 리콴유의 아들인 리셴룽고촉통한테서 총리직을 넘겨받자, 리콴유는 스승장관이라는 자리를 만드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2015년 리콴유가 사망하자 리셴룽은 고촉통한테 부여된 선임장관직을 박탈하고, 아버지 리콴유의 정책을 전부 뒤엎어 버렸다.
  • 실질적으로 왕조 국가인 북한에서 김일성은 수십 년간 권좌에 있었으나, 말년에 아들 김정일에게 밀려 허수아비가 된다.
  • 조선선조임진왜란 당시 본인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 반면 세자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대내외적 입지가 급상승하자 전쟁 와중에도 잦은 선위 파동을 일으키며 견제했고, 전쟁 이후에도 광해군의 입지를 세자 자리가 새로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들 만큼 약화시켜 신하들이 선조가 죽자 광해군에게 바로 옥좌에 오르게 할 만큼[58] 오랫동안 자기 아들을 괴롭혔다.
  • 재임 시절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지녔던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후계자가 되셔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을 보고받고 격노하여 그들과 그들의 세력을 전부 숙청하는 윤필용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전두환, 차지철, 김재규 등 실세 측근들의 충성 경쟁은 있었으나, 확실히 후계자로 인정받을 2인자 자리는 공석인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10.26 사건 이후 정치적 혼란을 부른다. 당시 명목상 2인자는 국무총리최규하였고, 세간의 인식상 후계자는 김종필이었으나 그들은 박 대통령 생전에 정치적 영향력이나 실권이 확고하지 못했다. 반면 실세 측근 중 하나였던 전두환은 함께 충성 경쟁을 벌이던 차지철과 김재규가 모두 사라졌고, 12.12 사태로 더욱 권력이 커졌지만 명목상으로는 2성 장군에 불과했으므로 최규하가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을 석방하며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 일정을 공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일어난 1980년 서울의 봄을 막으려는 비상계엄도 시위 과열과 북한의 남침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워 5월 17일에야 간신히 최규하의 동의를 얻어 선포할 수 있었고, 전시와 비견될 만큼 비정상적으로 빠른 진급과 간선제라는 무리수들을 연이어 두며 12.12 이후 무려 1년이 지나고서야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박 대통령은 생전에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자를 만들지 않은 것이다.
  • 청나라에서는 강희제 시절에 지속적으로 비행을 일삼는 황태자 윤잉이 2번이나 폐위된 후, 입지가 확고해진 황태자가 교만해지는 것과 황태자 자리를 두고 당파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 사후 생전에 미리 써 둔 유서를 공개해 황위를 계승하는 태자밀건법(저위밀건법)을 공식화한다.
  •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말년인 1987년까지 노태우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고, 되려 노신영 안기부장이나 장세동 경호실장 등을 내세워 견제한다. 뿐만 아니라 퇴임 직전 자신의 직계 충복인 박희도육군참모총장에 유임시키고 이 외에도 3군사령관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지금의 기무사령관)에 최평욱, 수경사령관에 김진영을 임명하여 퇴임 후에도 군부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며,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앉아 정치에도 개입하는 상왕 정치를 구상하다가 대통령의 권력과 5공 청산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업은 노태우가 전두환의 주변인들을 공격하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반강제 유배를 보내는 등의 행보로 인해 사이가 크게 틀어진다. 전두환은 배신감이 컸는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때 자신을 취조하는 검사에게 '동기생한테 주요 보직 맡기면 안 된다.'고 회한 어린 충고를 했고,[59] 이후 사면된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았음에도 2014년에 위독해진 노태우에게 전두환이 문병을 간 것이 20년 만에 처음 본 것이라 한다. 수십 년 지기이자 전우이며 정치적 동지 관계도 권력 앞에서는 소용없다는 대표적 사례이다.
  • 그리고 민주화를 이룬 대통령제 국가들에서도 레임덕 현상과 취임 이전인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 직후부터 이미 재임 중인 대통령의 위상과 영향력을 압도하고, 집권 정당이 같음에도 현 대통령(또는 당선인) 세력과 전 대통령(또는 레임덕 시기의 대통령)세력이 갈등을 겪는 것으로 실현되고 있다.

더군다나 대량원군은 당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다.[60] 왕조 국가에서 국통을 이어나갈 유일한 존재가 재임 중인 군주를 능가하는 위상과 영향력을 지니기는커녕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험한 환경에 방치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로 현재까지 황실이 있는 일본의 히사히토 친왕이 있다. 아키히토 천황 재위 당시 황태자는 그의 백부인 나루히토였으므로 엄밀히 말해서 그는 황태손이 아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실과 사회 전체에서 황태손 대접을 받으며 금지옥엽으로 자랐고, 본인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도 '둘째 황자'에서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의 아버지'로 위상이 급격하게 커지는 등 일본 황실의 권력 구도가 크게 바뀐다. 일각에서는 황실의 안정을 위해 나루히토 황태자가 동생 후미히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와서 한 때 나루히토의 측근들조차 나루히토에게 마사코 황태자비와 이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여자와 재혼할 것을 주청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직을 이어나갈 유일무이한 존재라면 상식적으로 그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은 최소한 현재의 군주에 버금갈 만큼 엄청날 수 밖에 없는데 되려 수 년간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전술한 모든 것들과 구체적으로 기록된 대량원군 암살 시도가 독살밖에 없는 미심쩍은 정황, 실제로 목종이 치밀하고 상당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개연성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 1) 목종은 현재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인 대량원군의 권력과 위상이 지나치게 커져서 자신을 위협할까 두려워 그가 10세 남짓이 되자 출가를 직접 지시, 또는 태후의 권고에 동의한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그의 경호는 철저히 하여 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 제거에 어려움을 겪는다.
  • 2) 그러나 이후 목종은 자신이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그것 때문인지 완전히 불임이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으나) 부인 선정왕후가 있음에도 30세까지 아들을 보지 못한다.
  • 3) 그러던 중 대량원군 독살 시도까지 일어나자 왕씨 사직을 이어나가기 위해 대량원군을 확고한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결심하여 불러들인다.

6. 재구성[편집]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므로 많은 역사적 기록들이 당시 집권자와 그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것이 사실이고, 이로 인해 당대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정변의 최종 승자인 현종이 자신의 집권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직전 권력자들인 김치양, 천추태후, 목종은 물론 정변을 실질적으로 진행한 강조에 대한 기록들까지 전부 조작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런 논리로 역사적 사료를 모두 의심하고 무시한다면 역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의미가 없다. 또한 이 정변을 분석하기 위한 주요 사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정변으로부터 먼 훗날인 조선 시대에 당대의 기록들을 종합해 작성한 것으로, 당시 집권자 현종이라 해도 모든 역사적 기록들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목종과 강조에 대해서는 유리한 기록들도 존재하는데 관련 기록들이 모두 현종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창작이라면 이런 기록들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많은 기록들이 사실이고, 다만 현종에게 유리하게 약간의 윤색이나 과장이 가미되었다고 가정하면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우선 정변의 핵심 인물인 현종과 강조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고려사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이 즉위 전에 시냇물과 뱀을 두고 지었다는 두 개의 시가 있는데, 이를 보면 확실히 현종은 정변 이전부터 왕위에 오를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一條流出白雲峯(일 조 유 출 백 운 봉 한 가닥 물줄기 백운봉(白雲峰)서 솟아나와

萬里蒼溟去路通(만 리 창 명 거 로 통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莫道潺湲巖下在(영 도 잔 계 암 하 재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아라

不多時日到龍宮(불 다 시 일 도 용 궁 머지않아 용궁에 다다를 물이니까.

시냇물(溪水).


小小蛇兒遶藥欄(소 소 사 아 요 약 란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滿身紅錦自班斕(만 신 홍 금 자 반 란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네.

莫言長在花林下(막 언 장 재 화 임 하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고 말하지 말라

一旦成龍也不難(일 단 성 용 야 불 난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을 테니.

작은 뱀(小蛇).[61]


그리고 강조는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확실히 고려의 충신이었다. 정변 직후 군사들이 역성혁명에 성공한 줄 알고 만세를 부를 때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다음 임금께서 오시지 않았는데 어찌 이러는가?' 하며 수습했고, 2차 여요전쟁이 일어나자 최고 권력자임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아가 싸웠으며,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패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된 후 요성종에게 직접 투항도 권유받고 살을 베어내는 고문도 당했지만 끝내 자신은 고려의 신하라며 투항을 거부하였고, 자신과 반대로 항복한 이현운을 발로 차며 욕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 모든 기록들을 고려하면 강조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추가적으로 강조 일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인 하공진양규를 분석하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하공진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가담하였는데 정변 직후 일어난 2차 여요전쟁에서 많은 신하들이 현종을 버리고 흩어지는 상황임에도 끝까지 피난가는 현종을 수행하다가 추격하던 요군에게 거의 따라잡히게 되자 스스로 요군 진영을 찾아가서 요성종을 '왕(현종)께서는 여기서 수천 리 떨어진 남쪽으로 가셨다.'는 거짓말로 속여 요군의 철수를 이끌어낸다. 이 때 요나라로 끌려가 인질이 된 하공진은 강조의 경우처럼 요성종에게 직접 요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받고 장가까지 새로 가는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결국 고려로 도망가려다가 발각되었고, 끝끝내 요성종의 투항 요구를 거부하다가 처형당했다.[62] 양규는 이 정변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정변 이후 거란과의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강조의 후임으로 서북면 도순검사가 된 것으로 볼 때 강조의 일파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2차 여요전쟁의 서전인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하고, 통주 전투 이후 요군이 강조의 명령을 사칭해 항복을 권하자 '난 왕명 받고 왔으니 강조 명령은 안 듣는다.'며 거부했으며, 남하하는 요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활약으로 하공진과 더불어 요군의 철수를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철수하는 요군을 공격해서 포로가 된 많은 고려 백성들을 구출하고 장렬히 전사한 인물이다. 전술한 두 명과 강조를 볼 때 (비록 이현운 같은 예외도 있으나) 강조 일파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집단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황해도 신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부터 14세손까지 오직 독자로 가계가 이어지는데 그 중 강억이란 인물이 이부상서를 역임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부상서가 강조가 역임한 직책이라는 것과 조(兆)는 억(億)의 만 배라는 이유로 반역자로 간주되는 자신들의 직계 조상을 족보에서 지울 수도,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던 후손들이 이렇게 이름을 바꿔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3] 다시 말해서 강조와 그의 일파들은 고려의 중심 세력인 패서 계열의 인물들로 추정되므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을 정황 또한 충분하다.[64]

또한 강조는 목종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개경 진군을 한참 주저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강조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별개로 목종 개인에 대한 충성심도 갖고 있었던 듯 하다. 고려사 강조 열전에서 '강조는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진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개연성이 높으며 전술했듯이 목종은 재위 기간 내내 서경을 매우 중시하고 그 곳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내린 것도 고려해야 한다. 사심관 제도로 알 수 있듯이 당시 고려는 평시에는 지방 유력자들의 세력과 위상을 인정하여 행정을 맡기고, 전시 등 특수한 상황에서는 중앙 정부를 구심점으로 뭉쳐 통제를 받는 일종의 봉건제 국가였으므로 강조가 서북면 도순검사 또는 서경 유수였다는 것은 서경 지역이 그의 세력 기반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종이 서경에 내린 은혜는 실제로 강조가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일단 정변 당시 정치적인 상황이 기록에서 묘사한 대로 목종의 왕위와 고려 왕조가 위태로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유행간과 김치양 등에 의해 혼란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인 듯 하다. 애국심이 강했던 강조는 오랫동안 정치를 어지럽히는 양쪽 세력 모두에게 불만을 품고 제거할 생각이 있었으나, 유행간 일파를 제거하려면 그를 비호하는 목종을 거슬러야 했으므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목종은 태후를 등에 업은 김치양의 권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우려하다가 자신의 유고 시 왕통을 계승해야 하는 대량원군을 독살하려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대량원군의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여 고려의 사직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

하지만 유행간은 이에 반대하는데 목종의 권력이 공고화되고 대량원군의 후계 구도가 확실해지면 김치양과 태후 세력 견제를 위한 자신의 필요성이 사라지므로 그 동안 많은 악행을 한 자신이 목종에 의해 숙청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사실 이주정처럼 목종을 배신했는데 목종이 이주정의 경우와 달리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유행간이 둘 중 어느 쪽이었는지는 불명이지만 어느 쪽이었든 아마 그는 목종이 (동성애자였다는 게 사실이라도) 부인도 있고, 불임이란 정황도 없으며, 나이도 젊으니 목종의 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리자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아니라면 딱히 다른 왕위 계승권자가 없는데 대량원군을 반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종은 위독한 상태가 아님에도 칭병하며 보안을 유지하고 또 다른 심복 유충정을 통해 몇몇 신하들과 대량원군 후계 계획을 계속 진행하면서 강조에게 자신을 호위하러 올 것을 지시하고, 강조는 이에 따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목종이 보안을 철저히 유지한 것이 독이 되는데 몇몇 신하들을 제외하면 목종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목종이 위독하거나 또는 이미 죽었는데 이것이 숨겨지고 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강조 부자가 잘못 판단한 것이다. 강조는 위종정과 최창의 말,[65] 자신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믿고 '목종이 이미 죽었으니 김치양 일파 뿐 아니라 목종의 비호를 받던 유행간 일파도 제거하여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으로 대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군한다.

그러나 강조는 진군 도중에 목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한다. 목종이 살아있으므로 강조 자신의 계획대로 유행간 일파를 제거하려면 그를 비호하는 목종도 함께 제거해야 되고, 그렇다고 계획을 중단했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목종이 알게 되면 강조 자신이 반역죄로 처벌받게 되기 때문이다. 목종에 대한 충성심으로 고민하던 강조였지만 그의 부하들 모두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주장하자, 결국 목종까지 폐위할 결심으로 기존 계획을 강행한다.

이 대목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와는 달리 강조는 이미 목종에게 '개경으로 와서 자신을 호위하라.'는 왕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종이 생사 여부와 상관 없이 강조의 개경 진군은 왕명에 따른 것이므로 문제가 없으니 목종이 살아있다는 것이 강조가 진행하던 진군을 주저할 이유도, 주저하다가 강조와 그의 부하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정변 강행을 주장할 이유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조가 진군 도중에 자신이 알던 것과 달리 목종이 살아있는 것을 파악했다면 목종이 자신에게 명령한 대로 개경으로 가서 목종을 호위하면 되었고 딱히 진군을 주저하거나 정변 강행을 결심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이 기록은 정변 주체들(현종, 강조)이 '이 정변은 정권 장악을 위한 의도가 아니라 강조가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정당화하기 위한 날조라는 주장이다. 이 시각에서 볼 때 강조는 목종에 대한 충성심 없이 단지 정권을 차지하려고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므로 강조가 목종 또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목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들, 더 나아가서 이 정변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의 신빙성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강조는 개경 장악을 목적으로 병력을 5000여 명이나 동원하여 진군하던 상황이었다. 김치양 일파가 목종이 동원한 백여 명 남짓의 대량원군 일행도 제압하지 못한 사실을 상기하면, 5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개경으로 진군한 것이 목종의 호위를 위한 것이라는 변명은 통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였으므로 그가 지휘하는 병력이 거란과의 국경과 고려 제2의 수도인 서경(평양)을 지키는 정예 병력인 것까지 고려하면 강조와 그의 부하들은 더더욱 반역죄를 피할 수 없으므로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목종이 폐위되면서 '태후와 함께 통곡했다.'라고 하는데 이는 모자간의 지나친 권력 다툼으로 결국 둘 다 화를 입게 되었음을 한탄한 것으로 추정되며, 강조 군사들이 만세를 부른 행동을 고려해보면 아예 역성혁명이 일어나 왕씨 사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통곡했을 수도 있다.

추가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강조가 목종을 자신의 손으로 시해한 것도 확실해 보인다. 강조나 현종이 아니라면 목종을 죽여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 이상은 반드시 목종 시해에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

다만 현종이 목종 시해에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자신의 저서 <동사강목>에서 '현종이 목종의 시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거란에서 이 사실을 문책하자 비로소 알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현종이 목종 시해에 개입했음을 주장한다.[66] 그러나 정변 직후에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시 최고 권력자인 강조가 작정하고 '목종이 자결했다.'는 거짓 보고를 현종에게 올리고, 현종 주변의 궁인들과 신하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면 그 짧은 기간 동안에 현종이 목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강조는 목종의 죽음에 매우 큰 죄책감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물론 목종은 전횡을 일삼는 유행간을 비호하는 등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고려는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었거나 장기간 존속되어 안정된 국가가 아니었으므로[67] 군주가 자신의 지위와 생존을 위해 친위 세력과 공생 관계를 맺고 다소 지나칠 정도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68] 또한 목종은 자신이 폐위된 상황임에도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며 현종을 잘 보필할 것을 최항에게 당부했고,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태후에게도 자식으로서 효성을 다했는데 이를 통해 목종이 매우 선량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목종은 전술했듯이 여러 차례 강조를 승진시키고 후계 작업에도 참여시킬 만큼 신뢰하였는데 강조는 목종의 은혜와 신뢰를 배반하고, 끝내 목종의 목숨을 잃게 만든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변 당시 최항이 '옛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강조에게 따지자 강조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것, 목종 사후[69] 목종의 능호, 시호, 묘호를 모두 강조 자신이 직접 지은 것,[70][71] 거란군에게 통주 전투에서 패해 정신적으로 무너진 강조가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다.'며 잘못을 빌었다는 기록 등을 고려하면 강조는 '전횡을 일삼는 유행간 일파를 제압해 정치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의 정당성이나 정변 당시 상황이 불가피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강조 자신이 목종을 배신한 사실을 떳떳치 못하다고 여기고 목종에 대해 마음의 짐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강조는 전술했듯이 거란이 자신을 응징하겠다며 고려를 침공해오자 이례적으로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직접 대군을 이끌고 거란군을 막으러 전장에 나섰는데 물론 정변 직후라 함부로 남에게 대군을 맡길 수 없었고, 만인을 납득시킬 명분 없이 왕을 폐위하고 시해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큰 전공을 세워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거란의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죽음을 맞을 정도의 강한 정신력을 가진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자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목종의 혼령을 떠올리며 사죄했다는 기록은[72] 그만큼 강조 본인도 목종을 시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일어난 국난을 자신의 손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출전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현종의 경우도 그렇다. 전술했듯이 안정복은 그의 저서 <동사강목>을 통해 현종이 목종 시해에 개입하였고 강조와 더불어 정변의 주체였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었다는 두 시의 내용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목종에겐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고, 목종 역시 믿을 수 있는 신하들과 함께 현종을 확실한 왕위 계승자로 세우려는 상황이었다. 분명 왕위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고 해도 정당히 왕위를 계승받을 예정인 현종 입장에서는 실패할 경우 반역자로 전락하고, 성공하더라도 정변을 주도한 강조에게 정치적 지분을 나눠줘야 하는 정변을 원할 이유가 없었기에 정변을 직접 주도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현종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생각해도 그 역시 암살 위기에 처한 자신을 보호해주려 애쓴 목종의 죽음에 도의적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강조의 경우와는 달리 상상의 영역이지만, 현종도 목종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과 무거운 책임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현종처럼 어린 시절 또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군주는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73] 되려 그가 고려의 중시조(中始祖)이자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로 자신이 옹립되면서 시해당한 목종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노력의 결과일 수 있다.[74][75]

선량했던 은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책임을 지기 위해 강조는 한국사 역사에 드물게 최고 권력자이면서 스스로 전장에 앞장섰고, 현종은 최선을 다해 국난을 극복하고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이야기...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해야 하나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사실 고려사 자체가 2000년 태조 왕건 이후 정통 사극이나 퓨전 사극을 통해서 간간이 나오고 있지만,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그렇게 많은 드라마에서 비추지 못했다. 워낙 사료 자체가 적을뿐더러 관련 인물들에 대한 평가 및 논란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KBS 대하드라마에서 이 부분을 다룬 장면이 몇 있다.

  • 2009년 방영된 <천추태후>에서 극 후반부에 이 사건이 먼저 조명되었는데, 드라마 자체가 왜곡과 천추태후 미화로 논란이 많은 편이라 사건 자체로도 왜곡이 많다. 목종의 최후는 과거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 같아 눈치를 보던 이현운과 안패가 강조의 명을 사칭해 살해한 것으로 각색했다.

  • 2023년 방영 예정인 <고려거란전쟁>의 초반부에서 이 사건이 다뤄질 전망이다.


8. 관련 문서[편집]



[1]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명분일 뿐으로 실제로는 1004년에 송나라전연의 맹을 맺어 당분간 양면전선 걱정이 없게 된 요나라가 본격적인 중원 진출에 앞서 후방에 있는 고려를 제압해두려고 한 것이다. 마침 이 정변으로 고려의 내부 상황이 어수선했으니 요나라로서는 적기였다. 내세운 명분은 1차 고구려-당 전쟁과 같으나, 실제 침공 의도와 당시 국제적 상황으로 보면 병자호란과 흡사하다.[2] 寶齡, 군주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3] 동주(洞州, 현 황해북도 서흥군) 사람으로, 헌애왕후의 외가인 황보씨의 외족이라 한다.[4] 김치양은 양기가 강해서 음경에 수레바퀴를 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5] 김치양과 같은 예가 후술할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이다. 그는 헌애왕후와 마찬가지로 경종의 왕후이며 헌애왕후와 성종의 동복 여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와 사통하여 그녀를 임신시켰고, 이를 알게 된 성종에 의해 사수현(泗水縣 , 현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귀양을 가서 생을 마치게 된다. 근친상간이나 과부의 정절 등의 문제가 아니라, 왕후였던 여자와 사통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6] 이는 천추태후의 권력욕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주가 즉위 당시 어려서 섭정이나 수렴청정을 받더라도, 보통 군주가 14~16살이 되면 친정이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도 그 나이대가 되면 장성했다고 여겨져 보통 그 나이대에 혼인을 많이 했고, 남자면 군역 의무가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조선 성종조선 명종이 20세부터 친정을 시작했지만 성종은 형인 월산대군을 제친 다소 무리했던 즉위와 성종의 정치적 후견인이자 장인이었던 한명회가 자신의 딸 공혜왕후의 요절 등으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이었고, 명종은 수렴청정을 하는 어머니 문정왕후가 한국사에 손꼽히도록 권력욕이 강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으로 장성한 상태로 즉위하였고, 어릴 때부터 궁에서 자랐으며, 이미 10세에 성종으로부터 왕위를 보장받았던 목종은 섭정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명종과 유사하면서 오히려 더 심한 경우로 봐야 한다. 방계 계승이라 왕궁에서 나고 자라지 못해서 입지가 불안하여 16살에 즉위하고도 수렴청정을 받은 선조조차 고작 1년 후인 17세부터 친정을 한 것을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7] 천추태후가 본래 권력욕이 강했을 수도 있지만, 성종에 의해 김치양과 생이별을 하는 경험을 통해 권력욕이 생겼을 수도 있다.[8] '고려사 반역 열전 김치양'에서는 당시 상황이 ‘목종이 즉위하자 ~ 비할 데 없이 총애하면서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천추태후의 김치양 총애를 말하는 것인지, 목종도 처음에는 김치양을 총애했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목종이 자기 어머니이자 선왕의 왕후와 사통한 김치양을 좋아했을 리 없고, 당시 천추태후가 섭정을 했으므로 인사권도 천추태후에게 있었을 것이니 전자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목종이 사통 사건 당시 너무 어렸고, 성종이 왕실의 체면과 관계된 일이라 조용히 처리했었다면 목종이 김치양의 정체를 몰랐을 수도 있으므로 후자도 불가능하지는 않다.[9] 어느 왕의 재위 기간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합문통사사인은 정7품~종6품, 우복야는 정2품 정도이니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다.[10] 출처 : 고려사 열전 경종 후비[11] 출처 : 고려사 폐행 열전 유행간[12] 음식을 먹기 전에 참새와 까마귀에게 던져줬다. (출처 : 고려사 채충순 열전)[13] 자신의 방 안에 구덩이를 파 놓고, 대량원군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그 구덩이에 대량원군을 숨기고 위에 침상을 덮은 후 대량원군이 놀러 나갔다며 돌려보냈다.[14] 이에 훗날 왕이 된 대량원군은 신혈사를 진관사로 개칭하고, 진관사는 많은 왕실의 지원을 받게 된다.[15] 이에 천추태후는 장생전(長生殿)으로 옮겨간다.[16] 유충정은 거절했다고 한다.[17] 이주정의 벼슬이 고려사 강조 열전에는 전중감(殿中監), 고려사절요에는 지은대사 공부시랑(知銀臺事工部侍郞)이라 기록되어 있다.[18] 사실 이주정은 태후의 친족이었다고 한다. (고려사 반역 열전 강조)[19] 어머니에게 막혀 김치양을 제압하지 못 하고 있던 목종이었으나,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대량원군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에 유충정이나 이주정 등 자신의 병석 숙직까지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측근들까지 김치양이 포섭을 시도하거나, 이미 포섭했다는 사실까지 접하자 왕씨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더는 망설일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20] 이 때 유충정은 '자신이 가고 싶지만 나는 수행원이 많아서 보안 유지가 안 된다.'고 채충순과 최항이 오라고 하는데, 그들은 논의 끝에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종묘사직에 관련되었으니 가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원래는 유충정과 그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21] 일행이 많으면 행군이 더디다는 이유로 적은 사람만 지름길로 빨리 보내자고 채충순 등 신하들이 건의했고, 목종이 동의한다. (고려사 채충순 열전)[22] 출처 : 고려사 열전 황보유의전[23] 요사(遼史)에는 서경(평양) 유수라고 되어 있다. 서경의 위치가 서북면에 있는 것과 당시 고려의 국경을 고려할 때, 겸직일 가능성이 높다.[24] 고려사 강조 열전에는 이들이 모종의 이유로 조정에서 쫓겨나 항상 조정을 원망하고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25] 현 황해북도 연탄군 자비령(慈悲嶺)[26] 그 종은 죽을 힘을 다했는지 강조에게 도착하자마자 죽었다고 한다.[27] 황보유의가 대량원군을 데려가려 하자 신혈사 승려(진관으로 추정)가 또 대량원군을 해치려는 사람이 온 줄 알고 숨겨놨다가 황보유의가 자세히 설명해서 데려왔다고 한다.[28] 아마 유행간을 내치라고 강조가 간언했는데, 목종이 거절한 것으로 추정된다.[29] 출처 : 고려사 반역 열전 강조[30] 쉽게 말하면 '왕이 신뢰했는데 되려 신하가 왕의 뒤통수 친 적도 있었냐?'고 따진 것이다.[31]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큰 사건으로 만약 강조가 군사들에게 호응했다면 고려 왕조가 끝나는 역성혁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일을 통해 강조라는 인물과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32] 말 그대로 ‘나라를 양도한 공작’이란 뜻[33] 목종이 최항에게 새 임금(현종)을 잘 보좌할 것을 당부하며 ‘고향에 가서 늙고 싶으니 새 임금에게 그렇게 전해 달라.’고 했는데 목종의 친증조모이자 광종의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가 충주 출신이다.[34] 이 때 목종은 태후가 말을 타면 직접 말고삐를 잡고, 태후가 식사를 하면 직접 밥시중을 들었다고 한다.[35] 대표적으로 서희가 있다.[36] 기록상에 드러난 인원만 약 250여 명 정도이다. 관리들에게도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천거된 자들의 행보에 따라 천거자에게도 상벌이 내려질 것을 공표한다.[37] 이에 군사들이 너무 힘들어하자, 목종은 군심을 달래기 위해 육위(六衛)에 소속된 군사들에게 잡역을 면제해 준다.[38] 각각 대표적인 예를 하나씩 들면 목종 시기에 등용된 조원(趙元)은 귀주 대첩으로 대표되는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 1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공을 거둔 인물이고, 목종 시기에 축성된 흥화진(興化鎭)은 두 전쟁 모두에서 고려에게 첫 승리를 가져다 준 전장이다.[39] 물론 전횡과 업적이 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다. 유능하지만 또 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정말 유능하지만 전횡을 부리는 사람 정도라면 굳이 정변까지 일어났을지는 의문이다. 전횡을 부려도 유능하다면 쉬이 정변이 일아나긴 쉽지 않다. 그만큼 다른 이들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기 때문.[40] 그 때문에 정사를 게을리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41] 채충순이 '제가 할 테니 힘 쓰지 마세요.' 하니 목종이 '마음이 바빠서 힘든 것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42] 어떠한 이유라도, 아무리 권력이 크다 해도 군주 또는 군주였던 자를 시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다. 사마소가 자신을 공격한 조모를 자신의 부하 성제가 살해하자, '천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크게 놀라고 당황하다가 결국 성제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여 삼족을 멸한 것과 최충헌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희종을 폐위했지만 죽이지는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인조와 반정 주도 신하들은 인목대비의 추인이 반드시 필요했으나, '이혼(광해군) 부자의 목을 베어 오면 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입을 모아 '임금을 폐위한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다.'며 반대했고, 원한에 사무쳐 있던 인목대비도 '내가 좀 지나쳤다.'고 동의한 것도 같은 맥락의 경우이다. 반대로 임금을 시해한 이의민의 경우 이 점이 꼬투리잡혀 경대승 집권기에는 몸을 사려야 했다. 물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림답부처럼 왕을 시해하고도 뒤끝이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일단 묘사상 차대왕은 폭군이다.[43] 후술하겠지만 동성애와 불임은 별개의 문제이나, 목종이 이성을 완전히 배척할 만큼 성향이 강했다면 후사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44] 고려사 폐행 열전 유행간[45] 출처 : 고려사 황보유의전[46] 출처 : 고려사 김치양 열전[47] 5공노태우 정권 시절에 서울 근처에 있으며 전투력을 보유한 9사단수경사, 대한민국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주요 보직을 하나회가 독점한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48] 심지어 문인위(文仁渭)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천추궁사(千秋宮使)로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후의 최측근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성실하고 진솔해서 강조가 직접 변호하여 살려주었고, 훗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까지 된다. (고려사 반역 열전 김치양)[49] 최충헌 집권 당시 거란 유민들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천민에 불과한 양수척들이 거란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서 고려군이 크게 고전했는데, 전직 또는 현직 조정 신료나 장군의 배신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50] 반례로 고려 헌종은 14세에 요절할 정도로 몸이 너무 약했으므로 그의 재위 기간인 3년 가량을 모후인 사숙태후 이씨가 임조칭제 방식으로 정무를 봤고, 그 공을 인정 받아 사후 예종 때 자신보다 먼저 선종의 비가 되었던 정신현비 이씨를 제치고 선종과 함께 합사되었다. 목종과 천추태후 모자와 극명히 대비되는 사례이다.[51] 그래서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조선이 유교 사회임을 감안하면 대원군이 생전 고종에게 얼마나 위협적이었고, 그로 인한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52] 그나마 개연성이 있게 말하자면 과거에는 평균 수명이 짦았으므로 보통 10대 중반쯤에 결혼하고, 10대 후반에는 첫 자식을 보았으므로 20대에도 자식이 없으면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따라서 30세 가까이 되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은 후사를 보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상을 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당대의 인식을 감안해도 목종이 불과 20대인데 끝내 자식을 보지 못 한 채로 죽을 것을 생각하고 반란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후술할 유행간의 대량원군 후계자 책봉 반대 명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추론이 가능하다.[53] 실제로 목종은 김치양의 역모가 구체화되자, 천추태후 때문에 주저하던 행동을 개시했다.[54] 후주에서 곽위가 시영에게 왕위를 물려줘서 역성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곽위의 아들들이 모두 죽었기에 자식에 준하는 사위 시영에게 물려준 것으로 대안이 없으니 그랬을 뿐이다. 그나마도 시영은 양자로 들어가 즉위할 때는 곽영이었고, 즉위 이후에야 다시 시영으로 환원한 것이다. 물론 목종이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라고 지목한 대량원군에 대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암살 시도는 자신들의 아들 외에는 대안이 없도록 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만 이 또한 설령 암살이 성공해도 자신들이 살해 혐의를 피해야 하고, 목종이 늦게나마 후사를 볼 가능성까지 무릅써야 하는데 너무도 부자연스럽다.[55]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정변에서 강조가 어탑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역성혁명이 일어난 줄 알고 만세를 부른 것과, 곧 일어나는 거란의 2차 침입에서 현종이 피난하며 동행하던 신하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일개 아전에게까지 수모를 당한 것이 증거이다. 심지어 약 200년 후에도 김사미와 효심의 신라 부흥 운동,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 운동, 이연년 형제의 백제 부흥 운동 등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당대에 국가의 개념이 조선 왕조나 현대와는 달랐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56] 이해를 돕기 위해 긴 존속 기간으로 사직의 권위가 생긴 반례를 들자면 조조가 충분한 권력과 위상이 있었음에도 생전에는 400년 간 지속된 한나라 사직의 권위를 의식해 황제가 되지 못한 것, 역시 약 400년의 존속 기간이 지난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전횡에 홍건적왜구가 침입하는 내우외환에서도 끝내 수나라당나라가 멸망할 때처럼 국토가 사분오열되지 않은 것, 조선 말기 임오군란에서 장기간 쌓인 분노가 폭발하여 이성을 잃고 폭동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도 막상 왕궁을 범하는 일은 크게 주저한 것 등이 있다.[57] 이해를 돕기 위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반례로 들면, 연개소문은 반대파 신료들을 한꺼번에 행사에 초대하여 단시간에 모두 살해하고, 이와 동시에 왕궁 창고에도 불을 질러 정적들의 사병들과 왕궁 방어군들의 눈을 그 곳으로 돌린 후, 그 틈을 타서 왕궁에 진입하여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치밀한 계획과 신속한 움직임으로 반격당할 여지를 최소화한 것이다.[58] 당시에는 임금이 죽어도 살아날 수 있다고 믿고 며칠 정도 기다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서 권력의 공백기가 없어야 했다.[59] 출처 : <신동아> 1997년 1월 호 '전두환 노태우 수사비화'[60] 당시 태조의 손자 중 생존자로 왕건과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東陽院夫人 庾氏)의 차남 효은태자(孝隱太子)의 아들들인 동양군(東陽君) 왕림과 온결공(溫潔公) 왕정이 있었지만, 광종 때 효은태자가 반역죄로 사약을 받아 죽었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61]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조에 따르면 2번째 시를 지은 곳은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유배지였던 사천시 배방사라고 하며, 절은 현재 터만 남아 있다.[62] 자신의 호의를 배반한 것을 괘씸히 여긴 요성종은 하공진을 처형하고 그의 시체에서 심장과 간을 꺼내 사람들에게 먹게 했다고 한다.[63] 사실 무신정변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가 처참히 암살당한 이의방과 그의 권세에 빌붙어 권력을 누렸던 이준의도 전주 이씨 족보에서 지워졌고 그들의 동생인 이린 역시 족보에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충분히 강조도 그렇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4] 흔히 대중에 널리 퍼져 있는 인식과는 달리 고구려의 중심지는 평안도-황해도-경기도 북부 일부였고 당연히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 사람들은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강했다. 대표적인 예로 왕건의 삼국 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박수경의 할아버지인 박직윤은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스스로를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로 칭했다고 하며, 고려의 삼국 통일 공신들도 이 지역 출신이 가장 많다. 또한 학계에서는 왕건의 역성혁명도 천도와 국호 변경 등으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버리려 하는 궁예에 대한 패서 호족들의 반감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거나, 최소한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65] 위종정과 최창 역시 오래 전에 조정에서 쫓겨났다면 목종의 상태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의도적으로 강조를 속인 것이 아니라 같은 오해를 했다고 추정된다. 여담으로 이 둘은 이로 인해 귀양을 가게 된다. (출처 : 고려사 현종 2년)[66] 동사강목 제6하, 기유년 목종 12년 2월[67]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어 군주가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은 조선 시대 이후이고, 이전 왕조들은 봉건제에 가깝다. 그나마 삼국 중 가장 왕권이 약한 걸로 평가되는 백제도 700여 년이나 존속한 권위 때문에 의자왕의 지나친 왕권 강화에 반발하여 나당 연합군의 침입해왔을 때 부여씨 왕가에 등을 돌린 백제의 귀족, 호족 세력들도 막상 백제가 멸망하자 상당수가 백제 부흥에 동참해서 3년이나 부흥운동이 지속되었지만, 100년도 안 된 고려 왕조에게 이런 권위는 없었다. 전술했듯이 강조의 만세 사건과 현종이 피난길에서 겪은 수모가 이를 증명한다.[68] 환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69] 기록에는 제 멋대로 했다고 안 좋게 표현되었다.[70] 다만 현종 3년에 가서 이 모든 것을 고쳐 올렸다. 목종이란 묘호도 강조가 아니라 현종이 올린 것이다.[71] 사실 이 부분을 강조가 목종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다는 근거로 삼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는데 묘호와 시호는 물론 능호까지 별로 좋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올려진 민종(愍宗)의 민은 '근심하다'는 뜻이고, 시호의 뒷 글자인 '영'자 역시 나약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것이었으며, 능호인 공릉(恭陵)마저 '공손하다'는 뜻이 반영된 별로 좋지 않은 시호였는데 훗날 현종이 목종의 업적 등 여러 부분을 고려해서 그에 걸맞게 다시 바꾼 것이다. 그러나 강조로서는 현종의 즉위와 본인이 일으킨 정변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폐위된 목종을 다소 격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72] 강조가 패전 직후 처형당했으므로 사관이 야사의 내용을 명분론에 입각해 서술했을 수 있으나, 야사라는 주석도 없으며 강조 주변의 고려 패잔병 중 생존자가 목격했을 가능성도 있다.[73] 그 대표적인 예로 손호, 연산군이 있다. 광해군이나 의자왕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인 것과 의자왕이 말기에 지나치게 친위 세력을 육성하고 사치를 즐긴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쉽게 말해서 불우했던 시절의 트라우마가 터진 것이다.[74] 이와 유사하게 당 태종이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중국사 최고의 태평성대를 연 원인이 현무문의 변으로 형제와 어린 조카들을 모두 죽이고 아버지를 강제로 밀어내다시피하며 황제에 오른 도덕적 부담감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75] 물론 그런 마음의 짐이 아니더라도 현종은 정말 정치를 잘 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우선 목종이 시해당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므로 백성들 중에는 자신을 임금을 죽이고 임금이 된 자로 여기며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즉위한지 1년도 안 되어 거란의 2차 침공이 벌어졌고 통주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은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어찌저찌 나라가 망하는건 피하고 거란과 강화하긴 했지만 백성들은 그런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목종 시기에는 김치양이 천추태후를 뒤에 업고 전횡을 부린 때다. 당연히 백성들 입장에서도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목종, 천추태후, 김치양 모두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현종을 두고 앞서 말했듯 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며 안 좋게 본 사람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론 목종 시저로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주까지 도망친 관계로 민심이 많이 악화되었을 것이고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자신이 잘 하는 것 외엔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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