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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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319-1호[A]
대한민국 국보 제319-2호[B]
대한민국 국보 제319-3호[C]

동의보감
東醫寶鑑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A]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B]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신림동,서울대학교)[C]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목활자본
수량/면적
25권25책(오대산사고본)[A]
25권25책(적상산사고본)[B]
24권 24책(태백산사고본)/17권 17책[C][1]
지정연도
2015년 6월 22일
제작시기
[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이름
한국어
동의보감(東醫寶鑑)
영어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프랑스어
Principes et pratique de la médecine orientale
국가·위치
대한민국 서울
소장·관리
국립중앙도서관
등재 유형
기록유산
등재 연도
2009년
제작 시기
1612년


1. 개요
2. 특징
2.1. 영향
4. 번역
4.1. 동의보감과 저작권법
5. 400년만의 재편찬
6. 의의
7. 그 외
8. 국보 제319-1호[A]
9. 국보 제319-2호[B]
10. 국보 제319-3호[C]
11.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5호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국보 제319호로 허준이 완성한 조선 시대의 의학서.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목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세 동양 최고의 의서 중 하나로 국외에도 명저로 소개되었고 수차례 번역된 바 있다. 또한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됨으로서 세계의 유산으로 거듭났다.

선조 때 당대의 어의(御醫사전참고)와 유의(儒醫사전참고)들이 왕명을 받고 중국한국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연구, 편집 등 작업에 착수한 것을 광해군 3년(1610년)에 허준이 마무리하여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년)에 간행한 의학 서적이다. 총 25권 25책으로 나무 활자를 사용하여 발행하였다.[3] 모두 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곽란·부인병·소아병을 다룬 <잡병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과 <목차편> 2편으로 되어 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제정연한 서적이다. 이를 허준은 동국(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 ≪동의보감≫이라 이름하였으며, 훈련도감 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한국 최고의 한방 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 의학서의 절대량으로 보면 중국 쪽이 훨씬 많으나 체계적인 분류와 관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고 중의학 기록물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 부족했던 점을 감안하면 동의보감이 일정 부분 앞선다.

한의학에 대한 기록이다 보니 중국 쪽이 얽힌 일이 있다. 2005년 한국은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기념 사업 추진단'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등재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는 언론을 통해 중국에도 알려졌으며 2005년 당시 강릉 단오제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상처입은 중국의 자존심을 다시 한번 건드리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이 중의학을 한국 문화 유산으로 등재한다는 중국 찌라시들의 자극적 선동까지 더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동의보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등재사유는 예방 의학 측면과 공공 의료 서비스 측면에 대한 선구적인 면에 대한 고평가이다.[4] 이 당시 중국 내에서는 중의학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도 기록등재을 후발주자한테 빼았기냐면서 중국 문화재 당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강릉 단오제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뜨겁게 데인 중국이 이후 허겁지겁 무형문화재 보호에 나섰듯이 이후 허겁지겁 중의학 서적 등재에 나섰으며 2011년 본초강목황제내경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고, 그 이전에 세계기록유산에 1건씩만 등재시켰던것과는 달리 2건씩 등재시키기 시작했다.

동명의 소설도 있다.[5] 해당 책은 발간 당시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tv 드라마 <허준>으로 만들어졌는데, 드라마 역시 히트를 쳤다.

2. 특징[편집]


목차에 내경편은 인체의 본질인 정(精), 기(氣), 신(神), 그리고 그 '정ㆍ기ㆍ신'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들(피, 꿈, 목소리, 말, 진액(津液), 담음(痰飮)) 및 '정ㆍ기ㆍ신'을 만들고 담고있는 오장육부, 기생충, 소변, 대변 순으로 기술되며, 각기의 작용 및 생리, 병리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외형편은 인체의 상부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순서대로 기술되며, 이는 기의 상승과 하강, 출입의 원리 및 내상 및 외감의 진행 방향이 외형에도 반영됨을 이해시키는 흐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한마디로 한의학의 기본 원리를 목차만 봐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구조로 편집하고 있는 것이다.

각 항목에 병증(病症)과 처방의 실질적인 것만을 빠짐없이 선택, 수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출전(出典)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治方)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그 밖에도 속방(俗方)을 기재하였다. 동의보감의 위치는 송대 이후에 무수히 많이 나왔던 의서들의 범람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물리기도 한다. 왕실 서고나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 중에 정말 필요한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지식을 당시 의사로서 알아야 되는가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인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의원의 의학관과 지식, 임상 경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다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국내에 자생하지 않는 약초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록한 부분이 있어, 편집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다.

집필 당시에 나름대로 검증되었던 거의 모든 의서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조선 세종 ~ 세조에 걸쳐서 발간했던 의방유취가 기초 원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6] 특히 상한론황제내경, 의학입문을 인용한 부분이 많다. 물론 독창성 부분에서 떨어진다고 이 책이 얕보일 이유는 없다. 애시당초 의학이라는 실용적인 학문은 100% 창작, 독창적일 수가 없다. 당장 동의보감이 참고한 상한론이나 내경조차도 그전에 있었던 다른 텍스트와 임상 자료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는 연구가 있다. 또한 상한론, 의학입문 등이 외부의 기운 중심이거나 질병, 병증 중심이었던 데에 비해, 도교적 관점을 도입하면서 사람 중심의 의학을 정립한 공도 있다. 실제로 서문에 '병이 같더라도 사람에 따라 치법이 다르다'는 걸 언급하고 시작한다. 또 이후 한의학의 방향을 외사(外邪)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는 중국에 비해 한반도가 기후가 다양하지 않아 풍토성 질환이 적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최초로 집필된 뒤 후대에 국내의 현실에 맞게 재편집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경악전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청나라 말에 대두된 온병학의 내용도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재편집이라기보단 중국을 기준으로 한 약방문 조합식을 국내에 맞게 변경한 것이란 의견 쪽이 더 신뢰도가 높다. 동의보감 시절에 경악전서는 있지도 않았고, 경악도 의사가 아니었다. 한참 동의보감(1596년 ~ 1610년)을 쓰고 있던 기간은 임진왜란 ~ 정유재란으로 한중일 3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중이었다. 경악전서 서문에 따르면 장경악도 명나라의 군인이어서 이 국제 전쟁에서 참전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이후에 의사로 직업을 바꾸고 성공해서 유경과 경악전서(1624년)를 저술하였다.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장경악이 어쩌다가 동의보감을 보았다면 모를까 동의보감이 경악전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외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첫째, 도교적 공리(道敎的功利)와 실용주의적 사상을 적용하여 정확성과 실용성에 중점을 두어 그때까지 번잡다기(煩雜多岐)했던 많은 의서의 의술적 통념을 취사선택하여 정수(精髓)만을 골라 의술이론과 임상에 완벽을 기하였다.

둘째, 동양 의학사에서 최초로 정(精)·기(氣)·신론(神論)에 근본을 두고 내장기(內臟器)의 생리적 기능변조(機能變調)와 그 직접적인 병증을 일괄하여 내경편(내과)에서 새로 다룬 저작이다. 이것은 지금의 정신 신체 의학(心·身)과 같다. 즉, 의술의 본의(本義)를 정신 수양과 섭생에 두고, 복약과 치료는 2차적 의의라고 하였다. 이것이 《동의보감》 전편의 일관된 중요한 특색으로서 350여 년 전에 현대 의학의 선구적인 학설과 치료법이 이미 강구되었다는 사실은 경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고, 《동의보감》이 한방(漢方)이면서도 한방적(韓方的)이라는 의의가 여기에 있다.

셋째, 당약(唐藥 : 중국에서 나는 약재)이 아닌 한국에서 나는 약재를 권장하였으며, 탕액편에 나오는 약물학의 약재는 속명(俗名)을 일일이 한글로 부기하여 채약(採藥)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넷째, 각 고방의서(古方醫書)를 고증할 때 인용한 학설이나 처방의 출처를 명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억설이 아님을 밝혔고, 후학들에게 연구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현대 논문에서나 볼 법한 인용 출처 표시를 확실히 해 두었다.

다섯째, 각 처방약의 용량에 대한 관심인데, 고서에 표시된 것은 용량이 너무 많아 한국인의 체질에 적당치 않음을 지적하였으며, 오랫동안의 임상 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살려 표준 용량의 기준을 만들어 적의(適宜)를 가감하도록 하고, 그 복용법까지 명시하였다.

여섯째, 민간에서 아쉬운 대로 쉽게 조제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단방약을 집어넣었다.


2.1. 영향[편집]


동의보감이 한국한의학계에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 수 있다.
  • 책이 워낙 비싸다 보니 이 책을 구하기 위한 계를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을 단위로 구비하여 글(한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의사를 겸하게 되는데, 이렇게 유학자이면서 의술 지식도 갖춘 유의(儒醫)들이 늘어나자, 직업 자체로는 중인 계급인 한의사의 위상이 크게 상승되었다.
  • 저서의 완결성이 뛰어나 전체적인 한의학의 질을 크게 끌어올렸다. 현재도 동의보감을 공부해서 치료하였을 때 상당한 정도의 적중률을 보장할 정도이다.
  • 사실 동의수세보원의 내용도 동의보감을 상당수 인용한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 대학 교과서까지도 동의보감을 기본적인 근거로 하여 만들어졌다. 결국 동의보감은 현대 한국 한의학의 모태가 된 셈이다.
  • 동의보감의 방대한 분량을 요약하고, 명의 이천이 저술한 의학입문의 요점을 합쳐서 방약합편이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일본에 간 통신사가 병이 나자 일본인 의사가 치료를 하러 왔는데 "야 저 야매 왜놈 의사는 집에나 가라고 전해라~"라는 발언을 했다. 그 말에 화난 일본인 의사가 "난 동의보감 보고 공부한 제대로 된 의사인데 왜 그러냐?" 하고 화를 냈고 마침 의술에 조예가 있던 통신사가 정말 공부했나 시험을 해본 후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의보감은 당시에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서를 참고하고 여기에 내의원의 연구가 더해져 완성된 일종의 의학 백과사전, 전공서적으로 출판되자마자 조선, 청나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북경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중국으로 파견 나간 사신이 중국 책방 거리에 책을 사러가면서 "조선에서 출판된 책으로 잘나가는 건 뭐가 있을까?"하고 돌아다녔는데, 동의보감의 점유율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내심 잘 나가는 문화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기에 조선 양반이 쓴 성리학 책을 가장 기대했겠지만, 정작 조선에서 잡학으로 평가하던 의학서적이 가장 잘나갔었던 것. 다만, 이 당시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던 시기였고,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시작하던 조선과 달리 양명학과 고증학이 대세가 되던 시기였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당대 일본이라면 모를까, 당대 중국에서 굳이 성리학 서적을 조선에서 수입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3. 비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동의보감/비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번역[편집]


동의보감은 한문으로 되어 있거니와, 현대 말과 맞지 않아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있어왔다. 동의보감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선비인 허민이다. 1964년에는 『동의보감』(상중하, 동양 종합 통신 대학 발행)을 완역하였다. #[7]

어렵고 난해한 동의보감을 쉽게 풀어서 쓴 역주본도 나오고 있다. 2012년 현재도 출간 진행 중으로 동의과학연구소 겸 양재동일한의원 원장인 박석준 씨 주도로 2002년 동의보감 완역본 1권 내경편이 발간되었고 2008년 동의보감 완역본 2권 외형편이 발간되었다. 2권 이후의 작업은 현재까지 없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국역·영역 작업을 완료하여, 2015년부터 한의학고전DB에서 공개하고 있다.[8] 2014년 개발된 스마트폰 앱인 '내 손 안의 동의보감'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972년 동의보감(東医宝鑑), 1973년 속동의보감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로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4.1. 동의보감과 저작권법[편집]


대한민국제헌 국회의원이자, 6.25 전쟁 당시 납북조헌영 박사[9]의 주도로 국역본이 완성되었다. 이후 1982년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다시 펴낸다.

한의학계는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로부터 판권을 옮긴 '동의보감'(여강출판사)과 허민의 '동의보감 국역증보'(남산당)를 주로 참고했으나, 내용과 해석이 분분하였다.[10][11]

이 북한 번역본을 둘러싼 사건 덕분에, 동의보감은 한의학 뿐만이 아니라, 한국 저작권법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조헌영 박사의 번역을 참고한 여강출판사의 '동의보감'과 흡사한 법인 문화사[12]의 '동의보감' 국역본이 나왔는데, 여강출판사 측이 이를 고소한 것이다. 하급심에서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 2001년부터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2005년 경 법원이 북한과의 판권 계약을 주장한 여강출판사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북한에 조회를 하자,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저작권사무국'[13]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저작권사무국은 저작권자의 승인과 저작권사무국의 공증 확인서가 없는 한 남측에서의 우리 저작권에 대한 이용은 저작권 침해로 된다[14]는 것을 알립니다."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법원은 저작권을 주장한 원고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15] 원고는 북한 출판사가 1978년조선족 문화 예술관에 판권을 위임하고, 남한인이 그곳에서 판권을 취득해 왔다고 주장했으나, 북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라 저작권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남북한은 저작권 관련 국제 협약인 베른 협약에 가입하고 있다. 북한의 법학사전 설명을 보면, “과학, 문학 또는 예술의 창작품에 대하여 창작자가 가지는 권리"가 저작권임을 명시하고 있다.


5. 400년만의 재편찬[편집]


우수한 한의학 의서이긴 하지만, 21세기 현 상황에선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이에 한국한의학연구원은 동의보감 편찬 400년만에 재편찬 사업을 2012년에 추진하였으며, 2016년까지 집필을 완료하고 편집 과정을 거쳐 2020년에 공개하였다.

동의보감은 1613년 발간돼 지금까지 한의학 대표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등장한 임상적 성과를 담지 못하며, 일부 내용은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게 한계점으로 꼽혀왔다. 이에 신동의보감은 크게 기초 한의학, 임상 한의학, 한국형 한의학 등 3개 분야로 나눠 동의보감을 재집필하기로 하였다. 기초 및 임상 한의학 분야는 동의보감 외 중요 문헌 고찰을 통해, 현재까지 등장한 동아시아 한의학을 중심으로 집대성하기로 하였다. 남자 태아를 여자로 바꾸는 식의 '전남위녀법', '투명 인간' 등 비판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리뷰도 포함된다.주목할 부분은 한국형 한의학 편찬 사업이다. 동의보감 이후 국내 한의사가 자체 개발해 현장에서 사용 중인 치료 기법을 체계화해 추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신동의보감은 한의학 교육과 일선 한의사들의 임상 참고 자료로 보급될 예정이다. 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될 때마다 위키백과 형식의 업데이트 시스템도 구축된다. 즉, 허준의 업적을 계승하고 동의보감 편찬 이후 의학적 성과를 한데 모아 현대 한의학의 임상적, 과학적 성과를 반영한 통합형 근거 중심의 한의학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6. 의의[편집]


동의보감은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3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중세 동양 최고의 의서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한국 최고의 한방 의서로 인정받고 있으며, 왕명으로 편찬되어 일반 민중이 쉽게 사용 가능한 의학지식을 담고 있는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의서이다. 서양에서 공중보건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19세기임을 고려하면, 이미 우리나라는 서양보다 몇 세기나 앞서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동의보감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선구적인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는 기록물이다.


7. 그 외[편집]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동의보감은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서적이 아닌 전문서적이다. 한글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약초학이나 한의학적 지식이 있어야만 의학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분량이 무지막지하다.[16] 내경편이 한자로 4권인데 한국어 번역을 하자 200자 원고지에 8천 쪽이었고, 외경편이 한자로 4권인데 한국어 번역을 하자 200자 원고지 9천 쪽 분량이었다. (외경편 2160쪽)[17] 당연히 분권해서 판매 중이지만 그 한 권으로도 충분히 흉기가 될 정도. 단순 암기는 둘째치고, 환자가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결법을 찾기도 힘들다. 민간 배포용이라는 의도로 만들기는 했지만, 완전 초보자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시중에서 동의보감 검색해봐야 소설 동의보감밖에 안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점을 악용해서 음식점이나 판매점에서 '동의보감에 나온 xx의 효능' 하는 식으로 뇌피셜을 적어놓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대충 좋을법한 효능을 나열해놓고 출처가 없으니 동의보감이라고 적는 식.

허준이 침구에 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것은 일부 무면허 침구사들이 근래 내세운 주장이다. 이들은 허임의 일화를 내세워 침구의가 전혀 다른 분야인 것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이것을 위해 침의 vs 약의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경우도 있는데 실록을 통틀어 약의라는 직종이 따로 존재한 적은 없다. 더군다나 침의를 따로 양성하고 관리하는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침의는 어디까지나 기존 체계의 일부로 존재하였다.

세종 때에 침구의를 뽑기 시작하면서 침구학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일종의 전문의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력의, 치종의 등의 다른 전문의도 있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 분야의 차이라서 과거 시험에서는 비중의 차이가 있으나 한의학 전반에 대하여 모두 공부하여야 했다. 무엇보다 침의가 약 처방한 내용도 버젓이 나오고 있다. 실록에서 허준이 '소신은 침을 잘 모르옵니다만(후략)'라고 하여 침의인 허임이 침을 놓게 한 기록이 있으나, 이 부분도 앞뒤 문맥을 파악해야 한다. 선조가 편두통이 생겨 어떤 식으로 치료할지 허준과 상의하는 부분이며 이때 허준은 침구 치료를 권하면서 침의인 허임을 높이기 위해 겸양의 표현으로 저 말을 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때의 왕실 의료는 집단 협진 체제였다. 즉 주치의격인 원로 의사가 병명을 진단하면 그 밑의 의사들이 각각 혈자리를 잡고 침을 놓는 방식이었다. 당장 허임이 나오는 저 기사만 봐도 허준은 병명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자리를 잡고 허임이 침을 놓는 방식이었다. 허준이 정말로 침구에 능하지 않았다면 선조가 침구 치료에 대해 허준과 상의할 이유가 없다.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면, 대통령 주치의가 병명을 진단하고 좀더 수술 실력이 능숙한 다른 의사가 수술을 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 주치의가 수술에 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왕의 몸에 침습적 치료인 침 치료를 하기 때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록에서도 침의의 실수로 왕이 죽는 경우가 몇 번 나온다.) '침구편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편이다. 23편 중 달랑 1편이 침구에 할애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나 이는 동의보감의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 동의보감의 신형편을 제외하고는 각 편마다 끝 부분에 침구 관련 내용이 서술되었다. 무엇보다 허준의 다른 저작들에도 침구 관련 내용이 나온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게임 임진록 2에서는 전광렬이 열연한 드라마 허준의 대히트로 멀티플레이 조선군 진영 영웅 유닛으로 패치 추가됐다. 여기서 허준의 전용 업그레이드가 동의보감인데 허준 주변 아군 유닛을 서서히 치료해주는 효과다. 허준은 임진왜란을 겪은 인물이니 그가 나와도 이상할 건 없지만 동의보감은 정작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8. 국보 제319-1호[A][편집]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선조는 1596년에 허준과,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토록 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였으니 이것이『동의보감』이다.『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사람이 찬술한 의서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4권 26조,「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11권 38조,「탕액편(湯液篇)」3권 17조, 「침구편(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1724년(享保 9)에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寛政 11)에는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재판본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東醫寶鑑』 전 25책 가운데 內景篇 卷1이 수록된 冊3의 서문 권두에는 “萬曆四十二年(1614, 광해군6)二月日/內賜東醫寶鑑一件五臺山上/ 左承旨臣李[手決]”의 內賜記가 있다. 그 뒤에는 萬曆三十九年(辛亥, 1611, 광해군3) 孟夏에 지은 月沙 李廷龜(1564~1635)의 서문과 “萬曆四十一年(1613, 광해군 5)十一月日內醫院奉敎刊行”의 刊記가 있다. 또한 “通訓大夫行內醫院直長臣李希憲(1569~1651)” 및 “通訓大夫行內醫院副奉事臣尹知微(?~?)” 등 監校官의 銜名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東醫寶鑑』은 완질을 갖추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9. 국보 제319-2호[B][편집]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선조는 1596년에 허준과,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토록 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였으니 이것이『동의보감』이다.『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사람이 찬술한 의서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4권 26조,「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11권 38조,「탕액편(湯液篇)」3권 17조, 「침구편(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1724년(享保 9)에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寛政 11)에는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재판본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東醫寶鑑』에는 內賜記가 없다. 그러나 서문의 앞부분에 ‘宣賜之寶’를 찍었고, 우측 변란 밖으로 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찍은 ‘茂朱赤裳山 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이라는 長方形朱印이 있어 적상산사고본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사고본의 내지에 內賜記가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책이 기증되는 특정 시기에 해당 면이 결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東醫寶鑑』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동일본으로 완질을 갖추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10. 국보 제319-3호[C][편집]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선조는 1596년에 허준과,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토록 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였으니 이것이『동의보감』이다.『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사람이 찬술한 의서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4권 26조,「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11권 38조,「탕액편(湯液篇)」3권 17조, 「침구편(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1724년(享保 9)에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寛政 11)에는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재판본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東醫寶鑑』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24권 24책으로 太白山史庫本이며, 다른 하나는 동일 판본이나 內賜記가 없는 것으로 17권 17책이다. 太白山史庫本은 전체 25책 가운데 책16에 해당하는 雜病篇 卷六이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 판본인 17권 17책 가운데 雜病篇 卷六이 포함되어 있어 태백산사고본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2008년 지정 당시 『東醫寶鑑』 초간본의 전해지는 사례가 드문 현실에서 太白山史庫本이라는 역사성과 雜病篇 卷六의 보완을 통한 초간본 완질이라는 가치가 인정되었다.



11.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5호[편집]



「동의보감(東醫寶鑑)」은 1596년(선조 29) 왕명에 따라 허준(許浚, 1539~1615)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1610년(광해군 2)에 25권 25책으로 완성한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고 김두종(金斗鐘) 박사가 한독의약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로 내경편 권2와 외형편 권1, 침구편 등 3권 3책이다. 「동의보감」은 비록 완질본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중기의 목판인쇄문화는 물론 한의학 및 서지학의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을 자료이다.



12.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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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C D E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B] A B C D E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C] A B C D E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24권 24책으로 된 태백산사고본이고 나머지 하나는 17권 17책으로 된 판본이다.[2] 문화재청은 동의보감의 제작시기를 밝히지 않았다.[3] 당대 금속활자는 고정이 쉽지 않은 등 기술적인 문제로 대량 인쇄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대량으로 찍어내는 판본은 모두 목재활자를 사용하였다.[4] 유네스코에서 한국과 중국의 의서를 비교해서 동의보감을 더 높이 평가했다든가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5] 다만 정확한 제목은 <소설 동의보감>이다.[6] 의방유취가 과연 동의보감의 기저본이었는지, 역사적 연속성은 어느 정도 였는지는 2010년대 이후 관련 주제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한국 과학사 학회 신동원 교수의 저술들을 참고하면 된다.[7] 참고로 1년 뒤에, 『열하일기』를 완역하였다.[8] 원문, 국문, 영문 모두 열람 가능[9] 시인 조지훈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의사 출신이며, 남한 제헌의원으로서 한의학계에 남긴 업적이 엄청나다. 1950년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 의사 제도만 두고 한의사 제도는 폐지한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앞장서서 폐지에 힘썼다. 북한에서도 최초로 동의학(남한한의학에 해당) 박사가 되었으며, 현재의 한의학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 88세까지 살아 굉장히 장수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들 조지훈보다 20년은 더 살았다.[10] 여강출판사는 1993년 북한판 동의보감의 저작권자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로부터 15년 동안 한국에서의 판권을 가지고 계약했다고 하였다. 밑에서도 서술하지만 이는 거짓이다.[11] 다른 기록유산의 사례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북한1980년, 남한1994년에 번역 완료 되었다. 승정원일기일성록도 현재 번역 중이다. 참고로 승정원일기는 현재 진형형으로 번밀레 중이고, 완성은 언제 될 지도 모른다.[12] 법인 문화사 측은 이것이 복제가 아니라, "국내 한의대 교수들로 구성된 번역 위원들이 동의보감 원문과 중국 서적을 토대로 책을 출판한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13] 2004년에 설립되었다. 아마도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함인 듯하다.[14] '~이/가 되다' 대신 '~(으)로 되다'를 쓰는 것은 북한 문화어 용법이다.[15] 유사 사례로 리조실록 사건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북측에서 완역한 리조실록 판권을 계약한 여강출판사와 무단 복제한 다른 출판사와의 소송으로, 이번에는 여강출판사가 승소하였다. 참고로 여강출판사는 이 외에도 많은 북한 저작물을 펴냈다. 북한 저작물은 상호주의에 관계없이 우리 저작권법 상의 보호를 받는다고 판시하여 상호 저작권을 보호하는 한국의 실정법에 배치되지 않으려면 응당 지켜야한다는 뜻이다.[16] 한문으로 된 영인본 기준으로 총 25권, 3200여 쪽, 160만여 자이다. 우리말로 풀어 쓰면 더욱 분량이 늘어난다.[17] 따라서 25권 전체에 1만 2천 ~ 1만 4천 쪽 정도 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소아과 국시를 치기 위해 배우는 홍창의 책이 약 700쪽, 전문의를 따기 위해 배우는 넬슨 책이 약 3천 쪽이다.